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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5장21~34절
제목 :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이 아침에 치유의 은사가 나타나시기를 축복합니다.
계속하여 치유의 이적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을 받고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댄,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여자를 고치십니다.
1. 야이로의 간구를 들으심(21~24절)
1) 예수님께서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십니다(21절)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돼지 몰사 사건이 발생했던 위치가 갈릴리 호수 동편이므로 건너편이라고 할 때 서쪽 해안 곧 가버나움 지경으로 추측됩니다(마 9:1).
이곳은 바로 갈릴리 선교의 전진 기지였습니다.
그곳에서도 역시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이 표현은 4:1의 표현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거라사”지방과는 대조적입니다.
즉 거라사 지방에서는 떠나줄 것을 요구했지만 갈릴리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수의 인기를 보증해 줍니다.
바닷가에 계시더니. 이 표현은 바닷가에 도착한 시각과 22절에 나오는 다음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간격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닷가가 많은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용이한 지역이었으므로 이곳을 자주 당신의 교육의 장(場)으로 활용하셨습니다.
2)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렸습니다(22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회당장 중 하나. 이는 “한 회당장”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됩니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습니다(눅 4:13 ; 8:41 ; 행 18:8,17).
실로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失墜)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the laymen classes)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때로 “회당장”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야이로(Jairus)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데는 의심할 바 없습니다.
야이로. 이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이해됩니다(민32:41 ; 삿10:3).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입니다.
사실 그 당시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② 예수님의 치료 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합니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님의 이적 행위에 대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줍니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님을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3)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져서 살게 하소서 합니다(23절)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必死的)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님께 간절히 매어달렸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회당장이 예수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린 딸”(뒤가트리온)이란 조그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끊는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게 되었사오니”(에스카토스 에케이)란 지금 죽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한편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이가 12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눅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합니다(눅 8:4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즉 마가와 누가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절)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 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때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어쨌든 세 복음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박(急迫)하다는 것입니다.
손을 얹으사.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그 손을 딸의 몸 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체적입니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습니다(6:5 ; 8:23, 25 ; 약 5:14-16).
따라서 회당장의 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며,
그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란 “구원하다”, “보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 (소조)의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 예수님으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석하면 “(당신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여 (계속) 살게 하소서”가 됩니다.
4)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24절)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출발하는 장면 묘사입니다. 여기서 “가실새”(아펠덴)란 예수님께서 곧바로 출발하셨음을 암시합니다. 즉 예수님은 즉각적 응답으로써 그의 간청에 호응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급히 이동하자 바닷가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이동하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의 행동을 표현한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좇으며, 더욱이 예수님께 접근하기 위해 계속 몸을 부딪히는 혼잡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실로 이 같은 장면은 그 당시 예수님을 중심한 분위기가 매우 열기가 있음을 보여 주며, 따라서 예수님의 명성과 인기가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댄 여인(25~28절)
1)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25절)
여기서 상황이 바뀌고 있습니다.
야이로 회단장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12년 동안 혈루증(血漏症)을 앓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혈루증(subject to bleeeding, NIV)은 현대의학 용어인
“혈루병”이 아닙니다.
“혈루병”은 여자에게 유전 인자로 잠재할 수는 있어도 병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남자에게는 유전으로 잠재성과 병으로 모두 나타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혈루증은 만성 하혈증(下血症)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자궁(uterus)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clr적으로 피가 흐르는 중세일 것으로 간주했습니다(레 15:25).
따라서 종교 생활 뿐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 여인의 병이 12년(“12”는 완전수 또는 하나님의 계회과 성취를 나타내는 수로 상징됨)이나된 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병이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병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이 여인이 병으로 받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처참(悽慘)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편은 25절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2) 많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 졌습니다(26절)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위한 노력을 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적 노력을 더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의원들은 그녀에게 더 심한 고통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의사 출신인 누가는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눅 8:43)는 말로써 동료 의사들의 한계 상황을 깊이 배려하며 적절히 묘사하고 있습니다(Robertson).
한편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이 여인의 가정은 어느 정도 부자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부자가 아니면 의사를 찾아 갈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치료비로 다 써버리고 이제는 가난한 처지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병은 더 악화되었다는 묘사는 25절에서 12년 동안 병을 앓아왔다는 표현과 함께
① 병의 불치성과
② 의술의 무력함을 나타내 보이고
③ 인간적인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 갔다는 절망적인 상황 묘사와 ④ 그 여인이 받고 있는 고통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절박(切迫)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재산을 치료비로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병든 몸 하나이고 그나마 병은 더욱 악화되고 병의 부정함 때문에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인의 모습은(레 15:25-28) 인간 최악의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입니다. 삶과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상실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은 4장의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과 2~5절의 귀신들린 사람과 2,23절의 죽음 직전에 이른 야이로의 딸과 함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인간적인 노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혈루증의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서 구원자 예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니(27절)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절망의 벽에 부딪힌 이 여인은 예수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소문을 상세하게 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앞에서(23절) 언급된 야이로 회당장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처럼 예수님께서 주체가 되어 환자와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자가 예수님에게 접촉을 함으로써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3:10 ; 6:56에서도 나타납니다.
즉 예수님을 만지게 해 달라거나 옷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는 간청은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하다는 확신에 찬 믿음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치유 받고자 하는 사람의 믿음을 강조하는 점입니다.
이 여인은 직접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소문을 통하여 믿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그녀는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님을 만지게 되는데, 이 같은 사실은 그녀의 담대함(간절함)과 겸손함을 대변해 주는 행동입니다.
즉 그녀는 사회 통념상 여자로서 뿐 아니라 부정한 자로서 공중(公衆) 앞에 나설 수 없는(접촉 불가) 입장이었으나 그러한 사회,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님께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몰래 감추고 자신의 병을 가만히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뒤로” 온 것입니다.
한편 마태는 그녀가 예수님의 “겉옷 가”(the edge of his cloak, NIV)를 만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9:20).
즉 그녀는 예수님과 접촉함으로써 율법적으로는 예수님을 부정케 만든 결과가 되었습니다(레 15:19-27).
그러나 생명의 주님께서는 이 모든 의식적 부정을 초월(超越)하여 그녀의 믿음을 받아 들이셨습니다.
4)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28절)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실 그녀의 이 같은 심정에는 미신적(superstitious) 요소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예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구원자이심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한편 “함일러라”(엘레겐)는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 같은 사실을 되뇌이고 또 되뇌였음을 보여 줍니다.
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29~34절)
1)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9절)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여인의 믿음대로 병은 즉각적으로 치료되었습니다.
실로 12년 동안 한시도 그녀의 몸에서 출혈(出血)이 떠나지 않은 그 지독한 병증이 완전히 제거된 것입니다.
이 상황을 공동번역은 “출혈이 그치고”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특히 “혈루의 근원”이라는 표현은 병의 치료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치료된 것을 암시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법은 치료의 즉각 성과 피료의 완벽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12년간의 정신적 고통이 함께 해결된 것입니다.
이러한 치료는 예수님과의 전인격적(全人格的) 접촉(교제)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병이 나았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그녀는 혈루의 근원이 근절되자 곧 자신의 치유를 자각(自覺)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같은 자각은 곧 그 치유가 몸으로 직접 느낄 정도로 완전하고도 신속하게 치유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즉각적이고 근원적인 치유 기적이 발생한 놀라움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27절에서 묘사된 여인의 행동입니다.
그녀는 환자의 연약한 몸과 여자라는 핸디캡(handicap)을 갖고 그 많은 군중 속에서 겨우 예수님의 뒤쪽에서 손을 옷에 대었습니다. 간청을 한 적도 없고 믿음을 예수님께 밝힌 적도 없는 이 여인에게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 여인이 갖고 있는 믿음이 공개된 사실은 없지만 이미 숨겨진 믿음도 기적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암시합니다(히11:6). 실로 예수님은 인간의 심령을 살피는 분으로서 그 소원의 깊이를 조용히 알아보고 계셨던 것입니다(마 6:6).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2)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30절)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치유 기적이 예수님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사실과 누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사실을 감지한 것입니다.
사실 그 치료받은 여인은 모든 것을 은밀히, 조용히 심지어 예수님마저 모르게 해결하고자(27절) 했었습니다.
물론 이 같은 그녀의 생각은 심히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그녀의 겸손하고도 조용한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사람들이 혼잡한 가운데서도(31절) 당신의 전지성(全知性)으로써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이미 알고 계셨고 또 그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당신이 친히 그녀의 소망을 들어 주셔서 그녀의 치유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 “스스로 아시고”(에피그누스 엔헤아우토)란 완전하고도 초월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행위의 동기와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계셨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이 나간 줄 아신 것이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니라 곧 그 여인이 치료된 사실을 예수님께서 뒤늦게 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 치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능동적인 깨달음, 곧 당신이 그 능력을 능동적으로 계획하셨고 또한 발휘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예수님께서 그 간은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셨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밀한 이적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시기 위해 이 같은 질문을 의도적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생각되는 바는 33, 34절의 내용으로 보아 치료받은 사람과 인격적(人格的)인 관계를 맺기 위함인 것으로도 보입니다.
병의 치료는 단순히 물리적인 치료만이 완전 치유가 아닙니다.
병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신체적 고통 못지않게 큰 것이므로 인격적 만남 속에 병이 치유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병을 고침 받은 것이 미신적 신앙 때문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신앙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손으로 당신의 옷자락만 잡기보다 그 영(靈)으로 당신의 거룩한 인격을 잡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3)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31절)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시는 것에 대하여 불만 섞인 응답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혼잡하고, 또 사람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식의 반문입니다.
이 사실은 혈루증을 치유한 사실이 예수님과 환자 자신밖에 모른다는 사실과 제자들의 영적 무지(육체적 접촉만 생각하고 영적 교감(靈的交感을 도외시함)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치유 받은 여인은 즉각 나타나 고백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상당히 큰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4) 여인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32~33절)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님께서는 바로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직접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치유 받은 여인은 더 이상 사실을 숨긴 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몹시 뚜려워하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강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여인을 찾으시는 행위입니다.
제자들의 퉁명스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치유된 여인을 찾고 있는 장면(“둘러 보시니”는 미완요시제)은 치유받은 자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기 위함도 아니고 치유를 확인하기 위한도 아닙니다. 오직 치유 받은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녀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갖게끔 하기 위한 것입니다(30절 주석 참조).
이것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관심과 뜨거운 사랑 및 변함없는 연민을 갖고 있음이 암시됩니다.
둘째는 치유받은 여인의 행위입니다.
그녀는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① 자신의 병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이고 따라서 죄인 취급받는 신분이기 때문에 군중들 틈에 끼여 들였다는 것을 공개하기에는 두려운 사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② 또 그런 부정한 몸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사실이 특히 여자의 신분으로서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③ 그녀는 자신이 지금 받은 은혜를 예수로부터 훔쳐 낸 것 같은 심령을 가졌을 것이다.
즉 그녀는 예수 몰래 예수의 신적 능력을 이용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④ 마지막으로 예수에 대한 깊은 경외감(敬畏感)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엎드린 모습은 22절의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즉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신적인 권위와 초월적인 능력을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경외감이 두려움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한편 그녀는 예수님의 강권적인 요구로(내밀한 요구였음) 자신의 만성적인 몹쓸 질병과 그 기적적 치유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무리들 앞에서 공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소위 신앙 간증으로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크나큰 은혜에 부응하여 그분께 무한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으며,
또 그녀가 완전한 정상인이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기도 했습니다.
실로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가 주어진 것입니다.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절)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예수님께서 치유받은 여인에게 공개적으로 내린 구원 선언합니다. 여기서 “딸아”(뒤가테르)란 성숙한 여자나 소녀를 향하여 애정어린 마음으로 친밀히 부르는 호칭으로서(23절)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하여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곳은 복음서 가운데 본문이 유일합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믿음” 때문에 완전한 회복(구원)을 얻은 것임을 주지시키셨습니다.
그 “믿음”은 그녀가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함을 확신한 것입니다(27, 28절 주석 참조).
그리고 그 믿음을 행위로 옮겼을 때 이 여인의 가장 절망적 문제였던 혈루증이 완전히 치유된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하였으니”(세소켄)란 완료시제를 취하고 있어 그 구원이 이미 그녀에게 확실히 주어졌음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구원은 현상적으로는 육체적 구원과 영적 구원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묘사되고 있습니다(2:1-12).
따라서 이 치유의 체험은 질병으로 인한 모든 육체적 고통과 자신이 부정한 죄인이라는 정신적, 영적 굴레로부터 벗어남을 뜻합니다(25절 주석 참조).
이와 같은 구원 선언을 예수님께서는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이 여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님은 이 여인을 소외 당했던 사회로 다시 복귀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려고 그 여인을 그렇게 찾았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또한 부정한 여인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죄의식으로부터 풀려나는 것 뿐만 아니라 건강과 평화로운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원 선언을 한 다음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감동적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안히 가라”(Go in pease, NIV)는 문자적로 “평화를 향하여 가라”는 뜻보다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사하신 것입니다.
이 평안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인 “샬롬”(삿 18:6 ; 삼상 1:17)을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공하신 것입니다(요 14:27). 이 “평안”에 대해 혹자(Anderson)는 말하기를 “여기서 꼭 내적인 고뇌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의 완전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여하튼 모든 인류가 이와 같이 평화로운 은총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 선언은 눅 7:50 ; 17:19 ; 18:42 등에도 나타납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병치유의 기적은 내면적인 구원 문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치유의 목적이 단순한 병치유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구원과 관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언제나 그분께 나아오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입니다(24절)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병든 자의 고통과 가족의 애끊는 심장을 잘 아시기에 회당장 야이로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와 함께 가십니다.
사람이 만든 헛된 우상들은 무자비하며 강한 자의 편이 되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연약한 심령을 돌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 내 문제와 고민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2) 주님을 믿는 자에게 평안을 선포하십니다(29~34절).
예수님은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즉시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옷을 만지기 전에 마음에 가진 믿음까지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와 같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의 소원만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의 소원도 들어 주십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공동체에 복귀하여 건강한 삶을 누리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전인적인 회복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자신의 열두 살 난 딸의 구원을 간청합니다.(21~23절)
예수님은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지탄받고 있었기에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간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딸의 생명을 다루는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기에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믿으며, 주님 앞에 엎드려 사랑하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간구합니까?
2)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따라갔지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은 그들 중에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손을 댄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25~28절).
나는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신뢰하고 예수님께 손을 뻗습니까?
기도 :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며 늘 주님 앞에 나아가 문제를 아뢰고 으지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