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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풍요의 변증법
15. 칸트의 이율배반과 변증법적 모순
1.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대개 불신과 경멸로 응수한다. 거짓말조차 앞뒤가 맞아야 제대로 써먹을 수 있다. 또 우리는 일관성을 말의 차원에 한정하지 않으며, 한 사람의 말이 그의 행동과 어긋나지 않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누구나 일상에서 약속을 깰 수도 있지만, 그것이 상습적이어서 신뢰를 잃으면 사기꾼 대우를 받고 사회생활이나 정치활동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자유를 외치면서 탄압을 자행하거나,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며 국민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민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정치가들은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정상이다. 이성적인 사회에서는 그런 기만적 정치행태를 당연시하고 조장하는 국가권력과 그 밑바탕이 되는 자본권력이 함께 사라져야 마땅할 것이다. 이성적인 인간은 개돼지 취급받거나 기만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합리적 폭력이 난무하지 않는 한, 실제 사태와 어긋나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름의 논리와 현실적 근거를 갖춘 채 서로 대립하는 주장이나 이념들이 종종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성장과 분배, 국익과 진실, 안보와 인권 등등의 이념들이 종종 서로 충돌하며 우리의 선택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거창한 이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 차원에서도 예컨대 보편복지냐 기본소득이냐 따위로 끝없이 논쟁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각각의 주장이 제시하는 근거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옹호하는 것은 가능하다. 또 어느 한쪽이 새로운 현실적 근거를 추가하여 설득력을 높이면, 기존의 선택을 바꿀 수도 있다. 대립하는 주장들 대부분은 경험 자료들에 비추어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 검증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해소할 수 없는 상태로 대립하는 논리적 주장들도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칸트의 이율배반을 생각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칸트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감성⋅오성⋅이성으로 엄격히 구분하고 그 각각에 고유의 역할을 할당한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감성은 경험적 현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오성은 감성으로 받아들인 현상을 규칙에 따라 통일하여 경험적 인식을 만든다. 이성은 오성의 규칙을 원리 아래 통일하는 최고의 능력이다. 그런데 이성을 경험의 한계 너머로 확대하여 사유하고자 할 때 “경험 속에서 확증을 기대할 수도 없지만 반박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명제가 생겨난다. “그 하나하나 자체로서는 모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성의 본성 속에 그 필연적 조건을 두고 있기까지 하다. 다만 불행하게도 그 반대의 명제도 마찬가지로 나름으로 주장할 만한 타당하고 필연적인 근거를 가진다.”(순수302-303) 칸트는 인간 이성이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대립명제들로 1. 세계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 여부, 2. 복합적 실체를 이루는 단순체의 존재 여부, 3. 현상의 원인으로 자연법칙과 함께 자유도 상정할 필요성 여부, 4. 세계의 원인으로 단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의 존재 여부 등 네 가지를 제시한다. 그는 각각의 항목에서 대립하는 명제들이 자체로서는 모순 없이 성립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즉 제1이율배반의 경우 세계는 시간적으로 처음이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한계가 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시간적으로 처음이 없으며 공간적으로 한계가 없다는 주장 역시 논리적으로 성립된다는 식이다.(순수305-326)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명제들은 경험으로 확증할 수 있는 인식이 아니라 일종의 가상이지만, 그것이 가상임을 꿰뚫어보아도 제거될 수 없는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가상”이다.(순수303)
2. 칸트는 이성을 경험의 한계 너머로 확대하려는 이성의 본성을 경계함으로써 나름으로 형이상학의 횡포를 제어했다. 또한 이성이 이율배반적 혹은 모순적 사유에 빠져드는 것은 이성의 본성으로 인해 필연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헤겔은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여 더욱 밀고 나간다. 그는 칸트의 이율배반과 관련해, 증명되어야 할 것을 증명된 것으로서 전제 속에 가정하고 있다고 비판할 뿐 아니라 이율배반이 네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념들이 이율배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의 이율배반적 본성, 좀 더 진정한 의미로는, 이성의 변증법적 본성을 더 깊이 통찰하게 될 경우 일반적으로 모든 개념은 상반된 계기들의 통일일 뿐임이 드러나는데, 이 상반된 두 계기에 이율배반적 주장의 형식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생성이나 현존재 등을 비롯한 모든 개념은 나름의 특수한 이율배반을 제공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개념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 수의 이율배반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주2) 따라서 인식을 위해 개념이 불가피한 한에서 헤겔은 경험적 한계와 무관하게 모순도 우리의 인식에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이는 셈이다.
이처럼 인식에 모순을 불가피한 것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칸트 철학에 맞서는 인식론상의 본질적 수정이 필요하다. 헤겔은 감성과 오성, 사유와 경험이라는 칸트 식의 대립에 동의하지 않는다. 헤겔은 오성을 통해 매개되지 않은 감성적인 것 따위는 단연코 없으며, 그 반대도 없다고 본다. 칸트의 이율배반론은 경직된 감성과 오성의 구분에 근거하지만, 헤겔은 그러한 구분을 고수하지 않는다.(입문108)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감성적 경험을 넘어서 인식을 추구한다고 해서 칸트가 주장하듯 과오에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이율배반적 사유 자체가 ‘정신의 본질을 통해 필연적으로 규정되는 활동들 가운데 하나’라는 칸트의 생각을 적극 받아들이고, 이를 발판으로 ‘사유는 본질적으로 모순들 속에서 운동한다’는 논리를 발전시킨다.(입문109) 이 점에서 칸트의 이율배반론은 변증법적 모순론의 필연적 계기이다. 물론 그 둘 사이의 대립관계가 훨씬 더 본질적이다. 그 대립관계는 칸트가 사유에 끌어들인 모순을 헤겔이 의식적으로 ‘철학적 사유 일반의 기관(Organon)으로’ 삼음으로써 형성된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이성은 필연적으로 모순에 얽혀 들어가지만, 동시에 이 모순들에서 벗어나고 스스로를 바로잡을 힘도 가지는 것이다.”(입문62-63)
모순을 ‘철학적 사유 일반의 기관으로 만든다’거나 사유가 본질적으로 모순들 속에서 운동한다는 말은 일견 어불성설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시하는 모든 판단은 모순을 포함한다. ‘A는 A다’라는 동어반복으로는 인식이 전개될 수 없다. 인식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A는 B다’라는 판단형식이 불가피하다. 예컨대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참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동물과 같지 않은 한에서 허위이며, 따라서 모순을 내포한다. 물론 명제 형식 자체로 인한 이 허위는 ‘인간은 식물이다’와 같은 오류판단의 허위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모든 유한 판단은 그 판단 형식을 통해, 즉 ‘A는 B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미 어떤 절대적 진리, 단적인 진리임을 주장하고, 그 자체의 유한성과, 즉 어떤 유한 판단도 바로 유한한 것으로서 전체적 진리가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과 갈등에 빠진다.”(입문107) 유한 판단의 이러한 갈등 혹은 모순에서 벗어나 전체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헤겔이 구상한 변증법적 개념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의 운동에서는 개념들의 상호의존성, 상호이행, 대립의 상대성 등이 변증법의 본질적 요소로 부각된다.(철학150-151) 이러한 요소들이 주체의 자의적 궤변의 산물이 아니라 대상 자체에 근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순을 사유의 기관으로 만드는 밑바탕에는 현실 자체의 모순적 적대적 성격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입문134-135)
3. [정신현상학] 서문의 다음 구절은 모순과 개념의 운동을 통해 전체적 진리로 나아가려는 헤겔의 의도를 −그 이데올로기적 남용의 가능성과 함께− 선명하게 보여준다. “꽃봉오리는 꽃이 피면 사라지며 꽃에 의해 논박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열매를 통해 꽃은 식물의 거짓된 현존임이 해명되고, 꽃을 대신해 열매가 식물의 진리로 등장한다. 이러한 형식들은 서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서로를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 배척한다. 하지만 그것들의 유동적 본성 때문에 그것들은 동시에 유기적 통일체의 계기들이 되기도 한다. 이 통일체 속에서 그것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이며, 바로 이와 같은 필연성이 비로소 전체의 생명을 구성한다.”(현상학12)
비변증법적 사유는 화해 없는 배척과 논박의 정신에 매몰되어, 대상의 유동적 본성과 유기적 통일성, 그 계기들의 필연성과 전체의 생명을 보지 못한다. 대립의 상대성이나 개념들의 상호의존성, 상호이행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칸트가 감성⋅오성⋅이성의 역할을 엄격히 갈라놓았듯이,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정치와 경제, 과학과 이데올로기, 예술과 정치, 개인과 사회 등등 제반 영역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칸막이를 치고 그 영역들의 상호의존성 혹은 상호이행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그리고 각자 칸막이 안에 머무는 것을 미덕으로 삼기도 한다. 이로써 어디에나 칸트의 이율배반들처럼 절대적 타당성을 자부하며 영원히 마주볼 뿐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들이 그어진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자본독재가 애용하는 분할통치의 좋은 먹잇감들을 양산한다. 반자본독재 운동이 칸막이 안에 고립분산된 채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란 상상만 해도 괴기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칸트의 인식론이 직접적으로, 혹은 여러 우회로를 통해 우리의 운동문화에 남겨놓은 난치병은 물 자체에 대한 불가지론이나 주관적 관념론 이상으로 비변증법적 분류법적 사고방식에 기인한다.
대립물의 상호의존과 상호이행 역시 기계적으로 혹은 무차별적으로 어디에나 적용할 경우 이데올로기로 전도될 수 있다.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를 현실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그것을 헤겔 또는 변증법의 이름 아래 ‘유기적 통일체’ 혹은 ‘전체의 생명’으로 관념 속에서 대체하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를 현실적으로 극복하여 풍요로운 평등사회를 건설한 단계에서야 비로소, 노동자민중의 피와 땀으로 자본주의가 쌓아 올린 생산력들도 유기적 통일체 속에서 전체의 생명을 만드는 필연적 계기가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자본독재를 상대로 해방전쟁이 진행중인 단계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는 엄연히 절대적이다.
(2023. 6. 19.)
주1) I. 칸트: [순수이성 비판], 정명오 역, 동서문화사 2011, 250쪽 등 참조. 이하 ‘순수’로 약칭. 독일어 원문과 대조하여 번역은 임의로 수정함.
주2) G. W. F.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Erster Theil. Die objektive Logik. Erste Abtheilung, Berlin 1841, 209쪽. 이하 ‘논리학1’로 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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