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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이었던 지난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아침, 우리나라 제16대 대통령(2003.2.25.~2008.2.24.)을 지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국을 강타했다. 아직도 60대 초반의 한창 젊은 전직 대통령이 어떻게 갑작스럽게 가실 수 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해 서민들과 가깝게 어울려 생활하는 모습이 언론에 가끔 알려졌으며, 또 재임 중에 가족이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과 관련해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생가와 가까운 봉화산의 부엉이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니 믿기질 않았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아온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이 세상과 이별하였다.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에서 근무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을 필두로 재임 중 해외순방과 국빈 방한행사, 국경일 경축식, 국무회의 등의 주요한 행사나 회의 실무자로서 노 대통령의 국정을 말직에서나마 보필했던 필자로서는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는 2009년 5월 29일 오전 11시 경복궁 내 광장에서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되고, 귀향길에 경기도 수원의 「연화장」에서 화장을 하였다. 그 뒤 유해는 고향 마을 옆 봉화산 산속에 자리 잡은 사찰 「정토원(淨土苑)」에 모셨다가 49재(齋)를 치른 뒤 생가 옆 공터에 조성된 고인돌 형태의 묘소에 안장되었다.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을 거행하기까지 행정안전부의 실무책임자로서 봉하마을에 파견돼 현장 지원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전부터 노무현 대통령과는 작으나마 인연을 갖고 있었다. 행정안전부 의정담당관실 서기관 때인 2003년 2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추진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바 있고, 2007년 2월에 의정담당관에 임용돼 노무현 대통령 퇴임 때까지 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해외순방과 국빈방한 환영식, 국경일 경축행사, 그리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방문 때 DMZ 내에서의 열린 환송 ․ 영식 등 국가적 행사의 준비를 도맡아 일한 적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 운영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어 중앙부처의 어느 부서의 과장보다도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기회가 많았다. 청와대 국무회의에서는 간사인 의정관을 대신해 의정담당관인 필자가 몇 차례 사회를 맡아 본 적도 있다. 긴장된 속에 대통령 입장을 국무위원들에게 알리고, 국민의례를 마친 후 착석하기까지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헌법상 최고 국정 심의기구인 국무회의인 만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또 국무회의 진행 중에는 늘 의장인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도 신경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 이번에 국민장 장례식까지 그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장례식에 참여하게 된 계기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을 비롯해 사회 일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은 검찰을 통해 심리적 압박을 가해온 이명박 대통령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세간의 의견이 분분했다. 말하자면 노 대통령의 자살 사건이 사회의 큰 이슈로 떠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빈소가 차려진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조문객들로 장사진을 이룰 정도로 넘쳐났다.
온 국민은 물론 언론매체들의 눈이 김해의 작은 마을인 봉하마을에 쏠리고 있었다. 봉하마을이 뉴스의 진원지가 돼 TV와 신문의 뉴스 화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 거행과 그에 따른 엄청난 사회적 파장에 대해 대응해야 하는 책임을 맡은 행정안전부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서거 이튿날인 2008년 5월 24일(일) 14시30분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고인의 장례를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키로 결정하였다. 이에 필자는 행정안전부 비상대비정책과장이라는 다른 직책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직 의정담당관의 경력을 살려 현장 실무책임자로 나가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날 오후 늦게 김해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도착부터 봉하마을까지
마침 서거한 5월 23일은 필자가 온천으로 유명한 경남 창녕 부곡에서 열린 고교 동창회에 참석해 1박 후 오전에 산행을 하는 것으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그런데 국가 의전 업무에 오래 근무하면서 체득한 느낌이 좀 달라서인지 이튿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그 후의 일정을 포기한 채 귀경을 서둘렀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도중에 행정안전부 박수영(朴洙瑩, 후에 경기도 행정부지사. 현 21대 국회의원) 인사기획관으로부터 국민장 준비를 위해 김해 봉하마을로 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마도 필자가 그 전에 의정담당관을 지내 큰 행사를 치른 경험이 많아 현지에서 국민장을 준비하는 적임자로 보였던가 보다.
동창회가 열린 그 날 저녁에는 부산과 창원에서 경찰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고교 동창 몇 명이 경찰비상령으로 인해 불참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요 사태’임을 직감했었다. 필자는 서울역에 내려 바로 정부중앙청사의 행정안전부에 들러 여러 진행 상황을 체크한 다음 아내가 집에서 가져다준 내의와 세면도구가 든 가방을 건네받아 다시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현장 실무책임자로서 기내에서 국민장 영결식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현지의 숙련된 행사인력이 부족하고, 행사에 필요한 제반 시설이나 물자를 확보하는 데도 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당초에는 봉하마을과 가까운 진영종합운동장에서 영결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잠정 계획했기 때문이다. 즉, 발인(봉하마을 빈소) → 영결식장(진영공설운동장) → 화장장 → 장지(국립현충원)로 이어지는 일련의 장례 절차를 예상하고 이에 따른 세부 사항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장례를 준비하는 도중에 상황이 달라져 서울 경복궁 광장(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내 넓은 공터)에서 거행하는 것으로 장례계획이 바뀌어, 발인(봉하마을 빈소) → 영결식장(서울 경복궁 광장) → 노제(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 화장장(수원 연화장) → 유골 안치(김해 봉화산 정토원) 순으로 진행되었다.
김해공항에 내려 마중 나온 김해시청 직원으로부터 현장 설명을 들으며 김해시에서 제공한 승용차를 타고 봉하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도중에 조문객들이 타고 온 차량들이 약 6㎞ 앞부터 도로가에 일렬로 주차된 상황을 보고는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하고 느꼈다. 이어 봉하마을 가까이에서 길게 줄을 지어 서 있는 조문 행렬을 보고는 재차 심각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봉하마을 한 켠에는 김해시가 제공해 준 컨테이너박스에는 pc, fax 등 사무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또 행정안전부의 박노익(후에 새만금개발청 운영지원과장), 김호규(후에 인사혁신처 서기관) 사무관 등이 장례지원차 파견 나와 있었다. 이들로부터 현지 상황 설명을 듣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의 대응 방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 봉하마을 입구에 분향을 위해 줄지어 선 조문 행렬
유족 측과의 상견례 후 장례식 협의
이튿날인 5월 24일(일) 10시30분에 봉하마을에서 일하는 유족 측의 준비위원들과 상견례를 겸하여 국민장 장례계획에 관해 실무적인 논의를 했다. 상견례에 나온 유족 측의 준비위원이라 해도 불과 3개월 전까지는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이 봉하마을에 노무현 정부에서 함께 일한 이해찬,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장 ․ 차관들의 모습도 가끔 보였다.
필자가 행정안전부 의정담당관으로 있으면서 국무회의와 각종 국가행사 등의 업무를 수행할 때 대통령비서실과 접촉이 많은 편이라 대부분 얼굴이 익은 사람들이었다. 한때 같은 배를 타던 동지적 입장에 있었으나 이제는 필자가 정부 측 대리인으로 참석한 것이므로 유족 측과는 입장이 달라졌다.
따라서 국민장을 주관하는 행정안전부를 대표하여 봉하마을에 내려온 만큼 유족 측과는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은 중재하고, 또 해결이 어려운 문제는 서울의 행정안전부 본부에 전달해 의견을 물은 뒤 다시 유족 측에 통보하는 방식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족장이 아니라 정부가 주관하는 국민장인 만큼 회계처리절차에 대하여도 협조를 구했다. 그날부터 국민장 준비에 소요되거나 빈소와 분향소의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 영수증은 매일 한곳에 모아 필자에게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야 예비비로 행사 경비를 정산할 할 때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족측 준비위원들 대부분이 청와대에 근무한 적이 있어 국가회계제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던 터라 흔쾌히 동의했다. 아울러 필자는 전직 대통령의 국민장이라는 점을 고려해 행정안전부에는 회계담당자를, 국가기록원에는 기록관리 담당자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날 회계 분야는 행정안전부 운영지원과에서, 기록 분야는 국가기록원에서 담당 직원들이 파견 나와 각기 소관 업무를 챙기기 시작했다.
또 이날 오후에는 국민장의 중요성을 감안해 당시 조윤명(趙潤明) 행정안전부 인사실장이 현장 책임자로 지정돼 몇 명의 직원을 대동하여 파견을 나왔다. 조윤명 실장은 얼마 전까지 경상남도 행정부지사를 역임한 터라 누구보다도 지역 실정에 밝다는 이유로 선임되었다. 이제 필자는 조윤명 실장을 도와 장례식 준비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아침 상주 측과 정례 협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초에 진영공설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한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필자는 현지로 내려왔었다. 그러나 그 후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의 서거가 노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기인하였고, 이같은 비극적 상황은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서거 책임론’이 비등하였다. 또 일반 서민들의 편에 서서 정치를 해왔던 노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이 만만치 않아 이에 따른 사회적 파장이 의외로 커져만 갔다.
이에 따라 유족 측에서 보다 많은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서울광장에서 노제(路祭)를 거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영결식을 서울에서 거행하는 방안을 정부에 요청했다. 이렇게 되면 새벽에 봉하마을의 빈소에서 발인 후 서울로 이동해 영결식과 노제를 마치고 다시 봉하마을로 귀향하는 일련의 장례 절차도 복잡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도 이 요청안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영결식 준비는 서울의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에서 담당하게 되고, 봉하마을에 머물고 있는 필자는 빈소를 지키며 상황관리를 유족 측과 서울의 행정안전부 간의 메신저 역할이 계속되었다.
봉하에 머물며 유족 측과 장례식 진행
유족 측과의 면담에서 처리한 몇 가지 사안을 들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국민장 장의위원회(후에 ‘장례위원회’로 바뀌었다.) 구성 문제였다. 이 중요한 장의위원회 구성에 대하여 유족 측에서는 정부 측과 유족 측을 대표하는 장의위원장과 장례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인 집행위원장을 공동으로 하자고 강력히 제의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유족 측에 그간의 국민장 선례는 장의위원장과 집행위원장이 1인 체제로 운영해 왔음을 설명하고, 「국장 ․ 국민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후에 「국가장법 시행령」으로 바뀜) 의 관련 규정에 따라 집행위원장은 행정안전부장관으로 지정돼 있어 공동 집행위원장은 제도상 불가능하다며 선을 그었다. 공동 장의위원장에 관해서는 명문 규정이 없으므로 정치적 판단이 요구되는 사안이라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에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결국 장의위원장은 현직인 한승수(韓昇洙) 국무총리와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의 한명숙(韓明淑) 전 국무총리가 공동 장의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장의집행위원장은 법령에 따라 이달곤(李達坤, 현 21대 국회의원) 행정안전부장관 단독으로 하여 언론에 국민장 계획을 공고하였다. 장의위원은 행정 ․ 입법 ․ 사법부의 전 ․ 현직 고위인사, 학계, 종교계 등 각계 대표와 유족 측이 요청한 고인의 친인척과 지인 111명을 합해 모두 1,383명에 달했다. 유례가 없는 대규모 인원이었다. 고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680명과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이처럼 장의위원의 규모가 커지자 그 명단을 개별적으로 일일이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느라 장례 전날에야 일간지에 국민장 장례를 공고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국민장은 기존의 선례에서 다소 벗어난 장례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장의위원장이 기존의 정부 쪽에서 맡아오던 관례를 깨고 유족 측을 대표하는 위원장 1명이 추가돼 ‘공동위원장’체제가 운영되었고, 또 그에 더하여 법령상 장의를 총괄하는 「집행위원회」(위원장 행정안전부장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옥상옥이라 할 수 있는 「운영위원회」(위원장 당시 문재인文在寅 전 대통령비서실장)란 이름의 특이한 위원회가 추가로 만들어진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두 번째로 국민장 영결식 진행 절차였다. 이 영결식에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의 추도사(追悼辭)를 식순에 포함해 달라고 요청했다. 직전 대통령이며 ‘정치적 동지’라는 점을 감안해 유족 측에서 식순에 포함될 수 있기를 희망해 왔다.
이에 필자는 그간의 국민장 영결식 선례가 없으며, 전직 대통령이 여러 명 생존해 계시는데 그 가운데 특정인만 선택적으로 하는 것은 맞지 않을뿐더러 국민장은 엄숙하고 간결해야 하므로 핵심적인 절차만 포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 또한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라 정부에서 판단할 문제라며 양해를 구했다. 결국 선례가 없다는 이유 등을 들어 정부가 반대해 김 대통령의 추도사는 성사되지 않았다.
세 번째로 종교의식에 원불교를 포함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그 이전까지의 국장과 국민장에서는 국내 3대 종교인 불교, 천주교, 기독교가 참여해 온 것이 관행이었다. 종교집전 순서는 국내에 들어온 시기를 그 기준으로 하되, 고인의 신앙이 따로 있다면 그 종교를 앞 순서로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국내 네 번째로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는 원불교에 대해 정부도 동의했다. 이 원불교의 종교의식은 그로부터 3개월 뒤에 거행된 김대중 대통령의 국장 영결식에도 마찬가지로 이뤄졌다.
이밖에도 필자는 유족 측과 정부 간의 가교역을 맡아 봉하마을의 현지 분위기를 전달하고, 장례식 준비에 따른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했다.
봉하 현장의 막전 막후
▷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장 준비는 경호경비가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따라서 봉하마을에 파견 나와 있던 경호요원들과도 수시로 접촉해 국민장 경호와 관련된 정보를 교환하고, 경호관련 대책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필자는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에서 오래 근무한 탓에 대통령 경호실 직원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사고 지역’인 부엉이바위와 생가 부근까지는 출입을 통제해 출입이 불가능했으나 경호본부(CP)에서 경호경비관련 회의가 있을 때는 예외적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이 경호 CP에서는 부엉이바위가 바로 눈앞에 전개돼 있어서 가끔 그 바위 쪽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 봉하마을의 빈소는 서거 당일 오후에 마을회관에 차려졌고, 마을회관 앞 광장에 마련된 대형 분향소는 그다음 날부터 일반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처음에는 몇 줄로 분향하다가 대기자가 장사진을 이루자 하는 수 없이 10명이 한 줄로 서서 단체로 분향하였다. 이들은 부산, 경남 등 가까운 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도 등 먼 지역에서도 참석한 것으로 보였다. 영결식이 치러진 5월 29일 저녁까지 100만 명 이상이 조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봉하마을 광장의 분향소에 단체로 분향하는 모습
정부에서 세운 공식 분향소는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해 102개소에 마련되었으며, 이외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분향소도 서울시청 가까운 대한문 앞을 비롯해 전국 150개소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만큼 고인의 갑작스러운 서거가 국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 당시 봉하마을에서는 조문을 위해 찾아온 조문객들을 대상으로 검문을 실시했다. 특히 ‘서거 책임이 집권 정부 여당에 있다며 분노한’젊은 청년대원들이 마을 입구에서 일일이 승용차의 문을 열게 해 신분을 확인하는 등 삼엄하게 검문했다. 이로 인해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의 전 ․ 현직 대표와 현직 국회의장 등 여권 정치인들과 한승수(韓昇洙) 국무총리 등 정부 측 인사들이 조문하기 위해 봉하마을 입구까지 왔다가 조문을 포기한 채 발길을 돌린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현장을 계속해 지킬 수 없었던 입장이라 이 소식을 듣고서 대한민국 속에서 ‘치외법권 지역이 따로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정도로 한때 봉하마을은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특수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다.
심지어 국민장 장의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을 맡은 이달곤(李達坤) 행정안전부 장관조차도 현지 경찰의 도움을 받아 겨우 봉하마을에 도착해 빈소에 분향한 뒤 유족 측과 장례 절차를 협의할 정도였다. 무슨 군사작전을 펼치듯 제3의 통로를 이용한 것이다. 그만큼 정부 여당 인사들의 출입을 강력히 제지하였다.
▷ 5월인데도 당시 날씨가 매우 더웠다. 봉하마을에 도착한 후 무더위 속에 김해시가 긴급 설치해 준 컨테이너박스 속에서 선풍기에 의지해 땀 흘리며 행정안전부에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잠자리도 불편했다. 빈소와 분향소 관리를 맡은 장례업체 연화회(대표 유재철) 직원들과 함께 봉하마을 어느 주민의 집에서 방을 제공해줘 며칠간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 유족 측이 대형 분향소 옆에서 시골의 5일장처럼 조문객들을 위해 쇠고기와 무, 콩나물이 들어간 장터국밥을 제공했다. 더운 날씨에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던 조문객들을 저잣거리 장터처럼 공터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의자를 배치해 식사를 하게 한 것이다. 국밥이 모자랄 때는 빵과 우유를 간식으로 대접하기도 했는데, 김해지역의 여러 대형 가게를 그야말로 ‘싹쓸이’를 했다고 한다. 어떤 날은 그것도 부족해 부산과 창원에까지 원정을 나가 구입해 오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돌아가신 노 대통령이 고향의 경제에도 크게 도움을 주시는구나!”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당시 영결식 등의 기본 경비 외에 조문객의 식대, 간식 및 음료접대, 분향소 및 헌화용 조화(弔花) 등의 경비가 엄청나게 늘어나 사후에 경비를 정산할 때 논란이 일었다. 정부는 국고에서 장례지원비로 29억5천만원을 지불하였는데, 다른 국장이나 국민장에 비해 경비가 크게 늘어난 액수였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2011년도에 종전의 ‘국장’과 ‘국민장’을 하나로 통합하는 「국가장(國家葬) 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빈소 및 운구행렬, 영결식, 안장식 등 장례식 본연에 소요되는 경비는 국고(國庫)에서 부담하되, 그 외의 부수적인 조문객의 식사 비용과 노제(路祭) ․ 삼우제(三虞祭) ․ 49재(齋) 그리고 국립묘지가 아닌 묘지 설치를 위한 토지 구입 및 조성 비용은 국고에서 지출할 수 없도록 법제화하였다.
▷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산책을 겸해서 조문 행렬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인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우연히 한 줄로 길게 서 있는 행렬 가운데 부산에 거주하는 누님의 아들, 즉 생질이 눈에 띄었다. 그 자리에서 조문을 온 이유가 뭔지, 입구의 교통상황이 어떤지 등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역시 부산에 거주하는 둘째 형님도 발인 전날 조문 차량에 밀려 새벽녘에야 분향을 마치고 돌아갔다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현장에서 피곤해 잠자고 있을 동생(필자)을 깨울까 염려가 돼 전화를 하지 않은 채 귀가했단다. 사실은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데도 말이다.
친노무현 성향인 젊은 생질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수성향인 필자의 형님까지도 조문을 온 데 대해 궁금증이 더해졌다. 조문을 오게 된 이유가 뭔지? 이 의문을 풀어보고자 여러 조문객들과도 대화를 나눠 보았다. 대부분 생전의 친서민적 생각과 행동에 앞장섰던 전직 대통령의 자살에 따른 동정심에다 서거 장소인 부엉이바위를 현장에서 보고 싶어서, 또 조문객이 엄청 많다고 하니까 이참에 나도 한번 가봐야겠다는 마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돼 오게 되었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다.
▷ 봉하마을에서는 일반 조문객들은 마을회관 앞 광장에 설치된 대형 분향소에서, 친인척이나 노무현 정부에 함께 일했던 사람 등 제한된 일부 인사들만 빈소에서 조문하고 있었다.
발인 전날 저녁에 빈소를 관리하고 있는 측에서 전화가 왔다. 권양숙 여사께서 봉하마을에 와서 장례준비를 위해 수고하시는 국가기관 근무자들에게 직접 빈소에 분향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당부가 있으니 빈소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마지막 분향이라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다음 빈소로 향했다. 장례지원 차 나와 있던 행정안전부, 경남도청과 경남경찰청, 김해시청과 경찰서 등 20명 정도가 모였다. 빈소를 향해 두 줄로 조문 대열이 갖추어지자 다른 참석자들의 등에 밀려 엉겁결에 필자가 대표로 고인의 영정 앞에 나아가 술 한 잔 올리고 향을 사르는,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귀한 기회를 가졌다.
고인돌 형태의 묘소에 납골당 형태로 안장돼
5월 29일 5시경 봉하마을 빈소에서 유가족 등이 참여한 가운데 발인 후 봉하마을을 한 바퀴 돈 뒤 운구행렬은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5시간을 달려 서울 경복궁 광장에 도착한 후 장의위원장, 유족, 전 ․ 현직 대통령, 각계 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11시에 국민장 영결식이 시작되었다.
이 영결식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 등 장의위원, 유가족, 각계 인사 등 2,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식선언, 국기에 대한 경례, 고인에 대한 묵념, 고인의 약력보고(이달곤 장의집행위원장), 공동 장의위원장인 한승수 국무총리와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조사(弔辭), 불교-기독교-천주교-원불교 순의 종교의식, 추모 영상 시청, 헌화 순으로 진행되었다.
▲ 경복궁 광장에서 거행된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 모습
영결식을 마친 후 서울시청 앞을 거쳐 고향으로 향하는 고인의 운구행렬을 보기 위해 연도에 수많은 국민들이 몰려나왔다. 엄청난 조문 인파들이 운집한 가운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노제(路祭)’를 치른 뒤 경기도 수원시 소재 ‘연화장’에서 화장되었다.
▲ 엄청난 인파가 몰린 가운데 거행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울광장 노제
▲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울광장 운구행렬
화장 후 수습된 유골은 고향인 김해의 생가 인근 봉화산 내에 있는 사찰 「정토원」에서 49재(齋)가 끝날 때까지 안치되었다. 한때 국립묘지 안장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기도 하였으나 고인의 “작은 비석을 세워 달라.”고 한 유언에 따라 아주 특이한, ‘고인돌 형태의 묘소에 납골당 형태’로 안장되었다.
마지막으로 고인이 남긴 유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끝부분의 말이 이후 오랫동안 필자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의 운명입니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습니까.”
▲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의 고 노무현 대통령 묘소. 끝
- 출처 : 정현규의 의전노트, 제주에서 DMZ까지'(정현규 저, 도서출판 예중, ebok,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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