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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잠언8장22~36절
제목 : 창조자인 지혜
오늘 말씀은 잠언 8장1절로부터 시작된 지혜에 대한 후반부의 말씀입니다.
어제 말씀에서는 지혜가 현제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에 대하여서 설명하였다면, 오늘 말씀은 창조 때의 지혜를 말해 주십니다.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영원 전에 이미 세움을 받았고,
천지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곁에서 함께 우주를 세운 건축가로 지혜를 묘사합니다.
또 창조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으로 활동하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주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1. 창조 전의 지혜(22~26절)
1) 지혜는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있었다(22절).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3:19,20에서 간략하게 언급되었던 지혜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지혜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31절까지 언급되고 있습니다(눅 11:49;고전 1:24).
먼저 저자는 지혜 곧 그리스도께서 창세전에 이미 존재하셨던 사실을 창조 사역에 비유해 순차적으로 설명합니다(요17:5).
*요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조화의 시작(레쉬트 다르코). - 문자적으로는 '그의 길의 시작'이란 뜻으로 성경에서 '길'이 주로 어떤 행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의도하시고 계획하신 때를 가리킵니다.
나를 가지셨으며(카나니) - 원어상 '바로 세우다', '조성하다','소유하다'(시 139:13;사 43:24)란 뜻입니다.
한편 70인역은 이를 '만들다'(에크티세)로 번역했으며,
특별히 성자(聖子)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창조하다'란 말로 번역함으로써 성자가 성부로부터 피조 된 존재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러한 번역들은 원어상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 비약시킨 이단의 사실일 뿐입니다.
곧 본 문구는 창조와 피조 또는 소유의 의미가 아니라 '바로 세우다'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성부께서 성자를 그 창조의 동역자로 세우시고 임명하셨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2) 지혜가 태초부터 세움을 받았다(23절)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만세 전부터'(메올람)는 시간적 의미를 초월한 태초를,
'태초부터'(메로쉬)는 천지창조 직전의 때를,
'땅이 생기기 전부터'(미카드메 아레츠)는 창조 사역의 개시 이후 아직 땅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을 때를 각각 지칭하는 말들로서 이러한 표현은 곧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기법으로 보여집니다(Delitzsch).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니사크티) - 본 문구는 지혜, 곧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 세계의 통치자로 임명되어 기름부음 받은 사실을 시사합니다.
3) 지혜의 선재성(24~26절)
(1) 아직 바다가 생기기 전에 존재(24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큰 샘들이 - 창 7:11 주석을 참조하라.
내가 이미 났으며(홀랄레티) - 문자적 의미는 '(해산의) 진통을 겪다'입니다. 그러나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경우 곧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로 왜곡될 소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 문구는 22절의 '가지셨으며'와 유사한, 지혜 곧 성자의 선재성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의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Toy).
한편 LB는 이를 그 의미대로 '살아 활동하다'(live)라고 번역했습니다.
(2) 산이 세워지기 전에(25절)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산이 세워지기 전에하림 하테바우) - 문자적으로 '산이 물에 빠지다'란 뜻으로서 해석되는데, 이는 모든 산들이 그 근저를 바다 깊은 곳에 두어 육지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막고 제자리에 고정시키는 단단한 기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고대인들의 관념을(욥28:9;38:6) 반영한 말입니다.
따라서 본 문구는 '언덕이 생기기'와 더불어 육지의 생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이 창조 전에(26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여기서 땅은 사람의 주거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며 들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황량한 벌판을 뜻합니다(Delitzsch, Fleisher).
진토의 근원(로쉬 아페로트) - 문자적으로는 '흙의 머리'란 뜻으로 혹자는 이를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으로 보나(Jarchi, Umbreit), '로쉬'를 '전체적인 덩어리', '전체적인 양'으로 해석하여 땅위를 뒤덮고 있는 비옥한 '흙덩어리'로 보는 견해가 문맥상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2. 창조 중의 지혜(27~29절)
1) 창조 사역에 대한 지혜의 적극적인 동역(27절).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이제까지 지혜의 선재성을 강조했던 저자는 여기서부터 창조 사역에 대한 지혜의 적극적인 동역 사실을 언급함으로써(골1:16;요일 1:1-3),
지혜가 창조의 근원인 동시에 인간적 지혜를 초월하는 신적 속성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곧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구분 짓는 궁창(대기권의 하늘)을 만드셨던 사실을 상기시킵니다(창 1:6-8 주석 참조;엽 26:10).
2)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28절).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 여기서 '구름 하늘'은 곧 궁창 위의 물을 지시하는바, 본 문구는 욥 26:8과 같이 구름을 거대한 자루로 여긴 것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보여집니다.
이는 궁창 아래의 물을 대기권의 하늘인 궁창이 떠받쳐 땅으로 쏟아지지 않도록 공중에 떠있게 한 것으로 여긴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보여 줍니다(창 1:7).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 곧 '심연의 근원을 안전하게 고정시키시며'란 뜻으로 '심연의 근원'이 모든 지하수를 총칭한다는 점에서(창 7:11 주석 참조) 본 문구는 노아 홍수 당시 폭우와 함께 지하수가 터져 나온 사실을 상기하며 쓰여진 표현인 것 같습니다.
3)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29절).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바다의 한계를...거스리지 못하게. - 여기서 '한계'는 지정학적 의미에서의 특정 한 지역적 경계를 나타내는 말로(Zockler) '바다의 한계'는 바다와 뭍이 맞닿은 지점을 가리킵니다(창 1:9,10).
따라서 본 문구는 바다가 그 경계를 넘어 땅에까지 이르지 못하게 하셨다는 의미로서(욥 38:8;시 104:9;렘 5:22), 이 또한 노아 홍수 당시 온 육지가 남김없이 물로 뒤덮였던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인 듯합니다(창 7:19,20).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 땅이 어떤 지주(支株)에 의해 떠받쳐져 있다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관념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이러한 용례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합니다(욥38:4;시 24:2;82:5;104:5;사 51:13;렘 31:37).
3. 창조를 기뻐하는 지혜(30~31절)
1) 창조자가 됨(30절)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지혜, 곧 그리스도께서 창조 사역의 동역자라는 사실을 재삼 확증시켜 주는 구절입니다(요 1:2).
한편 '창조자'(아몬)는 원어상 '숙련공'이란 뜻으로서 그리스도의 탁월한 창조 능력을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에혜예 솨아슈임) - 원어상 '내가 기뻐하였다'란 의미로 기쁨의 주체가 지혜(그리스도)자신으로 나타나는 바(I was filled with delight, NIV), 그 기쁨의 주체를 지혜의 동역 사실을 보시고 흡족해 하시는 하나님인 것처럼(창 1장, '보시기에 좋았더라') 번역한 개역 성경의 문맥은 70인역과 KJV의 번역에서 따온 것으로 원전상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곧 본 문구는 지혜가 자신의 창조 사역을 통해서 스스로 기뻐하였다는 의미입니다(습 3:17).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상반절과 병행을 이루는 구절로 이 역시 지혜가 창조 사역 자체와 그 창조물들로 인해 스스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 땅에서 즐거워 하며(31절)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사람이 거처할 땅 - 곧 지혜의 창조 사역으로 만들어진 피조 세계를 가리킵니다.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 이제 지혜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피조물 중 가장 탁월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기쁨의 표현으로 자신의 창조 동역 사실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4. 지혜를 사랑하라(32~36절)
1)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32절)
“[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지혜의 선재성과 창조 동역 사실을 통해 지혜의 신적 실체를 밝힌 저자는 이제 다시 지혜의 보편적인 권면들로 돌아갑니다(5:7;7:24).
그러나 본절 이하의 권고들은 이전의 사회적, 도덕적 삶의 지침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의 것으로 이미 언급한 신적 실체로서의 지혜에 근거해 사람들로 하여금 영혼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있습니다.
한편 이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의 복음의 초청 메시지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요 14:6;7:37,38).
2)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33절).
“[33]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훈계를...버리지 말라 - 4:4-6 주석을 참조하라.
3) 지혜를 들으며 기다리는 자는 복이있습니다(34절).
“[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 여기서 '기다리며'(리쉐코드)는 원어상
'잠자지 않고 밤을 새워 망을 보며'란 뜻으로서 '기다림'의 의미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측면에서 '주의하여 지켜 살펴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곧 본 문구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간절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그 사랑하는 자의 문 곁에 지키고 서서 문이 열리고 그 사랑하는 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을 비유해 지혜를 얻고자 하는 자의 내적 자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Delitzsch, Fleisher).
문설주 옆에서 - '문간에서'(at my doorway, NIV)란 뜻으로 상반점 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4) 나를 얻는 자는 생명과 은총을 얻습니다(35절).
“[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3:18 주석을 참조하라.
5)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36절)
“[36]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나를 잃는 자는...해하는 자라 - 여기서 '나를 잃는 자'(호테이)는 문
자적으로 '나에 대해 범죄하는 자'란 뜻입니다.
지혜의 권고를 배격하고 그 인도를 좇지 않으며 그 길에서 이탈하는 모든 것이 죄악된 행위인 바, 이러한 행위는곧 영적 사망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1:19,32;2:18;5:23).
오늘 말씀을 보면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잠언의 “지혜”와 요한복음의 “말씀”이 동일한 설명으로 이루워 져 있슴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지혜를 “로고스” 그 말씀으로 이해 했습니다.
지혜는 바로 그 말씀이고 말씀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며 곧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로의 초대는 곧 하나님께로의 초대입니다.
지혜의 초대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 초대에 응하는 자와 응하지 않는자의 최후는 극과 극에 이릅니다.
지혜 초청에 지혜에 이르는 자는 생명을 얻지만,
지혜를 잡지 못하고 지혜를 노치는 자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지혜를 얻느냐 못 얻느냐의 문제는 생명과 사망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단순히 육체의 사망만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죽음, 도덕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집에 영원히 머물면서 그 지혜와 함께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로 다스리고 보존하시고 지금도 여전히 견고하게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질서와 조화를 이루시면서 균형 잡힌 세상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능력이며, 또한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지혜가 창조를 바라보며 기뻐했습니다.
30~31절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창세기 1장에 반복되는 말씀이 기억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때에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창조자의 지혜가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창조의 지혜와 함께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자의 지혜를 기쁘시게 하는 하루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22~31절).
지혜는 하늘이 창조되고, 하늘과 물의 경계가 생기며, 바다가 땅의 경계를 넘지 못하게 정해질 때 곁에서 보고 기뻐하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가 이루어지게 하는 대리자로 있었습니다.
지혜는 자신을 창조자로 부르는데, 요한은 창조 때 하나님과 함께 계신 이 지혜(말씀)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창조의 대리자가 되셨습니다.
또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요1:1~4).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창조자이실 뿐아니라, 인류를 재창조하신 분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구원자뿐 아니라, 창조 전부터 계신 창조주로 믿습니까?
또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라 살고 있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지혜는 창조와 질서의 영입니다(22~31절).
하나님이 조화의 시작, 곧 천지를 창조하시기에 앞서 지혜를 만드셨다는(가지셨다는)것은 지혜가 창조의 첫 작품이며, 창조의 근원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지혜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을 연결하며 생명과 질서를 부여합니다.
지혜가 부여하는 생명과 질서를 누리고 따르는 것이 곧 지혜롭게 사는 길입니다.
2) 적극적으로 지혜를 얻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32~36절).
사랑하는 자가 문을 열고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지혜를 사랑하며 부지런히 갈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이유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10).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인신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도를 지키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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