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퀸이란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닌 것 같다. 오늘 하늘은 화창하고 대기는 온화하며 그림자는 4월보다 한층 더 짙었다. 오솔길 옆 풀밭엔 소리쟁이 풀들이 한껏 목청을 돋웠고, 군데군데 엉겅퀴가 자그마한 연보라 꽃 뭉치들을 올렸고, 노란 씀바귀 꽃들이 무리지어 하늘거렸으며, 그 곁에 노랗고 여릿여릿한 애기똥풀 꽃들도 해맑았다. 그들이 내가 오늘 산책길에서 눈으로 보고 새삼스럽게 그 이름을 기억한 꽃들이다. 물론 이 철에 하얀 찔레꽃이 무더기져 피어 있었고, 양지 바른 울타리에 올라앉은 덩굴장미가 모두들 고개를 길거리 쪽으로 내밀고 구경 중에 최고라는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아마 50대 중후반 무렵—이른바 갱년기와 겹치는 시기—부터 스마트폰 앨범에 꽃 사진을 소장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꽃밭 속에 푹 침입하여 찍은 사진이나 혹은 꽃무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자신의 스마트폰 프로필 사진으로 띄우기도 한다. 그 시기에 꽃이라는 식물의 생식기관이 그처럼 우리의 눈에 새삼 매혹적으로 보이는 원인이 뭘까? 자신의 생명력이 쇠하고 아름다움이 시들어가는 데 대한 심리적 보상 반응일까? 어쨌든 인생의 그 특정한 시기에 꽃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새로운 열정을 띄게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풀이나 꽃의 이름을 공부하여 알아내고 그것들을 기억하느라, 둔해져가는 머리를 무리해서 사용한다. 나를 포함하여 내 친구들 중 몇몇은 꽃 이름을 많이 아는 데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며, 그걸 자랑거리로 삼기도 한다. 그래서 각종 꽃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가며 늙발에 열심히 공부하기도 하고, 꽃 이름을 알려주는 앱을 설치하여 그 실력을 뽐내기도 한다. 하기야 우리가 꽃 이름을 알아내려 애쓰는 이유는 상당히 고상한 차원의 인지적 호기심 때문인가 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구가 그걸 말해준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연애시로 읽히든 모던한 실존주의 시로 읽히든 우리는 꽃의 이름을 알아내어 마음속으로 불러주고, 그 앞이나 옆에서 사진을 찍거나 꽃송이 자체만을 사진 찍어 간직함으로써 그 꽃을 내 소유로 만든다. 그렇게 하면 그 꽃과 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생겨나는 걸까? 서너 살 먹은 어린아이에게는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대상이 새롭고 신기한 것이겠지만, 그 아이에게도 꽃은 특별히 흥미로운 시각적 자극인 것 같다. 어떤 시각적 자극에 대한 어린아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그것에 손을 갖다 대본다. 그래서 아기는 꽃을 보면 손을 내밀어 그걸 가만히 만져본다.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는 꽃의 이름을 알 리 없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그에게 사랑이니 영광이니 행운이니 우정이니 하는 따위의 꽃말에 대한 개념이 있을 리 없다. 그 아이에게는 꽃이 아마도 특별한 방식으로 기분을 좋게 하는 시각적 자극일 뿐이다. 꽃이 주는 감각적 자극에 대한 어른의 반응은 아이의 일차적이고 반사적인 반응과 사뭇 다르다. 어른들은 꽃 이름을 알아내려 하며 나아가서 꽃말도 알고 싶고, 꽃에 코끝을 가져가 향기도 맡고 싶으며, 그걸 꺾어 누군가에게 갖다 바치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사진이라도 찍어 휴대폰의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화초를 어떻게든 자기 집 마당 한구석 화단에, 멋지게 가꿔진 정원에 심고 키워서 자기만의 꽃을 피워 그걸 개인적으로 바라보며 감동하고 싶다. 사정상 그렇지 못하면 그 화초를 화분에라도 심어 거실에 창턱이나 책상 맡에 두고 시시때때로 바라보며 시각적으로, 정서적으로, 물질적으로 그 식물의 잎과 줄기와 뿌리의 발육, 그리고 그 결정체인 꽃을 소유하고 싶다. 아니 전유하고 싶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들꽃들과 개인이 소유한 정원의 꽃들에 대한 미적·정서적·시각적 가치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즐거움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자기 집 거실 창틀에 피운 꽃이든 자기 집 정원의 꽃이든 아파트 단지라는 공동 정원의 꽃이든 도시 공원의 꽃이든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 우리는 그 각각의 경우에 대해 각기 다른 심리적 반응을 보인다. 특정 식물과 나 사이에 다분히 개인적인 정서적 관계를 형성하여 나만의 식물을 가꾸고 싶고 나만의 꽃을 피우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집 마당에 우리 화단이나 정원을 가꾸고 나의 방 안에 나만의 화분을 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화초나 꽃을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차원의 만족을 넘어서 그것들을 심고 돌보고 가꾸고 아끼고 소유하며 그것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애틋한 경험을 얻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자기 집 정원의 화초나 화분의 식물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다. 기르는 화초가 비실비실해지고 말라가거나 시드는 기미가 보이면, 또는 병충해가 끼어 시달리면 걱정이 들고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그게 원기를 회복하도록 간절히 바라며 물도 조절해서 주고, 영양제도 놓아주고, 해충 구제 약도 뿌려주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해주고, 적절한 햇빛을 받도록 위치도 신경을 써줘 가며 세심하게 애를 쓴다. 우리는 이처럼 일부 자연 생명체를 인공의 가장 깊숙한 내부까지 끌어들여 내 곁에 두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공원의 화단이나 아파트 단지 내 식물들이나 꽃들은 제아무리 잘 가꾸어져 있어도 나는 그것들에 대해 그처럼 애틋한 감정을 가질 수 없다. 그것들은 남의 꽃이다. 유럽의 집들은 화분을 창 바깥쪽 창턱에 놓아두어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집들은 거실이나 베란다 안쪽에 두어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여 우리 식구들만, 나만 바라보는데 만족하는 것 같다.
나는 직장생활 할 때 연구실 창가에서 해피트리(행복나무) 화분을 욕심껏 가꾸어 그 꽃을 풍성하게 피워본 적이 있고, 산세베리아 화분도 싱싱하게 길러서 그 꽃의 향기에 취해본 적도 있으며, 여러 가지 재스민 꽃도 피워 그 색깔들에 매혹되어 본 적도 있고, 화분에 봉숭아 씨앗을 뿌려 봉선화도 꽤 흐드러지게 피워본 적도 있으며, 여러 가지 품종의 사랑초도 창턱에 즐비하게 가꾸어 여름 내내 피고 지는 그 다양한 꽃들의 모양과 색깔을 바라보며 흐뭇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는 동료 교수들이 내 연구실을 ‘정글’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 지금 내가 사는 우리 집(아파트)에는 풀 한 포기 화초 한 그루 없다. 대신에 오늘 산책길에 군데군데 하얀 찔레꽃 무더기와 만났고, 고개 갸웃거리는 덩굴장미꽃들과 하이파이브 했으며, 풀밭에서 방싯거리는 클로버 시계꽃들에게도 아는 체했고, 엉겅퀴꽃이랑 씀바귀꽃들과도 눈인사 했다. 난 그걸로 만족이다.
첫댓글 황금손이십니다. 흡족할만하실 실력이시네요~
‘식집사’가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닐 텐데요? ^^
핸드폰의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