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4일 수요일 요나스 요나손의 <핵을 들고 도망친 101세 노인>을 읽었다. 내가 이 작가를 안 것은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 이라는 소설을 보았기 때문이다. 재미있고 신기하고 배꼽잡는 풍자가 압권이었다. 이 작품에 이어 [셈을 할 아는 까막눈이 여자] 도 읽었는데 주인공이 어떻게 될지 조마조마하면서 읽은 기억이 있다. 다음 작품으로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둘] 도 있으나 이 작품은 미처 읽지 못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 보고 싶다, 또 세상이 어떻게 되어야 좋을지도 간접적으로 얘기해 보고 싶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무엇인지 알겠으나 세상이 어떻게 되어야 좋을지는 감추어져 간접적으로 얘기한다. 태평양 양편에 하나씩 서 있는 거대한 자아, 아무 흘모없는 두 개의 혹덩이 ㅡ김정은과 트럼프는 탐욕과 죄악이 과도하고, 메르켈이나 메이트키니의 경우는 신의와 상식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비핵화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다시는 한반도가 풍자소설의 소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작품 맨 끝 부분을 적는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알란은 연못이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새로문 취미를 찾아냈으니, 바로 트위터였다. 그는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전문가가 되었다. 하지만 트위터를 하면서 자신의 현위치가 전 세계에 알려진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젊은 친구들이 저마다의 삶에 만족하는 것을 보고 기뻤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의 검은색 테블릿에 쏟아져 들어오는 뉴스들 가운데 어떤 패턴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세상은 1백년 전보다 좋은 곳이 되았다. 하지만 발전은 직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주기적인 부침이 있었다. 알란이 판단 하기로 지금 인류는 하강 국면에 있었다. 그리고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추세가 역전되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그러고 나면 사람들은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리라. 그런데, 지금까지는 늘 그래 왔지만, 앞으로 그러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연구자들의 최근 밟표에 따르면, 인류의 평균 지능이 점차 낮아지고 있단다. 또 알란은 테블릿을 가지고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대화 능력을 잃는다는 기사를 읽었다. 테블릿은 그것의 주인과 대화히기보다는 그에게 일방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단다. 인터넷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기 대신 생각하게 하여 결국에는 바보가 된다는 거였다. 알란은 지성이 약해지면 더불어 진실도 힘을 잃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전에는 참인 것과 참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술은 아주 좋은 거였다. 2 더하기 2는 5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게 되고 나서부터, 같은 것을 여러 번 말하는 사람이 진실인 세상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 기술을 완벽의 경지로 끌어올린 나머지 자기가 한 말을 몇 초 사이에 여러 번 되풀이할 수 있었다. 단 몇 초 사이에 말이다! 하지만 알란을 무엇보다 걱정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이 모든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골치 아프고 복잡한 얘기들 없이, 세상만사가 그냥 그 자체일 수는 없단 말인가? 그 옆을 지나가던 사비네가 노인이 검은 색 테블릿을 내려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서 멍한 눈으로 사바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어' 그가 대답했다. '나무너무 많은 것을 ㆍㆍㆍㆍㆍ 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