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치 뿌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뿌리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선사시대 촌락공동체(씨족사회)에 다다르게 된다.
당시 마을 주민(씨족원)들은 일정한 장소에 모여 회의를 통해 마을의 중요한 일들을 공동으로 처리했다.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은 그 후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형태로 발전되고 전승되어 왔다.
물론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에 서양식 잣대를 들이대면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하지만 꼭 서양식 잣대로 평가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가 주체적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본다면 우리에게도 서양보다 훌륭한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이 있다는 것을 넉넉하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 전부에 걸쳐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건상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위주로 다루고자 한다.
조선시대의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을 다루자면 먼저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인 주자를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은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이 바로 주자이기 때문이다.
주자는 중앙권력이 아닌 향촌자치를 통해 세상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향촌자치의 실현수단으로 향약과 사창을 만들어 시행했다.
오늘날 향약은 마을헌법과 마을정부, 사창은 마을기금으로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무척 놀라게 된다. 나는 마을공화국의 핵심 요소로 마을헌법, 마을정부, 마을기금을 들고 있는데 주자는 나보다 900년이나 앞서 그런 통찰을 했다.
셩리학은 고려말에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 당시 고려에서는 권문세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백성을 수탈하고 있었다. 이에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은 개혁을 추진했다.
사대부들은 개혁 방안을 둘러싸고 혁명파 사대부와 온건파 사대부로 분열되었다. 혁명파 사대부는 역성 혁명을 주장했고 온건파 사대부는 점진 개혁을 주장했다.
결국 혁명파 사대부들은 이성계세력과 합심하여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건국했다.
새롭게 건립된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했으나 혁명파 사대부들은 향촌자치를 외면하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추구했다. 그들은 현실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했다.
한편 온건파 사대부들은 조선 왕조 건국을 쿠데타로 여기며 중앙정치를 거부하고 낙향했다. 그들은 원칙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했다. 그렇게 낙향한 온건파 사대부들은 성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중앙에 진출했다. 이때의 온건파 사대부들을 사림이라 부른다.
이처럼 사림이 중앙정치로 진출할 때 혁명파 사대부들은 개혁정신을 상실하고 부패타락해 훈구파로 변질되어 있었다.
중앙에 진출한 사림은 훈구파와 각을 세우며 개혁을 추진했다. 그때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광조를 들 수 있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정신에 따라 왕도정치와 향촌자치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특히 중종을 설득해 전국적으로 향약을 실시했다. 하지만 곧 훈구파의 반격이 있었고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향약 시행은 중단되었다.
향약은 선조대에 이르러 다시 시행되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조광조 때와는 달리 중앙정부 주도의 전국적•일률적 실시가 아니라 향촌에서 개별적•자율적 실시 쪽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소위 '조선향약'이라 부른다.
조선향약을 정립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들 수 있다.
퇴계와 율곡은 특정 마을에서 그 마을 실정에 맞는 향약을 실시했다. 특히 율곡은 향약 외에 사창도 실시했다.
그렇게 퇴계와 율곡에 의해 정립된 조선향약은 17세기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퍼져 마을마다 특성에 맞게 향약이 실시되었다.
앞서 주자는 향촌자치의 실현수단으로 향약과 사창을 실시했다고 했다. 당연히 사림은 사창의 실시도 추진했다. 하지만 향약과 달리 지지부진했다. 마을마다 관이 주관하는 마을기금인 환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이 주도하는 환곡은 백성수탈기구로 전락했다. 이에 개혁방안으로 관이 아니라 민이 주도하는 사창이 제시되었으나 관(수령과 향리)의 반발로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 이후 대원군의 개혁으로 환곡은 민이 주도하는 사창으로 바뀐다.
한편, 향약의 운영조직은 향회와 유향소였다. 향약이 마을헌법이라면 향회는 마을의회, 유향소는 마을행정부였다. 향촌 양반들은 향약과 향회, 유향소라는 자치기구를 통해 향촌사회를 지배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신분제가 동요되며 서얼, 향족, 평민도 향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향촌자치권을 놓고 구세력과 신세력간에 치열한 쟁탈전(향전)을 벌이게 된다. 신세력은 수령과 결탁하여 향권을 장악했지만 향회는 수령의 부세보조기관으로 전락했다.
19세기 농민항쟁기에 향회는 분화되어 농민이 주도하는 민회로 발전하게 된다. 역사기록에 '민회' 이름이 처음 나오는 것은 1862년 농민항쟁 때라고 한다.
보은집회 때 동학혁명군은 자신들의 조직을 '민회'라고 불렀다. 또한 민회는 집강소로 이어진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와 자치의 싹이 피어난 것이다.
하지만 동학혁명은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고 민회와 집강소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우리 민족 스스로 틔운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와 자치의 싹은 그렇게 잘려나갔다.
그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회와 집강소는 망각되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을 철저히 짓밟았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서구의 대의제와 정당제를 채택하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뤘으나 양극화가 심해지며 스카이캐슬로 상징되는 엘리트제국이 되었다.
묻고 싶다. 현재의 정치체제가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은 아직도 일제가 단절한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우리가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럴 때 엘리트제국 대한민국은 시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고 누구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되지 않을까?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 서울과 제주에서는 민회가 구성되었다.
서울과 제주에서 이제 막 탄생한 민회는 작은 불씨에 불과하다.
작은 불씨에 불과한 민회가 큰불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마을헌법, 마을정부, 마을기금을 축으로 하는 마을공화국이 건설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일제에 의해 단절된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치 전통이 다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때 엘리트제국 대한민국은 참된 민주공화국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 민주주의와 자치전통인 향촌자치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