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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입문]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제 6강
(1958. 6. 10.)
변증법적 방법은 형식적 사유도식이 아니다·95 | 진리의 객관화·98 | 참인 사고는 모두 고립을 통해 또한 거짓이 된다·101 | 헤겔의 경우 삼중 도식은 중요하지 않다·102 | 모순의 보편화에 대한 비난·104 | 모순은 제일원칙이 아니다·105 | 칸트의 선험적 변증론에 대한 헤겔의 비판·106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변증법은 일종의 손작업처럼, 일종의 처방처럼, 하나의 방법처럼 다루어지는 순간, 그 자체가 이미 필연적으로 허위로 넘어간다고, 더욱이 실로 엄격한 변증법적 의미에서, 즉 그로써 변증법이 그 자체의 개념과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에서, 허위로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증법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단절상태로(unterbrochen) 사유한다는 것, 그러니까 개념이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그때그때 그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에서 자체에^ 대한 비판을 발견하고, 역으로 단순한 사실성이 그 자체의 개념에 근거해 평가되는 식으로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다른 대목에서 ‘개념의 노동과 노고’라고 칭한 일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는 순간,(75) 우리는 그 방법을 확실하게 손에 들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이미 그 방법을 실제로 날조하고 그르쳐버린 셈입니다.(입문96-97)
한편 그보다 훨씬 더 일반적인 사실, 예컨대 예술에서 되풀이하여 접할 수 있는 사실을 칸딘스키(Kandinsky)는 언젠가 자신의 저서 예술 속의 정신적 요소 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에서 멋지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즉 한 예술가가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고 믿는 순간 실제로는 이미 그것을 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셈이라는 것입니다.(…) 변증법적 사유의 요구들 가운데 한 가지로 결코 사소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변증법적으로 사유할 경우 칸트 스타일의 교사처럼 “이제 나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일단 가지고 있는 한 내게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식으로 사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매 순간 사고 자체의 노고를 수행하지 않고, 말하자면 자동화되어 맹목적으로 계속해서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관념[에] 헤겔은 극히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직 비교적 겸손하고 단순한 통찰들입니다. 물론 구체적 사유에서 실제로 그러한 통찰들에 따라 반응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런 통찰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더라도, 변증법적 사유를 헤겔이 그토록 절실하게 경고하는 마술사기의 괴로운 반복으로 바꿔놓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또 우리가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범주들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일, 즉 부단히 자신의 범주들을 반성하여 그것들이 사실상 그것으로 사유되는 사태들에^ 여전히 적합한지 검토하는 일에도 애초부터 단련되는 것은 확실히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76)(입문97-98)
이런 맥락에서 헤겔의 매우 훌륭한 점, 또 오늘 여러분에게 주목하도록 만들고 싶은 점은, 헤겔이 그러한 것을 확인하는 데에, 또 변증법적 사유의 기계적 사용이나 고착화를 논박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그가 모든 부정적 요소들을 가지고 언제나 그러듯이, 그런 현상도 나름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런 현상 자체를 −사유의 이러한 일탈, 사유의 이러한 경직화와 사물화 자체를− 사유 자체의 살아 있는 과정으로부터 추론해내려고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변증법 전반에 대해 지극히 특징적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은 사물화된 것, 경직된 것, 고정된 것에 이른바 살아 있는 것, 직접적인 것을 간단히 맞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경직된 것을 활용하고 응고된 삶, 응고된 노동, 그 속에 침전된 것을 지각하며, 단지 그것을 그 자체의 힘에 근거해, 그러니까 우리와 소외된 상태로 맞서 있는 사물들과 개념들 속에 침전되어 있는 삶에 근거해 작동시킴으로써 경직된 것과 고정된 것을 극복하여 그것을 용해시키는 일을 신경중추로 삼고 있습니다.(입문98)
“하지만 그 훌륭한 것이 그렇게 생명과 정신을 잃게 되고 그렇게 혹사당한 채, 그 피부는 생명 없는 지(Wissen)와 이의 허영으로 둘러싸인 것을 보게 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 위와 같은 문장에서 여러분은 실제로 헤겔 전체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떨어져나간 단순한 피부라는 관념이 지(知)나 의식처럼 외관상 매우 추상적인 것에 완전히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문장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지난 시간에 이미 말했듯 연속적 이행이 아니라, 사고가 구체의 극에서 추상의 극으로 뛰어넘는 식의 엄청난 도약을 통해 운동하는 헤겔 철학의 특이한 긴장의 장은 다름 아니라 지극히 감각적인 것, 가까운 것으로부터 지극히 멀리 떨어진 것에까지 이런 식으로 추론이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양자 사이의 어중간한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 극단이, 즉 보편과 특수가 서로 접하는데, 이는 다시 극히 깊숙하게 헤겔 철학의 내용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편이 언제나 동시에 특수이며 또 특수는 보편이라는 것이야말로 사실상 변증법 이론 자체의 정수이기 때문입니다.(입문98-99) (78)
“오히려 이 운명 자체에서는” −그러니까 사람들이 죽은 피부 속에 말하자면 사태 자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운명− “그것이 정신에는 아닐지라도 정서에 발휘하는 힘도 인식할 수 있고, 아울러 그것^의 완성이기도 한 형식의 보편성과 확정성의 형성을 인식할 수도 있는데, 이 형식을 통해서만 보편성은 표면적인 것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헤겔은 이 문장에서 지극히 심오한 어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유 자체가 착상의 단순한 우연성, 주관의 자의성을 버리려면 객관화⋅대상화의 형식에 도달해야 한다는 점, 하지만 그것이 이런 성격의 보편성, 개념적 확정성을 띰으로써 자체 내에서 필연적으로 사물화되고 일종의 처방이 되고 악용될 위험을 생산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헤겔이 경고하는 악용, 즉 삼중 도식을 피상적으로 이용하는 데에 따른 이 악용 자체는 사고에 대해 외적인 것이 아니라, 사고가 지금 여기의 단순한 자의성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사고 자체가 어떤 객관적 진리가 되고자 하면 해야 하는 것을 따름으로써 야기되는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하면 고착화라는 의미에서 허위로 되는 것 내지 허위는 진리 자체가 객관화되는 성격과 분리될 수 없는 듯합니다. 하나를 가지면서 다른 것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아무튼 가장 중요한 변증법적 원칙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한편으로 사고에 그 객관성⋅힘⋅구속성을 부여하면서 바로 그로써 사고가 스스로를 자립시키고 사태에 맞서 그것에 외적인 것으로서 폭력적으로 딱딱하게 기계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입문99-100) (79)
진리와 허위는 서로 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진리와 허위는 서로 간단히 추상적 안티테제로 대립하지 않고 진리 자체에 마치 그 운명처럼, 그 저주처럼, 그것이 처해 있는 죄의 연관을 가리키는 표지처럼, 허위로의 이행이 내재한다는 것, 그리고 거꾸로 진리 일반이 나아가는 길은 −그리고 진리는 사실 일종의 과정입니다− 단지 허위를 통과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변증^법적 사유에 그 자체의 악용에 대한 경고와 같은 사실도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입문100-101)
삼중 도식의 악용에 대한 이 경고에는 또 하나의 변증법적 기본 통찰로서 여러분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위의 생각을 단지 조금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즉 고립시켜 놓을 경우 −그리고 헤겔의 경우 추상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고립시키는 것, 전체의 연관관계로부터 떼어내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또한 허위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사고는 없다는 통찰이 그것입니다.(…) 즉 단적으로 어떤 진리도, 가장 참인 이론도, 심지어 변증법 이론 자체도 그 연관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특히 어떤 이해관계에 얽힌 상황에 복무하게 될 경우, 직접 허위로도 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철학의 최고 구성물이든, 예술의 최고 구성물이든, −그것을 고립시켜 파악함으로써− 사람들을 다른 사물들과 떼어놓고, 사람들을 다른 것에 대해 속이고 그들에게 거짓만족⋅허위만족⋅사이비만족을 만들어주는 데에 악용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80)(입문101)
그리고 여러분이 여기서 일단 나에게 변증법의 실천적 적용을 기대한다면, 그러한 적용은 바로 변증법적 사고가 본래 어떤 방식으로 고립되어 그러한 악용에 쓰이는 것에 지극히 불신을 갖고 대응하는 사고라는 데에 있습니다. 즉 일반적으로 어떤 개별 인식이, 어떤 유한한 개별 인식이 −전체에 대한 어떤 인식이든 사실 인식으로서 언제나 아직 하나의 개별 인식입니다− 마치 전체인 체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될 경우, 그것은 당장 허위에 복무하게 되고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습니다.(81)(입문101)
나는 이제까지 여러분에게 말한 바에 근거해 여러분이 −이는 말 그대로 헤겔의 텍스트에 쓰여 있는 것과는 대립하지만, 헤겔 철학의 정신에 근거해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증법은 바로 전통적 의미에서 어떤 방법이 아니라는 점, 즉 자신의 대상들을 장악하는 정신의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실로 변증법의 운동은 언제나 사태 자체의 운동이면서 동시에 사유의 운동이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함으로써 그것이 상대적으로 사소하다는 점을 아주 간단히 의식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즉 변증법적 운동이 사태의 운동이며 사태에 근거해 수행될 수 있다면, 그로부터 실제로 단지 방법적으로, 단지 외부로부터 사물들에 뒤집어씌워진 모든 종류의 변증법적 고찰은^ 이미 변증법을 그르친다는 결론이 저절로 나옵니다.(입문102-103)(82)
변증법적 운동은 모순적인 계기가 여러분이 발언하는 명제 자체에서 발견된다는 점, 즉 확고하고 굳어진 것으로서 여러분에 맞서는 명제가 자체 내에서 긴장의 장이며 자체 내에서 특정한 종류의 생명을 지닌다는 점, 그리고 철학은 명제를 통해 이러한 생명을 어떤 점에서 사후구성하는 과제를 지닌다는 점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합은 두 명제의 공통점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헤겔은 합이 바로 그와 반대되는 것, 즉 부정의 또 다른 형식, 부정의 부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명제 자체로부터 끄집어낸 명제의 대립물인 반명제는 자체 내에서 유한한 명제로서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참이 아니며, 그것에 담긴 이 비진리가 규정됨으로써 원래 부정되었던 명제 속의 진리 계기가 다시 타당성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름 아니라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관점에서 묘사한 사유와 외부로부터 대립들을 설정하고 그 다음에 그 대립들에서 추상적 특징을 결과로서 파악하는 추상적 사유 혹은 외연논리적 사^유(umfanglogisches Denken)의 대립에, 여기에 아무튼 변증법적 사유의 본질이 있습니다. 삼중 도식이 그다지 엄청나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은, 이 도식이 실제로 주관적 추출일 뿐,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사태에 접근할 때의 주관적 반응에 대한 묘사일 뿐이라고 할 수 있는 데에 반해, 이 주관적 반응은 단지 하나의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야기됩니다. 이 계기를 헤겔은 자신이 ‘순수 관찰’이라고 칭하는 다른 계기, 그러니까 완전히-무제한적으로-사태에-자신을-내맡기기(Völlig-uneingeschränkt-der-Sache-sich-Überlassen)를 통해 교정하고 있습니다.(입문103-104)
도대체 왜 모든 것이 모순에 처해야 하는가? 정말 모순만이 존재하고 단순한 차이들은 없는 것인가? 단지 풍성한 질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은 나란히 있고 녹색⋅빨강⋅파랑처럼 그저 상이할 뿐인데, 내가 이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모순으로, 내 나름 내적 모순으로, 아무튼 모순으로 끌고 가려는 것은 일종의 자의적 행위이자 −이로써 우리는 매우 부담스러운 의미에서 개념들의 강압성 문제에 부딪칩니다− 강압적인 방법-에-근거해-현실-을-억압하기(Von-der-Methode-aus-die-Realität- Vergewaltigen)가 아닌가? 그리고 이제 내가 모든 것을 어디서나 모순의 형식으로 끌고 갈 경우, 아름다움의 근저에 예컨대 다양한 색도에 맞서 평준화, 다름 아닌 추상화⋅평탄화의 한 계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이런 반론은 철학사에서 아주 빈번히 제기되었으며, 내 생각에 그것을 이제 간단히 우아한 제스처로 끝내려 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과 대면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전통적 논리학, 즉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측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트렌델렌부르크(Trendelenburg)에 의^해 처음으로 극히 예리하게 정식화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19세기 전반기에 자신의 헤겔 비판을 위한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반론은 마침내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이른바 헤겔-르네상스 초기에 헤겔에 대한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의 책에서 다시 다루어졌습니다. 이 책은 이른바 헤겔-르네상스의 물꼬를 텄지만, 다소 양심의 가책을 갖고 헤겔에 접근했으며, 이미 트렌델렌부르크가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헤겔을 실증주의적인 사유, 이른바 ‘반성철학’과 나름으로 일치시키려고 했고, 이로 인해 그렇게 크로체가 시작한 재탄생에는 다소 문제적인 사태가 남게 되었습니다.(84)(입문104-105)
변증법이 단지 환원적 사유일 뿐이어서 차이들 모두를 모순의 공식 아래 끌어들이려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모든 것을 어쩌면 하나의 원칙에 근거해 설명하려는 시도와도 같은 어떤 것인 셈인데, 본래 변증법은 이러한 것에 반대했습니다. 내 생각에 변증법적 사유 일반이 수행하는 역할, 또 변증법적 사유 혹은 철학적 사고 일반이 본래 가지는 의미는 오히려 살아 있는 경험에 맞서서 규율을 제시하는 힘의 일종입니다. 상이한 것 속에서 통일성을 찾지 못하고, 또 통일성을 찾음으로써 단순히 상이한 것 속에 담겨 있는 모순의 성격 또한 지각하지 못하고, 단지 차이만^을 보고 단지 상이함만을 지각할 경우, 그럴 경우 사유는 말하자면 녹아버리며 이론의 형태도 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 이론을 절대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한편으로 이론 없이는 인식과 같은 어떤 것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자기제한의 의미에서 본래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는 것입니다.(85) 여기에 일종의 역설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전체를 장악하여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는 열쇠가 되리라고 믿는 이론은 사실상 조야한 오만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이론의 이러한 계기, 즉 우리가 오늘 처음부터 들은 바 있는 인식을 통일하거나 혹은 객관화하는 이 계기가 사유에 전혀 없다면, 더 이상 근본적으로 전혀 인식에 도달할 수 없고, 실제로 다소 병렬적으로 늘어져 있고 조직되지 않고 산만한 사실들을 단순히 확인하는 데에 도달할 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특별히 변증법적인 구상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사물들에 지나친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서 그런 상태에 맞서 작업하려는 욕구입니다.(입문105-106)
모순 개념은 어떤 다른 개념과 꼭 마찬가지로 실체화해서는 안 됩니다. 즉 어떤 다른 개별 개념이 핵심 개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변증법을 위한 핵심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실상 변증법은 어떤 개별 개념에 절대적 품위를 요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념들 상호간의 관계 속에 있을 뿐입니다.(입문106)
하지만 여러분은 사실상 변증법에서 모순 개념이 왜 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지, 그것도 사유-영양법적인 이유가 아니라 어떤 실제적인 모^티프로 인해 실제로 그러한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86) 일단 이 문제를 우선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즉 모든 유한 판단은 그 판단 형식을 통해, 즉 ‘A는 B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미 어떤 절대적 진리, 단적인 진리임을 주장하고, 그 자체의 유한성과, 즉 어떤 유한 판단도 바로 유한한 것으로서 전체적 진리가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과 갈등에 빠집니다. 변증법에서는 모순 개념이 그처럼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고, 또 단순한 관찰과 사태에 대한 적응에 가장 많은 것을 요구하는 개념이며, 한편으로 이 개념에 대해 변증법에서는 그것이 본래의 원칙이라고 이야기되는데, 이는 바로 이 대목에 실제로 그 근거가 있습니다.(입문106-107)
모순의 범주, 혹은 근대적 변증법 이론의 기원은 사실 순수이성 비판에서 유래합니다.(…) 그 기본적인 사고는 이렇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 이성의 기본개념들, 이른바 우리의 범주들을 우리 경험의 가능성들 너머로까지, 감성적 실현의 가능성들 너머로까지 적용할 경우, 달리 말하면 우리가 무한 판단을 내릴 경우, 그 나름으로 각각 동일한 수준에서 명증하지만, 서로 모순되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위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모든 사건은 시간 속에 하나의 출발점을 갖는다, 혹은 모든 사건은 시간 속에서 무한한 계열을 이룬다는 판단들이 그렇습니다. 혹은 공간에도 유사한 것이 적용됩니다. 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율에 종속된다, 혹은 자유로부터 나오는 인과율도 있고 따라서 인과의 계열이 중단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판단들도 그렇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이 모든 명제들은 칸트의 말에 의하면 본래 우리의 경험을 조직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인 우리의 범주들이 말하자면 이제 혼란스러워진 데에 기인합니다. 즉 이 범주들이 그 자체로 공허해지고 자체에 근거해 절대적인 것을 갖는다고 주장하지만, 단지 그것들에 대립^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본래 타당하다는 데에서 그처럼 모순되는 명제들이 생겨납니다.(87) 이로써 칸트는 모순성의 개념을 인식에 새로이 받아들였으며, 더욱이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아주 강력히 강조하며 받아들였습니다. 즉 우리의 이성은 이 모순들에 필연적으로 얽혀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즉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사유를 계속 끌고 갈 수밖에 없기에, 우리 사유의 조직 속에는 우리가 유한성을 넘어선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기에,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되풀이하여 그런 명제들을 주장하도록 오도되며, 또한 −순수이성 비판의 다른 대목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이 모순들을 그 근원의 측면에서 간파할 수 있고 또 우리가 그것들을 풀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입문107-108)
여러분은 일단 간단히 헤겔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상정할 수 있습니다. “이 모순들이 우리의 인식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그래서 우리가 되풀이하여 얽혀 들어가는 필연적 모순들이라고 그대가 우리에게 말한다면, 또 그대가 이 모순들을 해결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면, 왜 그대는 그 길 전체를 가서 이 불가피한 모순들에 관여하지 않는가. 왜 그대는 자신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이 모순들을 대면하지 않으며, 그런 다음 왜 이 모순들의 운동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고 시도하지 않는가?” 그런데 헤겔 철학의 이러한 요구는 사실상 칸트 철학에 맞선 본질적인 인식론적 수정에 근거를 둡니다. 즉 칸트가 비교적 순진하고 조야하게 설정한 감성과 오성, 사유와 경험이라는 칸트 식의 낡은 대립에 헤겔은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헤겔은 이런 식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도대체 어떻게 감성과 같은 것에 도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88) 오성을 통해 매개되지 않은 감성적인 것 따위는 단연코 없으며, 그 반대도 없다. 따라서 이처럼 전적으로 경직된 감성과 오성의 구분에 칸트의 이율배반론은 근거하며, 또 그것이 나에게 모순들에 빠져드는 것을 어떤 점에서 경계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결코 고수할 수 없다. 오히려 오성 없는 감성은 없고 감성 없는 오^성은 전혀 없기 때문에, 칸트가 실제로 의식의 단순한 과오라고 보는 이 운동 자체가 정신 자체의 본질을 통해 필연적으로 규정된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며, 바로 그래서 사유는 본질적으로 모순들 속에서 운동한다.”(89)(입문108-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