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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제/저자사항
공기와 꿈: 운동에 관한 상상력
바슐라르, 가스통[1884-1962]정영란Bachelard, Gaston
발행사항
서울 : 이학사, 2000
형태사항
텍스트파일JPG498p.; 23cm
총서사항
(신화 종교 상징 총서; 08)
주기사항
원표제: L'air et les songes
Bachelard, Gaston
서지: 색인수록
이용가능한 다른 형태자료: KMO200100213
표준번호/부호
ISBN 8987350266(세트) ISBN 8987350274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181.5 듀이십진분류법-> 153.3
자료이용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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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바슐라르에게 니체는 전적인 생성의 철학<une philiosophie du total devenir>자이다. 따라서 바슐라르는 니체가 생성의 이미지를 그려내려 소묘한 시론을 따라가고자 한다. 이에, 바슐라르가 니체에게 붙은 불의 철학자 이미지를 벗겨내고 공기의 철학자로 보고자 하는 시도는, 니체를 그 이상으로 읽고자 하는 시도이지, 그와 동떨어져 있거나, 내려뜨리려는 시도는 결코 아니다. 바슐라르가 다소 급진스러워 보일지라도, 생을 통해서 생을 넘어서려는 니체철학의 공식 없이 니체를 이해하는 것이 힘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슐라르의 다른 사원소 시론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읽어야 할 것은 그 의의인 것이지 니체가 불에 가까운지, 공기에 가까운지 하는 그 자체로 소요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바슐라르가 니체의 역동성과 공기의 이미지를 일관할 때, 우리는 마치 니체의 철학적 소재가 공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슐라르를 응원하게 된다. 나는 그간 니체의 “해가 진다”라는 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이 책까지 읽기에 이른 것인데, 바슐라르는 그 시에 대해서도 답해준다. ‘공기’성 그 자체로 삶을 전위하고자 하는 니체의 ‘권능’이 이 시에는 충분하게 담겨 있다.
그렇지만 무리스러운 부분도 있다. 바슐라르는 니체의 시론을 상승의 시론으로 읽고자 많은 시들에서 수직의 이미지를 그 자체로 상승으로 읽어내버린다. 그러한 독법 중 하나가 맹금들 가운데에서Zwischen Raubvögeln에서 있다. 바슐라르는 여기서 ‘전나무’(이 책에서는 ‘소나무’로 번역)의 수직에서 ‘상승’을 읽어내는데, 여러 시어 상 여기서 전나무의 이미지는 심연을 향하는 하강의 이미지이다. 바보만이 시인만이 독법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나 자신이 니체에게서 치솟음보다는 내려감 이미지가 도드라져서 당황하던 차에 ‘역추적’이라는 들뢰즈의 용어를 썼었는데, 이 글을 보고서도 이 말을 수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니체를 이렇게 읽지 않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텍스트가 이렇게 쓰였는데…….
*일부러 이 책을 찾아서 읽었다. 집에 이 책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이 책에 여기 저기 꼼꼼히 메모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는, 이리 열심히 읽은 책이었나 다시 놀랐다. 그런데도 그런 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에 다시 다시 놀랐다. 내게도 남겨진 날이 있으니.
본문
제5장 니이체와 상승적 정신 심리
……
그리하여 우리는《시선»과 서정적 작품인『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만을 주로 검토 함으로써, 니이체의 경우 시인으로서의 그가 사상가로서의 그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니이체는 수직적 시인, 정상의 시인,2》상승적 시인의 전형 그 자체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재란 그 자신만으로 일류 를 이루는 바. 니이체는 역동적 상상력을 구사한 가장 특별하고도 가장 뚜렷한 전형들 중의 하나임을 우리는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특히 그를 셸리와 비교하면서, 고지를 향한 탈출들이 매우 다른 운명들을 드러내 보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셸리와 니이체라는 두 시인은 공기의 동력학에 둘 다 충실하면서도 서로 다른 (상상적) 두 유형을 제시하고 있음을 우리는 증명하고자 한다.
우선은 우리가 니이체의 상상력(을 정의하기 위해 그것)에 부여하는 공기적 특성을 입증하기로 하자.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니이체의 시 에 나타나는 공기의 이미지들이 갖는 특이한 생명력과 힘을 드러내 보여 줄 우리의 논지를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기에 앞서, 니이체적 시학에 나타나는 대지, 물, 불과 같은 이미지들이 가지는 부차적 성격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232~233.
니이체가 불의 시 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란 한층 까다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천재적 시인은 온갖 원소들의 메타포를 다 구사하기 때문 이다. 게다가 불의 메타포는 언어의 자연스러운 꽃이다. 말이 지닌 부드 러움과 격함은 그것들을 표현할 불을 찾아낸다. 모든 열정적인 웅변은 불길 같은 응변이다. 다른 원소들을 사용한 메타포가 활기 있고 명료하 게 되기 위해서는, 항상 약간의 불이〔불이라는 원소가〕필요하다. 다채 색을 띤 시는 대지의 금속들로 그 색을 취하는 불길이다. 그래서 니 이 체 적 불에 관한 많은 자료도 쉽사리 수집될 수 있다. 하지만 좀더 가까이 서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 불이 엄정한 의미에서 질료적이 아니라는 것. 그 불은 니이체의 물질적 상상력에 침투하여 그것에 독특한 조성 을 부여해 주는 질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241.
“니이체적 불은 차가움을 원한다’라는 기이한 역설을 깨닫게 될 때, 역동적인 동시에 덧없는[일시적인〕니이체적 불의 성격은 한층 분명해 질 것이다. 그것은 보다 큰 가치로 전환되어야 할 상상적 가치이다. 상 상 세계 역시, 아니 그것이야말로 가치 전환 속에서 생기를 띠는 것이 다.「불의 징표」(《시선》, p. 272)에서는 다음과 같은 계시적 시행들을 읽 게 된다.
백열하는 이 불꽃은
—멀리 냉기를 향해 욕망의 혀를 날름거리며,
더한층 순수한 고도를 향해 항상 목을 돌린다-
마치 초조하게 곧추선 맨과도같이.......
244.
따뜻함과 차가움의 이러한 종합은 차가운 태양. 빛나는 싸늘한 태양의 이미지들 속에서도 발견된다. 저 아름다운「밤의 노래」(짜라투스트라) 에서 다음과 같은 절을 읽을 수 있다. "태양들은 각기 제 궤도를 따라 운 행하니,그것이 그들의 길이어라. 그들은 가차 없는 그네들의 의지를 따 르노니, 그것이 바로 그들의 냉정함이어라." 이 시에서 침착한 오만만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그 무엇도 제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그런 긍지 가 이미지로 옮겨졌다고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낌 없이 베푸는 선행에 굳이 참여하지 않으려는 저 기이한 의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태양은 그 열기를 (주기는 주되) 차갑게 준다. 역동적 상상력에 있어서는. 무엇 을 주느냐보다도 주는 방식, 준다는 것의 에너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너무나도 격렬하게 그 역을 향해 있는 (이런) 불은 질료적 풍요로움보다는 역동적 성격이 더 두드러진다. 니이체에게는, 불이 있는 곳에 곧바 로 긴장과 역동이 있다. 이러한 불은 따스한 열량주의의 행복감을 주는 노발리스적 불과는 거리가 멀다. 불은 솟아오르는 선trait일 뿐이다. 불 은 순수한 공기와 고지의 냉기를 향한 열정적 의지이다. 니이체적 불은 공기와 차가움이라는 상상적 가치를 선호하게 하는, 상상적 가치 변환의 한 요인이다. 차가움이 니 이 체적 공기의 주요한 성격들 중 하나임을 장 차 우리가 밝히게 될 때면, 상상적 원소들이 보여 주는 이 같은 변증법들 을 우리는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 논중의 적극 적 대목으로 넘어가서, 공기야말로 니이체의 물질적 상상력을 위한 진 정한 질료임을 증명해 보자.
245.
니이체는 자기 자신을 공기 적 인간이라고 말한다.
비구름이여 , 그대들이 무슨 상관이랴?
우리들처럼 자유로운 정신, 공기적 정신, 환희에 찬 정신에게는.
“시선”, p. 232
과연 니이체에게 있어 공기는 우리 인간 자유의 질료, 위버멘쉬적 환희의 질료 바로 그 자체이다. 니이체적 환희가 초극된 인간의 환희이둣. 공기는 일종의 초극된 질료이다. 대지의 환희를 풍요와 중량이라 말한 다면 물의 환희는 부드러움과 휴식이며, 불의 환희는 사랑과 욕망이며, 공기의 환희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니이체적 공기는 기이한 질료이다. 그것은 질료적 성격이 없는 질료이다. 그것은 따라서 전적인 생성의 철학에<une philiosophie du total devenir> 적합한 것으로 존 재를 특징짓는다. 상상력의 왕국에서 공기는 질료적이거나 내면적이거 나 소화에 관련된 몽상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공기는 우리를 물질 적 예속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 자유의 물질이다. 니 이체에게 있어 공기는 아무것도 싣고 오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주 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무병〉의 엄청난 영광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 아닌가? 빈 손을 하고 있는 저 위대한 증여자는 우리에게 손 내밀고 싶은 욕망을 덜어 준다. 그는 우 리가 아무것도 받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획득하는 데 익숙해지도록 만 든다. 니이체는 묻는다. “기꺼이 취하려 한 자에게 감사해야 할 사람은 바로 증여자가 아니겠는가?” 공기의 물질적 상상력이 어떻게 공기의 역 동적 상상력에 자리를 내주게 되는가를 우리는 곧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공기가 약탈자의 진정한 고향이라는 사실은 벌써 여기서부터 이해될 수 있다. 공기는 공격적이고 당당한 자유 속에서 마치 벼락처럼. 독수리나 화살처럼. 의연하고 지고한 시선처럼 (약탈자가) 단숨에 가로지르게 되는 무한한 물질이다. 공기 속에서는 백일하에 희생물을 가져가며, (약탈자도) 숨지 않는다.
246~247.
물질적 상상력에 있어 비상이란 발명해야 할 기계 장치가 아니라 전 환시켜야 할 물질로서. 모든 가치들을 전환하는 기초이다. 즉, 우리의 존 재가 대지적인 것에서 공기적인 것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온 땅을 가볍 게 할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대지가 “가 벼운 것"이 될 것이다.
이어지는 글은예 위대한 사상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글은 인간에게 스 스로를 사랑하는 자기 애 속에서 스스로를 북돋는 진정한 힘을 얻기를 가르친다. 이처럼 풍요한 니이체적 사상과는 대조적인 단순한 우리의 이 고찰을 두고. 사람들은 또 우리에게 비난을 가하려 들기 쉽다. 그들은 우 리가 철학자로서의 본업을 버리고 단순하게 문학적 이미지들이나 수집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고 또다시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듭 같 은 논지로써 우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바, 문학적 이미지란 고유의 삶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심오한 사고 위를 스쳐 가는 자율적 현상 과도 같다. 우리는 바로 이 자율성을 확실히 드러내 중명하고자 하는 것 이다. 니이체의 예는, 위대한 시인과 위대한 사상가로서의 이중의 삶을 드러내므로 인상적이다. 니이체적 이미지들은 시와 사상을 각각 움직이 는 이중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 니이체적 이미지들은 물질적으로. 또 역동적으로 잘 특수화된 상상력이 주는 물질적이자 역동적인 일관성 을 입증한다.
256~257.
*이 절은 특히 니체 시론을 잘 드러내는 장이라서 전부 옮긴다.
존재가 전적으로 자신 밖으로 던져지는 이 같은 투하가 있는 후에, 존재가 자기 아래 있는 자기를 보게 되는 이러한 해방적 비상이 있은 후에, 니이체는 종종 심연을 응시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의 해방을 더 잘 깨닫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거기에서 떨어지지 않을 고지에서 내려다 본 낮은 곳은 정상을 향한 보완적 도약을 허락한다. 바로 이런 사실로부터, 정적인 이미지들도 매우 특이한 역동적 삶을 부여 받게 된다. 니이체 의 작품을 계속 다루면서, 그리고 어떤 이미지들에 대해서는 보다 일반 적인 검토 속에서 차후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 우리는 니이체 에게 친근한 어떤 (특별한) 이미지들의 수직적 역동화에 대해 살펴보기 로 하자.
예를 들어 심 연 가장자리의 소나무가 있다. 쇼펜하우어도 그 나무를 주목한 바 있다. 그는 식물과 바위의 고된 공생, 중력의 힘에 대항하여 버티려 하는 나무의 노력을 묘사하면서, 그것을 생존 의지의 한 증거로 삼았다. 반면 니이체에게 있어 나무는 덜 휘어져 있으며, 보다 더 수직적 인 존재로서 추락에 감연히 도전한다.
하지만, 그대, 짜라투스트라여!
그대 또한 심연을 사랑하는가, 소나무처럼 ?
소나무는 그 뿌리를 움켜잡는다,
암벽마저도
전율하며 심연 속을 응시하는 곳에서
«시선». 불역서. P. 267.
이 전율은 결코 현기증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니이체주의란 근본적으로 극복된 현기증이다. 니이체가 심연 가까이로 오는 것은 상승의 역동적 이미지들을 찾기 위해서이다. 심연의 실제성은, 널리 알려진 오만의 변 증법을 통하여, 솟아오르는 힘에 대한 의식을 니이체에게 제공한다. r악 셀j47)에 나오는 인물 사라Sara처럼, 그는 기꺼이 말하리라. "나는 오직 날개로써 도전하여 감연히 심연을 벌할 뿐이다;
니이체적 나무가 주는 교훈을 좀더 자세히 추적해 보자.
그는 심연 가장자리에서 멈춘다,
주위의 모든 것이 내려가려고만드는 곳에서,
거친 조약돌들, 격렬한 급류들의
성급함 곁에서
그는 참을성 있고. 관대하고, 굳고,
조용하고, 고독하다.
「맹금들 사이에서」
여기에 이어 (그 소나무는) 곧고. 몸을 일으킨 채 서 있다고 덧붙이기로 하자. 즉, 그 나무는 수직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두자. 그는 그 어떤 지하수로부터도 수액을 자아올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끗끗함을 바위로부터 수혜 받지도 않는다. 그는 대지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물질이 아니라 힘이며, 자주적인 힘이다. 그는 그의 힘을 자신의 투사 projection, 바로 그 속에서 찾는다. 심연 가장자리에 있는 니이체의 소나
무는 공기적 상상력의 우주적 벡테항력이다. 아주 정확히 말하자 면, 그것은 의지의 상상력을 두 유형으로 구분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 으며, 우리로 하여금 의지는 두 가지 유형의 상상력과 관련되어 있음을 더 잘 보도록 해준다. 즉, (의지의 상상력의 두 유형이란) 한편으로 의 지-질료volonté-substance로서 쇼펜하우어적 의지이며. 다른 한편으로 의지-힘 volonté-puissance으로서 니이체적 의지이다. 전자는 유지하려는 반면 후자는 솟구치려 한다. 니이체적 의지는 그 스스로의 속력에 의해 지지된다. 그 의지는 어떤 생성, 달리 말해 물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런 생성의 가속화이다. 심연은 늘 당겨져 있는 시위처럼, 니이체로 하여 금 그의 화살을 위로 쏘아 올리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연 가장자리에 서, (보통) 인간의 운명은 아래로 떨어진다. (반면) 심연 가장자리에서, 위버멘쉬의 운명은 위로 솟구친다, 마치 소나무처럼, 푸른 하늘을 향하 여 . 악의 감각은 선의 특성을 더욱 강조한다. 비탄에의 유혹은 용기를 더 욱 강조한다. 심연의 유혹은 하늘을 더욱 강조한다.
니이체의 작품에서 나무가 진정으로 직 립에 도취해 있는 다른 많은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고하고 강한 의지의 이미지를 나 타내기 위해 니이체는「환영 인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한 한 그루 나무에 의해 풍경 전체가 생기를 얻는다.
오 짜라투스트라여. 그처럼 자라나는 자를
나는 소나무에 견주어 본다. 솟아오르며, 묵묵하고, 튼튼하고, 고독하며, 훌륭한 목질로, 더할 나위 없이 탄력 있고 멋진 재질로 된 나무에.
—강하고 푸른 가지들로 마침내 자기 자신의 주권을 자기가 장악하려고 손을 뻗고, 바람과, 뇌우와, 그리고 고지에 친근한 그 모든 것에게 대담한 질문들을 던지는 나무.
—그리고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더욱 준엄하게 대답하는, 명령이며 승리자인 나무—아! 그런 나무를 보기 위해서라면 누군들 산 높이 오르기를 망설이겠는가?
우울하거나 실의에 잠긴 모든 사람이 그대의 나무를 보고 힘을 얻는다. 오 짜라투스트라여, 그대 모습은 불안한 자를 안심시키고 그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혀 주나니.
—『짜라투스트라』, p.407
곧바른 이 나무는 의지의 축일 뿐만 아니라 니이체주의에 특유한 수직적 의지의 축이다. 그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바로 관조자가) 자신의 몸 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니, 그 나무의 역동적 이미지란 이뤄 내놓은 일 속 에서가 아니라 활동 그 자체 속에서 스스로를 관조하는 의지. 바로 그것 이다. 오직 역동적 상상력만이 우리에게 의지에 관한 적절한 이미지들을 제공할 수 있다. 물질적 상상력은 미처 말로 아직 표현되지 않은 의지, 악이나 혹은 반대로 무구함 속에 잠든 채 있는 의지의 잠과 꿈들밖에는 보여 주지 못한다. 물질적이라기보다 한층 더 역동적인 니이체의 나무는 악과 선을 잇는 전능한 연결선, 땅과 하늘을 잇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끈이다. “그가 더 높은 곳과 빛을 향해 솟아오르면 오를수록, 그의 뿌리 는 땅속 더 깊이 내리박힌다, 어둠과 심연, 즉 악(惡) 속으로."(「산허리에 있는 나무에 대하여」,『짜라투스트라, 초판, p. 57) 땅속 두엄의 작용 없이는 꽃이란 (피어날 수) 없으며. 몸을 홀로 빼돌려 피어날 수 있는 선 이란 없다. 선은 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가장 높은 산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고 나는 전에 물었던 적이 있다.
그래 나는 그것들이 바다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는 증거는 산 정상의 바위와 멧부리에 씌어 있다. 가장 높은 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그 정상을 획득하는 것이다.
니이체의 시에 상승의 테마들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글들은 그야말로 수직적 정복에 관한 일종의 미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부서지기 쉬운 흙, 산 사람의 발 밑에 구르는 돌멩 이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모든 것이 아래로 내려오는 경사를 따라 거슬 러 올라가야만 한다. 가파른 길이란, 우리의 역동성에 역의 역동성으로 써 대답하려는 능동적 적수이다.
산사태로 무너져 내려앉은 흙더미 한가운데로 당당하게 올라가는 오솔길, 험하고 고독한 길. 산의 한 오솔길이 도전적인 내 발걸음 밑에서 뿌드득 뿌드득 소리를 내었다.
더 높이 위를 향해-나의 발을 아래로 잡아당겨 저 아래 낮은 곳으로, 심연으로 끌어내리려는정신, 나의 악마이자 최대의 적인 무거움의 영원에 항거하면서.
더 높이 위를 향해-내 귀 속에 납을 퍼 넣고, 내 뇌 속에 납덩이 같은 사상들을 방울방울 부어 넣는 반은 난쟁이. 반은 두더지,자기도 절룩거리며 남가지 절룩거 리게 만드는 이 무거움의 영이 나를 깔아뭉개듯 내게 매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 p. 223.
그들의 질료와 역동성 속에서, 니이체적 이미지들은 아무리 깊이 되새겨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정신 도덕적 삶에 대한 한 실험 물리학을 제시한다. 즉, 니이체적 이미지들은 정신 도덕적 전환 을 유도하게 될 이미지들의 전환을 정밀하게 보여 준다. 이러한 실험 물 리학은 물론 특별한 실험가예와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이 조작적이거나 근거 불명한 일이거나 임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 은 영웅화 과정에 있는 자연, 영웅적 삶에 접근하는 우주에 일치한다. 니 이체주의를 산다는 것은 생 에너지〔생기〕의 변환, 인간 존재 내부에서 공기적 질료를 산출해야 할 추위와 공기의 물질 대사를 사는 것이다. 존 재를 존재의 이미지들만큼이나 크고 힘차게 만드는 데 그 이상이 있다. 하지만 오해 말기를. 이미지들을 그들의 역동적 현실 가운데서, 상상하 는 정신 심리적 힘들의 전환으로 간주하는 바로 그때에. 그 이미지들 속 에서 이상은 실현되며. 그것도 힘차게 실현되는 것이다. 세계가 우리 안에서 꿈꾼다 라고 노발리스주의자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투사된 자 신의 몽상 속에서. 또 꿈꾸려는 자신의 의지 속에서 전능한 니이체주의 자는 보다 사실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세 계는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꿈꾼다.
264~269.
하지만, 결정적 성공을 거두는 순간, 니이체적 비상이 지니는 격렬하
고 공격적인 성격을 (그 무엇보다도 강하게) 지적해야 할 것이다. "때로 나는 화살처럼 햇볕에 취하여 황홀경에 떨며 날아가곤 하였다.”(「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j,8■짜라투스트라J, p. 285) 독수리는 하늘 을 발톱들로 움켜쥐는 듯이 보인다. “나의 독수리는 깨어나 나처럼 태양 을 경배한다. 그 독수리는 발톱들로 새로운 빛을 낚아첸다.T조짐『짜 라투스트라』, p. 472) 힘찬 비상은 매혹적인ravissant 비상이 아니라. 약 탈적인ravisseur 비상이다. 난다는 엄청난 행복이 가지게 되는 저 힘에의 돌연한 취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몽상가가 우월감을 남에 게 과시하고 그가 갖게 된 돌연한 전능성했을 뽐내는 일이 꿈속의 비상 에서도 드물지 않다. 맹금이란 비상 능력의 필연이다. 공기는 다른 모든 원소들처럼 그와 싸우는 전사행소를 가진 것 같다. 상상력과 자연은 이런 진화에 있어 서로 일치한다. 상상력은 운명적으로 공격성을 가진다.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짜라투스트라)에서 니이체는 이 렇게 썼다. "오직 새들만이 인간 위의 존재로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인 간도 날기를 배운다면, 아! 그의 맹렬한 탐욕은 그 얼마나 높이 날아오 르려 하겠는가!” 맹금들이야말로 가장 높이 나는 새들이다. 고공의 오만 한 철학자59》는 즉시로 이 선언의 환위 명제도 참되다고 인정할 것이다. 니이체의 공기적 삶은 땅으로부터의 먼 도피가 아니라 하늘로의 공격이다. 이 (니이체적) 공격은 상상 세계의 순수를 간직한 용어들, 온갖 전통 적 이미지들을 벗어던진 용어들을 통해, 반역한 천사들을 그려 낸 밀턴 적 서사시를 재연한다. 그리고 이 공격은 여기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공격적 상상력이다. 지극히 높은 하늘이 정복자의 웃음으로 진동하고 있음을 들어 보라. "윙윙거리는 날개를 가진 내 큰 욕망은…… 아주 먼 곳으로, 산들 너머로, 고공을 향하여. 웃음의 한복관으로•…" 나를 종종 이끌어 갔다.”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짜라투 스트라I, p.285) 선량함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이 거대한 비상과 함께. “야생적 예자•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야생적 예지 라는 관념을 숙고할 때에 가치들이 선회하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될 것이다. 정신 도덕적 진리는 동일축상에 놓인 가치들의 운동인 착란 적인 예지, 침공당한 하늘, 공격적인 비상 둥과 같은 모순 속에서 진화한 다.
275~276.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서서히 유도된 완만한 이륙이 아니라. 존재의 솟구침이다. 떠오르는 해 앞에서 니이체적 인간이 갖는 최초의 감각 은 의지에의 내밀한 감각, 결단의 감각으로서. 숙고의 회오를 멀리하 고_왜냐하면 모든 숙고란 은밀한 후회나, 정도의 깊이는 다르지만 어 쨌든 은닉된 채 억제된 회오들에 대한 싸움이기에—스스로 움직임으로 써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런 감각이다. 떠오르는 해는 다가 오는 새날의 결백이며, 세계는 새롭게 일어난다. 새 벽이란 그러므로 일 어나는 우리 존재의 전신 감각이다. 이 새로운 태양이 나의 태양이 아닌 가? “그대는 나의 광원으로부터 솟구치는 빛이 아닌가? 그대는 내 지성의 자매혼이 아닌가?"(p. 235) 이토록 밝게 보기 위해서는,에 내 자신이 밝게 빛나야 하지 않겠는가?
역동적 상상력, (다시 말해) 세계를 기계론적 운동이으로 파악하고 마는 시각을 역동성으로써 팽창시키는 상상력에 있어서는, 떠오르는 해와 아침 을 맞은 존재62》는 상호 역동적 유도 관계 속에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배웠다. 우리는 함께 우리 자신 위로, 우리 자신을 향하여 떠 오르는 것을 배웠고, 그리고 구름 끼지 않은 미소를 짓는 것을, 먹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눈으로 머나먼 무한을 가로질러 미소하는 것을 배웠다. 우리들 아래로는 속박과 목표와 실수가 비 오듯이 들끓을 (바로 그)때 에.” 그렇다,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비약이며, 순수한 충동이다. 그것은 분명 치명적인 화살이지만 범의째t 없는 화살이다. 역동적 긴장인 동시 에 웃음 띤 이완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떠오르는 해가 쏟아 붓는 곧바른 화살들이다. 그 아래에는, 예의 그것들이 비처럼 부글거리듯 들끓으며. 곰광내를 풍기고 처량하게 웅성인다. 꼿꼿이 자세 바른 인간은 하늘에 쓴 화살63》과 함께 기상하고 돌진한다.
277~278.
많은 이미지들 중에서. 일출(의 이미지)은 즉각적 교훈을 준다. 그것은 즉자성l’immédiat의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일출은 니이체에게 정경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제시한다. 니이체에 있어서 그것은 관조 의 차원이 아니라 결단의 차원에 속한다. 니이체적 해돋이란.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의 행위이다. 그것은 힘의 영원 회귀, 수동형에서 능동형으로 옮겨진 영원 회귀의 신화, 바로 그것이다. 힘에의 의지의 각성이라는 견 지에서 볼 때 영원 회귀의 신화는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태양처 럼 획 하니 일어날 줄 아는 자는, 매일 다시 기꺼이 수용하는 운명, 매일 다시 새로운 운명애amor fati로써 정복하는 그러한 운명 속에 자기 존재를 던져 넣을 줄 안다. 우주적 회귀의 함과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니 이체적 몽상가는 밤을 향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해가 뜨게 하겠다. 나는 기상 시간을 선포하려는 밤을 지샌 초병 이며, 밤이란 깨어남의 긴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즈음,영원 회귀에 대한 의식은 투사하는 의지에 대한 의식이다. 의지라는 바로 그 의식 . 바로 그 확신으로서 우리 존재는 스스로를 거듭 발견하며, 바로 이 런 우리 존재가 세계를 다시금 투사하는 것이다. 역동적 상상력을 최우 선시키지 않은 채, 만약 우주를 똑같은 밀을 빻으며 끝없이 도는 거대한 풍차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니이체적 우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우주는 죽어 있으며. 운명에 의해 무화된 것일 뿐이다. (반대로,) 니이체적 우주는 항상 젊은 충동들에 의해 재발견되는 순간들 속에 산 다. 그것은 떠오르는 해들의 이야기이다.
279
여기서 우리는, 정신 도덕적 삶에 관한 이와 같은 모든 고찰들은 역동적 상상력의 우위를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빈약한 메타포로 보일 뿐이리라고 단언함으로써 결론을 짓기로 하자. (그와 반대로) 진정으로 이미지들을 살고자 하는 자는 모럴의 심리학이 가지는 근본 현실을 이해 할 것이다. 그런 그는 니이체적 형이상학의 중심에 위치하게 될 것이니. 이 형이상학이란_형이상학이란 말은 니이체에게는 탐탁치 않은 표현이겠지만—힘의 관념론이다. 이 관념론의 기본 명제는 다음과 같다. 상 승하고 하강하는 존재란 (바로), 그에 의해서 모든 것이 상승하고 하 강하게 되는 존재이다. 무게란 이 세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마음 위에. 곧 인간 위에 있다. 무거움[중력〕을 정복할 자. 즉 위버멘쉬에게는 초자연, 곧 공기적 존재의 정신 심리가 상상하는 그런 자연이 주어질 것이다.
282~283.
더 추운 하늘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연기처럼
한겨울을 헤메야만하는
너는 창백하게 멈춰 서 있으니.
시선, p.200
이 차가움이야말로 니이체적 디오니소스주의의 독특한 성격으로, 도취나 열기와 절연한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기이한 디오니소스주의이다.
284.
그러나〈상상적 기후〉는 실제 기후보다 더 결정적이다. 니이체의 상상력은 그 어떤 체험들보다도 (그에게 더) 유익하다. 상상력은 상상적인 고지의 기후를 확산하며 독특한 서정적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니이체 적 가치 전환들 중 최초의 것은 이미지들의 전환이다.71》그것은 심연의 풍요를 높은 곳의 영광으로 변형시킨다. 니이체는 심연의 피안, 즉 악의 피안과, 고지의 피안,즉 숭고함의 피안을 추구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사 회적 위세라는 전통에 그저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정신 도덕적인 힘들을 이 상상적 양극 간에 팽팽하게 당겨 놓으며. 물질적이 며 실용적인 온갖 "진보"는 우리 무거운 존재에 아무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는 그저 수평적 진보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거부한다. 무거 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대지적인 것을 공기적인 것으로 교환하는 데에 니이체는 그의 모든 서정적 에너지를 투여한다. 그는 심연으로 하여금 산정의 언어를 말하게 한다. 동굴은 문득 공기적인 메아리를 되돌려 보 낸다. “오 환희여…… 나의 심연이 말하노니. 나는 나의 가장 깊은 심연 을 빛을 향해 되돌려 놓았도다!”(「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짜라투스트 라!, 초판, P. 314) 그래도 혹자는 여전히 상징이나 알레고리. 메타포들 에 대해 우리에게 말할 것이고, 이미지를 지적하기에 앞서 (니이체의 글 이 가진) 정신 도덕적 교훈을 먼저 지적하라고 철학가72》에게 요구해 댈 것이다. 하지만 (니이체의) 이미지들이 정신 도덕적 사상과 일체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그토록 놀라운 생명력과 지속성을 갖지 못하 였을 것이다. 니이체주의란,우리가 보기에는 상상력의 마니주의이다. 그것이 힘을 북돋우고 유익을 주는 이유는 바로 그 상상력은 더할 나위 없이 활발한 이미지들에 의해 유발된 우리의 역동적 존재를 활동케 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가 진정으로 활동하는 그러한 활동 속에서, 그가 그 의 존재를 진정으로 참여시키는 그러한 행위 속에서는. 높이 [고지〕와 깊 이[심연〕라는 이중적 조망이—우리의 논지가 근거 있는 것이라면—반 드시 발견될 것이다. 풍요예와 비약세을 향한 저 이중적 의지는「여명」 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도 느껴지지 않는가. "그대는 그를 모른 다. 그는 많은 무게들을 뒤에 달고, 그 모두를 높은 곳으로 이끌어 을라 갈 수 있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대 나름의 미미한 도약에 비추어, 그가 이 무게들을 뒤에 달고 있으니 그는 아래에 머물고 싶어하는 자이라고 판단해 버리고 만다.”(§475) 니이체는 정녕 다음과 같은 단 한 줄의 위 대한 시 속에서도, 상승적 정신 현상을 말한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중 한 사람임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대는 그 모든 산정들의 심연이다.
—하피즈에게, 시선, p. 209.
285~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