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장애인 / 시 16:1-11, 요 9:1-12
오늘은 4.19기념주일이며 장애인 주일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장애인선교위원회는 1990년부터 장애인의 날인 4월 20일 전후주일을 매년 장애인주일로 지켜오면서 각 교단과 개교회로의 확산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래서 올해는 각 교단이 4월 21일을 장애인주일로 지키기로 했다. 우리교회도 오늘 장애인주일을 지키면서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겠다. 먼저 장애인주일은 올해로 7번째이지만 정부에서 제정한 날을 보면 올해로 16번째가 된다. 그래서 설교에 앞서서 제16회 장애인의 날에 즈음하여 정부와 교회에 보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96년도 장애인의날 선언문을 읽드리겠다.
이 땅에는 400만명이 넘는 장애인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을 하다 다쳐서, 교통사고로, 각종 질병으로, 약물오남용과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태어날 때부터 기형아로 그리고 가정내 사고 등으로 인해 우리사회는 매년 수십만명의 장애인을 양산해 내고 있습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열명중에 한명은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는데 우리 주위에는 장애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에서조차 장애인을 쉽게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사회는 몸이 불편하 이들과 함께 살고자하는 자세와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휠체어에 의지해서는 문밖으로 한발짝도 나올 수 없습니다. 설령 누구의 도움으로 밖으로 나온다고 할지라도 교통을 이용하거나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거나 관공서를 이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복잡한 도시에서 맹인은 흰지팡이에만 의지해서 살아가기에는 순간순간 생명에 위협을 느낍니다. 잘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 일반인들과 섞여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정신지체인이나 정신에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혼자의 횜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말로는 장애인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 함께 살고자 할 때에는 마치 전쟁에서 적군을 만난 것처럼 행동하는 이중적인 인식과 태도입니다. 물리적 환경이 문제가 있을지라도 장애인과 함께사는 것이 하나도 문제가 없는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면 언젠가는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이러한 물적인 환경보다도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더욱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장애를 입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 않습니까? 이러한 예수의 사상을 실현해야 할 우리교회마저 장애인이 오는 것을 막는 많은 장벽이 있습니다. 계단이 가로막고 있고, 설교를 들을 수 없고, 찬송가를 볼 수 없는 등 공동예배에 참여할 기회가 적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환경과 함께 장애를 입은 사람이 비장애인 신도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 열명중에 한명의 신도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루종일 집에만 있거나 수용시설에 모여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이 이 땅에는 적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사회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이들을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다음과 같은 차별은 없어져야 합니다.
장애인의 권리회복을 위하여 정부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1. 모든 건물과 정보와 대중교통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접근권이 보장된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합니다.
2. 교육받을 기회가 똑같이 주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실질적인 의무교육이 실현될 수있도록 하기 위한 교육환경 개선이 시급합니다.
3. 독립해서 살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최저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무각출 연금제가 장애인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4. 일할 수 있는 장애인에게는 직업을 가질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만들어진 장애인고용촉진법에 관한 법률을 제대로 시행하여야 합니다.
장애인의 권리회복을 위하여 교회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해야 합니다.
1. 교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한 형제, 자매임을 고백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삶의 각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2.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마련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은 잘 안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경사로, 점자블럭, 자동문, 장애인전용 화장실, 음향신호기 등을 설치해야 합니다.
3. 교회내에 장애인 관련위원회나 부서를 설치해야 합니다. 장애인선교가 특수교회의 일만은 아닙니다. 모든 교회내에 장애인복지위원회 등을 설치하여 지역의 장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지원해야 합니다.
4.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기초과정으로서 교회학교 교육에 있어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교육과 통합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5. 장애인 교역자들도 평등하게 주님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안수와 청빙문제 등에 있어 선교적 우대와 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1996년 4월 21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요즘 사회복지에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다. 원불교, 천주교, 성공회, 통합은 일찍부터 시작하였지만, 이제 기장은 시작단계이다. 국어학자이며 보수측 크리스천 교수는 한국교회 성장은 끝났고, 이제 감소추세이다. 교회가 성장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사회에 눈을 돌리는 교회라고 말했다. 기장은 민주화운동에 앞장 서서 얼마만큼의 성과가 있었는데, 이제는 사회복지쪽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본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복지상황과 장애인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고통의 감수성은 공동체의 기초이다.
현대기술문명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까닭은 현대문명에서 자연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인간의 공동체적 관계가 상실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기술문명의 위기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의 상실에서 왔다. 현대기술문명은 쾌락과 편리함을 추구한다. 현대인은 고통을 견디는 힘을 잃었고 고통에 대한 현대인의 감각은 마비되었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건강한 삶의 척도이다. 신경이 손상되거나 나병과 같은 몸쓸 병에 걸리 사람은 고통을 느낄 수 없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와 문명의 건강도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비추어 평가할 수 있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그 사회, 그 문명의 공동체적 기초이다. 남의 아픔을 헤아릴 수 없는 사회는 공동체적 기초를 상실한 사회이다.
오늘 한국사회와 교회도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가고 있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잃고 있다는 뚜력한 표징은 장애인에 대한 무관심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세계인류 가운데 1/10이 장애인이라고 한다. 장애인은 우리 주위 어디나 있다. 또한 지금 건강한 사람도 사고나 질병을 통해 장애인이 될 위험 속에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너무 많다. 장애인들이 사는 곳은 집값이 떨어진다고 할만큼 장애인은 외면당하고 멸시당한다. 주택가에는 장애인 시설이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장애인은 배척당하다. 이 땅에서 장애인은 이중으로 고통을 당한다. 이 나라에서 장애인은 사회적으로 생존하기 어렵다. 장애인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고 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과 편의시설도 거의 없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 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거의 없다. 있다 해도 제대로 운용되지 않는다. 길은 울퉁불퉁해서 장애인이 휠체어는 타고 다닐 수 없다. 이처럼 물질적 조건, 사회적 조건이 장애인의 생존을 어렵게 한다. 더 나아가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배척이 장애인의 삶을 가로막고 있다. 장애인은 외면당하고 배척당한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장애인을 멸시하고 배척하나? 어쩌면 좁은 땅에서 같은 인종끼리 작은 마을에서 오래 살다보니 다른 형태,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포용하는 마음이 닦여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한 유교의 가부장문화와 군사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유교의 가부장문화는 어른, 남성, 높은 사람 다시 말해 강자 위주의 생활태도를 형성했다. 유교는 어른, 남성, 높은 관리 중심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주입했다. 더 나아가 일제의 군국주의적 지배와 6.25전쟁을 거쳐 30년 군사독재에 이르기까지 군사문화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함으로써 한국인은 철저히 강자위주의 사고에 길들여졌다. 군대는 철저히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지는 집단이므로 강자위주의 사고를 강요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지난 30여년 동안 급격히 진행된 자분주의적 산업화는 이기적 생존경쟁을 부추겨갔다. 약자를 짓밟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약자이고 소수자인 장애인은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사회가 되었다. 국민소득이 1만불을 넘었다지만 복지수준과 정신문화수준은 후진국수준에 머물러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볼 때 강자위주로 생각하고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마음은 죄로 물든 마음이고 병든 마음이다. 오늘날 정부가 말하는 한국병의 근원은 여기서 찾아야 하다. 강자에게 아첨하고 뇌물바치고 약자를 무시하고 짓밟는 마음이 부정과 부패, 무사안일과 나태의 근원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언저나 낮은 자와 약자를 편애하는 하나님이다.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낮고 힘없는 자의 편에 서실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히 작고 힘없는 자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선언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다.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보다 엽전 두푼을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를 더 높이 평가한 예수, 당당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바리새파의 기도보다 자기 가슴을 치는 세리를 높인 예수는 철저히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사신 분이었다. 마지막 심판 때 그리스도는 힘없는 자, 헐벗은 자, 굶주린 자와 동일시된다. 약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한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고, 이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그리스도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힘없고 상처받은 사람들과 하나된 예수의 마음과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드러냈다.
2. 장애인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야 한다.
성서의 하나님은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장애인 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만을 보는게 아니라 그의 속에서 또는 그의 뒤에서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함께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장애인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시험하는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장애인은 힘없고 가난하며 무시당하고 상처받는 인간이므로 장애인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성숙을 헤아리는 잣대가 될 수 있다. 본문의 말씀에 장애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예수와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을 만났다. 제자들은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장애인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는 당시 유대교인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당시 유대교는 질벙을 죄탓으로 돌렸다. 이런 태도에는 몇가지 잘못된 생각이 들어 있다.
첫째, 제자들은 인과응보적 하나님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나님, 해방하고 살려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와 허물을 가차없이 처벌하는 율법주의적 하나님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새로운 미래의 하나님이 아니라 과거에 매인 하나님이었다.
둘째, 제자들은 장애인의 삶을 운명론적으로 이해했다. 장애를 부모의 죄나 장애인 자신의 죄로 돌리는 한 장애인은 자신의 장애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할 수밖에 없다. 장애를 수치스럽고 욕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장애인은 수치스러운 존재, 저주받은 존재로 멸시하고 배척하게 된다.
셋째, 제자들은 개인주의적, 방관자적 관점에서 장애인을 보았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고 나는 나라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방관자적 입장에서 장애인을 보고 평가했다. 하나님 앞에서 장애인이 나와 더불어 살아야할 이웃이라는 공동체적 안목이 없었다.
예수는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장애인을 보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는 율법주의적 하나님 신앙을 거부하고 운명론적 관점도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방관자적 태도도 부정한다. 예수는 장애인의 삶을 하나님과 직결시킨다. 예수는 여기서 매우 놀라운 선언을 한다. 장애인의 장애는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장애인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존재라는 말이다.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장애인을 평가할 수 없다. 장애인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드러내기 위하여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능력이 장애인에게서 드러나야 한다. 예수는 장애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예수는 장애인을 장애의 상태에 체념적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장애로부터 해방하여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일으켜 세웠다. 예수는 장애인을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세웠다. 예수가 장애인의 삶에 개입함으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3. 장애인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다.
지난 1985년 무렵부터 한국교회의 성장은 현저히 둔화되거나 정지되고 있다. 상장이 급격히 저하된 중요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사회를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참된 신앙과 바른실천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본래적 사명을 되찾고 도덕적 종교적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을 위해서도 정애인을 돌보고 섬기는데 앞장서야 한다. 말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고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내적으로 성숙해지고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종교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장애인을 돕는 일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거창한 일도 아니고 두드러진 성과를 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 일은 인내와 겸손과 사랑을 요구한다. 이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믿음과 헌신을 요구한다. 이 일은 인간적인 사랑만으로는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이 일은 교회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사랑이 교회 안에 살아있다면 교회는 이 어둔 세상의 등대로서 썩어가는 세상의 소금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크고 돋보이는 일을 해도 교회는 맛잃은 소금, 불꺼진 등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장애인을 어떻게 도울 수 있나? 불쌍하니까 도와준다는 식으로 장애인을 대해서는 안된다. 장애인은 못나고 불쌍한 사람이고, 나는 잘나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결코 장애인을 도울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장애인을 얻어먹는 거지로 대하고 장애인을 의존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도 위선에 빠지고 장애인도 불행하고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런 사람과 장애인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사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 사이에는 더욱 깊은 벽이 생길 뿐이다. 그렇게 하는 봉사는 하나님 없는 봉사, 그리스도 없는 섬김이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부족하고 죄많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목말라하는 심정으로 장애인을 섬겨야 한다. 장애인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온 인류의 죄와 고난을 지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장애인과 더불어 계시기 때문에 장애인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장애인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장애인을 구원하는게 아니다. 장애인을 끌어안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끌어안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나를 맡길 수 있다.
오늘 하나님은 장애인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부르신다. 장애인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하자. 장애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장애인을 감싸안고 돌보는데 앞장 선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교회를 채워주고 교회는 어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다. 오늘 장애인주일에 전국의 장애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1996-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