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내용을 보면 밀레의 그림이 사회주의적인 그림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밀레의 그림들에 대해서 보는 이들이 느끼는 감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말하고자 하였던 그 진실, 즉 보는 이의 마음이 슬프니 강물이 슬프게 들리고, 보는 이의 마음이 두려우니, 강물의 소리가 두렵게 들리는 것이 아닐까?
밀레의 그림에 대한 오해 중 가장 심각한 경우는 『만종』의 경우 일 것이다. 이 그림은 밀레의 가장 대표적인 그림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 얽힌 진실’이라는 떠도는 소문에는 이 그림이 하루일과를 마치고 감사를 드리는 모습이 아니라, 사실은 ‘배고픔으로 죽은 아기를 애도하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해보면 이 소문에 대한 이야기도 가지가지다. 원래 죽은 아기가 바구니 안에 있었다고 하는가 하면, 죽은 바구니의 자리에 아기의 관으로 보이는 관이 놓여있었다고 하는가 하면, 아기의 관을 묻을 만한 네모난 구덩이가 있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을 출품하기 전 밀레의 친구가 그림이 끼칠 파장을 생각해서 감자바구니로 대신 그려서 출품을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친구가 정확히 누구인지, 그 말의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이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만종」에 바구니 대신 아기의 관이 그려져 있었다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초현실주의의 거장이었던 ‘달리’로 알려져 있다. 달리가 어린 시절 그 그림을 보고 그림 안에 평화로운 분위기 보다는 무엇인가 불안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감자바구니 아래에 아기의 관이 놓여있었던 것을 통찰(?)하고 그림이 “죽은 아기를 위한 기도”라고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어린 아이의 낭설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후일 어떤 난봉꾼의 칼에 의해 그림이 손상을 입자, 이를 복원하기 위해 x-선으로 확인한 결과 바구니 아래에 원래 그려졌던 네모난 구덩이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 사실이 어린 달리가 말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만종」에 대한 이러한 <추측>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근거가 없는 것이고, 마치 사람들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구체적인 <아기의 시체>가 보이지 않고 다만 ‘작은 상자’가 보일 뿐인데, 그것을 왜 ‘죽은 아기의 관’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둘째는 그것이 설령 아기의 관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아기가 아니라, ‘애완견’이거나 ‘양의 새끼’가 죽어서 묻으려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설령 죽은 아기의 관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기가 전염병으로 죽은 것인지, 교통사고로 죽은 것인지 혹은 늑대에게 물려서 죽은 것인지 혹은 굶어서 죽은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살바도로 달리’라는 한 위대한 화가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 생각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 달리가 「만종」에서 발견한 것은 <불안> 이었다. 그런데 죽은 아기를 애도하는 부모의 마음이라면 <슬픔>이어야지 왜 불안이라는 말인가? 사실 달리의 그림들은 그 자체가 ‘불안’과 ‘허무’가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달리의 고유한 실존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이다. 달리가 <만종>에서 불안을 본 것은 달리의 자신의 내적인 감정의 투영일 뿐, 밀레의 <만종>에서는 분명 불안이 아닐 것이다.
이 그림이 불안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가?
어떤 책에서는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린 동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옛날에 저녁종이 울리면 할머니는 언제나 일손을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어!”
하지만 이 역시 실제로 이렇게 밀레가 말 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은 밀레의 그림에 대해서 자신의 느낌이나 판단은 자유이겠지만, 이 느낌이나 상식도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근거가 없는 억지 추측은 결코 그림을 판단하는 방식을 수 없다는 점이다. 국내의 한 철학교수는 위 그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렇게 기도하는 손이 삶의 중심인 한 저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저들이 손을 모으는 것은 사람이 약해서 종교로 도망가는 일이 아닙니다. 저들은 사람을 믿고 생명 있는 것을 믿고 자연을 믿어서 초자연의 신비를 뱃심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소소한 일상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 경향신문, 오피니언, 2011, 04, 03,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 밀레의 만종 중에서 =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밀레의 그림을 통해서 자신이 느낀 무엇일 것이며, 어쩌면 <자비의 원리>에 의해서 어떤 것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일 것이다.
만일 <자비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든 명백하게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추측하여 '사실' 혹은 '실재'로 인정한다는 것은 ‘허상’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허상으로서 무엇을 판단한다는 것, 이것이 곧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이다. 일반적으로 소문은 60%가 거짓이고 99%가 과장이다.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고, 나의 의식 안에서 분명한 것이 아닌 것은 ‘실재’로 받아들일 때 인간은 ‘허상’으로 자신을 채우고 실재를 살지 못하고 환상을 살아갈 뿐이다. 만인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매 순간 허상을 살지 않고 ‘실재’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