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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창조의 보전
- 창조의 보전과 새로운 창조신학 -
서언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세계의 신학은 정치적, 경제적 책임의 문제에 집중했다. 이 노력의 결과로 유럽에서는 몰트만(Moltmann), 죌레(Sölle), 메츠(Metz) 등에 의해 주도된 정치신학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구티에레즈(Gutiérrez), 보니노(Bonino), 보프(Boff) 등에 의해 주도된 해방신학이 태동했고, 한국에서는 민중신학이 나타났다. 그러나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에 이르면서 세계의 신학은 새로운 신학적 주제 앞에 고민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환경의 파괴로 말미암아 야기된 창조의 보전 문제였다.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개혁교회 총회는 창조의 보전(Integrity of Creation)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총회 주제 중 하나로 채택했고, 1990년 W.C.C. 서울 대회의 주제 중의 하나도 창조의 보전이었다. 이것은 2000년대를 향한 세계 교회의 책임이 창조의 보전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세계는 환경의 파괴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수질오염, 온실효과, 산림파괴, 산성비, 핵, 생명공학의 문제, 제1세계의 제3세계에 대한 자원 약탈 등 수많은 문제 앞에서 세계 교회는 창조의 보전을 위한 새로운 책임을 감당해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이 창조의 보전을 위한 교회의 새로운 책임은 새로운 창조신학의 발전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Ⅰ. 오늘의 창조 세계의 위기
오늘날 자연은 죽어가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생태학적 위기>라는 표현은 오늘의 사태를 나타내기에는 약하고 부적절하다.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는 <생태학적 위기>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모든 삶의 체계의 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환경은 죽음의 독으로 뒤덮여 있다.
서구의 아름다운 바다 지중해는 강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로 죽어가는 바다로 변하고 있다. 강어귀 수십 킬로미터의 해변의 물속은 50년 전만 해도 미역과 같은 해초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자탄이 터진 것과 같이 완전히 황폐해져 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가? 물론 폐수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요인은 핵 찌꺼기가 강물 속에 녹아 바다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등뼈가 굽은 기형적인 물고기가 지중해에서 점점 더 많이 더 많이 잡히고 있다. 이 고기를 인간이 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독일의 삼림은 50퍼센트 이상이 병들어 있다. 건강한 나무보다 병든 나무가 더 많다는 말이다. 공장, 자동차 등에서 나온 매연은 공기를 오염시키고 산성비를 내리게 한다. 산성비를 맞고 사는 나무가 과연 온전하게 자랄 수 있을까?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던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한가? 물이 그토록 맑았던 우리나라에서 이제는 정수기가 필수품이 되었다. 옛날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고 했는데 오늘날 대동강 물, 한강 물을 누가 팔아먹을 수 있을까? 무공해 채소, 무공해 쌀이라는, 지난 시대의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 등장해서 비싸게 팔리고 있다.
아름다운 시,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노래는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다. 아름다운 자연은 인간을 아름답게 하고 인생을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검은 굴뚝과 콘크리트 벽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의 심성은 거칠어지고 파괴적이 되고 공격적이 된다. 자연의 황폐는 인간의 육체에 위해를 가할 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의 황폐를 가져온다. 즉, 병든 자연은 인간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죽음을 가져오게 한다. 자연의 위기는 인간의 전체 삶의 위기와 직결되어 있다.
Ⅱ. 전통적 창조신학의 공헌과 문제점
고대인들은 자연 속에 정령이 들어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호랑이를 섬겼고 큰 바위를 섬겼고 고목을 섬겼다. 범 신, 곰 신, 고목 신, 바위 신, 구렁이 신 등은 자연 속에 정령이 들어있다는 고대인들의 정신을 잘 반영해 준다. 고대인들은 구렁이에게 제사를 지내고 곰에게 제물을 바쳤다. 기독교 창조신학은 이와 같은 고대인들의 정신을 깨뜨리고 자연을 비 신성화시키고 비 악마화 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기독교 창조신학의 기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1장 26~28절은 자연은 인간의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지배 대상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전통적 기독교 창조신학은 이 본문을 기초로 해서 자연숭배를 거부하고 자연을 인간의 발아래 두는 정신적 혁명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이 창조신학이 설교 되는 곳마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지배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 바뀌게 되었고 찬란한 인간중심의 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다.
전통적 창조신학은 인간이 자연을 이용해서 문명을 발전시키는 정신적 기초로 작용했다. 기독교 창조신학이 없었다면 어쩌면 인류는 아직도 자연숭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창조신학이 자리를 잡고 있는 서구가 아닌, 창조신학과 거리가 먼 세계의 미개 지역을 살펴보면 그 가능성을 많이 측정할 수 있다. 창조신학과 거리가 먼 세계의 미개 지역에서는 아직도 자연숭배를 벗어던지지 못한 곳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창조신학은 인간을 원시적 정신에서 해방하고 문명을 발전시켰고 오늘의 기술사회가 오도록 만들었다. 이 점에 있어서 전통적 기독교 창조신학의 공헌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 이와 같은 큰 공헌을 남긴 기독교 창조신학은 그 남긴 공헌 그 속에 자신의 문제점을 남기고 있었다. 자연을 비 신성화시키고 비 악마화시킨 인간은 전통적 창조신학이 가르친 대로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약탈이 등장한 것이었다.
물론 전통적 창조신학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약탈을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통적 창조신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약탈로 나갈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 결과 이 가능성을 열어두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을 약탈하는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 약탈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계속한 것이다.
오늘의 창조 세계의 위기는 외면적으로는 기술사회, 산업사회가 낳은 위기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신 위기이다. 즉 인간이 자연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오늘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착취와 약탈을 위한 지배는 결코 아니다. 오늘의 창조 세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을 올바로 인식하는 창조신학의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전통적 창조신학은 인간에 의해 약탈당하며 황폐화되는 자연 앞에서 매우 심각한 신학적 위기를 맞고 있다.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새롭게 밝혀질 수 있는 성서적 정신은 무엇인가?
Ⅲ. 새로운 창조신학
전통적 창조신학은 자연을 비 신성화시키고 비 악마화 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음은 이미 밝혔다. 그러나 전통적 창조신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자연에 대한 약탈로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성서가 말하는 창조신학은 결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약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성서는 자연에 대해 지금까지의 창조신학이 분명히 하지 못한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21세기의 기독교 창조신학은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서 지금까지 밝히지 못한 성서의 가르침을 인지해서 새로운 창조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1.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기본 텍스트는 창세기 1장 26~28절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위의 본문의 텍스트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정신적 특성, 영적 특성을 의미한다는 기독교 신학 속의 전통적 해석이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인간의 영적 특성 곧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했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인간의 이성적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바른 이해는 20C의 신학 속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은 고대 중동지역의 대리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집트의 왕의 신학에 의하면 파라오는 땅 위의 신의 형상이었다. 그는 신을 대리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자였고 신의 위임을 받은 자였고 땅 위에 있는 신의 광채요, 그의 현현의 방식이었다. 시편 8편 속에서도 비슷한 정신이 투영되어 있다. 시편 8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왕과 같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대 중동지역의 형상에 대한 기본적 시각은 파라오는 그의 제국의 모든 지방에 세운 그의 형상 속에 현존한다. 그러므로 제국 곳곳에 존재하는 파라오의 동상은 그가 그곳을 지배한다는 것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파라오의 형상은 파라오를 대신해서 다스림의 눈에 보이는 대리자인 것이다.
창세기 1장 26절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은 땅 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의미가 그 핵심에 놓여 있다. 즉,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가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땅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주권의 표지이고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의 통로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특수한 지위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모든 지위는 책임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를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그의 통치와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의 거울이어야 한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의 거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탄의 통치의 거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성과 맞물려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거울이어야 한다.
현존하는 인간은 참된 하나님의 형상인가?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아직 인간의 미래에 속한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의 통치가 완벽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다. 모든 인간은 참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먼저 인간의 영혼과 심령이 새롭게 됨으로써, 그리고 마지막 날 인간의 육체가 부활함으로써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는가? 이 질문은 20C의 신학의 두 거장이었던 바르트(K. Barth)와 브룬너(E. Brunner) 사이에 있었던 큰 논쟁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매우 분명한 답을 몰트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상에 존재하는 자신의 형상으로 규정했다. 즉 인간은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인간의 죄악으로 파괴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규정한 하나님의 신실성은 결코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인에게도 은혜를 베풀고, 죄인은 죄인인 그 상태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지위와 책임을 상실하지 않는다. 신체장애인도 완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는 결코 위축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에 결코 파괴될 수 없고 상실될 수 없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죄인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사람의 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파괴할 수 없어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파괴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지위와 책임에 실패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사하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되지 못하고 전도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고 미신과 증오와 절망을 나타내는 형상이 된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은 죄악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전도시킬 수는 있지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관계를 상실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이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언급은 구약성서에도 신약성서에도 없다.”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자요 인간을 향한 그의 계획과 약속에 영원히 신실하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통치의 통로이자 이를 반사하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이를 창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결부시켜 언급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을 대신해서 식물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창조 세계를 하나님처럼 다스리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6절의 다스리라는 명령은 결코 착취와 약탈을 위한 다스림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착취와 약탈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는 방법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사탄의 방법이고 그런 방식으로 다스리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지 못하고 사탄의 형상이 된다. 창세기 1장 26절의 다스림은 선한 관리의 책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선하게 관리해야 한다. 창세기 1장 28절의 땅을 정복하라는 말은 인간은 땅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고 땅을 관리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정복하라는 말이 땅을 파괴하고 약탈해도 무방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인간은 땅을 다스려서 땅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는 처음 만든 하나님의 세계가 매우 좋았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그런데 이 창조 기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고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창조 세계를 다스려야 하는가? 인간은 창조 세계를 매우 선하게 관리해서 매우 아름다운 세계가 되도록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창조 세계의 파괴는 선한 관리자로서의 인간의 책임 유기를 의미한다.
2. 하나님의 동산인 세계
자연이 약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다. 서구의 기독교는 이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형성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인간의 창조 세계에 대한 통치는 선한 관리자로서의 통치이지 결코 지배자적인 통치는 아니다. 서구의 기독교는 땅을 정복하라는 성서의 말씀이 지배자적인 통치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결과 자연은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의 기술에 의해 계속 파괴되었고 인간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연을 학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 속에는 가치의 위기, 의미의 위기가 들어있고 그 가장 깊은 중심에는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 들어있다.
창조 세계에 대한 성서의 정신은 모든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신명기 10장 14절에 의하면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모든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시편 24편 1절에 의하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 19장 5절에도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와 땅과 나무와 동물과 물고기 등 창조 세계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있다고 해서 그 땅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각을 고쳐야 한다. 레위기 25장 23절에 의하면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땅을 황폐화시킬 수 있는 권리는 결단코 인간에게 없다.
세계는 인간의 사유지가 아니다. 세계는 전부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이 하나님의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다. 인간은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이지 결코 세계가 인간의 것은 아니다. 인간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세계를 선하게 관리해야 한다. 인간은 이 세계를 선하게 관리해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실 만한 아름다운 동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동산의 청지기인 인간은 이 하나님의 동산이 파괴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고 이 하나님의 동산을 새롭게 단장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하나님의 궁궐로 만들어야 한다.
오늘의 새로운 창조신학은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으로의 일대 변혁을 요구한다. 20C의 유명한 신학자 불트만(R. Bultmann)은 그의 책 『신약신학』에서 자연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인간의 사용과 향유를 위해 인간에게 맡겨져 있다고 선언했다. 이와 같은 불트만식의 인간 중심적 신학으로는 자연의 황폐화를 결코 막을 수 없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창조 세계에 대한 최종의 권리는 하나님께 있다. 인간이 오만하게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연을 약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죄악이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약탈하면 안 된다.
자본주의적인 사유(私有) 개념 속에는 매우 악한 요소가 숨어 있다. 사유라는 개념 속에는 자신의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그 중심에 들어 있다. 사유는 지배를 의미하고 사유의 대상은 권리가 박탈된다. 성서는 자본주의적인 사유를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인간에게 맡겨져 있는 모든 것은 일시적으로 맡겨져 있는 것뿐이다. 인간은 자산이 맡은 것에 대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맡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새로운 창조신학은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는 하나님의 권리가 파괴된 데서 비롯된 위기이다. 인간은 청지기로서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맡긴 자연과 동물과 땅과 하늘을 하나님의 영광이 숨 쉬는 동산으로 만들고 가꾸어야 한다.
3. 자연의 권리
인간에게 인권이 있듯이 자연에게는 자연의 권리가 있다. 특이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동물에게는 동물권이 있다.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동물권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성서는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의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하고 있다. 안식일 계명 속에는 인간 해방의 권리가 들어 있다. 인간은 안식일을 통해 인간답게 된다. 그런데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인간만의 휴식을 명하고 있지 않다. 안식일은 인간이 휴식하는 날인 동시에 가축이 휴식하는 날이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23:12). 안식일은 가축도 쉬는 날이다. 가축도 쉴 권리가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22장 30절은 동물의 어린 새끼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소와 양의 어린 새끼는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어야 한다. 땅은 칠 년마다 한 번씩 휴경해야 한다(레25:4~5). 레위기 26장 33~35절에는 땅의 권리와 관련해서 유념해야 할 매우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너희가 원수의 땅에 살 동안에 너희의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주하는 동안 너희가 안식할 때에 땅은 쉬지 못하였으나 그 땅이 황무할 동안에는 쉬게 되리라” 땅을 쉬게 해주는, 곧 땅의 권리를 침해한 결과는 원수의 땅으로 끌려가는 비극이었다. 출애굽기 23장 5절에 의하면 엎드러져 있는 나귀는 비록 그 나귀가 원수에게 속한 나귀라 해도 반드시 부축해서 일으켜 주어야 한다.
성서는 동물의 권리와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만을 불쌍히 여기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동물도 불쌍히 여기시고 있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시36:6).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4:11).
인간은 동물을 잔인하게 대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성서는 동물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소와 양을 그 새끼와 함께 같은 날 죽이지 말라”(레22:26).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도 안 된다”(출23:19). 과거에 있었던 물 먹여 죽인 소의 사건은 동물권을 침해한 잔인한 사건이다. 다리를 잘라 피를 흘리게 해서 심한 갈증을 느낀 소에게 물을 먹이고 심장에 호수를 넣어 소의 몸속에 물을 주입한 잔인한 행위는 동물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한 행위이다.
오랫동안 기독교회는 인권의 신장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오늘날 인간의 권리가 보장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확보된 배후에는 기독교회의 희생과 공헌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인권의 보장을 위해 노력한 기독교회의 전통은 이제는 인권과 더불어 자연의 권리의 보장을 위해 일하는 전통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교회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눈 어두운 오늘의 세계인에게 인간과 더불어 자연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한다.
4. 그리스도의 우주적 화해
오늘의 새로운 창조신학은 피조물의 신음을 들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학은 신음하고 있는 인간의 구원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지, 신음하는 피조물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19~21절은 허무 속에 굴복된 상태로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피조물의 신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영광의 자유를 갈망하고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인간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모든 피조 세계를 구원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전체 피조 세계를 구원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사상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화해를 전제로 한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화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리스도의 화해는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에베소서 1장 9~10절 역시 그리스도를 통한 우주적인 구원의 경륜이 나타났음을 언명하고 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피조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일하려 한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인간론적 지평 속으로만 제한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우주론적 지평은 새로운 창조신학의 터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해방과 구원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해방과 구원의 상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사자가 어린 양을 잡아먹는 피조 세계의 비참함은 없을 것이다. 이사야 65장 25절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이사야 11장 6~9절은 메시야 왕국 속에서의 모든 피조물의 화해와 평화를 매우 극명하게 보여 준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동물과 동물, 하나님과 모든 피조 세계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져 있는 참된 평화의 세계이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화해는 이 평화의 세계관을 위한 전제이다. 하나님은 허무 속에 굴복되어 있는 인간과 피조 세계 전체를 해방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분여(分與)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종국적인 희망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8:21)이다.
5. 신체성의 중요성
오랫동안 기독교는 영혼의 종교였다. 칼 맑스(K. Marx)의 종교비판은 영혼의 종교였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눈물의 골짜기에 있는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육체적인 경제적 해방을 외면하고 영혼만의 천국 행복을 가르치던 당시의 기독교는 맑스의 눈에는 분명 민중의 아편이었다. 니체(F. Nietzsche) 역시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의 서문에서 천국 행복을 뇌까리는 자들은 독처럼 해로운 자라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영혼의 천국 행복에 중독되면 현실의 개혁 의지가 마비되기 때문이었다. 맑스주의의 종교비판 속에는 개혁 의지를 가로막는 영혼의 종교를 근본적으로 배격하는 정신이 그 핵심에 존재한다. 영혼의 종교는 세상과 역사의 희망과는 무관하기 때문이었다.
오스카 쿨만(O. Cullmann)은 「영혼 불멸이냐 죽은 자의 부활이냐?」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기독교의 희망은 풀라톤적인 영혼 불멸이 아니고 죽은 자의 부활임을 밝혔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참된 본질은 영혼이다. 영혼은 고귀하고 영원하지만, 육체는 천하고 일시적이다. 죽음은 육체라는 감옥 속에 있던 영혼이 영원한 자유를 얻는 순간이다. 쿨만에 의하면 이와 같은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미치면서 기독교의 희망을 영혼 불멸과 결부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기다렸고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기독교의 희망은 영혼만의 영생이 아닌 육체의 부활이었다.
기독교의 부활의 복음은 영혼만의 종교를 그 근본에서부터 배격한다. 하나님은 영혼만을 창조하지 않고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역시 육체의 구원을 그 핵심적 과제로 갖고 있다. 예수의 질병 치유의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가 육체성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극명하게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외팅거(F. Oetinger)는 “신체성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종점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하나님의 창조와 화해의 구원의 영역은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 땅적인 것 모두를 포함한다. 마지막 날의 육체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은 신체성과 물질적인 것과 땅적인 것이 하나님의 사역의 가장 높은 목적이요, 종점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혼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천한 몸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나라이고 모든 피조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어 있는 나라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육체적으로 새롭게 변화시킬 것이다. 오늘의 새로운 창조신학은 신체성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적 활동을 유념해야 한다.
6. 자연과 인간의 조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목표로 한다. 이사야 11장 6~9절에 나타나는 메시야 왕국의 상징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메시야 왕국은 어린아이가 사자와 짐승과 함께 뛰노는 세계이고 독사와 어린아이가 함께 사는 세계이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종국적 관계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화해와 조화이다. 인간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갈등은 종식되어야 하고 대신 조화로운 사귐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동양의 정신 속에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테두리에 속하는 많은 긍정적인 유산이 있다. 동양화는 자연 속에 파묻혀 낚시하는 사람 혹은 하늘과 달과 나무 사이에서 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피리를 부는 사람 같은 내용들을 매우 많이 표현하고 있다. 도교의 정신도 그 중심에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사상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새로운 창조신학은 동양의 정신 속에 들어있는 긍정적인 유산들을 새롭게 창조적으로 수용해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Ⅳ. 창조 세계의 완성
오늘의 세계 교회는 창조의 보전이라는 표어로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말은 현재 엄청나게 파괴된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 질서를 복구하고 보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개혁교회 총회의 주제 중의 하나도 이런 시각에서 창조의 보전이었다. 이 정신은 1990년 서울에서 열렸던 W.C.C의 JPIC대회에도 계승되어 창조의 보전이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창조의 보전이라는 말이 새로운 창조신학을 포괄하는 표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창조의 보전이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수구적인 표현이다. 즉, 기존하는 원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기존하는 창조 질서를 유지하고 파괴된 창조 질서를 회복해서 원래의 상태로 만드는 것은 물론 큰 의미가 있다.
더구나 산업사회 이후 시대의 황폐화되고 죽어가는 자연을 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창조의 보전이라는 말은 새 시대를 건설하는 새로운 창조신학의 표어로는 부적당하다. 창조의 보전이라는 말은 창조의 완성이라는 말과 함께 쓰일 때만 완전한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산업사회 이후 시대의 황폐화되고 죽어가는 자연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전해야 하는 절박한 과제 앞에 서게 된다. 그러나 기존해 있던 창조 질서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완성된 창조 질서는 결코 아니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표어가 오늘의 창조신학의 표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기존해 있던 창조 질서를 새롭게 가꾸고 재창조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행위에 상응하는 행위이다. 최초의 창조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초의 창조로 그의 창조행위를 마감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창조한다. 하나님의 새 창조행위는 현존하는 창조 질서보다 더 나은 창조 질서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파괴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창조 세계는 완성을 향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
1. 계속적 창조
진화론은 창조론을 배격하고 창조론은 진화론을 배격하는가? 얼른 보기에 진화론과 창조론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처럼 보인다. 진화론을 믿고 있는 한 창조론은 존재할 영역이 없을 것 같고, 창조론을 믿는 한 진화론은 저주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는 서로 용해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가 있는 반면에 상호 간에 대화가 가능한 영역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문제는 한국 장로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옛 프린스턴 신학자들에게도 심각한 문제였다. 옛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진화론의 도전 앞에 어떻게 창조론을 지켜나갈 수 있는가라는 심각한 과제 앞에 서 있었다. 이 과제 앞에서 옛 프린스턴 신학의 선두 주자인 찰스 핫지(C. Hodge)는 단호히 진화론을 무신적 사상으로 규정하고 저주했다. 핫지에 의하면 진화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하나님의 설계하심(design)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찰스 핫지에 의하면 독수리의 눈알만 보아도 하나님이 이 눈알을 설계해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우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납득될 수 없는 비진리였다. 눈은 보기 위해서, 귀는 듣기 위해서, 코는 호흡과 냄새를 맡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만 보아도 하나님의 설계하심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어떤 목적을 갖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찰스 핫지는 전통적 유신 논증 가운데 특히 목적론적 논증의 시각에서 진화론을 거부했다. 진화론은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하심과 계획과 섭리와 목적을 파괴하는 무신적인 잘못된 사상인 것이다.
그러나 찰스 핫지로부터 한 세대 지난 아취발드 알렉산더 핫지(A. A. Hodge)의 시대에 와서는 진화론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변천했다. 아취발드 알렉산더 핫지는 진화론이 하나님이 설계하심을 부인하지 않는 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음을 피력했다. 진화론은 있었던 사실을 설명하는 그 자체로서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이 되어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하심을 부인하면 안 된다. 진화론이 무신론으로 흐르지 않고 그 자체의 한계를 지키는 한 진화론은 새로이 기독교 신학과 공존할 수 있음을 아취발드 알렉산더 핫지는 인정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프린스턴 신학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공존의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본격적인 새로운 신학적 이해는 프랑스의 고생물학자요 가톨릭 신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Teilhard de Chardin)에게서 발견된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진화신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면서 진화론을 본격적으로 신학 속으로 수용했다. 샤르뎅에 의하면 진화의 사실은 과학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생물 진화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엄밀히 연구해보면 이 진화의 역사가 결코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진화가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있고 단순한 생물에서 끊임없이 복잡한 생물로 발전해 나간 진화의 역사는 진화가 우연의 산물이 아닌 창조의 산물이라는 것을 나타내 준다고 샤르뎅은 보았다. 샤르뎅은 생물 진화의 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진화를 우연의 산물로 보는 무신적인 진화론은 합리성이 없고 진화를 창조의 일부로 보는 것만이 진화론에 대한 바른 견해라고 밝혔다.
위와 같은 샤르뎅의 관점은 진화 자체 속에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와 설계하심이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옛 프린스턴 신학자 찰스 핫지가 우려했던 점을 극복하는 중요한 신학적 관점이라고 평할 수 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에 와서 진화론은 두 가지 관점으로 구분되게 되었다. 즉 무신론적 진화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이 그것이다. 샤르뎅은 진화론을 유신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로 보아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샤르뎅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창조적 진화 혹은 진화적 창조라는 개념을 그의 진화신학 속에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새로운 신학 사상을 거친 20세기 후반의 기독교 창조신학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그중 첫째는 <태초의 창조>이다. 이 태초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개념으로 전통적인 창조신학이 계속적으로 강조해왔던 사상이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태초에 세계를 창조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둘째는 <계속적 창조> 행위이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태초의 한 번의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창조하고 세상을 변혁하고 새롭게 한다. 이 계속적 창조개념 속에는 <새 창조>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의 창조신학은 진화는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행위의 일부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무에서부터 창조하는 창조행위도 있지만, 이미 있던 것을 가지고 변화시키고 또 새롭게 만드는 창조행위도 있다. 이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행위는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창조해 가는 창조행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행위를 단순히 원상을 회복하는 보수행위만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전통적 창조신학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행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고, 태초의 창조 이후의 하나님의 행위를 유지, 보전 및 원상회복이라는 차원에 주로 집중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과 하와가 살던 동산의 회복이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인간의 모습도 최초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의 모습으로의 복귀도 아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부활한 형상을 닮아서 영광스러운 부활체의 모습을 갖게 되고 모든 창조 세계는 영광의 세계로 변화된다.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행위 속에는 이 종말론적인 창조의 선취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행위는 보수행위뿐만 아니라 영광의 세계를 향한 새 창조의 행위이다. 물론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것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이 회복은 원상을 향한 단순한 회복이 아니고 종말론적인 영광의 세계를 향한 회복이다.
2. 창조의 완성을 위한 인간의 책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일해야 하는 책임성이라는 것을 이미 밝혔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상응하는 창조적 행위를 세상 속에서 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완성을 위해 일해야 하는 지상의 동반자이다.
따라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창조의 보전이라는 말은 바로 이 인간의 일차적 책임과 연계되어 있다. 인간의 소유욕과 정복욕에서 기인된 창조 세계의 황폐라는 상황 앞에서 우선 원상부터 회복해야 하는 절실한 과제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원상의 회복이라는 의미에서의 창조의 보전은 오늘의 과학적 발전과 심각하게 충돌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과학적 발전은 기존하던 창조 질서의 변경과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창조의 보전이라는 주제로 모이는 교회의 총회는 자주 오늘의 기술적 발전을 규탄하고 특히 생명공학을 저주했다. 생명공학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창조 질서의 변경이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우리는 물론 오늘의 생명공학이 갖고 있는 크나큰 위험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오늘의 생명공학은 괴물 인간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분별없는 유전자의 결합이 몰고 올 파국도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공학은 그 자체로는 결코 저주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유전병을 제거할 가능성을 알고 있다. 동식물에 있어서의 새로운 품종의 개발은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과 품종인 부사는 지난날에는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품종의 개발은 더욱 풍요로운 세계를 약속해 줄 수 있다.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행위는 새로운 종의 출현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행위는 괴물 인간의 창조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행위에 상응하는 인간의 창조행위는 역사 책임적이고 미래 책임적인 창조행위여야 한다. 과학의 발전과 생명공학의 발전은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원시 자연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곳에는 파리 모기떼가 뒤끓고 독충이 살고 있다. 원시 자연이 인간이 살 만한 하나님의 평화의 동산은 아니다. 오늘의 창조신학이 명하는 인간의 책임은 이 창조 세계를 관리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해서 참으로 하나님의 평화의 동산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배고픈 자가 없는 풍요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하고 사시사철 과실을 맺는 동산을 만들어야 한다. 이 세계는 창조의 보전이라는 수구적 자세만으로는 안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와 새 창조에 상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환경 운동가들이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이 외침 속에는 자연의 원래의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그 배후에 존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와 같은 원시 자연에 대한 이상주의적 사상은 잘못 파괴된 자연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때는 정당성이 있지만 자연 자체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요소를 깊이 이해하고 있지 못함에 문제가 있다. 맹수가 약한 짐승을 뜯어 먹는 자연의 질서 속에는 무언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다. 태풍과 지진으로 수많은 생명체가 몰살당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비극과 악의 힘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땅을 정복하라”(창1:28)는 성서의 말씀은 많은 환경 운동가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겠지만, 자연 속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힘을 정복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읽으면 결코 걸림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원시 자연은 아직 완성된 자연이 아니다. 인간은 창조 세계를 보전하는 동시에 완성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활동에 동참해야 한다.
3. 자연의 역사
일반적으로 역사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대체로 이해되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역사가 일어나는 무대일 뿐이다. 자연은 반복되는 것이고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천된다. 자연에 역사라는 말을 쓰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반적인 견해는 오늘날 수정되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태초의 창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끊임없이 변천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자연 역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변천되어야 한다. 이 자연의 긴 역사 속에 인간의 역사가 출현한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정리해 보면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이 자연의 역사의 주인공이다. 하나님은 태초의 창조로부터 종말론적 세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자연의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이 자연의 역사를 책임져야 한다. 인간이 책임져야 하는 영역은 인간의 역사만이 아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롬8:19). 인간은 자연을 해방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피조물로 만들어야 한다. 창조 세계의 완성은 인간의 역사만의 완성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가 포함된 전체 자연의 역사의 완성이 창조 세계의 완성이다.
결언
덴마크의 부흥의 영웅 그룬트비 목사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비옥한 땅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땅을 빼앗기고 황무지 유틀란트반도로 쫓겨와 절망에 빠진 덴마크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자고 역설했다. 그룬트비 목사가 외친 자연사랑은 황무지 유틀란트반도를 사랑하자는 것이었다. 덴마크 백성들에게 남겨진 땅은 황무지 유틀란트뿐이었다. 그룬트비 목사는 이 황무지를 사랑할 것을 외쳤고 이 일을 위해 북해의 찬 바람을 막으려고 방풍림을 조성하고 황무지 유틀란트를 개간했다. 그룬트비 목사의 이 정신은 황무지 유틀란트를 비옥한 땅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덴마크를 세계 굴지의 낙농국이 되게 했다. 인간이 자연을 사랑하면 자연을 인간을 사랑하고 마침내 세계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땅이 되는 것이다. 블로흐(E. Bloch)는 자연은 인간의 어머니라고 칭했다. 어머니인 자연에 대한 파괴는 어머니의 양육을 받아야 할 인간의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의 새로운 창조신학이 말하고자 하는 마지막 한마디 말은 인간은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인 인간을 사랑하듯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