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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나타난 부활
2020. 4. 12.(부활주일) 고린도전서 15:12-20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인 김경일교수가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친구와 길을 걷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앞에 상무님이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전교 3등으로 졸업한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상무님 앞에만 서면 실어증 걸린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경일교수는 상무님과 대화하는 내용을 녹음해 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녹음파일을 들어보니 친구가 상무 앞에서 말을 더듬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전혀 말을 더듬지 않는 친구가 상무님 앞에서는 바보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인지심리학 박사인 김경일교수에게 상무님 앞에만 서면 자신이 작아지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때 김경일교수의 대답은 네 자신을 크게 하면 되지 였다.
왜 김경일교수는 자기 자신을 크게 하라고 하였겠는가? 김경일교수님은 아주 재미난 실험을 이야기 한다. 도박하기 전에 몇 분 동안 사장님 자세를 취하라고 한다. 그리고 사장님 자세를 취한 사람이 도박을 하면 적극적이고, 또 대담한 결정을 한다. 그런데 도박을 하기 전에 신입사원 자세를 몇 분 동안 취한 사람은 도박을 할 때 대담한 결단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면접을 보는 취준생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취준생이 면접을 보기 전에 대기실에서 사장님 자세를 하고 있다가 면접을 보면, 그 취준생은 적극적이고 담대하게 답변을 하는데, 신입사원 자세를 취한 사람은 소극적인 답을 하였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겠는가? 김경일교수님은 이 실험의 결과를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은 신체상태와 생각을 균일하게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취하고 있는 자세가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은 하란에 있던 아브람을 부르셨다.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가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땅을 주고, 민족을 이루고, 또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아브람이 가나안 세겜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네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해 주었다. 아니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로 떠났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였다. 아브람은 그 말씀을 듣고 헤브론으로 가서 장막을 쳤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붙잡고 62년을 사는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창세기 23장을 보면 아내 사라가 127년을 살고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아내를 장례할 땅 한평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아브라함이었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반응을 하겠는가? 성경을 살펴보면 사라와 같은 여인은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사라의 아름다움으로 때문에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라에게 여보가 아니라, 오빠라 부르라고 한다.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의 말에 순종했다가 애굽의 궁궐에서 살아야 할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그런 큰 실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아브라함을 부르는 호칭이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뭐라고 불렀는지 읽어보기 바란다.
(창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아브라함이 99세 때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장막에 온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다고 말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을 사라는 속으로 웃고 혼자 하는 말이 나와 내 남폎은 늙어서 아들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을 부르는 호칭이 내 주인(my lord)이다. 아무도 듣지 않고 혼잣말로 하는데, 그때도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인으로 아브라함을 불렀던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대하는 사라의 모습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실수를 덮어주고, 또 주인으로 극진히 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착하고 순종적인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아내를 위하여 장례할 땅 한 평이 없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하겠는가? 아마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털어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살다가 이런 비참한 형편에 처하였으니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겠다고 고함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한 그 헤브론 땅에 있는 막벨라 굴을 샀다.
왜 아브라함은 헷족속에게서 땅을 샀겠는가? 개그우먼 박미선씨가 작년에 스탠드업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강의를 시작하는 박미선은 자신이 개그우먼인데 선배님이 사람을 많이 웃기는 것이 부럽다는 후배는 아무도 없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오랫동안 방송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였다 그렇게 묻는 후배들에게 박미선씨가 하는 말이 젖은 낙엽정신이다. 박미선씨는 어릴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굉장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웠기 때문에 어머니가 가사도우미 일을 하였다. 이 집 저집 일을 도우며 생계를 꾸렸던 어머니는 어느날 아침 일찍 가사도우미 일을 하러 가서 이불빨래와 커튼을 빨았다. 그리고 점심이 되자 주인은 밥으로 누룽지와 간장을 내어 놓은 것이다. 그때 자존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욱하는 성격에 그냥 집으로 와버렸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는 그때를 기억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때 돈은 받고 나올걸. 그 누룽지가 뭐라고, 욱하면 너만 손해다
그래서 박미선씨 집의 가훈은 젖은 낙엽정신으로 버티고 참고 살자이다. 박미선씨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일이 되지 않고, 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2인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젖은 낙엽정신으로 버티고 참았던 것이다. 그랬더니 1인자도 다 방송을 떠났는데, 박미선씨는 지금까지 방송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산 것이 젖은 낙엽정신이다. 아브라함은 충분히 욱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욱하지 않고 젖은 낙엽정신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사서 거기에 아내 사라를 장례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땅을 주실 것이다는 믿음으로 살았다. 이렇게 막벨라 굴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실 영원한 땅을 바라보았던 아브라함은 죽어서 막벨라 굴에 묻혔다.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주실 땅을 소망하며 막벨라 굴에 묻힌 것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막벨라 굴에 묻힌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야곱이 막벨라 굴에 묻힌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야곱은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였다. 그래서 야곱이 죽었을 때 애굽는 70일동안 애곡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야곱이 애굽에서 장례를 치루기를 원했다면 웅장한 피라미드에 묻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나를 애굽에 장사하라고 유언하지 않고,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창 49:29)고 유언하였다. 그래서 야곱은 죽은 후에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
요셉도 마찬가지이다. 요셉은 죽을 때에 자신을 애굽에서 장례하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자기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달라고 유언한다.
왜 야곱과 요셉은 애굽에 묻히기를 거절했겠는가?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막벨라 굴을 통하여 그 영원한 땅의 징표를 삼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빈무덤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로 삼아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빈무덤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활이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소망하고 사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만일이라는 단어를 5번 반복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❶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고, 또 ❷우리의 부활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❸우리의 전파하는 것과 믿음도 헛되며, ❹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짓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부활이 없다면 ❺우리는 여전히 죄가운데 있고, ❻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고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왜 바울은 예수님을 믿어 한 교회된 고린도교회에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가? 2달 전에 태국에서 사역하는 박정문선교사님이 페이스북에 미얀마 난민들을 위하여 집을 지은 집을 철거해야 한다는 내용을 올렸다. 우리교회가 비전트립을 갔을 때 불교땅(푸포마을)에 집을 짓고 사는 미얀마 난민촌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때 절의 눈치를 보며 사역하였는데, 난민촌 사람들이 교회 출석하는 수가 늘어가자 절에서 교회다니는 사람은 난민촌을 떠나라 한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선교사님은 난민촌을 떠난 미얀마 성도들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그 건물이 불법이라 철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님은 철거하는 미얀마 성도들의 생활비를 후원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집사님 한 분이 비전트립 가려고 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이 경비를 준다고 그 돈으로 선교에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감사하게 난민촌을 떠나는 분들을 도울 수 있었다.
그런데 브라질 박종필선교사님이 선교편지를 보내어 왔다. 브라질도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는데, 정부에서 격리는 말하면서 노숙자 형제들을 위한 대책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개인 생활비로 그들을 돕고 있다는 내용을 보내왔다. 사실 우리교회도 미자립교회 돕기를 한 직후라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돕는 손길이 있어서 후원을 하였더니 선교사님이 영상을 보내왔다.<영상4분>
여러분은 이 영상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박종필선교사님은 청소년 사역을 정말 잘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박종필선교사님 아내인 신숙희 선교사님은 외과의사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사역을 하였다면 넉넉하게 후원하며 살 수 있다. 그런데 브라질에서 후원을 받으며 노숙자를 섬기는 바봩은 삶을 사로 있다.
왜 선교사님은 이렇게 바보같은 삶을 살고 있겠는가? 고린도교회 안에는 파벌의 문제, 은사의 문제, 그리고 음행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정말 이것이 교회가 맞나?고 할 정도로 고린도교회 안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교회에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내가 어떤 대우를 받고 살까?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부활의 소망과 확신을 가진 사람이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 바울은 부활의 산소망을 가지지 못한 성도를 향하여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함께 20절을 읽어보기 바란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었다는 말은 이제 주 안에서 잠자는 성도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의 열매가 될 것이다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무덤에서 깨어나신 것처럼 이제 저와 여러분도 언젠가는 그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는가? 러시아가 루마니아를 점령한 후 루마니아는 종교회의를 하였다. 그리고 그 회의에서 교회지도자들은 모두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때 리차드 렘브란트 목사님은 발언권을 얻어 단상에 섰다. 그리고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직자로서 공산당이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미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절대세속의 권력자를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남을 구원하였으니 네 자신도 구원하라,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참된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소망 앞에서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예수님이 베푼 기적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니었고, 또 조롱하는 그들을 벌하는 것도 아니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는 기적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부활을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보여야 할 기적이 바로 이와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포기하고,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활의 산소망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