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나당연합군의 백제침공?
출처: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6권'에서 발췌
1) 신라의 외교전략
고구려가 강성하던 시기에 신라와 백제는 서로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553년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영역인 한강유역의 6郡을 점령하고 新州를 설치하자 백제와 신라의 우호관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백제의 성왕은 이듬해인 554년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으려다 管山城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斬首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백제는 신라와 仇讐(구수: 원수)가 되어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성왕의 뒤를 이은 威德王은 신라에 대한 복수전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복수전은 武王과 義慈王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무왕은 재위기간 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지 않고 이어갔고, 백제의 공격은 신라로 하여금 국가적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더욱이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자왕은 신라 서쪽 변방의 40여성을 함락시키고, 允忠을 보내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위협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에 급히 金春秋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寶臧王은 신라에게 구원병을 보내주는 대신에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竹嶺서북쪽의 땅을 먼저 반환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이 지역은 551년 羅濟同盟軍의 공격으로 빼앗겼던 죽령 이북 남한강 유역의 10군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고구려에 대한 김춘추의 請兵외교가 실패로 돌아가자 신라로서는 한반도내에서의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唐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신라는 선덕여왕 12년(643) 9월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여러 차례 공격하니 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다고 알리고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신라는 당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를 신라의 대당관계와 결부시킴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당의 감정을 역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은 신라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원병을 파견하지 않자 신라는 더욱 더 적극적인 대당외교를 전개하였다.
신라는 645년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親征에 나서면서 군병의 출정을 요구하자 3만 명의 군병을 이끌고 고구려의 배후인 南邊을 공격하는 등 군사적인 지원을 실행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에게 7城을 공취당하는 피해를 입는 등 백제의 계속된 침공에 더욱 국가의 존망을 위협받았다. 당시 신라의 군사력은 眞德女王이 스스로 신라를 小國, 백제를 大國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백제에 비해 열세였다. 따라서 신라는 군사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대당 청병외교에 적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신라는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 당 태종으로부터 出兵을 약속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출병을 약속한 당 태종이 죽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당 고종이 즉위하자 신라는 당과의 친선을 더하기 위해 진덕여왕 4년(650) 여왕이 직접 당 황제를 찬양하는 太平頌을 지어 바치고 백제를 멸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 다음 해인 651년에는 김춘추의 아들 金仁問을 보내어 당에 조공하고 宿衛하도록 하였고, 652년에도 사신을 보내 金總布를 바쳐 당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하였다.
진덕여왕에 이어 김춘추가 太宗武烈王으로 즉위한 이후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신라의 對唐請兵外交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659년 다시 당에 출병을 요구하여 당 고종의 재가를 받게 되었다. 당 태종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던 당군의 백제파병이 11년 만에 당 고종에 의해 실현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는 군사적인 열세를 면치 못하던 백제를 공격하는데 당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인 주도권을 당에게 내주게 되어 후일 百濟故地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당과 불가피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하였다.
2) 선무(宣撫)와 교란(攪亂) 전략
백제공격을 준비하는 신라에게는 자국민의 전쟁의지를 결집시키는 한편으로 백제군의 심리를 불안케 하고 신라군의 침입에 따른 공포감을 조성하여 대항 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조처가 필요했다. 신라는 이를 적절히 활용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하였다. 무엇보다도 국민의 결속을 다져 전쟁의지를 불태우게 하였다.
우선 신라는 백제공격을 합리화시키는 것에서 출발하여, 신라가 반드시 백제를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자국민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전쟁의지를 다지도록 유도하였다. 『三國史記』의 다음기록을 통해 그 일단을 살필 수 있다.
김유신은 “나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고, 또한 용감한 壯士 3천 명을 뽑아놓고 “위태로움을 당하여 목숨을 내놓고 어려운 일에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烈士의 뜻이라고 하니”, 여러 사람이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에 나가더라도 어찌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三國史記 卷41 列傳 金庾信)
이 기록은 642년 백제 윤충에게 대야성 등 신라 서변 40여 성이 함락 당한 후 김춘추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가는 길에 김유신이 한 말이다. 이는 신라의 백제 정벌의지가 본격화 된 계기가 대야성전투의 패배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고자 고구려와 당에 청병을 요청하려한 이유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희생당한 대야성 성주이자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딸 古?炤娘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발단이 되었다. 김유신은 백성들의 마음을 간파하여 스스로 싸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였다. 이는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신라가 백제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宣撫한 것이다.
신라의 백제에 대한 원한은 655년 奈勿王의 8세손으로 王孫인 金歆運이 백제의 助川城을 치다가 陽山에서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사건으로 인하여 더욱 깊어졌다. 김흠운은 김유신과 함께 신라의 군병들로부터 대단한 신망을 얻고 있던 장수였다. 김유신과 김흠운은 자신의 몸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국가와 군사들을 먼저 돌보는 모습을 보여줘 다른 장수와 병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런 김흠운이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신라사람들이 陽山歌를 지어 부르면서 슬퍼할 정도로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백제에 대한 신라의 원한은 더해 갔고 백제공격에 대한 의지도 더욱 굳건해졌다.
여기에 백제의 수도 泗?에 유언비어가 횡행하여 민심이 어지러워지고 정세가 불안해지는 등 신라에 유리한 국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직접 공격할 무렵에 백제 泗?城에서는 기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고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그러나 의자왕은 太子宮을 수리하고, 왕궁의 남쪽에 望海亭을 세우는 등 사치했고, 충신들을 감옥에 가두는 등 國政은 피폐해지게 되었다.
백제의 君臣은 奢侈하고 淫逸하여 國事를 돌보지 않았고, 백성이 원망하고 災變과 怪異가 자주 일어났다.(三國史記 卷42 列傳 金庾信) 의자왕 19년(659) 봄 2월에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가서 그 중 한 마리가 上佐平의 책상에 앉았고,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 9월에 궁중의 느티나무가 울었는데 사람이 우는 소리와 같았고, 밤에는 귀신이 궁성의 남쪽 길에서 울었다. 의자왕 20년(660) 2월에도 왕도인 사비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고, 泗?河의 물이 핏빛과 같이 붉어졌다. 4월에는 두꺼비 수 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고, 6월에는 왕도의 개떼가 길 위에 모여 짖거나 울다가 사라졌고, 귀신이 궁 안에 들어와 ‘백제는 망한다.’고 소리치고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등 해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이러한 의자왕 말기의 괴변과 사건들은 백제 백성들의 불안한 심리와 위기의식이 팽배된 결과였다.
백제에 나타난 괴변과 이에 대한 소문들은 백제 백성들의 팽배된 위기의식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신라에 의해 의도적으로 과장되어 조작된 유언비어일 가능성도 크다. 신라는 백제에 포로가 된 夫山縣令 租未押(조미압)을 佐平 任子의 집에 침투시켜 첩보전과 심리전을 폈다. 김유신은 백제의 포로로 되어 좌평 임자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조미압을 매개로 백제 최고위층의 한 사람이던 좌평 임자를 회유하여 백제 안팎의 일을 소상히 보고받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의 김유신은 諜報戰을 통하여 백제 정벌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또한 첩자 조미압과 포섭한 좌평 임자를 이용하여 백제의 국정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하여 괴변과 災異를 조작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 불안한 백제의 민심을 더욱 자극하여 큰 불안 속에 빠뜨렸다.
결국 백제의 災變과 怪異가 자주 나타나는 것은 백제를 정벌하라는 하늘의 뜻이라 여기게 하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호기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신라는 심리적 우세를 군사력과 연계하여 백제 국민과 백제군의 전투의지를 약화시킨 후 당군의 지원을 받아 백제 정벌에 나설 수 있었다. 나당연합군의 침공 때 백제는 사실상 전의를 상실한 것과 다름없었다는 것을 階伯이 한 말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출전에 앞서 계백은 “한나라의 사람으로서 唐軍의 大兵을 마주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까 두렵다.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 죽어서 마음이 편한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말하고, 그 처자를 모두 죽였다.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기대 내지 자신감이 있었다면 가족들을 살해하고 출전하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패전에 대한 공포는 백제지배층 및 백성들의 저항의지를 크게 약화시켰고, 黑齒常之와 같이 나당연합군에 투항하는 장수가 나오게 되고, 의자왕과 태자는 사비도성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달아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3) 나당연합군의 전력
백제에 비해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던 신라는 당의 출병을 전제로 백제공격을 준비하였다.(三國史記 卷5 新羅本紀 太宗武烈王 6年 4月; 三國史記 卷44 列傳 金仁問)
659년 10월 마침내 당의 백제출병이 결정되었고, 다음 해인 660년 3월 당 고종은 백제로의 출병을 명령하였고, 6월에는 출병이 시작되었다. 당은 左武衛大將軍(좌무위대장군) 蘇定方(소정방)을 神丘道行軍大摠管(신구도행군대총관), 金仁問(김인문)을 副大摠管(부대총관)으로 삼아 左驍衛將軍(좌효위장군) 劉伯英(유백영), 右武衛將軍(우무위장군) 馮士貴(풍사귀), 左驍衛將軍(좌효위장군) 龐孝泰(방효태: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에는 龐孝公) 등이 13만 대군을 출동시켰다.
신라 역시 이에 호응하여 국왕인 金春秋가 직접 金庾信과 眞珠, 天存등 5만의 군병을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이로써 나당연합군의 본격적인 백제침공이 시작되었다. 백제 정벌에 동원된 나당연합군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 등 18만 대군으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군이었다.
당군은 13만 군을 1,900척의 배에 태워 지금의 산동성에 있던 造船基地 萊州를 출발하여 서해의 덕물도(지금 덕적도)를 거쳐 백제로 진군했다. 신라군은 精兵 5만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신라군 정병 5만은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동원이 가능한 최대의 군사력이었다. 과거 신라가 동원한 최대규모의 병력은 645년 당의 고구려 공격을 응원하기 위해 동원한 3만 명이었다.
신라는 정병 5만 이외에 巨艦100척의 수군을 동원하여 당군을 응원하였다. 나당연합군은 모두 18만 대군과 2,000척의 수군을 내세워 백제를 협공하기 시작했다. 신라의 수군은 덕물도로 가서 당군을 영접하고 향도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신라군은 육군을 김유신과 진주, 천존 등이 지휘했고, 수군은 良圖(양도는 661년 12월에는 고구려 원정에 나선 당군을 후원하기 위해 신라 수군을 거느리고 출정하는 신라 수군의 대장)가 지휘하고 있었다. 양도는 덕물도에서 당 수군을 기벌포로 안내하는 중책을 수행하여 나중에 김유신·김인문과 함께 당 고종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4) 나당연합군의 공격전술
水陸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온 당군과 5만 정병의 육군과 100척의 거함을 거느린 신라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를 향하여 육로와 수로의 두 갈래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신라군은 당군에 비해서 규모면에서 열악하였
고 請兵후 백제공격이 가능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도권은 당군에 있었다. 신라군의 역할은 당 주도의 연합작전에서 부차적인 존재였다. 이 당시 나당연합군의 출정상황과 연합군의 편성, 백제공격루트 등에 대하여는 다음 사료에 잘 나타나 있다.
3월에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 水陸軍1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치게 하는 동시에 (무열)왕으로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응원케 하였다. 5월 26일에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에 다다랐다. 소정방은 萊州에서 출발하여 船艦이 千里에 뻗치고 동쪽을 향하여 물길을 타고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으로 하여금 兵船100척을 이끌고 덕물도에 가서 定方을 맞이하게 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이르기를 ‘내가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사와 만나 義慈의 도성을 무찔러 깨뜨리려고 한다.’함에 (중략)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 흠춘 등과 더불어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케 하고 왕은 금돌성에 車駕를 머물렀다. 7월 9일에 유신 등의 군이 황산벌에 이르니 백제장군 계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진영을 셋이나 벌리고 신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이 날 정방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에도달하여 백제병을 만나 이를 맞아 쳐서 크게 깨뜨렸다. (중략) 유신 등이 당군 진영에 이름에정방은 약속한 날짜보다 늦은 것을 이유로 하여 장차 신라 독군 김문영의 목을 베려 하였다. (중략)
12일에 나당연합군이 의자왕의 도성을 에워싸려 하여 소부리 들판으로 진군하니 (정방은 꺼리는 바가 있어 전진하지 않거늘) 유신이 달래어 양군이 용감하게 네 길로 쳐들어갔다. (三國史記』卷5 新羅本紀5 太宗武烈王7年)
나당연합군의 편제와 지휘권은 당군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었다. 당 고종은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백제정벌군의 총대장으로 삼았고, 신라 태종무열왕의 왕자로 당에 와서 청병하고 宿衛하던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았다. 당군은 모두 3개의 군단으로 편성되었다. 소정방은 휘하에 좌효위장군 유백영, 우무위장군 풍사귀, 좌효위장군 방효태 등 3장군이 거느린 3개 군단을 이끌었다.
신라는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직접 출전했으나, 신라군의 실질적인 지휘는 上大等 김유신이 맡았다. 즉 나당연합군은 소정방의 지휘하에 유백영·풍사귀·방효태가 거느린 3개 군단 13만 병력과 신라 김유신의 신라군 5만으로 구성된 1개 군단 등 모두 4개 군단 18만 명으로 구성되었고, 총지휘는 신구도행군대총관 소정방이 맡았다.
이러한 군단 편성은『三國史記』新羅本紀태종무열왕 7년조에 양군이 사비도성을 향해 네 길로 나누어 나란히 쳐들어갔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약 4만여 명으로 편성된 당군의 3개 군단과 5만 명으로 편성된 신라의 1개 군단이 합세하여 나당연합군이 구성된 것이다. 당군의 전력은 군단의 수와 동원된 병력의 수로 볼 때 신라군에 비해 월등하였다. 그러므로 신라군은 당군을 응원하는 입장이었고, 나당연합군의 지휘권은 자연히 당군에 귀속될 수 밖에 없었다.
660년 3월 당의 출병 결정 소식을 접한 신라는 5월 26일 왕과 태자 法敏, 상대등 김유신, 병부령 진주, 장군 천존 등이 신라군을 거느리고 경주를 출발하여 6월 18일에 南川停에 도착해서 당군을 기다렸다. 그리고 6월 21일 태자 법민은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당군이 중간기항지로 머물고 있던 덕물도로 가서 소정방과 만나 백제공격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되었다. 덕물도에서 만난 당군과 신라군은 7월 10일 백제의 남쪽에서 만나 合軍한후 백제 사비도성을 함께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다.
여기서 백제의 남쪽은 사비도성의 남쪽을 말하는 것으로 신라의 육군과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한후 사비도성으로 향하는 중간 길목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금의 강경 부근이다. 당군은 덕물도에서 해안을 따라 기벌포로 이동한 후 상륙작전을 거쳐 사비로 향하고 신라는 육로로 진군하는 水陸竝進作戰을 펼치기로 합의하고 구체적인 날짜까지 약속하였다.
이렇게 나당연합군이 수로와 육로의 두 방향에서 백제를 공격하기로 한 것은 이동의 편리함을 위한 전술이기도 하였지만 백제의 방어선을 분산시키고자 한 면도 있다. 백제로서는 두 방향에서 대규모로 공격해오는 적군을 막기 위해 전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고, 나당연합군의 水陸에서의 협공전략은 백제의 방어선을 둘로 쪼개놓음으로써 효과적인 공격을 펼칠 수 있었다.
6월 21일 덕물도 회합 이후 당군이 기벌포를 거쳐 백제 도성 남쪽까지 이동하는 데는 약 20일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신라군은 5월 26일 경주를 출발하여 20여 일이 걸려 남천정(여주 이천)에 도착한 것이 6월 18일이었는데, 다시 군사를 돌려 백제 국경을 돌파하여 당군과 7월 10일에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6월 21일 덕물도에서 회합한 후 즉시 남천정으로 돌아와 군사를 돌린다 하여도 불과 20일의 여유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천정에서 덕물도로 당군을 맞이하러 가는데 3일이 소요된 점을 감안하면, 신라군이 남천정에서 군사를 돌려 백제 국경으로 출발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날은 6월 24일이 되기 때문에 당군과 만나기로 한 날짜를 지키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지만 신라군은 7월 9일 황산벌에서의 격전으로 다소 지체되었지만 당군과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늦은 7월 11일에는 합군할 수 있었다. 당군은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해 그 다음날 신라군과 합군하기로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신라가 백제의 국경을 넘어 사비성의 남쪽에서 당군과 합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당과 합군하기로 약속을 하였던 것은 기일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판단에 근거하였을 것이다.
당시 신라군의 백제공격로를 살펴보면 이러한 신라군의 전략적 판단이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군 精兵 5만의 이동경로 즉, 백제공격로는『三國史記』에 비교적 잘 기록되어있다.(三國史記 卷5 新羅本紀 太宗武烈王 7年; 卷6 百濟本紀 義慈王 20年) 신라군은 경주를 출발하여 이천의 남천정으로 북상했다가 다시 상주의 今突城으로 남하하여 炭峴을 넘어 황산벌에서 대회전을 치른 후 당군과 합세하여 사비도성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라군의 백제 공격로인 탄현의 위치에 대해서는『三國史記』백제본기 동성왕 23년 7월에 신라에 대비하기 위해 탄현에 목책을 세웠다는 기사를 전거로 첫째, 대전 부근으로 보는 설 둘째, 충남 금산과 전북 고산의 경계인 탄치로 보는 설 셋째,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탄현으로 보는 설 등 3개의 설이 있다. 탄현의 위치에 따라 신라군의 중간 경유지가 달라질 수 밖에 없지만, 대개 상주의 금돌성에서 보은의 삼년산성과 옥천의 관산성을 거쳐 대전 부근의 탄현을 넘어 연산의 황산벌로 진격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대세이다.
(탄현의 위치와 관련)『三國史記』동성왕 23년조의 탄현에 柵을 세웠다는 기록과 백제부흥운동기의 군사활동 상황을 살펴보아도 대전 근방이 당시의 신라와 백제 사비도성을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백제 탄현의 위치는 대전 근방에서 찾아야 하고, 신라군의 백제공격로도 옥천에서 대전 부근의 탄현을 넘어 연산의 황산벌로 나아가는 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라군의 진격로를 보면 의아한 부분이있다. 즉 신라의 5만 정병이 사비로 바로 공격해 들어가지 않고, 백제와 신라의 북방경계선 바깥에 위치한 이천의 남천정으로 진군(북상)했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상주의 금돌성을 거친 다음 백제와의 국경을 지나고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이 거느린 백제결사대와 대회전을 치른 후 당군과 합군하고 있는 부분이다. 신라군이 처음부터 금돌성에서 탄현을 넘어 백제도성으로 진군하지 않고 남천정에까지 진군했다가 회군하는 등 먼 거리를 돌아 공격해 들어간 까닭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신라군의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몇 가지 가능성을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당군을 영접하는데 신라군의 위세를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5만 정병을 이끌고 남천정으로 가서 주둔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당군에게 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백제공격에 나선 신라의 대군을 한강유역의 남천정까지 진군시켰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일일 것이다. 다만 애초 당군과 남천정 부근에서 만나 백제의 북쪽 경계선을 뚫고 진격하려고 했던 계획이변경되었기 때문에 급거 금돌성으로 군대를 돌렸을 가능성은 있다.
둘째로 신라군은 당군과의 원활한 연락을 취하고 백제가 고구려에게 兵員支援을 요청할 것을 예측하고 그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남천정에 주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사비도성이 최종 공격목표였던 만큼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5만 정병을 남천정으로 이동하여 주둔시킨다는 것은 무리한 전략이다. 신라가 고구려의 백제 후원 내지는 침입을 우려했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셋째로 백제공격을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서 백제의 방어주력을 분산시키고 교란시키려는 의도로 사비성으로 바로 진군하지 않고 우회하는 전략을 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백제군으로 하여금 신라군의 공격로를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시키기 위해서 택할 수 있는 欺瞞戰術로서 최단거리의 공격로를 택하지 않고 우회하여 공격하는 것으로, 역사상 유용한 전술로 사용되었다.
넷째로 신라군 정병 5만이 모두 남천정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주력군은 백제공격을 위한 관문인 탄현을 넘기 위하여 옥천의 관산성이나 보은의 삼년산성과 같은 신라의 重鎭에 남겨두고, 왕과 태자, 김유신 등 지휘부만이 당과의 작전 熟議를 위하여 남천정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즉 덕물도로 가서 당군을 맞이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부 병력만이 남천정으로 가서 주둔했을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앞에서 살펴본 신라군의 백제공격로와 당군과의 합군에 필요한 시간상의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을 종합해 다시 정리해 보면 신라군은 5월 26일 경주를 출발하여 그 주력은 상주의 금돌성을 거쳐 백제와의 국경상에 위치한 重鎭에 진영을 베풀고 백제공격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그 사이 왕과 태자, 김유신 등 주요 지휘관과 일부 병력은 이천의 남천정으로 이동했다. 남천정에 도착한 신라군 지휘부는 6월 21일에 당군과 덕물도에서 만나 백제 공격에 대한 전략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당군은 신라 수군의 안내를 받아 해로로 진군하여 기벌포로 들어가 상륙하고, 신라 육군은 육로로 진군하여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서 만날 것을 기약한 것이다.
신라군은 당군과 기약한 날짜를 맞추기 위하여 백제의 관문인 관산성 또는 삼년산성에서 대기하던 주력을 이끌고 백제의 국경선을 돌파하여 탄현을 지나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깨뜨리고 약속보다 하루 늦은 7월 11일 당군과 합군하였다. 신라군이 기일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것은 황산벌에서 예상보다 더 강한 백제군의 저항 때문이었던 것으로 정상적인 행군이었다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기일 약속이었을 것이다.
한편 당군을 덕물도에서 영접한 신라군의 수군은 100척의 거함과 함께 덕물도에서 기벌포에 이르는 해로에서 당의 수군을 안내하며 백제 수군과 접전을 벌였을 것이고, 기벌포 상륙전에서도 갯벌상륙작전을 위해 버들자리를 미리 준비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나당연합 수군의 기벌포 상륙작전 성공으로 당군 주력인 육군은 육로로 진군하고 수군은 육군과 나란히 하면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사비성 밖 30리까지 진격하였고, 여기서 신라의 5만 정병과 합세하였다. 그리고 잠
시 전열을 가다듬은 당의 3개 군단과 신라군으로 구성된 1개 군단 등 모두 4개 군단은 네 길로 나아가 사비성으로 진격하였다.
---------------------------------------------------------------
2. 백제군의 방어전략
백제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나당연합군 18만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았다. 의자왕대에 신라에 공세를 퍼붓던 백제의 군사력도 나당연합군에 비하면 열세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구원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구려는 당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기진해 있었다. 당군이 백제를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고구려로서는 백제에 대규모 구원병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나당연합군의 협공을 받은 백제는 孤立無援의 처지였다. 나당연합군이 공격한다는 정보도 백제는 즉각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음의 사료를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백제가 지리의 험함과 거리의 먼 것을 믿고 天道를 업신여기고 게을리 하므로 황제가 대노하여 삼가 정벌을 행하였다.(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5年 8月)
위 사료는 백제 멸망 후인 665년 당의 강요로 신라의 문무왕과 백제 태자 부여융이 취리산에서 맺은 맹약문에 나오는 구절로, 백제가 지리적인 천험을 믿고 당을 업신여기고 당을 섬기는 것을 게을리 하였기 때문에 당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사실 당과 백제는 서해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당군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공격한다는 것은 쉽사리 생각할 수도 없었고, 당이 이를 극복하고 백제를 공격하였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즉, 백제는 당군이 바다를 건너서 공격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의자왕 12년(652) 이후 당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당과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어려웠다.
신라도 659년 10월에 당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660년 3월에 당의 통보를 받고서야 안 것으로 보아서, 백제가 당의 출병결정을 알고 대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은 비밀리에 백제 출병을 준비하였고, 신라도 당의 출병결정을 즉시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백제는 당의 출병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당군의 출정이 시작된 연후에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다음의 사료로도 증명된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의 서쪽 덕물도에 다다르니,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의자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을 모아 방어할 대책을 물었다.(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 義慈王 20年)
국왕 이하 대장군 김유신 등이 거느린 5만의 신라군이 경주를 출발한 5월 26일경 백제는 신라군의 움직임에 주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군이 백제의 국경지대로 진군하지 않고 한강유역의 신라 내지인 남천정으로 진군하는 것을 보고, 백제는 신라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북진하고 있다고 오판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백제로서는 신라군과 당군이 덕물도에서 만나 백제를 공격할 것에 대하여 의논한 이후에야 사태를 알아차리고 부랴부랴 군신들과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좌평 義直이 나아가 말하기를 “당병은 멀리서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치 못한 자는 배에서 피곤할 것이니, 처음 육지에 내려서 士氣가 安定치 못할 때 급히 치면 가히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인은 대국의 도움을 믿는 까닭에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唐人의 불리함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날카롭게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인과 결전함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솔 常永등이 이르기를“그렇지 않습니다. 당병은 멀리서 와서 速戰할 의욕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예봉을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인은 앞서 우리에게 여러 번 패하였으므로 지금은 우리의 兵勢를 보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오늘의 계획은 당인의 길을 막아 그 군사의 피로함을 기다리고,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그 銳氣를 꺾은 후에 적당한 때를 엿보아 合戰하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국가를 보전할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주저하여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몰랐다.(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6 義慈王20年)
뒤늦게 나당연합군의 공격사실을 알아차린 백제는 방어책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당군과 신라군을 한꺼번에 상대할 전략을 세우지 못하였다. 백제로서는 일찍이 수륙 양면에서 대군의 협공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처음 상대하는 당의 대군과 신라군을 양쪽에서 막아야하는 상황은 백제가 방어전략을 수립하는데 매우 어려운 문제로 일치된 의견을 모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당시 신라와 백제간의 전쟁은 국경지대에서의 국지전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면전에 경험이 없던 백제로서는 신속히 대응전략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또한 국경지대에서의 무력충돌이 아닌 수도 사비성으로 직공하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수립한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었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직공전략과 수륙 양면에서의 협공전략에 말려 마땅한 대응책을 세우지 못하고 의견이 갈린 채 우왕좌왕하였던 것이다.
의자왕 초기부터 신라공격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좌평 의직은 우선 당군을 주력으로 보고 당군과 결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달솔 상영은 백제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신라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의직은 원거리 항해에 지쳐 있는 당군이 상륙하는 것을 맞아 친 후에 신라군을 칠 것을 주장하였고, 상영은 여러 번 이긴 경험이 있는 비교적 약세인신라군을 먼저 쳐서 그 銳氣를 꺾은 후에 당군을 치자고 주장했다. 백제군이 당군과 신라군 중 어느 쪽과 먼저 결전을 해야 할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고, 의자왕은 주저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 의자왕으로서는 나당연합군의 협공을 받아 양면에서 전선을 형성해 결전을 벌일 생각을 하지못했고, 이는 백제 군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수군과 육군으로 구성된 나당연합군을 동시에 방어할 계책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고 백제 수군의군세로는 당의 상륙군을 해상에서 먼저 저지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로지 육군으로만 나당연합군을 막아내야 하는 상황에서 전력을 분산하여 나당군을 동시에 상대하기도 어려웠기에 어느 한 쪽을 먼저 선택하여 결전하여야 한다는 현실 아래 의직과 상영으로 대표되는 군신들간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던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백제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던 신구귀족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의자왕 말년 당시 大姓八族으로 대표되는 구귀족 출신의 佐平 成忠과 興首 등은 왕의 신임을 잃고 정치권 밖으로 쫓겨난 상태에서 達率관등을 가진 상영과 계백 등 신진귀족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평 의직으로 대표되는 구귀족세력들은 의자왕 15년(655) 이후 상실한 정치적 주도권을 대당 우선 결전전략을 관철시킴으로써 회복하려고 했었고, 달솔 상영으로 대표되는 신귀족세력들은 신라군과 우선 결전할 것을 주장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한편 의직과 상영의 엇갈린 주장을 듣고 의자왕이 주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의직은 왕의 측근으로서 등 정치적 실권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지만 군사문제에서만큼은 의자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의직은 의자왕 즉위 초에 대신라전을 이끌면서 신라에게 연속하여 패배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의직은 의자왕 7년(647) 신라의 茂山·甘勿·桐岑城등 3성을 공격하다가 김유신에게 패하여 匹馬로 돌아왔고, 8년(649)에도 신라의 要車城등 10성을 공격했으나 다시 김유신에게 玉門谷싸움에서 대패를 당하는 등 번번히 신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의자왕의 입장에서 군사적인 경험이 부족한 신진귀족들의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의자왕은 구귀족세력의 한 사람으로 古馬彌知縣에 귀양 가 있던 좌평 興首에게까지 대책을 묻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는 의자왕 16년(656)에 이미 구귀족의 한 사람으로서 655년 정치권 밖으로 축출되었던 좌평 성충이 의자왕에게 외적의 침입을 막을 방책을 上書한 예가 있다. 성충이 제시한 방어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신이 항상 시세의 변천을 살펴보니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用兵에는 반드시 그 地理를 살펴 택해야 할 것이니, (江의) 상류에 머물러서 적을 끌어들인 후에야 保全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에서는 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해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적을 막아야 합니다.(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 義慈王16年 3月)
성충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육로와 수로를 모두 막을 방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즉 성충은 이미 나당연합군이 수륙으로 협공할 것을 예견한 것이었다. 성충이 올린 방비책을 의자왕이 받아들였다면 나당연합군의 침입소식을 듣고 백제의 군신들이 우왕좌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의자왕은 정권에서 배제된 구귀족세력의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인 성충의 말을 쉽게 들어줄리 없었고, 또 당시 정권을 잡은 신귀족 세력들이 이를 용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당연합군의 침입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의자왕은 다시 구귀족세력으로 고마미지현(장흥)에 유배 중이던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방어전략을 물어보게 되었다. 의자왕이 신진귀족세력보다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흥수의 지혜를 빌리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흥수는 성충과 동일한 방어전략을 말하였다.
당병은 많고 軍律이 嚴明하고, 더구나 신라와 ?角을 공모하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對陣하면 승패를 알 수 없다. 白江(혹은 伎伐浦)과 炭峴(혹은 沈峴)은 우리나라의 要路이다. 一夫單槍을 萬人도 당할 수 없을 것이다. 마땅히 勇士를 가려서 가서 지키게 하고,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의 입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 대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하고 사졸이 피로해지게 한 뒤에 떨치어 공격하면 반드시 적병을 깨뜨릴 수 있다.(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 義慈王 20年)
흥수가 제시한 방어전략은 앞서 성충이 의자왕에게 올린 전략과 같은 것이었다. 흥수도 성충과 마찬가지로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의 입구인 기벌포에서 적군을 막을 것을 주장하였고, 아울러 국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籠城戰을 벌일 것도 제시하였다. 급박한 상황에서 흥수에게 방어전략을 물었으나 예전에 성충이 올린 것과 차이가 없었고, 의자왕은 이미 성충의 방어전략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기에 더하
여 달솔 상영 등의 군신들의 반대가 있었다.
백제의 군신들은 믿지 않고“흥수는 오랫동안 유배 중에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채용할 수 없다. 만약 당병이 백강에 들어오면 흐름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에 오르면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할 수 없게 한 후에 군사를 내어 치면, 마치 조롱 속의 닭을 죽이는 것이고, 그물 속의 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 義慈王 20年; 三國遺事 紀異太宗春秋公)
의자왕은 상영 등의 군신들이 ‘흥수의 말을 들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에 오르게 한 뒤에 치면 쉽게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따르기로 하였다. 성충과 흥수의
방어책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요충지로 지목한 백강구와 탄현에서 나당연합군을 막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상영 등 백제의 신진귀족세력은 백강의 입구와 탄현이 가지는 지리적 이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또한 상영으로 대표되는 군신들은 의자왕 15년 이후 정치세력의 중심에서 몰아낸 구귀족세력들의 정치적 복귀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흥수의 방어전략은 군신들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고, 구귀족세력인 의직이 제시한 당군에 대한 선공전략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자왕은 상영 등의 신귀족세력들이 주장한 신라에 대한 선공전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강구로 당군이 들어오고, 탄현에 신라군이 올라선 연후에 방어전을 펼치자는 전략이 백제의 방어전략으로 채택되게 되었고, 탄현 위에서 신라군과 먼저 결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백제의 조정에서 국왕과 대신들이 방어책을 두고 신속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당군과 신라군은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인 백강의 입구인 기벌포와 탄현을 넘어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군의 기벌포 진입은 차치하고라도 신라군이 이미 탄현을 넘어섰다는 소식은 백제가 신라군을 막을 때와 장소를 이미 놓쳤다는 판단을 하게 했다. 상영 등 신진귀족세력의 주장대로 신라와의 우선 결전전략이 채택되기는 하였지만, 신라군을 탄현에서 방비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방어전략이 쓸모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미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섬으로써 신라군과 유리한 곳에서 결전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진군을 제때에 막아낼 기회를 상실하고 매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더구나 18만 나당연합군에 비해서 백제군의 전력은 열세에 놓여 있었다.
당시 백제군이 동원할 수 있었던 전력은 신라군보다는 우세했다고 하지만 나당연합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제 말기의 군사력을 살펴보면 백제가 대신라전에 동원한 병력의 최대치는 648년에 약 4만 명이 신라군의 포로가 되거나 참살당하였고, 그 다음해인 649년에 장사와 군졸 9천여 명이 살획당하고 戰馬1만 필을 빼앗기는 피해를 당한 사정을 고려하면 5만 명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의 중앙군과 지방군을 모두 합친 수가 아니고 신라와의 전투에 동원된 병력이므로 당시 백제의 전력은 5만 명 이상의 정병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5만 명이나 되는 전투력의 손실을 겪은 이후에도 백제의 신라공격이 멈추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당수의 예비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는 대략 1만 명의 중앙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기에 달솔이 지휘한 方領軍의 규모가 8천 명인 예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지방의 주요 거점인 5개 방성의 방령군은 총 4만 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따라서 중앙군과 5방성의 방령군의 수를 합치면 약 5만 명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각 지방의 郡城에 주둔하고 있었던 병력을 더하면 5만 명 이상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멸망 당시 백제군의 손실 등을 합산해 보면 방증할 수 있다. 황산벌 전투에서 전몰한 5천 결사대와 당군의 기벌포 상륙을 저지하다 전사한 수 천 명, 사비도성 밖 전투에서 죽거나 포로가 된 1만 명 등 최소한 1만 5
천 명이상의 손실이 있었고, 사비도성 함락 후 黑齒常之의 부흥운동군에 열흘도 못되어 3만 명의 병력이 모인 것을 본다면, 의자왕 말년 백제군의 동원 가능한 전력은 최소한 5만 명 이상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백제군의 전력으로 나당연합군의 18만 대병을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상황에서 백제군이 나당연합군을 상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 나당연합군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전면방어전략을 펴기보다는 백제군의 주력을 당군과 신라군 중의 어느 한 쪽에 먼저 투입하여 결전하고자 논의를 거듭하였던 것이고, 결국 신라군과 우선 결전하는
것으로 방어전략이 결정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