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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떠나는 남편과 이별하는 부인 |
■ 성당기사단 -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한 군사적 수도원 단체
성당기사단은 첫 번째 십자군 원정이 끝나갈 무렵인 1112년 유럽에서 성지(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군사적 수도원 단체이다.
이들은 원래 9명의 기사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들이었지만, 당시 종종 두 번째 교황으로까지 불리었으며, 기독교 세계의 대변인이었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eux)의 후원에 힘입어 급속도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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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기사단원 |
■ 이단시비-성당기사단의 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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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기사단의 인장 |
십자가를 밟고 거기에 침을 뱉았으며,
동성애, 남색을 즐겼으며,
바포메트 악마를 숭배했다.
필립은 성당기사단의 권력과 재산을 빼앗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기독교 국가의 왕들로 하여금 같은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1314년 3월 19일 마지막 성당기사단장이었던 자끄 드 몰레이(Jacques de Molay)는 화형주에 매달려 화형되었다. 몰레이는 화형되면서 필립 왕과 클레멘트 교황을 저주하며 1년 안에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신비롭게도 교황 클레멘트는 몰레이가 죽은 뒤 한달 뒤에 그리고 필립 4세(Philip IV)는 7달 뒤에 죽었다.
성당기사단은 최초의 군대조직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며, 후대 사람들의 전범이 되었다. 이들은 아주 초라하게 시작하였지만, 거대한 발전을 이루고 비극적으로 사라져간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1차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직후, 십자군들은 자신들의 성지회복이라는 자신들의 서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이들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성지 예루살렘은 다시 예전처럼 무슬림들 사이에 포위된 채 남아있게 되었다. 이 시기 즉 볼드윈 2세(Baldwin II)가 다스리던 1118년, 샹파뉴의 기사였던 휴그 데 파옌(Hugues de Payens)과 8명의 동료들은 예루살렘의 대주교 앞에서 기독교 왕국을 사수하겠다는 서약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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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기사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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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기사단원 |
3) 화려한 성장
칼과 성경: 성스러운 특권층
소수 정예의 긍지: 신의 전사들
비밀스러운 입문 의례?
라이벌의 등장과 공정왕 필립의 음모
칼과 성경: 성스러운 특권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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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
성당기사단은 중세인들을 지배하던 두 가지의 커다란 열망을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 두가지 열망은 바로 종교적인 열정과 군사적인 무훈에 대한 열망이었다.
성당기사단은 이렇게 기본적으로 중세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전쟁터에서 자신들의 무용을 보여주기 이전에도 벌써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영적이건 혹은 속세에 관한 것이건 그들에 대해 호의를 표시하곤 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교회권력이건 세속권력이건 간에 다른 권력에 의해 지배받지 않도록 보호해주었다.
또한 그들의 재산은 교회의 재산처럼 다루어졌기에 모든 세금이 면제되었으며, 심지어 십일조도 면제받았다. 또한 성무정지를 받지 않는 특권도 부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혜택에 힘입어 성당기사단의 재산이 증가하게 되고, 반면 교회의 세입은 감소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주교단이 성무정지를 부여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 이러한 권한을 남용하기도 하였는데, 성당기사단에는 성무정지라는 벌칙을 부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교회와 성당기사단간의 갈등의 여지를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1156년부터 이미 성지 예루살렘의 성직자들은 군사단체인 성당기사단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특권을 억제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모든 이의가 거부되었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는 오로지 세속적 성직자들이 이러한 단체에 대한 거부감만 키워놓았을 뿐이다.
소수 정예의 긍지: 신의 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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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기사단 |
성당기사단들은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에는 11명으로 이루어진 집행관이 있었으며, 이는 다시 42개의 영지로 세분화되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성당기사단의 재산들은 주로 무력으로 무슬림들의 것을 빼앗아 생겨난 것이었다. 1140년에 건설된 사페드(Safed) 성, 1143년 사막에 건설된 카라크(Karak) 등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아직도 성당기사단이 세운 성들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1217년 해안 가에 전략적으로 이슬람을 모독하기 위해 건설된 “순례자의 성(Castle Pilgrim)”이다.
수도원이자 기사들의 요새 역할을 한 이러한 성들에서 성당기사단원들의 삶은 다양성의 대비로 가득 찬 것이었다.
한 동시대인(Jacques de Vitry)은 성당기사단을 “전쟁 때는 사자이지만 화덕 앞에서는 양이다, 전쟁터에서는 거친 기사들이지만, 예배당에서는 경건한 수도사이다. 그리스도의 적들에게는 무시무시하지만, 그의 친구들에게는 온화함 그 자체이다.”라고 묘사한다.
성당기사단은 인생의 모든 즐거움들을 포기한 채 긍지에 찬 무관심으로 죽음을 마주 대했다. 공격할 때는 항상 맨 앞에 섰으며, 후퇴할 때는 맨 뒤에 섰다. 지도자의 목소리에는 항상 온순했으며, 군인의 훈련에 수도자의 훈련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군인으로서 성당기사단의 수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한 동시대인은 우리에게 성당기사단이 가장 번창했던 시기에 예루살렘에는 400명의 기사가 있었다고 이야기해준다. 물론 각각의 기사들에게는 시종들이 딸려 있었으므로 그 수를 모두 포함하면 좀더 많은 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성당기사단원들의 숫자가 많고 적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뛰어난 무훈으로 선별된 소수였으며, 전쟁터에서는 다른 기독교의 군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와주었고, 무슬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무슬림에게 패배했을 경우에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기 거부했으며, 또한 포로가 되었을 때 배교를 조건으로 자유를 준다는 제안을 경멸스레 거부하였다.
비밀스러운 입문 의례?
1264년 사페드(Safed) 성이 함락되었을 때 90명의 성당기사단이 전사하였으며, 80명은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유를 조건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하기를 거절하였으며 모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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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페드성 |
이러한 까닭에 2세기 동안 거의 2만 명의 기사들과 시종들이 전쟁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잦은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십자군 정신의 부패로 말미암아 성당기사단은 그 수가 좀체로 늘지 않았다.
따라서 신참자 보다 죽은 기사가 더 많기에 성당기사단은 새로운 신참자를 많이 모집하기 위해 신참자를 받아들이는 규정을 완화시켰다. 즉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준비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규약이 있었지만 이 규약이 사문화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기사가 되는 자격규정이 느슨해짐에 따라 점차 자격이 떨어지는 사람들도 성당기사단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심지어는 성당기사단이 되어 자신의 죄를 씻고자 원하는 파문당한 사람조차도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의 새로운 신참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수도자로서, 군인으로서의 맹목적 복종이었다. 신참자는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비밀스러운 시험과 입문의례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비밀스러운 입문의례는 이후에 성당기사단이 이단으로 고발당하게 되는 주된 혐의내용이었지만, 이 입문의례가 실제로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라이벌의 등장과 공정왕 필립의 음모
세입이 누적되면서 성당기사단의 재산은 점차 어머어마하게 늘어갔다. 또한 이들의 신용도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수많은 왕족과 개인들이 사적 재산을 성당기사단의 은행에 예금하였다. 파리에서는 왕실 재산이 성당에 맡겨졌다.
성당기사단은 한창 최고조에 달했을 때 유럽 전역에 9000여 개의 영지를 소유했다고 말해진다.
교황의 권위를 제외하고는 독립적이었으며, 또한 세속권력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성당기사단은 곧 예루살렘 왕국의 약한 정권을 제어할 권력을 갖게 되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내부적 불화를 거친 매우 약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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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당기사단은 곧 병원기사단(Hospitallers)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병원기사단은 성당기사단에 뒤이어 생겨난 기사단으로 처음에는 성당기사단을 모방하며 형성되었지만, 나중에는 성당기사단의 라이벌이 되었다. 이 두 기사단의 갈등은 예루살렘 왕국의 불화를 좌초했다.
게다가 이 시기 아랍의 살라딘(Saladin) 왕조의 힘은 라틴 왕국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두 기사단의 갈등은 당시 기독교 세계에 충분히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이 두 기사단의 경쟁을 막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다. 즉 이 두 기사단을 합치는 것이었다.
1274년 리용회의(Council of Lyons)에서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러한 의견이 제안되었으며, 또 1293년에도 교황 니콜라스 IV세(Nicholas IV)가 이를 다시 공식적으로 제안하였다. 니콜라스 4세는 또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 국가들이 모여서 이 점에 관해 협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성당기사단과 병원기사단의 문제는 모든 유럽 국가의 관심거리였지만, 특히 프랑스의 왕이자 세인트 루이스의 손자였던 공정왕 필립(Philip the Fair)은 이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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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왕 필립 |
공정왕 필립은 매우 탐욕스러운 인물이었으며, 성당기사단의 어마어마한 부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공정왕 필립은 교회의 영역에 속한 성당기사단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빼앗기 위해 술수를 꾸미기 시작했다.
결국 당시 유럽에는 이 고집세고 교활한 왕과 쉽게 속아넘어가는 유약한 프랑스 인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의 밀약이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소문과 맞물려 성당기사단이 정통에 도전하는 이단이라는 의문스러운 폭로가 있었고, 결국 필립은 교황청의 행동을 촉발시켜 자신이 바라던 것을 얻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4) 교회재판과 기사단장의 화형
자끄 드 몰레이
성당기사단의 재판은 두가지 국면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국면은 공정왕 필립에 의한 재판이었으며, 두 번째 국면은 교황에 의한 재판이었다. 공정왕 필립은 몇몇 타락한 성당기사단원들을 매수하여 이들로 하여금 성당기사단을 매도하는 폭로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공정왕 필립은 이 "폭로"에 근거하여 1307년 10월 13일 모든 성당기사단원들을 체포하여 프랑스로 잡아들인다. 이때 공정왕 필립은 이른바 교회 조사관의 요청에 의해 교회권력으로 성당기사단원들을 체포하는 시늉을 내었지만, 사실상 교회의 협력은 없었다고 한다. 체포된 성당기사단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백을 이끌어내기위한 무시무시한 고문대였다.
중세시대에 목격자가 없었던 범죄들의 경우는 무자비한 고문이 용인되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범죄를 입증하기 곤란한 경우에 피고발자들은 무자비한 고문 끝에 나온 자백 하나로만으로도 유죄가 선고되었고, 또 이러한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문의 사용은 반드시 필요하고 적법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성당기사단의 경우도 명백히 범죄라고 할 만한 것을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잔인한 고문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물론 성당기사단에는 혐의를 살 만한 모습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것은 즉 이들의 입문의례와 관련한 '비밀주의'였다.
성당기사단 입문의례와 관련한 비밀주의는 입문의례가 기사단의 종회(chapter)에서 치루는데, 이 종회라는 것이 기사단의 미묘하고 진지한 문제들이 논의되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비밀리에 치루어져야 했다는 점으로 설명된다. 또한 이에 대한 비밀누설은 기사단으로부터 축출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 입문의례의 비밀주의는 성당기사단에 두가지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입문의례는 기사단의 지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행해졌으며, 상위 당국으로부터 통제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각 지부에 따라 적절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에 의해 오용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 시기 장인들의 길드에서 매일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이들도 또한 신참자가 들어오게 되면 미사 혹은 세례식을 신성모독적으로 모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당기사단의 비밀주의의 두 번째 불리한 점은 성당기사단의 많은 적들에게 이를 토대로 악의에 찬 의심과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울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성당기사단원들은 이러한 비밀 의례 속에서 십자가에 침뱉고, 그리스도를 부정하였으며, 남색을 즐기고, 바포메트라는 악마을 숭배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중세시대에는 편견이 극에 달하면 적들을 파괴하기 위해 이러한 끔찍한 범죄를 뒤집어씌우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교황 보니파체 8세
공정왕 필립에 의해 교황 보니파체 8세(Pope Boniface VIII)에게 가해졌던 불명예스러운 고발을 생각해보면 이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고발된 자들은 끔찍한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은 자신에게 붙여졌던 죄명을 대부분 그대로 시인하고 만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지 않고도 그러한 죄목을 시인하지만 이것도 역시 고문에 대한 두려움에 못이겨 그렇게 한 경우가 많다. 성당기사단의 우두머리였던 자끄 드 몰레이(Jacques de Molay)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단을 관할하는 교황의 권위 없이 행해진 이 심문은 그 의도나 혹은 과정에 있어서 급속도로 타락해갔다.
결국 교황인 클레멘트 5세(Clement V)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을 뿐만 아니라 재판 전체를 무효화하고 이 재판을 관할한 주교와 심문관들의 권력을 중지시켰다. 하지만 공정왕 필립은 파리대학에서 자신에게 준 “믿음의 수호자이자 전사”라는 칭호를 무기로 성당기사단의 소위 끔찍한 죄악에 대한 공론을 형성시켰다.
교황 클레멘트 5세
게다가 그는 체포된 성당기사단원 중 72명을 미리 뽑아 적절히 훈련을 시킨 다음 교황의 앞에 내어놓고 자신들의 범죄를 자백하게 하였다. 1308년 6월 프와티에(Poitiers)에 있었던 이 심문으로 인해 여지껏 그들의 죄에 회의적이였던 교황도 마침내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자신이 감독하는 새로운 위원회를 열었다.
성당기사단 재판의 두 번째 국면은 바로 교황 클레멘트 5세의 심문단에 의한 것이다. 이 재판은 프랑스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모든 유럽의 기독교 국가로 확대된 것이며, 심지어 오리엔트 지방도 포괄했다. 이 재판의 결과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사이프러스 등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성당기사단원들은 무죄로 판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도 몇몇 구역만을 제외하고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만은 황제의 조사단이 다시 활동을 개시하였다.
결국 이 황제의 조사단은 이전에 했던 재판에서 자백했던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무기징역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고행을 하도록 만드는 정도로 결말을 지었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이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속권력에 넘겨졌으며, 엄격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또한 고문에 못이겨 이단이라고 자백했다가, 이 자백을 철회한 자들은 더욱 큰 벌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소위 다시 타락한 이단자들로 규정되었다. 이렇게 한번 자백을 했다가 다시 그것을 철회한 54명의 성당기사단원들은 타락한 자들로 규정되어 1310년 5월 12일 화형당했다.
결과적으로 1311년 10월 16일 비엔나에서 열린 교무총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 기사단을 유지시키려 하였지만, 우유부단한 교황은 공정왕의 압력에 시달린 끝에 마침내 중도책을 채택했다. 즉 교황은 이 단체의 해산을 명령했지만, 이 단체를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므로 해산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황의 직권으로 해산을 명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성당기사단이 숭배한다고 알려졌던 바포메트 신
성당기사단이 해산되면서 교황이 그 기사단원들의 운명과 기사단의 소유물들의 거취에 대해 결정하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의 재산은 경쟁기사단이었던 병원기사단으로 넘어가게 되어 원래의 용도, 즉 성지의 방어에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아라곤(Aragon) 지역에서는 성당기사단의 재산은 포르투갈의 그리스도 단(the Order of Chris)과 아라곤의 몬테사 단(the Order of Montesa)에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성당기사단이라는 조직은 해산되었지만 기사단원들 자신은 무죄로 여겨지게 되었고, 다른 기사단에 들어가거나 혹은 세속으로 복귀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기사단의 소유물이었던 기사들의 저택도 그대로 허용되었다. 다른 한편 주교 앞에서 자신들의 유죄를 인정했던 성당기사단원들의 경우는 “관대한 자비로 완화된 엄격한 정의에 따라” 다루어졌다.
교황은 직접 성당기사단장과 그의 세 명의 최초 고위 인사들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유죄를 인정하였으며, 교회와 화해하고 전통적인 회개의식을 행하였다. 여기에 좀더 공공성을 기하기 위해 노트르-담 앞에 이들의 죄목을 새겨넣은 단이 세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끄 드 몰레이는 용기를 되찾고 성당기사단의 무죄를 주장하였고, 자신의 자백이 거짓이었다고 말하였다.
이 통탄할 만큼 약해졌던 순간을 속죄하기 위해 그는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었노라고 선언하였다. 즉 죽음과 맞바꾸어 명예를 되찾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아무도 예기치 않았던 이러한 극적행위 직후에 그는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다른 고위인사들과 함께 타락한 이단자로 체포되었다. 필립왕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왕궁 문 앞에 마련된 화형주에 매달려 불태워졌다.
자끄 드 몰레이의 이러한 죽음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게다가 자끄 드 몰레이가 죽고 교황과 왕이 잇따라 사망하자, 화형주에 매달린 몰레이가 1년안에 교황과 왕을 저승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저주를 퍼붓고 죽었다는 전설이 퍼져나갔다.
자끄 드 몰레이
성당기사단의 비극적 종말을 낳은 이러한 재판과정은 그 재판에 고발당한 사람의 수는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의혹과 모순된 증거들 속에서 진실을 밝히기가 어렵다는 것, 그리고 영국에서 사이프러스까지의 여러 기독교 세계의 사법권이 동원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커다란 재판거리였다. 또한 아직도 수많은 역사가들이 성당기사단을 옹호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둘로 갈라져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 중 중요한 사람들만을 언급하자면, 우선 성당기사단이 유죄라는 쪽은 Dupuy (1654), Hammer (1820), Wilcke (1826), Michelet (1841), Loiseleur (1872), Prutz (1888), and Rastoul (1905) 등이 있으며, 무죄라고 주장하는 쪽은 Father Lejeune (1789), Raynouard (1813), (1846), Ladvocat (1880), Schottmuller (1887), Gmelin (1893), Lea (1888), Fincke (1908) 등이다.
5) 재판에 관한 몇 가지 증언들
성당기사단은 결국 이단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되고 재산을 몰수당한다.
미스테리에 쌓인 성당기사단에 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상반된 증언들을 남겼다.
여기서는 그 중 성당기사단의 재판과정에 대해 흥미로운 몇가지 증언들을 모아본다
"아비뇽은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의 권좌였다. 클레멘트 5세는 1305년에 리용(Lyons)에서 교황 위에 올랐으며, 당시 프랑스는 필립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1307년 전체 기독교 국가에서 성당기사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클레멘트 5세였다. 필립 왕이 즉위한지 (1306년) 일년이 안되서 성당기사단을 박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또한 그 해에 필립왕이 이 일을 교황 클레멘트와 상의했다는 몇몇 증거들도 있다."
- Graham Hancock, The Sign and the Seal
"프랑스의 공정왕 필립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기독교 제국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강한 재력이 필요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왕국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붙잡아 그들의 한쪽 눈을 없애서 미래를 포기하게 하였으며, 다른 한쪽 눈마저 없애겠다고 위협하였다. 다음으로는 성당기사단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시도를 행동을 옮겼다."
- Peter Tompkins, The Magic of Obelisks
자끄 드 몰레이는 마지막 성당기사단장이었다.
“1307년 10월 12일 목요일 밤, 필립 왕의 군대는 몰레이와 60명의 동지들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다. 필립 왕은 이들을 체포하여 몇몇은 왕실 감옥에 가두었고, 다른 자들은 성당기사단의 자체 감옥에 가두었다.”
13일 금요일 아침까지는 일만 오천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에는 기사들도 있고, 군목도 있었으며 일반 군인들과 종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심지어 성당기사단에서 고용한 일반 노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정식 기사단원이었던 자는 채 500이 안되었다.
주말 경에는 벌써 대중 설교자들이 성당기사단이 프랑스 전역에서 대중들을 겁에 질리게 한다고 비난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체포는 불법적이었다. 공권력은 성직자들을 체포할 수 없었으며, 성직자들은 단지 로마 교황청에만 제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립은 성당기사단에 대한 몇가지 죄목들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으며, 동성애를 했다는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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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의 고문 |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보니파체 8세(Boniface VIII)와 프랑스의 공정왕 필립 사이의 다툼은 중세시대의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긴장과 관련이 있다. (당시 보니파체 8세는 1302년 교회권력이 국가권력의 우위에 선다는 것을 교서를 발표하자, 필립 왕이 이에 반기를 들고 교황을 처단하려 나선 것이다.) 필립 왕의 명을 받고 길라모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라는 이름의 프랑스 관리가 소규모의 사병을 이끌고 교황을 체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들은 교황을 프랑스로 데려와서 프랑스가 관할하는 교회에서 재판을 받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불발로 끝났으며, 이 일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교회법에 의해 파문당하게 되었다. (보니파체 교황이 죽고 후임자인 베네딕투스 11세에 의해) 필립 왕의 파문은 곧 취소되었지만, (교황을 직접 체포하려 했던) 노가레의 경우는 파문이 취소되지 않았다. 필립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죽은 보니파체 8세가 이단, 불신자, 마술사이며, 마녀들을 보호했었다는 비난을 퍼부어댔다. 성당기사단의 재판과정에서 가장 모순적인 것은 바로 그 재판 전체를 관할했던 관료, 즉 길라모 드 노가레가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추방당한 인물이라는데 있었다."
- Peter Partner, The Murdered Magicians
이와 대조적으로 성 베르나르도 영적인 완전성으로 가기 위한 단계를 묘사하기 위해 성스러운 “세 번의 입맞춤”이라는 상징을 사용하였다. 성당기사단의 입문의례에서 남색혐의를 받았던 입맞춤이라는 것이 당시에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그런 것은 중세시대 주군과 가신 사이의 충성의 서약과 거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서약을 할 때 가신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주군의 손을 맞잡고 선언한다. “주인님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충성의 서약을 한다. 그러면 주군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의례상에 정해진 대로 입맞춤을 해준다. 이렇게 되면 가신은 “주군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해야 하며, 주군이 싫어하는 것은 그도 싫어해야 하며, 말로든 행동으로든 결코 그를 슬프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 Noel Currer-Briggs, The Shroud and the Grail - A Modern Quest for the True Grail
성당기사단에 뒤집어 씌워진 온갖 혐의들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신성모독과 이단 혐의였다. 즉 십자가를 부정하고, 짓밟고 그 위에 침을 뱉았다는 것이다.
- Baigent, Leigh & Lincoln, 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1311년 6월 영국의 심문관들은 스테판 드 스트라펠브루게(Stephen de Strapelbrugge)라는 한 성당기사단원에게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듣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성당기사단으로 입문할 때 예수는 그저 사람이지 신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존 드 스토케(John de Stoke)라는 이름의 다른 기사는 자끄 드 몰레이가 자신에게 예수는 그저 사람일 뿐이며, 하늘과 대지의 설계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어야지,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믿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고 진술했다.
- Christopher Knight & Robert Lomas, The Hiram Key: Pharaohs, Freemasons and the Discovery of the Secret Scrolls of Jesus
성당기사단에 대한 심문 끝에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죄목이 밝혀졌다.
- 새로 입문하게 되는 자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때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부정하고, 때로는 예수를 부정하고, 때로는 하느님을 부정하고, 때로는 성모를 부정하고, 때로는 주님의 모든 성인들을 부정하였도다.
- 이들은 기사단 전체의 이름으로 이러한 짓을 했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그러한 죄를 저질렀도다.
- 그들은 입문의례를 받은 뒤에 이러한 짓을 했으며, 신참자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 혹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진실된 신이 아니라고 배웠다고 말하였다.
- 그들은 예수가 거짓 사도라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였다.
- 또한 예수가 고통을 받지도 않았으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지도 않았으며, 단지 자신의 죄 때문에 그리 되었노라고 말하였다.
- 이들은 십자가에 침을 뱉거나 혹은 십자가의 조각 혹은 그리스도의 그림 위에 침을 뱉았다. 또한 십자가를 발밑에 놓고 깔아뭉개기도 하였다.
- 이들은 심지어 십자가 위에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성당기사단 고발문 요약]
“여지껏 알려진 모든 고문 방법을 동원하라”
심문관들은 ‘여지껏 알려진 모든 고문 방법을 동원하라’는 엄명을 내렸고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이 넘치는 데로 무엇이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몇몇 성당기사단원들은 질문을 하나 받을 때마다 이빨이 하나씩 뽑혀나갔으며, 이빨이 뽑혀나간 자리에는 다시 고문이 가해졌다. 한쪽 손톱 밑으로는 나무못을 쑤셔대었으며, 다른 쪽 손톱은 뽑아버리곤 했다. 가장 자주 쓰던 방법은 침대처럼 생긴 강철 판에 성당기사단원을 맨발로 거꾸로 누인 다음에 불에 달군 숯을 기름 바른 발 위로 미끄러트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 끝에 몇몇 기사들의 경우는 미쳐버리기까지 했다. 또 많은 기사들은 발이 다 타버려서 마지막 심문 때는 발이 없는 기사들이 타버린 발에서 삐져나온 검은 뼈들을 봉지에 싼 채로 심문장에 나오곤 했다. 쇠를 달구어서 고문하는 방법도 무척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었는데 온 몸 어느 군데건 계속해서 쉽게 가할 수 있는 고문이었기 때문이다.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달군 쇳덩이를 몸 위에 대고 있다 대답이 늦게 나오거나 틀린 대답이 나오면 곧바로 눌러서 지져버리는 것이었다.
- John J. Robinson, Dungeon,Fire and Sword (1991)
파리에서는 10월 달에 조사받은 138명의 기사들 중 105명이 스스로 입문의례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했노라고 자백했으며, 123명은 침을 뱉었다고 자백했다. 103명은 척추의 끝자락 혹은 배꼽위에 입맞춤을 했노라고 자백했다. 그리고 102명은 동료기사단원들 사이에 동성애적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자백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이 동성애를 했다고 자백한 자는 3명이었다.
기사단장인 자끄 드 몰레이를 포함해 거의 모든 성당기사단원들이 이렇게 스스로 유죄를 자백한 것은 곧 바로 기사단의 파멸로 이어졌다. 비록 이러한 자백이 심한 고문에 의한 것이었고, 나중에 교황의 조사단이 재조사를 할 때 전에 했던 자백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성당기사단원들은 제 입으로 자신들에게 유죄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Gabrielle M. Spiegel
프랑스에서는 36명의 기사단원이 죽고, 조사받은 138명중 123명이 유죄라고 자백을 하였다. 심지어 자끄 드 몰레이조차 이러한 엄한 심문 앞에 몸을 수그리고 동성애를 했다고 자백하였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이를 다시 부정한다.
한편 까르까손느(Carcassone)에서는 두 명의 기사단원들이 자신들이 바포메트(Baphomet)라는 우상을 만들어 섬겼노라고 자백했으며, 피렌체의 기사들은 마호메트(Mahomet)라는 이름으로 이 우상을 섬겼다고 했다. 그러자 왕실의 조사단원들은 미친 듯이 바포메트에 대한 증거를 찾아다녔고 결국 성골함을 닮은 이상한 금속제 해골모양을 발견하였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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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십자군 |
- Gabrielle M. Spiegel
영국에서는 성당기사단원들이 자신들의 죄상을 인정하고 성당기사단의 이단성을 인정한다면 가벼운 처벌만을 받고 풀려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당기사단원들이 그렇게 했다. 이렇게 자백을 한 기사단원들은 속죄를 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가거나 혹은 몇몇은 병원기사단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교회가 허락한 최소한의 옷과 음식만을 가진 채 세속의 삶으로 돌아갔다.
- John J. Robinson, Dungeon, Fire and Sword (1991)
십자군 전쟁에서 성당기사단이 얼마나 열심히 싸우다 죽어간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무죄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당기사단에 대한 가장 심한 고발이 카타리 이단의 중심지역에서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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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 이단자들 |
- Noel Currer-Briggs, The Shroud and the Grail - A Modern Quest for the True Grail
1305년에 교황이 된 클레멘트 5세는 교황의 재판정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교황은 프랑스에서 1307년 10월 27일에 있었던 성당기사단의 심문결과에 대해 크게 항의했지만, 공정왕 필립이 11월 말경 몇몇 성당기사단의 자백을 발표하자, 클레멘트 교황도 결국 모든 성당기사단의 체포에 동의하게 되었다. 성당기사단의 재판은 거의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벌어졌다. 1308년 1월 영국도 자국 안의 성당기사단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영국에는 118명의 기사단의 사병들, 11명의 군목, 그리고 오직 6명의 기사들이 있었으므로 모두 합쳐 성당기사단에 속하는 사람은 135명이 있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란드의 성당기사단원들도 모두 잡혀갔다. 하지만 아무리 심문해도 별다른 결과를 낳지 못하자 결국 클레멘트 교황도 이들에게 고문을 사용할 것을 승인하였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영국에서는 성당기사단에 속하는 200여명이 극심한 고문을 당했으며, 이중 4명은 십자가에 침을 뱉었노라고 자백했다. 파리에서는 1310년 말경 120명의 성당기사단원이 화형당했다. 아마도 성당기사들이 가장 좌절한 것은 정신적인 측면이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죽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많은 동료들이 미쳐갔다.
프랑스에서 여론은 성당기사단이 유죄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프랑스 인들은 성당기사들이 지옥에서 여자 악마를 불러내어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고 믿었다.
카스띠야의 몇몇 성당기사들은 너무나 겁에 질려 그라나다로 도망쳐서 무슬림이 되었다. 1312년 3월 마침내 클레멘트 교황은 '솔로몬의 성당의 청빈한 기사들'(성당기사단의 정식명칭)에게 씌워진 모든 죄명이 확실함을, 즉 성당기사단이 유죄임을 선언했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노르망디의 성당기사단 지부장이었던 죠프리(Geoffroy de Charnay)는 기사단장인 자끄 드 몰레이에게 가서 저항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이 둘은 자신들의 무죄를 큰 소리로 외쳐대면서 산 채로 불에 태워졌다. 그때 모인 군중들은 이들에게 동정적이였으며, 이들이 순교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화형식이 있은 뒤 전설이 만들어져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전설에 따르면 자끄 드 몰레이가 죽어가면서 필립왕과 클레멘트 교황을 하느님의 정의 앞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화형식이 있은 뒤 한달이 안되서 클레멘트 교황이 죽었으며 그해 8월에는 필립왕도 죽었다. 또한 필립왕의 세 아들들과 후계자 또한 젊어서 죽었다.
- Desmond Seward, The Monks of War
6) 시돈(Sidon)의 해골
죽음을 기억하라- 해골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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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메이슨의 무덤 장식에서 그 비슷한 상징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해골 밑에 두 개의 뼈가 교차되어 있는 문양은 프리메이슨과 연관된 상징으로 알려져 왔다.
해골과 교차된 뼈다귀가 프리메이슨 상징이건 아니건 간에 이 상징은 인간의 유한한 생명임을 즉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이 유한성의 상징은 또한 성당기사단의 의식에서도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성당기사단의 재판과정에서 생겨난 잘못된 믿음인 듯하다.
성당기사단이 수도원적 단체이기 때문에, 여성과 성적 접촉을 금한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시돈의 해골에 대한 전설에 따르면 한 타락한 성당기사가 이미 죽은 여성의 시체를 범했다고 한다. 이 타락한 성당기사는 무덤을 파고 죽은 여성의 시체를 범하고 난 뒤 9개월 뒤에는 무시무시한 출산을 보게 된다.
시체가 낳은 아이- 시돈의 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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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성지인 시돈 |
시돈의 군주였던 한 성당기사는 한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젊은 나이에 죽어버리게 되자, 이 성당기사는 그녀가 매장된 바로 그 날 저녁 그 무덤을 파헤치고는 시신을 범한다. 그러자 하늘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9달 뒤에 이곳으로 와서 지금 행한 일의 결과로 태어날 아이를 찾으라 하였다.
약속대로 9개월 뒤 그 자가 무덤으로 찾아와 무덤을 다시 열자 그는 두 개의 다리뼈가 교차되어 놓여있고 그위에 해골이 하나 얹혀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9개월 전의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이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라 이 물건은 너에게 온갖 선물을 줄 것이니라’ 이후로 그 기사는 해골을 소중히 간직하고 어디에라도 가지고 다녔다.
결국 그 해골은 이 성당기사의 수호정령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고, 기사는 그 해골을 내밀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모든 적들을 다 무찌를 수 있었다. 이 해골은 나중에 성당기사단의 소유가 되었다.
조작된 전설
이 전설은 발터 맵(Walter Mapp)이라는 작가에 의해 쓰인 것으로 12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이 시돈의 해골을 가진 기사가 성당기사단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성당기사단 전혀 상관없는 전설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1307년에서 1314년에 걸친 성당기사단의 재판과정에서 성당기사단을 이단으로 단죄하면서 이러한 전설이 교묘하게 성당기사단과 관련된 것으로 변질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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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만시 의식 |
에드워드 버만(Edward Burman)는 그의 책 '극도로 혐오스러운 범죄들(Supremely Abominable Crimes)에서 안토니오 시치(Antonio Sicci)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사람은 북 이탈리아의 베르첼리(Vercelli)라는 곳 태생의 공증인이었다. 시치는 자신이 성지 예루살렘에서 성당기사단을 위해 일할 때 시돈의 군주에 대한 전설을 들었노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시치의 이러한 주장은 성당기사단을 이단의 죄목으로 고발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성당기사단을 조사하던 심문관들과 신학자들은 이 전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이 아르메니아 계라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아르메니아 교회에는 일명 바울파(Paulician)라는 이단 종파가 있었는데, 이 바울파와 보고밀파는 카타리 이단에 속하는 종파들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교회에서는 카타리 이단이 흑마술과 네크로만시(죽은 자와 교감하는 마술의 일종)를 한다고 비난하던 터였다.
따라서 시돈의 해골전설에 나오는 여성이 아르메니아 계라는 사실은 적대자들이 성당기사단을 송두리채 흑마술을 수행하는 이단으로 몰기에 좋은 근거가 되었다.
"심볼리안"에서 발췌 (http://www.symbolian.com/web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