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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관 53주년 기념 행사(안)
1. 대한민국 ROTC제4기 임관 53주년을 맞이 하여 우리 영남대 121ROTC제4기 동기회에서는
작년도 52주년 행사에 이어 이번 53주년 행사를 안동 선비문화 탐방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2. 일시 및 행선지(안)
일시 : 2019년 10월 8일(화)(4기 동기회 월례회 하는 날)
행선지 : 대구 반월당역(08:30) ---- 안동 병산서원(10:30~11:00) --- 하회마을(11:25~14:00)
(관람 및 중식) ---- 신경북도청 청사(14:10~14:50) ---- 삼강주막(15:30~16:20) ---
대구 반월당역 도착(18:10)예정
3. 경비 : 1인당 50,000원 정도(중식비, 버스 대절료, 입장료 등)
부족분은 4기 동기회비에서 지원
4. 10월 8일은 모든 일정을 미리 비워 두시고, 동기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꿈 많든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남은 여생을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 갈 수 있도록 합시다.
5. 자세한 내용은 수시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6. 동기생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행선지 정보
안동하회마을
(한국의 미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하회마을!)
하회마을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 성마을이며, 와가와 초가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특 히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류운룡 선생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 성룡 형제가 자라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고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 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해당하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327m의 화산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 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가 있는 지역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들의 집들이 정남 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 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 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 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마을은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우리나라의 열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2010. 7. 31) 되었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의안에서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양동’은 주거 건축물과 정자(亭子), 정사(精舍), 서원(書院) 등 전통 건축물들의 조화 와 그 배치 방법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 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문집, 예술작품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 및 문화적 성과물과 공동체 놀이, 세시풍속 및 전통 관혼상제 등 주민 들의 생활과 신앙에 관계된 무형유산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점 도 높이 평가하였다.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 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 들의 삶 자체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안동하회마을 연혁
• 조선 초기 공조전서를 지낸 류종혜(柳從惠) 공(公) 입향(1392) 후 풍산 류씨 600여 년간 세거
• 대유학자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1539~1601) 선생과 임진왜란시 영의정 으로 국난 극복에
큰 공을 세운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 선생 등 많은 인물 배출
• 조선시대 양반·서민 문화가 공존, 전통 와가·초가 유지 및 보존
• 1980. 12. 30. 경북도 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
• 1984. 1. 14. 국가민속문화재 제122호(국가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
• 1991. 4. 1. 하회마을관리사무소설치조례에 의거 관리사무소 개소(현 종합안내소)
• 2008. 6. 1. 하회마을관리사무소 이전(현 위치)
• 2010. 7. 31.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 등재
• 2017. 3. 21. 국가중요민속자료 ⇒ 국가민속문화재(명칭 변경)
◆안동하회마을 문화재 보유 현황
• 국보 : 하회탈 및 병산탈(제121호 12종 13점), 징비록(제132호)
• 보물 : 양진당(제306호), 충효당(제414호), 류성룡 종가유물(제460호)·문적(제160호)
• 사적 : 병산서원(제260호)
• 국가민속문화재 : 안동하회마을(제122호), 화경당(북촌댁)고택(제84호), 원지정사(제85호),
빈연정사(제86호), 작천고택(제87호), 옥연정사(제88호), 겸암정사(제89호),
염행당(남촌댁)고택 (제90호), 양오당(주일재)고택(제91호), 하동고택(제177호)
• 국가무형문화재 : 하회별신굿탈놀이(제69호)
• 천연기념물 : 하회마을 만송정 숲(제473호)
• 시도민속문화재 : 지산고택(제140호)
• 시도기념물 : 화천서원
• 문화재자료 : 상봉정
◆하회 16경
• 立岩晴漲(입암청창) 형제바위에 흐르는 맑은 물
• 馬巖怒濤(마암노도) 갈모바위에 부딪치는 성난 물결
• 花峀湧月(화수용월) 화산에 솟아오르는 달
• 蒜峯宿雲(산봉숙운) 구름에 잠긴 마늘봉
• 松林霽雪(송림제설) 눈 개인 뒤 만송정 솔숲
• 栗園炊烟(율원취연) 율원에 오르는 밥 짓는 연기
• 秀峯霜楓(수봉상풍) 첫서리 내린 남산 수봉의 단풍
• 道棧行人(도잔행인) 상봉정 비탈길을 지나는 나그네
• 南浦虹橋(남포홍교) 남쪽 나루의 무지개 다리
• 遠峯靈雨(원봉영우) 원지산에 내리는 신령한 비
• 盤磯垂釣(반기수조) 물가 반석에 낚싯대 드리운 낚시꾼
• 赤壁浩歌(적벽호가) 부용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 江村漁火(강촌어화) 강촌의 고기잡이배 불빛
• 渡頭橫舟(도두횡주) 옥연정 앞 강나루에 매어둔 배
• 水林落霞(수림낙하) 수림에 지는 저녁노을
• 平沙下雁(평사하안) 드넓은 모래톱에 내리는 기러기
◆입장료 경로 : 무료 일반 : 5,000원
◆하회세계탈박물관
하회 세계 팔 박물관 하동고텍
하회마을 입구에 위치한 이 곳에는 우리나라 탈 250여점과 외국탈 250여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어
동·서양의 서로 다른 탈문화를 비교해 볼 수 있다.
◆하동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77호)
1836년 용궁현감을 지낸 류교목이 지었으며, 마을의 동쪽에 있어 ‘河東古宅’이라고 부른다.
‘ㄷ’자 모양의 안채와 서쪽으로 꺾여 나오게 지은 사랑채가 이어져 ‘弓’자 모양을 하고 있다.
독립된 대문채가 본채와 달리 초가로 지어져 소박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염행당(남촌댁)
류치목(1771~1836)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90호)
처음에는 단출하게 지었는데, 그의 증손자인 류영우가 1905년에 크게 확장하였다.
1954년에 불이 나서 안채, 사랑채와 후대에 지은 작은 사랑채가 소실되었으나 현재 복원되었다.
◆만송정 솔숲(천연기념물 제473호)
겸암 류운룡 선생이 젊은 시절에 조성한 것으로 풍수 지리적으로 마을 서쪽의 지기가 약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조성한 일종의 비보림이다.
또한 부용대와 낙동강 백사장과 더불어 하회마을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펼쳐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양진당(보물 제306호)
풍산에 살던 류종혜공이 하회마을에 들어와 15세기 경에 최초로 지은 집 으로 풍산류씨 대종택이다. ‘養眞堂’이라는 현판은 풍산류씨 족보를 최초로 완성한 류영의 호에서 따온 것이며, ‘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은 겸암 선생과 서애 선생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충효당(보물 제414호)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으로, 평생을 청백하게 지낸 선생이 삼간초옥에서 별세한 후 그의 문하생과 지역 사림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졸재 류원지를 도와 건립하였다. ‘忠孝堂’ 이라는 당호는 선생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유래하였다.
◆화경당(북촌댁)(국가민속문화재 제84호)
1797년에 류사춘이 사랑채, 날개채, 대문채를 짓고, 1862년에 그의 증손자 류도성이 안채, 큰사랑채, 사당을 지었다. 집의 규모가 웅장하고 대갓집의 격식을 완벽하게 갖추어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화경당은 ‘和’로 어버이를 섬기고, ‘敬’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삼신당 신목(보호수)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로 마을의 정중앙에 위치하며 아기를 점지해 주고 출산과 성장을 돕는 신목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이곳에서 마을의 평안을 비는 동제를 지낸다.
◆양오당(주일재)(국가민속문화재 제91호)
부호군 류만하(1624~1711)가 충효당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그의 아들 주일재 류후장이 증축하였다. 이 집은 사랑채, 문간채, 안채, 일각문과 마주하고 사당이 있는 전형적인 전통가옥이다. 대문 앞 안팎을 가리는 아담한 내외담은 조선시대 남녀유별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작천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87호)
이 건물의 건축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처음에는 두 채였으나 1934년 대홍수로 문간채가 쓸려나가고 지금은 ‘一’자 형의 안채만 남아있다. 한 건물인데도 사랑방과 안방 사이에 작은 토담을 세워 사랑손님과 안채의 부녀자가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빈연정사(국가민속문화재 제86호)
겸암 류운룡 선생이 1583년에 서재로 쓰려고 지은 것이다.
이 정사의 이름은 부용대 절벽 아래의 깊은 소를 빈연이 라고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류운룡 선생은 정사 앞마당에 작은 연못을 파고 연꽃도 길렀다고 한다.
◆원지정사(국가민속문화재 제85호)
서애 류성룡 선생이 부친상을 당하여 낙향한 후, 1576년에 서재로 쓰려고 지은 것이다. 2층 누각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함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遠志’는 서쪽의 원지산에서 나는 약초로서 마음을 다스려 정신을 맑게 하는 효능이 있어 선생이 즐겨 드시던 것이다.
◆옥연정사(국가민속문화재 제88호)
서애 류성룡 18 부용대 선생이 1588년에 지은 정사이다.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임진왜란에 대해 기록한 ‘懲毖錄’을 쓴 장소로도 그 의미가 깊다.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강물이 이곳에 이르러 깊어지는데, 깨끗하고 맑은 물빛이 옥과 같아서 정사의 이름도 ‘玉淵’이라고 하였다.
◆겸암정사(국가민속문화재 제89호)
겸암 류운룡 선생이 1567년에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을 위해 지은 정사이다.
‘謙菴亭’이라는 현판 글씨는 그의 스승인 퇴계 이황이 직접 써준 것이다.
이 곳에서는 벼슬길을 멀리하고 자연 속에서 학문에만 전념하고자 했던 겸암 선생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부용대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한 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에서 바라보는 하회마을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선유줄불놀이
과거에 하회마을 선비들은 음력 7월 초순이나 중순 무렵에 부용대 일 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시회(詩會)를 열고 뱃놀이·줄불 놀이·계란불놀이를 겸하였는데 이것이 곧 ‘선유줄불놀이’이다.
이 무렵이 되면 하회마을 선비들은 물론 인근의 시인묵객들까지 모여 서 나룻배를 타고 형제바위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강 중앙에 배를 멈추고 술잔을 나눈다.
이 때 부용대에서 강 건너 아래쪽의 만송정에 이르는 공중에 매달아 놓은 수 가닥의 동아줄에서 뽕나무 뿌리로 만든 수 백 개의 숯 봉지들이 차례대로 타들어가면서 허공을 은은하게 밝히 니 이것을 ‘줄불’이라고 한다.
또한 겸암정사에서 옥연정사에 이르는 강물 위에는 달걀 껍질 속에 기 름을 묻힌 솜을 넣고 불을 붙인 수 백 개의 달걀불들이 수면을 아로새 기며 유유히 떠내려 오니 이것을 ‘연화(蓮花)’라고 한다.
이런 가운데 배 위에서는 흥겨운 음주가무와 함께 시회(詩會)가 벌어진다. 표주박에 기름 먹인 솜을 넣고 불을 붙여 강물에 띄운 뒤에 그 불이 옥연정사 앞 의 소(沼)에 이를 때까지 시 한 수를 짓는 놀이를 펼친다.
만약 시간 내 에 시를 지으면 일행은 “낙화(落火)야!”하고 크게 외친다.
그러면 부용 대 절벽 위에서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이들이 잘 마른 소나무를 묶어 둔 ‘솟갑단’에 불을 붙여서 절벽 아래로 내던진다.
큰 불덩이가 절벽에 부딪히면서 화려한 불꽃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다.
이 놀이는 1930년대 초엽까지 전승되다가 단절되었으나, 오늘날 다시 복원하여 매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 중에 2회 재현된다.
◆하회별신굿탈놀이
전국의 탈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하회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에서는 이 탈을 쓰고 그들의 삶과 희노애락을 표현한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만날 수 있다.
◈ 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
◈ 기간 및 일시
• 1월~2월 : 매주 토.일 14:00~15:00
• 3월~12월 : 화, 수, 목, 금, 토, 일 14:00~15:00(월요일 제외)
◈ 공연장소 : 하회마을 탈춤공연장
◈ 문 의 처 : (사)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054)854-3664
※ 성수기, 탈춤페스티벌 기간에는 공연 일정이 변경될 수 있으니 전화 문의
[네이버 지식백과] 안동하회마을 - 한국의 미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하회마을! (지역정보 : 안동시)
병산서원
하회마을과 함께 꼭 찾아야 할 곳이 바로 병산서원이다. 낙동강의 물돌이가 크게 S자를 그리며 하회를 감싸안아 흐르는데, 그 물길이 감싸는 중심에 있는 화산 자락의 양쪽 끝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병산서원으로 가려면 하회 가는 길에서부터 왼쪽으로 갈라진 샛길로 들어서야 한다. 왼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풍산 들 한자락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산굽이를 끼고 돌면서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한 좁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느티나무가 의젓하게 버텨선 효자마을 입구를 거쳐 몇 굽이를 돌아가면 너른 시야가 펼쳐지면서, 낙동강변의 모래사장이 멀리 바라보이는 위치에 병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풍천면 병산리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고장에 왔을 때 면학하는 유생들을 가상히 여겨 내려준 토지 8백 두락을 받기도 했다. 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에 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며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에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는 병산서원의 사적지 면적은 6,825평에 이른다. 건물과 건물을 둘러싼 담장과 그 주위를 통틀어 그러하다. 그러나 병산서원이 시야로 누리는 땅과 강과 하늘이 어찌 6천 평에 한정되랴. 보이는 모든 풍광을 병산서원은 다 끌어안고 있으니 그것이 우리가 이곳을 찾는 까닭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서원 설립의 역사에서 보면, 초창기인 16세기 초반도 아니고 남설기인 18세기 이후도 아닌 17세기 초반에 지어졌다. 서원이라는 사설교육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이후에 건립된 서원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병산서원의 배치나 구성은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서원의 전형을 보여준다. 서원의 기본 배치는 성균관 문묘나 고을의 향교들처럼 남북 일직선상에 외삼문·누각·강당·내삼문·사당을 놓고, 강당 앞쪽으로는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놓으며, 강당 뒤쪽에 전사청과 장판교를 두었다. 그리고 외곽에는 이 모두를 감싸는 낮은 돌담을 두르고, 사당공간에도 특별히 담을 둘러 출입을 엄히 통제하였다. 병산서원은 이 기본 배치를 충실히 살리면서 살짝 축을 비껴 사당을 두었는데, 전체적인 조화로움은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 다른 군더더기가 없으니 엄격하면서도 권위적이지 않은 공간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병산서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가면 마주하는 문이 복례문(復禮門)이다. 솟을대문인 복례문의 이름은 ‘克己復禮’에서 따온 듯한데, 세속된 몸을 극복하고 예를 다시 갖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삼문 안쪽은 물건을 둘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서쪽 칸의 가마는 향사 때 제수를 운반하는 의례용 가마이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으로 길게 선 만대루 아래로 강당인 입교당이 보인다. 만대루 아래는 급경사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니 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마음과 몸을 다시 한번 추스리게 하는 역할도 한다.
만대루 아래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있다. 이 집은 ‘입교’, 곧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그 이름에 걸맞는 강당으로 서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에 온돌을 들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이고, 서쪽의 조금 더 큰 2칸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이며, 마루는 원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 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서재도 각각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을 들였다. 이 건물들은 남향하지 않고 동향 또는 서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강당을 향하도록 한 것이니, 서원이 지녀야 할 엄격성을 고려한 배치이다.
누 아래를 고개 숙여 지나서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이 당당히 버티고 서 있다.
입교당과 동재 사이로 빠져나가면 정면에 길고 높은 계단이 마주한다.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로 오르는 길이다. 사당은 문과 담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데, 단청이 칠해져 있는 문은 아무 장식이 없는 다른 건물들과 대조를 이룬다. 삼문으로 된 신문(神門)은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음력 4월과 10월의 첫째 정일(丁日)의 향사 때에만 열린다. 존덕사 동쪽에는 제수를 마련할 때 사용하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서쪽에는 각종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전사청이나 장판각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촐한 집들이다.
지금까지 올라가면서 건물을 보았다면 이제는 건물에 앉아서 직접 이곳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던 사람의 눈으로 살펴보자. 병산서원의 건물들은 겉에서 보면 매우 무심히 지어진 듯 보이지만 실은 기거하는 사람의 눈이나 마음을 곳곳에 담고 있다. 먼저 존덕사의 신문 앞 계단 위쪽에서 내려다보면 건물 지붕들 너머로 멀리 강이 보인다. 가장 중요한 공간인 강당 마루에서는 만대루가 길게 펼쳐진 지붕 위쪽으로 위엄이 서려 있는 병산과 하늘이 보인다. 강물은 만대루 누각의 기둥 사이로 찰랑거린다.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길게 이어진 만대루(晩對樓)는 두보의 시 한 귀절인 “翠屛宜晩對”에서 따온 것이다. 만대루를 오르자면 통나무를 깎아 걸친 나무계단이 먼저 눈에 띈다. 신을 벗은 발에 닿는 나무의 감촉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만대루에 오르면 머리 위로 휘어진 굵은 통나무 대들보가 물결치듯 걸쳐 있다. 역시 자연스러움을 최대한으로 살려 편안함을 주고 있다.
수많은 사람을 수용하고도 남을 이 누마루에 앉으면 낙동강과 주변 병산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시간과 공간을 모두 까맣게 잊게 할 만큼 사람을 취하게 한다.
만대루에 앉아 바라보는 승경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까맣게 잊게 할 만큼 사람을 취하게 한다. 휘돌아가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위치한 병산(甁山)은, 『영가지』의 지도에 ‘청천절벽’(晴川絶壁)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그토록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이라는 뜻일 게다.
가까이로 눈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면 서원의 바깥 앞쪽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복례문에 이어진 담장 구석에는 1칸짜리 뒷간이 있는데 서원 뒷간이어선지 깔끔하다.
서원 입구 돌담 모서리에 있는 단정한 뒷간과는 달리 고직사 앞에는 짚과 대나무로 둘러친 야외용 뒷간이 있어 눈길을 끈다. 서원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사용하였을 것이라 여겨 ‘머슴뒷간’이라고도 부른다.
서원 마당 곳곳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특히 복례문에 들어서서 만대루로 오르는 계단 앞의 화단과 사당 계단 양옆, 장판각 주위에 많다. 장판각 앞쪽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을 심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얘기에서부터 선비의 상징으로 여겨져오던 나무이니 서원과 잘 어울린다. 병산서원에 그밖에 별다른 조경시설이 없는 것은, 주변 풍광 자체가 뛰어나서 보기만 해도 자연을 가득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한가운데 들어감으로써, 가두거나 소유하지 않고 자연을 누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연관이 잘 드러나 있다.
대청마루에 서면 만대루가 눈앞에 길게 펼쳐진 지붕 위쪽으로 병산과 하늘이 보인다. 누각과 기둥 사이로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찰랑거린다.
병산서원에는 정문말고도 옆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는데, 그 옆집이 바로 서원을 관리하는 고지기가 사는 고직사이다. 지금은 서애의 후손이 살면서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이 집도 꽤 오래된 집이라 민가로서 해묵은 맛을 잘 간직하고 있다.
◆관세대(관洗臺)
제향(祭享)시 제관(祭官)이 손을 씻는 세수 대야를 올려놓는 석조물로서 네모난 형태의 역사다리 모양을 취하고 있다. 위가 넓은 것은 대야를 올려놓기 안정되게 하고. 아래가 위 보다 조금 비스듬히 들어간 것은 가까이 가서 씻기 수월하게 하기 위한 설계로 생각된다.
◆병풍을 펼친듯한 병산서원
서원앞에는 노송들과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풍(屛風)을 펼쳐놓은 듯 한 병산(屛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병산서원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목수현, 김성철, 유홍준, 김혜형, 정용기)
예천 삼강주막[ 禮泉 三江酒幕 ]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전통주막.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4호 (2005년 11월 20일 지정)
삼강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들에게 요기를 해주거나 숙식처를 제공하던 건물로서, 1900년 무렵 건축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본래 기능에 충실한 평면구성으로, 건축사적 희소가치와 옛 시대상을 보여주는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인정 받아, 2005년 11월 20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방치되었으나 2007년 예천군에서 1억 5천만 원의 비용을 들여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복원 당시 주막 주변에 보부상숙소, 사공숙소, 공동화장실 등을 함께 지었는데, 보부상숙소는 면적 40.41㎡로 방 2개와 대청, 부엌 등을 갖추고 있으며 사공숙소는 면적 21.60㎡로 방 2개를 들였다. 공동화장실은 외관은 전통식으로 꾸미고, 내부는 현대식 시설을 하여 편리성을 추구하였다. 주막 건물 뒤에는 수령 약 500년 이상의 회화나무가 서 있어 옛 정취를 더해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천 삼강주막 [禮泉 三江酒幕] (두산백과
신 경북도청 청사
첫댓글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용주
많이들 참가하면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