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현대시의 거목 미당 서정주
토속적, 불교적 내용의 탁월한 언어감각과 시적자질 그리고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박목월 시인과 함께 해방 전 후 대한민국의 근현대시를 대표하는 거목이며 한국의 보들레르로 불리었다. 그의 문학작품은 현재도 따라갈 이가 없는 독보적 단어 구사와 소재 선택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탁월한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 친일에 앞장 선 행적과, 군사정권 특히 신군부치하의 처신 등 용의주도한 행적으로 문학인으로서의 시대적 의무를 회피하고 때마다 일신의 안위만 노린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적 이력도 아쉽게 남아 있다.
1. 출생과 성장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줄포리에서 아버지 서광한徐光漢과 어머니 김정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대구 서씨이며 호는 미당未堂. 『화사집』을 냈을 무렵에는 대머리를 뜻하는 궁발窮髮이라는 호도 사용했다.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소작농들에게 소작료를 거두는 위치)이었으나, 시인은 시<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14살에 서울로 상경해서 중앙보통학교에 진학할 만큼 어느 정도 사는 집안이었으리라 추측한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1924년 인근의 줄포로 이사해서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 졸업했다. 같은 해 서울로 유학하여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당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가했다가 풀려난 바 있다. 이듬해인 1930년에는 사회주의운동에 감화되어 빈민운동에 투신해 당시 아현동에서 살던 좋은 하숙집에서 나와 빈민굴에서 생활하다가 장티프스에 걸리기도 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 학생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했다. 1931년 고향 쪽의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그해 가을 권고 자퇴를 당하게 된다.
이후 만주나 러시아로 갈 계획 하에 아버지 돈 30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서울에 눌러앉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때 많은 책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방랑의 시간 속에 18세인 1933년 겨울, 개운사 대원암에서 석전 박한영 스님 문하에 입산했으며, 이 시기에 작가 김동리, 함형수, 이상 등과 만나 교류했고 특히 오장환과는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1935년 경성 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에 당시 교장을 지냈던 스승 박한영의 권유로 입학했으나 1년 뒤 자퇴했다.
2. 문학과 사회활동
1933년 「그 어머니의 부탁」이라는 시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기고 형식으로 발표하다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벽」 역시 다른 작품처럼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신춘문예 원고로 바뀌어서 당선까지 된 것이라고 한다. 등단 후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와 함께「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주간을 맡기도 했다. 1938년 방옥숙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941년에는 「자화상」, 「화사」, 「문둥이」 등의 시가 수록된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해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는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
해방 이후 당시 문학계를 풍미하던 좌익 계열의 문학적 흐름에 반대하여, 1946년 김동리, 조지훈, 곽종원, 박목월, 조연현 등과 함께 순수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시 분과위원장을 맡으며 좌익성향의 ‘조선문학가동맹’과 선두에서 대결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문화부장, 초대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거쳐 1949년 초대 한국문학가협회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문총구급대가 급조되어 실무책임을 맡으며 ‘구상’과 함께 일선부대에 나가 신문편집, 시 낭송, 연설을 했다. 조지훈, 이한직 등과 함께 피난을 갔으나 전쟁 초기 극적으로 한강을 건너는 등 전쟁의 상흔으로 조현증(정신분열증)이 발병하여 병원에 요양하였다. 하지만 참혹한 시대가 만들어 낸 그의 병은 도리어 그의 시세계를 확장하여 그 시점 이후부터 실질적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대작을 많이 발표해내었다.
「견우의 노래」, 「귀촉도」, 「푸르른 날」등이 수록된 두 번째 시집 『귀촉도』를 1948년 발간하였는데 이는 1집인 『화사집』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작품성의 확장을 이루었다. 1956년에는 「무등을 보며」, 「국화 옆에서」, 「추천사」 등이 수록된 세 번째 시집 『서정주 시선』을 출간해 해방 이전에 이어 시인으로서 또 다시 크게 주목받았다. 1961년에는 「꽃밭의 독백」, 「고조」, 「무제」 등이 수록된 제 4집 『신라초』를, 1968년에는 「동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선운산 동구」 등이 수록된 다섯 번째 시집 『동천』을 출간하면서 명실공이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독특한 언어 구사력으로 표현한 특출함도 있었지만, 오랜 기간 걸출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사의 가장 큰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잔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 「귀촉도」 전문
또한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으면서 박재삼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한국문학의 가치를 더욱 충실하게 하는데 일조를 했다. 시 이외의 다른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남겨 자서전인 『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와 『천지 유정』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산문집과 평론집을 내기도 했다. 특히 평론 중에서 『한국의 현대시』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를 다룬 글은 지금 읽어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75년에는 「신부」, 「상가수의 소리」,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등이 수록된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를, 1976년에는 「시론」, 「낮잠」 등이 수록된 일곱 번째 시집 『떠돌이의 시』를 출간했다. 이후에도 약간의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1977년에는 신문사의 후의로 세계여행을 다녀와 1980년 기행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을 냈고 1982년에는 한국의 역사를 시로 표현한 시집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를 냈다.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한국문인협회 이사장(1977-1979)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 등 친 독재적인 행보를 저질러 진보 문학계인사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3년 자신의 생애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집 『안 잊히는 일들』을, 1984년 노래로 쓰이도록 만든 시들을 묶은 시집 『노래』를 출간 했고 1988년 자서전적 성격의 담시들을 쓴 시집 『팔할이 바람』을 냈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매일 1600여 개의 세게의 산 이름을 외웠는데 이를 바탕으로 1991년 시집 『산시』를 냈다. 말년까지 공부와 시쓰기를 활발하게 하여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러시아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1990년대 중반 『세계 민화집』과 동화집 『우리나라 신선선녀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1993년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 1997년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출간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옆에서」 전문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동천」 전문
1941년에 발간된 첫 시집 『화사집』은 생명탐구에 집중되어 관능적, 본능적 이미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초기의 정신적 방황을 잘 담아내고 있다. 1948년『귀촉도』는 일제말기에 쓴 시와 해방 뒤에 쓴 시를 함께 수록하고 있어 노자, 장자 등 동양사상을 중요한 세계관으로 잘 담아내고 있다. 1955년 발간된『서정주 시선』은 미당이 불혹의 나이를 넘긴 상태에서 앞에서 말 한바와 같이 조현증(정신분열증)의 증세와 함께 시세계의 보다 넓은 확장을 이루어 대표작인 「국화옆에서」,「무등을 보며」,「광화문」등을 수록하였다. 이후에는 고전문학에 심취하여 고전을 통한 문학적 성취에 노력하였다. 1952년 광주 소재 조선대학교 부교수를 시작으로 서라벌예대 강사와 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강의하며 140여명이 훨씬 넘는 제자를 등단시키고 한국문학계의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친일적 활동에 앞장서 ‘다쓰시로 시즈오’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태평양전쟁의 일본 침략을 찬양하며 당시 조선인의 전쟁참여를 독려하는 많은 시와 글을 발표하며 조선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모는, 돌이킬 수 없는 반민족 친일행위를 하는 등 오점을 남겼다. 특히 최재서 등과 같이 일본군 사병 군복을 입고 종군기자로 다니며 충성을 강요하는 글을 올리곤 했다. 현재까지 총 10여 편의 친일적 성격의 글들이 발견되어 8·15 광복 이후 반민특위에 소환되었는데 이때 “적어도 일제 치하에 몇 백 년은 더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당시 우리 민족의 절대 다수의 실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은 몰랐다”라는 고백을 기술 한 바도 있다.
말년에는 친일 행위와 여러 정치적인 행보로 인해 진보 세력들로부터 살해 협박과 집요한 스토킹에 시달려야만 했는데, 특히 시인의 아내에게까지도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 연락이 매 시간 단위로 걸려왔다고 한다. 실제로 집 앞에 외부인이 칼을 들고 한 참 동안 머물다가 간 적도 있다고 한다. 기회마다 정권에 충성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특히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대통령의 56세 생일 때 ‘한강을 넓고 깊게 또 맑게 만드신 이여’로 시작하는 ‘처음으로’라는 축시를 지어 바친 것으로 극단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말년에 이러한 협박과 스토킹에 회의를 느껴 미국으로 피난하다시피 떠났고 아내와 함께 장기간 체류했다가 1990년대 중반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2000년 10월 아내 방옥숙 여사가 사망(1919년-2000년 10월10일)하자 충격을 받고 쓰러졌으며 나중에는 곡기를 거부한 채 술만 마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후 산소호흡기를 쓰고 투병하다가 11월에 과거의 행적에 대해 의식한 듯 잘 봐달라고 말씀하더라도 해“라는 최후의 인터뷰를 남겼으며 12월 22일부터 혼수상태에 빠졌고 2000년 12월 24일에 향년 85세로 영면했다. 사망 이후 흑석동에 있던 그의 고택도 수 년 동안 폐가로 쓸쓸이 버려져 있다가 2008년 즈음 정부에서 복원하였다.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다. 시인은 일생동안 1.000여 편에 달하는 문학작품을 남겼고, 그 중 많은 작품들이 걸출하여 한국문학의 가치를 높였다.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여 시인의 공적을 기렸다.
1986년 동국문화상, 1987년 5·16 민족상, 2000년 금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자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
눈이 또 오면 어이 하리
내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푸르른 날〉 전문
3. 남겨진 이야기
가.
미당의 생가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다. 근래에 복원된 곳으로 미당시문학관도 같이 자리하고 있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로부터 차로 10분 거리에 있어 경유지로 좋은 곳이다. 인근에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이며 고려대학교와 동아 일보 등을 설립한 인촌 김성수의 생가도 있다 .
나.
그의 시 「자화상」(1937)에 나오는 ‘애비는 종이었다.’는 구절을 가지고 ‘종놈의 자식’이라고 까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에서도 나오듯이 그의 집안은 김성수 집안과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서정주의 아버지가 지주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기 때문이다. 마름은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직으로 소작농 들 앞에서는 지주 못지않은 권세를 누렸다. 「동백꽃」에 등장하는 점순이도 바로 마름집안 딸이었다. 이건 친일행적과는 무관하지만 진보성향의 문인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눈에는 그의 경력이 워낙 악질적인지라 ‘말당’과 함께 그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종놈 새끼라는 식으로 자주 언급 하곤 했다. ‘말당’이라는 비속어는 5공 당시 청와대에 초청되었을 때 전두환 당시 대통령(또는 영부인 이순자 여사)이, 미당未堂이라는 아호를 말당末堂으로 잘못 읽어 생겼다고 한다. 문인 조지훈도 그에게 큰 굴욕감을 갖게 했다. 조지훈은 4·19의거 시 학생들과 함께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투쟁을 이끈바 있는 지조 있는 문인이었기에, 매년 정월 후배 문인들이 대 선배인 서정주 시인을 제쳐두고 제일 먼저 조지훈 시인에게 세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다고 한다. 역시 동갑내기 문인인 황순원도 그에게 크나큰 굴욕감을 주었는데 황순원은 박정의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에 어떤 비판이나 칭송도 거부하고 침묵을 지켰고, 이에 문인들은 ”역시 선생님다우십니다.“라고 극찬하며 인사드리러 갔다고 한다.
다.
2020년 3월 11일 그의 8살 아래 남동생인 우하又下 서정태 시인이 97세에 별세했다. 형제 관계는 각별했고 동생도 형을 따라 평생 시인을 꿈꿨으며, 서정주 시인은 19살 때 당시 15살이었던 여동생과 11살이었던 남동생의 시를 묶어 『형제 시집』이라는 제목으로 문집을 내기도 했다.
라.
1940년 이후부터 본격화된 시인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2년 국회의원들이 발표한 대표적 친일파 708인의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부분에 최재서, 노천명등과 같이 포함되었다. 해방이후에는 우파문학의 선두에 서서 기회마다 정권에 충성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특히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대통령의 56세 생일 때 ‘한강을 넓고 깊게 또 맑게 만드신 이여’로 시작하는 ‘처음으로’라는 축시를 지어 바친 것으로 극단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마.
”아무리 뛰어난 시인일지라도 거의 평생에 걸쳐 잘못을 저지른 인물에게 찬사를 보내서야 되겠느냐?”라는 주장도 많이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오점 때문에 그가 남긴 문학적 가치 전체가 매도되거나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는 입장의 차이도 분분하다. 문학적 성취에서는 백석과 함께 한국의 현대시에서 아직도 단연 독보적이라는 평가가 왕왕 나온다. 그도 시인이기 전에 인간이므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서로의 생각과 목소리도 다르고 선·악의 개념도 획일적이지 않은 현대 사회에서, 어떤 세력의 주장만이 정의라고 할 수는 없다. 편협 된 이념에 물들지 않고 포괄적 선을 향해 가는 방향성을 위해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풍토를 애타게 기다리는 목소리도 이제는 너무 많다. 문학적 가치의 순수성보다 어두운 면만 거론하며 비판하는 것은 인류사에 길이 남을 위인도 전부 쓰레기로 낙인을 찍는 모습을 연출한다.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평가도 개인의 주관에 따라, 시대적 선동에 따라 너무나 다르다. 따라서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일리가 있다. 역사에 남은 명화와 명작들에 대해 작품의 위대성보다 작가의 사생활을 유추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인 서정주는 분명 대단한 문인이며, 미당의 문장은 한국어의 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크다른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희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롱거리는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 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꽃대님보다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섹시, 고양이 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배암.
- 「화사花蛇」 전문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귀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난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신부」 전문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참고문헌】
1. 『두산백과』
2. 『위키백과』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 중앙연구원)
4. 『서정주』 (박호영,건국대학교출판부,2003)
5.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2009)
글쓴이; 이희국 시인 (월간문예사조 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