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장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 是以萬物莫不存道而貴德.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故道生之畜之, 長之育之, 成之熟之, 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도(道; 自然)는 (만물을) 낳고, (도道의 공능功能인) 덕스러움(德; 無爲)은 기르며, (따라서) 만물의 형상이 갖추어지고, (만물의) 본체(性)와 작용(命)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만물은 도道가 아니면 자리하지 못하고, 도道는 따라서 덕스러움德을 귀하게 여긴다. (따라서) 도道는 (만물이) 높이는 바가 되고, 덕스러움德은 (만물이) 귀하게 여기는 바가 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도道와 덕스러움德이 일부러 일삼아) 명령한 바가 아니라, (만물이) 늘 그러하게 저절로 그러한 바이다. 이른바, 도道는 (만물을) 낳고, 덕스러움德은 (만물을) 기르는데, 키우고 살찌우며, 열매 맺게 하고 익게 하며, 먹이고 입힌다. (그러나 도道와 덕스러움德은 만물을) 낳지만, (그러한 자신의 공功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있지 않고, (만물을 먹이는 바를) 일삼지만, (그러한 자신의 공능을 일부러 일삼아) 기대지 않으며, (만물을) 키우지만, (만물을 일부러 일삼아) 주재하지 않는데, 이것이 (유위가) 어렴풋한 덕스러움德이다.
莫, 非道也. 有之, 曰德也. 流形, 曰物. 推幹運用, 曰勢. 勢, 不得不成. 而不能自尸其成. 物, 不得不形. 而不能自賦其形.
(시이만물막부존是以萬物莫不存에서) 막莫은 ‘도道가 아니면’이라는 말이다. (도道의 공능功能인 자연自然) 그것을 가지는 바가 있는 바, 덕스러움(德; 無爲)이라고 일컫는다. (도道가) 흘러가 형상으로 드러난 바, 만물이라고 일컫는. (덕스러움德이 흘러가 만물의) 본체(幹; 性)로 옮아가고, (만물의) 작용(用; 命)으로 돌아간 바, (만물의) 기세氣勢라고 일컫는다. (이른바, 만물의) 기세는 (덕스러움德에 의해) 부득불 이루어진 바이다. 따라서 (임금은) 그 (자신이 일삼은) 기세를 일부러 일삼아 (백성에게) 주관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만물은 (도道에 의해) 부득불 형상으로 드러난 바이다. 따라서 (임금은) 그 (자신이 일삼은) 형상을 일부러 일삼아 (백성에게) 부과해서는 안 된다. 〔도생지道生之, 덕축지德畜之를 치인治人의 입장에서 이해한 점이 독창적이다〕
故唯道德, 專其尊貴. 生者, 受命, 於一原. 猶人之, 資始於父也. 畜者, 孳養之謂. 猶人之, 胎養於母也. 莫之命, 不待告戒也.
따라서 도道와 덕스러움德은 그 (만물이 저절로 그러하게) 높이고, 귀하게 여기는 바를 오롯하게 하게 된다. (비유컨대, 도道가 만물을) 낳음은 (만물이 저절로 그러하게 도道를) (이어) 받고, (좇아) 따름으로써, (저절로 그러하게 도道와 더불어) 하나가 되고, (도道를) 근원으로 삼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태어나 저절로 그러하게) 아비를 거울로 삼고, 시작점으로 삼는 모습처럼. (비유컨대, 덕스러움德이 만물을) 먹여 기름은 (태어난) 새끼가 (저절로 그러하게) 먹이를 먹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태어나 저절로 그러하게) 어미의 품을 찾고, 어미의 젓을 먹는 모습처럼. 막지명莫之命은 (도道가 높여지고, 덕스러움德이 귀하게 여겨지는 바는 만물을 일부러 일삼아) ‘가르치거나 타이르는 바를 기대지 않는 (늘 그러하게 저절로 그러한) 바’라는 뜻이다.
畜, 與育, 皆養也. 詩曰, 拊我畜我, 長我育我. 蓋畜, 主氣言, 自生而趨於長. 育, 主形言, 自長而趨於成也. 覆, 庇也.
축畜은 (뜻을) 육育과 더불어 하는데, 모두 먹여 기른다는 뜻이다. 『시경詩經』은 (「소아小雅·요아蓼莪」에서) 일컬었다. “나를 입히고, 나를 먹임으로써, 나를 키우고, 나를 살찌운다.” 이른바, 축畜은 기세(氣; 性·命)를 (먹여 기름의) 주인으로 삼(아, 그것을 ‘생장’시킨다)는 말로서, (기세가 도道에서) 생겨나면서부터 (먹여, 그것이 만물에게서 모두) 커지는 데까지 달려가게 한다는 뜻한다. 육育은 형상을 (먹여 기름의) 주인으로 삼(아, 그것을 ‘성장’시킨다)는 말로서, (형상이 덕스러움德에서) 커지면서부터 (먹여, 그것이 만물에게서 모두) 이루어지는 데까지 달려가게 한다는 뜻이다. 복覆은 입혀준다는 말이다.
上, 言道生之德畜之, 而下, 言道生之畜之. 專言, 道, 則可以統乎德也.
(노자는) 앞 문단에서는 “도생지덕축지道生之德畜之”라고 일컫고, 뒤 문단에서는 “도생지축지道生之畜之”라고 일컬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도道는 덕스러움 덕스러움德을 아우르는 바이기 때문이다.
生而不有以下, 解已.
생이불유生而不有 이하는 풀이했을 따름이다. (제10장에서)
具第十章, 此, 言聖人之軆夫道也. 夫道之, 所以尊貴於天下者, 以其, 能生育萬物也. 王者之於天下也, 亦然. 唯道, 無情, 而人, 有心. 道, 無形, 而人, 有爲. 無情與形者, 無假乎戒矣. 有心者, 或不能無意. 有爲者, 或不能無欲. 如或有其功. 以恃其能. 有意以主宰之. 則物, 或累之. 而盡喪其所以尊貴矣. 此, 有道者, 所以貴夫無爲無事, 而聖人, 所以無常心也.
제10장과 더불어, 이 장은 성인이 일삼는 도道의 모습에 대해 일컫는다. 이른바, 도道가 천하에서 높여지고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그것이 만물을 (저절로 그러하게) 잘 살아가게 하고, 잘 먹여 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이 천하에서 높여지고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 또한 그러해야 한다. 이른바, 도道는 (유위有爲한) 마음을 가지는 바가 없지만, 사람은 (유위有爲한) 마음을 가지는 바가 있다.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의) 형상을 가지는 바가 없지만, 사람은 일부러 일삼는 바(의 형상)를 가지는 바가 있다. (따라서 유위有爲한) 마음과 (일부러 일삼는 바의) 형상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는 경계해야 할 때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그러나 유위有爲한) 마음을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은 늘 그러하게 (유위有爲한) 뜻을 가지는 바가 없을 수 없게 된다.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은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는) 늘 그러하게 그 (천하를 살아가게 한 자신의) 공功을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따라서 (그는 천하를 먹여 기른 자신의) 공능功能을 (일부러 일삼아) 기대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가지는 바가 있는 (유위有爲한) 뜻으로써, (천하)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주재하게 된다. 따라서 천하가 늘 그러하게 (유위有爲) 그것과 (더불어) 얽히고설키게 된다. 따라서 (그는) 그 높여지고 귀하게 여겨지게 되는 까닭을 (일부러 일삼아) 어그러뜨리는 바를 (그) 끝점까지 다하게 된다. 이것이 도道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이 무위無爲와 일부러 일삼아 사안을 처리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고, 성인이 좋아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고, 싫어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까닭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