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민수기6장13~27절
제목 : 서원의 완성, 축복의 지속
어제는 나실인의 서원에 대하여 말씀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나실인 서원은 기한이 차면 서원 종결을 위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하십니다.
1. 나실인의 서원 종결 의식(13~21절)
1) 나실인의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 문으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13절).
“[13]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 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 '회막'은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서 서원 기간을 채운 자가 회막문에 가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구별된 자의 처음(10절)과 나중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원 기간을 채운 나실인이 회막문에 선 것은 곧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 하나님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고백하는
신앙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롬11:36).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헌신코자 결심하는 자는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의식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회막문에서'라는 말은 '하나님 앞'이라는 의미 외에,
'이스라엘 온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즉 나실인이 서원 기간을 채운 후 회막문에서 각종 의식을 행하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의무 기간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런 공개적 행사를 통해 지금까지 제한된 이웃과의 교제 관계를 청산하고, 서원전의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렸던 것입니다.
2) 그는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되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과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려야 합니다(14,15절)
“[14] 그는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15]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릴 것이요”
예물을 드리되. - 여기서 '예물'(코르반)이란 '가까이 가져오다', '준비하다', '제공하다'는 뜻의 '카라브'에서 유래한 말로써 곧 여호와께 나아가는 자가
드릴 '봉헌물', '희생 예물'을 뜻합니다(레1:2).
*레1: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나아오는 자에게 결코 '빈 손'으로 나오지 말 것을 명하신 바 있습니다(출 23:15=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이는 당신이 물질적으로 빈핍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당신을 만나러 오는 자로 하여금 그 은혜를 감사하게 함으로써,
당신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는 목적으로 요구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물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마 6:21).
*마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한편 본문에서는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1) 번제물(일 년 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나실인이 정한 기간을 채움으로써 서원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헌신의 삶을 살아갈 것을 고백하는 표의 예물입니다(레 1:1-17).
(2) 속죄 제물(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 - 헌신 기간 동안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지은 죄와 자신의 부족한 삶 전체를 고백하며 속죄의 은총을 바라고 드리는 제사 제물입니다(레 4:1-5:13).
사실 나실인의 생활이란 절대 무흠(無欠)이 요구되는 것이었으나,
그 서원을 마치는 날 이처럼 죄를 속하는 제사가 요구된 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 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롬 3:10).
*롬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 화목제물(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 - 헌신 기간 동안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계속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여 드리는 제사 예물입니다(레 7:11-36).
(4) 소제물 - 이 제물은 화목 제물과 함께 드려졌는데, 서원 기간 동안 헌신과 봉사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예물이었습니다(레 2:1-16).
그리고 이 소제물과 더불어 전제물이 드려졌습니다.
전제물이란 전제(奠祭)의 방식으로 드리는 예물로서 곧 포도주나 기름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전제물(奠祭物)은 단독으로 전혀 드려질 수 없었고,
보통번제, 화목제, 소제 예물 등과 더불어 드려졌습니다(레 23:13).
한편 위의 각종 예물과 제사에 대해서는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를 참조하라.
소제와 전제로 바쳐질 제물을 열거한 15절의 내용을 보다 쉽게 번역한 공동 번역에는 "또 고운 밀가루를 기름에 반죽하여 누룩 없이 과자 모양으로 만든 것과 기름을 발라 누룩이 없이 만든 속 빈 과자 한 바구니를 곡식 예물과 제주(祭酒)와 함께 가져가 바친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 모두는 여호와께 대한 감사의 표로써 드리는 일종의 감사 제물입니다(레 7:12).
*레7:12 “만일 그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려면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고”
3)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습니다(16절).
“[16]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번제보다 속죄제가 순서상 먼저 드려졌습니다(11절). 그 이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헌신(獻身)과 감사(感謝) 이전에 가장 먼저 요구되어지는 것이 바로 죄(罪)를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 있는 인간과 결코 교제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기에 앞서 죄 문제를 해결함이 마땅합니다.
4) 화목제물로 숫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소제와 전제를 드렸습니다(17절).
“[17] 화목제물로 숫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소제와 전제를 드릴 것이요. - 엄밀히 구분하면 여기서 '소제'는 제사의 한 종류이고, '전제'는 제사 드리는 한 방법입니다.
즉 전제는 제물을 '부어서'드리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예물로서는 주로 기름이나 포도주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제사 종류와 제사 방법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혼용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소제와 전제는 단독으로는 거의 드려지지 않았고,
대부분 번제 또는 화목제와 더불어 드려졌습니다.
5)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두었습니다(18절)
“[18]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그 머리털을 밀고. - 서원한 기간이 종료된 나실인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5절)와 각종 헌신에 대한 의무가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표시로써 머리털을 잘랐습니다.
물론 그가 머리털을 잘랐다고 해서 이제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치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를 드리는 나실인의 까다로운 규제에서 벗어나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 감사와 교제로 상징되는 화목제에 불에 그동안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신이 특별히 구별되었음을 표시하는 긴 머리를(7절) 태우는 것은 서원 기간 동안의 구별된 삶 전체와 그 삶을 가능하게 했던 사실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그동안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께 열납 되었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후부터 하나님과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원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의 삶 전체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과 '하나님과 화목'이라는 대명제 아래 머뭅니다(고전 10:31).
*고전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6) 제사장이 삶은 숫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었습니다(19절)
“[19]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의 머리 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숫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나실인의 서원을 마무리 짓는 최종적인 제사로서 제사장은 화목제 예물(흠없는 수양 한 마리, 14절) 중 수양의 삶은 어깨 부위와 소제 예물(무교병 한 광주리와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 15절) 중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레 2:4 주석 참조)를 취해 '요제'(搖祭)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요제로 드린 이 예물들은 이미 화목제로 드린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레 7:34 주석 참조)와 함께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졌습니다.
이처럼 나실인의 서원 종료 예물을 제사장이 취한 것은 그 나실인의 삶이 앞으로도 계속 제사장의 구별된 삶으로 이어져 그 속에서 하나님과 친교와 화목의 상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축복이었습니다.
7) 여호와 앞에 가슴과 넓적다리를 요제로 드리고 포도주를 마실 수 있습니다(20절)
“[20]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받들어 올린 넓적다리는 성물이라 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라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여호와 앞에 요제로. - '요제'는 화목제 희생 제물의 가슴 및 곡식단과 첫이삭의 떡(본문에서는 무교병과 무교전병, 레 7:12)등을 앞.뒤로 흔들어 드리는 제사 방법입니다<레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가슴과 넓적다리'는 이미 화목 제물 중 제사장의 것으로 구별된 것입니다(레 7:30-34).
한편 요제로 드려질 제물(19절)은 먼저 그것을 드리는 나실인의 손 위에 올려지며, 다음으로 제사장이 제물을 든 나실인의 손을 받쳐들고 흔들므로써 제사가 진행됩니다.
이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상징합니다.
즉 (1)나실인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2)제물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는 이 요제의 행동은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다시 제사장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사실을 상징화한 행동입니다.
(3)그리고 나실인이 바친 풍성한 예물이 하나님의 대변자인 제사장들에게 돌려져 그들의 음식이 되게 한 것은 나실인이 하나님과 거룩하고도 풍성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온전한 봉사를 마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이처럼 구약 시대에 나실인이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교제를 나누는 이러한 간접적인 헌상(獻上)과 교제는 이제 신약 시대에 영적 나실인된 우리 성도들에게 이르러서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직접적인 봉헌과 교제를 이룰 수 있게 되었는 바 이것은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되는 날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이뤄질 것입니다(계 21:1-4).
흔든 가슴과 받들어 올린 넓적다리. - 레 7:34 주석 참조.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 나실인이 나실인으로서의 기간 동안에는 엄격히 금지된 포도주를 마시는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나실인의 서원 종료 제사를 열납하셨음과 그의 헌신 기간이 완전 종료되었음을 확증하는 표시입니다.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때 나실인이 마셨던 포도주는 희생 제물과 더불어 드려졌던 전제물(15절)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8) 이외에도 힘이 미치는 대로, 그가 서원한 대로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입니다(21절).
“[21] 이는 곧 서원한 나실인이 자기의 몸을 구별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헌물을 드림과 행할 법이며 이외에도 힘이 미치는 대로 하려니와 그가 서원한 대로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이니라”
이 외에도 힘이 미치는 대로. - 즉 나실인의 법(13-20절)에 지정된 것 외에 나실인이 마음의 감동을 받은 대로 하나님께 특별 예물을 드려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의무제가 아닌 '자원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힘이 미치는 대로'란 곧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1) 인간의 형편과 처지를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성품을 반영한 조처입니다.
(2) 감사하는 마음과 자원하는 심령에 의해 드려진 예물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합니다(출 36:3).
실로 하나님은 예물보다 그것을 드리는 인간의 마음을 더욱 감찰하십니다(삼상 15:22).
(3) 당신께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억제시키거나 금지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교훈합니다.
한편 이 조항으로 인해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자가 '나실인의 법'을 수행할 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동료들이 자원제의 제물을 대신 내어주는 관례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가 서원한 대로 자기의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이니라. - 이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약속한 것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서원'이 지니는 필수 이행성을 강조한 표현으로써, 비록 서원한 것이 서원자에게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서원의 대전제 조건입니다(시 15:4),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시15: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2. 제사장의 축복(22~27절)
1)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 자격자입니다(22,23절).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1)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릴 축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자 선지자인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축도는 오직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즉 모세와 아론은 각각 그 한계를 지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구약 시대의 모세와 아론의 역할을 홀로 온전히 감당할 거룩한 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곧 우리의 영원한 왕이자 선지지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영적 이스라엘 백성 된 우리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 선언을 받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게 합니다(23절).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의 중보자인 제사장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래 언급된(24-26절) 축복을 선언할 권한은 오직 아론과 그 아들들, 곧 제사장들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제사장 스스로의 권위에 기초하지 않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사장은 매 축복의 내용을 선언할 때마다 '여호와는'(예호와)이란 말을 전제한 후 각종 축언을 베풀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들의 축복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임하신 그 특별한 권위에 전적 의존하고, 나아가 그 권위로 말미암아 그 축복의 내용이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후일 유대 랍비들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있다고 합니다.
즉 '당신은 행여 이 초라한 제사장이 나에게 무슨 축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에게 복을 주시는 자는 그 제사장이 아니라, 그 제사장을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축복하여. - '축복하다'(바라크)는 말은 '하나님을 송축하다', '무릎을 꿇다', '은혜로 복주다', '풍성하게 하다'란 의미 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신적인 복의 선포와 그 선포가 지니는 긍정적이고 풍성한 영향력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신(神)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채 개인이나 공동체에 '축복'이 선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인간을 복(福)되게 하는 근원이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그 모두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 아래 놓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이 말의 용례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1)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善)을 베푸심으로써 그들에게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와 풍성함을 가리킬 때(신 7:12-16)와
(2)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자가 타인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고자 할 때 기원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창 14:19).
본문에서는 위의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신 28장 강해, 성경에 나타난 복의 의미>
2) 축복문입니다(24~26절).
본 축복문(24~26절)에 ‘여호와’가 세 번 언급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주체자는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요엘2:13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십니다”.
‘여호와’는 역대상29:11~12“[11]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12]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13절에서는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라고 송축하였습니다.
(1)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 원하며(24절).
➀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이시자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계약자로서 그들에게 '복'(베라카),
곧 현세적이고 내세적인 모든 복(福)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福)'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과 지혜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시16편).
*시편16:9~11 “[9]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11]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또한 물질적인 번영과 많은 자녀 및 건강과 장수 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창 24:1; 시 127:3).
*창24: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범사에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시127:3 “[2]사랑하는 자녀에게 잠을 주십니다[3]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이처럼 하나님은 선택하시고 부르신 당신의 백성의 필요를 따라 아낌없이 풍성한 영육간의 복을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진정 복의 근원자이십니다.
➁ 지키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지키다'(솨마르)는 말은
원래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이 의미가 발전하여 '세심하고도 철저한 보호와 보존', '주의 깊에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짐'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시37:28)뿐 아니라,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 및 전쟁으로 부터의 보존(시 33:19; 76:3)까지를 의미합니다.
*시37:28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영원히 보호를 받습니다.
*시33:19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사실 향후 죽음의 땅 광야를 행진해야 하며 사나운 이방 세력과 맞부딪쳐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실제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나라를 목적하고 광야 같은 세상을 행진해가야 하는 우리에게도 간절히 요청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없이는 이 세상에서 한시라도 쓰러지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25절).
➀ 그 얼굴로 네게 비추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이란 표현은 그분의 '성품'과 전인격을 상징하는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rmophism)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 우거나 감춘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절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레 17:10; 신 31:17,18; 욥 13:24; 욜2:6).
*레17:10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14]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얼굴을 돌리면 끊어집니다. 즉 죽음입니다.
*신31:17,18 “[17]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18]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욥13:24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반면에 그분의 '얼굴'이 한 개인 또는 어떤 공동체를 향하여 돌려진다는 것은 바로 생명과 구원과 희열이 그 위에 찬란히 비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 27:1; 44:3; 잠 16:15).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잠16:15 “왕의 희색은 생명을 뜻하나니 그의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 방향은 곧 인간 생존의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간직한 채 지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당신의 그 사랑과 은혜(恩惠)와 보호(保護)와 평강(平康)의 얼굴을 항상 돌리시겠다고 축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의 '비취다'(오르)는 '영광스러운'(glorious)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는 말로써, 곧 당신의 영광스러운 광채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로 향하여 짐을 의미합니다.
실로 캄캄한 곳에서는 미미한 촛불하나가 매우 값진 역할을 감당하는데,
하물며 의와 영광의 태양이신 하나님께서 어둡고 지친 우리 영혼에 찬란한 빛을 비추시는데 어찌 벅찬 감격과 생의 희열이 솟아나지 않겠는가?
➁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에게 당신의 '은혜(恩惠)'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은혜'(하난)란 본래 '구부리다', '아랫사람에게 몸을 굽히다'는 의미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은혜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으며 그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엡 2:4,5).
*엡2:4,5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3)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26절)
➀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들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향하여 든다'(나사)는 말은 '받아 들이다', '열망하다', '공급하다'는 뜻을 지닌 말로써 곧 '열정적으로 바라보다', '계속해서 주시하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베푸심'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25절의 '비취사'란 말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묘사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귀중한 대상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계속 주시함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된 자는, 하나님의 그러한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그 어떤 위협과 도전도 능히 극복할 수 있으며,
아울러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롬 8:31-39).
*롬8:31~39 “[31]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➁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평강'(솰롬)은 '안전', '행복', '건강', '번창', '평안', '우정' 등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불화)이 없는 상태', 곧 적막한 평화를 의미하지 않고, 기쁨과 생(生)의 환희가 샘 솟듯 솟아 오르는 역동적인 평화를 가리킵니다(사 55:12)“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평강'은 모든 기쁨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의 축복의 최고 절정을 이루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선포한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평화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죄와 불의를 멸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억제할 수 없는 참 평강을 맛보게 하셨습니다(사 52:7; 53:5; 행 10:36; 골 1:20).
*사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행10: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골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신1:11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3) 축복 내용이 그 백성에게 반드시 이루실 것을 표명합니다(27절)
“[27]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내 이름으로. -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대변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명하는 것은,
곧 자신의 전 의지와 인격을 내걸고 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셨을 뿐 아니라(출 3:14), 축복 선언(24-26절) 중에도 거듭 언급하셨던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절대 거룩한 당신의 이름을 전제하여,
제사장들로 하여금 축복을 선언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전 인격과 명예를 걸고,
그 축복 내용을 그 백성에게 반드시 이루실 것을 표명하셨습니다.
또한 이것은 오직 당신의 이름에 의해서 그 축복이 선포될 때만이 그 속에 담겨진 내용이 유효하게 작용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고로 진정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빠진 축복은 공허한 주문(呪文)에 불과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 이는 여호와께서 유일한 복의 주체자가 되심을 분명히 선언하는 구절입니다.
즉 비록 제사장에 의해 축복이 선포되지만,
진정한 선포자요 수여자(授與者)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이 축복(祝福)은 가장 완전하며,
또한 모든 이들에게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자기 백성에게 복 주시길 기뻐하십니다(22~27절).
제사장은 복의 통로일 뿐,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라는 말 속에 복 주시는 분의 의지가,
“네게”라는 말 속에 복 받는 대상과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축복의 대상입니다.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겠다”(시121:8)고 선언하십니다.
*시121: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그 선한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용서(容恕)와 은혜(恩惠)를 베푸시며
평강(平康)을 누리게 하십니다(시67:1).
*시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서원(誓願)은 완성되었지만(12~21절), 축복(祝福)은 지속됩니다.
축도로 예배를 마치듯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 선언은 항상 축복입니다.
주변에 이 복의 선언이 필요한 ‘너’는 누구입니까?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나실인은 헌신하기로 작정한 기간이 찼을 때 서원의 종료를 알리는 “헌물(獻物)”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13~21절).
헌신(獻身)의 마음을 주시고,
그 헌신(獻身)을 받아주신 은혜(恩惠)에 감사(感謝)하는 제사였을 것입니다.
이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제약을 둔 일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거룩하게 살고 싶은 갈망(渴望),
앞으로도 거룩하게 살겠다는 다짐의 제사(祭祀)였을 것입니다.
은혜(恩惠)가 헌신(獻身)을 가능하게 합니다.
결심만으로는 안됩니다.
은혜 없는 헌신은 자기 의(義)만 남깁니다.
계속되는 봉사에 지쳤다면 은혜를 기억하고,
예배의 기쁨을 회복해 달라고 구할 때입니다.
특별한 일에 헌신한 후 지속적으로 마음을 지키며 일상을 살고 있습니까?
2) 서약 기간이 끝난 나실인은 머리털을 밀어 화목제물 아래 불로 살라야 했습니다(18,19절).
서원을 다 이행했다는 상징인 동시에,
머리카락에 미신적 효과를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처방으로 보입니다.
나실인 삼손의 힘의 근원은 머리털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상징물과 그것이 나타내는 대상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형식에 연연하여 의도(본질)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지 말아야 합니다(27절).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인격이고 실재이기에, 그 이름을 들머기며 함부로 축복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 그 이름에 맞게 사는 것이 축복의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