대금의 발전
대금은 신라의 삼국통일(676년) 전후에 신라를 대표하는 악기인 ‘삼현삼죽’의 하나로 정착하였는데, 삼현은 세 가지 현악기이고 삼죽은 세 가지 젓대이며, 또 삼죽은 크기에 따라 젓대를 대,중,소로 표준화 한 것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대나무로 만든 대금 실물은 현재는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은데, 다만 경주에서 옥돌로 만든 젓대 즉 ‘옥적’은 출토된 적이 있다. 대나무 대금이 정말 중요한 유산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삼국유사’의 만파식적 설화를 보면 젓대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 듯 하다. 신라시대 용으로부터 영험한 대를 얻어 피리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설화로서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악조(樂條)에 실려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만파식적 이야기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682년(신문왕 2)에 해관(海官)이 동해안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하여 온다고 하여 일관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니,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수성(守城)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다.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보니, 부산(浮山)은 거북 머리 같았고 그 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풍우가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이 피리를 불면 평온해져서, 만파식적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뒤 효소왕 때 이적(異蹟)이 거듭 일어나,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
만파식적이란 세상의 온갖 파란(萬波)을 없애고 평안하게(息) 하는 피리(笛)라는 뜻으로 통일신라의 정치적 통합과 국난극복을 위한 왕조의 통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시각도 있으며, 지금끼지 전해내려오는 실체가 멸실되어 없을 뿐더러 만파식적과 관련된 유물도 출토되지 않아 신라시대 실존했던 물건이었는지 증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신라의 국보로 지정되어 보관되었던 만파식적의 행적은 시대를 건너뛰어 일본의 침략을 막는 효능이 있어 일본 사신이 천냥을 내고 한 번 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특이하게도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하여 신라 밖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정절의 의미로도 해석되었다. 말갈족에 납치되었던 화랑 부례랑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이적을 보였다는 만파식적은 이후 만만파식적으로 격을 높여 불리우며 왕실 계보에서 소중하게 보관되어 오다가, 원성왕(즉위 785-798년)때 일본이 2차례 만파식적을 노려서 왕이 더 깊은 창고에 숨기도록 명하였다고 하며, 신라 멸망후 고려 광종 때부터 경주객사에 동경관에 보관해왔다고 전해진다. 이후 만파식적의 행적에 대해서는 사료와 유물이 명확하지 않아 전설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따까울 따름이다.
조선 초기부터 옥피리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1592년 임진왜란 도중 화재로 인해 유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신묘한 옥피리가 없어진것을 안타까와 하여 복원해 새로이 만들라 명을내려 다시 만들었고, 분실 등 우여곡절을 거쳐 경주 동경관에 보관했다. 이 옥피리는 조선말 진기한 보물로 꼽혔던 유물이며, 1909년 일제시대 서울 창경권 어원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다가 경주박물관 건립되면서 다시 경주로 옮겨 수장고에 보관했다. 관람객에게는 오랫동안 비공개였다가 2011년 특별전시회에서 만파식적이라는 이름으로 임시로 진열됐고 특별전이 끝난 뒤 다시 수장고에 들어가 비공개 상태라고 한다.(내용출처 : 나무위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개된 만파식적 | 요악 금향 최세현)
도중에 잃어버리고 새로 되찾았다는 시점에서 이미 옛 신라 때 만파식적일 가능성은 없지만 현재 전해진 두 옥피리도 최소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유물이 확실하며,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것을 신라의 만파식적으로 생각하고 오랫동안 보물로 보관해왔기 때문에 설령 신라 진품이 아니더라도 상징적인 가치가 크고, 역사적인 가치가 대단한 유품이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피리와는 그 형식도 다르다고 하니, 잃어버린 만파식적의 단서를 찾아갈 수 있는 현재까지 찾은 가장 오래된 흔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야기에 언급되는 월성(경주) 천존고에는 만파식적 외에 고구려계 현악기인 거문고(현금)도 함께 보관되어있는데, 이 이야기는 갓 통일된 삼국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할 의도로 젓대와 거문고 같은 악기에 신비한 힘을 부여한 것으로 해석된다. 벽화에 그리거나 유물에 새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주악상’이라 하는데, 그중 가로저 연주모습이 포함된 주악상이 새겨진 유물로는 통일신라 초기인 682년(신문왕 2년)의 봉암사 지중대사적조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