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 세대
통기타 가수 양희은이 지난 5월 토론토에 왔다 갔다. 그를 기억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기를 쓰고 소리를 지르며 그의 공연에 참석할 극성 팬은 별로 없다.
한국의 어느 기자가 "양희은 세대"라는 말을 사용했다. 글을 읽으면서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치열하게 70년대를 보낸 그 세대들, 10대에서 30대를 살았던 청장년 층을 양희은이라는 이름 하나로 어떻게 묶는단 말인가. 더구나 당시 여고생이었던 아내도 그보다는 송창식 윤형주의 <트윈폴리오>, <오니온스>, <사월과 오월>을 더 좋아했다고 말하는데.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청년문화, 시위, 최루탄개스, 장발, 오비스 캐빈, 쉘부루. 무교동 골목의 막걸리 자국보다 더 많이 선명하게 뿌려져 있는 그 시대의 흔적들.
양희은이 토론토서 공연하던 날, 차가운 봄바람이 호숫가에 종일 맴돌았다. 바람은 신기하게도 이민자라는 두터운 옷을 하나씩 하나씩 날려보내기 시작했다. 20여년전 신촌 언덕에서 청바지를 입고 무겁게 걸어가던 그의 모습을, 숙명여대 앞에서 S씨와 걸어가던 정다운 그의 어깨마저도 떠올렸다. 모두들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워 10대 20대 30대였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추억의 강으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서강언덕에 서면 나는 늘 운다. 남들은 양희은이 노래를 잘해 젊은이의 사랑을 받고 돈도 벌 수 있어 많이 부러워들 하는 것같았지만 지금도 그 시절-너무나 힘들었던 서강(대학교)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난다..." 그의 독백이다. 당시 반짝이는 인기를 한 몸에 업고 모두에게 부러움을 받았던 자신만의 속사정이다. 경기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정신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70년대의 청소년들은 물론 "6.25세대"보다는 풍족했지만 지갑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학비 조달을 위한 아르바이트생도 많았고 시골에서 올라오는 돈이 끊어져 휴학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기에 양희은의 어려움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대학가 포크 계열의 가수들중 여성으론 처음 등장했다. 포크의 대부로 불리는 밥 딜론을 위시, 존 바이에즈, 피터 폴 앤 메리, 그리고 존 덴버로 이어지는 당시의 귀에 익은 외국 가수들. 캐나다의 고오든 라이트풋, 조니 미셀(최근 잃어버린 딸을 찾았다)도 명성을 날렸던 시절이었다. 양희은은 이중 제인 폰다와 같이 반전운동에 앞장섰던 존 바이에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창법까지도. 이런 추세 속에서 당시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에는 통기타 소리가 항상 메아리쳤다. "기타 못 치면 간첩"이라는 말도 생겼다.
그의 인기곡은 누가 뭐라도 "아침이슬"이다. 우리들은 술집에서나 산에서나 바다에서나 시위 도중에도 이 노래를 불렀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를..". 목빼고 소리쳐 노래부르며 미래를 향한 이유 없는 투지를 불살랐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로 시작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부를 때 일부 관중들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린 속사정이야 아무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한 번쯤 울고 싶은 것이다. 메마른 내 가슴을 헛손질해 가며 파더라도 울음의 샘물을 한 번쯤찾고 싶은 것이다.
미국에서 7년동안 이민생활을 한 뒤 귀국한 양희은은 모국서 첫 공연을 가질 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과연 생활이란 굴레에 단단히 매여 있는 과거의 젊은이들이 나와 줄 것인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3회 공연을 할 때까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이 세대는 열심히 나와 주었다.
그는 이들을 "궁둥이가 질긴 세대"라고 표현했다. 가요 시장에서 <수십 만장 판매>를 순식간에 기록하고 다시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이름 모를 요즘 가수들. 그들에게 반짝 열기를 보이는 "궁둥이가 가벼운 세대"에 비교해서. "궁둥이가 질긴 세대"들은 양희은의 공연에 참석해 무엇인가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있는 무엇인가를. 그리고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이심전심 다짐을 하고 공연장을 떠났을 것이다.
그가 토론토 무대에 섰을 때 관중들을 "아"하고 탄성을 질렀다. 더욱 건강(?)해진 몸 때문에? 청바지를 입고 툴툴 나와 주어야 했을 그가 개량 한복으로 말끔하게 단장하고 나와서? 이제 늙은 관중들은 옛날의 양희은으로만 기억하다가 생경한 현재 모습을 보고 탄성 아닌 한숨을 쉬었을 지도 모른다. 그에게만은 세월이 적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오판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슬슬 우리 모두 같이 늙어 가고 있다는 세월의 피해자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양희은보다는 그의 뒤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 미소짓고 있는 젊은 우리를 보고 있었다. "양희은 세대"가 된 관중들은 10대의 피부로 반짝이던 꿈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날 온타리오호수의 바람은 봄바람 치고 매서웠지만 역시 봄은 봄이었다. (월간지 세계인 "김형주 칼럼"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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