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칼빈, 사역자들의 모델
누군가가 존 칼빈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일련의 교리들이나 아니면 그의 잘 알려진 저서 <기독교 강요>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어야 한다: “존 칼빈이라는 이름을 들은 후에 사람들은 ‘목회자들이 따라야 할 본’에 대해 생각할까? 정말로 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본을 그의 삶과 사역에 남겨 두었는가?” 이 글에서 나는 그가 바로 그런 인물인 것을 주장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두 가지 근본적인 사실에 기초해서, 즉 그의 삶의 방식과 설교 방법에 기초해서 입증하려고 한다.
칼빈의 삶의 방식
만약 정말로 존 칼빈이 목회자들의 모본이라면, 그가 살았던 방식에 그런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에 있어 좋은 본이 되라고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알기에 (빌 4:9, 살전 1:7, 살후 3:9, 딤전 4:12, 벧전 5:3), 우리는 존 칼빈이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정말로 살았는지를 묻는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인생을 간략히 개관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우리가 본받을 가치가 있는 그의 삶의 구체적인 특징들 몇 가지를 조명함으로써 결론을 내려볼 것이다.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피카드리 지방의 노용에서 제라드 칼빈과 조안나 칼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법률가였고, 또한 로마 가톨릭 지역 성당의 행정관이었다. 그의 어머니 조안나는 다섯 아이를 가진 경건한 여인이었는데, 둘 째 아이가 바로 존 칼빈이었다. 존은 교회에서 자라났고, 훗날 그의 아버지는 그를 훗날 사제로 만들고 싶어했다. 존의 아버지 제라드는 또한 그의 아들이 좋은 교육을 받기를 원했는데, 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한 돈을 자기의 직업에서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존 칼빈의 어린 시절 학업에 대해 윌리엄 다우닝 (William Downing)은 이렇게 말한다: “칼빈은 그의 아버지 덕에 좋은 교육의 혜택을 받았고, 학식 있고 저명한 가문들과 교류하며 자랄 수 있었다. 비록 그는 평민 계급이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 동료, 동급생들은 귀족 가문이었다. 그는 개인 교습의 혜택을 누렸고, 학업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열의를 가진 총명한 학생임을 보여주었다.”
다우닝 박사는 칼빈의 14살 무렵에 대해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칼빈은 “사제로서 로마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파리 대학교로 보내졌다. ... 대학생으로서 그는 동년배들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전해진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는 그의 삶을 훈련하고 지적인 발전을 이루도록 도와준 유능한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1528년에 그는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나이 18살 때의 일이었다.”
1528년 즈음에 칼빈은 법을 공부하러 오를랭 (Orleans)으로 옮겨갔다. 리드 (W. S. Reid)는 이렇게 기록한다: “비록 그는 파리대학에서 사제직을 위해 훈련 받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노용 성당의 주교와 사제들과의 논쟁으로 인해서 자신의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를 오를랭으로 보내 피에르 드 에트왈 (Pierre de Etoile) 밑에서 배우게 했다. 후에 칼빈은 부르주 (Bourges)에서 인문주의 법률가 안드레아 알키아티 (Andrea Alciati) 밑에서 공부했다. 칼빈이 개신교도가 된 것은 아마도 부르주에서였을 것이다.”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흐릿하고 비천한 상태에서 건져내셔서 복음의 전령이자 사역자라는 가장 영예로운 직분을 맡기셨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의 아버지는 내가 신학을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법률가라는 직업이 그 종사자들에게 부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깨닫자 아버지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셨다. 그래서 나는 철학을 배우는 일을 그만두고 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비록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라는 은밀한 고삐로 결국 나의 진로를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끄셨다.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예기치 못했던 회심을 통해 몇 년 동안이나 완고하게 굳어 있던 내 마음을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유순한 상태로 만드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제의 미신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나를 그런 깊은 진창에서 끌어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받았던 참된 경건의 이 순전한 맛은 나로 하여금 더욱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오르게 했고, 그래서 나는 다른 공부들은 비록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다 냉담하게 공부하게 되었다. 일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보다 순전한 교리를 갈망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배우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여전히 초신자이며 신병에 불과했던 나를.”
1536년 즈음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한 칼빈은 조용한 학자로서 살기 위해 독일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로마 제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를 통과하는 우회로를 택해야 했다 (이 제네바는 윌리엄 파렐 (William Farel)의 지도 아래 한달 여 전에 개신교주의로 넘어온 도시였다). 칼빈은 거기서 단지 하룻밤만 머물 생각이었지만, 이곳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가 1564년 5월27일 죽을 때까지 향후 23년간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해 머무르게 될 도시였다. 1564년 4월 25일 그가 죽기 대략 한달 전에 칼빈은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나, 존 칼빈, 제네바 교회의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자 여러 질병으로 인해 쇠약해져 있는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가 나 같은 불쌍한 피조물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 모든 죄와 약함 가운데 있는 나를 참으셨을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나의 일을 통해 그분을 섬기도록 그분의 은혜의 참여자로 나를 삼으셨다는 것이다. ... 나의 전 구원이 달려 있는 그분의 예정 외에는 내게 아무런 소망도 피난처도 없다는 이 믿음, 그분이 내게 주신 이 믿음 안에서 내가 살고 죽음을 나는 고백한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이 내게 주신 은혜를 껴안고, 내 모든 죄가 그를 통해 장사 지낸 바 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를 받아들이다. 모든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우리의 위대한 구속주의 피로서 나를 씻어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그래서 내가 그분의 얼굴을 뵈올 때 그분과 닮은 자로 보이기를 나는 겸손히 간구한다.”
이것으로 칼빈의 삶에 대한 연구는 마무리 짓는다. 이제 그가 우리를 위해 본을 보여주었던 세 가지 주된 특징들을 살펴볼 것이다.
학생으로서 칼빈의 삶
존 칼빈은 자신의 학업에 완전히 몰두했던 사람이었다. 어떤 과목이든 (라틴어, 논리, 법, 그리스, 히브리어 등등) 관계없이 그는 열심과 자기 훈련의 정신을 가지고 온전히 학업에 자신을 바쳤다. 워필드 (B. B. Warfield)는 칼빈에 대해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열심있는 학생으로 관심을 기울인 과목들을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익혀갔고, 동료 학생들로부터 그는 같은 학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생같다는 평가를 받으며 존경을 얻었다.” 칼빈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했던 테오도르 베자 (Theodore Beza)는 자신의 동료를 추억하며 이렇게 적었다. “칼빈은 후에 몽테규 (Mont Aigu) 대학으로 옮겨갔고, 거기서 뛰어난 업적을 달성한 스페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의 지도 아래서 가장 부지런한 학생이었던 칼빈은 문법 수업에서 동료 학생들을 월등하게 제치고 변증법 (Dialectics), 소위 말하는 인문학 (Arts) 과정으로 넘어갔다.”
칼빈이 초기 학창 시절에 지켰던 엄격한 시간 계획표에 대해서 파커 (T. H. L. Parker)는 칼빈의 하루는 대게 다음과 같았으리라고 말한다: “아침 일과 - 정해진 경건회 - 를 위해 4시에 일어나서 미사가 드려지는 6시까지 강의를 하고, 미사 후에는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8시부터 10시까지는 토론이 이어지는 수업이 있었고 11시에는 성경이나 성인들의 전기 낭독, 그리고 기도와 학내 공지 사항이 동반되는 식사를 했다. 12시에 학생들은 오전의 일과에 대해 질문 받았다. 그러나 1시에서 2시까지는 공적인 낭독이 있는 휴식시간이었다. ... 이제 오후 기도 시간이 찾아오고, 그 기도 시간 이후에는 오후 토론 수업이 있었다. 시종을 드는 이들이 책을 낭독하는 저녁 식사 시간과 겨울에는 8시, 여름에는 9시에 시작되는 잠자는 시간 사이는 더 많은 질문이나 예배를 위한 시간으로 사용되었다.”
칼빈이 학생 시절 살았던 이런 열심, 엄격함, 그리고 훈련으로 채워진 삶은 그의 전 생애에 걸친 특징일 것이다. 전 생애를 걸쳐 칼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쉼 없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일한 사람이었다. 어떤 분야를 공부했든지 간에, 칼빈은 뛰어난 성적을 보이는 학생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공부하는 모든 분야에서 학문적 탁월성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칼빈의 겸손한 삶
참된 겸손이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반드시 정기적으로 열망해야 하는 그런 것이다. 겸손할 때, 설교자들은 가장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빌 2:1-8). 디도서 1장 7절에 있는 사도의 말, 목회자는 “자기 고집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 마디 말에서 이제 우리는 성 바울의 의미를 파악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라고 부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자기 고집대로”하지 않고, 기꺼이 배우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은 온유해야 하고, 조용한 영을 가져야 한다. 교만하지 말고, 다른 이의 덕을 세우기를 힘써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끊임없이 배우려고 하고 행실에 있어서도 친절해야 한다.”
칼빈의 겸손에 대해 윌리엄 와일만 (William Wileman)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칼빈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제네바에서 트로일렛 (Troillet)이라는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탐했던 이가 많은 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죽음이 그에게 임박했을 때, 그는 그 동안 자신이 함부로 대하고 잘못을 범했던 목사를 보고자 했다. 칼빈은 그 죽어가는 사람에게 지체 없이 달려왔고,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로했다. ... 그는 분노가 많고 편협하다고 비난 받았다. 그런 비난은 그것을 말하는 이의 입술에 묻어 있는 잘못된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성찬시의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에 대한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의 논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천성적으로 기질이 불 같았던 루터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비난했다. 칼빈이 여기에 끼어들었다. 불링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루터가 당신에게 한 것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대한 독설을 담은 긴 글을 출판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당신께 침묵하고 있어달라고 감히 요청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이들이 그런 식으로 아무런 해명의 기회도 없이 공격받는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것이 정략적으로 어떤지는 결정하기 어렵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먼저 루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기억해주기를 바랍니다. 그가 어떤 인내와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어떤 기민함과 효과적인 배움을 가지고 지금껏 자신을 적 그리스도의 왕국을 뒤집어 엎고 구원의 교리를 전파하는데 헌신하였는지를 말입니다. 저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비록 루터가 나를 마귀라고 부를지라도, 그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너무도 커서 나는 기꺼이 그를 하나님의 탁월한 종으로 인정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편지는 칼빈의 겸손한 성품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비록 이 편지의 다른 곳에서 그는 루터의 행동에 대해. 예를 들어, 그는 루터가 “그에게 천성적으로 주어진 그 맹렬함을 진리의 원수들에게 대항해서 사용하고 주의 종들에 대해서 휘두르지 말 것을” 소망한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칼빈이 여전히 루터를 하나님의 참된 사람으로 높이 평가하려고 하려고 했지, 분노나 교만으로 그에게 반응하려 하지 않았음을 본다.
슬프게도 오늘날에는 펜을 들어 언어로 다른 이들을 쉽게 공격하고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는 이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칼빈은 그러지 않았다. 앞서 인용한 글들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이들을 기꺼이 용서하려고 하고 자신에 대해서 중상모략한 이에 대해서도 그를 그리스도가 선택하신 종으로 보려는 사람을 본다.
칼빈의 인내의 삶
‘칼빈은 힘든 삶을 살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삶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그는 천식, 편두통, 궤양성 치질, 위궤양 같은 여러 질병들로 인해 고생했지만, 결핵 때문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해서 이 모든 시험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 칼빈은 자신이 가진 신체적인 어려움들이 자기 주인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숨을 쉬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리라 결심했다. 힘든 시기를 거치는 동안 칼빈이 보여준 성품에 대해서 베자 (Beza)는 1562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의 연약함이 너무 커져가고 있어서 그는 이미 보다 나은 삶으로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위로하고 권면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계속해서 설교하고 신학을 강의했다. ... 이듬해 (1563) 칼빈의 병은 더 중해지고 늘어나서, 그토록 강하고 고귀한 정신이 그렇게 연약한, 수고로 인해 지치고 고통으로 인해 부서진 육체 안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을 좀 돌보라는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 비록 언젠가 그가 공적인 임무에서 물러나 있었을 때도 (이것도 칼빈은 매우 꺼려하며 간신히 받아들였다), 그는 여전히 싫증 내지 않고 집에서 자신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답을 하거나 그의 필경사들이 끊임없이 그의 말을 받아 적도록 했다. 이에 대한 증거가 그의 매우 진지한 권면인 <성 삼위일체를 모독하는 이들을 대항하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권면들 Admonitions to the Poles against the blasphermers of the Holy trinity>, 또한 그가 말과 글로 리옹 공의회에서 파견된 이들에게 준 대답들이다. 그리고 라틴어로 쓰고 후에 그가 스스로 프랑스어로 번역한 <모세가 쓴 4권의 책들에 대한 주석 Commentary on the Four Books of Moses>과 그의 마지막 수고의 열매인 <여호수아 주석 Commenatary on the Book of Joshua>이다. 그는 이 책을 바로 이 시기에 쓰기 시작해서 죽기 바로 직전에 마무리했다. 여러 질병으로 인해 고생했지만, 그는 결코 견고한 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거나, 나아가 기독교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오직 그의 눈을 하늘에 고정하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오 주여 언제까지이니까!” 심지어 건강할 때도 그는 그의 형제들이 당하는 고난들을 보며, 밤이나 낮이나 이를 자신의 육체적 고통들보다 더 괴로운 것으로 여기면서 이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만약 우리가 그에게 아플 때는 구술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충고하거나 간청했다면, 그는 “뭐라구요? 여러분들은 주께서 저의 게으른 모습을 보시게 하려는 것입니까?”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 우리는 존 칼빈과 비교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때때로 우리는 아주 작은 고난만 닥쳐도 금새 우리가 맡은 사명에서 도망가곤 하지만, 칼빈은 그러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심지어 그의 겉사람이 낡아지고 있을 때도 그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기로 결심했다.
이 글의 한 부분을 마무리하면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내야 할까? 존 칼빈은 그의 동료 목회자들에게 따라야 할 탁월한 본을 남겼다는 평이한 결론이 아닌가? 초반부에 말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자들은 다른 이들이 따를 수 있어야 하는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학생으로서, 겸손의 사람으로서, 그리고 여러 시험 중에 인내한 사람으로서, 그는 이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본받을 가치가 있는 모델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추천하고 있다.
칼빈의 삶은 분명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본을 남겼다. 이제 우리는 그의 설교 방법도 동일하게 본받을만한가라는 두 번째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그의 인생에 크나큰 은혜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설교는 끔찍하리만큼 형편없어서 그를 본받아 목회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설교의 본은 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존 칼빈은 어떤 종류의 설교자였는가? 먼저 그는 성경의 책들과 장들 전체를 설교하고 다양한 구절들의 의미를 해설한 뒤에 그 구절들이 가진 진리들을 청중의 마음과 양심에 적용하던 그런 설교자였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종류의 설교는 흔히 강해 설교라고 불려왔다.
칼빈이 정말로 이런 방식으로 설교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런 다음에 우리가 따를만한 본을 남겼는지를 살펴보자. 우리는 먼저 <칼빈의 설교 방법>을, 다음으로는 <칼빈의 설교의 예>를 살펴볼 것이다.
칼빈의 설교 방법
칼빈은 “성경의 책들과 장들 전체를 설교”하던 설교자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한 증거는 압도적으로 많다. 칼빈의 설교 방법에 대해 스티븐 로손 (Steven Laws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적인 설교에 ‘주목했던’ 한 주목할만한 강해자는 제네바의 기념비적인 개혁자, 존 칼빈이었다. 말씀 중심적이고 본문이 이끄는 설교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헌신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1541년부터 1564년까지의 23년간 이 스위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회중들에게 사려 깊게 강해했다. ... 사실, 칼빈은 성경의 각 책들 전체를 설교하려고 했기에 그의 강해시리즈가 끝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예를 들어 매주 사도행전을 설교해서 마치기까지는 4년이 걸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46번, 고린도 전후서를 186번, 목회 서신을 85번, 갈라디아서를 43번, 에베소서를 48번에 걸쳐 설교했다. 후에 그는 공관복음서 설교를 시작했는데 이는 1559년 봄에 시작해서 5년 뒤 1564년 5월 27일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일한 기간 동안 그는 욥기를 159번, 신명기를 200번, 이사야서를 353번, 창세기를 123번에 걸쳐 다른 강해설교들과 함께 설교했다.”
제임스 스팃징어 (James F. Stitzinger)는 칼빈의 설교에 대해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신실함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세히 풀어내면서 보낸 그의 삶이다. 제네바의 원로 목회자로서 칼빈은 1549년부터 그가 사망한 1564년까지 격주로 주일과 주중에 하루 두 번씩 설교했다. 그는 구약성경만 가지고 2천편이 넘는 설교를 했다. 그는 욥기를 해설하는데 1년을, 그리고 이사야서를 해설하는데 3년을 썼다.”
확실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설교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이것이 칼빈의 방법이었다. 휴즈 올리판트 올드 (Hughes Oliphant Old)는 칼빈의 설교에 대해서 “그의 강해 설교의 철저함과 완결성, 그리고 체계적인 특성은 분명 주목할만한 것이다”라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칼빈의 설교의 예
이제 우리는 칼빈의 설교에서 몇 가지 예들을 발췌해서 검토할 것인데 이는 그가 참으로 본문들의 의미를 파악하고 해설한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그의 청중들에게 적용한 사람이었는지를 보기 위한 것이다.
먼저 칼빈의 요한복음 1:1-5절 설교를 살펴보자. 그가 어떻게 청중들에게 그 본문을 해설했는지를 주목해보라. 본문을 소개한 뒤에 그는 말한다:
“이제 본문을 살펴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성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의도하는 것은, 성자가 세상에 나타나셨을 때 그 때부터 그 분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시듯이, 그분의 덕도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을 때 그 때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시간에 그리고 시간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분의 덕은 그분 안에 거하고 있었지 다른 어딘가에서 취해진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태초부터 하나님의 말씀 안에 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덕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이를 아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 요한은 여기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오신 것이고, 우리를 당신께로 구속하신 분이 오신 것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에서 말해진 것을 하나씩 다 살펴봐야 합니다.”
그 다음 칼빈은 주의 깊게 각 구절의 의미를 절마다 풀어낸다. 그는 이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 구절을 적용한다:
“이것이 성 요한이 우리가 받은 구속의 효과를 알도록 우리를 준비시키기 원했던 방법입니다. 그런 다음에 성요한은 또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그의 피조물들 안에 선포하시는지를 보여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그분의 능력으로 보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알기를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에 의해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보다 탁월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우리가 다음의 사실들도 알기를 권면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살아있는 형상을 태초부터 새겨놓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하셨기에,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드는 법을 배워야 하고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일반적인 유익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우리에게 부으신 그 빛이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도록, 그래서 성령에 이끌림을 받은 우리가 우리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시려는 성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계속)
[1] 헤리티지 개혁교단(Heritage Reformed Congregations)에서 발행하는 공식 교단 매거진 The Banner of Sovereign Grace Truth 2018년 3-4월 호에 “John Calvin – a Model for Ministers”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 허락을 받고 게시합니다. 저작권은 The Banner of Sovereign Grace Truth와 저자에게 있습니다.
[2]롭 벤추라 목사(Rev. Rob Ventura)는 로드 아일랜드 컴버랜드 지역에 있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침례 교회의 목회자이다.
바른신학 바른신앙에서 가져온 글
프로스원어성경연구
http://cafe.daum.net/prosbib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