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강 네 번째 증명(3) 우상숭배로 되돌아가렵니까?(갈4:8-11)
1. 하나님을 아는 지식(4:8-9)
“그런데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지만,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
세례를 받아 이제 하나님의 이들로 인정을 받는 상속자가 되었다면, 그는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례, 상속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 세 가지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사상이라는 것이 바울의 네 번째 논증입니다. 그래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질문이 유효합니다.
(1)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세례 받았습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느끼십니까?”
(2)두 번째 질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아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는 아십니까?”
(3)세 번째는, “그러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인데, 왜 자꾸 우상숭배를 하려고 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안다.”는 표현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당연하게 들립니까? 아니면 생경(生硬)하게 들리십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표현은 신학에서는 보통 “신지식”(Knowledge of God)이라고 부릅니다.
요한 칼빈(Johann Calvin)이 쓴 <기독교강요> 최종판은 4개의 권(Book)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권(Book I)의 제목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하여”입니다. <기독교강요>는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사상들을 설명한 책인데, 초판은 1536년 27세의 나이로 출판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신앙서적이었습니다. 율법, 믿음, 기도, 성례, 거짓 성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여섯 주제로 구분된 소책자였습니다.
1555년에 나온 최종판은 여러 차례 개정하여 아주 두꺼운 신학서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의 큰 주제를 다루는 조직신학 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오늘날 세계 개혁교회들의 신학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 책의 제 2권(Book II)의 제목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하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매우 중요한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그런 질문을 드린 이유는, 우리가 과연 당연히 알아야할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이 갈라디아 4장 8-9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싶은 대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본디 하나님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 하였다.”는 바울의 선언 속에는 이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경고>가 숨어있습니다. 8절과 9절에 “안다”는 단어가 각각 나오는데, 먼저 8절의 “알지 못하다.”는 말의 “안다”(οἶδα)는 눈으로 보고 안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눈이 있다면 보고 안다는 말입니다. 그 눈조차 없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당연히 자기 눈에 “하나님이 아닌 것들” 보고 그 아래서 종노릇 하였다는 것입니다.
9절에 다시 나오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에 사용한 “안다”(γινώσκω)는 “내가 직접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그노시스, Gnosis> 즉, “영적인 지식”이라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경고는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이미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 자격을 갖추었는데,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충분히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위험이 오늘날에도 상존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 것입니다. 미신과 신앙의 차이가 바로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하나님을 보면 미신이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면 신앙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고 다 하나님 뜻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다 하나님 뜻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미신이 자기 생각이 관철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저급한 신앙이라면,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 느끼고, 순종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9절에서 또 주목하여 읽어야할 대목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읽다보면,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신 것과 반반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지금은 하나님을 아는 것 그보다 더욱이(rather) 하나님에 의하여 알려졌다.”입니다. 현대 주석가들은 그래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을 알아서, 더 정확히[말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져서”라고 말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이 과정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쌓아가는 공부가 쌓여서 하나님을 아는데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험 속으로 직접 들어오실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 하나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아무 것도 안하고 기다리는 것은 감나무 아래서 입 벌리고 기다리는 것과 똑같이 무지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갑작스런 체험에만 의지하면, 신비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의 영역에도 줄탁동시(啐啄同時)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기(4:10-11)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다는 말은 헛된 절기 숭배를 경고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앞 절에서 유치한 교훈(스토이케이아)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의미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무의미한 종교적인 형식에 얽매이던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바울의 심정이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오죽하면 자기의 수고가 헛된 것이 될까 염려하겠습니까?
절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대체로 이런 것들이라고 합니다. 안식일, 초하루, 속죄일, 유월절, 초실절 같은 유대교의 절기들입니다. 물론 이방 문화 속에 남아있는 자연숭배 등등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별들의 운행을 관측하고 그에 따른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등장하는 절기들을 경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세계의 법칙에 순종하며 예를 갖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9절에서 이런 유치한 교훈들이 무력(약)하고 천하기(무가치하기)까지 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주장은 “수준 낮은 숭배의식”에서 벗어나서, 이런 절기들조차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인식”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사실 자신의 신앙이 낮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열심이 신앙수준 측정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외모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외적인 면에서조차 수준미달라면 내적인 면은 더 볼 것도 없겠지요.
문제는 외적으로는 열심히 대단한데, 만일 자신의 속마음이 의심과 불신과, 원망과, 서운함으로 시끄럽다면, 그는 신앙으로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누가복음 10장 38절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마르다는 섬기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예수 일행 수 십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분명히 힘든 일입니다. 자기가 자청하여 시작한 일인데, 동생 마리아가 일을 돕지 않고 주님 곁에 딱 붙어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자, 속이 심히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원망합니다.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덧붙여 주님께 명령까지 합니다.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인식> 수준이 어떻게 관여하는지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런 외적 숭배행위를 전면에 내세우면, 억지로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신앙적 강요가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강요하는 사람들과 그런 강요에 못 이겨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마르다과 마리아 사이에 벌어진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섬기는데, 마르다는 손님 대접을 최고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일 마리아마저 대접 준비에 나서면, 예수님은 대화상대를 잃게 됩니다. 반대로 아무도 식사대접 준비를 하지 않고 모두 주님 곁에 둘러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다면, 그들은 나중에 무척 배가 고프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자기 좋은 일을 하되, 강요하지 말고, 서로 원망하지 말고, 기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 인식이 필요하지만, 공동체로 모인 우리들에게도 참다운 하나님 인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셨듯이 서로를 용납해야하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대로 우리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이웃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대목의 제목을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기>라고 정한 것은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속에 만든 우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 우상>이란 나의 옳음이 하나님의 옳음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를 용납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실 틈이 우리 가운데 생겨납니다. 우리가 먼저 판단하고 먼저 결론을 내 버리면, 하나님은 영원히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론을 내고 발설하기 전에 잠시만이라도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말씀하실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2024년 8월 4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