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국성결교회 90년의 역사를 마치 흘러가는 대강(大江)에 비유하면 여기에도 많은 뛰어난 주의 일군들이 활동하다가 사라져갔다. 그 중에서도 이명직 목사의 존재는 한국성결교회라는 큰 강줄기 위에서 때로는 순탄하게, 때로는 거센 물결을 헤치며 도도히 노를 저어갔던 인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그를 가리켜 '한국성결교회의 사부(師父)'라 일컫는다. 그러나 그에 관한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혹시 그에 관한 연구가 있다고 해도 그것들은 그의 성결론과 성서해석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를 단순히 성결교회의 교리 학자로, 아니면 성서학자로만 이해한다면 한국성결교회사에 미친 그의 진정한 영향과 가치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에 본 연구는 교회사적인 입장에서 이명직 목사를 연구할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그가 한국성결교회에 미친 역사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라 하겠다.
B. 연구범위와 연구방법
흔히 1921년에서 1945년까지를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시대로 보는 관점이 있다. 이 시기를 다시금 구분하면 1921년에서 1929년까지의 성결교회 조직시대와 1930년에서 1937년 까지의 성결교회 발전시대, 그리고 1937년에서 1945년까지의 성결교회 수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이 범위 내에서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본 연구는 1922년에서 1942년까지 출판된 한국성결교회 기관지인 [활천]에 게재된 이명직 목사의 사설과 특별 기고를 중심으로 한국성결교회사를 고찰하고자 한다. 물론 여기에 있어서는 중요한 몇가지 문제들-1921년 대부흥운동, 한국성결교회의 직접 전도, 하나님의 교회 사건, 이명직 목사의 친일정책 등-만 다루어질 것이다.
II. 이명직의 출생과 입교 과정
이명직은 1890년 12월 2일 서울 충정로에서 이성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도승(道僧)이 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학관에 입학하면서 기독교를 알게 되었으며, 성서과목에 흥미와 관심을 보였지만 입교는 하지 않았다. 그후 박감은과 결혼한 이명직은 정치학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으나 거의 1년간 공부할 학교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게 되었다.
그러던 중 구세군 전도대의 전도 강연을 듣게 되었으며, 그 뒤 동경 Y.M.C.A 총무인 김정식에게 기독교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하였으며, 또한 그의 안내로 동양선교회에서 운영하던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입학 당시는 물론 1909년 5월 3일 성령강립절에 나까다 쥬지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까지도 중생의 체험은 물론 복음전도자로서의 사명감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경성성서학원의 첫 졸업생인 이명헌을 만나 함께 기도하던 중 중생의 체험과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한국에 있는 자신의 부모에게 서신을 통한 복음전파로 가족을 구원시키기도 하였다. 그후 1911년 5월에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III. 1920년대 성결교회 부흥기와 이명직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 한국 전도를 시작한 지 15년이 되던 1921년에 이르러서는 설립된 전도관의 수가 33개에 이르렀으며, 신자들만 수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복음전도관 체제로서는 그 많은 신자들을 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므로 결국 교회제도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동년 9월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A. 1921년의 대부흥운동
1920년대는 한마디로 성결교회 부흥기라고 할 수 있다. 1907년에 시작된 한국성결교회는 때마침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의 열기를 힘입어 성결의 메시지를 강하게 외칠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이르러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복음의 선포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박명수 교수는 그 원인을 선교사와 한국교회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 한국 교회지도자들 사이의 불화, 3.1운동 실패에서 기인된 한국민족의 좌절, 1910년대 후반에 유행하던 교회에서의 남녀교제의 스캔들 등에서 찾고 있다. 이 실례들을 우선 성결교회 내에서 찾아본다면 먼저 1910년에 최초의 감독으로 부임했던 토마스(John Thomas)목사와의 문제, 한국성결교회 최초의 교역자인 정빈, 김상준의 탈퇴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교회 내에 있어서 남녀간의 스캔들은 당시의 시각에 있어서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 같다. 그것은 [활천]에 실린 다음의 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여러말 할 것 없이 남매의 의를 맺는 남녀의 심리는 다 불결한 줄노
안다. . . 그러한 사람들은 말하기를 쥬안에서 사랑한다 하되 발셔 마
귀의 최면술에 걸닌지가 오래다. . . 만일 남녀간에 성결한 자이면 공
연히 시간을 허비하야 편지질할 필요도 업거니와, 그러한 편지는 회
답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남녀간에 편지 왕복에 대하야 쥬의하라.
이는 사탄의 무션뎐신이다. . . 모든 남녀들이여-만일 객(客)적은 편지
쓸 시간이 잇거던 긔도하고 성경을 닑는 것이 둇치 아니한가. . . 남녀
가 교제하는 중간에는, 악마가 싀긔의 눈을 뜨고 활동하는 오묘하고
비밀한 긔책이 잇는 쥴로 아노라.
그러나 한국성결교회는 이러한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1920년대에 들어와서 새로운 전진을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조직적인 교회를 설립했다는 제도적 측면과 일본에서 철수한 동양선교회가 그 중심지를 한국으로 이동시킴에 따른 물량적 지원, 그리고 무엇보다도 1921년 경성성서학원 에서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특히 1921년의 대부흥운동에 대해 이명직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과거 5.6년동안 흑암을 지내여나온 학원은 이때에 비로소 면목이 새롭게
되엿나니, 이번의 부흥은 실노 학원 일부에만 부흥이 아니라, 우리 성결
교회를 영뎍이나 역사뎍으로 개조하는 부흥이더라. 이 부흥으로 말메암아
비로소 회개하고 거듭나고 성결의 은혜를 실제로 밧은 수양생뿐 아니라
교역자도 다수이엿섯다. 그래서 이 불길은 디방 각 교회에 파급이 되고
다른 단테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되엿다. 우리 성결교회의 참된 부흥
의 운동은 이때브터 비로소 니러나게 되엿나니라.
그러므로 한국성결교회의 신앙의 원형은 바로 1921년의 대부흥운동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명직은 그 도화선을 제공한 인물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부흥운동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배경은 주로 이명직 개인의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 신학문에 대한 욕망
이명직이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의 상황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가 이미 체험했던 중생과 성령의 체험도 이때에는 다 소멸되고 있었다. 그 때의 상황을 이명직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나는 22세에 학원에서 졸업하고 귀국한 후 년구세심(年久歲深)함을
따라 은혜의 도수가 놉하지지 못하고 점점 랭각이 되며 그저 가장한
일개 보통 전도사가 되엿다. . . 그러나 나는 성신이 없었다. 처음의
은혜는 일허바리고 말엇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신학문에 대한 욕망은 줄어들지 않았다. 즉 그는 신학문과 전통적인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곳 학식의 욕이엿섯다. 나는 생각하기를 교역을 하려면 문학이 업스면
안되리라고 생각하엿다. 법률을 모르면 안된다. 역사, 철학을 모르면 안
된다. 상식이 업스면 안된다. 하는 나는 이 점에만 착안하고 다른 것은
쥬의치 아니하엿다.
이후로 그는 기도와 성경읽기를 게을리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빚을 지고 안질에 걸리도록 신학문과 신소설을 탐독하게 되었다.
2.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에 대한 갈등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명직은 직접 참여는 하지 않았으나, 독립에 대한 설교를 통해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명직은 여기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余도 가장 애국심이나 잇는듯이 풍성학려로 심리가 동변하야 이때브터는
사상가인 테 애국자인 테 지사인 테 가장하고 강단에 올나서면 그나마도
아조 타락되여 복음에 대한 설명은 그림자도 업서지고 아조 속화하고 말
엇다.
당시 한국교회는 3.1운동의 실패와 그에 따른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기독교의 사회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게 되었고, 이명직이 은혜를 체험한 것은 이렇듯 한국교회가 사회참여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시기와 일치한다.
3. 남녀윤리의 문제
이미 언급했듯이 당시에 남녀간의 스캔들은 교회는 물론 경성성서학원 내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명직 자신도 자신이 가르쳤던 여전도사와의 스캔들이 있었다. 이 사건은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사실 당시 이명직의 사상이 이 사건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전에는 그래도 남녀례의는 직혀 갓스나 이제는 남녀 사이의 례의좃차
한만하야 셩히 남녀평등이니 해방이니하며 리면으로는 남녀의 자유교
제를 매우 자미스러운 일노 생각하고 례의니 태면이니 하는 것은 일죵
의 장애물노 간쥬하게 되엿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자신의 스캔들을 후회하게는 하였을지 몰라도 회개까지는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성결성과 사명의식에 대해 자문하게 되었고, 기도를 통해 그가 깨닫게 된 사실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명직은 자신의 체험을 경성성서학원 수양생들에게 간증했으며, 이것으로 인해 경성성서학원은 15일동안 수업을 중단하고 금식하며 부흥집회가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1921년의 부흥성회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는가?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이명직은 자신의 체험 이후 모든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심령의 변화에서 찾으려는 사상을 굳히게 되었다. 이 사상은 지금까지도 성결교회 부흥운동의 핵심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이 '사회'라는 또다른 차원과 만날 때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박명수 교수는 1921년의 부흥운동이 그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도리어 새시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이 부흥운동을 계기로 이명직 목사의 사상은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첫째로 그는 과거와는 달리 반(反)학문적인 자세를 견지하게 되었으며 결국 반지성적이 되는 것이 참신앙적이 되는 것 처럼 이해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민족의 문제에 대하여 도피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즉 사회참여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뜻이다. 셋째로 이명직은 남녀의 문제에 대해 다시금 봉건적인 유교윤리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921년의 대부흥운동은 1920년대에 한국성결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토대를 마련하여 준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지금의 한국성결 교회 신앙의 원형이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명직의 극보수적 사상이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성결교회의 사회참여를 저해하였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적극적으로 신(新)문화와 신(新)사고를 습득하려고 노력했었고, 이것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했던 인간 이명직의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선택한 극보수화의 길은 개방적이었던 그가 마지막으로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길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IV. 성결교회 발전시대와 이명직
1920년대의 부흥기를 지나 1930년대를 들어선 한국성결교회는 이전보다 더 강한 전도정책을 수립, 진행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타교단이 사회봉사, 농촌봉사에 주력하면서 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면 성결교회는 지방은 물론 해외에까지 직접전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성결교회는 엄청나게 교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좋지못한 사건도 있었는데 하나님의 교회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A. 직접전도에 총력을 기울인 성결교회
한국성결교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07년의 복음전도관 시대부터 한국성결교회의 전도정책은 직접전도 방식이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는 교파 설립이나 선교사업이라는 사업적 정신 보다는 오직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타교단처럼 교육이나 의료를 통한 간접전도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즉 의료사업 계통으로는 전무했고, 교육기관은 단지 성서학원 한 군데에 지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야 몇 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정도였는데, 그나마 본 교단에 소속된 개인에 의해 운영되는 실정이었다. 물론 이처럼 직접선교에 더 강조점을 둔 데에는 타교단과 같은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하는 외국의 교단적 선교부가 없었다는 사실에도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이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초기의 복음전도관의 선교목표가 목회보다 전도에 있었고, 따라서 단기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직접전도 방식을 채택했다는 데에 있다.
사실 한국성결교회는 그 전도방식에 있어서 동양선교회의 선교방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동양선교회의 선교방식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앙선교'라고 할 수 있다. '신앙선교'라는 것은 어떤 교파의 선교부에 의해 파송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출발했다는 것을 강조 한다.동양선교회는 그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기들을 하나의 신앙선교단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박명수 교수는 이들이 이처럼 모험적으로 선교를 진행한 원인으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긴박성과 성령의 역사를 들고 있다. 본 연구는 그 중에서 전천년설에 기인한 재림의 긴박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성결교회 헌법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친히 천년왕국 이전에" 이루어지며, 이 재림은 성도를 위한 공중재림과 세상의 심판을 위한 지상재림으로 구분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성결교회의 재림사상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국성결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동양선교회의 재림론 역시 전천년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신학을 배운 이명직의 재림론 역시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 [활천]에 실린 수많은 사설 중에서 직접전도를 매우 독려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것을 주님의 재림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에 있어서나 종말론이 강력하게 대두되는 것은 그 사회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1930년대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전세계적으로 몰아닥친 경제 공황의 여파가 한국성결교회 내에까지 침투하였다는 점이다. 즉 경제 공황의 여파로 동양선교회의 후원 기반인 미국 중부지역의 농촌지역이 타격을 받음에 따라 동양선교회 역시 모금 활동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으며, 이는 곧 한국성결교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일제에 의한 수탈로 인해 한국, 특히 한국의 농촌 지역은 황폐화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장로교와 감리교에서는 이미 1928년에 그들의 총회에 농촌부를 상치시키고 있었으며, 1929년에는 YMCA에서 [농촌청년]이라는 정기 간행물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결 교회의 입장은 달랐다. 동일한 상황에서 한국성결교회는 종말론, 구체적으로는 현실에 부정적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강조하며 직접전도에 매진했던 것이다.
웨 직접전도에 주력하지안코 유치원 야학갓흔 결과도 업는 일에 노력
하는가 하면 전투력을 일허바린 자의 일이다. . . 참 생명이 잇는 교회
는 싸호나니 지금까지 허공을 치는 역사를 긋치고 직접전도에 주력하
라. 이단과 싸호라. 죄악과 싸호라.
이명직은 타교단의 농촌계몽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당시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 재림이 가까운 시대로 보고 차라리 구령사업이 더 필요하고도 효과적인 사업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대 위태한 날의 시작은 되엿다. 지금은 곳 우리가 자다가 깰 때가
되엿다. 보라. 지금은 전세계가 경제적으로 위태한 날이 되엿다. 금일
의 경제공황은 한 나라에만 한한 것이 아니라 각 나라마다 적자보충문
뎨, 실업문뎨는 우리의 생활을 크게 위협하고 잇다. 여긔에 따라서 인
심 곳 사상은 악화가 되여 무삼 주의, 무삼 주의가 니러나게 되엿스니
사상뎍으로 위태한 날은 니르럿다. 사상의 변화는 정치뎍으로 위태한
형편이 만타. 따라서 지금은 종교뎍으로 위태한 날이다. . . 금일 교회
내에 형형색색의 주의주장과 별모양의 태도와 동작으로 신자의 마음을
흔들며 신앙을 업드러트리고저하는 운동과 성경을 원만하게 진리를 공
평하게 즈거하야 가라치지도 안코 편벽되히 해석하야 새진리라 새묵시
라 하는 이단과 사설이 류포되어 신자의 마음을 현혹케 하니 이 때가
과연 종교방면으로 위험한 날이다. 우리가 이러한 위험한 시대에 처하
야 더욱 깁히 기도하며 성경을 배와 진리에 미혹되지 말며 성신에 충만
함을 밧아 진격뎍으로 어느 방면으로던지 구령중심으로 활동할 때인줄
노 믿는다. 이 위태한 날이 온것은 예수 재림의 전제인줄노 믿는다.
수양의 긔간은 매년에는 봄과 가을 양기로 하고 육년에 졸업을 하게
되엿스니 삼년에 대하야 육년이 시간으로는 연장이 되엿스나 몇백명
천명의 령혼을 구원하며, 몇개소의 교회를 세울터이니 급속교화운동
에는 이만한 유익과 량책이 없을줄노 밋는다. . . 교회정치회의로는 각
교회마다 택립한 장로와 목사로 당회를 조직하야 지방회의의 결의와
지도하에서 자치할 것이오. . . 지방회를 조직하야. . . 이와같은 정체
의 변갱은 교회조직이 목뎍이 않이오 구령을 본위로 하는 것이다.
이렇듯 그 당시의 한국성결교회는 성서학원제도와 교회정치를 개편하는 그 모든 목적을 오직 직접전도에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직접전도의 배경을 마련했던 재림론이 약간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조짐도 보였다. 즉 그것은 일종의 시한부 종말론으로 볼 수도 있다.
시온주의자로 유명한 위버, 그렌, 바오리바씨의 세계종말에 대한 예언
이라고 발표한 것을 보면, '우리는 지금 세계의 종말을 당하얏다. 장래
할 일천구백삼십오녀이야말노 그리스도 재림의 해이다. 축복의 때는 시
작되려고 함으로 우리는 그 쥰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발니스틴의 이
스르엘 평원에 미증유의 대전이 발발하야 이억의 병사가 모혀 간과를
들고 싸훌터인대 이 전쟁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매암아 끗치나니라'
(조선일보 소화 육년 구월) 하엿스니 이 일천구백삼십오년은 우리가 가
장 주의하야 희망하는 해이다.
이 시대는 일천구백삼십오, 육년을 향하고 진행한다. 유대인의 형긔는 일
천구백삼십오년이나 삼십육년에는 끝이 난다. 전세계는 아마겟돈 전쟁준
비에 분주하다.
그러나 이명직이 완전히 시한부 종말론에 몰입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위의 두 사설들을 제외하면 다른 어떤 사설에서도 1935년 혹은 36년을 언급한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렇듯 재림을 강조하며 복음 전도에 매진한 것은 성결교회의 큰 부흥을 가져다 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장막전도대]라고 할 수 있다. [장막전도대]의 가장 큰 임무는 한국 전역을 통해 진격적인 전도를 시행하는 것이었으며 그 책임자로서는 정남수 목사가 맡았다. 특히 이 전도대는 자동차를 이용하여 역동적으로 복음전파를 할 수 있었고, 그 성과는 매우 탁월하였다.
이처럼 1930년대의 날로 어려워지는 상황 하에서 다른 교파들이 농촌계몽 등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에 몰두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한국성결교회는 직접전도를 통한 구령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특히 이명직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적 재림론에 기반을 둔 전도 독려를 통해 1930년 대의 전도 열풍을 이끌어갔다. 이러한 전도 열풍은 [장막전도대]를 통한 국내 전도는 물론 해외선교까지 이어졌다.
B. 하나님의 교회 사건
이 사건은 한국성결교회 역사상 처음 있었던 분열사건이었다. 1933년 제1회 총회를 통해 자치선언을 하고난 이후 전국의 성결교회와 교역자들은 상당히 고무적인 반응을 보임과 함께 교단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단의 교권 장악을 위한 알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1935년 3월 제3회 총회에서 젊은 지방대의원 변남성 목사가 총회장에 선출되자 여기에 충격을 받은 동양선교회 이사들과 중앙대의원들이 제3회 총회의 무효를 선언 하는 동시에 이사회를 집권 기관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중앙세력의 대처에 대해 지방 출신 교역자들이 반발하게 되어 분열은 시작되었다. 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된 [한국성결교회사] 에서는 5가지의 원인을 들고 있다.
1. 자급운동과 급속한 교화운동으로 인한 생활비 문제
동양선교회와 총회의 자급운동으로 인해 일부교회에서는 4-5개월분의 교역자 생활비를 지급할 수 없었으며, 이에 교세가 약한 지방교회에서는 불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우기 미국 내의 경제공황과 성결그룹의 교단조직화로 동양선교회의 선교정책은 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만을 품은 일부층이 동양선교회의 선교비 모금과 자급과정에 비리가 있다고 발설하여 문제를 확대시켰다.
2. 이사회 회원간의 의견 차이
1929년 이사회 조직에 있어서 허인수 목사가 회장 대리였고, 이명직, 최석모, 곽재근 목사가 이사로 있었는데, 이들 중 곽재근 목사만이 평남 출신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사회 운영에 있어서 언제나 경성 출신들과 지방 출신들 사이에 의견 조율이 어려웠다. 한편 경성 출신들의 득세에 불만을 느낀 곽재근 목사는 지방에 거주하는 목사들과의 긴밀한 연락을 통해 제3회 총회장은 지방출신 인사를 세울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변남성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동양선교회 이사회와 중앙의 인사들이 반발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변남성 목사가 젊다는 이유로 반대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중앙세력들이 기득권 확보를 위해 지방출신-곽재근 목사와 동향(同鄕)-인 변남성 목사를 반대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각도에서 다음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금번 이 사건은 작년(1933년) 7월분에 평양 상수리교회 전도부인
김용자를 신막으로 이동시키고 신막교회 전도부인 고명남을 평양
으로 이전시키려던 것이 발단이 되어 횡설수설과 류언비어가 함부
로 선전되었다. 김용자의 이동문제가 없을 때에는 변남성 목사에
대하야 아모 말이 없다가 김용자의 이동문제가 잇스면서 일부에서
목사 배척운동이 니러난 것은 일대의문이다. 이 중에 분명히 악마
의 흑수(黑手)가 움직이고 있다. . . 一. 변목사는 범죄인이다. 二.
젊은 전도부인을 좋아한다는 등 악평이 도라다니게 되엿다. 이것
은 참으로 고의로 지어내인 악마의 선전이다.
비록 이명직은 이 사건을 교회를 음해하려는 악마의 장난으로 일단락짓고자 하였지만, 이 문제가 1935년의 사건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1933년 2월에 제정된 임시약법에 의하면 총회의 임원 중 정.부회장은 "목사 중에서 지명하나 토론을 요치않고, 무기명 투표로 선거하되 반수이상의 득점차로 하느니라."(임시약법 6장 5절 1조)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할 때에 변남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가 젊었다는 이유보다는 그에 관한 평양에서의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3. 중앙과 지방 목회자들의 의견 차이
당시 교역자들의 임지는 이사회에 의해 결정되었다. 특히 지방 출신의 교역자는 대부분 지방에서만 사역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불만을 품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1934년 에는 순회이사목사제도가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지방회장 이상의 실권을 소유하였다. 이런 상황들이 지방 교역자들로 하여금 지방 출신의 총회장을 선출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4. 의회정치제도 정착과정에서의 의견차이
사실 중앙세력은 총회가 조직되었으나 아직도 감독제도 밑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반해 교회를 대의정치 형태로 운영하기 원하는 소장측에서는 '총회'라는 이름대로 '의회정치'를 통해 민주적으로 이글어 나가려고 했다. 여기에서 두 세력 사이의 알력이 생기고 분열로 이어진 것이다.
5. 교리의 강직성
동양선교회는 교리수호의 차원에서 순회목사에게 교역자의 내용까지 조사하게 하여 성결의 교리에 위배되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회활동의 간섭이 하나님의 교회 사건을 초래 하게 한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제3회 총회가 무산되자 정남수, 곽재근, 변남성, 오계식, 안형주, 서재철, 김광원 등 젊은 교역자들이 한꺼번에 성결교회를 탈퇴하였다. 이들은 대개 서선(西鮮)지방 출신들이었다. 또한 이 때에 200여개의 교회 중 12교회가 이탈하였다. 이들은 전직 성결교회 목사였던 송태용이 도입한 '하나님의 교회'와 통합하는 형식으로 새 교단을 선언하였다. 여기에 장로교의 이원규 목사까지 가담하여 1936년 11월 25일에서 29일까지 평양 상수리 교회에서 새 교단창립 총회를 개최하고 변남성 목사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 교단도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고 1942년 제4회 공의회에서 해산을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한편 이명직은 총회가 해산되고 다시금 이사회로 정치권이 넘어간 데 대해 별다른 이의없이 교단 내의 동요가 없도록 무마하고자 하였다.
이제 총회를 연회라 환원하게 되었으니 총회가 없어진 것이냐하면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면 이것이 퇴보가 아니다. 차라리 법을
밟는 계단이라 하겠다. 불원한 장래에는 4년총회를 조직하게 되는
날이 있을 터인데 그 때에는 당당히 총회를 조직하야 감독기관인
그 무엇이라도 우리가 선거하게 될 것이다. . . 년회라도 우리의 목
표는 자치오 총회라도 우리의 목표는 자치이다. 전일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자치의 정신은 변함이 없다. 자치를 향하야 돌진하여야 할
것이다. . . 우리가 주께 봉사하는 데에는 감독정치도 관계없고, 공
화라도 관계가 없다.
즉, 이명직에게 있어서 감독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여기 에서 개교회가 자신들의 교역자를 청빙하는 순수한 의미의 장로교 체제가 부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명직은 항상 자치를 주장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치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V. 한국성결교회 수난기의 이명직
일제말의 한국성결교회는 두 얼굴울 가지고 있다. 일제에 의해 교단이 강제로 해산되었다는 고난의 모습 속에서 한국성결교회는 자긍심을 갖는다. 반대로 일제말의 한국성결교회는 일본의 침략 정책에 동조한 역사도 가지고 있다. 한국성결교회를 포함한 전체 한국교회의 수난은 중일전쟁의 발발(1937)과 함께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에 이명직은 한국성결 교회의 책임자로서 어떻게 일본의 정책에 대응하였는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교회를 수호하고 변호하고자 했는지의 모습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A. 이명직 목사의 친일정책
[활천]에 실린 이명직의 글 중에서 노골적으로 친일적인 요소사 나타난 것은 1937년 10월호에 실린 "성서와 국민"이라는 사설에서부터이다. 여기에서 이명직은 국가에 대한 순종과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일가정에는 가장이 잇고 일사회에는 지도자가 잇고 일국가에는 주권자가
잇으매 일반 민중은 순종하는 것이 지상의 도덕이다. . . 만일 정부로부터
출전을 명하면 그대로 순종하여야 할 것이오 구차한 평화론이나 계명을
방패로 할 것이 없다. . . 금번 사변(중일전쟁)에 관한 모든 사항 곳 몸으
로 할 일이나 시간으로 할 것이나 물질로 할 것이나 주저치 말고 의총이
나마 다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명직은 [활천] 1937년 11월호에 실린 "성서에서 본 민족과 영토관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가가 일동리에 합하고 일동리가 일주군을 일우고 주군이 합하야
일국을 일우고 갑의 나라와 을의 나라가 합하야 다시 다민족 대국
가를 일움이 무삼 괴이함이 잇으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일울 따
름이다. . . 지구 전소유지는 하나님이시오 국가의 흥망성쇠는 부지
런하였는가 게을넌는가에 따라 변동되는 것인줄로 믿는다. 이러케
우리는 멀니 대관적으로 이 우주를 볼 것이오 근시안이 되어 울분
비애할 것이 없다. 만사가 하나님께서 섭리로 지배 않으심이 없는
것이다.
주 예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아니시오 세계인류를 다 구원하야
천국으로 인도하시고저 하는 사랑밖에 없으셨다. . . 주께서는 제자
들이 기대하든바가 배치되는 말슴을 하셨다. 이스라엘 회복 운운의
질문과 성신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라는 말슴과는 소양의 차이다.
교회를 국가운동, 정치운동, 자기출세의 광고대로 삼고저하는 제자
에게는 거의 실망될 말슴이었다. . . 금일에 공연히 시국문제를 구실
삼아가지고 몰러가기 쉬우나 이것도 역시 마역(魔役)이니 속지말고
전진운동을 이르켜야 될 줄로 안다. 시국이 분운할수록 전도가 급선
무로 생각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이 이 시국에 대하여 인심을 안정
통일 시키는데 적절한 봉사인 줄로 생각한다.
구원받는 자가 많아질수록 천국이 넓어지고 아래로는 인류사회에 평
화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보은이요 국가에 대
하여는 보국이다.
이상의 글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명직은 조선과 일본이 하나라는 내선일체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회의 독립운동 참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전도 개념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성결교회의 전도는 재림의 임박성에 기반을 둔 일대일 개인 구령사업에 그 특징을 두고 있다.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중반까지 이르는 수난기에 있어서도 개인을 상대로 하는 전도방식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명직에게 있어서 전도는 사회를 안정시키면서 인류사회에 평화가 성립되게 함으로서 일제에게 봉사하고 보국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는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도 아울러 지적할 수 있다.
국가의식에서 일(逸)하여서는 않이될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결코
무군무부지도가 않이다. 천륜인륜쌍전지교이다. . . 우리가 하느님
께 의뢰하고 신앙하는 것은 령적이며 정신적이며 또한가지 생각할
것은 국가이다. 우리가 령적으로 신앙이 있드라도 육체에 식물을
주고 의복을 입히고 가정을 조직하고 위생을 힘써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니 두가지가 합하여 인간은 생활하는 것이다.
즉 이명직은 국민의식으로서 신사참배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것은 영적인 것이며 국가에 대한 것은 육적인 것이므로 신사참배는 이 육적인 것에 속한다는 이분법적인 논리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사참배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작정 그를 매도할 수만은 없다. 많은 증인들은 그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현실 상황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가 과감히 순교의 길을 택하지 못하고 현실에 순응한 것은 그의 어깨에 한국성결교회라는 무거운 짐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B. 교회를 지키려는 노력 -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와 한국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서는 1920년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1919년의 3.1운동 이후 일제의 사이또 총독이 무단정치에서 문치(文治)로 전환하면서 민족문화에 대한 대망의 자극은 물론 공산주의 역시 세속사상과 같이 유입될 수 있었다. 이에 한국교회는 위기를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당시에 있어서 교회는 미국에 연결되어 있는 듯이 인식되어 있었던 반면 공산주의는 소련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거리감과 함께 보수적인 교회와 현실적이고 사회참여적인 공산주의는 사상적으로도 거리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 이다. 더우기 공산주의는 교회가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던 사회적 하류층을 상대로 호소력있게 받아들여졌으며, 민족의 해방을 말하는 구원의 현실성으로 인해 급속히 수용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한국성결교회 내에서도 이 당시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생활과 작금의 공산주의 사상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었던 듯 하다. 이에 대해 이명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에 사도행전의 긔사로 공산주의라 하여 실행하고자 할진대 성경법
대로 할지니 곳 긔도할 것이며 성신에 충만함을 받을 것이며 죄악을 회
개하라. 그리하면 곳 공산주의가 회개하고 복음주의가 될 것이니라.
이 당시에 있어서 이명직은 공산주의에 대해 성서적으로 반대는 하였지만 강력하게 비판을 가한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의 비판은 교회 내에서 공산주의를 부르짖는 사람에게 향한 것이었다.
오날날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되지안케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것은, 一曰 무식소치오 二曰 세상 사람의 마음을
좀 잇글어볼가 하는 비열한 생각으로 좃차나온 것이오 三曰 말하는
자신이 중생치 못한 까닭에 성경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변별
력이 없는 사라믜 일에서 지나지 못하나니라.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이 매우 강경하게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종말론을 바탕에 두고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강경한 비판은 1937년에 이르러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불법의 기미]란 무엇인가 이는 곳 적화사상이다. 현사회제도를 부정
하야 소위 허무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이런 것들은 곳 [불법의
긔미]니 그 원동력은 장차 출현할 적기독에서 발현한 것이다. . .여차
사상과 주의의 선도자는 저 소연방이다.
요사이의 하는 짓을 보면 만소국경에 침입을 한다. 조전의 태도를 취
하는 것은 심상치않은 일이다. 만일 일소전쟁이 되는 날에는 반다시
예언과 같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로서아가 패하야 그 예언이 성취될
줄로 믿는 바이다.
적룡의 한 일과 적색로서아의 하는 일을 비교하야보아 이 적룡이 적색
로서아를 이용하야 자기의 뜻을 이루고저 하는 줄 가히 알 것이다. 이
제 적룡의 한 일을 보면 종교박해, 인명살상, 사상혼란의 큰 운동을 이
르킨 것이다.
여기에서 이명직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공산주의의 온상인 소련을 교회와 일제의 공동의 적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일제에 있어서 소련은 군사적인 것과 함께 혁명적인 공산주의의 사상 역시 체제 안정에 있어서 위협이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또한 기독교계에 있어서도 종교를 탄압하는 소련은 마치 계시록에 나오는 적룡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명직은 이러한 조치를 통해 일제로부터 교회에 대한 탄압은 물론 불이익을 최소화함으로서 교회를 유지 시키고자 하였던 것 같다. 이는 다음의 글에서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방공 현하 일독이(일본, 독일, 이태리) 삼국은 방공협정을 하야가지고
무력으로 방공을 실시하고 있거니와 공산주의라는 사상은 무력으로만
넉넉지 못하다. . . 우리는 진리의 말슴으로 이 사단 즉 적룡래의 사상
과 건전히 싸움을 하여야 하겠다. 현금은 교회가 곤난한 입장에 서서
있는 것 같으나 인내하고 나아가면 최후의 승리는 진리에 있음을 단언
한다.
VI. 결 론
지금까지 1921년에서 1943년까지의 한국성결교회사와 이명직 목사를 연관하여 고찰하였다. 한국성결교회에 있어서 1920년대는 부흥의 시대였다. 1921년의 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1920년대의 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본다. 이명직 목사는 사실상 그 산파역을 담당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성령 체험과 그 간증을 통해 경성성서학원의 대부흥운도이 일어났으며 그 여파는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렇듯 뜨거운 부흥의 열기는 1930년대의 열렬한 전도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명직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입각한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 하면서 직접 전도를 독려하였다. 이 시기에 정남수 목사가 인도하던 [장막전도대]는 자동차를 사용하면서 역동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던 대표적인 전도대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하나님의 교회 사건이라는 최초의 교단 분열을 체험했던 우울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 아픔은 그대로 일제말의 수난기로 이어졌다.
이명직 목사의 친일행각이나 사설은 후일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를 비방하는 자료로 이용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물론 그의 친일행각과 사설 그리고 발언들에 대해 그것을 옹호하거나 덮어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했었어야 하는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1921년 이후 그의 사상은 극보수로 선회했고, 사회 전반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에게느 오직 복음과 그 전파만이 소중했다. 그러던 그에게 현실참여에 대한 강요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신사참배 라는 정치적, 종교적 문제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은에 없는 수긍을 그는 감당해야 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한국성결교회가 그 어깨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당시에 가장 중요했던 문제는 교회를 살리는 것이었다. 단지 교단의 대표라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고민을 해야했고, 또 고통을 당한 그를 생각해야 한다. 더우기 그의 노력과 인내에도 불구하고 교단이 폐쇄되고 성서학원이 문을 닫았을 때에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역시 생각해야 한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언제나 심적 고통을 받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결교단이 재건될 때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교단이 해산당하게 된 모든 책임을 지고 공직에 나서지 않았다. 그 후 1951년 서울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그는 학교 발전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1961년에 정년으로 학장직을 사임하고 명예학장이 되었다. 그리고 1973년 3월 30일 충정로 신학교 구내 자택에서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성결교회라는 대강은 아직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이 강의 끝은 어디인가? 주님의 재림이라는 거대하고 끝없는 바다에 닿는 그 때일 것이다. 그 때까지 잔잔할 때나, 풍랑이 칠 때에나 한결같이 이 강을 따라 내려갈 사람을 이 시대 한국성결교회는 찾고 있을 것이다. 이명직 목사는 바로 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준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 참 고 문 헌 >
< 1차 자료 > - [활천]에 게재된 이명직 목사의 사설들.
"남녀교제의 근신", 1923년 3월.
"은혜기(上)", 1924년 9월.
"은혜기(下)", 1924년 10월.
"금일 교회내에 류행하는 이단 [디상텬국]설", 1926년 9월.
"성경이 과연 공산을 인뎡하는가?", 1927년 7월.
"전투의 교회", 1928년 11월.
"복음의 전사 정남수형을 환영함", 1931년 5월.
"그리스도교회의 장래(一)", 1931년 6월.
"위일의 도래", 1931년 11월.
"무화과 나무 가지는 연하였다", 1932년 2월.
"구령주의로 돌진", 1932년 4월.
"디방자치와 급속 교화운동", 1932년 5월.
"백마의 승첩", 1932년 8.9월 합본.
"평양교회분규에 대하야", 1934년 4월.
"제2회 총회를 맟이고", 1934년 6월.
"헌법발표에 대하야", 1936년 10월.
"김정기형에게서 사과장을 받고", 1937년 6월.
"교계의 방적운동", 1937년 8.9월 합본.
"성서와 국민", 1937년 10월.
"我의 증인이 되리라", 1938년 6월.
"성서에서 본 로서아와 그 운명", 1938년 8.9월 합본.
"적룡은 무엇인가", 1938년 10월.
"전도보국", 1939년 3월.
"성서에서 본 민족과 영토관념", 1939년 11월.
"종교와 국가", 1940년 8.9월 합본.
"교회와 세상", 1927년 8월. - 작자 미상.
< 단 행 본 >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성결교회사] 서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1992.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성결교회 역사와 문화 연구회, [성결교회 인물전I] 서울: 성결교회 역사와 문화 연구회, 1990.
이명직,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약사] 경성: 동양선교회성결교회 이사회, 1929.
이응호, [한국성결교회사I] 서울: 성결문화사, 1992.
이천영, [성결교회사] 서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1970.
< 학술지 & 잡지 >
강근환, "초기 한국성결교회에 나타난 선교정책적 특색" [신학과 선교] 제4집 (1977).
박명수, "성결교회와 '신앙선교'" [활천] 1993년 2월.
------, "성결교회와 재림신앙" [활천] 1993년 3월.
------, "일제시대 한국성결교회의 자립문제" [활천] 1994년 5월.
------, "각성운동의 원형, 1921년의 경성성서학원의 대부흥운동" [활천] 1995년 3월.
------, "일제말의 종교정책과 한국성결교회" [화해] 1995년 여름.
허경삼, "한국성결교회의 선교정책과 교회성장의 과제" [신학과 선교] 제4집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