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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조선 왕릉(1)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장기자문위원)
2009년 6월 동구릉·광릉·태릉 등 조선시대 왕릉(王陵) 40기가 일괄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한국의 유산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 왕릉은 조선시대 27명의 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망라한 것으로, 한 왕조의 무덤이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문화재청은 총 42기의 조선시대 왕릉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齊陵,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厚陵,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를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는데 단 1년 만에 유네스코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것이다(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포함되지 않았음).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근본적인 요인은 왕릉이 단순한 왕의 주검이 묻혀 있는 무덤이 아니라 조선시대(1392~1910) 519년의 역사를 포함해 당대의 건축 양식과 미의식,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조선 왕릉 40기 전체를 실사한 후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어야 할 가치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① 유교사상과 토착신앙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반영된 장묘(葬墓) 문화 공간이다.
② 자연경관을 적절하게 융합한 공간 배치와 빼어난 석물(石物) 등 조형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③ 제례 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④ 왕릉 조성이나 관리, 의례 방법 등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의궤(儀軌)』, 『능지(陵誌)』 등 고문서가 풍부하다.
⑤ 조선 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조선 왕릉을 실사한 유네스코 심사위원은 ‘한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것도 놀랍지만 재위한 모든 왕의 무덤이 남아있는 경우는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고 놀라워했다. 일본의 경우 3세기 이래 7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능침이 조성되기는 했지만 이후 왕릉은 눈에 띄게 규모가 작아지고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왕릉 대신 석탑이 조성됐다. 베트남 경우엔 중국 왕릉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조선 왕릉에 비하면 독자성이 떨어지며 중국 명·청 시대의 황릉(皇陵)은 자연미를 엿볼 수 없는데다 더 이상 제례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반면에 과거와 현재를 이어 살아 숨 쉬게 만든 유산은 조선 왕릉뿐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서울시의 팽창에 따른 개발 압력을 견디고 녹지가 이렇게 잘 남아 있는 것만으로 세계유산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는데 수도권 일대 조선왕릉의 녹지를 모두 합친 면적은 1935만3067m²에 이른다.
조선 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어느 정도로 파격적인 것인지는 2009년 6월 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장에서도 나타났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조선왕릉에 최고 등급인 ‘등재 권고’ 평가를 내린 이유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5분의 설명 이후 호주 등 4개국 위원의 지지 발언이 이어지자 마리아 세군도 위원장은 “모두 조선왕릉의 가치를 인정하니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심의를 끝내겠다”고 말했고 단 15분 만에 등재가 결정되었다. 논란이 되는 유산의 경우 3시간 이상 심의가 이어질 때도 있음을 볼 때 조선왕릉의 등재가 얼마나 파격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40기 내역과 그 무덤의 주인공은 다음과 같다.
① 정릉(사적 208호) : 제1대 태조계비 신덕왕후 강씨
② 서오릉(사적198호) :
1) 경릉 : 제9대 성종사친 덕종 및 소혜왕후 한씨.
2) 창릉 : 제8대 예종 및 계비 안순왕후 한씨.
3) 명릉 : 제19대 숙종 및 계비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4) 익릉 : 제19대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
5) 홍릉 : 제21대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
③ 서삼릉(사적 200호) :
1) 효릉 : 제12대 인종 및 비 인성왕후 박씨.
2) 예릉 : 제25대 철종 및 비 철인왕후 김씨.
3) 희릉 : 제11대 중종계비 장경왕후 윤씨.
④ 온릉(사적 210호) : 제11대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
⑤ 광릉(사적 197호) : 제7대 세조 및 정희왕후 윤씨.
⑥ 동구릉(사적 193호) :
1) 건원릉 : 제1대 태조.
2) 현릉 : 제5대 문종 및 현덕왕후 권씨.
3) 목릉 : 제14대 선조 및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4) 휘릉 : 제16대 인조계비 장열왕후 조씨.
5) 숭릉 : 제18대 현종 및 명성왕후 김씨.
6) 혜릉 : 제20대 경종비 단의왕후 심씨.
7) 원릉 : 제21대 영조 및 계비 정순왕후 김씨.
8) 수릉 : 추존 문조 및 왕후 신정왕후 조씨.
9) 경릉 : 제24대 헌종 및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
⑦ 태릉(사적 201호) :
1) 제11대 중종계비 문정왕후 윤씨.
2) 강릉 : 제13대 명종 및 인순왕후 심씨.
⑧ 홍릉(사적 207호) :
1) 제26대 고종 및 명성황후 민씨.
2) 유릉 : 제27대 순종및순명황후 민씨, 순정황후 윤씨.
⑨ 사릉(사적 209호) : 제6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
⑩ 헌릉(사적 194호) : 제3대 태종 및 원경왕후 민씨.
⑪ 인릉 : 제23대 순조 및 순원왕후 김씨.
⑫ 선릉(사적 199호) : 제9대 성종 및 계비 정현왕후 윤씨.
⑬ 정릉 : 제11대 중종.
⑭ 융릉(사적 206호) : 추존 장조(사도세자) 및 헌경왕후 홍씨.
⑮ 건릉 : 제22대 정조 및 효의왕후 김씨.
⑯ 공릉(사적205호) : 제8대 예종비 장순왕후 한씨.
⑰ 순릉 : 제9대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
⑱ 영릉 : 추존진종 및 효순왕후 조씨.
⑲ 장릉(사적 203호) : 제16대 인조 및 인열왕후 한씨.
⑳ 장릉(사적 202호) : 추존 제16대 인조부 원종 및 인헌왕후 구씨.
(21) 의릉(사적 204호) : 제20대 경종 및 계비 선의왕후 어씨.
(22) 영릉(사적 195호) : 제14대 세종 및 소헌왕후 심씨.
(23) 녕릉 : 제17대 효종 및 인선왕후 장씨.
(24) 장릉(사적 196호) : 제6대 단종.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는 민간 차원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점이다. 동구릉이 소재한 경기도 구리시에서 지역 사회와 일부 역사문화학계 인사들이 동구릉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고 문화재청이 이를 발전시켜 각지에 분산된 조선왕릉 40기를 일괄 신청한 것이다. 학자들은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 뿐 아니라 철저한 관리도 그에 못지않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드레스덴 엘베 계곡'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지 불과 5년 만에 자격이 박탈되었다. 드레스덴 시 당국이 추진하는 대규모 교량 건설이 이 문화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크게 훼손시킨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조선왕릉의 핵심지역은 국가 소유의 토지이며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보호. 관리받고 있어 앞으로도 도시화 과정에서 훼손될 우려는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당수 왕릉의 주변이 도시화와 인구증가, 주거지역 확장으로 완충공간이 축소된 것도 사실이다. 태릉에 사격장이나 국가대표 선수촌이 들어서고 선릉의 경우 홍살문과 인접해 도로가 지나갈 정도로 능역이 줄어들었다. 유네스코도 이런 점을 감안하여 조선 왕릉을 세계유산에 등재시키면서 일부 훼손된 능역을 원형 보존할 것과 개발압력이 커지는 것에 대비해 완충구역의 적절한 보존지침을 마련하고 시행할 것을 권고했다. 유네스코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왕릉 주변의 경관을 해치는 각종 시설물이 난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지적은 과거부터 있어왔다. 이들을 지키는 것은 이제부터라는 설명이다. 조선 왕릉의 조성과 상설제도 등 왕릉에 관련된 설명을 먼저 한다. 이 장의 상당 부분은 문화재청, 한국문원,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조오례의』, 목을수 등 여러 글에서 인용했는데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용어와 한자가 많이 나와 다소 읽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유산 특히 왕릉의 경우 엄격한 규범과 절차를 기초로 축조하여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더라도 음미하면서 읽기 바란다.
<체계적인 왕릉 조성>
조선조의 왕릉은 서울을 중심으로 고양, 구리, 파주, 양주, 여주, 화성 등 수도권에 산재하고 있다. 왕실에서 국상을 당하면 제일 먼저 왕이 묻힐 곳을 정하는데 모든 왕릉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일반적으로 뒤에 주산(主山)을 등지고 산 능선의 언덕 아래쪽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동쪽에 청룡(靑龍), 서쪽에 백호(白虎)라 부르는 산줄기가 서로 감싸고 안산(案山)이 능의 전방으로 우회하며 안수(案水)는 능 좌우 측에서 발원해서 연못과 도랑물이 능 앞의 명당(明堂)을 지나 안산으로 흘러 냇물에 임하는 형세다. 중국 후한(後漢)때 중장통(仲長統, 179〜219)이 지은 낙지론(樂志論)에 의하면 명당이란 ‘산을 등지고 냇물에 임하여 도랑과 연못이 이어있고 대나무가 둘러졌으며 앞에는 마당과 채소밭 뒤에는 과수원이 있다’고 적었다. 선조들은 이러한 지형을 신라 말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시대에 길상지(吉祥地)라 했다.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황제는 붕어(崩御), 왕은 훙서(薨逝) 또는 승하(昇遐)’라고 했다. 군자나 대부는 졸(卒, 수명을 다해서 늙어 죽는 것) 또는 종(終), 소인은 사(死)라 한다.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이조판서는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하여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의 3개 임시관청을 설치하고 다음과 같이 국장을 분담토록 했다.
빈전도감은 겉과 안이 흰 비단옷을 9겹으로 입히는 습(襲), 염(殮), 성빈(成殯), 빈전(왕이나 왕비는 빈전(殯殿), 세자나 왕세자빈은 빈궁(殯宮), 그 외 일반인은 빈소(殯所)라 한다), 한가운데의 조금 서쪽에 재궁(梓宮, 관을 뜻함)을 보관하는 벽돌로 쌓아 만든 찬궁(欑宮, 관)을 설치하는 일, 상복을 입는 성복(成服)과 장례가 끝난 후에 3년간 신위(神位)를 안치하는 혼전(魂殿)에 소용되는 물건을 준비하는 일 등을 맡는다. 염을 소렴과 대렴으로 구분하여 소렴은 겹옷과 겹이불로 19겹을 입히고 대렴 때에는 겹옷과 겹이불 90겹을 입힌다
국장도감은 재궁, 견여(肩輿), 가마), 반우거(返虞車, 수레), 보여(寶輿, 금으로 만든 도장을 싣는 가마), 명기(明器, 생전에 쓰던 물건을 상징하여 만드는데 다만 거칠고 조잡하며 규모가 작은데 왕후는 넣지 않는다), 책보(冊寶, 옥책(玉冊)과 금보(金寶, 금인(金印)을 말함), 복완(服玩), 강원도 정선에서 생산되는 청석으로 만드는 지석(誌石), 제기(祭器) 등을 만드는 일을 맡는다. 옥책이란 왕이나 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드리는 글로 재질은 옥이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시호(諡號), 능호(陵號), 묘호(廟號, 왕후에게는 없다), 존중해서 부르는 존호(尊號)를 내려주는 데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영조가 아들을 죽이고 후회되어 슬프고 애처롭게 생각이 난다하여 지은 시호이다. 이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고 올렸는데 장(莊)은 용기를 좋아하고 힘을 일치시키는 것이며 헌(獻)은 총명하고 예지에 밝다. 정2품 이상의 재상이 죽어도 시호를 내려준다.
능호는 왕이나 왕후 또는 추존된 왕이나 왕후에게 내려주는데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웠으므로 건원릉(健元陵)이란 두 글자를 사용하고 그 외는 모두 외자이다. 왕세자나 왕세자빈 그리고 후궁 소생으로서 왕위에 올랐을 때 그 생모에게 원호(園號)를 내려주는 경우가 있고 그 외에 대군(大君)이나 군(君)은 모두 묘(墓)라 한다.
묘호(廟號)는 왕이 승하한 뒤에 이름을 피하여 종묘에 봉안하는 호칭으로서 태조, 세조, 태종, 세종 등으로 살아있는 동안에는 전하(殿下, 세종16년(1434)에 상위(上位)를 전하로 중궁(中宮)을 왕비(王妃)로 동궁(東宮)을 세자(世子)로 고침) 또는 금상(今上)이라 하고 자신이 부를 때에는 짐(朕) 또는 과인(寡人)이라 부른다. 짐은 조짐(兆朕)을 의미하고 과인은 겸손하게 자칭하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의하면 왕 중에서 공적이 있는 자는 ‘조(祖)’라고 하고, 덕망이 있는 자는 ‘종(宗)’을 붙여 사용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덕망(德望)이란 예(禮)와 악(樂)을 모두 갖춰 성품이 단정하고 지(智), 인(仁), 용(勇)을 겸비한 유덕한 사람을 뜻한다. 덕망이 있는 왕이란 뜻의 종(宗)이란 마루종자로서 산마루, 고건축물의 종마루(용마루라고도 함), 턱마루, 종갓집 등 꼭대기를 가리킨다. 조선조의 왕 중 묘호가 ‘조(祖)’인 경우는 추존된 사도세자 장조(莊祖)와 문조(文祖)를 제외하고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이다. 이 부분은 ‘종묘’의 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산릉도감은 금정(金井, 광중(壙中)을 파는 일), 현궁(玄宮), 석인(石人), 석수(石獸), 비각, 정자각, 재방(齋房, 제관이 목욕재계하는 처소로 지은 재실(齋室)과 제기고(祭器庫), 제수․제복 등 제사일체를 관장하는 전사청(典祀廳),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香大廳) 그리고 수릉군(守陵軍) 70명이 능을 지키기 위해 지은 수복방(守僕房, 제기를 보관하거나 능을 지키는 관리가 있던 방), 부엌인 수라깐(水刺間, 원래 몽골어로서 탕미(湯味)를 뜻하는 말) 등을 준비한다. 장례기간은 죽은 지 5개월 만에 장례를 지내므로 이 기간 안에 산역을 준비한다. 능자리는 왕궁에서 100리 거리 안에 정한다.
능 입구에서 바라보면 진입공간에 외금천교가 있고 제향공간에 금천교(禁川橋, 궁궐에도 금천교가 있음)를 거쳐 붉은 석간주칠을 한 신문(神門, 홍살문 이라고도 함)을 세우고 홍살문 옆에 장방형의 망례위(望瘞位, 판위(版位)라고도 함)가 설치되어 제사가 끝나면 축궁(祝官)이 축문을 예감(瘞坎)에서 불태운다. 축문을 태우는 예감은 당초 전이공간에 소전대를 마련하여 시행했으나 세종부터 소전대 대신 예감을 정자각 북쪽에 놓았다. 금천과 홍살문은 성역임을 표시하는 의미가 있다.
홍살문을 들어가기 전 앞에 연못을 파놓았는데(경복궁에는 경회루지(慶會樓池), 창경궁에 춘당지(春塘池), 창덕궁에 부용지(芙蓉池)등이 있음) 이는 통치자가 절도(節度)와 검약(儉約)으로 백성을 겸허하게 포용한다는 다짐의 의미를 뜻한다. 홍살문을 통과하면 신의 영역으로서 혼이 다니는 얇고 넓은 박석(博石)을 깔은 신도(神道)와 임금이 신을 영신(迎神)하여 걸어가는 신도보다 약간 낮은 어도(御道)로 구분되고 신이 정자각에 오르는 신계(神階)가 있어 신계 첫 계단 양쪽에는 태극무늬를 새긴 석고(石鼓)가 있으며 북(石鼓)은 진행을 가리킨다.
신도를 중심으로 동쪽(좌측) 박석에는 문관이, 서쪽(우측)박석에는 종친과 무관의 참배석(參拜席)이다. 참배석에 박석이 깔려 있는 능은 선릉, 순릉, 장릉(長陵), 영릉(寧陵), 영릉(永陵), 융릉, 건릉, 홍릉(洪陵), 유릉(裕陵)이며 그 외의 건원릉, 헌릉, 영릉(英陵), 현릉 등 모든 능에는 박석대신 잔디를 깔았다(광릉 제외). 산릉제사와 하관하기 전 까지 시신을 모시는 정자각(丁字閣)은 정자(丁字)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인데 왕과 왕비의 신좌(神坐)를 모시고 각종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정자각은 원래 산릉제례와 하관직전까지 시신을 모시는 곳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능침(陵寢), 침전(寢殿), 능전(陵殿)이라고 하는데 왕과 왕비의 처소를 일괄하여 연침(燕寑)이라 한다. 아늑한 잠자리란 뜻이다. 서민은 주거(住居)라 하고 사대부이상은 연거(燕居)라 한다. 정자각 내부에는 화문석을 깔고 신어상(神御床), 검은 칠을 한 제상(祭床) 2좌(坐), 향상(香床) 1좌, 촛대상(燭臺床) 2좌, 붉은 칠을 한 축상(祝床) 1좌, 준소상(遵所床) 1좌를 둔다.
정자각 좌측에는 비각과 1칸의 수복방이 있으며 우측에는 수라깐이 있다. 정자각 뒤의 북동쪽(좌측)에는 산신석(山神石)이 있고 북서쪽(우측)에는 예감(瘞坎)이 있는데 조선초기의 왕릉에는 예감 대신 소전대석(燒錢臺石)이 놓여 있으며 인공적으로 조성한 높은 언덕이 있는데 이를 강(岡)이라 부른다. 언덕위로 올라가면 왕릉에 도달한다.
<참고문헌>
「500년 왕조(王朝)의 무덤이 모두 남아있다니… 세계가 놀랐다」, 허윤희, 조선일보, 2009.05.14
「조선왕릉 ‘500년 숨결’ 세계가 함께 지킨다」, 김미촉, 동아일보, 2009.06.29
「문화유산 보존 관리에 주력해야」, 연합뉴스, 2009.06.28
「조선조의 왕릉문화 이해」, 목을수, www.boso.kr
『문화유산 왕릉』, 한국문원편집실, (주)한국문원, 1997
『우리역사 우리문화』, 한용근, 서경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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