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맹자를 찾아서- <제남,태산,곡부,추성- 공맹의 유적 답사기>
2019.10.18~22
작년도 봄 초한전 유적지를 찾아 학술답사를 다녀온 후,초한전 유적지 후편을 기대 했었는데 다른 지역의 논어반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해 올해는 공자맹자의 유적지를 답사하게 되었다. 江南史記班의 경우 12년전에 곡부,추성 그리고 태산을 다녀온 바 있다. 많은 세월이 지났고 학생도 바뀌어 참가자 역시 새 멤바이다. 필자도 12년 전에 다녀온지라 망설였으나 필자 중고교대학친구 사기반학생 13명의 金友會를 대표하여 친구S와 함께 답사팀에 참가했다. 이번에 江南史記班은 15명이 동참 하였다. 다른지역 반원들 합쳐 66명의 대 부대다. 미리 카톡방을 만들어 사전 여행사측과 정보교환과 빠른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여행사측이 잠실운동장 앞과 압구정 주차장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제공해주어 매우 편했다. 티켓팅과 짐을 부치고 시간이 남아 간단한 점심도 먹었다. 오후 1시10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예정 대로 출발,2시간여에 제남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중국과의 시차는 1시간. 현지시간으로 3시반경 현지 가이드를 만나고 버스에 올랐다.
1일차 대명호풍경구 관광 대명호는 제남 3대 명승지(대명호,표돌천,천불산)의 하나로 꼽히는 천혜의 자연호수로 번화한 도심에 위치하여 특히 제남인들로 부터 사랑을 받는다. 대명호는 72개의 샘에서 흐르는 물이 천수에서 합류되여 호수를 이룬다. 호수의 면적은 46헥타르이다. 1958년 공원으로 문을 열고 6개의 섬,7개 다리,10개의 정자가 볼거리를 만든다. 배를 타고 유람하는 뱃놀이도 인기가 있다고 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제남에 이르렀는데 북해태수이며 서예가인 이옹(李邕 678-747)이 대명호 역하정(歷下亭)에서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환대하여, 답례로 즉석에서 시를 지어 아름다운 경치와 이옹과의 우정을 표현하였고 그 시가 전해지고 있다. 또 자연과 벗하며 살다간 당나라의 詩聖 두보와 詩仙 이백이 대명호 안의 섬에서 만나 아름다운 시를 나누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자유시간을 주어 대명호 주변을 산책했다. 두보와 이백이 시를 읊었다는 섬으로 가볼 시간은 되지 않아 멀리서 사진만 남겼다. 대명호는 늘어진 수양버들이 유명하다. 또 여름철이면 연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지금은 꽃은 지고 무성한 잎만 호수에 그득하다. 조명이 들어오는 야간 경치가 일품이라는데 혹 기회가 될지~ 가을찻집의 간판도 추심을 자극한다. 시간이 급하여 유혹하는 찻집을 그냥 지나쳐야 했다. 대명호 관광을 마치고 이제 제남을 떠나 차는 태안을 향한다. 내일의 목적지 태산 등정을 위해서 2시간 가량 달려 태안에 도착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폴만호텔(foreman hotel: 弗尔曼酒店)에 입숙했다.
대명호
대명호에는 섬이 있어서 옛 시인들이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2일차 태산(泰山)등정 천하명산 태산(해발 1545m)에 오른다. 태산(泰山)은 중국 5악(동악 泰山,서악 華산, 북악 恒山, 남악 衡山,중악 嵩山)중 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동악(東岳)이라고 불리는데, 5악 중에서도 중국의 대표적인 성산으로 五岳之長 혹은 五岳獨尊으로 불리는 최고의 명산이다. 중국 역대 제왕이 하늘의 아들 천자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제(封禪祭)를 이곳에서 지냈다. 토요일이라 태산은 분명 인파로 덮일 것이다. 8시 정각 호텔을 나서서 20여분만에 태산 도화곡 관광센터 앞에 도착했다(2호차). 그런데 1호차가 문제가 생겼다. 길을 잘못든데다 러시아워에 걸려 3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그바람에 태산관광이 30분간 줄게되어 아쉬웠다. 기다리는 동안 관광센터앞 길게 늘어선 노점상을 구경했다. 나무지팽이가 인기였다, 계단길이 길어서 다리가 부실하면 지팽이는 필수이다. 12년전 우리 일행 중에 구십노인(서울대교수출신)이 지팽이로 옥황정까지 동행한 기억이 난다. 1호차가 도착하자 바로 셔틀버스로 나눠타고 20여분 꼬불꼬불한 계곡길을 오른다. 마치 백담사행 샤틀버스를 탄 기분이다. 이제 단풍이 시작되는 협곡은 그야말로 선경이다. 도화원케이블카(桃花源索道)로 갈아타고 20여분 오른다. 태산에 오르는 케이블카는 우리가 택한 남천문행 도화원삭도(桃花源索道) 외에 북천문행 후석오 삭도(后石塢索道)도 있다.
천가정류장(天街站)에 내려 천가(天街)거리를 걸어 오른다. 천가의 시작점에 남천문(南天門)이 있고 청나라 건륭황제가 태산 등정시 머물렀던 건륭행궁이 보인다. 구름둥지호텔이라는 의미의 운소(雲巢)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옥호 간판도 보인다. 계단길을 오르면 南天門賓館 앞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태산으로 오르고 내리는 일행들이 일단 모임장소인 듯. 우리 일행도 태산을 개인별로 답사하고 이 장소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 장엄한 태산의 모습이 무언가 경탄과 함께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구경할 때마다 느낀다. 자연은 주인이 없다. 눈으로 가슴으로 담아가는 자가 바로 주인이다. 더구나 수천년의 역사를 함께 담고 있는 절경을~ 눈과 마음의 호사이다. 남천문 앞에는 태산의 산신령에 대한 제사당인 미료헌(未了軒)이 있다. 정상에 가려면 아직 멀다는 의미이다. 원래 未了라는 말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에 나오는 齊魯靑未了에서 유래된 것으로 제나라와 노나라의 푸른숲은 끝이 없구나라는 말로 태산의 웅장함을 표현한 것.
천가(天街) 문을 지난다.이름 그대로 하늘 거리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천상의 세계로 비상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걸어가면서 보이는 좌측 큰 바위에는 흘린 행서체의 산고망원(山高望遠)이 시선을 끈다. 산이 높으니 멀리 바라보노라~봉원문(逢元門)을 지나 벽하사(碧霞祠)로 가는 높은 계단길이 시작된다. 계단길에 솟아있는 망오성적(望吳聖跡:오나라의 아름다운 유적을 바라본다)의 붉은 글씨를 보면서~공자와 안회가 태산에서 오나라쪽을 바라보았는데 때마침 어떤 물체가 휙 지나가 안회가 하얀비단 같다고 하니 공자는 한필의 백마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공자의 말이 정확했다는 공자가어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망오성적을 지나 서신문(西神門)에 이르니 벽하사 붉은 건물이 나온다. 벽하사(碧霞祠)는 도교사원으로 태산의 여신 벽하원군(碧霞元君) 혹은 태산할머니(泰山奶奶)를 모시는 사당이다. 동신문(東神門)으로 나오면 벽하사 궐내를 나오게 된다 태산도교협회,벽하사관리본부의 건물에는 동천복지(洞天福地)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대관봉(大觀峰) 바위산에 엄청나게 큰 글씨들이 걸음을 멈추게 하면서 한자한자 읽게 한다. 특히 우측에 황금색 글씨의 천하대관기태산명(天下大觀紀泰山詺)마애비는 당나라 현종의 글씨로 현종이 봉선의식을 하면서 선조의 업적과 봉선의 역사 현종의 소원과 각오 등을 적은 1008字나 되는 예서체 마애석비로 높이가 13.3m 너비가 5.7m나 되는데 유일한 황금글씨로 유명하다.
태산에는 도교 사당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산 고 건축궁 중의 하나인 청제궁(靑帝宮)에는 觀音殿,財神殿,청제 불상이 모셔져 있고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공자묘(孔子廟)도 있다. 공자묘에는 공자의 상이 모셔져 있고 명나라 가정연간(嘉靖年間)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입구에 있는 현판은 산동성 정부 주석이었던 한푸쥐(韓复榘)의 친필이라 한다. 사당 안은 大喩高因이라는 편액 아래 검은 칠의 목각의 공자상이 앉혀져 있는데 '지성대사공자신위(至聖大師孔子神位)'의 위패가 있다. 많은 인파가 옥황정 가는 길을 메우고 있다. 200m 거리 표지판이 알려준다. 암벽에 또 저명인의 글씨가 보인다.1989년 6월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가 팔순나이로 "登泰山看祖國山河之壯麗"(태산에 올라 조국산하를 바라보니 장엄하고 아름답구나)라고 쓴 글씨이다.
옥황정 바로 아래에 유명한 오악독존(五嶽獨尊)바위가 우뚝 서 있다. 오악독존 앙두천외(五嶽獨尊 昻頭天外)라는 붉은 글씨가 태산의 위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옥황정(玉皇頂)은 태산의 정상으로 과거 중국의 황제들이 이 옥황정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봉선제의 봉제를 올렸다. 태산은 해발 1545m 최고봉인 천주봉(天柱峰) 정상에 여와(女媧)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제사를 지내는 옥황전(玉皇殿)이 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이듬해인 BC 219년 태산(泰山) 정상의 옥황전(玉皇殿)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진시황 이후 한무제는 5번 청 건륭황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전한다.옥황정 앞마당에는 태산극정(泰山極頂) 1545米(m)라는 표지석이 있고 둘레는 소원을 비는수많은 자물통들이 채워져 있다.
선제(禪祭)를 지냈다는 양보산(梁父山) 돌아오는 길은 시간이 바쁘다. 중식후 오후 禪祭를 지냈다는 양보산(梁父山)을 탐방하기위해서다. 현지 가이드가 이틀간이나 물어물어 양보산을 찾아냈는데 등산로가 없어 어렵게 정상에 올랐으나 유적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했단다. 우리 일행이 보아도 나즈막한 돌산에는 제사를 지낼만한 유적지는 없는 듯 하다. 그러나 노선생의 예상대로 안으로 들어가니 모양이 같은 두개의 산이 있고 가운데 조금 작은 산이 있어 아마도 땅신에 지내는 선제는 음지로 여성상을 닮은 이곳이 적지로 본 듯하다는 주장이다. 다산과 곡식의 풍요를 비는 선제이기 때문이니-- 어쨋든 역사탐방 학술연구팀으로서 활동을 제대로 한듯 뿌듯한 기분이다.저녁에는 태산대제(泰山大祭)라는 뮤지컬드라마 공연이 있었다.진시황을 비롯해서 왕조별로 대표적인 황제의 업적을 기리고 태산대제를 지내는 모습이 재연되었다. 진시황에 이어 한 무제-당나라 측천무후-송 진종제-청 강희대제의 업적을 묘사했다. 태산대제를 통해 중국의 위대한 힘을 과시하는 것 같다.
남천문빈관 천가-하늘거리
주말이라 인파가 대단하다. 공자와 안회의 대화에서 따온 망오성적(望吳聖蹟)
대관봉에는 많은 황제들의 명필이~ 특히 오른쪽 황금글씨는 당나라 현종의 글씨
옥황정으로 가는 길 공자묘
오악독존 앙두천외
태산 등정로
옥황전/옥황정
3알차 대묘와 한명당 공묘 공부 공림 안묘
대묘(岱廟) 오늘은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가는 날이다. 태안에 있는 대묘(岱廟)를 먼저 갔다. 대묘는 태산에 오르기 전 황제들이 목욕재계하며 태산에 올라 봉제를 지내는 준비과정에 머물던 곳이다. 대(岱)는 태산의 다른 이름이며 대묘의 중심 건물은 천황전이다. 천황전으로 들기 위해선 우람한 건물이 앞을 막는다 대묘방이다. 대묘방(岱廟坊)은 1672년 청나라 강희제 때 세운 패방이다. 높이 12m, 너비 9.8m의 석방을 빈틈 하나 없이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했다. 여의주를 갖고 노는 용, 새벽 해를 바라보는 봉황, 하늘을 나는 천마 등 전설적인 동물들과 식물,꽃 조각이 섬세하다.중국 전역을 통틀어 아름다운 패방으로 꼽힌다. 정양문을 시작으로 배천문,인안문,후재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면 대묘의 본 건물인 천황전이 나온다.천황전은 북송 때 처음으로 건축한 것인데,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 곡부 공묘의 대성전과 함께 중국 3대 목조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천황전 안에는 태산지신이 모셔져 있고 벽에는 송대 진종의 봉선 의식 행차 모습이 벽화로 새겨져 있다. 경 내에는 각종 건축물 외에도 오래된 은행나무와 측백나무가 위용을 자랑하고 역대 제왕들과 문인들의 비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천황전에는 태산 최고의 여신인 벽하원군이 있고 벽하원군태산노모지신(碧霞元君泰山老母之神)의 위패를 잡고 있다. 경내의 관음전(觀音殿), 우응천자(佑應天慈) 재보전(財補殿), 정양문(正陽門)을 지나면 한무제(漢武帝)가 심었다는 한백(漢柏)이 있다. 구리로 만든 정자건물 동정(銅亭)도 보이고, 동어좌(東御座)은 청나라 건륭시 지은 것으로 침실도 볼 수 있다. 진나라 진시황이 BC 219년에 봉선행사시 글을 새겼다는 진태산각석(秦泰山刻石)은 유리로 보존되어 있는데 현존 글씨는 10자에 불과하지만 가장 오래된 비문이다. 대묘 참관을 마치고 나오니 정문이다. 우리는 후문에서 입장하여 정문으로 나온 셈이다. 정문에서는 멀리 태산이 보였다. 아! 역대 황제들이 태산에 올라 봉선제를 지내려고 이곳 대묘에서 목욕재게하고 준비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태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것도 같다.
대묘방 송나라 때 지은 천황전 앞에서
자생보윤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천황전 태산노모 벽하원군지신의 위패를 안고 있는 태산 최고의 여신
한명당(漢明堂) 다음으로 찾은 곳은 한명당이다. 한 무제 때 지은 건축물과 정원인데 지금은 개인의 소유물로 빈땅에 농사를 짓고~ 유적물을 찾는 사람도 없고 관리가 전혀 안되고 있었다. 사실은 춘추시대 노나라의 부용국(附庸國)인 전유국의 땅으로 천자가 순수시 이곳에 머물렀던 행궁이였기 때문에 유명한데, 논어의 계씨편(季氏編)에서 계씨가 전유국을 침공하려 하자.공자가 제자이면서 계씨 아래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염유와 자로를 꾸짖는 대목이 있어서 특별히 지목하여 탐방한 곳이다. 한명당 문으로 들어가는 좌우에 뜻깊은 문구가 달려 있었다.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장엄한데 위정자의 자잘못은 천년이 지난 후에도 남는다. 게단 밑에는 태산을 기리는 泰山頌이 돌에 각석되어 있다. 계단 중앙에는 손님을 옥처럼 모신다는 뜻의 賓玉如歸라는 멋진 행서체를 감상할 수 있었다. 연목 우측편에는 한명당박물관과 한명당서화원이 있었으나 관리가 안되어 들어가 구경할 수가 없었다. 훌륭한 유적지가 한심하게 묻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한명당
한명당 서화원 孔廟 孔府 孔林과 顔廟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공자의 사당,후손들이 거주하는 곳 그리고 공자와 후손들이 묻힌 묘소를 방문했다.버스로 한시간20여분을 타고 곡부(曲阜)에 도착했다 먼저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부터~ 공묘로 가는 길에는 길게 늘어선 각종 기념품가게가 역시 대단한 관광지임을 실감케 한다. 예전에는 한국인 고객을 만나면 무조건 "천원"을 외치며 호객을 했는데 이젠 한국돈은 전혀 소용이 없나보다. 호객의 단위가 중국돈 십원(十元 시웬)이다. 공묘의 대성전(大聖殿)은 우리가 탐방했던 대묘(岱廟)와 베이징의 고궁(古宮)과 함께 중국 3대 궁전건축의 하나로 중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명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공묘(孔廟) 공묘(孔廟)는 공자를 배향하는 문묘(文廟)로,지성묘(至聖廟)라고도 한다. 12위(位)의 황제와공문제자(孔門弟子), 172명의 유학(儒學) 대스승(大師)을 배향하고 있다.공묘는 춘추(春秋)시대에 창건되었고, 2천여년간 역대 왕조에 걸쳐 100여 차례 중수 확장 건축되었으며, 명청조(明淸朝)에 이르러 현재규모로 형성되었다. 공묘의 남북 길이는 대략 1,300여미터, 동서 넓이가150여미터이고, 14만 평방미터를 차지한다.묘내(廟內)에는 한(漢)이래 역대 석각(石刻) 1,000여점이 있으며, 더욱이 한위6조(漢魏六朝) 비각(碑刻), 한화석상(漢畵石像)과 명청조룡(明淸雕龍) 등은 정치, 역사, 문화, 예술을 연구하는 보고(寶庫)이다.
공묘는 1961년 중국 국무원에서 전국제일의 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되었고,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2006년 중국 전국AAAAA급(級)경구(景區)로 지정되었다. 공묘 입장시는 휴대가방 복장검색까지 한다. 대성전으로 가는 길은 멀다. 무려 9개의 문을 지나야 한다.金聲玉振坊, 영성문(欞星門)을 지나 太和元氣坊,至聖門,聖時門을 거쳐 壁水橋를 건너 행단(杏壇)을 구경, 행단은 공자가 학문을 가르치던 장소로〈장자(庄子), 어부(渔父)편에 등장한다. 1018년 공자의 45대 손이 공묘를 수리하면서 대성전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행단을 만들어 살구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행단 양 옆에 몇 그루의 작은 살구나무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東文門,大中門,大成門을 지나야 대성전에 이른다. 양편으로는 천자들이 다녀간 흔적의비석들이 먾다. 여기 영성문(欞星門)은 공자 사당 제1문으로 欞星은 고대의 중국인들이 학문의 수호성으로 숭상했던 별이었다. 명나라 영락황제가 처음 세웠을 때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청나라 건륭황제가 재건하면서 쇠돌기둥으로 바뀐뒤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영성문의 편액도 건륭제의 친필 서체이며 공자의 학문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을 통과하면 1544년 명나라 때 세운 태화원기(太和元气)패방이 나온다. ‘태화원기’는 유가 사상이 우주 만물의 근본임을 강조하는 말이다.두번째 문인 聖時門은 1415년 명나라 때 세운 것이 시초이고 청나라 옹정제 때 공묘의 정문으로 공식 제정 성시문으로 개명했다. 벽수교를 지나면 先師手植檜(일찌기 선생이 직접 손수 심은 회나무)라는 설명을 붙인 오랜 회화나무가 있다. 공자가 심은 나무가 다 말라죽었으나 한그루만 살아남아 청나라 옹정제 때 죽은 그루트기에서 새삯이 자라나 지금까지 커왔다는 나무다.마침내 대성전에 입장한다. 공묘의 핵심이다. 베이징 고궁의 태화전, 태산 대묘의 천황전과 함께 중국 3대 건축물로 꼽힌다. 흰색 대리석단 위에 24.8m 높이로 세워진 현재의 건물은 1724년에 만들었다. 겹처마 지붕의 노란색 유리기와를 얹은 모습에서 궁전이 연상된다. 이곳의 압권은 정면을 장식한 10개의 돌기둥이다. 7m쯤 남짓한 기둥마다 마치 휘감듯 새긴 두마리 용이 예술이다. 본래 용 문양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에, 건륭제가 이곳을 방문할 때면 붉은 비단으로 기둥을 죄다 가렸다고 한다. 실내 중앙에는 3.4m의 거대한 공자 조각상이 앉아 있다.
매년 공자를 기리는 제사 의식이 이곳에서 거행된다. 곡부 시내의 모든 건물은 대성전의 높이 24,8m로 높이 제한을 한다고 한다. 대성전 안에는 제자 12철이 배치되어 있다. 공자는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12줄의 면류관이다. 유학을 이어준 네명의 제자가 좌우에 안자(顔回:復聖),증자(曾子:宗聖),자사(子思:述聖),맹자(孟子:亞聖)는 아홉줄의 면류관을 쓰고 있다.대성전 처마 천정에는 청나라 황제들이 쓴 편액들이 빼곡하다. 강희제는 만세사표(萬世師表),옹정제는 생민미유(生民未有),건륭제는 여천지삼(與天地參),가경제는 성집대성(聖集大成),함풍제는 사문재자(斯文在玆)--대성전 뒤편 우측에 숭성사(崇聖祠)가 있다. 공자의 5대조를 모시는 사당이다. 뒤편에는 공자후손을 모신 가묘(家廟)가 있는데 아들 공리,손자 자사 그리고 43대후손 공인옥부부의 위패가 있다. 대성전 서쪽편에는 아버지 숙량흘을 모시는 계성왕전(啓聖王殿)도 있다.노벽(魯壁)에 많은 관객이 모여 있었다. 유명한 진시황의 분서갱유시 춘추,상서,예기,논어와 효경 등을 공자 9대손 공부가 묻었는데 기원전 154년 한무제 때 공자의 옛집벽에서 발견 수십편의 경전이 나왔다. 이를 기념하여 노벽(魯壁)을 세웠다. 또 시례당(詩禮堂) 건물이 있어 들여다 보았다. 시례당은 명나라 홍치년간에 지었는데 청나라 때는 공묘에서 제사를 지낸후 이곳에서 공자 후예의 경전강의를 들었다고 한다.넓기도 하고 볼 것도 많았던 공묘를 지나 이제 공부(孔府)로 들어갔다.
공묘 입구
지성묘(至聖廟 : 공자를 모시는 사당)
대성전
여러 황제들의 편액 전시장 같다. 공부(孔府)
공부는 공묘의 오른편에 동서 3.5Km, 남북 2.5Km로 둘러싸인 곡부노성을 말하는데, 공자의 가족들이 대대로 집무를 보거나 거주하던 곳이다. 송나라 때 인종황제가 공자의 46대 손(孫)인 공종원(空宗願)에게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벼슬인 연성공(衍聖公)에 봉하고 이후부터 곡부지역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송나라 때인 1038년에 공부(孔府)가 지어졌고, 명(明)대에도 다시 황제의 명에 의해 연성공부(衍聖公府)로 봉해진 후 증축이 계속되었다. 그 후에도 淸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현재와 같이 공무를 집행하는 곳, 가족들이 거주하는 집, 후원과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곳, 손님을 접견하는 곳 등 463間으로 되어 있어 당시 孔씨 家門의 권력과 규모를 보여준다. 12,470평에 152채의 건물이 즐비하다. 명,청 시기에는 황제궁실 다음으로 큰 규모의 저택으로 존재했다. 공자의 77세 직계후손인 공덕성은 대만 고시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79세손이 있다고 하며 현재 공부는 중국 정부 소유이다.
공부의 건물은 앞쪽은 관청, 뒤쪽은 주택과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문인 大門을 지나 뜰을 지나고 二門을 넘어서면 중광문(重光門)이 나오는데 명 세종이 은사중광(恩賜重光)이라는 편액을 내려 중광문이라 부른다. 중광문을 지나면 공부의 관아가 펼쳐지는데 연성공이 공무를 집행햤던 대당을 중심으로 양옆에 육부 관아가 있다. 二堂,三堂도 공무를 보던 관저이다. 삼당 뒤로는 안채인 前上房 뜰로 들어선다. 여기 벽면에 탐(貪)이라는 동물이 그려져 있다. 계탐도(戒貪圖)를 자세히 보니 상상의 동물이 욕심이 과해서 해를 삼키려 하고 있는 그림이다. 가훈인 셈이다.생활공간인 후당루(後堂樓)는 77대 연성공 공덕성이 문화대혁명으로 대만으로 피신하기 까지 살았던 곳이다.
안묘(安廟) 공자의 애제자 중 하나인 안회(顔回)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한나라의 고조가 노나라에 들러 공자의 제사를 지낼 때에 창건되었다.안회가 사후 복성왕에 봉해졌기 때문에 복성묘(復聖廟)로 칭해진다. 復聖廟안의 안회는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제후급의 아홉줄이다.
공부 입구
안묘/복성묘라고도 한다
공림(孔林) 공림은 공자와 그 자손(子孫)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가족묘(家族墓)이다. 곡부의 북쪽으로 1.5Km를 가면 ‘지성림(至聖林)’이라는 문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공림이 시작된다.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그의 지위가 커지고(황제들도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갔다),공림의 면적이 계속 넓어져 현재는 약 60만평에 담장의 길이가 7Km에 이르며 묘가 약 2만기가 있다. 공림 내 주요 건물과 명소로는 지성림방(至聖林坊)·지성림문(至聖林門)·세수방(洗水坊)·수수교(洙水橋)·형전(亨殿)·공자묘(孔子廟)·자공려묘처(子貢盧墓處)·주필정(駐蹕亭)·공상임묘(孔尙任墓) 등이 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공자가 사망한 뒤 제자들이 여러 곳에서 기이한 나무들을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따라서 진귀한 나무들이 많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무성하고 푸르며 사철 시들지 않는다. 공자 이후 지금까지 약 2400년 동안 매장 행사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1994년 공자유적지에 포함되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림의 안쪽에 있는 공자의 묘는 BC 479년 공자가 죽자, 노나라 애공이 이곳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분묘가 없었는데 공자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면서 묘의 크기도 커지고 분묘의 높이도 높아졌다고 한다. 공자의 묘에는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廟)라고 씌어져 있는데 王자를 세로로 길게 쓰서 담에 가린 왕자가 王자로 보이지 않게 했다는 해설이다. 공자 묘 옆에 공자의 아들 리(鲤)의 무덤이 있다. 그 앞쪽에 공자의 학문을 계승해 중용(中庸)이란 책을 쓴 손자 자사(子思) 공급의 묘가 있다. 이러한 묘의 배치는 공자가 아들을 데리고 손자를 안아 주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없던 카트가 등장하여 공림 전체를 카트를 타고 관람하여 편리해졌다. 공묘,공부,공림 3공 탐방을 모두 끝내고오늘 일정을 마쳤다. 오늘 숙소는 성덕국제(聖德國際 :SUN PLAZA)호텔DLEK. 어제 이틀간 묵었던 풀만호텔과 비교하니 같은 5성급이라도 훨씬 좋은 것 같다.
공림 입구
大成至聖文宣王墓/王자가 안보이게~
4일차 니산공묘(尼山孔廟),맹묘(孟廟),맹부(孟府),주공묘(周公廟)
니산공묘(尼山孔廟) 먼저 니구산을 찾았다. 니산공묘(尼山孔庙)는 곡부시(曲阜市) 동남쪽 약 25킬로미터 거리의 니구산(尼丘山, 尼山) 동쪽자락에 위치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공자(孔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纥)과 어머니 안징재(颜征在)가 니산에 올라와 치성을 드려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공자를 모시는 사당 니산공묘(尼山孔廟)는 후주경덕년간에 건설되었고 현재 69칸이 남아 있다. 니산공묘의 첫 문도 영성문이다.영성문을 지나 두번째 목조 대성문을 지나면 대성전이 나온다. 청나라 때 재건된 대성전에는 중심에 공자 소상 그리고 양쪽에 안회,증자,자사,맹자 4명의 제자를 모셨다. 뒤쪽의 침전(寢殿)은 공자부인 원관(元官)씨를 모셨다. 원관씨는 宋代에 운국부인(郓國夫人)으로 추봉되기도 했다. 대성전 건물 서쪽구역으로 가면 아버지 숙량흘사당(啓聖王殿)이 있고 뒷쪽엔 어머니 안징재 사당이 있다.廟 뒤에는 니산서원(書院)이 있고 이곳에는 9칸의 건물이 있다. 前廟後學의 배치로 뒤쪽에 명륜당이 있다.
부자동(夫子洞) 일흔이 넘은 아버지 숙량흘이 열여섯 나이의 세번째 부인 안징재 사이에 치성을 드려 낳은 호랑이굴을 夫子洞으로 명명하고 성지로 단장을 했다. 공자의 이름이 丘요, 호가 仲尼인 것은 태어난 산이름이 니구산(尼丘山)인 점과 관련이 있다.
공자 소상
부자동(夫子洞)/공자가 탄생했다는 동굴
맹묘(孟廟) 맹자의 고향 추성으로 간다 .맹림부터 탐방하기로 했으나 맹림으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의 높이제한으로 우리의 대형버스가 진입할 수 없어 결국 포기하고 시간만 낭비했다. 역시 또 1호차가 많이 늦어 기다려야 했다.맹묘,맹부만 보기로~ 맹묘는 추성시 남쪽에 위치해 있고 맹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역대로 내려오면서 맹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송대인 1037년, 공자 45대손 공도보(孔道輔)가 맹자의 묘를 찾아 건설했다고 하는데, 성에서 멀어 불편하고 수해도 잦아, 112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동서 95m, 남북 458.5m로, 맹묘의 건축물은 송, 원, 명을 거치며 38차례 보수 확장되다가, 현재는 1715년 강희연간에 세워진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맹묘는 5개 뜰과 64개의 전당이 있고 맹묘 내에 현존하고 있는 역대 비석은 300여 개인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진역산석각”과 당나라 구양순의 “서한래자후석각”이 있다.추성(鄒城)은 맹자의 본 고장답게 '맹자고리(孟子故里)' 라는 도로를 가로 지르는 큰 패방으로 시작된다. 공묘와 마찬가지로 영성문(欞星門)이 맹묘의 입구 정문에 자리해 있다. 영성문을 들어서 좌우로 고개를 돌려 보면 동쪽 성벽에 계왕성(繼往聖), 서쪽에 개래학(開來學)이라고 적힌 나무로 된 패방 건축이 보인다.
천년이 넘는 측백나무가 시선을 끈다. 거북이 모양으로 혹이 나서 마치 거북이가 고목을 타고 오르는 것 같다. 고목 사이에 멋진 정자, 강희비정(康熙碑亭)이 서 있다. 손자인 건륭제가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남긴 맹자에 대한 찬사와 제례에 관한 내용을 비석을 세우고 정자를 지어준 것으로, 맹묘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비석의 내용은 주로 찬사로 승선성(承先聖), 성인 공자의 업적을 잘 계승했다는 것이다. 맹묘의 동쪽 라인에서 중앙으로 들어서자 드디어 아성전(亞聖殿)이 모습을 드러낸다. 1121년 송대에 건축되었다가 지진으로 무너진 것을 1672년 강희제가 중건한 것이다. 가로 27.7m, 세로 20.48m, 높이 17m 겹처마에 녹색 기와를 얹은 아성전은 공자의 대성전보다 아담하지만, 2인자의 여유로움과 멋이 풍겨나는 건물이다. 그런데 아성전 앞에는 유생복을 입은 수많은 학생들이 단체로 방문하여 학습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대성전 돌기둥에는 용이 금방이라도 비상할 듯 양각되어 있지만, 아성전에는 26개의 둥근 돌 받침 위에 연꽃과 목단 등이 은은하게 수놓아져 있다.아성전 뒤로 孟子生平史蹟진열관이 이 있는데, <맹자>의 유명한 글귀와 <맹자>에서 유래한 200여 개 성어 중 일부가 소개되어 있다. 알묘조장(揠苗助長), 오십보백보, 호연지기, 적자지심(赤子之心) 등이 보인다. 또 맹자의 부모의 신위를 모시는 亞聖寢殿이 있다. 승성문(承聖門)과 양기문(養氣門)을 지나면 맹부(孟府)로 연결된다.
맹부(孟府) 맹묘와는 길 하나를 두고 건너편에 있다. 아성(亞聖)이란 현판이 걸린 나무패방이 맹부로 가는 입구임을 알려준다.아성부라는 편액이 걸린 정문은 너무나 소박해 전통가옥으로 들어가는듯한 느낌이다. 禮門과 예문의로(禮門義路),의문(儀門)을 지나면 맹부의 주 건물인 맹부대당(孟府大堂)이 자리해 있다. 맹자의 직계 후손이 한림원 오경박사로 임명되는 황제의 성지를 받거나 공무를 집행하던 곳이다. 문헌상 확인된 바로는 1451년 명대에 맹자 56대손 맹희원(孟希元)이 이곳에서 한림원 오경박사의 작위를 부여받은 후 18대에 거쳐 세습됐다.맹부대당 뒤편은 내택문으로 통한다. 세은당(世恩堂)에는 한림원 오경박사가 거주하는 집으로 현재는 74대손 맹번기 내외가 거주한다. 마당에는 큰 상수(桑樹:뽕나무)가 있었는데 붉은 비닐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한의원인 국의당(國醫堂)을 지나니 양생당(養生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들어가 보니 맹씨의 미출가 여아들의 거주처였다. 그 외에 맹자 적손 후예들이 책을 읽던 후학(後學)이란 요즘의 도서관도 있었다. 70대 손 맹광균이 건축했다고 한다. 그 뒤로 습유관(習儒館)과 오경박사원이 자리한다. 유학강의장인 강유당(講儒堂)에는 책걸상을 갖추고 학생 단체체험도 한다. 마지막으로 맹부감은당(孟府感恩堂)이 있었는데 원래는 아성부소학루(亞聖府小學樓)로 74세손 맹번기가 1943년 지은 건물이다. 주제는 "모친의 은혜에 감사하고 사회에 보답"이다. 향사례(鄕射禮)는 활예절을 경험하는 곳이고 맹부대당 앞 동쪽에는 해시계인 일구(日晷), 서쪽에는 곡식을 계량하는 도량형 가량(嘉量)이 석상으로 놓여 있다.
영성관 아성묘
亞聖 孟子
맹부감은당
주공묘(周公廟) 어제 일정으로 잡혀 있던 주공묘는 오후 4시30분 이전에 입장해야만 한다는 주공묘 관리인의제지로 어쩔수 없이 오늘 다시 재방문하게 되었다. 미리 시간을 단축했기에 입장이 가능했다. 주공의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무왕의 동생으로 은을 멸하고 주를 세운 창업공신의 한사람이다.공자는 주공을 군자의 표본으로 삼았고 왕을 잘 모시는 중신의 대표인물로 삼았다.무왕이 천하통일후 일찍 죽고 왕위를 물려 받을 수 있었으나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을 보좌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 건국 이후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봉국 노나라에는 아들 백금을 대신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논어에서 공자는 주공을 이상적인 성인으로 여겨 꿈에서도 보고싶어할 정도로 경모했다.
그래서 이번 답사여행에 필수코스로 삼은 듯하다.주공묘(周公廟)는 곡부시에서 동북쪽으로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주공을 ‘원성(元圣)’으로 봉했기 때문에, 원성묘(元圣庙)라 불리기도 하며, 현재 중국에서 3대 주공묘(周公庙)의 하나이다. 주공묘 문 앞에 ‘곡부노국고성(曲阜鲁国故城)’이라는 돌비석이 세워져있다. 그래서 주공묘는 바로 노나라 태묘(鲁太庙)이자 노나라의 조묘(祖庙)이다.주공묘는 송(宋), 금(金), 원(元), 명(明), 청(清)대에 여러차례 보수공사와 확장공사를 거치면서 현모습을 갖추었다. 총 면적은 75무에 달하며 주변은 붉은 색 벽에 에워싸여있으며 안은 4동의 정원으로 이루어졌다. 전(殿), 당(堂), 무(庑), 정(亭), 문(门), 방(坊) 57칸이 있고 역대 고대 비석이 30여동이 있으며 전나무, 측백나무,규범나무, 홰나무 등 고목들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주공묘 입구 벽앞에 수레들이 다니던 연로(輦路)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역시 공묘와 마찬가지로 대문에는 영성문(欞星門)이 일행을 맞는다. 규모가 큰 공묘,공부,공림을 다녀온 후라 비교적 규모도 적고 조용한 주공묘를 돌면서 공자가 경모했던 주공을 그리는 사색의 시간을 갖는 듯 하다.이제 마지막 밤은 제남에서 보낸다. 내일 오전 제남의 천불산,산동성박물관을 보고 바로 귀국길에 오른다.
주공묘
주공묘(周公廟)는 원성묘(元聖廟라고도 불린다.
5일차 천불산 흥국선사,산동성 박물관 이번 여정의 최종일로 귀국날이다. 오늘은 천불산에 올라 중국 불교의 유적을 살피고 제남 산동성 박물관을 관람하는 일정이다.천불산천불산(해발 285m)은 제남 3대 명승지의 하나로 국가4A급 관광지이다. 천불산은 경치가 수려하고 명승지가 많다. 흥국선사, 만불동,역산원,미륵승원,천불애 등 불교사적의 유적지와 신해혁명 열사능원도 있다. 도보로 오르면 40여분이 걸리는 등산로와 계단길이 있으나 우리는 케이블카(2인승 리프트)를 타고 10여분 걸려서 정상부근까지 올라왔다.
삭도종점 근처에 있는 흥국선사(興國禪寺)의 여러 법당을 구경하고 반야문 안으로 들어가 바위산에 새겨놓은 수많은 암각불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흥국선사는 당나라 정관연간(627~649년)에 건립되었다 한다.천불산내 산책로에는 배뿔둑이 포대화상을 비롯 여러 표정의 조각불상들이 발걸음을 멈추게한다. 리프트 정상에 오르면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천불산 수림과 제남시의 풍경을 한눈에볼 수 있어서 좋았다.산동성박물관1956년 개관했으나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2010년 11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총 3층으로 구성된 실내에 들어서면 전체가 황금빛으로 번쩍인다.춘추 전국시대 때 산동성 일대가 제(齊)와 노(魯)나라로 번영했던 것을 상징해 꾸몄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천정 가운데의 옥벽(玉璧) 문양이다. 고대에 옥벽은 몇 개의 성(城)과 맞바꿀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녔다고 한다.
천정 옥벽의 진품이 실제로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곡부(曲阜)에서 출토된 노나라의 옥벽을 포함,총 14만 점의 유물과 13만 점의 문건, 자연 표본 8,000여 점이 15개 전시에 나뉘어 전시보관되고 있다.2층의 제6~10전시실이 하이라이트이다. 공자를 테마로 꾸민 제6전시실을 시작으로, 제7전시실에서는 산둥 성에 꽃피운 신석기 토기 문화를 소개한다.제10전시관에서는 목각으로 깎은 병마용, 거북이 모양의 옥새 노국지보(鲁国之宝)가 흥미롭다. 우리는 시간관계로 주로 6전시실 공자학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특히 유학전승발전시의도(儒學傳承發展示意圖)를 참고로 유심히 보았다. 서예에 관심이 있어서 예서체 을영비(乙瑛碑)탁편을 사진으로 남겼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박물관과 건너편에 있는 산동성미술관도 구경하고싶은 마음 간절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천불산 대문
흥국선사
바위에 양각한 석불 산동성 박물관 공자학당
중식을 하고 공항으로 가는 길이다. 일정 내내 옵션이 없어서 선물을 살 기회가 없았다. 그래서 공항 바로 인근에 있는 잡화 가게에 들렀다. 농산물 가공품과 과자류가 인기였다. 아무 것도 안산다고 하면서도 모두 한 보따리씩 들고 나온다. 4박5일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다. 일정기간 동안 날씨가 너무 좋았고 호텔도 5성급이라 잠자리는 물론 음식도 너무 좋았다. 그리고 이번 여행은 단순한 관광여행이 아니라 논어를 배우는 학도로서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끼는 역사문화탐방이기에 보다 진지한 여행이 되었다.답사 후기도 미처 해설이 부족했던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충 설명하느라 길어진 점 양해하시길 바랍니다. 긴 글과 사진 끝까지 보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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