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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백(姜小百,제환공)
태조 8권, 4년(1395 을해/명홍무(洪武)28년) 10월 30일(경신) 1번째기사
밤에 정도전등 훈신을 불러 주연을 베풀다
밤에 임금이 판삼사사 정도전등 여러 훈신(勳臣)을 불러 술을 마시고 풍악을 잡혔다. 주연(酒宴)이 한창 벌어질 무렵에 임금이 정도전에게 하는 말이,
“내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경등의 힘이니,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만대에까지 이르기를 기약함이 옳을 것이다”하니,
도전이 대답하였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포숙(鮑叔)에게 묻기를, ‘어떻게 해야 나라가 다르려지오?’하니, 포숙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는 거(莒)땅에 계셨을 때를 잊지 마옵시고, 원컨대, 중부(仲父)께서는 함거(檻車)에 있을 때를 잊지마소서’하였으니, 신이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말 위에서 떨어지셨을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역시 항쇄(項鎖)했을 때를 잊지 않으면, 자손만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옳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서 문덕곡(文德曲)을 노래하게 하고, 도전에게 눈을 껌벅이면서 하는 말이,
“이 곡은 경이 찬진(撰進)한 바이니 경이 일어나서 춤을 추라”하니,
도전이 즉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임금이 상의(上衣)를 벗고 춤을 추라하고, 드디어 귀갑구(龜甲裘)를 하사하고는 밤새도록 심히 즐기다가 파하였다.
○庚申/夜上召判三司事鄭道傳等諸勳臣, 置酒張樂。 酒酣, 上謂道傳曰: “寡人之得至於此, 卿等之力也。 相與敬愼, 期至子孫萬世可也。” 道傳對曰: “齊桓公問於鮑叔曰: ‘何以治國,’ 鮑叔曰: ‘願公無忘在莒時, 願仲父無忘在檻車時。’ 臣願殿下無忘墜馬時, 臣亦無忘鎖項時, 則子孫萬世可期矣。” 上曰: “然。” 使人歌《文德曲》, 目道傳曰: “此卿所撰進, 卿宜起舞。” 道傳卽起舞, 上令脫上衣以舞, 遂賜龜甲裘。 歡甚徹夜乃罷。
태종 6권, 3년(1403 계미/명영락(永樂)1년) 11월 18일(임진) 2번째기사
의안대군 이화의 첩에게 옹주 칭호를 주는데 반대하는 사간원의 상소문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소하였는데, 소(疏)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선왕(先王)의 예(禮)가 적첩(嫡妾)의 분수를 엄하게 한 것은 대륜(大倫)을 밝히고 가도(家道)를 바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혜공(惠公)이 중자(仲子)로 부인(夫人)을 삼은 것을 기롱(譏弄)하여 후세에 경계를 남기었고, 제환공(齊桓公)이 맹세할 때에 ‘첩(妾)으로 아내[妻]를 삼지말라’고 하여 밝게 금하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지금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첩(妾) 매화(梅花)는 본래 관기(官妓)로서 이름이 악적(樂籍)에 매어 있었사온데, 다행히 천역(賤役)을 면하고, 또 외람하게 옹주(翁主)의 칭호를 받았으니, 이미 적첩의 분수를 잃었고, 또 부마(駙馬) 평녕군(平寧君) 조대림(趙大臨)의 길례(吉禮)때에, 종실(宗室) 명부(命婦)와 척리(戚里)의 제부(諸婦)가 모두 그 집에 모였을 적에 천첩(賤妾)으로서 거만하게 종친 명부의 위에 앉아있어, 이름을 어지럽히고 분수를 범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헌사(憲司)에 내려서 작첩(爵牒)을 거두고, 참람하고 건방진 죄를 다스리고, 본역(本役)을 정하여, 적첩의 분수를 엄하게 하소서.”
임금이 노하여 박석명(朴錫命)에게 이르기를,
“궁방(宮房)의 모임을 내가 모두 보았는데, 매화는 매양 종친의 아래에 있었다. 지금 이것을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하고,
장무(掌務)인 헌납(獻納) 정안지(鄭安止)에게 묻기를,
“종친명부(宗親命婦)의 모임을 네가 알바가 아닌데, 너에게 말한 사람이 누군가?”하니,
대답하기를,
“신들이 전하의 이목지관(耳目之官)이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말의 옳고 그름만을 살피실 것이요, 말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으실 필요는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끝까지 캐면, 네가 어찌 감히 숨기겠느냐마는, 내가 아직은 용서한다”하고
또 묻기를,
“의안(義安)이 적처(嫡妻)을 잃었으니, 매화를 대하는 것이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다. 태상왕께서 작(爵)을 봉하였고, 또 의안(義安)이 일찍이 여러 번 내게 충성을 다하였는데, 그가 사랑하는 첩을 빼앗아서 환본(還本)시켜 정역(定役)함이 옳으냐?”하였다.
대답하기를,
“본역(本役)에 돌리는 것은 정리(情理)에 마땅치 않사오나, 법에는 그렇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정리에 마땅치 않다면서 나더러 하라고 하느냐? 너희들은 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만일 행할 수 없는 일이라면 구차히 말하지 말라.”
○司諫院上疏。 疏略曰:
先王之禮, 嚴嫡妾之分, 所以明大倫而正家道也。 是以《春秋》譏惠公以仲子爲夫人, 垂戒後世; 齊桓公之盟, 毋以妾爲妻, 以著明禁。 今者義安大君和妾梅花, 本以官妓, 名隷樂籍, 幸免賤役, 又濫受翁主之號, 已失嫡妾之分。 且駙馬平寧君趙大臨吉禮之時, 宗室命婦、戚里諸婦, 咸會其第, 乃以賤妾, 傲然坐於宗親命婦之上, 亂名犯分。 願殿下特下憲司, 收其爵牒, 治其僭踰之罪, 定其本役, 以嚴嫡妾之分。
上怒, 謂朴錫命曰: “宮房之會, 予悉見之, 梅花每處宗親之下。 今乃以是言之, 何哉,” 問掌務獻納鄭安止曰: “宗親命婦之會, 非爾所知, 與爾言者誰也,” 對曰: “臣等爲殿下耳目之官。 殿下但當察其言之可否, 不必問言者是誰。” 上曰: “予若窮詰, 爾何敢匿! 予姑優之耳。” 又問曰: “義安喪嫡妻, 對梅花固無害義, 太上王因而封爵。 且義安累曾效忠于我, 奪其愛妾而還本定役可乎,” 對曰: “還其本役, 不宜情理, 於法則然。” 上曰: “旣云不宜情理, 而欲予爲之耶, 爾等其以可行者言之, 若事之不可行者, 毋苟言之。”
세종 44권, 11년(1429 기유/명선덕(宣德)4년) 4월 9일(갑신) 2번째기사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가다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좌전(左傳)》을 강(講)하다가, 관중(管仲)이 제후(齊侯)1352)에게 말하기를,
“적을 불러서 위로하는 데는 예(禮)로써 하고, 먼 지방을 회유(懷柔)하는데는 덕으로써 하니, 덕과 예를 변역(變易)하지않으면 사람이 사모하지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한 귀절에 이르러, 임금이 탄식하기를,
“공자(孔子)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진문공(晉文公)은 속이고 바르지못하며, 제환공(齊桓公)은 바르고 속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그러나 내가 두 임금의 사적을 상고해보니, 환공(桓公)이 천하를 바로잡고 제후(諸侯)를 규합(糾合)하여 제후의 우두머리[諸侯伯]가 된 것은 오직 관중(管仲) 한 사람의 어진 이가 이를 보필(輔弼)했기 때문이다.
문공(文公)의 신하는 관중(管仲)과 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도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어 환공보다 오래 지속하였으니, 설령 문공(文公)이 관중을 얻었더라면 그 공렬(功烈)이 어찌 환공(桓公) 에 그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강(講)하다가,
“실행(實行)하고 기록하지않는 것은 성덕(盛德)이 아니다”라는 말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 말은 무엇을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사관(史官)은 마땅히 한 시대 행사(行事)의 자취를 다 기록하여 뒷세상에 보일 뿐인 것이다.
임금된 사람이 어찌 능히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착한 것은 기록하게 하고, 착하지 못한 것은 기록하지 못하게 하겠는가?”하니,
검토관(檢討官) 설순(偰循)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이른바 ‘써서 법되지않으면 후사(後嗣)가 무엇을 보겠느냐?’는 말과 같아야만 경계하는 말이 되어 임금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사신(史臣)은 마땅히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지않고 다 기록해야 된다고 한 것은 이 말을 한 사람은 자못 실언(失言)한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하였다.
註1352]제후(齊侯):제왕(齊王), 제환공:강소백(姜小白)
○輪對, 經筵。 講《左傳》至“管仲言於齊侯曰: ‘招携以禮, 懷遠以德, 德禮不易, 無人不懷。’” 上歎之曰: “孔子嘗稱: ‘晋文公譎而不正, 齊桓公正而不譎。’ 然予考二君之迹, 桓公一匡九合, 爲諸侯伯者, 獨一管仲之賢有以輔之。 文公之臣, 無一如管仲者, 而爲天下伯則久於桓公。 設使文公得管仲, 其功烈, 豈止桓公哉,” 又講至作而不記非盛也之語曰: “未知此言何謂也。 史官當盡記一時行事之跡, 以示後世耳, 爲人上者, 豈能使史官善則記之, 不善則不記乎,” 檢討官偰循對曰: “當如所謂書而不法, 後嗣何觀, 然後乃可爲進戒之辭, 而曉其君矣。 史臣當不分是非, 而盡記之, 爲此言者, 殆失之矣。” 上曰: “善。”
세조 13권, 4년(1458 무인/명천순(天順)2년) 6월 29일(을유) 9번째기사
한명회를 좌익1등공신으로 책훈하는 교서
한명회(韓明澮)에게 반교(頒敎)하기를,
“큰 집을 짓는 자는 반드시 주석(柱石)의 재목에 의지하여야 하고, 큰 기업(基業)을 세우는 자는 반드시 호걸(豪傑)의 인사에 의지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신백(申伯)2792), 방숙(方叔), 소목공(召穆公)은 주(周)나라 선왕(宣王)때 중흥(中興)의 융성한 시대를 가져왔고, 구순(寇恂)2793), 등우(鄧禹), 경감(耿弇), 오한(吳漢)은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때 왕조를 다시 세우는 공업(功業)을 이루었는데, 공(功)이 이미 보익(輔翼)하는데 많았으므로 은혜도 또한 포숭(褒崇)하는데에 지극하였다.
생각하건대, 경은 성질과 도량이 침착하고 웅대할 뿐만 아니라 풍자(風姿)도 크고 훌륭하며, 행동은 충(忠),효(孝)의 아름다움이 나타나고 학문은 경(經),사(史)의 글에 통달하였다.
작은 일에 구애하지 아니하고 무리와 어울리지않는 높은 재주가 있고 강개(慷慨)하여 경세(經世)하려는 원대한 지략이 있었으나, 중도에 비운(否運)을 만나서 오랫동안 하료(下僚)에 침체(沈滯)했었다. 지위가 낮았으나 이름은 더욱 높았고, 몸이 가난하였으나 뜻은 더욱 웅장하더니, 드디어 제갈공명(諸葛孔明)2794)처럼 삼고(三顧)2795)의 지우(知遇)를 만나 마침내 진평(陳平)2796)처럼 육계(六計)2797)의 기이한 계책을 바치었다.
지난번에 간신(姦臣)이 흉포한 짓을 다하여 나라의 운명이 절박해지자 내가 그때 의(義)에 분발(奮發)하여 불궤(不軌)한 무리들을 없애버리고자하였는데, 경도 또한 모의(謀議)에 협력하여 드디어 비상한 공적(功績)을 이루고, 왕실(王室)을 옆에서 보좌하여 위험한 때를 함께 구제하였다.
비록 수악(首惡)은 이미 그 전형(典刑)을 받았는데, 여얼(餘孽)이 아직도 천망(天網)을 빠져나와서 몰래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틈을 엿보아 보복(報復)하려는 생각을 다하려고 하였으나, 경이 또 능히 기미(幾微)를 환히 알고 자기 몸을 잊고 절개를 보여 조용히 대책(對策)을 결정하고 도와서〈여얼을〉주토(誅討)하는 공(功)을 이루고, 분주하게 충성을 다해서 간난(艱難)한 즈음에 나를 호위(護衛)하고, 이에 대명(大命)을 모아서 오늘의 아름다움에 이르게 하였다.
옛날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부열(傅說)2798)을 얻어서 내[川]를 건너는 배에다 그를 비(比)하였고,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관중(管仲)2799)을 재상으로 삼고서 날아가는 기러기의 날개에다 그를 비유(比喩)하였으니, 고금(古今)의 자취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임금과 신하의 만남은 같은 것이다.
이러한 큰 공(功)을 생각하니, 마땅히 큰 상(賞)을 내려야 하겠으므로, 좌익 1등공신(佐翼一等功臣)으로 책훈(策勳)하고, 그 부모(父母)와 처(妻)를 봉작(封爵)하며, 유사(宥赦)가 영세(永世)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전지(田地) 1백50결(結), 노비(奴婢) 13구(口), 백은(白銀) 50냥쭝, 표리(表裏)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내려주니, 이르거든 수령(受領)하라.
아아! 대려(帶礪)로써 맹세하여 충훈(忠勳)을 밝게 보이니, 나의 고굉(股肱)이 되어 더욱 왕실을 보호하기에 부지런히 하라”하였다.
註2792]신백(申伯):주(周)나라 선왕(宣王)의 명신 註2793]구순(寇恂):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때 명신 註2794]제갈공명(諸葛孔明):제갈양(諸葛亮).註2795]삼고(三顧):임금이 신하를 세 번 찾아감 註2796]진평(陳平):한(漢)나라 고조때 명신.註2797]육계(六計):한(漢)나라의 공신(功臣) 진평(陣平)이 한(漢)나라가 천하(天下)를 통일할 때까지 반간(反間)을 놓아 초(楚)나라 항우(項羽)의 군신(君臣)사이를 이간시키고, 밤에 여자 2천명을 영양동문(榮陽東門)으로 내보내어 고조(高祖)를 탈출시키고, 한신(韓信)을 임시로 제왕(齊王)에 봉했다가 속여서 운몽(雲夢)에서 잡은 일등의 여섯 가지 기계(奇計)를 말함. 註2798]부열(傅說):은(殷)나라 고종(高宗)때 명신 註2799]관중(管仲):법가(法家)의 정치가.
○敎韓明澮曰:
構大廈者, 必賴柱石之材, 建丕基者, 必資豪傑之士。 是以申、甫、方、召致, 周宣中興之隆, 寇、鄧、耿、吳, 成漢光再造之業, 功旣多於輔翼, 恩亦極於褒崇。 惟卿性度沈雄, 風姿魁偉, 行著忠孝之懿, 學貫經史之文。 有磊落不群之高才, 有慷慨經世之遠略, 中罹否運, 久沈下僚。 位卑而名愈揚, 身窮而志益壯, 遂致孔明三顧之遇, 終試陳平六計之奇。 乃者姦臣肆兇, 國步斯蹙, 予時奮義, 欲剪不軌之徒, 卿亦協謀, 遂建非常之績, 夾輔王室, 共濟時危。 雖首惡已正其典刑, 而餘孽尙漏於天網, 陰伺危疑之釁, 欲逞報復之懷。 卿又能炳幾燭微, 忘軀徇節, 從容決策, 贊成誅討之功, 奔走効忠, 扞衛艱難之際, 用集大命, 式至今休。 昔殷宗得傅說而比於濟川之舟, 齊桓相管仲而喩諸飛鴻之翼, 古今之迹雖異, 君臣相遇則同。 念玆戎功, 宜膺茂賞, 肆策勳爲佐翼一等功臣, 爵其父母及妻, 宥及永世。 仍賜田一百五十結、奴婢十三(曰)〔口〕、白銀五十兩、表裏一段、內廐馬一匹, 至可領也。 於戲! 誓以帶礪,昭揭忠勳,作我股肱,益勤保乂。
세조 22권, 6년(1460 경진/명천순(天順)4년) 10월 6일(무신) 1번째기사
대가가 개성부에 이르니, 기로와 유생이 가요를 올리다
크게 우레와 번개하고 바람 불고 비가 내렸다.
대가가 판문평(板門平)에 이르니, 비가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권지(權摯)가 대가를 영접하였는데 여러 일이 매우 소홀하였다. 길을 인도하는 자가 늙은이였는데 대가를 진흙 빠지는 곳으로 그릇 인도하였으며 행궁(行宮)의 여러 일이 또 착오된 것이 많았다.
명하여 권지를 의금부에 내리었다. 개성부에 이르니, 기로(耆老)4658)와 유생(儒生)등이 남대문(南大門) 앞에서 서립(序立)하여 가요(歌謠)를 올리었다.
기로의 가요에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순수(巡狩)의 제도는 예전부터입니다. 우제(虞帝)로부터 하후(夏后), 주왕(周王)에 이르기까지 모두 행하였으되, 이것은 모두 제도를 통일하고 출척(黜陟)을 엄하게 하였으니 제후(諸侯)의 법인 것입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유문(繇文)의 자손으로서 큰 역복(歷服)을 이어 받아 소의간식(宵依旰食)4659)하시고, 부지런히 백성의 곤궁한 것을 근심하시며, 개연(慨然)히 예전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이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중외에 계칙(戒勅)하고 10월 초하루에 삼농(三農)이 끝마침을 고하자 드디어 법가(法駕)를 갖추어 서쪽 방면을 살피시니, 귀신과 사람이 매우 기뻐하고 만이(蠻夷)와 융적(戎狄)이 두려워합니다.
천년동안의 폐한 법전(法典)을 하루아침에 일으키시니, 신등은 예전에 서울에 자라서 밭두둑에 엎드려 있으며 늙을 무렵에 다시 한(漢)나라의 위의(威儀)를 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지팡이를 붙들고 열(列)에 나아와서 참새처럼 뛰는 것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하리(下里)의 노래를 바치어 거의 태사(太史)의 채택에 대비합니다”하고,
사(詞)에는 이르기를,
“아름답다! 우리 왕이시여.
예전 제도를 상고하여 사방을 살피시니, 10월 좋은 때에 큰 거북에게 점치어 신지(神祇)에게 고하고 서쪽 변방에 순행하시었다.
고취(鼓吹)가 앞을 인도하니, 우위(羽衛)는 가볍고 빠르고, 달리는 길은 평평하고, 어헌(魚軒)은 엄숙하고 화하도다. 청궁(靑宮)으로 버금하니 백료(百僚)가 그림자처럼 따르도다. 풍운(風雲)은 영(靈)을 합하고 일월(日月)은 광휘(光輝)를 더하도다. 송경(松京)에 이르니 송경의 부로(父老)들이 사통오달(四通五達)한 길에서 노래하여 덕을 좋아하도다. 우리 왕이 한 번 노시니 백성을 사랑하는 자는 우대하고, 탐관오리는 근심하도다. 우리 왕이 한 번 즐기시니, 위엄이 널리 나타나서 오랑캐들이 멀리 도망하도다.
인(仁)은 요(堯), 순(舜)을 짝하시고 패업(覇業)은 제(齊)환(桓), 진(晉)문(文)4660)을 더럽게 여기시니, 여러 나라가 첩복(帖伏)하여 순종하도다.
이번의 이 한 번 순행은 편안히 노는 것이 아니요 순수(巡狩)함이니, 모두 우리 백성을 위함이로다. 혜소(徯蘇)4661)의 읊음으로 가시는 곳마다 서로 경사로 여겨 모두 너그러운 정치를 즐기도다.
신들은 흰머리로 농사일을 마치고 광화(光華)를 보게 되었다.
송죽(松竹)의 무성함과 건곤(乾坤)의 오램으로 성수(聖壽)를 절하여 드리도다”하였고,
유생(儒生)의 가요에는 이르기를,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 빛나게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큰 역복(歷服)을 이어서 근심하고 부지런하게 다스림을 도모하여 모두 도리에 맞아 결함이 없으신데도 오히려 사경(四境)의 넓음과 민정(民情)의 궁곤함을 염려하시어 우조(虞朝)의 성방(省方)의 제도를 거행하고, 하후(夏后)의 유예(遊豫)의 속언(俗言)을 징험삼아 드디어 법가(法駕)4662)를 갖추어 서쪽으로 가시니, 난여(鑾輿) 이르는 곳에 뛰고 춤추는 것이 똑같았습니다.
신등이 다행히 밝은 시대에 나서 오래 향학(鄕學)에 있어 풍기(豊芑)의 혜택이 흡족하였고 규곽(葵藿)의 정이 깊었습니다.
뜻밖에 지금 천표(天表)를 뵈오니 기뻐 날뛰는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배수(拜手) 계수(稽首)하여 공손히 비연(斐然)의 장(章)을 드리니 목여(穆如)의 칭송이 부끄럽습니다”하고,
사(詞)에 이르기를,
“관서(關西) 천리에 추성(秋成)을 경축(慶祝)하니, 봉연(鳳輦)과 예정(霓旌)이 옥경(玉京)에서 내리도다. 바다와 산악은 빙둘러서 지고(指顧)에 돌아오고 풍운(風雲)은 뒤얽히어 함령(咸靈)을 돕는다. 누가 순성(巡省)이 편안히 노는 것이 아닌 줄을 알랴, 숭고한 자리에 있으면 감히 편안할 수 없음이리라. 만년을 가져서 성산(聖算)을 더하니 남극(南極)의 노인성(老人星)이 빛나도다”하였다.
註4658]기로(耆老):조선조때 70살이 넘은 정2품 이상의 문무관(文武官)을 일컫던 말.註4659]소의간식(宵依旰食):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정복을 입고, 해가 진 뒤에 저녁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함을 비유한 말.註4660]제(齊)환(桓), 진(晉)문(文):제(齊)나라의 환공(桓公)과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을 일컬음.註661]혜소(徯蘇):탕(湯)임금이 갈백(葛伯)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악(惡)한 나라를 정벌하니, 그 나라 백성들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을 기다렸는데, 임금이 오니 우리가 소생된다[徯我后后來其蘇]’고 하였음.註4662]법가(法駕):노부(鹵簿:임금행차 거둥때의 의장규모 의식)의 하나.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제향(祭享)하고 국학(國學)에 행차하여 석전례(釋奠禮)를 행하고, 사단(射壇)에 활 쏘거나 무과(武科) 전시(殿試)의 사단(射壇)에서 활을 쏘는 것을 구경할 때등에 사용하는 의장임. 전정(殿庭)의 반의장과 같음.
○戊申/大雷電, 風雨。 駕至板門平, 雨猶不止。 開城府留守權摯迎駕, 諸事頗踈闊。 指路者老耄, 誤引大駕於泥陷處, 行宮諸事又多違錯。 命下摯于義禁府。 至開城府, 耆老、儒生等序立於南大門前, 進歌謠。 耆老歌謠曰:
臣聞巡狩之制, 古也。 自虞帝曁夏后、周王皆行焉, 玆皆一制度、嚴黜陟, 爲諸侯法者也。 恭惟我殿下繇文子孫, 嗣大歷服, 宵衣旰食, 勤恤民隱, 慨然欲復古制。 爰命有司, 戒飭中外, 十月初吉三農告畢, 遂備法駕, 省方于西, 神人闓懌, 蠻戎震疊。 千載曠典, 一朝而擧, 臣等生長舊京, 跧伏壠畝, 不意垂老復覩漢儀。 扶杖就列, 不勝雀躍, 謹獻下里之謠, 庶備太史之採。
詞曰:
休哉我王! 稽古省方, 十月之良, 廟于元龜, 迺告神祗, 迺幸西陲。 皷吹導前, 羽衛翩翾。 馳道平平, 魚軒肅雝。 副以靑宮, 百僚景從。 風雲協靈, 日月增明。 聿戾松京, 松京父老, 歌于逵道, 繄德之好。 吾王一遊, 字民者優, 貪墨斯憂。 吾王一豫, 威稜布著, 氈裘遠去。 仁侔堯、舜, 覇鄙齊、晋, 堤封帖順。 今此一巡, 匪逸是循, 率爲吾民。 徯蘇之詠, 攸徂相慶, 咸樂寬政。 臣輩皤皤, 竣事犂鋤, 獲覩光華。 松竹之茂, 乾坤之久, 拜獻聖壽。
儒生歌謠曰:
伏覩殿下光奉帝命, 嗣大歷服, 憂勤圖治, 咸中罔缺, 猶慮四境之廣, 民情之隱, 擧虞朝省方之制, 徵夏后遊豫之諺, 遂備法駕, 于焉西邁, 鑾輿所至, 蹈舞惟均。 臣等幸生昭代, 久叨虞庠, 豐芑澤洽, 葵藿情深。 不意今玆獲覩天表, 不勝懽忭之至, 謹拜手稽首, 恭獻斐然之章, 仰慙穆如之頌。
詞曰:
關西千里慶秋成, 鳳輦霓旌下玉京。 海岳周遭歸指顧, 風雲轇輵助咸靈。 誰知巡省非惟逸, 自是崇高不敢寧。 擬把萬年增聖算, 煌煌南極老人星。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명성화(成化)4년) 9월 16일(임신) 1번째기사
중국에 부고하고 시호를 정하게 하며 의정부에서 행실을 찬하여 예부에 주달하다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이석형(李石亨)을 보내어 중국에 가서 부고(訃告)하고 시호(諡號)를 정하게 하였는데, 의정부(議政府)에서 행실(行實)을 찬(撰)하여 예부(禮部)에 주달(奏達)하였다.
“왕(王)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아무[某]이며, 자(字)는 수지(粹之)이니, 장헌왕(莊憲王)의 제2자(第二子)로 모비(母妃)는 심씨(沈氏)인데, 본국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심온(沈溫)의 딸이었습니다.
영락(永樂) 15년 정유년(丁酉年)8607) 9월 병자(丙子)에 탄생하였는데, 천자(天資)가 영명(英明)하여 배우기를 좋아하며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며, 덕기(德器)가 날로 이루어져 수양군(首陽君) 에 봉(封)하여졌습니다.
장헌왕(莊憲王)이 만년(晩年)에 병이 걸렸을 때에 왕(王)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침 저녁으로 곁에 모시며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않았고, 훙(薨)함에 이르러서는 애통해하여 몸이 여위니 보는 자가 감탄하지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경태(景泰) 3년8608)에 공순왕(恭順王)이 훙하니 황제(皇帝)께서 상선감좌감승(尙膳監左監丞) 김유(金宥)와 우감승(右監丞) 김흥(金興)을 보내어 시호와 제사를 내려주셨고, 또 사왕(嗣王)의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내려주었으므로, 사왕은 왕(王)8609)을 뽑아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서울에 나아가 칭사(稱謝)하게 하였습니다.
4년에 간신(姦臣)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등이 무리를 모아 불령(不逞)하게 반역(反逆)을 꾀하여 화기(禍機)가 이미 절박하였으므로, 왕이 사왕에게 고(告)하여 주살(誅殺)하여 제거하였고, 6년에는 사왕이 나이가 어리고 또한 병들었으므로 나라안에 연고가 많으니, 배신(陪臣)을 보내어 연유를 갖추어 진주(陳奏)하고, 국사(國事)를 왕에게 전(傳)하여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7년 2월에 황제께서 내관(內官) 윤봉(尹鳳), 김흥(金興)을 보내와서 고명(誥命)을 내려주고, 이어서 왕과 왕비의 면복, 관복(冠服), 채단(採段)을 내려주었으므로 왕은 배신(陪臣)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어 진사(陳謝)하게 하고, 이어서 적자(嫡子) 이장(李暲)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왕은 이미 봉(封)함을 받고는 밤낮으로 척려(惕厲)8610)하고 서정(庶政)을 근심하며 부지런히 하고 항상 농사와 학문을 일으키는 것에 힘쓰고 어진이를 구(求)하고 군사를 기르는 것으로써 선무(先務)를 삼았습니다.
7월에 하교(下敎)하기를, ‘감사(監司)는 명(命)을 받아 한 도(道)를 무육(撫育)하며 착한 자와 착하지못한 자를 출척(黜陟)하는 것인데, 근래에 들으니 수령(守令)이 다스려 묻고 염평(廉平)8611)하게 백성을 사랑하는 자는 적고, 한갓 후렴(厚斂)하는 것만을 일삼고 심지어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여 백성을 상하게 하는데에 이르른다고 하니, 만약 이와같이 하는데도 감사가 자거(刺擧)하지아니한다면 책임(責任)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대저 나라가 나라된 소이(所以)는 군민(軍民)일 따름인데, 군민의 폐단을 알고서도 조치(措置)하는 바가 없다고 하면 내가 목민(牧民)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감사는 수령을 꾸짖고 나는 감사를 꾸짖으면 체통(體統)이 서로 이어져 강거목장(綱擧目張)8612)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나라의 큰 정사인 것이다.
지금부터 만일 성심(誠心)으로 무자(撫字)하고 농상(農桑)에 힘쓰고, 종축(種畜)을 부지런히 하며, 병마(兵馬)를 기르고 지체되는 죄수가 없게 하며, 자기 몸을 받들기를 박(薄)하게 하고, 노질(老疾)에게 은혜롭게 하며, 학교(學校)를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내가 반드시 불차탁용(不次擢用)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이를 어기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중전(重典)을 써서 착한 이를 상주고, 악한 자를 벌줄 것이다.
나라의 대병(大柄)인데, 내가 감히 사사로움을 두어 천심(天心)에 누(累)되게 하겠느냐?’하였습니다. 10월에 적자(嫡子) 이장(李暲)을 조칙으로 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았으므로 왕이 표문을 받들어 칭사(稱謝)하고 이어서 세자를 중국 조정에 보내어 알현(謁見)하기를 청했더니, 황제께서 고유하기를 ‘국왕(國王)이 세자를 보내어 내조(來朝)하기를 요청하니, 예전에 열국(列國)의 세자가 조정에서 명(命)을 받는 뜻이며, 또한 인신(人臣)이 임금을 공경하는 당연한 일이다. 지금 추운 시기에 발섭(跋涉)하기가 간난(艱難)할 것이니, 세자가 이미 관상(關上)에 이르렀으면 입조(入朝)하는 것이 편(便)하겠으나, 만일 관(關)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면, 반드시 내조할 것이 없다’하였으므로,
세자가 이미 길에 올랐으나 왕이 명령을 듣고 이를 중지하게 하였습니다.
천순(天順) 원년(元年)8613) 2월에 왕이 영종황제(英宗皇帝)가 복위(復位)하였음을 듣고, 표문을 받들어 칭하(稱賀)하였더니 황제께서 한림원수찬(翰林院修撰) 진감(陳鑑)과 태상박사(太常博士) 고윤(高閏)을 보내어 조칙(詔勅)을 가지고, 왕과 왕비에게 금폐(錦幣)와 표리(表裏)를 내려주었으므로 왕은 경내(境內)를 용서하고, 표문을 받들어 칭사하였습니다.
9월에 세자 이장(李暲)이 병들어 서거(逝去)하였으므로 왕이 제2자(子) 이황(李晄)을 세워 세자로 삼기를 청했더니, 조칙에 이르기를, ‘짐(朕)은 국토를 향유(享有)하는 데는 계체(繼體)8614)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제 왕의 주문(奏聞)을 얻어보니 세자 이장(李暲)이 일찍 서거(逝去)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제2자 이황을 세우기를 청한다고 하니 특별히 청한 바를 허락하여 이황을 조선국(朝鮮國) 왕세자(王世子)로 삼는다.
왕은 더욱 충효(忠孝)로써 훈도하여 덕(德)을 돈독하게 하고 의(義)를 지키게 하며, 태만(怠慢)하거나 교만(驕慢)하지 말고 거의 나라 사람의 소망에 부응(副應)하게 하라’고 하였으므로, 왕은 표문을 받들어 칭사하였습니다.
왕은 세자로 하여금 선성(先聖)를 알현(謁見)하고 입학(入學)하게하며 치주례(齒胄禮)8615)를 행하고 박사(博士)를 따라서 수업(授業)하게 하였습니다.
왕은 매양 일을 당하면 고금(古今)을 원인(援引)하여 순절(諄切)8616)하게 논설(論說)하여 세자를 훈도(訓導)하였고, 또 유사(儒士)를 가리어 경사(經史)를 교수하게 하였으며, 친히 훈사(訓辭) 1편을 저술하였는데, 늘 변함없이 한결 같이 덕을 가질 것[恒德], 신을 공경하여 섬길 것[敬神], 간언을 받아들일 것[納諫], 참소를 막을 것[杜讒], 사람을 쓰는 것[用人], 사치하지말 것[勿侈], 환관을 부리는 일[使宦], 형벌을 삼가는일[愼刑], 문무(文武), 부모의 뜻을 잘 ?을 것[善述]의 10가지 일을 항목(項目)으로 삼고, 나라에 중요한 것을 갖추어 기술하였는데, 항상 세자로 하여금 이를 외우게 하였습니다.
천순(天順) 2년8617)에 왕이 제도(諸道)의 수령(守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형벌(刑罰)을 덜고, 부렴(賦斂)을 박하게 하며, 무비(武備)를 닦고, 농상(農桑)을 권하며, 헌장(憲章)을 준봉(遵奉)하는 것이 임금에게 허물이 없게 하는 뜻이 되는 것을 알지못하느냐?
요(堯),순(舜)이 비록 성인이라하더라도 다스리는데에는 반드시 고굉(股肱)의 도움이 있어야하는 것인데, 너희들은 나의 고굉이요 사방(四方)을 나누어 근심하는 자들이다. 대개 하늘이 증민(烝民)8618)을 낳아서 사목(司牧)8619)을 두는 것은 하늘이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므로 반드시 임금을 빌어서 하는 것이며, 임금은 홀로 친히 다스릴 수가 없으니, 서정(庶政)을 백관(百官)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주(人主)는 백관과 더불어 고루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마땅히 하루하루를 삼가야 하는 것이다.
항상 천심(天心)에 합하지못하는 것을 염려해야 할 것이다.
임금이 만약 함부로 방종(放縱)하여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아니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다. 너희 수령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니, 만약 나의 뜻을 몸받아서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하고, 형벌(刑罰)을 함부로 하지말며, 청백(淸白)하고 근검(勤儉)하게 하면 뛰어난 상(償)이 있을 것이요, 이름이 후세(後世)에 드리워질 것이나, 만일 탐오(貪汚)함이 심하고 가폭(苛暴)하게 하여 백성에게 폐해(弊害)를 끼치면 곧 형륙(刑戮)을 받게 되어 자신은 죽고 집안은 망할 것이니, 무릇 세상 사람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니 그를 가릴 수 있겠는가?’하였습니다.
12월에 산동(山東)도사(都司) 등주위(登州衛), 총기(總旗) 쇄경(鎖慶)등 45인이 풍랑을 만나 표류(漂流)하여 우리 국경(國境)에 이르렀으므로 왕이 친히 보고 위로하고, 옷과 양식을 후히 도와주어 요동(遼東)으로 풀어보내게 하였더니 황제께서 조칙을 내리시어 포장(褒奬)하였습니다.
3년에 왕이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인재(人才)를 양육(養育)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람들을 모두 쓰는 것도 아니다.
비록 인재가 있어서 가르치더라도 부지런히 하지아니하면 이루지 못하는 것이고, 비록 사람이 있어서 시험한다하더라도 미리 하지아니하면 쓰기가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항상 유액(誘掖)8620)하고 권려(勸勵)하여 자주 이를 시험하여 등용(登用)에 대비하겠다’하고, 자주 여러 유생(儒生)을 인견하여 경사(經史)를 강문(講問)하였습니다.
3월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이르러 선성(先聖)을 알현하고 책제(策題)를 내어 취사(取士)하였으며, 이 뒤로부터는 자주 선성을 알현하였습니다.
왕은 일찍이 학자(學者)의 사수(師授)함이 불명(不明)하여 각기 소견(所見)을 고집하여 의논(議論)이 분운(紛紜)한 것을 근심하여 여러 선비를 모아 사서(四書)오경(五經)의 동이(同異)를 논란(論難)하게 하고, 친히 스스로 결단하는 데에 임하여서 긍계(肯綮)8621)를 부석(剖析)하고 뭇 의논을 사리에 마땅하게 귀일(歸一)시켜 정하였으며,《역학계몽(易學啓蒙)》은 정밀(精密)하고 알기가 어려운 것을 왕이 친히 주해(註解)를 저술하여 학자를 깨우쳤습니다.
왕은 일찍이 후원(後園)에서 구신(舊臣)들과 술을 나누고, 이어서 더불어 사후(射侯)하였는데, 왕이 쏜 것은 반드시 과녁을 관통하였으므로, 시(詩)를 올리는 자가 있었습니다. 왕은 수찰(手札)을 보이며 이르기를, ‘나는 소년시절에 기운이 웅장하고 마음이 씩씩하여 스스로 유예(遊藝)를 평생(平生)의 업(業)으로 하려고 하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다. 만약 한갓 부녀에 의빙(依憑)되어 절제할 소이(所以)를 알지못하였다고 하면, 정치(政治)를 하고 오랑캐를 굴복시키는 길이 아니었을 것이다’하였으며,
또 여러 신하의 시를 보니, 모두 경계(警戒)하는 말이 있었으므로 더욱 고굉(股肱)의 충성을 느끼어 시로 회답하기를,
‘욕심이 적으면 욕심을 가히 채울 수가 있고,
일이 간략하면 공(功)을 가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공경하면 하늘이 보전(保全)할 것이며,
백성 다스리기를 부지런히 하면 백성이 편안할 것이니,
소예(小藝)에 생각을 다하지 말고,
큰 정사(政事)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우환(憂患)은 안락(安樂)함에서 나오고
창달(暢達)은 곤궁함에서 싹트는도다.
천명(天命)은 진실로 항상되지 아니하니,
오로지 선(善)만을 따를 뿐이다.
교수(交修)하는 뜻을 잊지 말라.
더불어 생각하면 시종(始終)이 있으리다‘하였습니다.
4년에 왕이 본국(本國)이 해외(海外)에 있어서 서적(書籍)이 매우 적고 문학(文學)이 정묘하지 못하다고 하여 자제(子弟)를 보내어 입학(入學)하기를 청하였더니, 조칙에 이르기를, ‘왕의 나라는 시서(詩書)와 예의(禮儀)의 가르침을 전습(傳習)하여 평소에 표문(表文), 전문(箋文), 장주(章奏)와 무릇 행문이첩(行文移牒)하는 이문(吏文)은 모두 예식(禮式)을 좇았고, 비록 능히 다 한음(漢音)을 통하지못한다하더라도 통사(通事)가 전역(傳譯)하여 일찍이 알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어찌 반드시 자제를 와서 배우게 하겠는가?’하였습니다. 처음에 모련위올량합(毛憐衛兀良哈)의 낭복아합(浪卜兒哈)이 대대로 우리나라 회령(會寧)지방에 살면서 우리나라 인민(人民)과 더불어 대대로 서로 혼가(婚嫁)하여 편맹(編氓)8622)과 다름이 없었으며, 그 아들 역승가(亦升哥)는 왕성(王城)에 와서 살면서 아내를 맞이하고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복아합(卜兒哈)이 왕성에 오고자 하는 것을 변장(邊將)이 겸종(傔從)을 예(例)대로 감하였더니, 복아합이 분(忿)함을 발하여 왕성에 이르러 역승가와 더불어 같이 모의하여 친당(親黨)을 다시 유인하고 여러 부락을 선동하였으며, 역승가도 길주온천(吉州溫泉)에서 병을 치료할 것을 청하고는 길을 재촉하여 역마로 달리어, 아비에게 나아가 같이 모반하기로 한 것을 변장이 뒤따라 그 모의를 알고 복아합의 부자를 나치(拿致)하여 아뢰었으므로 왕이 안핵(按覈)하니 모두 자복하여 곧 법대로 조치하였습니다.
건주우위도지휘(建州右衛都指揮) 동화니치(佟火爾赤)등이 말을 만들어 거짓으로 날조하여 보복(報復)하고자 하니, 황제께서 예과급사중(禮科給事中) 장녕(張寧)을 보내어와서 그 근유(根由)를 물어 모두 그 실정을 얻어 들었는데, 복아합의 아들 아비거(阿比車)가 도망가 숨어서 군당(群黨)을 불러 모아 변강(邊疆)을 침요(侵擾)하려고, 9월에 강(江)을 연(沿)하여 둔결(屯結)하여 몰래 군사를 발(發)하였으나 변장(邊將)들이 길을 나누어 추격(追擊)하기를 거의 다하였으므로 왕은 즉시 사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하였습니다.
7년에 왕이 교서를 내리기를, ‘나라를 위하는 것은 사람을 쓰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며, 사람을 쓰는데에도 장수를 가리는 것이 더욱 중(重)하다. 장수는 생민(生民)의 목숨을 맡으며 국가(國家)안위(安危)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장수는 나라의 보익(補翼)이요, 나라의 강약(强弱)인 것이다.
보익하는 것은 주극(周隙)한 것에 관계되니, 즉 임용(任用)할 즈음에 혹 가볍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인주(人主)는 항상 스스로 장수를 택하며 아래에 주의(注擬)8623)를 얻지않는 자라고 해서 어찌 소임이 무겁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거짓된 사람을 병용(柄用)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비록 그렇지만 깊이 궁중(宮中)에 거처(居處)하면서 비록 네 개의 눈[四目]을 밝힌다하더라도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아니함을 어찌 능히 다 알겠는가? 그러므로 부득불 누구든 널리 찾아서 첨거(僉擧)에 이바지하고 이미 천거한 뒤에 가리어 쓰는 것은 임금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옛날 한고조(漢高祖)가 일어날 때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모두 패향(沛鄕)8624)의 이졸(吏卒)이었는데, 어찌 천하(天下)에 사람이 없었겠느냐마는 다만 이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내가 덕(德)이 부족하고 어리석어 이러한 어렵고 큰 것을 지키면서 은혜는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위엄은 먼 곳에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아니하고 장재(將才)를 얻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무릇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은 모두 나와 더불어 같이 다스리는 자이니, 낮거나 현달(顯達)하거나에 구애되지 말고, 친척이거나 인척인 것을 혐의하지 말고, 재행(才行)을 갖추 기록하여 실봉(實封)8625)하여 아뢰도록 하라.
너희들의 천거한 바가 알맞으면 상(賞)이 마땅히 미칠 것이며, 천거한 것이 혹 맞지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너희들에게 죄주지않을 것이다’하였습니다.
왕은 승평(昇平)한 날이 오래되면 무비(武備)가 필시 해이해질 것이라하여 한달에 두 번씩 진(陣)을 검열하고, 봄과 가을에 강무(講武)하며, 또 스스로 설(說)을 저술하여, 여러 장수들을 훈려(訓勵)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였습니다. ‘병(兵)이란 것은 지혜로써 용(用)을 운전하고, 용으로써 지(智)에 응(應)하는 것인데, 지(智)라는 것은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것이며, 지리(地利)를 살피는 것이다. 용(用)이란 것은 형수(形數)를 밝히는 것이고 절제(節制)를 한결같이하는 것이며, 기계(器械)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인의를 근본으로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학교(學校)를 밝게 하고, 군신(君臣)을 엄(嚴)하게 하며, 문무(文武)를 숭상하고 전장(典章)을 지키는 것이 이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헤아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천운(天運)을 관찰하고, 장사(將士)를 교열(交閱)하며, 곡직(曲直)을 헤아리며, 노일(勞逸)을 참작(參酌)하는 것이 이것이다.
지리(地利)를 살핀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풍수(風水)를 헤아리고 도리(道理)에 통달하고, 고하(高下)로 인하여 험이(險易)에 웅거하는 것이 이것이다.
형수(形數)를 밝힌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군적(軍籍)을 만들고, 작대(作隊)하기를 미리하며, 인심(人心)을 정하고, 이목(耳目)을 한결같이 하는 것이 이것이다.
절제(節制)를 한결같이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교열(敎閱)을 부지런히 하고, 상벌을 항상되게 하며, 적(敵)에 임하여서는 조금도 버금가는 것이 없게 하는 것이 이것이다. 기계(器械)를 이롭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사람이 각각 만들어 상용하는 것을 금하고, 목마(牧馬)를 부지런히 하고, 출척(黜陟)을 상고하는 것이 이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공순왕(恭順王)8626)이 저술한《진법(陣法)》에 서(序)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르기를, ‘풍후(風后)의 악기(握奇)8627) 이후로 제갈양(諸葛亮)과 이정(李靖)8628)이 그 유법(遺法)을 얻어 비록 시의(時宜)에 따라 팔진(八陣)이나 육화(六花)란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다르지 아니하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이 아직 미치지못한데 미치는 뜻으로써 진법(陣法)을 수정(修定)하였으니, 번한(蕃漢)의 형세를 겸하였고, 기정(奇正)의 변(變)을 다했으며, 천지(天地)를 법(法)받고 인륜(人倫)을 밝혔으며, 선철(先哲)을 집대성(集大成)하여 후대(後代)의 홍규(弘規)를 세웠으며, 문(文)은 간략하되 뜻은 깊으며 법(法)은 간략하되 쓰임은 번성하였다.
그 연진(連陣)의 외진(外陣)이란 것은 6, 7, 8, 9의 수(數)이요, 내진(內陣)이란 것은 5, 10의 수이며, 간진(間陣)이란 것은 1, 2, 3, 4의 수이니, 이는 하도(河圖)8629)의 문(文)을 본받은 것이다.
합진(合陣)의 가운데에 내외(內外)를 위포(衛包)한다는 것은 50(五十)의 포(包)의 내외(內外)란 것이요, 사위(四衛)가 방위에 이(離)한다는 것은 16, 27, 38, 49가 각각 그 방위에서 이(離)한다는 것이니, 이는 낙서(洛書)8630)의 변(變)을 본받은 것이다.
주통(駐統)에는 방렬(方列)로 하고, 전통(戰統)에는 원취(圓聚)로 한 것은 방(方)은 지키는 것이요, 원(圓)은 행(行)하는 것이니, 이는 천지(天地)의 체(體)를 본받은 것이다.
외진(外陣)은 모나게 하고 내진(內陣)은 둥글게 한 것은 뜻은 밖으로 나타내고, 지혜는 안에 감추는 것이니 이것은 음양(陰陽)의 용(用)인 것이다.
각각 소장(小將)을 보전하는 것은 부자(父子)의 친(親)함이요, 한 장수에게 듣는 것은 군신(君臣)의 의(義)인 것이며, 진(陣)에 암[牝], 수[牡]가 있는 것은 부부(夫婦)가 유별(有別)한 것이요, 대오(隊伍)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형제(兄弟)의 정(情)이며, 법령(法令)을 어기지않는 것은 붕우(朋友)의 믿음[信]이니, 이는 인륜(人倫)의 도(道)를 본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군사를 가르치면서 백성이 예의(禮義)를 알게 되어 국가(國家)가 항상 편안할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戎]에 있다」고 하였고, 공자(孔子)가 이르기를,「백성에게 싸움을 가르치지아니하면 이는 이를 버리는 것이라 이르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싸움을 가르친다는 것은 나라의 큰일이다. 대저 누가 7척의 몸을 아끼고 백년의 목숨을 중히 여기지아니하겠는가마는 시체를 밟고 피바다를 건너 다투어 앞장서서 적(敵)에게 나아가는 자를 연유를 알게 하고 이를 가르쳐 맡기어, 법(法)이 먼저 정해지게 하고 형세를 먼저 굳게 해야 기력(氣力)이 이루어질 것이다.
관자(管子)8631)가 이르기를,「가르친 군사가 3만이면 천하(天下)를 횡행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강(剛)과 유(柔)를 변(變)하게 하면서 그 세력을 굳게 하는 것이니, 작게는 한 집, 크게는 천하가 세력이 합해져서 이루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비로소 건곤(乾坤)이 이미 판단되매 선악(善惡)이 반드시 상대가 있고, 치란(治亂)이 반드시 서로 인(因)하는 것이니, 우미(愚迷)한 무리로서 명령을 어기고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있으니, 왕자(王者)는 마땅히 이를 접(接)하는 일이 있게 되므로 부득이 간과(干戈)를 제정하게 되어 불복(不服)하는 것을 토벌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난세(亂勢)로 인해 제병(制兵)을 하게 되는 것이요, 티끌이 맑고 바다가 편안하며, 시랑(豺狼)이 자취를 감추고, 말을 놓아 버리며, 창을 던지는데에 미쳐서는 예(禮)를 제정하고 풍악을 만들어 때로 구공(九功)8632)을 펴고, 이 7덕(七德)8633)을 노래하게 되는데, 이는 치세(治勢)로 인(因)하여 군사를 그치게 하는 것이다.
그런즉 군사의 출입(出入)은 세력이 아님이 없다’라 하였습니다.
성화(成化)3년8634) 8월에 황제의 조칙에 이르기를, ‘건주삼위(建州三衛)의 동산(童山)등은 본래 번신(蕃臣)으로 대대로 중국조정의 은혜를 받았는데, 근자(近者)에 겉으로는 조공(朝貢)한다는 명목이나 음(陰)으로는 변방을 도둑질하는 계책을 행(行)하였지만, 짐(朕)이 이를 용서하였는데도 더욱 방자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써서 토벌하기에 이르렀다.
오직 그대 조선국왕(朝鮮國王)은 대대로 예의(禮義)를 지키고, 우리 국가(國家)에 충성하여, 더함은 있었으되 바뀜은 없었으니, 가상(嘉尙)하게 여기는 바이다. 만약 우리 군사를 저 역노(逆虜)들이 침노하거든 왕은 마땅히 관애(關隘)를 폐절(閉絶)하여 저들로 하여금 달아나서 들어갈 곳이 없게 하고 나아가 사로잡아서 진멸하게 하라.
만약 왕이 능히 편사(偏師)를 보내어 우리 군사와 더불러 멀리서 서로 호응하여 편(便)한 것을 기다려 이를 절박하게 몰아치면, 저들의 항복을 받기가 더욱 쉬울 것이며, 왕의 공(功)은 더욱 성하고, 충성은 더욱 더 빛날 것이니, 짐이 어찌 왕에게 보답함이 없겠는가?
힘써 훈명(勳名)을 심고, 때를 잃는 것은 불가하다’라 하였습니다.
왕은 즉시 배신(陪臣)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를 보내어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길을 나누어 바로 건주(建州)의 동북(東北) 발저강(潑猪江)을 올미부(兀彌府)의 여러 산채를 공격하고 그 소혈(巢穴)을 무찔러 적(敵)의 우두머리인 이만주(李滿住), 고납합(古納哈)및 그 당류(黨類)를 사로잡거나 베기도 하여 둔락(屯落)을 분탕(焚湯)하고서 돌아왔는데, 왕은 배신 고태필(高台弼)을 보내어 포로를 바쳤습니다.
4년8635) 4월에 조칙(詔勅)하여 이르기를, ‘짐이 장수에 명(命)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건주(建州)의 역로(逆虜)를 토벌함에 이르러 왕으로 하여금 중국 군사를 협조(協助)하게 하였더니, 이제 왕의 아룀을 보고, 배신(陪臣) 중추부관(中樞府官) 강순(康純)을 보내어, 무리 1만여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과 발저강(潑猪江)의 두 강을 건너서 올미부(兀彌府)의 여러 채(寨)를 공파(攻破)하고, 역로(逆虜) 이만주(李滿住), 고납합(古納哈) 부자(父子)를 죽이고, 그 부속(俘屬)을 참획(斬獲)하였으며, 그 여사(廬舍)를 불사르고, 그 곳에서 적취(積聚)8636)하였으며, 우리 동녕위(東寧衛)의 인구(人口)를 뺏아온 것을 알았다.
배신 이조참판(吏曹參判) 고태필(高台弼)을 보내어 부로(俘虜)를 바치므로 이미 왕이 바친 바의 적속(賊屬)의 예(例)에 의하여 처치(處置)하고, 인구(人口)는 친척에게 주어 완취(完聚)8637)하게 하였으며 우축(牛畜)은 군(軍)에 주어 둔전(屯田)을 갈게 하였으니, 진실로 왕이 대대로 충정(忠貞)을 돈독히 한 것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짐이 척찰(尺札)로써 왕에게 명(命)하였는데도 왕국(王國)의 백성들이 해동(海東)에서 향응(響應)하여 짐의 장사(將士)들이 우레처럼 사나웁고 바람처럼 달려가 내외(內外)가 합세(合勢)하여 역로가 와해(瓦解)되었으니, 왕은 짐의 명한 바를 저버리지 아니했다고 이를 수 있겠다. 짐이 왕의 군신(君臣)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제 내관(內官) 강옥(姜玉)과 김보(金輔)를 보내어, 왕의 나라에 이르러 왕에게 채단(綵段), 백금(白金), 문금(紋錦), 서양포(西洋布)를 내려주고, 강순과 고태필등에게도 또한 각각 내려 주어 그 공로를 표창하니 왕은 이를 받을지어다’하였으므로, 왕은 표문(表文)을 받들어 칭사(稱謝)하였습니다.
6월에 등주의(登州衛) 총기(總旗) 쇄경(鎖慶)등 43인이 우리나라 국경에 표류(漂流)해왔으므로 왕은 옷과 양식을 후히 베풀어 주고, 요동(遼東)으로 풀어 보냈습니다. 중국 사람으로 혹은 해상(海上)으로부터 표류해 이르거나, 혹은 포로(捕虜) 가운데서 도망해 돌아오는 자를 전후(前後)로 요동(遼東)으로 풀어보낸 바가 무려(無慮) 수백 인(人)이었는데, 모두 후히 위로하고 도와주어 보냈습니다.
9월 8일(갑자)에 왕이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훙(薨)하니 향년(享年) 52세고, 재위(在位)한 지는 14년이었습니다.
왕은 영명(英明)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용기가 있고 지혜로왔으며, 공검(恭儉)하고 관간(寬簡)하며, 천성(天性)이 학문(學問)에 돈독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경사(經史)의 제서(諸書)를 한번 보면은 잊지 아니하였고, 고금(古今)을 두루 통하였으며, 역산(曆算), 음률(音律), 의복(醫卜)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연구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
시조(施措)함에 있어서는 하는 것마다 통조(洞照)하였고, 어릴 때부터 말 한마디나 한 가지 동작도 모두 명백(明白)하고 정대(正大)하여 털끝만한 교식(矯飾)도 없었으며, 윗사람을 섬기는 데는 정성으로 하였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데는 예(禮)로써 하였으며, 가법(家法)을 바르게 하며 그 옹목(雍穆)을 다하고, 인륜(人倫)을 두터히하면서 그 은애(恩愛)를 다하였으며 비(妃)와 첩(妾)의 분수를 엄(嚴)히 하고 적서(嫡庶)의 차례를 밝게 하였으며, 향사(享祀)는 반드시 몸소 하였고, 법령(法令)은 반드시 믿게 하였으며, 정사에 임하여서는 예정(銳精)8638)하며 오직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리기를 부지런히 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았고, 날마다 부지런하고 날마다 삼가하여 조금의 여가도 없었으며, 어질고 유능한 이를 승진시키고, 삿되고 아첨하는 자를 내쳤으며,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영재(英材)를 작흥(作興)하였고, 무사(武事)를 숭상하여 사졸(士卒)을 정련(精練)하였으며, 농사에 힘쓰고 누에치기를 중히 여기며,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정렴(征斂)을 적게 하였으며, 몸소 먼저 검약(儉約)하여 항상 깨끗이 세탁한 것을 입었으며 왕비(王妃) 이하(以下)는 모두 화식(華飾)을 물리치게 하고, 궁인(宮人)을 방출(放出)시켜 다만 겨우 쇄소(灑掃)하는 이만을 두어 용식(冗食)을 없애며, 부비(浮費)를 덜어 재용(財用)을 절약(節約)하였으므로 수년(數年)이 되지않는 사이에 저치(儲峙)가 가득 차 넘쳤고, 백성은 날로 은부(殷阜)8639)하였습니다.
매양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게 거듭 경계하고, 혹은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사하고 찾아서 백성의 폐해를 모두 제거하였으며, 외임(外任)에 나아가며 배사(拜辭)하는 자도 또한 반드시 인견(引見)하고 곡진히 자민(字民)8640)의 뜻을 같이 근심하도록 개유하여 보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은택은 아래까지 다하고 정(情)은 위까지 이르러 환과(鱞寡)8641)도 거의 근심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신료(臣僚)를 인견하고 치도(治道)를 자방(咨訪)하고, 비록 작은 일에 처하더라도 또한 스스로 크게 염려하여, 자기를 버리고 힐난함이 없었으며, 광구(匡救)할 것이 있으면 경계하였습니다.
간(諫)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허심탄회하게 들어 받아들이어 언로(言路)가 넓어졌으며, 혹 한가하고 편안한 때를 만나면, 문아(文雅)8642)를 불러들여 역대(歷代)의 치란(治亂)과 성패(成敗)의 자취를 상론(尙論)8643)하거나 성현(聖賢)의 도통(道統)과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강명(講明)하기도 하며 해가 기울고 밤이 되어도 미미(亹亹)8644)하여 피곤해하지 아니하였으며, 항상 저이(儲貳)8645)를 훈계(訓戒)하여 이모(貽謀)8646)를 멀리 생각하도록 하고, 선조(先祖) 이래로 헌장(憲章)이 비록 갖추어졌다하더라도, 과조(科條)가 너무 많아서 유사(有司)에서 혹 준수(遵守)하는데에 현혹(眩惑)되기도 하고 또 때가 다르고 세상이 달라져서 부득불 바꾸어야만 통(通)할 것이 있으므로 이에 참작(參酌)하고 상각(商搉)8647)하여 간절(簡切)한 것에 따르는데에 힘써서 일국(一國)의 《대전(大典)》을 정하여 저술하여 후세(後世)에 지수(持守)할 법으로 삼았습니다. 교린(交隣)에 있어서는 의(義)로써 하며, 오직 즙목(輯睦)하는데에 힘쓰고 성신(誠信)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도왜(島倭)와 야인(野人)의 완악하고 흉악한 자들도 또한 위엄에 놀라고 덕(德)에 무안해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명(命)을 받은 이래(以來)로부터 성의를 다하여 술직(述職)8648)하여 삼가 번한(藩翰)을 지키며 무릇 황제의 명령이 있으면 공손함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저 천권(天眷)8649)을 특별히 더하시어 총수(寵綬)8650)를 거듭 입었으므로 우리나라 백성들이 환열(歡悅)하며 바야흐로 영년(永年)을 원(願)하였더니, 호천(昊天)이 박정하여 갑자기 병에 걸리어 수절(垂絶)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신령스럽게 적지 않은 어지러움을 생각하고, 백성의 수고로움을 덜어줄 것을 생각하여, 후사(後事)는 상장(喪葬)을 모두 검약(儉約)한 데에 따를 것을 유명(遺命)하시어 죽으면서도 오히려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어찌 애통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註8607]정유년(丁酉年):1417 태종17년.註8608]경태(景泰)3년:1452 문종2년 註8609]왕(王):세조 註8610]척려(惕厲):위구(危懼)해 몸을 수양함 註8611]염평(廉平):공평함.註8612]강거목장(綱擧目張):아래에서는 위에서 하는대로 다룸.註8613]천순(天順) 원년(元年):1457 세조3년 註8614]계체(繼體):제왕의 자리를 잇는 것.註8615]치주례(齒胄禮):세자(世子)가 학교(學校)에 들어갈 때 신분(身分)에 따르지않고 연령(年齡)에 따라서 다른 학생사이에 자리를 정하는 예식.註8616]순절(諄切):친절하고 간절함.註8617]천순(天順)2년:1458 세조4년.註8618]증민(烝民):백성.註8619]사목(司牧):맡아서 기른다는 뜻으로 임금을 말함.註8620]유액(誘掖):인도하여 도와줌.註8621]긍계(肯綮):일의 급소(急所) 註8622]편맹(編氓):호적에 편입된 백성.註8623]주의(注擬):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3인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註8624]패향(沛鄕):한고조의 고향.註 8625]실봉(實封):신하가 임금에게 밀계(密啓)할 때 소장(疏章)의 내용을 다른 사람이 보지못하도록 봉(封)하던 일.註8626]공순왕(恭順王):문종 註8627]풍후(風后)의 악기(握奇):중국 황제(皇帝)때의 재상이었던 풍후(風后)의 병법(兵法)에 나오는 군진(軍陣)의 이름.註8628]이정(李靖):당(唐)나라 장수 註8629]하도(河圖):복희(伏儀)때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등의 도형 註8630]낙서(洛書):하(夏)의 우(禹)임금이 치수(治水)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는 45점의 글씨.《서경(書經)》의 홍범구주(洪範九疇)와 팔괘(八卦)의 법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함 註8631]관자(管子):관중(管仲).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 환공(桓公)의 재상이 되어 부국강병책을 써서 환공으로 하여금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음.註8632]구공(九功):6부(六府:水,火,金,土,穀으로 백성을 기르는 기본)와 삼사(三事:正德,利用,厚生)로 선정의 기본.註8633]7덕(七德):정치의 7가지 덕 註8634]성화(成化)3년:1467 세조 13년 註8635]4년:1468 세조14년 註8636]적취(積聚):병량(兵糧), 마량(馬糧) 따위.註8637]완취(完聚):한 가족의 식구가 흩어져있지 않고 한 곳에 모여사는 것.註8638]예정(銳精):정신을 한군데로 모아 일에 힘씀 註8639]은부(殷阜):풍성하고 넉넉함 註8640]자민(字民):백성을 사랑하는 뜻.註8641]환과(鱞寡):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 註8642]문아(文雅):문필(文筆)이 뛰어난 사람.註8643]상론(尙論):옛 사람의 언행(言行),인격등을 의논함 註8644]미미(亹亹):부지런한 모양.註8645]저이(儲貳):세자(世子).註8646]이모(貽謀):자손을 위하여 남기는 꾀.註8647]상각(商搉):헤아려서 정함 註8648]술직(述職): 제후가 천자에게 자기의 직무에 대한 일을 말함註8649]천권(天眷):황제의 돌봄.註8650]총수(寵綬):사랑하고 편안하게 함.
○壬申/遣中樞府知事李石亨, 如大明, 訃告請諡。 議政府撰行實, 申禮部曰:
王姓李氏, 諱某, 字粹之, 莊憲王第二子。 母妃沈氏, 本國領議政府事溫之女也。 以永樂十五年丁酉九月丙子生, 天資英明, 好學不倦, 德器日就, 封首陽君。 莊憲王晩年罹疾, 王性至孝, 晨夕侍側, 未嘗少懈, 比薨哀慟毁瘠, 觀者莫不感嘆。 景泰三年, 恭順王薨, 帝遣尙膳監左監丞金宥、右監丞金興, 賜諡祭, 又賜嗣王誥命冠服, 嗣王選遣王, 奉表赴京稱謝。 四年姦臣皇甫仁、金宗瑞等, 聚群不逞謀逆, 禍機已迫, 王告嗣王誅除, 六年嗣王以弱齡且疾, 國內多故, 遣陪臣, 具由陳奏, 請傳付國事于王。 七年二月, 帝遣內官尹鳳、金興, 來賜誥命, 仍賜王及王妃冕服、冠服、綵段, 王遣陪臣, 奉表陳謝, 仍請立嫡子暲爲世子。 王旣受封, 夙夜惕厲, 憂勤庶政, 常以務農興學, 求賢養兵爲先務。 七月下敎曰: “監司受命, 撫育一道, 黜陟臧否。 比聞守令廉平愛民者寡, 徒事厚斂, 甚至營私傷民, 若是而監司不能刺擧, 則責任之意安在, 夫國之所以爲國, 軍民而已, 知軍民之弊, 而無所措置, 則予牧民之意安在, 監司責守令, 予責監司, 體統相維, 綱擧目張, 此國之大政也。 自今若有誠心撫字, 務農桑、勤種畜、養兵馬、無滯囚、薄自奉、惠老疾、興學校者, 予必不次擢用; 小有反是, 必用重典。 賞善罰惡, 國之大柄, 予敢有私, 以累天心,” 十月勑封, 嫡子暲爲世子, 王奉表稱謝, 仍請遣世子朝見, 帝諭曰: “國王要遣世子來朝, 乃古者列國世子受命于朝之意也, 亦人臣敬上之所當然。 緣今天寒, 跋涉難艱, 世子已到關上, 卽便入朝, 如未到關, 不必來朝。” 世子已登途, 王聞命止之。 天順元年二月, 王聞英宗皇帝復位, 奉表稱賀, 帝遣翰林院修撰陳鑒、太常博士高閏, 齎詔勑, 賜王及王妃錦幣表裏, 王宥境內, 奉表稱謝。 九月世子暲病逝, 王請立第二子晄爲世子, 勑曰: “朕惟享國土, 繼體爲重。 今得王奏, 以世子暲早逝, 國人請立第二子晄, 特允所請, 以晄爲朝鮮國王世子。 王尙訓以忠孝, 俾敦德秉義, 毋慢毋驕, 庶副國人之望。” 王奉表稱謝, 王令世子, 謁先聖入學, 行齒胄禮, 博士執經授業。 王每遇事, 援引古今, 諄切論說, 以訓世子。 又擇儒士, 授以經史, 親著訓辭一篇, 以恒德、敬神、納諫、杜讒、用人、勿侈、使宦、愼刑、文武、善述十事爲目, 備述爲國之要, 常令世子誦之。 天順二年, 王諭諸道守令曰: “汝等孰不知省刑罰、薄賦斂、修武備、勸農桑、遵奉憲章, 致君無過爲意耶, 堯、舜雖聖, 致治必資股肱, 汝等皆我股肱, 分憂四方者也。 蓋天生烝民, 立以司牧, 天不自有所爲, 必借之君; 君不能獨親庶政, 必委之百官。 然則人主與百官, 均是代天理民, 當日愼一日, 常以不合天心爲慮。 君若荒縱, 不恤民事, 天降之殃, 汝守令亦如是焉。 若體予意, 愛民如子, 刑罰無濫, 淸白勤儉, 則顯有超賞, 名垂後世; 若貪刻苛暴, 貽弊於民, 則卽受刑戮, 身死家亡, 夫十目所視, 其能掩乎,” 十二月, 山東都司登州衛總旗鎖慶等四十五人, 遭風漂流, 到我國境, 王親見勞慰, 厚資衣糧, 解赴遼東, 帝降勑褒奬。 三年, 王敎曰: “養育人才, 非一朝可成, 又非人人皆用。 雖有才而敎不勤, 則不成; 雖有人而試不預, 則難用。 宜常誘掖勸勵, 數試之爲登用之備。” 數引諸生, 講問經史。 三月, 王至成均館, 謁先聖, 發策取士, 自後頻謁先聖。 王嘗患學者師授不明, 各執所見, 議論紛紜, 會諸儒, 論難四書、五經同異, 親自臨決, 剖析肯綮, 至當歸一群議。 以定《易學啓蒙》, 精密難曉, 王親著註解, 以曉學者。 王嘗於後園, 酌舊臣酒, 仍與射侯, 王發必貫鵠, 有進詩者。 王手札示之曰: “予少年氣雄心壯, 自在於游藝, 以爲平生之業, 今則不然。 若徒爲馮婦, 而不知所以節之, 則非致治服戎之道也。” 又見諸臣詩, 皆有警戒之詞。 益感股肱之忠, 和之詩曰: “欲少欲可滿, 事簡功事成。 敬天天乃保, 勤民民乃寧。 小藝莫致慮, 大政宜致精。” 又曰: “憂患生安樂, 暢達荄困窮。 天命固靡常, 惟善以爲從。 毋忘交修志, 思與有始終。” 四年, 王以本國在海外, 書籍鮮少, 文學未精, 請遣子弟入學, 勑曰: “王國詩書禮義之敎, 傳習有素, 表、箋章、奏與夫行移吏文, 悉遵禮式, 雖未能盡通漢音, 而通事傳譯, 未嘗不諭, 何必子弟來學,” 初, 毛憐衛兀良哈浪卜兒哈, 世居我國會寧地面, 與我國人民, 世相婚嫁, 無異編氓。 其子亦升哥, 來住王城, 娶妻從仕, 卜兒哈欲赴王城, 邊將例減傔從, 卜兒哈發忿, 至王城, 與亦升哥同謀, 還誘親黨, 煽動諸落。 亦升哥請治病吉州溫泉, 倍道馳驛, 就父同叛, 邊將迹知其謀, 拿致卜兒哈父子以啓, 王按覈俱服, 乃置於法。 建州右衛都指揮佟火爾赤等, 虛捏爲辭, 欲報復, 帝遣禮科給事中張寧, 來問根由, 悉得其情。 卜兒哈之子阿比車逃竄, 嘯聚群黨, 侵擾邊疆。 九月沿江屯結, 潛師竊發, 邊將分道追擊, 殺獲幾盡, 王卽具由以聞。 七年, 王敎曰: ‘爲國莫先於用人, 用人尤重於擇將。 將者生民之司命, 國家安危之主也。 故云將者, 國之輔, 國之强弱。 係輔之周隙, 則任用之際, 其可或輕乎, 故人主常自擇將, 而下不得注擬者, 豈非任之重, 故不可假人以柄耶。 雖然深居宮中, 雖明四目, 人之賢否, 豈能盡知, 故不得不疇咨博訪, 以資僉擧, 旣擧之後, 擇而用之, 則在乎上耳。 昔漢高之興也, 肅、曺皆沛鄕吏卒, 豈以天下之無人, 只以知之之難耳。 予以寡昧, 守玆艱大, 恩無逮下, 威不及遠, 常安不忘危, 思得將才。 凡大小臣僚, 皆與我共治者, 勿拘卑顯, 勿嫌親姻, 具錄才行, 實封以聞。 稱爾所擧, 賞當延及, 與或不中, 予不爾罪。” 王以昇平日久, 則武備必弛, 月再閱陣, 春秋講武, 又自著說, 訓勵諸將, 略曰: “兵者以智運用, 以用應智。 智者, 本仁義, 度我人, 審地利也; 用者, 明形數, 一節制, 利器械也。 本仁義, 則如之何, 明學校, 嚴君臣, 崇文武, 守典章, 是也。 度我人, 則如之何, 觀天運, 校將士, 計曲直, 參勞逸, 是也。 審地利, 則如之何, 乘風水, 達道里, 因高下據險易, 是也。 明形數, 則如之何, 修軍籍, 預作隊, 定人心, 一耳目, 是也。 一節制, 則如之何, 勤敎閱, 恒賞罰, 比臨敵無少貸, 是也。 利器械, 則如之何, 人各造禁常用, 勸牧馬, 考黜陟, 是也。” 又嘗序恭順王所著《陳法》, 略曰: “自風后握奇以後, 諸葛亮、李靖, 得其遺法, 雖因時宜, 有八陣六花之名, 而其理則至于今未嘗異。 我殿下以迨天未雨之志, 修定陣法, 兼蕃漢之勢, 盡奇正之變, 法天地, 明人倫, 集大成於先哲, 立弘規於後葉, 文約而意深, 法簡而用繁。 其連陣之外陣者, 六七八九之數也; 內陣者, 五十之數也; 間陣者, 一二三四之數也, 此法河圖之文也。 合陣之中, 衛包內外者, 五十之包內外也; 四衛之離乎方者, 一六二七三八四九之各離乎其方也, 此法洛書之變也。 駐統方列, 戰統圓聚; 方以守之, 圓以行之, 此法天地之體也。 外陣方, 而內陣圓; 義形於外, 智藏於內, 此陰陽之用也。 各保小將, 父子之親也; 聽於一將, 君臣之義也; 陣有牝牡, 夫婦之別也; 隊伍相愛, 兄弟之情也; 法令不愆, 朋友之信也, 此法人倫之道也。 是故敎兵, 而民知禮義, 國家恒安也。 傳曰: ‘國之大事, 在祀與戎。’ 孔子曰: ‘不敎民戰, 是謂棄之。’ 敎戰者, 國之大事。 夫孰不愛七尺之軀, 重百年之命, 履屍涉血, 爭首赴敵者。 諒由敎之預, 而法先定勢先固, 而氣力成也。 管子曰: ‘敎士三萬, 橫行天下。’ 此無他, 變剛柔而固其勢耳, 小而一家, 大而天下, 無非勢合而成也。 始也乾坤之旣判, 善惡之必有對, 治亂之必相因。 愚迷之徒, 有違命負力者, 則王者當有以接之, 故不得已制爲干戈, 以討不服, 此因亂勢而制兵也。 及乎塵淸海晏, 豺狼屛迹, 放馬投戈, 制禮作樂, 時敍九功, 乃歌七德, 此因治勢而偃兵也。 然則兵之出入, 無非勢也。” 成化三年八月, 皇帝勑曰: “建州三衛童山等, 本以蕃臣, 世受朝恩。 近者, 陽爲朝貢之名, 陰行盜邊之計, 朕宥之而愈肆, 不得已用兵致討。 惟爾朝鮮國王, 世守禮義, 忠於我國家, 有加無替, 朕甚嘉焉。 若我兵加于彼逆虜, 王宜閉絶關隘, 使彼奔逬無所入, 以就擒殄。 若王能遣偏師, 與我軍遙相應伺便而蹙之, 則彼之授首尤易, 而王之功愈茂, 忠愈彰矣, 朕豈無以報王哉, 勉樹勳名, 時不可失。” 王卽遣陪臣康純、魚有沼、南怡, 領一萬餘兵, 馳渡鴨綠江, 分道直抵建州東北潑猪江兀彌府諸寨, 擣其巢穴, 擒斬賊酋李滿住、古納哈及其黨類, 焚蕩屯落而還, 王遣陪臣高台弼獻俘。 四年四月, 勑曰: “朕命將率師, 致討建州逆虜, 俾王協助天兵。 今得王奏, 知遣陪臣中樞府官康純等, 統衆萬餘, 渡鴨綠、潑豬二江, 攻破兀彌府諸寨, 殺逆虜李滿住、古納哈父子, 斬獲其俘屬, 焚其廬舍, 積聚得其所, 掠我東寧衛人口。 遣陪臣吏曹參判高台弼獻俘, 已將王所獻賊屬, 依例處置。 人口給親, 完聚牛畜, 給軍屯種。 良由王世篤忠貞, 故朕以尺札命王, 而王國之衆, 響應于海東, 朕之將士, 雷厲風驅, 內外合勢, 逆虜瓦解, 王可謂無負朕所命矣。 朕與王君臣同心, 豈不美哉, 今遣內官姜玉、金輔, 至王國, 賜王綵段、白金、紋錦、西洋布, 其康純、高台弼等, 亦各有賜, 以旌其勞, 王其欽承之” 王奉表稱謝。 六月, 登州衛總旗鎖慶等四十三人, 漂流到我國境, 王厚資衣糧, 解送遼東。 上國之人, 或自海上漂到, 或自虜中逃還者, 前後所解遼東, 無慮數百人, 悉皆厚慰資送。 秋九月甲子, 王以病, 薨于正寢, 享年五十二, 在位十四年。 王英果勇智, 恭儉寬簡, 天性篤學, 手不釋卷, 經史諸書, 一覽不忘。 淹貫古今, 以至曆算、音律、醫、卜之理, 靡不精硏。 遇有施措, 觸處洞照, 自幼一言一動, 皆明白正大, 無纖毫矯飾。 事上以誠, 接下以禮, 正家法而盡其雍穆, 厚人倫而極其恩愛, 嚴妃妾之分, 明嫡庶之等, 享祀必躬。 法令必信, 臨政銳精, 唯以敬天勤民爲心, 日勤日愼, 無少暇豫。 甄陞賢能, 黜退邪侫, 崇儒術而英材作興, 尙武事而士卒精鍊。 明賞愼罰, 務農重蠶, 輕徭役, 薄征斂, 身先儉約, 常服浣濯。 王妃以下, 皆斥華飾, 放出宮人, 只令纔備灑掃, 汰冗食, 省浮費, 以節財用, 不數年間, 儲峙盈衍, 民日殷阜。 每申儆監司守令, 或遣使廉訪, 盡祛民瘼, 赴外任拜辭者, 亦必引見, 曲諭分憂字民之意乃遣。 由是澤下究, 情上達, 鰥寡無蓋。 日引臣僚, 咨訪治道, 雖處小事, 亦自師虞, 舍己無難, 有匡救箴。 諫者必虛懷聽納, 以廣言路, 或値閑燕, 招延伩雅, 尙論歷代治亂成敗之迹, 講明聖賢道統性理之奧。 日昃夜分, 亹亹不爲疲, 常訓戒儲貳, 貽謀經遠, 慮祖先以來憲章雖具, 科條滋多, 有司或眩於遵守, 且時異世殊, 有不得不變而通之。 於是參酌商搉, 務從簡切, 定著一國大典, 爲後世持守之規。 交隣以義, 唯務輯睦, 示以誠信, 故雖島倭、野人之頑獷, 亦無不怛威赧德。 自受命以來, 竭誠述職, 愼守藩翰, 凡有帝命, 恐不及祇, 若天眷特加, 荐蒙竉綏, 東民歡悅。 方願永年, 昊天不弔, 遽罹于疾。 及至垂絶, 神思不少亂, 慮勞民以襄, 後事遺命, 喪葬悉從儉約, 歿猶惠民, 可勝痛哉!
성종 98권, 9년(1478 무술/명성화(成化)14년) 11월 30일(정해) 2번째기사
홍문관 부제학 성현등이 임금의 정사와 학문, 인재 등용등에 관해 상소하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성현(成俔)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삼가 듣건대, 하늘은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이기(理氣)로써 만물(萬物)을 화생(化生)시켜 농사[歲功]가 이루어지고, 임금은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의 도리(道理)로써 만민(萬民)을 다스려 국가(國家)가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의 지위(地位)는 참으로 큰 것입니다.
온갖 사무(事務)의 계기로서 모든 일이 모이는 바이며, 상벌(賞罰)과 생살(生殺)의 중추로서 치란(治亂)과 존망(存亡)이 나오는 바입니다.
대체로 하늘이 대명(大命)을 내리고 지위를 준 것은 편안한 자리를 주어서 즐기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어려움을 알고서 어려움으로써 대처하게 한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알고서 어려움으로써 대처하게 한 것이 매우 마땅한 것이라면 이는 곧 크게 편안하고 크게 영광스러운 것으로서, 아름다움을 쌓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을 잘하는 자는 비록 많으나, 끝마무리를 신중(愼重)히 하는 자는 적습니다. 창업(創業)하기는 쉬우나 수성(守成)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인데, 신(臣)등은 그 까닭을 말하려 합니다. 대체로 대업(大業)9131)은 하루아침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백전백승(百戰百勝)은 간난(艱難)9132)함과 창양(搶攘)9133)한 가운데에서 얻었으나, 오직 간활(姦猾)한 자가 그 틈을 엿볼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사에 관한 것을 널리 문의하여 민막(民瘼)9134)을 강구(講求)하며, 아언(雅言)9135)을 받아들이고 서무(庶務)에 근로(勤勞)해서, 나라가 이미 편안해지고 교화(敎化)가 이미 흡족(洽足)해지며, 형벌(刑罰)이 필요없게되고 기강(紀綱)이 확립되어, 사방의 오랑캐가 모두 판도(版圖)에 들어오며, 영웅(英雄)과 재걸(材傑)이 모두 범위(範圍)9136)안에 있게되면 호령(號令)을 실시함에 있어 하고 싶은대로 다스려져서 마치 털이 바람을 만나고 불이 들판에 번지는 것과 같아 막을래야 막을 수 없게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나면 관뉴(關紐)9137)를 파돈(簸頓)9138)하고 탁약(橐籥)9139)을 희롱(嬉弄)하여, 동정(動靜)을 제때에 하지않고 이장(弛張)9140)을 절도있게 하지아니하며, 한 번 기뻐하고 성낸다고 해서 무엇이 손상될 것이며, 한번 즐기고 욕심낸다고 해서 무엇이 해롭겠는가하여, 넓은 집 포근한 털이불이 그 몸을 편하게 하고, 아리따운 계집의 분바른 볼이 그 마음을 현혹시키며, 요란한 음악[管絃]이 그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구슬,비취,비단이 그 욕망을 사치스럽게 하며,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이 그 눈을 즐겁게 하고, 놀이하고 사냥함이 그 광증(狂症)을 일으켜서, 무릇 이른바 기기 음교(奇技淫巧)9141)한 것들이 다투어 그 앞에 모이게 됩니다.
그러면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거기에 따라 맞장구쳐서 국가의 형편을 어렵게 만듭니다. 이렇게 되면 이는 마치 9층(層)의 대(臺)가 비바람에 이미 그 꼭대기가 흔들리고, 백 아름드리 나무를 좀벌레가 이미 그 가운데 구멍을 낸 것과 같아서, 그 기울고 썩는 것을 마침내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의(忠義)한 선비는 그 기미를 환하게 먼저 알고서 화환(禍患)을 예방(預防)하기 위하여, 현재의 세상이 조금 편안한 듯하고 승여(乘輿)9142)가 크게 실덕(失德)함이 없는데도 곧은 말로써 적극적으로 간(諫)하여 뇌정(雷霆)9143)을 격동시킴은 명예(名譽)를 요함이 아니며, 조정(朝廷)을 비방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만에 하나라도 그 가운데 고황(膏肓)9144)의 병통이 있다면 이를 치료하기 위한 것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밝은 임금이었습니다만, 가의(賈誼)가 태식(太息)의 말을 하였고9145),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어진 임금이었습니다만, 위징(魏徵)의 십점소(十漸疏)가 있었습니다.9146)
당시에 두 임금이 두 사람의 말을 듣지않게 되었다면, 한나라와 당나라가 제대로 한나라 당나라가 되었을는지 알 수없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타고나신 예지(睿知)와 현명(賢明)하신 바탕으로서, 말에는 실수가 없고 행동에는 지나침이 없으시므로, 풍속(風俗)이 거의 순후(醇厚)하게 되고 이륜(彝倫)이 거의 질서가 잡혔으며,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이 거의 갖추어졌고,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이 거의 없어졌으며, 현준(賢俊)한 자가 거의 등용(登用)되고, 간사(奸邪)한 무리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니, 오제(五帝)와 삼왕(三王)9147)의 정치(政治)와 같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거되어야 할 폐단이 다 제거되지못하고, 종식되어야 할 해(害)가 다 종식되지 못하여 일은 마땅함에 다 부합되지 못하고, 사람은 올바름에 다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성대(聖代)에 한 가지 흠(欠)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천도(天道)는 10년이 되면 돌아오고 인사(人事)는 10년이 되면 변하며,《주역(周易)》에서는, ‘부인(婦人)의 정(貞)은 10년이면 반드시 변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殿下)께서 즉위(卽位)하신 지 이제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근심은 늘 적은 것을 소홀하게 여기는 데에서 생기며, 마음도 점차로 습관이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한가지 생각이 혹 차질이 있다든가 한가지 사심(私心)이 혹 일어나게 된다면, 오늘날의 근심과 노력이 후일의 게으름이 되고, 오늘날의 공경과 검소함이 후일의 사치함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끝마무리를 잘하려면 처음부터 삼가라’하였고, 또 이르기를, ‘오직 그 덕(德)을 새롭게 하여 시종(始終) 한결같게 하라’하였으며,《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누구나 시작이 없는 것은 아니나, 끝마무리를 잘하는 자가 드물다’하였으니, 이는 임금으로서는 마땅히 주의하여야 하는 것이며, 중재(中材)로서는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臣)등은 삼가 치도(治道)에 대한 여덟가지 일을 다음에 아뢰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유념(留念)하여 살펴주소서.
신등은 삼가 듣건대, 임금의 도리를 함에 있어서는 학문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학문을 하느냐않느냐에 따라, 마음의 사정(邪正)이 달려있는 것이며, 천하의 치란(治亂)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만일 학문을 좋아하면 군자(君子)들이 기뻐하고 사모하여 그 조정(朝廷)에 벼슬하기를 희망하지만, 만약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소인(小人)들이 방자하게 굴면서 그 권세를 장악하려 할 것이니, 삼가하지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 성왕(聖王)은 반드시 학문에 힘을 기울여 아침에 정사(政事)를 듣고, 낮에는 대신(大臣)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정사를 가다듬습니다. 그러고도 좌우(左右)의 훌륭하고 덕(德)이 있는 선비들의 훈고(訓告), 교회(敎誨)하는 힘과 함양(涵養),훈도(薰陶)하는 공(功)에 힘입습니다.
그래서 총명(聰明)함이 날로 열리고, 지기(志氣)가 날로 강해지며, 재기(材器)가 날로 이루어지고, 치효(治效)가 날로 드러나게 되어 나에게 있는 명덕(明德)이 날로 새로워지고, 또다시 새로워져서 자연히 자신도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고서도 혹 게으르게 될까 걱정이 되면 반우(盤盂)에 잠(箴)을 새기고9148) 궤장(几杖)에 명(銘)을 새기는데9149), 이는 그 동용주선(動容周旋)9150)과 앉고 일어나고 걸어감에 있어서 정도(正道)와 정학(正學)이 아님이 없이 정사(正事)를 행하고자 함입니다.
대체로 제왕(帝王)의 학문은 위포(韋布)9151)와 달라서, 분전(墳典)9152)을 해박하게 아는 것이 학문이 아니며, 물상(物象)을 잘 묘사하는 것이 학문이 아니며, 기송(記誦)을 많이 하는 것이 학문이 아니며, 마름질을 잘하거나 곱게 엮는 것이 학문이 아닙니다.
오직 마땅히 성현(聖賢)의 말을 음미하여 의리(義理)의 올바름을 강구하고 고금(古今)의 변화(變化)를 관찰하여 득실(得失)의 기미를 체험해서, 그것을 자신에게 옮겨 실천(實踐)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학문에 지극한 효과가 이룩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 추향(趨向)9153)을 분명하게 정하지아니하고, 널리 많이만 구하려고 힘쓸 경우 고원(高遠)한데로 쏠리게 되면 그로 해서 노불(老佛)9154)로 흐르게 되고, 험괴(險怪)한 데로 쏠리게 되면 그로해서 귀신(鬼神)숭배(崇拜)로 흐르게 되고, 지교(智巧)한데로 쏠리게 되면 그로 해서 술수(術數)로 흐르게 되고, 부조(浮躁)한 데로 쏠리게 되면 그로 해서 사부(詞賦)로 흐르게 되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는 육경(六經)을 깊이 연구하고, 치도(治道)를 연마하시어 하루 사이에 세번 경연(經筵)에 나아가시고, 또 야대(夜對)까지 두어 늘 강관(講官)들에게서 조용히 자문을 받으시니, 학문의 정미(精微)함과 문사(文思)9155)의 깊음은 마치 해가 바야흐로 솟아오르고 냇물이 바야흐로 이름과 같아서 그만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臣)등은 하루의 따뜻함은 오래지 못하고, 열흘의 차가움이 쉽게 이르며, 홍곡(鴻鵠)이 급히 옮김에 따라 심지(心志)가 굳어지지 못하게 될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9156)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공경심(恭敬心)도 차츰 해이해져서, 구극(駒隙)9157)이 빠르다고 생각하시고, 만기(萬機)9158)가 번거로움을 싫어하게 되면, 반드시 나의 학문이 이미 풍부하고 나의 다스림이 이미 융성해졌으니,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없이 지낼 수있을 것이라고 여겨 자주 경연(經筵)을 정지하고, 정사(正士)를 드물게 대하여 한번 안일(安逸)과 유연(遊宴)으로 흐르게 되면, 마침내 사욕(私慾)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옛날 위(衛)나라 무공(武公)은 나이 90이 넘어서도 오히려 날마다 그 신하에게 신칙해서 자기의 과실(過失)을 일깨워주게 했습니다. 그래서 절차탁마(切瑳琢磨)의 공(功)과 도학자수(道學自修)의 유익함에 대하여 풍아(風雅)9159)에서 이를 읊으면서 시인(詩人)이 마침내 잊을 수 없다는 말을 하였으니, 이것은 옛 현군(賢君)이 끝마무리를 삼가한 대덕(大德)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몸소 실천하는 돈독한 행실과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효과를 실제로 체득하시고, 밤낮없이 노력하여 쉬지 않고 나아가신다면 정일집중(精一執中)9160)의 학문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신등은 삼가 듣건대《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고, 임금은 간(諫)함을 따르면 성인(聖人)이다’하였고, 전(傳)에서는, ‘간하는 것은 복(福)이고, 아첨함은 적(賊)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천하(天下)의 일은 지극히 광범위하고, 군국(軍國)의 일은 지극히 중한 것이므로, 비록 밝은 임금이 이를 청단(聽斷)한다하고, 어진 신하가 이를 모의(謀議)한다 하더라도 생각의 실수를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실수한 것을 구제하지 못하게 되면, 해(害)가 적지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충량(忠良)한 선비가 소신껏 말하여 일마다 경계해서 바로잡아야만, 일이 시행됨에 있어 어긋남이 없이 태평의 다스림을 마침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씀하시기를, ‘천자(天子)에게 간쟁(諫爭)하는 신하 7인(人)이 있으면, 비록 임금이 무도(無道)하더라도 그 천하(天下)를 잃지아니할 것이고, 제후(諸侯)에게 간쟁하는 신하 5인이 있으면, 비록 제후가 무도하더라도 그 나라를 잃지아니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자사(子思)가 위후(衛后)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국사(國事)는 날로 잘못되어가고 있습니다. 임금이 한마디 하고서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데, 경대부(卿大夫)가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경대부가 한마디 하고서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데, 사서인(士庶人)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제각기 훌륭하게 여기면, 여러 아랫사람이 다 함께 훌륭하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선(善)이 어디로 해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하였습니다.
그래서 당(唐), 우(虞)의 시대에는 위에 요(堯) 순(舜)과 같은 임금이 있었어도 고(皐)9161), 기(夔), 직(稷), 설(契)의 무리가 서로서로 책난(責難)하기를 마지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末世)의 용렬하고 어두운 임금은 교만스럽고 괴퍅하므로, 인하여 위망(危亡)의 화근(禍根)이 즉시에 이르게 됩니다. 하(夏)나라 우(禹)임금은 바른말을 알리는 북[鼓]을 설치하고서 창성하였고, 주(周)나라 여왕(慮王)은 비방을 감독하다가 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3일간 간언(諫言)을 듣지못하면 반드시 보좌하는 신하를 꾸짖었는데, 마침내 정관(貞觀)의 치(治)라는 효과를 이루었고, 덕종(德宗)은 간쟁(諫諍)하는 신하를 매우 미워하여 곧음을 내세워 이름을 취하는 자들이라고 하다가, 마침내 경원(涇原)의 난(亂)9162)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간(諫)함을 따르는 자로 흥(興)하지아니한 자가 없고, 간함을 싫어한 자로 망하지 아니한 자가 없습니다.
은(殷)나라의 본보기9163)가 소상하게 방책(方策)에 실려있으니, 임금이 된 이로서 간함을 들어주는 것이 옳고 간함을 거절함이 잘못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정직(正直)한 말은 항상 귀에 거슬리고 아첨하는 말은 쉽게 마음에 들게 됩니다. 진실로 그로 말미암아 사욕(私慾)에 빠져서 구부러지고 곧은 것을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마치 비유하면 사람들은 오훼(烏喙)9164)가 사람을 충분히 죽일수 있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즐기다가 마침내 몸을 죽이고야 마는 것과 같으니, 이 또한 매우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殿下)께서는 즉위(卽位)하신 이후로 바른 말 구하기를 목마른 듯이 하시고, 간(諫)함을 따르시고 거절하지 아니하시어 조신(朝臣) 중에서 어떤 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작상(爵賞)까지 주어 표창하게 명하시고, 비록 그 말이 정당하지 못하더라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죄책(罪責)을 가하지 아니하셨으니, 비록 도유우불(都兪吁咈)9165)하는 시대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臣)등은 삼가 사람의 마음은 반복(反覆)함이 일정하지 못하고, 성자(聖者)와 광자(狂者)가 쉽게 바뀔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편안하게 다스려진 것을 믿으시고, 차츰 마음이 해이해져서 남의 간하는 바를 많이 받아들이지 아니한다든가?
혹은 상량(商量)한다고 하면서 미적미적 결단하지 않게되면, 청승(靑蠅)이 점점 극번(棘藩)에 이르고9166), 백구(白駒)는 장차 공곡(空谷)으로 떠나게 될 것이니9167), 삼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남의 말을 들음에 있어서 비록 말마다 믿고 일마다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직한 말로 고집스럽게 끊임없이 간하는 자는 자신을 위한 계책이 아니고, 모두 국가를 위한 계책인 것입니다.
만약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생각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만균(萬鈞)의 무거운 위엄을 무릅쓰고 꺾이게 될 화근을 계산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군자(君子)의 책난(責難)하는 참다운 공경을 아시고, 소인(小人)의 비위나 맞추는 간사한 술책을 깨달아 먼저 그 마음을 화평(和平)하게 하여 구부러지고 곧음을 살피시며, 사색(辭色)9168)을 너그럽게 하여 할 말을 다 할 수있게 해서 채택할 만한 말이면 즉시 윤허(允許)하여 따르시고, 망설이는 마음으로 선(善)을 따르는 계기를 늦추지 아니하시면, 전하께서 끝마무리를 삼가시는 것이 도리에 있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등은 삼가 듣건대, 소인(小人)이 국가의 근심거리가 된 지는 오래 되었다고 합니다.《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나라를 세우고 집을 계승함에 있어서 소인은 쓰지말라’하였고,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덕(德)있는 이를 후하게 대하고, 어진 이를 믿으며, 간사한 사람을 멀리 하라’하였으며,《시경(詩經)》의 소민장(小旻章), 항백장(巷伯章)에서 모두 그 실정을 극진히 논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자(孔子)도 주비(周比), 화동(和同), 교태(驕泰)9169)의 유(類)에 있어서 관심있게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서로 없을 수 없음은 마치 천지(天地)에 음양(陰陽)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양(陽)이 있으면 반드시 강(剛)하고, 강하면 반드시 밝으며, 음(陰)이 있으면 반드시 유(柔)하고, 유하면 반드시 어둡게 됩니다. 진실로 혹 거듭된 음이 심하게 엉키게 되면 청천백일(靑天白日)이 매양 거기에 가려서 밝지 못하게 되는데, 이로써 역대(歷代)를 통하여 비바람으로 어두워질 때가 많고, 건곤(乾坤)9170)이 밝게 개인 날은 적었던 것입니다. 대체로 소인의 정상(情狀)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니, 다만 임금이 분별할 수 없음이 염려될 뿐입니다. 소인들의 행동은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으로 그 얼굴을 꾸미고, 아름다운 말과 아첨하는 표정으로 그 자신을 번드르르하게 하며, 조그마한 절도(節度)와 가장된 행위로 그 세속(世俗)을 기만하고, 시세에 추창하고 급속히 날뛰는 것으로 그 능함을 내세우며, 시기하고 차마 못하는 행위로 그 어진 이를 모해하고, 교활하고 편벽된 수작으로 그 올바름을 미워하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행위로 그 진출을 도모하고, 간사하고 음흉스럽게 그 방법을 숨기는 등 천태만상(千態萬狀)이 한결같이 영합(迎合)과 진취(進取)로 우선을 삼습니다. 그러나 오직 군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씀이 공평하고 몸가짐이 신중하며 격렬(激烈)한 논란과 사나운 행동을 하지 아니하여도 사람들은 장자(長者)의 풍도(風度)가 있음을 압니다. 의리(義理)를 따르되, 임금도 따르지 아니하는데, 더구나 권신(權臣)이겠습니까? 도(道)를 따르되 아버지도 따르지 아니하는데, 더구나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이것이 군자와 소인의 방법을 택함이 같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이 그 진위(眞僞)를 분별할 수 없어서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서로 혼동이 된다면, 천하(天下)의 일이 더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크게 간사함은 충성처럼 보이고, 큰 속임수는 믿음성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군자로서 소인의 행위를 하는 자는 백에 한둘도 없으나, 소인으로서 군자다운 자는 왕왕 있으니, 이는 더욱 깊이 분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은 대체로 어렵습니다. 구준(寇準)9171)처럼 어진 이도 정위(丁謂)의 간사함을 깨닫지 못하여 그 당시 이를 아는 자는 오직 이항(李沆) 한 사람뿐이었으며, 사마광(司馬光)처럼 어진 이도 왕안석(王安石)의 간사함을 알지 못하여 그 당시 이를 아는 자는 오직 여회(呂誨)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대개 이 두 사람은 글은 거짓을 꾸며대기에 충분하고, 재주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비록 밝고 지혜있는 임금이라 하더라도 현혹(眩惑)을 당하는데, 더구나 어둡고 용렬한 임금은 자기에게 순종하여 거역하지않는 것만을 기뻐하고, 그들을 의지하여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같이 여깁니다.
상홍양(桑弘羊)같은 자는 심계(心計)9172)로써 무제(武帝)를 현혹(眩惑)시켰고, 우문융(宇文融)은 정민(精敏)으로써 현종(玄宗)을 현혹시켰으며, 노기(盧杞)는 구재(口才)로써 덕종(德宗)을 현혹시켰으며, 채경(蔡京)은 간능(幹能)으로써 휘종(徽宗)을 현혹시켰고, 진회(秦檜)는 위절(僞節)로써 고종(高宗)을 현혹시켰는데, 자고(自古)로 소인이 국가를 그르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원인이 없었겠습니까?
무릇 간사한 소인의 윗사람을 무시하는 태도와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을 취하는 방법이 간책(簡策)에 갖추어 있으므로, 성상(聖上)께서 빠짐없이 통촉(洞燭)하였을 것입니다만, 다만 아랫사람이 성상의 뜻에 맞추어주지 않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지금 경연(經筵)과 조회(朝會)에서 계사(啓事)할 때에 대간(臺諫)이 법을 내세워 어떤 일을 논(論)하면서 인물(人物)을 탄핵할 경우 전하(殿下)께서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물으며 지론(至論)을 듣고자하면, 혹 양단(兩端)을 확정짓지못하고 화합되기를 관망하기도 하고, 혹 마음으로는 그 그름을 알면서도 어물어물 밝히지 아니하며, 혹 그 말을 가로막아 억지로 미봉책(彌縫策)을 쓰기도 합니다.
무릇 중임(重任)을 맡은 대신(大臣)으로서 보필(輔弼)할 책임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화광동진(和光同塵)9173)하여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니, 이러한 것은 신등이 일찍이 마음 아파하던 것입니다.
자색(紫色)9174)을 미워함은 주색(朱色)9175)을 어지럽힐까 염려한 때문이며, 가라지와 피[稊稗]를 미워함은 곡식을 해칠까 염려한 때문입니다.
사람을 씀에 있어 간사함을 먼저 분간하지 못하면 임용되는 바가 반드시 현명한 자라고는 할 수 없어 어진 사람이 진출할 수 없을 것이고, 어질다고 믿었던 자도 알고 보면 반드시 간사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어 간사한 자가 반대로 진용(進用)될 것입니다.
예부터 임금으로서 간사하고 아첨한 자의 해(害)가 전대(前代)의 업적을 패망시킨 것을 누가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전철(前轍)을 되풀이하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를 들면, 곁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자는 승패(勝敗)를 알 수 있으나, 직접 두고 앉아 있는 사람은 막연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길흉소장(吉凶消長)의 이치를 아시고, 진퇴 존망(進退存亡)의 기미를 연구하시어 밝게 사람을 살피시고, 강하게 간사함을 제거하여 용렬한 무리로 하여금 조정(朝廷)에 용납할 수 없게 한다면 국가의 복이 그 한량이 있겠습니까?
신등은 삼가 듣건대 옛 성왕(聖王)이 세상에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것은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옳게 임용(任用)하는데에 달렸을 뿐입니다. 어떤 것을 가지고 사람을 옳게 임용했다고 하는가하면, 이는 안으로는 공경(公卿), 대부(大夫), 사(士)와 밖으로는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있어서 모두 그 적임자를 채용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것을 가지고 적임자를 채용했다고 하는가하면, 그것은 어진 자가 지위(地位)에 있고, 능력자가 직임에 있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서 능력자에게 관직을 맡기는 것은 요(堯) 순(舜)같은 분도 어렵게 여겼고, 말을 듣고 행실을 관찰함에 대해서는 공자(孔子)가 경계한 바입니다. 알면서도 능히 가리지 못하면 둔한 말이 천리마에 끼인 것이고, 가리되 정밀하게 하지 못하면 가짜 돌이 진짜 옥에 섞인 것입니다.
임금이 이러한 이치를 살펴서 능력자를 옳게 임용(任用)하여 정치를 해나간다면 허리띠를 드리우고 단정히 앉아서 하는 일이 없어도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이에 반대된다면 비록 현재(賢才)가 있다고 하더라도 등용(登用)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임금이 고립(孤立)되어서 의지할 데가 없게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내 잘못이 아니라 세상에 인재(人材)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옳겠습니까? 대체로 영웅준걸(英雄俊傑)은 없는 시대가 없습니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이들을 채용함에 있어 그 방법을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제대로 못함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는 너무 급하게 발탁해서 쓰고, 이름만 듣고 그 실제는 구하지아니하며, 임의대로 하고 대중의 의견을 따르지않는 데에 불과합니다. 옛날에는 의논이 결정되어야 임관(任官)을 했는데, 임관을 하고서 작위(爵位)를 주었으면, 갑작스럽게 천직(遷職)시키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같으면 덕(德)을 헤아리고, 덕이 같으면 점(占)을 하였으니, 이는 이름만을 듣고 그 실제를 구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좌우(左右)에서 모두 ‘어집니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으며, 대부(大夫)가 모두 ‘어집니다’고 하더라도 옳지않으며, 국민[國人]이 모두 ‘어집니다’고 하더라도 옳지않습니다. 반드시 참으로 어진가를 본 다음에 채용한다면, 반드시 공의(公議)를 따르게 되고, 마음에 내키는 대로 임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한 가지 일이 마땅하고 한 가지 말이 뜻에 맞는다하여 순서를 밟지 않고서 큰 직임(職任)을 맡기게 되면, 나중에 그가 형편없음을 알았다하더라도 그 뿌리를 내림이 이미 굳어지고,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져서 쉽게 내쫓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 붕우(朋友)와 대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평소에 친하게 교제하여 본말(本末)에 환해야만 그 마음가짐이 간사한가 올바른가를 알게 되는데, 더구나 임금이 신하에게 있어서는 겨우 한차례 안색(顔色)을 대하고 한차례 모임을 갖는 정도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채용함에 있어서는 명류(名流)9176)와 중망(衆望)9177)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무릇 명류는 덕행(德行)이 모인 바이며, 중망은 이목(耳目)이 집중된 바이니, 진실로 높이 발탁한다 하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헐뜯을 것도 없고, 칭찬할 것도 없으며, 여진여퇴(旅進旅退)9 178)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로와 업적의 선후(先後)를 헤아리지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을 채용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자격(資格)만을 따지므로, 명류와 중망을 받는 이는 대개 묻혀서 진출하지 못하고, 여진여퇴하는 자만이 때때로 승진이 되어서 기회를 엿보는 자는 앞을 다투어 선수를 치고, 겸손한 자는 말단에 남게 됩니다.
이는 마치 지란(芝蘭)이 녹시(菉葹)9179)와 한집에 있고, 소소(簫韶)9180)가 상복(桑濮)9181)과 음조(音調)를 같이 하는 격입니다.
전조(銓曹)에서도 연수(年數)에만 국한하여 비록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선비가 있다하더라도 재능(才能)대로 주의(注擬)하지 못하니, 이것이 급암(汲黯)이 적신(積薪)의 비평을 하게 된 것9182)이고, 풍당(馮唐)이 호수(皓首)의 탄식을 하게 된 것9183)입니다.
전조의 책임을 맡은 자가 진실로 인아(姻婭)9184)에게 사정(私情)을 두지않고, 원수라도 피하지않으며, 오직 덕(德)이 있는 이를 천거하고, 어진 이를 채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어질고 어질지 못함이 자연 구별되어서 각각 마땅하게 될 것입니다. 진(晉)나라의 산도(山濤)와 당(唐)나라의 최우보(崔祐甫)와 송(宋)나라의 구준(寇準)은 모두 전조(銓曹)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으므로, 그 당시에 옳은 사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이조(吏曹)도 신중하게 선택하여 위임(委任)시키지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현능(賢能)함을 논(論)하지 않고, 한갓 훈로(勳勞)와 척완(戚琬)9185)으로서 연수가 오래 된 것만을 가지고 갑작스레 임명한다면 약한 자는 거취(去就)에 밝지못하고, 강한 자는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여 도리(桃李)9186)가 사문(私門)에 빛나고, 호서(狐鼠)9187)가 성지(城址)에 기탁하게 될 것이니, 이는 국가의 이익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의(公議)를 널리 채택하고, 물망(物望)있는 자를 널리 방문하소서. 그 사양하며 자랑하지 않는 자는 그 뜻이 가상하고, 공손하여 자랑하지않는 자는 그 뜻을 취할 만하며, 신중하고 말수가 없는 자는 사람을 용납하는 아량이 있으며, 청렴하고 결백한 자는 돌같이 굳은 지조가 있는 자이니, 반드시 그 덕행(德行)을 고찰해서 진출시켜 요행을 바라는 무리로 하여금 함부로 진출하지 못하게 한다면, 많은 업적이 모두 이루어져 국가가 자연 평안하게될 것입니다.
신등은 삼가 듣건대, 우주(宇宙)사이에는 한가지 이치[里]뿐이라고 합니다. 하늘은 그 이치를 얻어서 하늘이 되고, 땅은 그 이치를 얻어서 땅이 되어, 무릇 천지(天地) 사이에 사는 자는 반드시 그 이치를 얻어 성품[性]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그래서 그 성품의 이치를 다 연구하여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며, 법을 만들어 세상에 드리워서 참찬화육(參贊化育)9188)의 성과를 이루어 한가지 물건도 제자리를 얻지못함이 없게 한 것입니다. 불씨(佛氏)9189)는 성인(聖人)의 도(道)가 아니고 별도로 일단(一端)이 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청정(淸淨)하여 이치에 가까운 듯하나, 그 실제를 탐구해 보면 노망(鹵莽)하여 말과 맞지않으니, 이는 사실 정도(正道)의 잡목(雜木)이고, 이륜(彝倫)의 해충(害蟲)입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임금이나 후세의 군주들은 이를 추종하여 믿으면서 서로 금수(禽獸)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면서도 알지 못하였으니, 위(魏)나라, 양(梁)나라같은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고명(高明)하고, 학문이 순수(純粹)하여 그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의 이해(利害)에 대하여 진실로 이미 환하게 아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지난해에 축수재(祝壽齋)를 폐지하게 하시고, 금년에는 삼사(三司)에서 제공하는 물품도 없앴으며, 신 등에게는 역대(歷代)의 불교(佛敎)를 배척한 일을 써서 소장(疏章)으로 아뢰라고까지 하셨으니, 중외(中外)에서 기뻐하며 모두 불세출(不世出)의 임금으로서 무언가 크게 하실 때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대간(臺諫)의 원각사(圓覺寺)의 조라치(照剌赤), 불당(佛堂)의 조두장(澡豆匠), 낙산사(洛山寺)의 길을 옮기고 고기잡이를 금하는 것과 사사(寺社)의 세금받는 밭에 대한 일들을 가지고 성상(聖上)을 여러번 번거롭게 하였는데, 전교(傳敎)하시기를, ‘조종(祖宗)의 법을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다’고 하시니, 신 등은 실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법이라는 것이 현재에 써도 어긋나지 않고, 후세에 물려주어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면, 진실로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혹 정치에 방해됨이 있으면 고쳐서 새롭게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선왕(先王) 때 일시(一時)의 영(令)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대전(大典)》에 오래 실린 법이 아니면 고치기에 무엇이 어려우며, 제거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신등은 그 폐단을 진술하기를 바랍니다.
조라치(照剌赤)는 궁중(宮中)에서 소제(掃除)하는 사람이지 사사(寺社)에서 소유(所有)할 바가 아니며, 조두(澡豆)는 바로 세수하는 데에 제공되는 물건이지 중[髡首]이 쓸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지금 각사(各司)의 실무를 보아야 할 사람을 이단(異端)의 쓸모없는 무리로 충당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관부(官府)의 피폐(疲敝)함과 인물(人物)의 초췌(憔悴)함이 이로 말미암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절[寺]에서 세금을 거둠은 이것이 무슨 공(功)에 의한 것입니까?
무릇 나라에 농지(農地)가 있고, 농지에 세금을 매기는 것은 조정(朝廷)의 백관(百官)에 대한 용도를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농사짓지 않는 무리로 하여금 또다시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게 한단 말입니까?
지금 양종(兩宗)9190)에 소속된 사사(寺社)의 밭이 무려 천여 결(結)이나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군자(軍資)에 충당시키고, 궁핍(窮乏)한 자를 진휼(賑恤)하여 준다면, 만민(萬民)의 생명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익도 없이 공름(公廩)9191)을 소비시킴은 이보다 더 심함이 없습니다. 강원도(江原道)는 산천(山川)이 험악하고 토지가 메말라서, 여러 해동안 풍년이 들지못하여 사람들이 자주 굶주리게 되므로, 산중 고을에서는 여곽(藜藿)9192)에 많이 힘입으며, 바닷가에서는 전적으로 어염(魚鹽)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풍년이 든 해라하더라도 구학(丘壑)에 뒹굴게 됨을 면할 수 없고, 인가(人家)가 드물며, 도로(道路)가 험하고 멀어서 쓸쓸한 우역(郵驛)에 달팽이 집 같은 몇 개 부락뿐이니, 한 도(道)의 호구(戶口)를 계산해 보면 도리어 하도(下道)의 큰 고을만 못하고, 한 고을의 축적(蓄積)을 계산해 보면 도리어 하도의 부잣집만 못하여, 그 잔폐(殘弊)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낙산사(洛山寺)때문에 도로(道路)를 구부러진데로 옮기어 인마(人馬)로 하여금 양장(羊腸)9193)의 괴로움을 견딜 수 없게하며, 백성들의 고기잡이를 금하여 동해(東海)를 방생(放生)하는 못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학열(學悅)이란 중은 또 강릉(江陵)에다 논[畓]을 많이 만드는데, 비록 새로 개간(開墾)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의 옛 농토(農土)를 수탈(收奪)한 것이므로, 원근(遠近)에서 떠들썩하여 통분(痛憤)하게 여기지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릇 중[緇徒]은 자신이 요역(徭役)을 하지않고 편안히 앉아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옷입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만한 것인데, 백성의 생계(生計)를 단절시켜 생활할 수 없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옛 신라(新羅)의 임금이 불교(佛敎)를 믿고 경내(境內)에서 고기잡이와 사냥을 못하도록 금하였으며, 고려(高麗)때에는 많은 전토(田土)를 사사(寺社)에 시납(施納)하였으므로 역사에서 그것을 기록하여 후대(後代)에 웃음거리를 남겼는데, 어찌 성명(聖明)한 조정에서도 오히려 말세(末世)의 전철(前轍)을 따라야만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보다 더 심한 것도 있습니다.
대비(大比)9194)때마다 예조낭관(禮曹郞官)을 양종(兩宗)에 나누어 보내어 문,무과(文武科)의 예(例)에 따라 중들을 선발하고, 이조(吏曹)에서는 또 따라서 관작(官爵)을 내리고 고신(告身)을 주니, 인연(因緣)에 따라 청탁(請托)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선왕(先王)의 제도(制度)에 안으로는 원녀(怨女)9195)가 없고, 밖으로는 광부(曠夫)9196)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구[生齒]가 날로 번성하여 풍속과 교화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도 근년에 이사(尼寺)9197)를 철거(撤去)하여 성(城)밖으로 내보내도록 명하였습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금법(禁法)으로써 그 폐단을 막지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처녀와 과부가 머리를 깎는 일이 서로 계속되어 끊이지않으며, 혹은 선(善)을 권장한다고 하고, 혹은 산에서 놀이한다는 핑계로 친구를 모으고 떼를 지어 중들과 섞여 있으므로, 음란하고 추악한 행위가 그 가속(家俗)을 어지럽히는 사례를 면치 못합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국가에는 이익이 없고, 백성에게는 해만 있는 것입니다. 조정(朝廷)에서 모두 그르다 하고 간관(諫官)들도 다투어 말하고 있으나, 전하께서는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그대로 둔 채 폐하지 않으시니, 신등의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 대체로 나무를 심는 자는 반드시 검은 흙을 먼저 넣고 물을 주며, 또 가시와 잡초를 제거하여 그 사이에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은 나무가 아무리 아름답다하더라도 마침내 잡초에 치여서 죽게 될 것입니다. 불교를 배격하는 방법도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진실로 그 근본(根本)를 단절시키지 못한다면,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 정사를 좀먹게 하는 실마리가 없어질 때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 무리들을 시석(矢石)9198)으로 보내면 모두 굳센 군사가 될 것이고, 전묘(田畝)9199)에 보내면 모두 훌륭한 농부가 될 것이며, 각각 전문업(專門業)을 갖게 하면 모두 훌륭한 공장(工匠)이 될 것이고, 남녀(男女)가 서로 짝을 지어 산업(産業)을 이루게 하면 모두 양민(良民)이 될 것인데, 그대로 앉아서 의식(衣食)을 소모시키며 국정(國政)을 어지럽히니, 신등은 그것이 옳은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그 해를 논(論)한다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어 크게 명교(名敎)에 누(累)가 되고 있으니, 만일 그 폐단을 구한다면 그들을 상인(常人)으로 만들고, 그 책을 불태우며, 그들의 사우(寺宇)를 일반인의 거처(居處)로 만들어 선왕(先王)의 도(道)를 밝혀서 인도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제함에 있어 그 힘을 다하지 아니할 경우 불교를 막지 아니하면 우리 도(道)가 펴지지 못하고, 불교가 그치지 아니하면 우리 도가 시행되지 못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 있는 정치를 행하시어 일체 엄하게 금한다면 백성들에게 또한 큰 다행이겠습니다.
신등은 삼가 듣건대, 선왕(先王)이 천하(天下)를 다스릴 적에 이륜(彝倫)을 붙들어 도(道)로 이끌고 민의(民義)를 힘써 알맞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商)나라 풍속이 귀신(鬼神)을 좋아하면서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풍습이 비로소 생겼고, 그후 주(周)나라에 이르러 진(陳)나라에서 대희(大姬)9200)의 영향을 답습하여 비로소 완구(宛丘) 아래에다 음사(淫祀)9201)를 만들어 도(翿)9202)를 잡고 춤을 추니, 그 음탕한 풍속은 정(鄭)나라, 위(衛)나라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법(法)을 창제(創制)하여 밖으로는 천지(天地),산천(山川),구릉(丘陵),성황(城隍)과 안으로는 조니(祖禰),소목(昭穆),호조(戶竈),문류(門霤)에 대하여 제사지내는데에 법제가 있고, 섬기는 데에 도리가 있게 하였고, 야외(野外)의 음흉(淫凶)한 귀신을 집안으로 이끌고 왔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듣건대 좌도(左道)9203)로써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는 용서 없이 처벌(處罰)하고, 요언(妖言)으로써 대중을 현혹시키는 자는 용서없이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 사람들은 다투어가며 귀신을 신봉하여 무릇 길흉(吉凶) 화복(禍福)에 대하여 한결같이 무당의 말만 듣고서 화상(畫像)을 그려 돈을 걸어놓기도 하고, 영혼(靈魂)을 맞이하여 집안에 들이기도 하며, 공창(空唱)9204)을 듣기도 하고, 직접 성황(城隍)에 제사도 지내며, 노비(奴婢)를 시납(施納)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성조(聖朝)에서 금하는 바로서《속전(續典)》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폐단을 깊이 아시고, 또 법사(法司)로 하여금 무당을 모두 찾아내어 성(城)밖으로 내쫓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건대 금하는 법령이 차츰 해이해져서 성밖으로부터 점점 다시 들어와 부인(婦人)들을 유혹시켜 주식(酒食)을 소비시키면서 혹은 액(厄)을 물리친다하고, 혹은 병을 구제한다하니, 비록 대가(大家)와 거실(巨室)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초치(招致)하여 다투어가며 저속한 행위를 하면서도 예사로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데, 한 사람이라도 이로 인하여 죄를 받았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며, 북 치고 피리 불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길거리나 저자 사이에 끊이지않고 있으니 이것은 신등이 의혹을 품는 바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몸소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 가르치면 다투게 되며, 명령하는 바가 좋아하는 바에 반대되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성수청(星宿廳)을 아직도 성(城)안에 두고, 기은사(祈恩使)9205)가 봄, 가을로 끊이지 않으니, 이렇게 하면서 백성만 못하게 한다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등이 일찍이 기은사(祈恩使)의 행렬(行列)을 보건대 경도(京都)에서 개성(開城)까지, 개성에서 적성(積城), 양주(楊州)의 경계(境界)에 이르기까지 말을 탄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하고, 그 동복(僮僕)과 치중(輜重)9206)은 배가 되는데, 혹은 가고, 혹은 머물면서 머뭇거리고 떠나지 않으면 수령(守令)들이 국궁(鞠躬)하고 숨을 죽이며 오직 은근하게 맞이하여 혹은 음식물을 후하게 주고, 혹은 뇌물을 주면서 만에 하나라도 견책(譴責)을 당할까하여 비록 절하고 무릎 꿇는 것도 거절할 수 없게 되었으니, 폐단의 큼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성수청(星宿廳)같은 것은 어떤 귀신이며 어떤 제사입니까?
귀신도 분명한 귀신이 아니고, 제사도 올바른 제사가 아니니, 이 또한 왕정(王政)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하였고, 또 말하기를, ‘정당한 귀신이 아닌 것을 제사함은 아첨하는 것이다’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하늘에게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공경하지 아니하면 무람해지고, 멀리하지 아니하면 친압하게 되며, 제사지낼 것이 아닌 것을 제사하면 모독이 되고, 빌 것이 아닌 것을 빌면 아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중려(重黎)9207)가 무당을 좋아하다가 그 집이 무사(巫史)가 되었으며,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귀신에게 현혹되어 마침내 무고(巫蠱)의 난(亂)9208)이 있었으니, 이는 밝은 본보기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있는 정치를 행하시어 풍속을 정돈해서 간사스럽고 음란하고 요망한 것들로 하여금 성명(聖明)의 아래에서는 용납되지 않게하소서. 이 또한 신등의 소망입니다.
신등은 삼가 듣건대 예의염치(禮義廉恥) 이것을 사유(四維)라 하는데, 이 사유가 지켜지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라면 이 네 가지를 버려두고서는 정치를 할 수 없었으니, 마땅히 관자(管子)가 그것을 말하여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도왔고, 가의(賈誼)가 그것을 취하여 한(漢)나라 문제(文帝)를 깨우치게 한 것입니다.
아! 세상의 도의(道義)는 날로 낮아지고, 인심(人心)은 옛날 같지아니합니다. 옛날의 선비는 공손하였는데 지금의 선비는 방탕하며, 옛날의 선비는 청렴하였는데 지금의 선비는 탐욕스러우며, 옛날의 선비는 정직하였는데 지금의 선비는 간사하여 소위 예의(禮義)니 염치(廉恥)니 하는 것이 여지없이 폐지되어 사람들이 지킬 바를 알지 못합니다.
선비의 기풍이 이미 아름답지못한데 민속(民俗)이 어떻게 순박할 수 있겠으며, 민속이 순박하지 못한데 조정이 어떻게 존중될 수 있겠습니까?
신등은 현재 눈으로 보는 폐단을 가지고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우서(虞書)9209)에 이르기를, ‘백료(百僚)가 서로 스승으로 여기며, 군후(群后)들은 덕(德)으로 양보한다’하였고, 문왕(文王)이 기산(岐山)에서 정치를 할 때, 선비는 대부(大夫)에게 양보하고, 대부는 공경(公卿)에게 양보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여 후진(後進)이 선배(先輩)를 멸시(蔑視)하고, 하료(下僚)가 좌상(座上)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선배와 좌상이 된 자도 엄격하게 아랫사람을 통솔하지 못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대간(臺諫)이 어떤 사람의 과실(過失)을 논(論)하면, 그 사람이 스스로 허물을 반성하지는 않고,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나에게 혐의가 있어서 시끄럽게 고알(告訐)한다’하면서, 반드시 서로 배격(排擊)하고 있으니, 이른바 예의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군신(君臣)의 분수는 마땅히 조회(朝會)할 때에 엄격해야 하는데, 요즈음의 백료(百僚)들은 전정(殿庭)에 출입할 때 추창(趨蹌)하지 않으며, 반열(班列)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고,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맞대고서 속삭임을 멈추지않으며, 심지어는 의관(衣冠),환패(環佩)나 진퇴(進退), 부복(俯伏)함에 있어서 공근(恭謹)하고 정숙(整肅)한 태도가 없으니, 이른바 예의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요구함이 있으나,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요구함이 없으며, 위에서 시키는 바가 있으면 아래에서 그 수고로움을 거절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분경(奔競)9210)을 업(業)으로 삼고, 기회를 노리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혹은 친척에게 의지하고, 혹은 고향 사람이라고 하여 사명(使命)구하기를 벼슬 구함보다 더 심하게하며,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경영하고 청탁함에 있어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일이 없으며, 이익이 없는 곳이라면 온갖 방법으로 반드시 모면하려고 하니, 이른바 예의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대체로 재상(宰相)이나 대신(大臣)은 임금이 의지하는 바이며, 온 나라에서 사모하는 존재이니, 그 책임이 진실로 가볍지가 않습니다.
옛날에는 재상의 첩(妾)이 비단옷을 입지못하고, 말에게 곡식을 먹이지 못하는 자도 있었고, 아욱[葵]을 뽑아 버리고 베틀을 제거하여9211)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아니하는 자도 있었으며, 남의 돈을 받지않고 청백함을 잠(箴)으로 남긴 자도 있습니다.
우리 조종조(祖宗朝)에 있어서도 조신(朝臣)이 축재(畜財)를 하지않고, 재상(宰相)은 이익을 말하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 욕심대로 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탐욕이 풍조를 이루었고, 이익에 만족함이 없어 대신(大臣)으로서 농단(隴斷)의 이익을 설치하고9212), 삼공(三公)으로서 수령(守令)의 행차를 전송합니다.
그래서 선물[苞苴]이 백주(白晝)에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뇌물이 권문(權門)에 몰려들어 녹봉(祿俸)을 구하여 명예(名譽)를 사려는 행위를 하지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곤궁(困窮)하게 시골에 있던 자라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요직(要職)에 앉게되면 밭이 천맥(阡陌)을 연하고, 재물이 거만(巨萬)이나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재물을 늘린 자는 성인(聖人)이라하고, 가난하면서도 편하게 여기는 자는 능제하기도 바쁜 처지인데, 어느 여가에 쓰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나라는 예부터 문헌(文獻)으로 알려진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대(事大),교린(交隣)함에 있어서 반드시 사조(詞藻)9213)의 문채에 힘입었으니 문장을 경시(輕示)할 수 없음이 이러한데, 어느 한 사람 근유(瑾瑜)9214)을 품고서 국가의 위대함을 선양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오늘날 한스러운 것입니다.
이상은 모두 큰 문제로서 마땅히 먼저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음률(音律)같은 것은 귀신과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 것인데, 아악(雅樂)과 속악(俗樂)이 모두 그 차례를 잃었으며, 역학(譯學)은 중국과 교통(交通)하는 것인데, 이문(吏文)이나 한어(漢語)에 대해서는 정통(精通)한 자를 보기가 드물어 의사(醫士)에게 완전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고, 상관(象官)9215)은 칠정(七政)9216)의 궤도에 밝지못하니, 태평시대의 문학을 지키는 세상이라 하면서 제도가 이렇게 미비(未備)할 수가 있습니까?
신등이 일찍이 그 폐단을 연구해 보건대 반드시 까닭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무능한 자는 덕(德)있는 자라 이르고, 재주가 많은 자는 도(道)에 위배된다 하며, 육경(六經)에 통달하면 오활(汚闊)9217)하여 임용(任用)하기 어렵다하고, 문학(文學)이 풍부하면 부과(浮誇)9218)해서 진실하지 못하다고 하니, 학문에 있어서도 이러한데 더구나 잡술(雜術)이겠습니까?
그래서 재예(才藝)에 구애를 받아 드러나게 발탁되지 못하고, 높은 지위를 지낸 제배(諸輩)에게 서로 조소(嘲笑)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종사하는 학업(學業)을 마치 진질(疹疾)9219)처럼 괴롭게 여깁니다.
그러니 인재가 날로 줄어드는데 대해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세종(世宗)때에는 경학(經學)으로는 황현(黃鉉), 윤상(尹祥), 김구(金鉤)등이 있었고, 역학(譯學)으로는 김하(金何), 이변(李邊)등이 있었으며, 이문(吏文)으로는 김청(金聽), 음악(音樂)으로는 박연(朴堧)등이 있었으며, 그 밖에 조그마한 재능과 천술(賤術)에 있어서도, 각각 그 적격자가 있었으므로, 그 위의(威儀)와 문물(文物)의 성대(盛大)함을 지금까지도 정치하는데 힘입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학교를 중하게 여기시고, 스승을 높이 받들며, 잡예(雜藝)에 있어서도 권장하고 유도하여 그 뜻을 이끌어가면, 선비로서 분수 안에 일을 누가 즐겨 종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면 비록 날마다 매를 때리고, 달마다 벌을 준다 하더라도 어찌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등은 또 듣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끝마무리를 신중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끝마무리를 신중히 하는 요점은 또 그 마음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합니다.
대체로 마음이 사람에게 붙여 있음은 지극히 은미(隱微)하고 지극히 큰 것으로서, 방촌(方寸)9220)으로 말미암아 만리(萬理)를 포괄(抱括)할 수 있으며, 일념(一念)으로 말미암아 만사(萬事)를 발견(發見)할 수 있으므로, 그 마음을 잡아두기는 매우 어렵고, 놓아버리기는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심(私心)을 이기고, 욕심(慾心)을 버려서 선(善)을 밝혀 본연(本然)의 것을 되찾아야만 이 마음을 보존할 수 있고, 몸이 편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이라도 그 공부를 하지 아니할 수 없는데, 더구나 한 사람의 몸으로 만민(萬民)에게 임(臨)하는 자이겠습니까? 대체로 임금은 깊은 궁중(宮中)에서 생활하므로, 그 마음의 사정(邪正)을 규찰(窺察)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험(符驗)9221)이 외부(外部)에 나타남은 항상 여러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여러 사람이 보는 바와 같아서 끝내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 철왕(哲王)들은 삼가고 두려워하며 경계심(儆戒心)을 가지고 마음을 지켜가기를 마치 신명(神明)을 대하거나 깊은 골짜기에 임한 듯이 하여 경(敬)으로써 지키고, 성(誠)으로써 임하여 감히 엎어지고 자빠지는 순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근간에 추위와 더위가 순서를 잃음으로 인하여 자책(自責)하심을 하교(下敎)하시고, 또 백료(百僚)로 하여금 각자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게 하셨으니, 이는 사실 대단히 조심하고 삼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진실로 바르면 억울하고 그릇된 것이 모두 상달(上達)되어서 형옥(刑獄)이 넘치지 않고, 조정(朝廷)의 만사(萬事)가 올바른데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실로 바르지못하면 사람의 사정(邪正)을 분변할 수 없고, 일의 시비(是非)를 알 수 없어 조정의 만사가 하나라도 올바른데에서 나올 수가 없어서 어지럽게 진소(陳訴)하는 자가 죄과를 모면하기 위하여 성상(聖上)의 총명(聰明)을 현혹시키려하는 데에 불과할 것입니다.
옛날 태무(太戊)가 상곡(桑穀)에 대해서9222)나 고종(高宗)이 구치(雊雉)에 대해서9223)나 송(宋)나라 경공(景公)이 형혹(熒惑)에 대해서9224) 모두 마음을 바로잡고, 덕(德)을 닦아 재앙(災殃)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정심(正心)으로써 끝마무리를 신중히 하는 근본을 삼으시고, 성경(誠敬)으로써 마음을 바로잡는 근본을 삼아보지않고 듣지않는 곳에서도 삼가하시고, 옥루(屋漏)9225)에 혼자있을 때에도 시종(始終) 한결같이 하셔서 조금이라도 단절됨이 없게 하시면, 천지(天地)와 함께 위치(位置)할 수 있으며, 만물(萬物)이 잘 생육(生育)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이는 사실 우리나라 만세(萬世)의 무궁한 복(福)입니다”하였다.
상소(上疏)가 들어가자, 명하여 승지(承旨) 등에게 보여주게 하고, 말하기를,
“그 가운데 ‘공경함이 차츰 해이해집니다’라고 한 것은 반드시 본 바가 있어서 한 말일 것인데, 내가 해이해졌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경(卿)등은 각각 숨김없이 말하도록 하라. 내가 요즈음 며칠간 경연(經筵)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아무 까닭없이 정지한 것이 아니고 몸이 약간 불편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하니,
승지 등이 대답하기를,
“홍문관(弘文館)에서는 전하께서 그 당시 공경함이 해이해졌다하여 그러한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전하께서 후일(後日)에 혹 게으르게 될까염려하여 더욱 전하의 마음을 굳히기 위한 것입니다”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나의 병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내일은 조하(朝賀)를 받고 경연에 나아갈 것이니, 그렇게 알라.
또 내일은 홍문관에서 합사(合司)하여 오도록 부를 것이다”하였다.
註9131]대업(大業):왕업(王業).註9132]간난(艱難):고되고 어려움 註9133]창양(搶攘):어지럽고 문란함.註9134]민막(民瘼):백성의 폐단.註9135]아언(雅言):정직(正直)한 말.註9136]범위(範圍):관할권.註9137]관뉴(關紐):끈으로 된 문지도리. 즉 사기(事機)의 추요(樞要)를 뜻하는 말임 註9138]파돈(簸頓):손에 쥐고 까불며 놀림 註9139]탁약(橐籥):풀무. 사물의 계기를 뜻함 註9140]이장(弛張):활시위를 팽팽하게 하였다 늦추었다한다는 뜻으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엄하게 하고 너그럽게 해야 한다는 말임 註9141]기기음교(奇技淫巧):기묘한 솜씨와 지나치게 교묘한 것.註9142]승여(乘輿):임금을 뜻함.註9143]뇌정(雷霆):임금의 위엄 註9144]고황(膏肓):고치기 어려운 병.註9145]가의(賈誼)가 태식(太息)의 말을 하였고:가의(賈誼)는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신하로서, 당시에 국정(國政)이 해이(解弛)해져서 기강(紀綱)이 서지않으므로, 그 병폐(病癈)를 열거하면서, 길이 태식(太息:탄식)할 일이 여섯가지라고 한 것을 말함.註9146]위징(魏徵)의 십점소(十漸疏)가 있었습니다: 위징(魏徵)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신하로서, 태종이 수신(修身)과 치정(治政)함에 있어 차츰 태만해지자, 군주가 소홀히하면 작은 일이 점점 켜져 큰 화(禍)가 된다고 하는 10개항의 조짐을 들어 경계한 것을 말함.註9147]오제(五帝)와 삼왕(三王):오제는 소호(少昊),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순(舜)이고, 삼왕은 하(夏)나라의 우왕(禹王), 은(殷)나라의 탕왕(湯王), 주(周)나라의 문왕(文王),무왕(武王)임 註9148]반우(盤盂)에 잠(箴)을 새기고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인 공갑(孔甲)이 26편(篇)의 명(銘)을 그릇에 써서 경계로 삼은 고사(故事)를 말함 註9149]궤장(几杖)에 명(銘)을 새기는데: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장(杖)에 명(銘)을 새겨 자신을 경계한 것을 말함.《대대례(大戴禮)》에 무왕장명편(武王杖銘篇)이 있음 註9150]동용주선(動容周旋):몸가짐과 행동의 전체를 일컫는 말로, 동용(動容)은 얼굴 표정 또는 몸가짐의 자세, 주(周)는 원(圓)의 법칙(法則)에 맞게하는 행동이고, 선(旋)은 방(方)의 법칙에 맞게 하는 행동을 뜻한 것임 註9151]위포(韋布):시골 선비.註9152]분전(墳典): 삼분오전(三墳五典)의 준말로, 삼분(三墳)은 삼황(三皇)의 책, 오전(五典)은 오제(五帝)의 책을 말함.註9153]추향(趨向):탐구해야 할 방향.註9154]노불(老佛):도교(道敎)와 불교(佛敎).註9155]문사(文思):여기에서 말한 문(文)은 덕행(德行)이 외부로 나타남을 뜻함이고, 사(思)는 사려(思慮)가 깊음을 뜻한 것임 註9156]홍곡(鴻鵠)이 급히 옮김에 따라 심지(心志)가 굳어지지 못하게 될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맹자(孟子)》고자편(告子篇)상(上)에,“홍곡(鴻鵠:기러기와 고니)이 이르면 활을 당겨 쏘기만을 생각한다”라고 한데서 전용(轉用)된 말로, 목적한 바에 전념하지 않고 엉뚱한 생각을 한다는 비유로 쓰이는 말임 註9158]만기(萬機):많은 정무(政務).註9159]풍아(風雅):여기에서 말하는 풍(風)은《시경(詩經)》국풍편(國風篇)의 위풍(衛風) 기오장(淇奧章)을 가리키고, 아(雅)는 대아편(大雅篇)의 억장(抑章)을 가리킨 것임 註9160]정일집중(精一執中):《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의 ‘유정유일윤집궐중(惟精惟一允執厥中)’의 준말로서, 인심(仁心)과 도심(道心)의 관계를 정밀하게 살펴서 한결같이 도심을 지켜 진실하게 중도(中道)를 지킨다는 말임 註9161]고( 皐):고요(皐陶).註9162]경원(涇原)의 난(亂):당(唐)나라 덕종(德宗)4년(783) 이희열(李希烈)의 난을 말함 註9163]은(殷)나라의 본보기:은(殷)나라의 창업주(創業主)인 탕(湯)은 하(夏)나라의 걸(桀)을 주벌(誅罰)하고 은나라를 세웠으나, 탕의 후손인 주(紂)는 무도(無道)하여 무왕(武王)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을 말함.註9164]오훼(烏喙):부자(附子)의 별칭(別稱). 이는 정력제(精力劑)로 쓰이는 약초(藥草)이나, 독(毒)이 많아 흔히 생명을 잃게 됨 註9165]도유우불(都兪吁咈):군신(君臣)간의 토론을 뜻하는 말로서, 도유(都兪)는 찬성, 우불(吁咈)은 반대의 뜻인데, 요(堯)임금이 군신과 정사(政事)를 의논할 때에 쓰인 말임 註9166]청승(靑蠅)이 점점 극번(棘藩)에 이르고:《시경(詩經)》소아(小雅) 청승장(靑蠅章)에서 인용된 말로, 청승은 쉬파리 종류인데 소인(小人)을 뜻하고, 극번(棘藩)은 가시나무로 만든 울을 가리켜서, 즉 소인이 울 안에 우글거린다는 뜻임.註9167]백구(白駒)는 장차 공곡(空谷)으로 떠나게 될 것이니:《시경》소아 백구장(白駒章)에서 인용된 말로, 백구는 어린 말인데 군자(君子)를 뜻하고, 공곡(空谷)은 산곡(山谷)을 가리켜서, 즉 군자가 산곡에 은거(隱居)함을 뜻한 것임 註9168]사색(辭色):말과 표정.註9169]주비(周比),화동(和同),교태(驕泰):이는 주이불비(周而不比),화이부동(和而不同),교이불태(驕而不泰)의 준말로서, 군자(君子)의 마음은 보편적이고 편당(偏黨)이 없으며, 화협(和協)하고 아부하지 않으나, 소인(小人)의 마음은 교만스럽고 태연하지 못함을 말한 것임 註9170]건곤(乾坤):천지(天地).註9171]구준(寇準):송(宋)나라 태종(太宗)때 사람 註9172]심계(心計):심산(心算).註9173]화광동진(和光同塵):자기의 재덕(才德)을 나타내지않고 세속(世俗)을 따름 註9174]자색(紫色):간색(間色).註9175]주색(朱色):정색(正色).註9176]명류(名流 ):명사(名士).註9177]중망(衆望):인망(人望).註9178]여진여퇴(旅進旅退):식견이나 지조가 없이 남이 하는대로 휩쓸림 註9179]녹시(菉葹):도꼬마리 註9180]소소(簫韶):순(舜)의 음악.註9181]상복(桑濮):음란한 음악 註9182]급암(汲黯)이 적신(積薪)의 비평을 하게 된 것:급암(汲黯)은 한(漢)나라 무제(武帝)때 사람으로, 곧은 말을 잘하여 승진(陞進)시키는 일의 잘못됨을 논하면서, “폐하께서 신하를 씀은 마치 섶을 쌓는[積薪]것과 같아서, 뒤에 온 자가 윗자리에 있게 됩니다”라고 한 것을 말함 註9183]풍당(馮唐)이 호수(皓首)의 탄식을 하게 된 것:풍당(馮唐)은 한(漢)나라 사람으로 효행(孝行)으로써 알려졌는데, 문제(文帝)때 거기도위(車騎都尉)를 지냈고, 경제(景帝)때 초상(楚相)이 되었다가 면직(免職)되었으며, 무제(武帝)가 즉위하고서는 현량(賢良)으로 선발하였으나, 그때 나이 90세가 넘어 백발[皓首]로는 벼슬에 나가지못함을 탄식한 것을 말함.註9184]인아(姻婭):모든 친척.註9185]척완(戚琬):임금의 외척(外戚) 註9186]도리(桃李):자신이 채용한 문인(門人).註9187]호서(狐鼠): 소인(小人).註9188]참찬화육(參贊化育):천지(天地)의 화육(化育). 즉 자연계(自然系)의 생성(生成)을 돕는다는 뜻으로, 제왕(帝王)의 덕화(德化)가 자연과 부합됨을 일컫는 말.註9189]불씨(佛氏):석가(釋迦).註9190]양종(兩宗):교종(敎宗)과 선종(禪宗).註9191]공름(公廩):국고(國庫)의 곡식.註9192]여곽(藜藿):거친 음식을 가리킴.註9193]양장(羊腸):꼬불꼬불한 길을 말함 註9194]대비(大比):과거제도의 일종임註9195]원녀(怨女):시집못간 여자.註9196]광부(曠夫):장가못간 남자.註9197]이사(尼寺):여승(女僧)이 있는 절.註9198]시석(矢石):전쟁터 註9199]전묘(田畝):농촌 註9200]대희(大姬):진(陳)나라 호공(胡公)의 비(妃).註9201]음사(淫祀):부정(不正)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註9202]도(翿):새깃으로 만든 춤출 때 쓰는 도구 註9203]좌도(左道):옳지못한 도 註9204]공창(空唱):무당들이 귀신의 소리라고 하면서 입으로 휘파람처럼 내는 소리. 이 소리에 의하여 길흉 화복을 판단하여 점을 치며, 죽은 사람의 음성과 소식을 듣는다고 함註9205]기은사(祈恩使):조선조때 선원전(璿源殿)에서 의장(儀仗)을 엄하게 하고, 무당,광대를 불러 악기(樂器)를 갖추어 울리며 왕가(王家)의 무궁한 복을 빌던 행사를 주관하던 신하.註9206]치중(輜重):짐바리.註9207]중려(重黎):전욱(顓頊)의 신하. 중(重)은 남정중(南正重), 여(黎)는 화정여(火正黎)임.註9208]무고(巫蠱)의 난(亂):한(漢)나라 무제(武帝)때 방사(方士), 무격(巫覡)의 무리가 궁인(宮人)을 고혹(蠱惑)시켜 목인(木人)을 궁중(宮中)에 묻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옥사(獄事)를 일으키게 된 것을 말함 註9209]우서(虞書):《서경(書經)》의 편명.註9210]분경(奔競):대관(大官)이나 세도가(勢道家)에 출입하면서 엽관(臘官)이나 이권(利權)운동을 하는 것.註9211]아욱[葵]을 뽑아 버리고 베틀을 제거하여:《사기(史記)》에 보면 공의휴(公儀休)는 노(魯)나라 정승이 되어, 아내가 베틀을 놓고서 비단을 짜는 것을 보고 노하여 베틀을 던지고 아내를 쫓아 보냈으며, 밥을 먹을 때에 아욱국을 보고서 크게 성을 내어 마당에 심은 아욱을 뽑아버리고 말하기를, “내가 국록(國祿)을 먹는데, 어째서 집에서 비단을 짜고 아욱을 심어 여공(女工)과 전부(田夫)의 이익까지 빼앗는가?”하였음 註9212]농단(隴斷)의 이익을 설치하고:《맹자(孟子)》공손추(公孫丑) 하(下)에, “농단(隴斷:높은 언덕)에 올라가 좌우를 둘러보고 시장의 이익을 독차지한다”고 한데에서 인용된 말로,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임.註9213]사조(詞藻): 시문(詩文).註9214]근유(瑾瑜):아름다운 옥. 학문을 비유한 말임 註9215]상관(象官):관상감(觀象監)의 관원.註9216]칠정(七政):일(日),월(月)과 오성(五星).註9217]오활(汚闊):현실에 맞지않음.註9218]부과(浮誇):사실보다 과장함. 註9219]진질(疹疾):열병(熱病).註9220]방촌(方寸):마음 註9221]부험(符驗):징험(徵驗).註9222]태무(太戊)가 상곡(桑穀)에 대해서:태무(太戊)는 은(殷)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으로서, 이때 상(桑)과 곡(穀) 두 가지 나무가 뜰에 생겨났는데, 하루 저녁에 두 손아귀에 차도록 크므로, 태무가 두려워하여 신하 이척(伊陟)의 말을 듣고 덕을 닦자, 두 나무가 같이 말라죽었다는 것이《사기(史記)》에 보임.註9223]고종(高宗)이 구치(雊雉)에 대해서:《서경(書經)》고종융일편(高宗肜日篇)에서 인용된 말로, 고종(高宗:무정(武丁))이 융제(肜祭)을 올리는 날에 꿩[雉]이 와서 운 이변(異變)을 가리킨 것으로서, 이는 제사(祭祀)의 법도(法度)를 지키지 못한 반응이라고 함 註9224]송(宋)나라 경공(景公)이 형혹(熒惑)에 대해서:송(宋)나라 경공(景公)때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침범하니, 경공이 이를 근심하여 사성(司星) 자위(子韋)를 불러 물었는데, 경공이 자위와 더불어 말하면서 덕(德)있는 말 세가지를 하였더니, 자위가 “하늘이 반드시 인군(人君)께 세가지 상(賞)을 내려서, 오늘 저녁에 마땅히 형혹성이 30리를 물러갈 것입니다”하였는데, 과연 이 날 저녁에 형혹성이 30리를 옮겨갔다고 하는 고사 註9225]옥루(屋漏):방안의 서북쪽 구석을 가리키는데, 이 곳은 방안에서는 후미진 곳으로서, 남이 잘 보지못하는 곳을 말함
○弘文館副提學成俔等上疏曰:
竊聞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而歲功得成, 人君爾德仁義撫御萬民而國家得安。 大哉! 人君之位也。 萬務之機, 而萬事之所由萃, 賞罰生殺之樞, 而治亂存亡之所由生也。 夫天之所眷命畀位者, 非與之可安之地而娛樂之也, 知其爲難而以難處之也。 知其爲難而以難處之甚當, 則大安大榮而積美之源也。 然善始者雖多, 愼終者蓋寡, 創業雖易, 而守成尤難, 臣等請言其故。 夫大業, 肇之非一日, 成之非一朝。 百戰百勝, 得之於艱難搶攘之中, 惟恐姦猾睥睨於其間。 是故訪問朝政, 講求民瘼, 察納雅言, 勤勞庶務, 迨夫國已安也, 化已洽也, 刑罰措也, 紀綱立也, 方隅夷(激)〔徼〕盡入乎版籍, 英雄材傑盡在乎範圍也, 發號施令, 從欲而治, 如毛之遇風, 火之燎原而不可遏也。 於是簸頓關紐, 嬉弄櫜籥, 動靜不以時, 弛張不以節, 一喜怒無傷也, 一嗜欲何害也, 廣廈細氈得以安其體, 娥媚粉頰得以蠱其心, 繁絃脆管得(其)〔以〕蕩其心, 珠翠錦繡得以侈其欲, 珍禽奇獸得以悅其目, 遊豫田獵得以發其狂, 凡所謂奇技淫巧爭集於前, 則姦侫之徒又從而贊成之, 以致國勢之岌岌。 譬如九層之臺風雨已搖其巓, 百圍之木蟲蠧已穴其中, 則其傾覆朽敗, 終不可救矣。 是故忠義之士炳知幾先, 預防禍患, 時世若可小安矣, 乘輿無甚失德矣, 而危言極諫以激雷霆者, 非要其名譽也, 非謗其朝廷也, 冀於萬一之中以藥膏盲之疾也。 漢文帝明主也, 賈誼有太息之言, 唐太宗賢君也, 魏徵有十漸之疏。 向使二君不聽二人之言, 則漢之爲漢、唐之爲唐, 未可知也。 今我殿下睿知天縱, 淸明在躬, 言無過言, 動無過擧, 風俗庶已醇厚, 彝倫庶已得敍, 典章文物庶已備具, 異端邪說庶已摧沮, 賢俊庶已登朝, 奸邪庶已屛迹, 而五帝、三王之治, 指日可待。 然而弊之可袪者未盡袪, 害之可息者未盡息, 事未盡合乎宜, 人未盡就乎正, 豈非聖代之一欠乎, 而況天道十年則有周, 人事十年則有變, 《易》稱 ‘婦人之貞, 十年必反。’ 殿下卽位, 於今已十年矣。 夫患常生於忽微, 而志亦戒乎漸習。 苟有一念之或差, 一私之或起, 則安知今日之憂勤不爲他日之怠忽, 今日之恭儉不爲他日之侈靡, 《書》曰: “愼終于始”, 又曰: “惟新厥德, 終始惟一”, 《詩》云: “靡不有初, 鮮克有終。” 此人主之所當致意, 而中材之所未免也。 臣等謹疏治道八事, 陳列于左, 伏惟殿下留神垂覽焉。 臣等竊聞人君之道莫大於學也。 學與不學, 而一心之邪正係焉, 天下之治亂彰焉。 何以言之, 如好學, 則君子欣慕而願立於朝, 如不好學, 則小人放肆而欲操其權, 可不愼哉, 是以古之聖王, 必以學爲務, 朝以聽政, 晝以訪問, 夕以修政。 尙賴左右賢德之士訓告敎誨之力、涵養薰陶之功。 故聰明日開, 志氣日强, 材器日成, 治效日著, 在我之德日新又新, 而自造於罔覺之地矣。 然猶懼其或怠, 則盤盂有箴, 几杖有銘, 其所人容周旋起居步趨, 無非正道正學而行正事也。 大抵帝王之學, 與韋布不同, 該洽墳典非學也, 雕鎪物象非學也, 涉獵記誦非學也, 割裂粧綴非學也。 惟當味聖賢之言以求義理之正, 察古今之變以驗得失之機, 而反之於身以踐其實, 然後爲學之極功也。 苟不辨其趨向而務求博雜, 蔽於高遠, 則由是而之佛老, 蔽於險怪, 則由是而之鬼神, 蔽於智巧, 則由是而之術數, 蔽於浮躁, 則由是而之詞賦, 可不戒哉, 殿下沈潛六經, 硏窮治道, 一日之間三御經筵, 又有夜對, 每與講官從容顧問, 學問之精微, 文思之灝噩, 如日之方昇, 如川之方至而不能已也。 然臣等竊恐一曝未幾而十寒易至, 鴻鵠遽移而心志不固。 殿下春秋漸盛, 寅恭漸弛, 念駒隙之云邁, 厭萬機之浩繁, 則必謂: “吾學已富, 吾治已隆, 可以高枕而無虞”, 屢停經筵, 稀接正士, 而一入於宴安遊逸之地, 則終爲私欲之所溺矣。 昔衛武公年九十餘, 猶日勅其臣以箴警己之過失。 故切瑳琢磨之功, 道學自脩之益, 播詠於風雅, 而詩人有終不可諼之語。 此往古賢君愼終之大德也。 伏願殿下躬踐履篤行之實, 致修齊治平之效, 勉强惕厲, 進進不已, 則與精一執中之學, 無以異矣。 臣等竊聞, 《書》曰: “惟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傳曰: “諫者福也, 諛者賊也。” 夫天下之務至廣也, 軍國之機至重也, 雖明主聽斷賢臣謀議, 而思(厲)〔慮〕之失亦未能免也。 一失而不能救, 則爲害不細。 必藉忠良之士, 知無不言,隨事箴規, 然後事行而不悖, 太平之治, 終可保也。 孔子曰: “天子有諍臣七人, 雖無道, 不失其天下, 諸侯有諍臣五人, 雖無道, 不失其國”, 子思言於衛后曰: “君之國事, 將日非矣。 君出言, 自以爲是, 而卿大夫莫敢矯其非, 卿大夫出言, 自以爲是, 而士庶人莫敢矯其非。 君臣旣自賢矣, 而群下同聲賢之, 則善安從生,” 是故唐、虞之際, 上有堯、舜之君, 而皐、夔、稷、契之徒交相責難而不已。 末世庸暗之君驕愎自是, 而危亡之禍立至。 夏禹置鼓而昌, 周厲監謗而亡。
唐太宗三日不聞諫言, 必責輔臣, 而終致貞觀之治效, 德宗深惡諫諍之臣, 以爲賣直取名, 而卒啓涇原之亂。 由是觀之, 從諫者未有不興, 愎諫者未有不亡。 殷鑑昭然, 載在方策, 爲人主者, 豈不知聽諫之爲是、拒諫之爲非, 而正直之言常忤於耳, 邪謟之說易合於心者, 良由汨於私欲不能分辨曲直。 譬如人知烏喙之足以殺人, 嗜之不已, 終至於殞身而後已, 不亦可哀之甚乎, 殿下卽位以來, 求言如渴, 從諫弗咈 朝臣之言事者, 至於加爵, 命以褒之, 雖或失當, 而優容報罷, 不加罪責, 雖都兪吁咈之世, 無以過也。 然臣等竊恐人心反覆之無常, 聖狂轉移之甚易。 殿下若恃治安, 漸肆志慮, 人有所諫, 多不聽納, 或稱商量, 遲疑不斷, 則靑蠅漸至乎棘藩, 白駒將已乎空谷, 不可不愼也。 聽人之言, 雖不可言言而信之事事而從之。 然謇謇諤諤執奏不已者, 非爲身謀, 皆爲國計。 若無忠君愛國之念, 何苦冒萬鈞之重而不計摧折之禍哉, 伏願殿下知君子責難之恭, 悟小人逢迎之術, 先平其心, 以審曲直, (街)〔假〕借辭色, 使得盡言, 言若可採, 卽許允從, 毋持猶豫之心, 以稽從善之機, 殿下愼終之道, 亦無大於此者也。 臣等竊聞小人之爲國家患也久矣。 《易》曰: “開國承家, 小人勿用”, 《書》曰: “惇德允元, 而難壬人。” 《詩》之《小旻》ㆍ《巷伯》皆極論其狀。 孔子於周比、和同、驕泰之屬, 未嘗不拳拳言之。 夫君子小人之不相無, 猶天地之不能無陰陽。 有陽必剛, 剛必明, 有陰必柔, 柔必暗。 苟或重陰窮冱, 則靑天白日每爲所掩而不昭, 此歷代所以多風雨晦暝之辰而少乾坤光霽之日也。 大抵小人之情狀不難知也, 但患人主不能辨耳。 姦邪謟侫以飾其容, 華言令色以文其身, 小節僞行以欺其俗, 趨走急速以辦其能, 猜忍忌克以害其賢, 詖險謫僻以醜其正, 讒謟導諛以售其進, 回互隱伏以藏其術, 千態萬狀, 一以迎合進取爲先。 惟君子則不然。 用心公平而持身厚重, 不爲詬激之論表暴之行, 而人皆知有長者之風。 從義而不從君, 而況於權臣乎, 從道而不從父, 而況於他人乎, 此君子小人操術之不同也。 人君不能辨其眞僞, 則是非邪正相與混淆, 而天下之事不復可言矣。 大姦似忠, 大詐似信。 君子之似小人者百無一二, 而小人之似君子者往往有之, 此尤不可不深辨也。 知人之術, 蓋亦難矣。 以寇準之賢而不悟丁謂之姦, 當時知者獨李沆一人而已。 以司馬光之賢而不知王安石之姦, 當時知者獨呂誨一人而已。 蓋此二人, 文足以飾非, 才足以驚世, 雖明智之君不免爲所惑, 而況昏庸之主喜其順己而無違, 則倚以爲周ㆍ召。 如桑弘羊以心計惑武帝, 宇文融以精敏惑玄宗, 盧杞以口才惑德宗, 蔡京以幹能惑徽宗, 秦檜以僞節惑高宗, 自古小人之能誤國家者, 豈無所自耶, 大憸邪罔上之態, 觀人取人之法, 備在簡策, 聖鑑所洞燭而無遺矣, 第恨在下之人不能副上之意。 今經筵朝啓之際, 臺諫執法論事, 駁覈人物, 殿下顧問左右, 欲聞至論, 或依違兩端觀望希合, 或心知其非而含糊不發, 或阻格其言而曲爲彌縫。 夫以柱石大臣, 不思輔弼之任, 和光同塵欲以取媚於人, 此臣等之所嘗痛心者也。 惡紫恐其亂朱, 惡稊稗恐其害穀。 用人而不先卞姦, 則所任未必賢, 而賢者不得進, 所賢未必非姦, 而姦者反進用。 自古人主孰不知姦侫之爲害前代之敗績, 然覆轍相尋而不自悟, 其故何歟, 從傍觀棋, 能知勝敗, 當局而坐, 漠然無措, 可不戒哉, 伏願殿下知吉凶消長之理, 究進退存亡之機, 明以察人, 剛以去姦, 不使闒茸之徒得容於朝廷之上, 則國家之福, 其可旣乎, 臣等竊聞古之聖王所以致治於天下者, 無他術也, 能任人而已。 何謂任人, 內而公卿大夫士, 外而州府郡縣, 皆稱其任而已。 何鎰稱其任, 賢者在位, 能者在職而已。 然知人能官, 堯、舜爲難, 聽言觀行, 孔子所戒。 知而不能擇, 則駑駘任於騏驥; 擇而不能精, 則碔砆混於瓊瑤。 人君察於斯理, 而能任以致治, 則垂紳端委, 行其所無事, 而坐收成功。 苟或反是, 則雖有賢才, 不爲之用, 人主孤立而無依, 則必曰: “非我也, 世無人也”, 而可乎, 夫英雄俊傑無世無之, 所患用之不得其道。 不得其道有三, 不過 ‘驟擢而用之’ 也, ‘聞名而不求其實’ 也, ‘任意而不從衆’ 也。 古者論定而官, 任官而爵, 則非驟而遷之也。 年鈞度德, 德均以卜, 則非聞名而不求其實也。 左右皆曰賢, 未可也, 大夫皆曰賢, 未可也, 國人皆曰賢, 未可也。 必見賢焉, 然後用之, 則必從公議, 而不任胸臆也。
苟以一事之合宜一言之愜意, 不次而付以大任, 則後知其無狀, 其植根已固名位已定, 未易黜而退之也。 凡人之與朋友處也, 必素與交親, 備詳本末, 然後知其心術之邪正, 而況君之於臣, 一顔色一交會之間哉, 是故用人莫如名流衆望。 夫名流, 德行所萃, 衆望, 耳目所屬, 固可超擢而無疑。 至如無毁無譽, 旅進旅退之人, 不可不計勞績之先後也。 今之用人一遵資格, 名流衆望多滯而不進, 旅進旅退有時而或升, 伺候者爭先着鞭, 退托者沈於末僚。 是猶芝蘭與菉箷同室, 簫韶與桑濮同音。 銓曹亦局於歲月, 雖有不羈卓越之士, 不得隨才而注擬, 此汲黯所以有積薪之譏, 馮唐所以發皓(酋)〔首〕之嘆也。 任銓曹者苟能不私姻婭, 不避仇怨, 惟德是擧, 惟賢是用, 則賢否自然區別而各就其當矣。 如晋之山濤、唐之崔祐甫、宋之寇準, 皆善於銓注, 故時稱得人。 今之吏曹亦不可不愼擇而委任之也。 苟不論賢能, 徒以勳勞戚畹之舊而遽任之, 則弱者迷於去就, 强者自擅威福, 桃李耀於私門, 狐鼠托於城社, 非國之利也。 伏願殿下博採公議, 廣詢物望。 其有恬退不伐, 則其志可尙, 謙恭不伐, 則其志可取, 重厚簡默, 則有容人之量, 廉潔淸諒, 則有介石之操, 必考其德行而進之, 使僥倖之徒不得冒進, 則庶績咸熙, 而國家自安矣。
臣等竊聞宇宙之間, 一理而已。 天得之爲天, 地得之爲地, 凡有生於天地之間者, 必得之爲性。 聖人於是能盡其性, 修己而治人, 立法而垂世, 成參贊化育之功, 而無一物之不得其所也。 佛氏者, 非聖人之道而別爲一端。 聞其言則淸淨近理, 究其實則鹵莾無稽, 實是正道之荊榛彝倫之蟊賊也。 而時君世主未免趨而信之, 相與淪入於禽獸之域而不自知, 如魏、梁之事是已。 殿下天資高明, 學問純粹, 其於異端邪說之利害, 固已灼知而無疑矣。 去年罷祝壽齋, 今年除三司薦供之物, 至令臣等書歷代闢佛章疏以啓, 中外欣忭, 皆謂不世出之主將大有爲之時也。 近臺諫將圓覺寺照剌赤、佛堂澡豆匠、洛山寺移路禁漁及寺社收稅田等事, 屢瀆聖鑑, 傳曰: “祖宗之法, 難以遽改”, 臣等不勝缺望。 所謂注者, 用之當今而不悖, 垂之後世而無疑, 固不可以輕議。 然或有妨於政, 則未免更而張之。 況出於先王一時之令而非《大典》久載之法, 則改之何難, 祛之何害, 臣等請陳其弊。 照剌赤是宮禁掃除之人, 非寺社之所宜有, 澡豆乃盥類所供之物, 非髠首之所宜用。 今以各司有實之人充異端無庸之徒。 然則官府之疲弊、人物之憔悴, 未必不由乎此也。 至如寺之收稅, 是何功也, 夫國之有田, 田之有稅, 所以供朝廷百執事之用, 而坐使不耕之徒又從而食民之膏血, 今兩宗所屬寺社之田, 無慮九千餘結。 以此充軍資賑窮乏, 則可以濟萬民之命, 無益而耗害公廩, 莫甚於此也。 江原道山川險阻, 田疇磽瘠, 年穀屢失豊稔, 人物易至飢饉。 山郡則多賴藜藿, 海濱則專仰魚鹽, 雖豊年樂歲, 未免轉于丘壑, 人煙鮮少, 道里窵遠, 蕭條郵驛, 不過蝸廬數落而已, 計一道戶口, 則反不如下道之大邑, 計一縣蓄積, 則反不如下道之富家, 其殘弊有不可勝言。 今以洛山寺之故, 移曲道路, 使人馬不堪羊腸之苦, 禁民捕魚, 欲印海爲放生池。 學悅又於江陵大開水田, 雖以新墾爲名, 其實奪人舊業, 遠近嗷嗷, 孰不痛憤, 夫緇徒身無徭役, 安坐飽暖, 亦云足矣, 而勦絶民生, 又不得蘇息, 昔新羅王崇信釋敎, 禁境內不得漁獵, 高麗多以土田施納寺社, 史筆書之, 貽笑後代, 安有聖明之朝, 而尙循衰季之軌乎, 又有甚於此者。 每當大比, 分遣禮曹郞官於兩宗, 依文武科選取僧人, 吏曹又從而爵之, 以給告身, 其因緣請托, 靡所不爲也。 先王之制, 內無怨女, 外無嚝夫。 故生齒日繁, 以裨風化。 殿下於近年命撤尼社, 驅出城外, 然未有明禁, 藺其弊。 故處女寡婦剃髮者相繼不絶, 或憑勸善, 或托遊山, 邀朋結隊, 與僧雜處, 未免有淫穢之行, 敗亂其家俗也。 凡此數事, 無益於國而有害於民。 朝廷皆以爲非, 諫官爭以爲言, 而殿下一無所納, 因仍不廢, 臣等之惑尤甚。 夫樹木者, 必先黑壤, 灌泉水, 又當踈剔荊棘, 剪刜茂草, 不張(王)〔旺〕於其間。 不然則樹木雖美, 終爲薈蔚所斃矣。 闢佛之道, 何以異於此, 苟不絶其根本, 則害民蠧政之端, 無時而可已也。 若以此輩驅之矢石, 則皆爲勁卒, 置之田畝, 則皆爲良農, 使各執所業, 則皆爲良工, 使男女相配以成産業, 則皆爲良民, 而坐耗衣食以亂國政, 臣等不知其可也。 大抵論其害, 則無父無君而大有累於名敎, 如救其弊, 則莫如人其人、火其書、廬其居, 明先王之道爾之。 然救而不盡其力, 則將有不塞不流、不止不行之弊。 伏願殿下廓揮剛斷, 一切痛禁, 則亦生靈之一大幸也。 臣等竊聞先王之疆理天下也, 扶彝倫而就諸道, 務民義而致其宜。 自商俗好鬼, 而酣歌恒舞之風始起, 降及于周。 陳國襲大姬之化, 肇爲淫祀宛丘之下, 執翿婆娑, 其淫靡之俗, 與鄭、衛無以異也。 聖人創爲法制, 外而天地、山川、丘陵、城隍, 內而祖禰昭穆戶竈門霤, 其祭之有制, 事之有道, 未聞引野外淫昏凶鬼於家室也。 臣聞左道亂俗者, 罰之無赦 妖言惑衆者, 殺之無赦。 今世之人爭信鬼神, 凡有吉凶禍福, 一聽於巫, 或畫像掛錢, 或邀魂入室, 或趨聽空唱, 或親祀城隍, 或施納奴婢, 是皆聖朝所禁而著於《續典》者也。 殿下深知其弊, 又令法司盡刷巫覡, 放于城外。 伏覩近日禁令稍弛, 自城外漸還入城, 誑誘婦人, 糜費酒食, 或稱度厄, 或稱救病, 雖大家巨室皆邀而致之, 競爲淫酗, 恬不知愧, 未聞一人以此而獲罪, 鼓笛歌舞不絶於街衢闤闠之間, 此臣等之所惑也。 傳曰: “以身敎者從, 以言敎者訟。 所令反其所好而民不從。” 今星宿廳尙在城內, 祈恩使春秋不絶, 以此而禁民, 不亦左乎, 臣等嘗見祈恩之行, 自京都至開城, 自開城至積城、楊州之境, 騎馬者不下數十人, 其僮僕輜重倍之, 或行或留, 淹滯不發, 守令鞠躬屛氣, 迎入惟勤, 或厚餼廩, 或行賄賂, 惟恐獲譴於萬一, 雖拜舞跪起亦不得辭, 弊之大者, 無踰於此也。 至如星宿廳, 是何神也, 是何祀也, 神非明神, 祀非正祀, 亦王政之所當先去者也。 孔子曰: “敬鬼神而遠之”, 又曰: “非其鬼而祭之, 謟也”, 又曰: “獲罪於天, 無所禱也。”
夫不敬則褻, 不遠則昵, 非所祭而祭之則瀆, 非所禱而禱之則謟。 昔重黎好巫而家爲巫史, 漢武惑神而終有巫蠱之亂, 此已然之明鑑也。 伏願殿下廓揮剛斷, 整頓風俗, 使邪淫妖妄無容於聖明之下, 此亦臣等之所望也。 臣等竊(謂)〔聞〕禮義廉恥, 是謂四維, 四維不張, 國乃滅亡。 自古善爲國者, 舍是四者, 無以爲治, 宜乎! 管子言之以相齊桓, 賈誼取之以喩漢文也。 嗟乎! 世道日降, 人心不古。 古之士也恭, 今之士也蕩, 古之士也淸, 今之士也墨, 古之士也直, 今之士也詐, 所謂禮義也, 廉恥也, 廢盡無餘, 而人不知所操矣。 士風旣不美矣, 則民俗安得而醇, 民俗旣不醇矣, 則朝廷安得而尊, 臣等請以當今目覩之弊而言之。 《虞書》曰: “百僚師師, 群后德讓”, 文王之治岐也, 士讓爲大夫, 大夫讓爲卿。 今也不然, 後進蔑視先輩, 下僚慢易座上, 爲先輩座上者, 亦不嚴敬以率下。 不特此也, 臺諫論人過失, 其人不自引咎, 皆曰: “此人有嫌於我, 紛紜告訐”, 必相排擊, 所謂禮義者安在, 君臣之分當嚴於視朝之際, 而今之百僚入庭不趨, 排班無序, 傾耳注目, 私語不休, 至如衣冠環佩、進退俯伏, 無恭謹整肅之容, 所謂禮義者安在, 上有求於下, 下無求於上, 上有所使則下不辭其勞, 臣之職也。 今人奔競以爲業, 伺候以爲名, 或憑親戚, 或稱古鄕, 求使命甚於求官, 利之所在, 則經營請托無所畏避, 利之所無, 則百計千慮必欲謀免, 所謂禮義者安在, 夫宰相大臣, 君上之所倚, 一國之所慕, 其任固不輕也。 古者有如妾不衣帛,馬不食栗者, 有如拔葵去織,不與民爭利者, 有如不受人金,淸白遺箴者。 在我祖宗朝, 朝臣不畜財, 宰相不言利, 有所顧畏而不得自恣。 今也貪墨成風, 利欲無厭, 以大臣而設隴斷之利, 以三公而餞守令之行。 苞苴行於白晝, 賄賂輳乎權門, 干祿交譽, 無人不爲。 向之窮苦在野者, 一朝驟登淸要, 則田連阡陌, 財藏巨萬。 殖貨者謂之聖人, 安貧者謂之不材, 轉相倣効, 不知紀極。 室宇有制, 而營繕不止, 婚姻有法, 而奢僭無已, 衣服有等, 而鮮侈日滋, 由是百物貴少, 市瞰踴, 人心之淆簿, 習俗之奢靡, 莫此爲甚。 然則所謂廉恥者安在, 大抵國家之患, 莫大於士風。 士風不正, 則見利而忘義, 錐刀之末, 將盡爭之, 吮癕舐痔靡所不至矣。 伏願殿下躬行仁義, 益敦儉素, 明飭有司, 申嚴典章, 其有犯禁, 勿論權勢, 悉坐以律。 然其要莫若唱淸議於朝廷之上, 使士大夫人人自高於名節。 如有頑鈍無恥不容於淸議者, 將不得齒於縉紳, 親戚以爲羞, 鄕黨以爲辱。 夫然則士之有志者, 寧飢餓而不敢以喪節, 寧阨窮而不敢以敗名, 廉恥之俗成而禮讓之風起矣。 臣等竊楣不遠人, 理不外事。 凡理之散在萬事者, 莫不有本末、精粗、先後之序焉。 所謂經術者, 本也精也而所當先也。 文藝者末也粗也而所當後者也。 譬之飮食, 經術, 五穀之精者也, 文章, 膏膳之美者也, 雜藝, 則果蓏菜茹之凡有味者也。 蓋人非芻豢, 則不得生矣, 至如果蓏菜茹, 雖甘酸芳辣不同, 而莫不有適於口, 則莫不養其心腹。 是故古之學者, 以經術正其心, 以文章發其氣, 兼通雜藝, 以致格物窮理之學。 聖人於是立之學校而建其師長, 開之《詩》ㆍ《書》而游以六藝, 興其賢者能者, 各盡其業, 所以居之有處, 官之有路, 取之有術。 故人才日盛而致太平風化之美也。 今也敎化陵夷, 正學不傳, 不知六經悉本乎吾心, 而高者騖於虛遠, 卑者安於賤陋, 徒以句讀訓誥爲進取利祿之資。 縱國家設講經之法, 臨時塗附口舌者, 特爲後日之筌蹄, 未聞一人融會貫通深識義理也。 夫學校乃根本之地, 儒者卽敎化之源。 而切劘講論之失其道, 藏修游息之失其宜, 未見菁莪棫樸之材, 故罕有孝悌忠信之人。 此無他, 師儒不得其人, 勸課未盡其方, 函丈之間名實不副, 此今日之所可恨者也。 今世之人, 以文章爲糟粕, 以文士爲疣贅, 爲文士者亦不致意, 得其皮而反遺其髓, 局乎小而不圖其大。
雖有可用之人, 隨風而靡, 無復奪發, 可勝嘆哉, 山高而多木, 淵深而生珠, 苟或內無所養, 則外無所施。 古之名臣碩輔, 孰不學以爲文, 文以應務, 比如富人多蓄財穀, 則自然豐潤, 光華四達, 貧人救身之不假, 奚有於所用, 而況我國古稱文獻之邦, 事大交隣必賴詞藻之華, 文之不輕至於如此, 而未聞一人懷瑾握瑜以鳴國家之盛, 此今日之所可恨者也。 此皆大者, 固當先慮。 至如音律, 所以和洽神人, 而雅俗二樂皆失其倫, 譯學所以交通華夏, 而吏文漢語罕見其精, 醫士無十全之効, 象官迷七政之侯, 曾謂太平守文之世, 而有如此制度之未備者乎, 臣等嘗究其弊, 則必有所由矣。 大抵無能者謂之有德, 多才者謂之反道, 通六經則以爲迂闊而難任, 富文學則以爲浮誇而無實, 學文尙或如是, 而況於雜術乎, 由是拘於才藝, 不蒙顯擢, 顧見諸輩之歷敭華秩者, 爭相嘲笑, 故視其所業如苦疢疾。 然則無惑乎人材之日尠也。 在世宗朝, 經學則黃鉉、尹祥、金鉤, 譯學則金何、李邊, 吏文則金聽, 音樂則朴堧, 其餘少才賤術, 莫不各有其人, 其威儀文物之盛, 至今賴以爲治。 伏願殿下崇重學校, 尊禮師儒, 至於雜藝勸勉誘掖, 以導其志, 則儒者分內之事, 孰不樂趨乎, 不然則雖日撻而月罰之, 有所不爲矣。 臣等又聞治國之道, 莫大於愼終, 愼終之要, 尤莫大於正其心也。 夫心之寓於人也, 至微至隱, 至大至顯, 由方寸而該括萬理, 由一念而發見萬事, 操之甚艱, 而舍之甚易。 必須勝私去慾, 明善復初, 然後心可存而身可安也。 凡人尙不可不致其功, 而況以一人之身莅萬民之衆者乎, 大抵人主居深宮之中, 其心之邪正, 有不可得而窺者。 然符驗之著於外者, 常若十手所指, 十目所視, 而終不可掩。 是故古先哲王兢兢業業, 儆戒持守, 如對神明, 如臨深谷, 敬以守之, 誠以莅之, 不敢有顚沛斯須之可忽也。 殿下近因寒暑失序, 下敎責己, 又令百僚得訴冤, 此實翼翼之小心也。 心苟正矣, 則冤枉畢達, 刑獄不濫, 而朝廷萬事莫敢不出於正。 心苟不正, 則不能辨人之邪正知事之是非, 朝廷萬事無一得出於正, 而紛紛陳訴者, 不過謀免罪愆, 以惑聖聰而已。 昔太戊之於桑穀, 高宗之於雊雉, 宋景之於熒惑, 皆能正心修德, 以弭災咎。 伏願殿下以正心爲愼終之本, 以誠敬爲正心之本, 戒愼乎不覩不聞之地, 恐懼乎屋漏幽獨之際, 終始如一, 無少間斷, 則天地可位, 萬物可育, 而實吾東方萬世無疆之休也。
疏入, 命示承旨等, 曰: ‘其寅恭漸弛’ 之語, 必有所見而發, 予所以弛之者何事歟, 卿等其各無隱。 予比來數日不御經筵, 此則予之過也。 然非無故而停之也, 乃微有不豫而然耳。” 承旨等對曰: “弘文館非謂殿下當時寅恭怠弛而言之之也。 慮恐殿下後日之或怠, 益堅殿下之心也。” 傳曰: “予疾不緊, 明日受朝賀, 御經筵, 其知之。 且於明日召弘文館合司來。”
성종 118권, 11년(1480 경자/명성화(成化)16년) 6월 12일(신유) 2번째기사
상산군 황효원이 이유기의 딸과의 혼인 허락 요청에 관해 상소하다
상산군(商山君) 황효원(黃孝源)이 상소하기를,
“이유기(李裕基)가 죄를 지었으므로 그 딸자식을 신에게 급부(給付)하시었는데, 그대로 외조모(外祖母)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신이 홀아비로 있어 배우자를 구하는데 모두 늙었다하여 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의 어미가 한스럽게 여겨 그 외조모와 더불어 매작(媒妁)을 통하여 드디어 혼례를 이루었고, 또 천은(天恩)을 입어 면방(免放)되어 전연 혐의가 없는 지 오래입니다.
병신년10633) 봄에 미치어 홍윤성(洪允成)의 가속(家屬)이 적(嫡)을 다투므로 헌부(憲府)에서 청리(聽理)하였는데, 홍윤성이 이미 죽었으니 질문할 근거가 없으므로 공경히 상지(上旨)를 받들었는데, 무릇 전후실(前後室)이 있는 자는 아울러 생시(生時)에 추문하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신(臣) 자신에게 추급(推及)하게 된 것이며, 추문하여 끝까지 핵실하여 하자를 구하였으나 혼례는 정당합니다. 그러므로 다만 급부(給付)한 것으로 사연을 만들어 박의(駁議)하여 계달하였는데, 성상께서 성심(聖心)으로 재탁(裁度)하시어 적처로 논하라고 명하시었습니다. 그런데 대간(臺諫)이 논박(論駁)하여 말하기를, ‘황효원은 공신(功臣)이니, 난신(亂臣)의 딸로 아내를 삼을 수 없다. 마땅히 첩으로 논하여야 한다’합니다.
천한 여자가 공신에게 시집가서 천인(賤人)을 면한 자가 하나가 아닌데, 홀로 신의 아내가 신이 공신이라는 까닭으로 적처를 강등하여 첩이 되니, 신이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는 것은 오래 가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은 짧다’하였습니다.
또 승음(承蔭)10634)하는 법이 다만 직손(直孫)에게 미치고 외손(外孫)에게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황보인(皇甫仁), 박팽년(朴彭年)의 외손(外孫)이 혹은 좋은 벼슬을 지내었고, 혹은 양시(兩試)에 올라 현달하였는데, 신의 자녀는 출생하기 전의 외조(外祖)가 범죄한 것때문에 의관(衣冠)의 집과 더불어 혼인을 맺지 못하게 되니, 일이 궁하고 형세가 절박합니다.
천은을 바라건대, 신의 자녀로 하여금 인류(人類)에 복귀하여 사족(士族)의 집과 혼인하도록 허락하소서. 지극한 소원을 이기지 못합니다”하였다.
명하여 대신(大臣)에게 보이니, 정창손(鄭昌孫), 한명회(韓明澮), 심회(沈澮), 윤사흔(尹士昕), 한계희(韓繼禧), 강희맹(姜希孟), 권감(權瑊), 어세공(魚世恭)은 의논하기를,
“이유기(李裕基)와 처가(妻家)가 모두 사족(士族)이고 또 왕실(王室)의 친척이었으나, 그러나 이미 난신(亂臣)의 딸이 되었고, 비록 은혜를 입어 면방(免放)되었으나 처음에 장가들 때에 성례(成禮)해서 성혼(成婚)하였는지도 알 수 없으니, 적실로 논하는 것은 미안(未安)합니다. 청컨대 처음 장가들 때에 성례하였는지 안하였는지를 상고하여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하고,
김국광(金國光), 윤필상(尹弼商),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예전에 이르기를, ‘예를 갖추어 장가들면 아내가 되고 예를 갖추지 않고 혼인하면 첩이 된다’하였으니, 비록 죄인의 딸이라도 성례하여 장가들었으면 첩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면방되었으면 본래 사족의 딸이니, 아내 되기에 무슨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처음에 장가들 때의 성례하고 안한 것을 세밀히 핵실하여 논정(論定)하소서”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그 성례한 여부를 상고하게 하니, 승정원에서 황효원의 혼서(婚書)를 취하여 아뢰었다. 또 명하여 정승(政丞)에게 보이어 의논하게 하니, 정창손, 한명회, 윤사흔, 윤필상은 의논하기를,
“지금 혼서(婚書)를 보건대 급부(給付)하던 때에 있었으니,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하고,
심회, 김국광은 의논하기를,
“황효원이 이씨(李氏)에게 장가든 것과 혼서를 이룬 것이 모두 급부하던 때에 있었으니, 후처(後妻)로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씨의 파계(派系)가 왕실(王室)에 연하였고, 이제 이미 면천(免賤)되었으니, 성상의 뜻으로 재처(裁處)하소서”하고,
홍응은 의논하기를,
“혼서가 비록 급부하던 때에 있었으나, 본래 사족의 딸이고 혼서가 있으니, 처로 논정하는 것이 편합니다”하였다.
또 승정원(承政院),대간(臺諫),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김승경(金升卿), 김계창(金季昌), 채수(蔡壽), 변수(邊脩), 이세좌(李世佐), 성형(成俔)은 의논하기를,
“황효원이 이유기의 딸에게 장가든 것이 비록 면방한 뒤에 있었으나, 훈구(勳舊)의 대신으로서 난신의 딸에게 장가들어 적처(嫡妻)를 삼았으니 이미 불가한데, 더구나 급부할 때를 당하여 어찌 주인으로서 종과 혼인할 리가 있겠습니까? 도리에 거슬리고 윤상(倫常)을 어지럽힌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청컨대 첩으로 논정하소서”하고,
정괄(鄭佸), 이덕숭(李德崇), 구치곤(丘致崐), 이인속(李仁錫), 최한후(崔漢侯), 정지(鄭摯)는 의논하기를,
“황효원이 이유기의 딸에게 장가들은 것은 급부받아 종을 삼았을 때에 있었으니, 종과 주인사이에 성례해서 성혼하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혼서는 추후에 기술한 것이 또한 의심이 없습니다. 또 공신으로서 난신의 딸에게 장가들어 적처를 삼고자하여 성상의 총명을 번거롭게까지 하였으니,
매우 불가합니다. 청컨대 전대로 첩으로 논정하소서”하였고,
이세필(李世弼), 김성경(金成慶), 윤석보(尹碩輔)는 의논하기를,
“황효원이 난신의 딸에게 장가든 것이 급부한 때에 있었으니, 어찌 성례해서 성혼하였다 이르겠습니까? 청컨대 첩으로 논정하소서”하였고,
최숙정(崔淑精), 권건(權健), 이세광(李世匡), 조숙기(曺淑沂), 정성근(鄭誠謹)은 의논하기를,
“이유기가 자신이 난적(亂賊)을 범하여 그 처자를 공신의 집에 주어서 노예를 삼았으니, 이유기의 딸은 곧 황효원의 집종입니다. 그 종[婢]에게 장가들 때에 어찌 혼례가 있었겠습니까?
무릇 사대부(士大夫)로서 조금 뜻이 있는 자라면 모두 난적의 자손과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는데, 더구나 면천(免賤)을 하지 못한 자이겠습니까?
황효원은 공신이고 또 재상입니다. 만일 재혼하기를 구한다면 얻지못할 리가 없으니, 난적을 범하여 몸이 천인을 면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적체(嫡體)의 배우자를 삼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집에 급부한 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처음 장가들 때에 첩으로 하고 아내로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어찌 능히 후일에 은혜를 입어 면방(免放)될 것을 예측하여 성례해서 성혼하였겠습니까? 가령 성례하여 자기집 종에게 장가든 자가 그 종이 후일에 양인(良人)이 되었다면 처(妻)로 논하여 벼슬길을 통할 수 있겠습니까?
또 혼서는 사사집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어서 다 믿을 수 없습니다.
두 아내가 적(嫡)을 다툴 때에는 이것으로 질정하는 것이 가하지마는, 첩으로 처를 삼으려고 하는 자야 어찌 혼서의 있고 없는 것을 묻겠습니까?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규구(葵丘)의 맹세에 이르기를, ‘첩으로 처를 삼지 말라’하였으니, 대저 첩으로 처를 삼는 것은 옛사람이 미워하는 것인데, 어찌 처음에 첩이 된 자를 나중에 처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첩으로 논정하는 것이 편합니다”하였고,
성숙(成俶), 안침(安琛), 김흔(金訢), 민사건(閔師騫), 김응기(金應箕), 안윤손(安潤孫)은 의논하기를,
“이유기의 딸이 사족이지마는, 이미 난신의 딸로 황효원의 집에 급부되어 종이 되었으니, 비주(婢主)의 분수가 이미 정하여진 것입니다.
주인으로서 종[婢]에게 장가든 데에는 혼례의 있고 없는 것을 논할 것이 아닙니다. 뒤에 비록 면방이 되었더라도 장가든 것은 급부한 때에 있었으니, 첩으로 논정하는 것이 편합니다”하였고,
성세명(成世明), 정광세(鄭光世), 조위(曺偉)는 의논하기를,
“이유기가 비록 본래 사족이지마는 베어 죽였고, 그 딸을 황효원에게 급부하여 종[婢]을 삼았으니, 나중에 면방될 것을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효원의 어미가 자식을 위하여 혼인을 구하는데 어찌 의관(衣冠)의 벌열(閥閱)을 버리고 반드시 난신의 자식으로 천인이 된 종을 구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종이라도 오히려 혼인하려고 하지않았겠는데 더구나 자기집 종이겠습니까?
이것은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비록 혼서가 갖추어 있다하더라도 족히 사실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혼인의 예는 인륜의 큰 벼리인데, 만일 한사람의 사정을 따라 조금만 그 분수를 문란시키면 사람들이 장차 이것을 빙자하여 본받을 것이니, 큰 벼리가 무너져서 다시 정돈하지 못할 것입니다.《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첩으로 처를 삼지말라.’하였으니, 지금 이유기의 딸을 처로 논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하였다.
의논한 것이 들어오자, 임금이 명하여 승정원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註10633]병신년:1476 성종7년.註10634]승음(承蔭):특별히 음관(蔭官)으로 임용함.
○商山君黃孝源上疏曰:
李裕基作罪, 其女子給付於臣, 而仍在外祖母家。 時臣鰥居求耦, 皆以老不應。 臣母恨之, 與彼外祖母, 通媒妁, 遂成婚禮, 且荷天恩, 而免放, 截然無嫌久矣。 逮丙申春, 洪允成家屬爭嫡, 憲府聽理, 允成旣沒, 質問無據, 敬奉上旨, 凡有前、後室者, 竝於生時推之。 推及臣身, 窮覈求疵, 然婚禮正矣。 故只以給付爲辭, 駁議啓達, 上裁自聖心, 命論以嫡。 而臺諫駁之謂: “孝源乃功臣, 不可以亂臣之女爲妻。 當以妾論之。” 賤女嫁功臣免賤者非一, 獨臣妻, 以臣功臣之故, 降嫡爲妾, 臣竊憫焉。 古人云: “善善長惡惡短。” 且承蔭之法, 只及直孫, 於外孫則不干。 皇甫仁、朴彭年之外孫, 或歷敭華秩, 或卓登兩試, 而榮顯, 臣之子女, 乃以其未生前, 外祖之所犯, 不得與衣冠之家締婚, 事窮勢迫。 顒望天恩, 俾臣子女, 復人類許婚士族之家。 不勝至願。
命示大臣, 鄭昌孫、韓明澮、沈澮、尹士昕、韓繼禧、姜希孟、權瑊、魚世恭議: “李裕基及妻家皆士族, 且連王室, 然旣爲亂臣之女, 雖蒙恩免放, 初娶之時, 成禮成婚, 亦未可知, 論以嫡室未安。 請考其初娶時成禮與否, 而更議之。” 金國光、尹弼商、洪應議: “古云: ‘聘則爲妻, 奔則爲妾。’ 雖罪人之子, 成禮而娶, 則不可以妾論。 況免放, 則本是士族之女, 何嫌爲妻, 但細覈初娶時成禮與否後論定。” 命承政院考其成禮與否, 承政院取孝源婚書以啓。 又命示政丞議之, 昌孫、明澮、士昕、弼商議: “今觀婚書, 乃在給付之時, 難以取實。” 沈澮、國光議: “黃孝源娶李氏與成婚書, 皆在給付之時, 不可論以後妻。 然李氏派連王室, 今旣免賤, 裁自上意耳。” 洪應議: ‘婚書雖在給付之時, 然本士族女, 而有婚書, 以妻論定爲便。” 又命承政院、臺諫、弘文館議之, 金升卿、金季昌、蔡壽、邊脩、李世佐、成俔議: “孝源娶裕基女, 雖在免放之後, 以勳舊大臣, 娶亂臣女爲抗嫡, 已爲不可, 況當給付時, 安有以主, 而婚其婢乎, 逆理亂常, 莫此爲甚, 請以妾論定。” 鄭佸、李德崇、丘致崐、李仁錫、崔漢侯、鄭摯議: “黃孝源娶李裕基女, 在給付爲婢之時, 婢主之間, 其不成禮成婚明矣。 婚書追述亦無疑。 且以功臣, 娶亂臣女, 欲以爲嫡, 至煩上聰, 甚不可。 請依前以妾論定。” 李世弼、金成慶、尹碩輔議: “黃孝源娶亂臣女, 在給付之時, 何以云成禮成婚也, 請以妾論定。” 崔淑精、權健、李世匡、曺淑沂、鄭誠謹議: “李裕基身犯亂賊, 其妻子給付功臣家爲孥, 則裕基之女, 乃孝源家婢也。 娶其婢之時, 安有婚禮乎, 大凡士大夫少有志者, 皆羞與亂賊子孫爲婚, 況未免賤者乎, 孝源功臣, 又宰相也。 苟求婚媾, 無不可得之理, 如其干犯亂賊, 而身不免賤者, 必不肯爲敵體之配矣。 況自家給付者乎, 然則初娶之時, 以妾不以妻明矣。 又安能預料後日之蒙恩免放, 而成禮成婚乎, 假令成禮, 而娶自家婢者, 其婢後乃得良, 則可論以妻, 而通其仕路乎, 且婚書, 則乃私家所藏, 固不可盡信。 兩妻爭嫡之時, 以是質焉可也, 欲以妾爲妻者, 安問其有無乎, 齊桓公葵丘之誓曰: ‘毋以妾爲妻。’ 夫以妾爲妻者, 古人所惡, 豈可始以爲妾者, 終以妻論乎, 以妾論定爲便。” 成俶、安琛、金訢、閔師鶱、金應箕、安潤孫議: “裕基之女, 固士族, 旣以亂臣之女, 給付孝源家爲婢, 則婢主之分已定。 以主娶婢, 婚禮有無, 非所當論。 後雖免放, 娶在給付之時, 以妾論定爲便。” 成世明、鄭光世、曺偉議: “裕基雖本士族, 而誅死, 其女給付孝源爲婢, 則其終免放, 未可必也。 孝源之母, 爲子求婚, 豈宜舍衣冠閥閱, 而必求亂臣之子屬賤之婢乎, 在他人婢, 尙不肯焉, 況自家婢乎, 此不近人情, 雖曰婚書具在, 其不足取實也審矣。 婚姻之禮, 人倫大綱, 若徇一人之私, 小紊其分, 則人將藉此效之, 大綱陵夷, 不可復整。 《春秋傳》曰: ‘毋以妾爲妻。’ 今裕基之女, 以妻論未便。” 議入, 上命留承政院。
성종 223권, 19년(1488 무신/명홍치(弘治)1년) 12월15일(갑진) 4번째기사
장사랑 이유녕이 상서하여 아비 이심원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의논하게 하다
장사랑(將仕郞) 이유녕(李幼寧)이 상서(上書)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신의 아비〈주계부정(朱溪副正)〉이심원(李深源)은 어려서부터 특별히 천은(天恩)을 입어, 국가에서 의식(衣食)을 받았으나 보답할 길이 없으므로 무술년20361)에 분에 넘게 직언(直言)을 올렸다가 사친(私親)의 뜻을 거역함으로 인하여 죄가 헤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명(聖明)께서 가엾게 보살펴주신 은혜로 거듭 용서함을 얻었고, 정미년20362)에는 권과(勸課)하는데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자급(資級)을 더하고 잔치를 내려 주었으니, 넓은 은혜는 그 이상 더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의 아비는 내외(內外)의 친(親)이 있어 따로 문호(門戶)를 세웠는데, 이미 고조(高祖),증조(曾祖)의 문음(門蔭)이 없고 또 농지가 없어서 수십명의 식구가 모두 의식(衣食)을 신의 아비에게 바라며, 더욱이 조부 평성도정(枰城都正) 이위(李徫)는 금년 여름부터 중풍(中風)으로 말을 더듬고 반신불수(半身不遂)가 되었습니다.
신의 아비가 조석(朝夕)으로 분주히 오가면서 말과 종[僮]을 빌려가며 의원을 맞이해 약을 물으니 어렵고 괴로움이 막심하여 처자(妻子)의 굶주림과 추위를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신은 신의 아비의 죄를 알지 못하여 삼가 조목(條目)으로 진술하여 분변하겠습니다.
지난 을사년20363)에 신의 아비가 복직할 때에 신의 아비를 미워하는 자가 탄핵하기를, ‘심원이 무술년에 임사홍(任士洪)을 공격할 때에 조부(祖父)20364)와 명정(明廷)20365)에서 서로 힐책(詰責)하였다’고 하므로 명하여《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상고하게 하셨는데, 당시의 일이 쓰여있기를, ‘심원이 그 조부에게 향하여 말하기를,「손자로 하여금 만세에 누(累)를 얻음이 없게 하소서」하자 좌우에서 말리니 심원 이 잠잠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참으로 서로 힐책한 말이 있었다면 사관(史官)이 어찌하여 듣지못하고서 쓰기를, ‘심원이 잠잠하였다’라고 하였겠습니까?
이로써 증명하면 이른바, ‘명정(明廷)에서 서로 힐책하였다’는 말은 그것이 무망(誣罔)인 것이 명백합니다.
신은 듣건대, 그 때에 신의 아비가 명을 받고 임원준(任元濬)과 더불어 반복해 대변(對辨)하였는데 잘못전한 것이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지난 경자년20366) 겨울에 조부가 신의 아비의 죄를 따져서 폐적단자(廢摘單子)를 처음에 예조(禮曹)에 올렸다가 받지아니하자 또 종부시(宗簿寺)에 올렸는데 그 사이의 시말(始末)은 거의 석달에 이르렀습니다.
신의 아비가 처음부터 먹는 것이 목구멍에 내려가지 아니하고 근심과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여 경계(驚悸) 병을 얻어서, 미친 것도 같고 병든 것도 같이 쓰러지고 넘어지며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신의 어미가 차마 앉아서 볼 수 없어서, 글을 올려 변명하기를, ‘이는 가옹(家翁)20367)의 아비의 본뜻이 아니고 가옹과 원수진자가 있어서 조부를 유인[誘弄]한 소위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지아비를 구(救)하려는 마음에서 그 정성이 속에서 우러난 것이지 어찌 신의 아비의 지주(指嗾)20368)를 기다린 것이겠습니까? 하물며 신의 아비의 그 때에 실심(失心)한 병은 모든 사람이 함께 아는 바이므로 참여해 듣지 아니한 것이 명백합니다.
을사년에 복직할 때에 미쳐서 탄핵하는 자가 말하기를, ‘심원이 글을 올려서 그 조부의 위조(僞造)를 소송하였다’고 하므로 그 때에 곧 승정원에 명하여 신의 아비의 상서(上書)를 상고하게 하였으나 마침내 사실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의논하는 신하가 비록 망령됨을 알았으나〈탄핵하는 자가〉고집하고 돌이키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신의 아비를 배척하여 파직시켰는데, 신의 아비는 일이 조부에게 관계된 것이므로 하늘에 맡기고 변명할 뜻이 없이 원통함을 머금고 억울함을 당하였으니, 신은 매우 민망하게 여깁니다.
신의 아비는 그 때에 명을 받들고 임원준(任元濬)과 대변하였었는데 8년 후에 조부와 더불어 힐책(詰責)하였다고 지적하고, 신의 어미가 그 지아비의 죄를 입은 것을 민망하게 여겨 상언(上言)하여 구(救)하였는데 6년 후에 가리키기를, ‘심원이 그 조부의 위조를 소송하였다’고 하였으니, 공격하는 자가 남의 없는 허물을 찾아내어 이 두 가지를 가리켜서 죄로 삼아 무망(誣罔)하기를 이처럼 하였습니다.
그때에 의논하는 신하는 마음에 편당(偏黨)이 없는 자이므로 비록 애매함을 알았어도 한번 말하고는 물러가는데 불과하고 신의 아비를 미워하는 자는 먼저 이 두가지를 발언하여 공격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조정에 있는 대신이 그 진위(眞僞)를 살피지 아니하고서 거짓을 전하고 그릇됨을 이어받아서, 같은 소리로 호응하여 힘을 다해 공격하니 심히 마음이 아프고 민망스럽습니다.
신의 아비를 공격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조카로서 삼촌을 고소하는 것도 박한 풍속이다’라고 하였으나, 원(元)나라 탈탈(脫脫)은 백안(伯顔)의 조카이면서 백안의 악한 일을 적발하였는데 당시에 다른 의논이 없었고 후세에 나무라는 말이 없으니, 임금 앞에서 숨기지 아니하는 것은 옛 도(道)입니다.
그렇다면 신의 아비는 바로 충신(忠臣)의 지나친 것입니다.
《춘추(春秋)》환공(桓公)10년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썼는데, 전(傳)에 이르기를, ‘환공은 왕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이제 다시 왕이라고 쓴 것은 무엇 때문인가? 10이란 것은 영수(盈數)인데, 천도(天道)도 10년이면 돌아오고 인사(人事)도 10년이면 변하는 것이다’하였고,《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곽숙(霍叔)20369)을 서인(庶人)으로 낮추어서 3년을 불치(不齒)20370)하였다’고 하였는데, 해석하는 이가 말하기를, ‘3년 후에야 바야흐로 끼워서 기록하여 그 나라를 회복하였다’고 하였으니, 대저 환공은 찬적(纂賊)이며 곽숙은 반신(叛臣)이므로 천지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인데도 성인(聖人)이 법을 쓰는 것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예전 악함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친족을 친애하는 뜻을 돈독히 한 것입니다.
지금 신의 아비는 무술년부터 죄를 입어서 이제 11년이 되었고 더욱이 요즈음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의 강녕(康寧)으로 넓은 은혜를 크게 내려서 모든 공신(功臣)의 주손과 종실(宗室)의 친족은 비록 불효와 불충에 관련되었을지라도 혹은 서용(敍用)을 명하고 혹은 속적(屬籍)에 회복시켜서 모두 함께 새롭게 하였으니, 이는 성명(聖明)께서 예전 악함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는 거룩한 마음입니다.
신의 아비의 죄는 성명께서 본래부터 자세히 아시는 바이므로 이미 벼슬길을 터주어 재주를 시험해 가자(加資)하였고 경하(慶賀)의 잔치를 내려서 작은 하자(瑕疵)와 옛 허물을 일체 씻어버렸으니 성은(聖恩)이 지극합니다.
다만 신등의 처자(妻子)의 마음은 굶주림과 추움이 몸에 간절하나 고할 곳이 없으므로 목숨을 연장하기를 밤낮으로 우러러 바랍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착한데로 옮기는 길을 열어주고 허물을 고치는 마음을 허락하며 특별한 은혜를 드리워서 서용(敍用)하기를 명하여, 공신의 주손과 종실의 은혜를 입은 자와 더불어 예전 악함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어짊[仁]을 같이 입도록 해주시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하였는데,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에 보이게하니,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심원(深源)은 조부에게 불효함으로써 죄를 얻었는데 그 조부 보성군(寶城君)이 살아있으니, 가볍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심원은 진실로 마땅히 허물을 뉘우치고 마음을 새롭게하여 성상의 은혜를 기다려야 할 것인데, 이제 아들을 시켜 글을 올려서 올려쓰기를 요구하였으니, 매우 마땅치 못합니다”하며, 홍응(洪應)과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심원은 죄를 얻은 세월이 이미 오래인데 만약 참으로 허물을 고쳤으면 쓰는 것이 무방합니다. 다만 불효로써 그 적사(嫡嗣)를 폐하였으니 마땅히 먼저 이 죄를 씻어 없앤 뒤에야 쓸 수 있습니다”하였다.
이극배(李克培), 윤호(尹壕),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심원은 조부에게 죄를 지었으니 죄가 강상(綱常)에 있습니다”하고,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심원이 그 조부에게 불순(不順)한 것은 조정에서 모두 알 뿐만 아니라 성상의 밝으심으로 통촉하시는 바인데 이유녕(李幼寧)이 전일에 조정에서 의논한 것을 가리켜서 하나는 무망(誣罔)한 것이라고 하였고 하나는 고집하여 돌이키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그 죄를 국문할 것이나, 아비를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므로 말은 비록 적중하지 못할지라도 추핵(推劾)할 필요는 없으며 심원을 복직할 수 없습니다”하며,
정난종(鄭蘭宗)은 의논하기를,
“이유녕이 이제 그 아비의 억울함을 펴려고 하여 그 정(情)이 급박하고 그 말이 간절하니, 진실로 가엾고 민망스럽습니다. 그 아비 심원은 일찍이 조부에게 불순한 죄를 얻어서 강상(綱常)에 관계되므로 비록 사유(赦宥)를 만났더라도 용서받기 어려울 듯합니다”하였는데,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아직 승정원에 머물러 두라”하였다.
註20361]무술년:1478 성종9년 註20362]정미년:1478 성종18년.註20363]을사년:1458 성종16년 註20364]조부(祖父):보성군(寶城君) 이합(李㝓)을 이름. 註20365]명정(明廷):밝은 임금이 있는 조정.註20366]경자년:1480 성종11년. 註20367]가옹(家翁):남편.註20368]지주(指嗾):달래고 꾀어서 부림 註20369]곽숙(霍叔):주무왕(周武王)의 동생註20370]불치(不齒):왕족에 끼지 못함
○將仕郞李幼寧上書曰:
伏以臣父深源自少特荷天恩, 衣食於國家, 圖報末由。 歲在戊戌, 冒進直言, 因忤私親, 罪在不測, 聖明憐察, 重蒙曲宥。 以及丁未年, 許赴勸課, 一等入格, 加資賜宴, 洪私罔極。 但臣父內外有親, 別立門戶, 旣無高曾之蔭, 又乏田疇, 家累數十口, 皆仰衣食於臣父。 加以祖父枰城都正徫自今年夏節中風, 言語艱澁, 半身不遂, 臣父朝夕奔走, 貸馬借僮, 邀醫問藥, 艱苦莫甚, 不暇顧妻子之飢寒。 臣未知臣父之罪, 謹條陳以辨。 臣父去乙巳春復職時, 疾臣父者劾之曰: “深源, 戊戌年攻擊任士洪時, 與祖父明廷相詰。” 命考《政院日記》, 乃書當時事曰: “深源向祖言曰: ‘使孫無得累於萬世。’ 左右止之, 深源默然。” 若實有相詰之語, 則史官豈不聞而乃書曰: ‘深源默然’, 以此證之, 則所謂 ‘明廷相詰’ 之語, 其爲誣妄也明矣。 臣聞其時臣父承命, 與任元濬反復對辨, 而誤傳者乃如此也。 去庚子冬, 祖父數罪臣父, 廢嫡單子, 初呈于禮曹, 不受, 又呈于宗簿寺。 其間始末, 幾至三朔, 臣父自初食不下咽, 無任憂煎, 得驚悸之疢, 如狂如病, 顚倒失措。 臣母不忍坐視, 上書辨之曰: “此非家翁父之本意, 乃有讎家翁者, 誘弄祖父所爲也。” 其欲救夫之心, 誠迫於中, 豈待臣父之指嗾也, 況臣父其時失心之病, 衆所共知也, 其不與聞明矣。 及乙巳年復職之時, 劾之者曰: ‘深源上書, 訟其祖之僞造。” 其時卽命承政院, 考臣父上書, 竟無得焉。 在廷議臣雖知其妄, 執迷不回, 竟斥臣父罷職焉。 臣父以事干祖父, 付之於天, 無意辨明, 含冤抱屈, 臣切悶焉。 臣父其時承命, 與任元濬對辨, 而八年之後, 乃指以爲與祖相詰; 臣母悶其夫之被罪, 上言救之, 而六年之後, 乃指以爲深源訟其祖之僞造。 攻之者吹毛覓庛, 指此二條爲罪, 而誣妄乃如此。 其時議臣心無偏黨者, 雖知曖昧, 不過一言而退; 疾臣父者, 首發此二條, 攻之不已。 在廷大臣不究眞僞, 傳訛承誤, 同聲和之, 極力攻之, 深可痛悶。 攻臣父者又曰: “以姪訴叔, 亦爲薄風。” 元之脫脫, 伯顔之猶子, 而發摘伯顔之惡, 當時無異議, 後世無貶辭。 君前不諱, 古之道也, 然則臣父乃忠臣之過者也。 《春秋》桓公十年, 書 ‘春王正月’, 傳曰: “桓無王, 今復書王何也, 十者盈數, 天道十年則亦周矣, 人事十年則亦變矣。” 《書》曰: “降霍叔于庶人, 三年不齒。” 釋之者曰: “三年後方齒錄, 以復其國。” 夫桓公, 簒賊也; 霍叔, 叛臣也, 天地所不容。 聖人用法猶且如此, 所以不念舊惡而篤親親也。 今臣之父, 自戊戌年被罪, 于今十一年。 況近日以仁粹王大妃康寧, 大霈鴻恩, 凡功臣之冑、宗室之親, 雖干不孝不忠之罪, 或命敍用, 或復屬籍, 咸與惟新。 此則聖明不念舊惡之盛心也。 臣父之罪, 固聖明之素所詳知也, 已通仕路, 試藝加資, 賜宴慶賀, 微瑕舊累, 一切洗濯, 聖恩至矣。 但以臣等妻子之心, 飢寒切身, 無所告處, 日夕仰望, 以延軀命。 伏願開遷善之路, 許改過之心, 特垂恩私, 乃命敍用, 得與功臣之冑、宗室之蒙恩者, 同被不念舊惡之仁, 不勝幸甚。
命示領敦寧以上與議政府。 沈澮議: “深源以不孝祖父得罪, 其祖父寶城生存, 不可輕赦。” 尹弼商議: “深源固當(晦)〔悔〕過自新, 以待聖恩, 今敎子上書, 希求進用, 甚不當。” 洪應、盧思愼議: “深源得罪年月已久, 若實改過, 用之無妨。 但以不孝廢其嫡嗣, 當須洗除此罪, 然後乃可用也。” 李克培、尹壕、孫舜孝議: “深源得罪祖父, 罪在綱常。” 李崇元議: “深源不順於其祖, 非但廷臣之所共知, 亦聖鑑所洞照。 幼寧指其前日廷議者, 一則曰誣妄, 一則曰執迷不回, 宜鞫其罪。 然爲父訟冤, 言雖不中, 不必推覈。 深源不宜復職。” 鄭蘭宗議: “李幼寧今伸父冤, 其情迫, 其辭切, 誠可憐憫。 其父深源曾被不順祖父之罪, 係干綱常, 雖會赦, 似難見原。” 御書曰: “姑置政院。”
성종 248권, 21년(1490 경술/명홍치(弘治)3년) 12월 4일(신해) 2번째기사
승정원에서 소격서의 초제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소격서(昭格署)의 초제(醮祭)를 시행하여 성변(星變)을 물리치게 하자고 계청(啓請)하였는데,
전교(傳敎)하기를,
“덕(德)을 닦는데 있는 것이지 빌어서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관중(管仲)이 이미 제환공(齊桓公)에게 자세히 고(告)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기도를 하겠는가?”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 전교를 보면 성상(聖上)의 학문이 고명(高明)함을 알 수 있다. 어찌 진(秦)나라, 한(漢)나라 이후의 임금으로서 훌륭한 임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본래부터 불교(佛敎)가 성행(盛行)하였고 도교(道敎)는 다만 나라에 소격서(昭格署)만 있을 뿐이었다. 뒤에 임금이 그것이 허황된 것임을 깊이 알고서 승정원(承政院)에 묻기를, ‘소격서는 폐지할 수 없느냐,’고 하였으니, 이는 우연히 한 말이 아니고 반드시 뜻한 바가 있었던 것인데, 당시의 대신이 동조하는 자가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다.”하였다.
○承政院請行昭格署醮祭, 以禳星變, 傳曰: “在修德, 不在祈禳也。 昔管仲, 已詳告於齊桓公矣, 何用祈禱爲?”
【史臣曰: “觀此敎, 則聖學之高明可知。 豈秦、漢以後人主, 所可髣髴耶? 我國由來, 佛敎盛行, 道敎只國有昭格署而已。 後上深知其誕妄, 問政院曰: ‘昭格署不可廢乎?’ 此非偶然而發, 意必有在, 時大臣無和之者, 惜哉。”】
성종 272권, 23년(1492 임자/명홍치(弘治)5년) 12월 3일(기해) 3번째기사
안침등이 대비가 종사에 간여함이 부당함을 간곡히 아뢰어 대비의 뜻을 바꾸게 하시라 상소하다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안침(安琛)등이 상소하기를,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천하(天下)가 생긴지 오래이므로 한 번 다스려지면 한번 어지러워진다’고 하였고, 선유(先儒)는 말하기를, ‘기화(氣化)25024)의 성쇠(盛衰)와 인사(人事)의 득실(得失)은 반복하여 서로 찾아온다’고 하였으니, 무릇 삼대(三代)25025)의 치란(治亂), 득실(得失)은 맹자가 그 대략을 자세히 말하였으니 이제 다시 덧붙일 것은 아닙니다.
후세로 내려옴에 미쳐서는 한(漢)나라, 당(唐)나라, 송(宋)나라가 성(盛)하였는데, 그 다스려질 적에는 모두 오도(吾道)25026)를 대략이나마 활용한 것으로 인하여 혹은 대강(大綱)을 얻기도 하고 혹은 그 가법(家法)을 얻기도 하였으나, 그 어지러워질 적에는 혹은 오도를 따르지 아니함을 인하기도 하고, 혹은 궁위(宮闈)가 정사에 관여하는 실수와 혹은 아첨하는 신하의 영합(迎合)하는 잘못과 혹은 무략(武略)이 강하지 못한 잘못으로 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가 어지러웠던 것은 노자(老子)의 도교(道敎)때문이며, 양(梁)나라와 위(魏)25027)나라가 실패한 것은 불(佛)25028)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동방(東方)에 있어서는 신라(新羅)가 쇠약해지고 고려(高麗)가 멸망한 것은 역시 불교 때문이니, 지나간 역사를 찾아보면 하나하나 징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는 앞 수레의 넘어진 바퀴를 거울로 삼아서 오도(吾道)를 존숭(尊崇)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쳐서 절을 혁파하고 그 노비를 거두어 우리 조선의 문명(文明)한 정치를 열으셨으며, 열성(列聖)25029)이 서로 이어서〈그 법을〉준수하여 잃지 아니하셨는데, 오직 도승(度僧)25030) 한가지 일만은 이제까지 인습을 따르니, 융성(隆盛)한 정치에 누(累)가 됩니다.
전하께서는 인명(仁明)25031)하고 영무(英武)25032)하심이 천고(千古)에 우뚝하게 높으시며 문(文)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켜서 능히 전열(前烈)25033)을 이으셨으며, 그 이단(異端)의 그릇됨에 있어서는 밝게 살피시고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배척해 물리쳐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시고, 이미 도승법(度僧法)을 정지하도록 하고 또 금승령(禁僧令)을 내려서 놀고먹는 무리로 하여금 모두 나와서 농민이 되고 군사가 되게 하셨으므로, 오도(吾道)의 바름은 해가 바야흐로 떠오르는 것과 같고 이단의 간사함은 잡초를 제거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삼대(三代) 이하 인사(人事)가 가장 잘 다스려짐을 얻고 동방에 없었던 융성한 정치를 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온나라의 신민(臣民)들이 기뻐 뛰면서 바야흐로 눈을 닦고 바라보며 지극한 다스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대비의 전교가 내리니 유식한 이로서 팔을 걷어붙이고 분격하면서 본심(本心)을 잃고 천정만 쳐다보고 한탄하면서 천년만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었다고 하지않는 이가 없습니다.
대저 임금은 구중(九重)25034)의 깊고 엄한 곳에 높게있고 동조(東朝)25035)는 또 궁액(宮掖)25036)의 가장 깊숙한 곳인데, 승도(僧徒)가 국령(國令)이 자기에게 불편함을 싫어하여 대궐안에 말을 전하여 모후(母后)의 들으심을 현혹(眩惑)하게 하였으니, 이는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지못한 잘못입니다.
제환공(齊桓公)25037)의 규구(葵丘)의 맹약에 이르기를, ‘부인(婦人)으로 하여금 국사에 참여하지 말게 하라’고 하였고,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조서(詔書)에는 이르기를, ‘태후(太后)에게 일을 아뢰지못하게 하라’고 하였으니, 이는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義)입니다.
그러므로 당(唐)나라 문덕황후(文德皇后)가 병이 위독하자 태자가 청하기를, ‘한번 도인(道人)으로 하여금 재액(災厄)을 물리쳐 막게하소서’하니, 황후가 말하기를, ‘불로(佛老)25038)는 이방(異方)25039)의 교(敎)이므로 위에서도 하지 아니하는 바인데, 어찌 나 때문에 천하의 법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지금 대비께서는 늙은 중의 간사한 말에 치우치게 미혹되어 전하의 좋은 법을 저지하시니, 이는 모후(母后)의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대신(大臣)은 정도(正道)로 임금을 섬기면서 올바른 것을 지키고 아첨하지 아니하며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사직(社稷)을 보호하는 것으로 소중함을 삼고 임금을 과실이 없는 곳으로 인도해 들이는 것이 가합니다.
한(漢)나라 경제(景帝)가 두 태후(竇太后)의 명령에 핍박받아 양왕(梁王)에게 전위(傳位)를 가볍게 허락하자, 원앙(袁盎)25040)이 경계하기를, ‘작은 것을 차마 하지못하여 큰 계책을 어지럽게 한다’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태후의 의논이 바로잡히고 한나라 황실이 편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송(宋)나라 영종(英宗)초년에 자성(慈聖)25041)이 임조(臨朝)25042)하였는데 양궁(兩宮)25043)에 불화가 있어서 인심이 흉흉(洶洶)하자 한기(韓琦)25044)가 마(馬), 등(鄧)25045)이 권세를 가지고자 한 것으로써 경계하여 태후의 마음을 감동시켜 깨우치게 하자, 드디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파하므로 송나라 황실이 편안하였습니다.
일찍이 두 신하로 하여금 모후의 뜻을 거스리는 것을 혐의하여 바른말을 올리지 아니하고 바로잡는 바가 없었으면 한나라와 송나라의 안위(安危)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비께서 금승령(禁僧令)을 저지하시는 것은 비록 한나라와 송나라의 사세(事勢)와는 같지 아니하다고 하더라도 이것 역시 옳지못한 일이며 정사에 간여하는 잘못입니다. 그러니 대신이 된 자는 마땅히 착한 것을 진술하고 간사함을 막아야 할 터인데, 윤필상 등은 맨먼저 자지(慈旨)에 힘써 따르라는 말을 올려, 동조(東朝)에 아첨하여 전하의 좋은 법을 세상에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대신이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또 아들이 어버이를 섬기는데에 있어서 부모의 뜻을 먼저 헤아려서 뜻을 받드는 것이 효도지만 기간(幾諫)하여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효도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의 명령에만 따르는 것이 효가 될 수 없으며, 더구나 어머니가 아들에게는 전제(專制)하는 의리가 없고 삼종지도(三從之道)25046)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제 대비의 자성(慈聖)으로 이런 전교가 있게된 것은 특히 전하를 사랑하심이 지나치게 심하시고 국가를 근심하심이 지나치게 심한 것이고, 만약 이 영(令)을 행하면 불교에 어긋남이 있어서 복전이익(福田利益)25047)을 받을 수 있는 바 자료가 되지아니한다고 하시어 그러한 것이니, 이른바 부인(婦人)의 인(仁)입니다.
전하께서 대비를 섬기시는 효성이 순수하고 지극하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양쪽에 시기(猜忌)와 사이[間]가 없는 것은 나라 사람이 진실로 아는 바입니다. 대체로 하늘에 밝은 도(道)가 있어서 그 종류대로 드러나, 착한 자에게는 복(福)을 받도록 하고 정도에 지나친 자에게는 화(禍)를 받도록 하니,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반드시 요사(妖邪)한 귀신으로 하여금 흉억(胸臆)을 행하고 위복(威福)을 짓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이치로써 조용히 개진(開陳)하고 인도하여 공경을 일으키고 효도를 일으켜서 뉘우쳐 깨닫게 하시지 못하시면서 뜻을 어기고 거스리는 것으로 혐의로움을 삼아 억지로 힘써서 구차히 따르시니, 이는 대비께 이 이치를 족히 고할 수 없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대비를 대접하시기를 박하게 하십니까, 이는 전하께서 자식이 된 도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아! 대비의 전교를 따르시면 궁금(宮禁)은 궁금으로서의 도리를 잃게되고 모후(母后)는 모후가 된 도리를 잃게되며, 대신은 대신이 된 도리를 잃게되고 전하는 자식된 도리를 잃게 되어 한가지 일을 거행하면 네 가지 실수가 합하여지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척연(惕然)히 깨우치고 살피시지 아니하십니까?
신등이 삼가 대비께서 허종(許琮)에게 답한 전교를 보고는 깜짝 놀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대비께서 반드시 이기기를 구하려고 하여 대신을 능욕(凌辱)하고 조정을 위협(威脅)하고 억누르는 것이니, 신등은 자전(慈殿)의 전교가 이처럼 극도에 이를 줄 생각조차 못하였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어버이의 허물이 큰데도 간(諫)하지 아니하면 이는 더욱 소홀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향당주려(鄕黨州閭)25048)에서 죄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숙간(熟諫)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필부(匹夫)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임금이겠습니까?
신등은 전하께 의(義)로 합한 것인데도 오히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여 권권(惓惓)25049)함을 그치지 아니하는데, 더구나 전하께서는 대비께 천속지친(天屬之親)이니 어찌 감동시켜 돌이키지 못하시겠습니까?
신등의 말한 바는 국가의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것이니, 원하건대 신등의 상소를 가지고 백관(百官)을 거느리고서 위로 대비께 고하여 공경을 일으키고 효도를 일으켜서 울부짖으면서 따라다니시기를 날마다 되풀이하시어 기꺼이 따르시기를 기약한 뒤에 그만두셔야하며, 일체 보파(報罷)25050)하여 충성으로 간하는 길을 막는 것은 마땅치 못합니다”하였는데,
전교하기를,
“경등은 다만 자지(慈旨)를 보는 것이 가하다”하였다.
註25024]기화(氣化):음양의 조화 註25025]삼대(三代):하(夏),은(殷),주(周). 註25026]오도(吾道):유교(儒敎)의 도(道).註25027]위(魏):후위(後魏).註25028 ]불(佛):불교(佛敎).註25029]열성(列聖):대대의 여러 임금 註25030]도승(度僧):도첩(度牒:나라에서 발행하는 중의 신분증)을 가진 중. 즉 정전(丁錢)을 나라의 허가를 받아 중이 된 사람을 말함 註25031]인명(仁明):어질고 명철함.註25032]영무(英武):무용이 뛰어남 註25033]전열(前烈):전대의 공적 註25034]구중(九重):구중궁궐 註25035]동조(東朝):대비가 거처하는 궁전을 가리킴.註25036]궁액(宮掖):궁궐.註25037]제환공(齊桓公):춘추시대(春秋時代) 오패(五覇)의 한 사람 註25038]불로(佛老):불교와 노자(老子)의 도교(道敎). 註25039]이방(異方):풍속, 습관 따위가 다른 지방 註25040]원앙(袁盎):한나라 전기의 중신.註25041]자성(慈聖):태후(太后) 註25042]임조(臨朝):태후(太后)가 국정(國政)을 섭정(攝政)하는 것을 말함.註25043]양궁(兩宮):황제와 태후 註25044]한기(韓琦):송(宋)나라의 현상(賢相).註25045]마(馬), 등(鄧):후한(後漢)의 마황후(馬皇后)와 등황후(鄧皇后)를 가리킴. 註25046]삼종지도(三從之道):여자(女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덕(道德). 곧 어렸을 때에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을 여윈 뒤에는 아들을 좇는 일. 삼종지의(三從之義).註25047]복전이익(福田利益):부처를 공양(供養)하여 얻는 복(福), 또는 이익. 부처를 섬기면 복덕이 생기는 것이 밭에서 곡식이 나는 것과 같다는 뜻임.註25048]향당주려(鄕黨州閭):《주례(周禮)》에 보면, ”25가(家)를 1여(閭)라하며 4여(閭:1백가)가 1족(族)이 되며, 5족(族:5백가)이 1당(黨)이 되며, 5당(黨:2천5백가)이 1주(州)가 되며, 5주(州:1만2천5백가)가 향(鄕)이 된다”하였음.註25049]권권(惓惓):정성스러운 모양.註25050]보파(報罷):의견을 들어주지 않음
○弘文館副提學安琛等上疏曰:
《孟子》曰: “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 先儒以爲, 氣化盛衰, 人事得失, 反復相尋。 夫三代之治亂得失, 孟子詳言其略, 今不復贅, 降及後世, 漢、唐、宋爲盛, 其治也皆因吾道之略用, 或得於大綱, 或得於家法, 其亂也, 或因於不遵吾道, 而或失於宮闈之與政, 或失於佞臣之迎合, 或失於武略之不競。 至若魏、晋之亂以老; 梁、魏之敗以佛; 吾東方新羅之衰、高麗之亡亦以佛, 求諸往牒, 一一可驗。 我(大宗大王)〔太宗大王〕鑑前車之覆轍, 尊崇吾道, 排抑異端, 革寺社、收奴婢, 以啓我朝文明之治, 列聖相承, 遵而勿失, 獨度僧一事, 至今因循, 爲盛治之累。 我殿下仁明英武, 卓冠千古, 右文興化, 克紹前烈, 其於異端之非, 明睿洞照, 臨御以來, 攘斥排觝, 不少假貸, 旣停度僧之法, 又下禁僧之令, 使游手游食之徒, 盡出而爲農爲兵, 吾道之正, 如日方升, 異端之邪, 如莠斯耨, 豈非三代以下, 人事之最得而開東方未有之盛治也, 一國臣民, 懽欣踴躍, 方拭目顒望以俟至治之成, 而大妃之敎遽下, 有識罔不扼腕喪心, 仰屋歎吒, 以爲失千載一大機會也。 夫人主尊居九重深嚴之地, 東朝又宮掖之最邃者也, 而僧徒惡國令之不便於己, 飛語于內, 眩惑母后之聽, 此則失於宮禁之不嚴也。 齊桓公葵丘之盟曰: “毋使婦人預國事。” 魏文帝詔曰: “無得奏事太后。” 此古今之通義也。 故唐文德皇后疾革, 太子請一度道人禳塞災會, 后曰: “佛、老異方敎耳, 上所不爲, 豈宜以吾, 亂天下法,” 今大妃偏惑老髡之邪說, 以沮殿下之良法, 此失於母后之道也。 大臣爾事君, 守正不阿, 以安國家衛社稷爲重, 納君於無過之地可也。 漢景帝迫於竇太后之命, 輕許傳位梁王, 袁盎戒以小不忍、亂大謀, 由是太后議格, 漢室以安。 宋英宗初年, 慈聖臨朝, 兩宮有隙, 人心洶洶, 韓琦戒以馬、鄧之戀權, 感悟后心, 遂罷垂簾之政, 宋室以寧。 向使二臣嫌於違忤母后, 不進讜言, 無所規正 則漢、宋之安危, 未可知也。 大妃沮禁僧之令, 雖不若漢、宋之事勢, 是亦非義之擧, 預政之失, 爲大臣者, 當陳善閉邪, 而弼商等首進勉從慈旨之說, 容悅東朝, 使殿下之良法, 不得行於世, 此則失於大臣之道也。 且人子之事親, 先意承志固孝也, 幾諫不違亦孝也。 故從父之令, 未得爲孝, 況母之於子, 無專制之義而有三從之道乎, 今大妃慈聖, 其有此敎, 特以愛殿下太甚, 憂國家太甚, 若行此令, 則有違佛敎, 非所以資福田利益而然耳, 所謂婦人之仁也。 殿下之事大妃, 誠孝純至, 懽欣悅懌, 兩無猜間, 國人固知之矣。 夫天有顯道, 厥類惟彰, 福善禍淫, 非可誣也, 必不令妖邪之鬼, 行胸臆作威福也。 殿下不能以此理, 從容開導, 起敬起孝, 使之悔悟, 乃以違忤爲嫌, 黽勉苟從, 是以大妃爲不足告以是理歟, 何待大妃之薄也! 是則殿下失於爲人子之道也。 嗚呼! 從大妃之敎, 則宮禁失其爲宮禁, 母后失其爲母后, 大臣失其爲大臣, 殿下失其爲人子, 一擧而四失倂焉。 殿下何不惕然警察乎, 臣等伏覩大妃答許琮之旨, 不覺駭愕, 是則大妃必欲求勝, 陵辱大臣, 脅制朝廷, 臣等不意慈敎之至此極也。 《傳》曰: “親之過大而不諫, 是愈踈也。” 又曰: “與其得罪於鄕黨州閭, 寧熟諫。” 匹夫尙然, 況帝王乎, 臣等之於殿下, 義合也, 猶且戀君憂國, 惓惓不已, 況殿下之於大妃, 天屬之親也, 其不能感回乎, 臣等所言, 關國家大體, 願將臣等之疏, 率百官上告于(太)〔大〕妃, 起敬起孝, 號泣而隨之, 日復一日, 期於悅從而後已, 不宜一切報罷以塞忠諫之路也。
傳曰: “卿等但見慈旨可也。”
연산 12권, 2년(1496 병진/명홍치(弘治)9년) 1월 29일(무신) 2번째기사
김효강의 죄를 다스리도록 대사헌 이집등이 청하다
대사헌 이집, 대사간 이인형 등이 아뢰기를,
“김효강(金孝江)은 여러 조정을 섬긴 늙은 내시이오라, 그 역시 조진(朝進)의 사체를 알고 있사온데, 어찌 내수사(內需司)에서 함부로 계하는 것이 불가함을 모를리 있사오리까? 또 신들도 그 소금을 아깝게 여겨서 아뢰는 것만이 아니오라 구워내는 공력이 적지않고, 수납(輸納)할 즈음에는 백성의 원망이 적지 않으므로 아뢰는 것입니다”하였으나, 듣지 않으매,
이집(李諿)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상고하옵건대,《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재물은 손상하지 않고 백성을 괴롭히지않아야 한다’하였고, 조조(晁錯)는 말하기를, ‘인정(人情)은 부가되고 싶어하지않는 이가 없으므로 삼왕(三王)이 후히 길러 곤궁하지 않게하고, 인정은 편안히 살고자하지않는 자 없으므로 삼왕이 그 힘을 절약하여 다쓰지않게 했다’하였는데, 지금 승도(僧徒)에게 소금을 공급하는 것은 민폐(民弊)가 적지않습니다.
대저 임금이 어디고 거둥한 곳에서는 반드시 은혜를 베풀었으니, 저 한광무(漢光武)의 전조(田租)를 면제한 일과 제환공(齊桓公)의 노구(老嫗)에게〈의식을〉내려준 것은 곧 임금의 인애(仁愛)하는 마음이 듣고본 대상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세조대왕께서 이 절에 어가(御駕)를 머물렀으므로 특명으로 소금을 주신 것이니, 어찌 후사(後嗣)에게 수헌(垂憲)799)하신 도(道)이겠습니까?
강원도(江原道) 전역이 토지가 척박하여 백성이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형편이온데, 그들을 마구 부려 소금을 고아내니 백성의 힘이 일차로 피곤하고, 식량을 싸가지고 여러 날 묵어가며 바리에 싣고 험한 길을 가노라니 사람은 병이 나고 말은 지쳐 넘어져 백성의 힘이 재차로 피곤하고, 탐욕많은 승도(僧徒)가 갖은 방법으로 침탈하여 숫자를 반드시 다 채우고야 말므로 백성의 힘이 또 거듭 피곤하게 되옵니다.
승도들은 부역을 도피하고 놀고먹는데도 전토를 내주어 그 세를 거두어 먹게 하였으니 성은이 이미 망극하온데, 하물며 백성의 고혈을 뽑아서 그들을 살찌게 함에리까?
더구나 이 소금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요, 한결같이 우리 백성의 힘으로 이루어져 조정의 경비에 보충되므로 평시에는 이로써 곡식을 무역하여 군수(軍需)에 충당하고, 흉년이 들면 굶주리는 백성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는 것이온데, 어찌 놀고먹는 무리들에게 헛되이 소모할 수 있으리까?
그렇다면 전하의 이 조치는 재물을 상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지않아서, 과연 삼왕(三王)의 백성을 곤하게 하지않고 위태롭게 하지않고 그 힘을 다 쓰지않는 도(道)에 합치된다 하오리까?
성종대왕께서 고금을 통하여 용재 휼민(用材恤民)의 도를 짐작하여《속록횡간(續錄橫看)》을 편찬하시면서 불필요한 것은 일체 산삭하여 버리셨으니, 이야말로 뒷사람을 계우(啓佑)하심이 지극하온데, 전하께서 준수하지 않으시면 되겠습니까?
전자에 해조(該曹)가 법에 의거하여 아뢰자, 전하께서 바로 응종하셨는데, 이윽고 한 내시의 교사한 말을 들으시고 마침내 특명으로 하사하시니, 선왕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뜻이 크게 무너지고, 백성을 노고하게 하는 폐습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효강이 하나의 늙은 내시로서 여러 조정을 내리 섬기었고, 또 간교하여 꾀조차 많으며, 국전(國典)을 무너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닐 터인데, 지레 승첩(僧牒)에 의거하여 서슴치않고 직계(直啓)하였으니, 마땅히 통렬하게 징치해야 할 것이온데, 하물며 내수사(內需司)에서 각사(各司)를 검찰하라는 분부대로 유점사(楡岾寺)는 참여하지않았고, 경상감사(慶尙監司)가 이보(移報)한 관문(關文)에도 내수사는 간여되지 아니하였는데, 부회(附會)해서 녹계(錄啓)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이는 임금도 안중에 없고 조정도 안중에 없고 국전(國典)도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내시의 무리가 세력에 의지하고 은총을 믿어서 권세를 부리므로 발,초,관,소(勃貂管蘇)가 된 자는 1백에 1, 2도 못되고, 수조(竪刁), 이려(伊戾)와 같이 된 자는 10에 7, 8이 넘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를 걱정한다’하였고, 송(宋)나라 석수도(石守道)는《당사(唐史)》중의 간신(奸臣), 환관(宦官)의 일을 채집하여 책을 만들어 이름을《당감(唐鑑)》이라하여 당시 임금에게 내시가 권세를 부리는 화를 경계하여 역사에 낱낱이 갖추었으니, 진실로 만세에 임금의 대감(大鑑)이옵니다.
효강의 기군망상한 죄는 결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온데, 전하께서 전혀 방치하시고 다스리지 않으시니, 신들은 중사(中使)800)가 이제부터 전횡할까 두렵사옵니다.
옛날에 당(唐)나라 토돌승최(吐突承璀)가 죄를 짓자, 헌종(憲宗)은 말하기를, ‘경(卿)이 오랫동안 구사(驅使)를 했기때문에 사은(私恩)으로 관용하는 것이니, 만약 다시 어기고 범하는 일이 있다면 짐은 경을 제거하기는 터럭 하나 치우는 것과 같다’하였으니, 효강의 죄는 헌종의 시대에 있어서도 오히려 마땅히 제거를 당할 것이온데, 더욱이 전하의 성(聖)으로서 국전(國典)을 분명히 보여서 그 조짐을 막지 않으십니까?
지금 비록 징치하더라도 오히려 늙은 간물이 다시 날뛸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대로 두고 묻지않아서 교만과 방종을 양성함에리까?
신들은 통분함을 이기질 못하옵니다. 당태종(唐太宗)이 처음으로 정사에 임하자 손복가(孫伏伽)가 작은 일로써 간하니, 태종이 후히 상을 내렸으므로 당시 일을 말하는 자가 오직 심각하고 절실하게 간하지못할까 염려하였습니다. 태종이라고 어찌 자기 비위를 거슬리는 것을 좋아하였겠습니까?
진실로 어김없이 따라 오는 그 쾌감보다 위망의 화가 더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이미 해가 넘었사옵고, 대간의 논사(論事)도 역시 빠진 날이 없었사온데, 일체 거부만 하시니 전하같으신 대대로 나지않는 성(聖)으로서 도리어 태종의 아래 처하시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빨리 소금공급하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효강의 죄를 통렬히 다스리시어 첫 정사의 거룩한 업적을 이룩하소서”하였으나, 듣지않았다.
註799]수헌(垂憲):법을 물려 줌.註800]중사(中使):내시.
○大司憲李諿、大司諫李仁亨等啓: “金孝江以累朝老宦, 亦知朝(進)〔廷〕事體, 豈不知內需司擅啓之不可, 且臣等非以愛惜其鹽而啓之, 煮取之功不細, 而輸納之際, 民怨不少, 故啓之耳。” 不聽。 李諿等上疏曰:
臣等謹按, 《易》曰: “不傷財、不害民。” 晁錯曰: “人情莫不欲富, 三王厚之而不困; 人情莫不欲安, 三王節其力而不盡。” 今給鹽僧徒, 民弊不貲。 大抵人君所幸, 必示恩惠。 光武之復田租, 齊桓之賜老嫗, 此人君仁愛之心, 發見於見聞之所及也。 世祖大王因駐駕是寺, 特命賜鹽, 豈垂憲後嗣之道也, 江原一道土地磽确, 民不聊生, 而驅使煮鹽, 民力一困也。 齎糧信宿, 駄載涉險, 人痡馬斃, 民力再困也。 貪婪僧徒多方侵刻, 數必取盈, 民力又重困也。 僧徒逃賦游食, 而給田收稅, 聖恩已極, 況瘠民以肥之乎, 且是鹽也非天降地湧也。 一出於吾民之力, 而係於朝廷經費。 平時則貿穀, 以補軍需, 凶年則以賑飢民, 豈可虛耗於游食之徒乎, 殿下此擧, 其不爲傷財害民, 而果合於三王之不困、不危、不盡其力之道乎, 成宗大王斟酌古今用財恤民之道, 其纂《續錄》, 橫看一切刪去, 其啓佑後人至矣。 殿下其可不遵守之乎, 前者該曹據法啓之, 而殿下從之。 尋以一宦矯飾之言, 而特賜之, 先王良法美意大毁, 而勞民之弊復起也。 孝江以一老宦, 歷仕累朝, 而奸巧多術。 非不知國典之不可毁, 而經據僧牒, 遽然直啓, 固當痛懲。 況內需司檢察各司之敎, 楡岾不與焉。 慶尙監司移報之關, 內需不干焉, 而附會錄啓, 無所忌憚。 是不有君父、不有朝廷、不有國典也。 先儒有言曰: “熏腐之徒依勢怙寵, 竊柄弄權, 爲勃、貂、管、蘇者, 百不一、二; 爲竪刁、伊戾者, 十已七、八。 故君子患之。” 宋石守道採《唐史》中奸臣、宦官事, 作卷而目之曰《唐鑑》, 以戒時君, 宦寺弄權之禍, 備載方冊, 萬世人主之大鑑也。 孝江欺罔之罪, 決不可不懲, 而殿下專釋不治, 臣等恐中使自今專橫也。 昔唐吐突承璀有罪, 憲宗曰: “卿以其驅使之久, 故假以恩私。 若有違犯, 朕去之輕如一毛耳。” 孝江之罪, 在憲宗猶當去之。 顧以殿下之聖, 而不明示國典, 藺其漸乎, 今雖懲之, 猶懼老奸之復肆。 況置而不問, 釀成驕縱乎, 臣等不勝痛憤。 唐太宗初卽政, 孫伏伽以小事諫, 太宗厚賞之。 故當時言事者, 惟患不深切。 太宗豈好逆意哉, 誠以順適之快小, 而危亡之禍大故也。 殿下踐阼, 今已周歲。 臺諫論事, 亦無虛日, 而一切拒之。 以殿下不世出之聖, 反居太宗之下乎, 伏願亟收給鹽之命, 痛治孝江之罪, 以成初政之美。不從。
연산 16권, 2년(1496 병진/명홍치(弘治)9년) 7월 5일(경술) 2번째기사
대사헌 이육등이 신주, 사당세우는 일등을 서계하다
대사헌 이육(李陸)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어제 전교에, ‘경들의 말이 숨기는 바가 없으니 옳으나, 그 일은 들어줄 수 없다’하셨으니, 신등이 전교를 듣고는 물러 나와 사사로 서로 치하하되, 전하께서 신들의 말을 옳다고 하셨으니, 그 일의 옳고 그른 것과 신들이 되풀이하여 청하여마지않는 뜻을 전하께서 환히 아시는 바이나 특히 사은(私恩)에 끌려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지 못하신 것인데, 노사신(盧思愼)이 비위를 맞추어 총애를 굳게 하려는 술책을 썼으므로 그 사이에 비록 바른 의논을 하는 신하가 있어도 모두 전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이 가석합니다.
전하께서 이미 신들의 말을 옳다 하시면서 이와 같이 굳이 거절하시니, 이는 곽공(郭公)1036)이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면서 쓰지못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대저 알지못하였다면 오히려 알려고 할 때가 있겠지마는 지금 이미 그 옳고 그른 것을 알면서 들어 줄 수 없다 하시니, 이는 전하께서 착한 말을 무익하다고 하는 것이며, 바른 의논을 들을 것이 못된다하는 것이어서, 말하는 자로 하여금 오직 나의 하고자하는 대로 낮추고 나의 뜻에 거슬림이 없으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대간(臺諫)을 두어서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즐겨 거슬리는 말을 하여 감히 벼락같은 위엄에 부딪쳐서 스스로 화를 취하려 하겠습니까? 이 일은 여러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오직 부왕(父王)의 유교를 저버리지않고 선왕(先王)의 전례(典禮)를 준수하며 생모(生母)에게는 사사로 그 정성과 공경함을 다할 것뿐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멀지않아 돌리매[復] 뉘우침이 없어 크게 길하다’하였으며,《전(傳)》에 이르기를,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으리요마는 허물이 있는 것을 능히 고치면 이보다 큰 착함이 없다’하였으니, 알아서 하소서”하니, 그 차자 끝에다 어서(御書)로 쓰기를,
“천친(天親)을 위하여 추후로 신주를 만들고 사당을 세우는 것이 어찌 허물이 되겠는가? 그대들이 말한 바, 허물이 된다고 한 그대들의 뜻을 알 수 없으므로 들어 주지 않는다”하매,
다시 서계하기를,
“천친(天親)을 버려서 안된다는 전하의 말씀은 당연합니다.
천하에 어찌 어미없는 사람이 있어 감히 이런 박절한 말을 하여 전하의 애통 사모하시는 정을 막겠습니까?
다만 성종께서 오늘날 이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염려하시어 대신으로 더불어 의논하여 바꾸어서는 안될 전례(典禮)를 만들어서, 전하로 하여금 준수하여 고치지말게 하셨으며, 다만 전하로 하여금 준수하여 고치지말게 할뿐만아니라, 또한 자손으로 하여금 길이 준수하게 하신 것입니다.
전하께서 성종의 유교가 이와 같이 분명한 것을 친히 보시고도 감히 고치시고서는 ‘천친을 버리지 못한다’하시니, 성종께서는 전하의 천친이 아닙니까? 하늘과 땅을 아울러 칭하되 하늘을 땅보다 먼저 하고, 부와 모를 아울러 칭하되 부를 모보다 먼저 하니, 이로써 본다면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의 명령을 폐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신들의 뜻이 이와 같은데에 지나지않는데, 전하께서, ‘그대들의 뜻을 모르겠다’하시니,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이 처음에는 전하께서 애통 사모하시는 정이 지극하여, 이 일이 그른 줄을 알지 못하시는가 생각하였더니, 이제는 드러내놓고 ‘어찌 허물이 되느냐? 이것을 허물이라하는 그대들의 말이 허물이 된다’하시니, 참으로 신들의 말한 바를 허물이라 하고 부왕(父王)의 유교를 위반함을 옳다하고 조정의 바른 의논을 허물이라하고 사신등의 반복하여 비위 맞추는 의논을 옳다고 하십니까?
한치례는 왕실의 지친이니, 전하께서 그를 보전하여 주시려는 것은 당연하십니다. 비록 차마 온전히 법대로 죄를 주지는 못할지라도 우선 파직시켜서 그로 하여금 징계하여, 후일의 징조를 막는 것이 가합니다.
순손은 작은 환관으로서 죄가 있다면 죽이는 것이 가합니다만 유사에게 부쳐서 그 죄를 밝히지 않고 당신 뜻으로 독단하여 극형을 주기에 이르니, 여러 사람 마음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만약 용서하지 못하겠으면 형조나 금부에 맡겨서 추국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가합니다”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註1036]곽공(郭公):중국 춘추시대의 제환공(齊桓公)이 지방에 나갔다가 옛 도읍 터를 보고 물으니, 그곳 사람이 대답하기를 곽공의 옛터라 하매, 망한 까닭을 물으니,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되 쓰지못하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되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고사가 있음
○大司憲李陸等上箚曰:
昨日敎云: “卿等之言, 無有所隱是也, 然其事則不可聽也。” 臣等聞命乃退, 私自相賀以謂, 殿下以臣等之言爲是, 則其事之是非及臣等之反覆陳請不已之意, 天鑑所洞照, 特以牽於私恩, 不能斷以大義, 而思愼迎合固寵之術, 得以中之, 故其間雖有正論之臣, 皆不得以回天聽也, 可勝惜哉, 殿下旣以臣等之言爲是, 而固拒之如此, 是何異於郭公之善善, 而不能用乎, 夫苟不知, 則猶有求知之時, 今旣知其是非, 而曰: “不可聽也。” 云爾則是殿下謂善言無益也, 謂正論不足聽也, 使言者惟吾之所欲爲, 而無拂乎吾之意也。 然則殿下置臺諫何用, 然則誰肯犯顔苦口, 敢觸於雷霆之下, 以自取禍乎, 此事不必多言, 唯在於不負父王之遺敎, 勉遵先王之典禮, 私盡其誠敬於所生之母而已。 《易》曰: “不遠復, 無祇悔, 元吉。” 《傳》曰: “人誰無過, 過而能改, 善莫大焉。” 伏惟上裁。
御書其末曰:
爲天親, 追立主、廟事, 豈爲過乎, 爾等所云爲過, 未審爾意, 故不聽。
更書啓曰:
不棄天親, 殿下之敎固也。 天下豈有無母之人, 而敢爲此迫切之言, 以阻殿下哀慕之情乎, 但成宗預慮今日之有此事也, 與大臣往復商確, 以爲勿易之典, 使殿下遵而勿改。 非徒使殿下遵而勿改, 亦且使子孫永永遵守。 殿下親見成宗遺敎, 如此其昭昭, 而敢改之, 乃曰: “不棄天親。” 成宗獨非殿下之天親乎, 天地竝稱, 而天先於地; 父母竝稱, 而父先於母。 以此觀之, 則不以母故, 而廢父之命昭然矣。 臣等之意, 不過如此, 而殿下曰: “未審爾意。” 臣竊未解。 臣等初意, 殿下情切於哀慕, 不知此擧之爲非也, 今則乃顯然敎之曰: “豈爲過乎, 爾等所云爲過。” 臣等未知眞以臣等所言爲過, 而背父王之敎爲是乎, 以朝廷正論爲過, 而以思愼等反覆迎合之議爲是歟, 致禮王室至親, 殿下欲全之固也。 雖不忍全科定罪, 而姑且罷職, 使彼有所懲艾, 藺後日之漸可也。 舜孫以小竪, 有罪誅之可也, 然不付之有司, 明正其罪, 而獨斷己意, 以至大辟, 不厭衆心。 如不可恕, 請委諸刑曹若禁府, 推鞫定罪可也。不聽。
연산 24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10년) 6월 5일(을해) 1번째기사
홍문관이 외척, 환관을 총애하는 일, 임사홍의 일등에 대해 상소하다
홍문관의 상소를 내려 보내고 이어 전교하기를,
“비록 백방으로 말하더라도 내가 들어줄 수 없다”하였는데,
그 상소에 이르기를,
“신등이 삼가 살피건대, 유향(劉向)1586)의 말에 이르기를, ‘인군이 과실이 있는 것은 위망(危亡)의 징조이다. 인군의 과실을 보고도 간하지않는 것은 인군의 위망을 경하게 하는 것이니, 인군의 위망을 경하게 여기는 짓은 충신으로서는 차마 하지못하는 것이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간하지않으면 인군을 위태롭게 하고 굳이 간하면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인군을 위태롭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위태롭게 해야 한다’하였습니다.
대저 임금된 이의 과실이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는데, 재앙과 걱정이 온 것도 또한 그 종류에 따라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위망의 화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라면 이른바 과실이라는 것이 어찌 다시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큰 기업(基業)을 계승하신 지 지금 이미 4년인데, 덕있는 정사는 들어볼 수 없고 잘못되는 일은 점차 많아집니다. 외척과 환관의 총애라든가 탐심부리고 간사하며 사특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의 진출이 오늘과 같은 적이 없어 조정의 관작이 너무도 천해지니, 전하의 과실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무릇 일이 시초에 혹 잘못하다가도 뉘우치고 고치면 결국 성대하고 아름답지않을 수 없는 것인데, 지금 전하께서는 간하는 말 듣기를 꺼리고 허물고치는데 인색하니,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그 누가 전하를 위하여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대간은 말하는 것이 직책인데, 차마 전하의 허물이 날마다 깊어가는 것을 보고도 감히 간하지 않을 것입니까? 복합(伏閤)하여 굳이 간하면서 직위를 사퇴하고 직무를 폐한 지가 거의 반년이나 되었습니다.
법을 범한 사람은 나라에 금법이 없다하고 원한을 품은 사람은 나라에 맡은 관원이 없다하여, 정치의 기강이 문란하여 바로잡히지 못하고 백성의 원성이 쌓여 풀리지못하여 국가의 일이 장차 날마다 잘못되어가는데 전하께서 오히려 구중궁궐에 깊숙이 계시어, 생각하거나 들을 수가 없으시므로 방금도 또한 하교하기를, ‘신(信)을 잃을 수 없다’하고, ‘대간이 하는 짓은 천고에 없는 일이다’하여 전하께서 반드시 국하게도 보잘것없는 무리들에게는 신의를 지키려고 하시면서 유독 조정의 공론에 대해서는 생각하려하지 않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나라에 대간이 있는 것은 잘못되는 일에 보충해가려는 것인데, 지금에 있어서는 감히 간하는 것을 범상(泛常)한 일로 여기고 만홀히 하여 살피지 않으시니, 대간을 설치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대간이 어찌 누차 신총(宸聰)을 괴롭히는 것이 번거로운 일인 줄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오히려 감히 말하여 그만두지 않는 것은, 탐심많고 사특하고 용렬하고 비루한 자들이 모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국정에 해가 되고, 성덕에 누를 끼침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임사홍은 성묘(成廟)의 대가 다하도록 다시 녹용(錄用)하지 않았으니, 전하께서 실록을 상고하여 보게 되면 그 간악한 죄상을 분명히 아시게 될 것인데, 지금 자급(資級)을 높여 그 몸을 영화롭게 하여 주시려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옛날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곽(郭)땅에 가서, 부로(父老)들에게 ‘곽이 어찌하여 망했느냐?’고 묻자, ‘선(善)을 선히 여기고, 악을 미워해서입니다’하므로, ‘선한 것을 선히 여기고, 악을 미워했는데 어찌 망하게 되었느냐?’고 하자, ‘선한 사람을 선히 여기면서도 쓰지못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제거하지못하여 망하게 된 것이다’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사홍의 간사함을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하시니, 악한 줄을 안 것이 귀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신등은 위망의 화가 혹 오늘에 싹트게 될까 두렵습니다.
신등은 또한 들어보건대, ‘재변이란 함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불러들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뇌성이 초가을에 일어나고 우박이 여름철에 내리며, 흰 기운이 하늘에 뻗히고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나니, 모두 다 큰 재앙과 변괴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하늘의 마음이 전하를 인자하게 사랑하여 경작시키는 것인데, 도리어 하교하시기를, ‘태백이 나타난 것은 옛부터 있는 일인데, 어찌 사홍때문에 그러겠느냐?’하시니, 이것은 임금으로서 할 말이 아닙니다.
옛날에 송(宋)나라 신하 유수(劉隨)가 인종(仁宗)에게 말하기를, ‘사특하고 아첨하는 소인은 급하게 부귀하기를 도모하다가 그 자급(資級)과 물망이 승진되지못하게 되면 정의의 선비[端士]의 모함을 획책하며, 밝은 시기에 승진되고 임용되려고 하는데, 차츰 흉악과 간특이 싹터가면 또한 성신(星辰)을 움직이게 된다’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정사가 잘못되어도 고치지않고 하늘이 형상을 나타내어도 두려워하지않는다면 이것은 위망의 길이다’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하늘을 조심하고 두려워하시며 모든 정사를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여 통절하게 스스로 자신을 꾸짖고, 널리 보고 멀리 들어보아 인사를 다하여 하늘의 경계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요, 마침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이라고 하여 만홀히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더욱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덕을 닦고 정사를 행하시어 위망의 발자취를 밟지 마소서”하였다.
註586]유향(劉向):중국 한(漢)나라 때의 유학자.
○乙亥/下弘文館疏, 仍傳曰: “雖百般言之, 予不可聽。” 其疏曰:
臣等謹按, 劉向之言曰: “君有過失者, 危亡之萌也。 見君之過失而不諫, 是輕君之危亡也。 輕君之危亡者, 忠臣不忍爲也。” 又曰: “不諫則危君, 固諫則危身。 與其危君, 寧危身。” 夫君上之過, 有大有小, 而禍患之來, 亦以類應。 苟基危亡之禍, 則所謂過者, 豈復有大於此者乎, 殿下紹宅丕基, 今已四期。 德政罕聞, 過擧寢多。 外戚、宦寺之寵, 貪奸邪侫之進, 無有如今日者。 朝廷之官爵甚賤, 而殿下之過可謂大矣。 凡事之始也, 或不免有誤, 悔而改之, 終不害爲盛美。 今殿下憚於受諫, 吝於改過, 在廷之臣孰不爲殿下嘆息, 況臺諫以言爲責, 則其忍視殿下之過將日深不已, 而莫之敢諫乎, 伏閤固爭, 辭位廢職, 殆將半年。 犯憲者謂國無禁章, 抱冤者謂國無有司, 政紀已紊而不振, 民怨已積而不伸, 國家之事將日非矣。 殿下猶深居九重, 罔可念聽, 方且敎之曰: “不可失信也。” 曰: “臺諫之事千古所無。” 殿下必欲區區取信於闒茸之輩, 而獨不念朝廷之公議者何也, 國有臺諫, 將以補闕也。 今乃以敢諫爲泛常, 而慢不之省, 則設臺諫之意, 果安在乎, 臺諫豈不料累瀆宸聰之爲煩也, 猶敢言不已者, 貪邪庸賤竝據高位, 害於國政, 累於聖德者甚大耳。 況士洪終成廟之世, 不復錄用。 殿下命考《實錄》, 灼知奸狀, 固當終身廢棄, 不使復汚朝廷, 而乃欲峻其級、榮其身何也, 昔齊桓公之郭, 問父老曰: “郭何故亡,” 曰: “善善而惡惡也。” “善善而惡惡, 何至於亡,” 曰: “善善而不能用, 惡惡而不能去, 所以亡也。” 今殿下知士洪之奸, 而不能去, 何貴於知惡, 臣等恐危亡之禍, 或萌於今日也。 臣等又聞: “災不妄作, 由人所召。” 雷奮孟秋, 雹降夏月, 白氣竟天, 太白晝見, 此皆災變之大者。 是必天心仁愛殿下, 使之警悟, 而反敎之曰: “太白之見, 自古有之。 豈爲士洪而然也,” 此非人君之言也。 昔宋臣劉隨言於仁宗曰: “邪妄小人, 急圖富貴, 顧其資望, 不得陞遷, 謀傾陷於端士, 期進用於明時, 稍萌凶慝, 亦動星辰。” 又曰: “政有失而不改, 天垂象而不懼, 此危亡之道也。” 殿下當祇畏上穹, 憂勤庶政, 痛自責躬, 廣視遠聽, 思所以盡人事, 答天戒耳, 未可謂之適然而慢之也。 伏願殿下, 更加畏省, 修德行政, 毋蹈危亡之轍。
연산 58권, 11년(1505 을축/명홍치(弘治)18년) 5월 19일(계묘) 3번째기사
이항, 이봉과 어미 정금이의 가산을 적몰하여 해외에 내치고 중외에 효유하게 하다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천륜(天倫)이 비록 중하나 대의(大義)는 폐할 수 없으니, 은휼(恩恤)을 경시하고 의리(義理)를 중시하는 수가 있다.
이항(李㤚), 이봉(李㦀)의 어미 정금이(鄭金伊)는 지극히 천한 몸으로 후궁의 열에 채워져 신분에 넘치는 은택(恩澤)을 받았거늘,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모르고 도리어 질투를 내어 왕후께 대항하고자 넌지시 무함하여 드디어 큰 변고를 가져왔으니, 이를 차마 이루 말하랴!
항, 봉은 곧 그 소생이며 나에게는 천륜의 친속이나, 실로 한 하늘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므로, 이미 그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고 해외(海外) 4992)에 가두게 하여, 행여 나의 영원한 통분을 풀려 하였다.
대저 애강(哀姜)4993)은 노(魯)에 있어서 오히려 임금의 어머니이나《춘추(春秋)》가 이를 끊어서 그 어버이로 여기지 않았거늘, 하물며 항, 봉은 정금이의 친자식임에랴. 끊어서 친(親)으로 여기지않음이 의리에 당연함을 조정에 있는 신하라면 누가 모르랴마는, 먼 지방의 낮은 백성이 잘 알지못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 그 죄상을 드러내어 널리 중외를 깨우치도록 하라”하였다.
註4992]해외(海外):여기서는 섬을 뜻함.註4993]애강(哀姜):노장공(魯莊公)의 부인. 성품이 음탕하여 경보(慶父)와 간통하였는데, 장공이 죽고 자반(子般)이 서자, 경보와 모의하여 그를 죽이고 자반의 아우 민공(閔公)을 세웠다가, 또 그를 죽이니, 애강의 아버지인 제환공(齊桓公)이 민공의 형 희공(僖公)을 세우고 애강을 본국에 불러다가 독살(毒殺)하였음
○傳旨, “天(綸)〔倫〕雖重, 大義難廢, 恩或有所輕, 而義或有所重。 㤚、㦀之母鄭金伊, 以至賤之軀, 充後庭之列, 叨恩濫澤, 不知戒懼, 反生嫉妬, 欲抗椒闈, 陰成讒構, 遂致大變, 言之可忍, 㤚、㦀是其所出, 於予雖天屬之親, 實不共戴天之讎, 已令籍其家, 幽之海外, 庶洩予終天之痛。 夫哀姜於魯, 猶是君母, 《春秋》絶之, 不成其親, (兄)〔況〕㤚、㦀鄭金伊之親子乎, 絶不爲親, 義有攸歸, 在廷之臣, 孰不知之, 其在遐方細民, 容有未盡知者, 宜暴其狀, 廣諭中外。”
중종 7권, 3년(1508 무진/명정덕(正德)3년) 11월 10일 갑진 1번째기사
조강에서《춘추》제환공의 일, 군직체아, 병조의 권한 남용등을 아뢰다
조강에 나아갔다. 강(講)이《춘추(春秋)》제환공(齊桓公)의 일에 이르러,
동지사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등용함으로써 제(齊)나라가 다스려졌다가, 수도(竪刀)의 역아(易牙)를 등용한 뒤에는 어지러워졌으니, 군자와 소인의 진퇴(進退)는 실로 국가의 치란(治亂)에 관계되는 것입니다”하였다.
강을 마치고, 장령 서지(徐祉)와 정언 이희증(李希曾)이 앞의 일을 논계하였다. 서지가 또 아뢰기를,
“군직 체아(軍職遞兒)에 관하여는 의논한 재상이 병조(兵曹)로 더불어 그 의논을 부회(傅會)하여 60명만 제거하고 1백명은 그대로 두었으니, 이는 너무도 불가한 일입니다. 병조에서 가관(假官)1904)을 많이 내어, 일을 마치었는데도 해임하지않고 녹을 받도록 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체아직은 사사로이 시은(施恩)하는 그릇이 되어 버렸습니다”하고,
희증이 또 아뢰기를,
“변장(邊將)이 그 군관을 자천(自薦)하였으나, 병조에서는 그 자천한 사람을 버리고 그들이 아는 자를 차임하였으며, 또 군관의 재직 기한이 만료되지 않았는데 병조가 다른 사람을 예차(預差)한 것은 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실로 권한을 농락할 조짐입니다”하였다.
○甲辰/御朝講。 講至《春秋》齊桓公事, 同知事鄭光弼曰: “桓公用管仲而齊國理, 用竪刀、易牙而亂。 君子、小人進退, 實關國家治亂。” 講訖, 掌令徐祉、正言李希曾, 論啓前事, 徐祉且曰: “軍職遞兒, 議得宰相, 乃與兵曹, 傅會其議, 只除六十, 而一百仍舊, 此甚不可。 兵曹多出假官, 雖事畢, 仍不遞, 使之受祿。 是以遞兒, 爲私自施恩之器也。” 希曾又曰: “邊將自望其軍官, 而兵曹棄其自望, 以所知者差之。 且軍官未箇滿者, 兵曹預差他人, 非徒有違於法, 實弄權之漸。”
중종 22권, 10년(1515 을해/명정덕(正德)10년) 8월 8일(임술) 1번째기사
폐비 신씨의 복위를 간한 담양부사 박상등의 상소문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 순창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함께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그 소(疏)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제왕의 하늘을 이어 극(極)을 세우는 도리는 처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러므로, 단서를 만들고 처음을 접하는 것이 올바른데서 나오면 큰 기강과 큰 근원이 질서정연하게 빛나고, 위에서 움직이면 만가지 일과 만가지 교화에 미치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듯 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한결같이 올바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하면서 교화의 성취를 바라는 것은, 비유하면 그 근원을 흐려 놓고 흐름이 밝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있은 뒤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뒤에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뒤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뒤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뒤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뒤에 상하가 있고, 상하가 있은 뒤에 예의(禮義)를 시행할 수 있다’하였으며,《시경(詩經)》의 대서(大序)에 이르기를 ‘주남(周南), 소남(召南)은 처음을 바루는 도리요, 왕화(王化)의 기초이다’하였습니다.
대저《역경》에 건곤(乾坤)을 으뜸으로 하고《시경》에 관저(關雎)5809)를 처음으로 한 것은, 배필(配匹)하는 것이 인륜의 시초요 만화의 근원이며, 강기(綱紀)의 으뜸이요 왕도(王道)의 큰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노애공(魯哀公)이 공자(孔子)에게 묻기를 ‘면류관을 쓰고 친영(親迎)하는 것은 너무 중하지 않습니까?’하니, 공자가 초연(,然)히 정색하면서 대답하기를 ‘이성(二姓)의 결합은 선성(先聖)의 뒤를 이어 천지,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는 것인데,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너무 중하다고 이르십니까?’하였으며, 제환공(齊桓公)은 규구(葵丘)의 모임5810)에서 초명(初命)에 ‘첩을 처로 삼지말라’하였습니다. 대저 공자가 초연히 정색한 것은 어찌 애공이 천지, 종묘, 사직의 주인됨을 근엄하게 여기지않고 그 예를 업신여기는 것을 한심스럽게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환공은 패자(覇者)이었을 뿐인데도, 오히려 능히 배필의 중함을 알아서 그 분수를 어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두 진실로 단서를 만들고 처음을 정하는 도리이니, 왕자(王者)로서 삼가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옛날 주(周)나라가 창시(創始)될 적에 태왕(太王), 왕계(王季)5811), 문왕(文王)이 모두 융성한 덕이 있어서, 능히 제가(齊家), 치국(治國)하는 도리를 높여 예도를 문란시키지 않았으므로 대대로 어진 왕비를 얻어, 인륜의 근본을 바르게 하고 왕화의 근원을 맑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나라 사람의 시에 이르기를 ‘고공단보(古公亶父)5812)가 아침 일찍 말을 달려 서쪽물가를 좇아 기산(岐山)아래 이르러, 같이온 강녀(姜女)5813)와 더불어 집터를 살펴봤다’한 것은, 태왕이 적인(狄人)의 난을 당하여 황황한 처지임에도 돈독한 은애(恩愛)를 어기지않고 왕실의 기틀을 세웠음을 말한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덕스런 태임(太任)5814)이 문왕(文王)의 어머니이니, 주강(周姜)5815)에게 사랑을 받아 경실(京室)의 며느리가 되었다’한 것은, 왕계(王季)가 이처럼 장경(莊敬)한 덕이 있으므로, 배필이 능히 주강에게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여 주나라 왕실의 왕비됨을 잃지않았고, 경사스러움이 자손에게 계속 되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예문으로 그 길일(吉日)을 정하시어 위수(渭水)에서 친히 맞을 적에 배로 다리를 만드니 그 광채가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또 이르기를 ‘종공(宗公)5816)에 순종하여 귀신들이 원망하지않으며 애통하지 않았음은, 과처(寡妻)5817)에게 모범을 보여 형제에게까지 이르러 나라를 다스렸다’한 것은, 문왕이 혼례를 중히 여겨 얌전하고 덕있는 왕비를 얻어서 묘사(廟社), 신기(神祇)의 주인으로 삼아, 위로는 거룩한 태임(太任)의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규문(閨門)에 본보기가 되어, 방국(邦國)에 왕화를 유행시켰음을 말한 것입니다.
대저 주나라가 처음을 바르게 하고 근본을 단정하게 한 바가 순수하고 결백하여 결함이 없으며, 덕화가 도타와서 투박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하였으므로, 그 왕화가 상자(床笫)5818)사이에서 비롯하여 양양(洋洋)하게 조정위에 흘러넘치고 패연(沛然)히 사방에 퍼져서, 천지의 조화가 음양(陰陽)에 근본하여 성신(星辰)과 한서(寒署)를 운행하고 산천(山川), 조수(鳥獸), 초목(草木)을 생장 번식시키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지아비는 지아비답고 지어미는 지어미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다우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서, 그 사이에 한치의 간사함이나 터럭만한 더럽힘도 감히 간여함이 없어 하늘과 땅이 자리하고 만물이 육성되기에 이르렀으며, 추우(騶虞)와 인지(麟趾)5819)의 아름다운 상서가 모두 이르러 면면히 8백년을 지냈으니, 이 어느 것이나 관저(關雎)와 작소(鵲巢)5820)의 교화가 아닌 것이 있습니까?
그 쇠미하여짐에 미쳐서는 내교(內敎)가 무너지고 해이해져, 까닭없이 정후(正后)를 폐하여 물리쳐 마침내 융적(戎狄)의 재앙을 부른 자도 있고, 첩을 적(嫡)으로 삼아 예의 분수를 어지럽혀 마침내 쟁탈(爭奪)하는 혼란을 부른 자도 있습니다.
기타 당고종(唐高宗)같은 이는 왕황후(王皇后)를 폐함에5821) 마침내 종묘사직이 복멸(覆滅)되어 자손이 끊어졌으며, 송철종(宋哲宗)은 맹황후(孟皇后)를 폐함에 본원(本源)이 전착(顚錯)되고 음사(陰邪)가 빚어져 정강(靖康)의 변5822)이 일어나게 하였거늘, 하물며 첩을 부인으로 삼아 떳떳한 예를 경멸하게 한다면 그 재앙이 어찌 작겠습니까?
위문제(魏文帝)가 곽귀빈(郭貴嬪)을 세워 황후로 삼으려하자 중랑(中郞) 잔잠(棧潛)이 간쟁하였고, 당명황(唐明皇)이 무혜비(武惠妃)를 세워 황후로 삼으려하자 어사(御史) 반호례(潘好禮)가 간쟁하였습니다.
대저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치란흥망의 자취를 환히 징험할 수 있음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제왕의 배필을 중히하고 풍화(風化)의 근본을 바로하고자 한다면, 구차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등이 삼가 보건대, 옛 왕비 신씨(愼氏)가 물리침을 입어 밖에 있은 지 이제 거의 일기(一紀)5823)가 됩니다.
신은 그 당초의 연유를 상세히는 모르겠으나, 무슨 큰 까닭과 무슨 큰 명분으로 이런 비상(非常)한 놀랄 만한 일을 하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대저 임금이 대통을 계승하고 왕위에 오르면 먼저 부부의 도리를 바루어 천지와 같게 해서, 안으로는 음교(陰敎)를 다스리고 밖으로는 양덕(陽德)을 다스려, 묘사(廟社),신기(神祇)를 나란히 주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대저 배필(配匹)은 그 중대함이 이와 같아서, 진실로 어버이에게 승순하지 못했거나 종묘사직에 죄를 얻음이 아니면, 비록 작은 허물이나 미세한 잘못이 있더라도 결코 끊어버리는 의리가 없거늘, 하물며 명분도 없고 까닭도 없이 폐척(廢斥)하였음에리까?
그 어찌 천심(天心)을 누리고 종조(宗祧)5824)를 받들 수 있겠습니까?
한광무(漢光武)는 원대(怨懟)때문에 곽후(郭后)를 폐위시켰고, 송인종(宋仁宗)은 투기(妬忌)때문에 역시 곽후(郭后)를 폐위하였으되, 당세와 후세에서 오히려 기자(譏刺)하여 마지않아 밝은 임금의 큰 누(累)로 여겼습니다.
지금 신씨는 폐위할 만한 까닭이 있음을 듣지못하였음에도 전하께서 폐위하신 것은 과연 무슨 명분입니까?
정국(靖國)5825)당초에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성희안(成希顔)등이 이미 신수근(愼守勤)을 제거하고는, 왕비가 곧 그 소출이므로 그 아비를 죽이고, 그 조정에 서면 뒷날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바르지못하게 자신을 보전하려는 사사로움을 위하여 폐위시켜 내보내자는 모의를 꾸몄으니, 이는 진실로 까닭도 없고 또 명분도 없는 것입니다.
신씨는 전하께서 용잠(龍潛)5826)하시던 처음부터 정복(貞卜)이 아름답게 화협하여 좋은 배필을 이루었고, 의식을 갖추어서 자전(慈殿)에게 알현하여 고부(姑婦)의 의리가 이미 정하여졌었습니다.
전하께서 들어가 대통을 이으심에 미쳐서는 중곤(中壼)5827)의 자리에 나아가 신민(臣民)의 하례를 받으시고 묘사의 신주(神主)를 받드셨으니, 전하에게는 배필이 이미 세워졌고 조종(祖宗), 신기(神祇)에게는 빈조(蘋藻)5828)를 받듦에 맡길 곳이 있게 되었고, 국인에게는 모후(母后)의 명분이 밝혀졌고, 자전께서는 뜻을 거슬렸다는 꾸지람이 없으셨고, 자주(笫稠)5829)에는 버릴 만한 허물이 없었고, 신인(神人)이 슬퍼하고 원망하는 허물이 없었는데, 전하께서 강한 신하의 제어를 받아 능히 그 항려(伉儷)5830)의 중함을 보전하지못하셨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빈천할 때에 사귄 벗은 잊어서는 안되고,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버리지 않는다’하였는데, 신씨가 대저(代邸)5831)에서 술과 장을 담그고 쇄소(灑掃)를 받든지 무릇 몇 해였습니까?
사생결활(死生契闊)5832)의 의로 서로 믿었고 혼조(昏朝)의 비바람을 함께 맛보앗는데, 하루아침에 귀는 구오(九五)5833)에 오르고 부는 천승(千乘)을 소유하게 되자, 헌신버리 듯하여 높고 낮음의 처지를 달리하니, 마치 하나는 운천(雲天)의 오른 듯하고 하나는 구연(九淵)5834)아래에 빠져들어간 듯합니다. 지존(至尊)의 배필과 금술좋은 우애로 옥전(玉殿)을 떠나 여염집에 섞여 살면서 경상(景象)이 쓸쓸하므로 듣는 이가 눈물을 흘리니, 태왕이 적인(狄人)의 난을 당하여 황황한 처지에서도 은애를 돈독히 하여 어기지 않던 것과 다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아들이 그 아내와 사이가 매우 좋더라도 부모가 기뻐하지않으면 쫓고, 아들이 그 아내를 못마땅하게 여기더라도 부모가 이르기를 「나를 잘 섬긴다」하면, 아들은 부부의 예를 행하여 죽을 때까지 변치않는다’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폐출(廢出)하는 의(義)는 한결같이 부모의 허락을 받는 것이 분명하거늘, 지금은 자전(慈殿)께서 명하지않았는데도 왕실(王室)의 지어미를 경솔히 바꾸었으니, 이는 왕계의 일과 다릅니다.
《역경》에 이르기를 ‘부부의 도리는 오래지않아서는 안된다’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부부는 종신토록 변하지 못하는 것이다’하였으니, 그 오래도록 변하지못하는 소이는, 근윤(巹酳)5835)의 예를 지키고 만세의 시초를 중히 여겨 감히 바꾸지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처음 예문으로 정한 배필을 생각하지 않고, 보불(黼黻)5836)과 빈번(蘋蘩)5837)의 주인을 돌보지않은 채 흙덩이처럼 버려 내형(內刑)5838)을 떨어뜨리니, 이는 문왕의 일과 다릅니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도리는 가정에 근본되는 것이므로 한번 집을 바로 하면 천하가 안정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난망(亂亡)이 일어나는 것은 가법(家法)이 바르지 못함에서 근원하지 않음이 없으니, 아조(我朝)의 가법은 모두 바른데서 나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태조는 창업하여 모범을 보이신 성군이시면서도 폐총(嬖寵)에 빠져 적서(嫡庶)의 분수를 어지럽히고자 하셨고, 선릉(宣陵)5839)에 미쳐서는 암담(黯黮)5840)하였기 때문에 송인종(宋仁宗)의 그릇된 전철5841)을 밟았습니다. 근본 세움이 한번 어그러지자, 그 유파(流波)가 연산군(燕山君)에 이르러 드디어 넓고 커져서 강상(綱常)이 끊어지매, 종묘와 사직이 거의 폐허가 될 뻔하였으며 그 화가 참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뜻밖에 크게 닥쳐온 좋은 운수를 얻고 여조(輿眺)5842)의 붙좇음에 순응하여, 얼올(臲卼)5843)을 헤치고 평탄한데로 돌리시고 황매(荒昧)한 것을 도려내어 맑은데에 오르게 하셨으니, 이는 정히 삼령(三靈)5844)이 눈을 씻고 우러러 바라던 바입니다. 새로 왕위에 오르시는 날에 마땅히 한집안의 근본을 단정히하고, 천지 생민을 위하여 극(極)5845)을 세우고 만세의 넓은 기틀을 크게 세워서, 빛나고 밝기가 해와 달이 중천에 걸린 것과 같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기회였는데, 머뭇머뭇하여 능히 스스로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륜은 왕화의 근원인데 위에서 스스로 먼저 어지럽혔으니 이러고도 치화(治化)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그 의혹됨을 많이 보겠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홀로 전하만의 허물이시겠습니까?
저 당초에 권세를 끼고 용사(用事)하던 신하의 죄는 죽여도 그 죄가 남습니다. 저 원종(元宗)등도 명분의 크기가 하늘과 땅처럼 분명하여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오직 그 자신만을 보전하려는 간교한 계교가 뛰어났기 때문에, 방사하고 거리낌이 없이 초매(草昧)5846)하고 위의(危疑)한 때를 타서, 전하께서 자기들의 소위를 감히 이기지 못할 것이라하여, 군부겁제하기를 마치 다리사이와 손바닥위에 놓고 희롱하듯 하고, 국모(國母)를 내쳐 쫓기를 병아리새끼 팽개치듯 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하였거늘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그 마음을 미루어보면 비록 동탁(董卓), 조조(曹操)5847)의 소행까지도 뭐 꺼리겠습니까?
인신(人臣)은 난역(亂逆)하지아니하여야 하며 난역하면 반드시 베는 것은 《춘추(春秋)》5848)의 의리이니, 이는 정히 이런 무리를 위하여 설정한 것입니다.
만약, 신씨(愼氏)가 죄인의 소출이어서 지존(至尊)을 짝하고 종조(宗祧)를 주장하게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으로써 핑계한다면, 수근(守勤)의 죄가 본디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어찌 족히 이로써 왕비를 연루시킬 수 있습니까?
가사, 종묘, 사직에 죄를 얻어 벌을 받았다하더라도 왕비는 참여하여 들은 일이 없으니, 또한 이것을 허물로 삼아 미칠 바가 아닙니다.
옛날 한선제(漢宣帝)때에 곽씨(藿氏)가 모역하다가 일족이 주륙(誅戮)5849)되었으되 곽후(霍后)는 참여하여 듣지않았기 때문에 폐위되지않았고, 아조의 심온(沈溫)5850)은 헌릉(獻陵)5851)에게 죄를 입었으되 소헌왕후(昭憲王后)58 52)의 옥도(玉度)5853)에 흠이 되지않았습니다.
지나간 전철을 환하게 징험할 수 있거늘, 하물며 신수근은 당초 나라일에 관계된 죄가 아니었으니 주가(周家)의 의친(議親)5854)하는 법전에 준하여 비록 용서하여 보전케 하여도 가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죄를 더하고 또 기필코 왕비를 연루시켜 폐출(廢黜)하였으니, 이는 자신만을 아끼고 임금은 무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왕실의 주손으로서 들어가 대통(大統)을 이으시었으니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여 삼대(三代)의 대 이음보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원종등이 국가 계획을 잘하지 못하여 전하를 쇠세(衰世)의 지역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왜냐하면, 연산군의 무도함이 극심하여 삼강(三綱)이 민멸되어 다시 사람의 도리가 없어져, 신기(神祇)가 싫어하고 조종(祖宗)이 거절하고 친척이 배반하고 인심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미 폐위된 독부(獨夫)5855)가 되었으므로 이성(異姓)의 손에 대통이 넘어가게 되었더니, 하늘의 도움과 사방의 구가(謳歌)5856)를 힘입어 삼보(三寶)5857)가 전하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전하께서 이에 이른 것입니다.
대저, 왕통을 계승하는 것은 천하고금의 큰일이므로, 진실로 명백 정대해야 하며 조그만 터럭만큼이라도 숨김이 있어서는 안되며, 태양이 허공에 걸려 만물이 쾌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아야 하니, 그 어찌 구차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정(反正) 당초에 마땅히 대비(大妃)의 명을 받들어 연산군이 천지와 조종과 신민에게 거절된 죄를 낱낱이 세어 종묘와 사직에 폭로한 뒤에, 위로 천자에게 고하고 명을 청하여 대위(大位)에 오르심을 밝혀야 하였습니다.
대저, 이와같이 대통을 이어야 왕위를 계승하는 도리가 명백 정대하여 숨김이 없게 되고, 사방만세가 우러러 보기를 태양이 허공에 걸린 것과 같이 하리니, 어찌 위대하지 않았겠습니까?
어찌하여 박원종등은 대의(大義)에 어두워서, 전하께서 광명정대하게 대통이으신 것을 짐짓 선위를 교대하는 듯이 글을 지어 천조(天朝)를 속였는지 애석합니다.
전하께서 강한 신하에게 제어를 받아 가교(家敎)가 어그러져서, 인륜의 근본과 왕화의 근원과 처음을 바루는 도리를 밝게 심고 크게 드날리지 못하셨으니, 무엇으로 중화(中和)5858)와 위육(位育)5859)의 공을 이루어 하늘 마음을 안정시키겠습니까?
만화(萬化)가 따라서 날로 박잡(駁姉)하여지고 풍교(風敎)가 자연히 퇴박(頹薄)하여지며, 어그러진 기운이 불울(拂鬱)5860)하고 음양이 차서(次序)를 바꾸고, 일월이 박식(薄蝕)하고, 샘물이 끓어오르고, 꽃과 열매가 겨울에 열리고, 많은 서리가 여름에 내리고 또 비오고 볕들고 바람불고 우박내리며, 살별, 무지개, 고충의 요괴에 이르기까지가 간간이 나타나기도 하고 계속되기도 하였습니다.
요사이 후정(後庭)5861)의 반열이 슬픔을 그친 지 얼마 안되어 장경왕후(章敬王后)5862)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곤위(壼闈)가 슬픔에 잠겨 고요하니, 생각건대 하늘이 전하를 경계함이 깊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화한 기운은 상서를 이르게 하고 어그러진 기운은 괴이함을 이르게 한다’하였고, 옛적에 ‘여자가 원한을 품으니 연(燕)나라에 서리가 내렸다’하였습니다.
저 궁항 벽촌의 미천한 한 계집은 보잘 것 없어서 하늘에 관계없을 것같은데, 그 맺힌 원한이 족히 하늘을 감동시켜 서릿발을 내리는 변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지존(至尊)의 배필로서 천지, 묘사, 신인(神人)을 제사지내어 상제(上帝)가 가만히 돌보는 사람인데, 까닭없이 폐척(廢斥)하여 한 방에 낙막(落莫)5863)하게 지내면서 깊이 그윽한 원한을 맺게 하였으니, 천지의 화기가 상하고 거듭하여 계속되는 여러 가지 괴변이 오게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성념(聖念)도 또한 이에 미침이 있으십니까?
아, 이미 지나간 과실은 그만이나 어찌 다시 바로 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한번 생각을 달리할 계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지금 내정(內政)의 주인이 비었으니, 마땅히 이때를 계기로 쾌히 결단하셔서 신씨(愼氏)를 곤후(坤后)5864)의 자리에 앉히시면, 천지의 마음이 흠향할 것이요 조종의 신령이 윤허할 것이고, 신민의 희망에 부응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장차 이 자리를 누구에게 부탁하고자 하십니까?
이미 떨어진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보존하고 어그러진 옛 은혜를 온전히 하시면, 이는 바로 대의와 정리에 합당한 것으로 환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가사 어떤 사람이 이미 폐위한 것을 이유로 삼아 망령되이 이의(異議)를 낸다면, 이는 전일 폐위하자는 의논을 주장한 신하에게 아부하여 관망하다가 다시 전하의 가법(家法)을 어지럽히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 원종(元宗)등이 비록 왕실에 큰 공이 있었다고 하나, 그때를 당하여 천명과 인심이 모두 전하에게 돌아갔으니, 비록 이 무리들이 아니더라도 신기(神器)가 장차 누구에게 돌아갔겠습니까?
마침 대인(大人)5865)이 일어나는 기회를 타고 그 힘을 바친 것뿐이었습니다. 그 공을 믿고 방자하게 꺼림없이 군부(君父)를 겁제하여 국모를 내쫓아 천하고금의 큰 분수를 범하였으니, 이는 만세(萬世)의 죄라 공으로 이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그 발효(跋扈)할 때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확고하게 왕후 폐위하자는 청을 들어주지않으시고, 협제(脅制)한 정상을 상고하여 전형(典刑)5866)을 밝게 바루어야 했었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자약(自若)하게 영화와 부를 누리게 하여 주었으니 족히 그 공을 보상하였습니다. 이제 이미 죽었으나, 마땅히 그 죄를 밝게 바로 잡아 관작을 추탈(追奪)하고, 안팎에 효유하여 당세와 만세로 하여금 큰 분수는 절대로 범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환히 알도록 하여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몇가지 일에 대하여 의리에 질정하셔서 지체하고 어려워하지 말고 처리하시면, 이왕의 잘못을 단번에 씻을 수 있으며, 인륜의 근본과 왕화의 근원과 처음을 바로하는 도리가 맑고 광대하여 천지가 캄캄하였다가 다시 개어 탁 트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또 능히 정일(精一)하게 하시고 자신을 삼가서, 성의(誠意)와 정심(正心)하는 마음을 정치하는 이치에 미루어 확충시키면, 주가(周家)의 인지(麟趾),추우(騶虞)의 왕화가 이로부터 성취될 것이고, 왕업도 8백년을 지나 만세에 이르도록 무궁할 것입니다.
신등이 소원(疏遠)한 신하로서 직위를 넘는 책망을 피하지않고 감히 면총(冕聰)5867)을 더럽히는 것은, 진실로 이 몇 가지 일이 분수와 의리에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하기 때문에, 마음속에만 간직하여 두고 한번 임금에게 들려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신등이 가슴에 분울(憤鬱)을 품은 지 오래면서도 전에 능히 말을 내지못하였던 것은, 정히 장경왕후(章敬王后)께서 중전에 계시므로 신씨를 복위시키면 장경왕후의 입장이 곤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장경왕후께서 돌아가시고 곤위(壼位)가 다시 비었으니, 정히 도로 바로잡을 기회이고 또 구언(求言)하시는 때를 당하였으니, 이러므로 신등이 급급히 아뢰는 바입니다. 방금 천변이 사라지지 않고 정교(政敎)가 순수하지 못하여 여러 가지 일이 방도에 어긋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힘씨 공경스럽게 하시어 능히 천심(天心)을 누리소서.
신등의 구구한 회포와 답답한 생각이 아직도 많으나, 모두 다 말씀드리지 못하니 삼가 전하께서 굽어 살피소서”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 의논이 매우 올바른 것인데, 좌우의 의논이 분분하여 서로 시비(是非)를 하고, 나중에는 양시양비(兩是兩非)의 말이 나와,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사림(士林)이 반목(反目)5868)하여, 그 화(禍)의 계제(階梯)가 참혹하였다.
상이 소(疏)를 정원에 내리고 전교하기를,
“이는 큰일이다. 어찌 소신(小臣)의 말을 듣고서 할 수 있겠는가?
비록 해조(該曹)에 내리더라도 또한 시행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 소는 정원에 머물러두는 것이 가하다. 그리고 옛적에 이르기를 ‘출납(出納)5869)을 미덥게 한다’하였다.
정원은 후설(喉舌)5870)의 곳이어서 다만 위에서 전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래의 아뢰는 바도 분명히 살펴서 아뢰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출납을 미덥게 하였다’고 할 만한 것이다.
평상시에 상언(上言)하는 등의 일은 정원이 으레 입계(入啓)하여야하나, 만일 구언(求言)에 의하여 봉사(封事)5871)를 올린 것은, 첫 면에 ‘임금앞에서 개탁(開拆)하소서’라고 적혔어도, 심히 굳게 봉하지않았으면 뜯어보고 아뢰어야 한다. 이 뒤로는 비록 그 위아래 끝을 풀로 단단히 봉하여 뜯어 볼 수 없게 한 글이라도 모두 뜯어본 뒤에 아뢰면, 출납을 미덥게 한다는데에 합당할 것이다”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박상(朴祥)등의 봉사는 위아래를 풀로 봉하여 뜯어 볼 수 없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교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이와 같이 하게 하면, 정직한 말을 올려 권간(權奸)과 환척(宦戚)을 꺼리지않고 충성스러운 속마음을 토로하는 이들이, 반드시 억눌리고 막혀서 상달(上達)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면 비록 흉소(兇小)가 용사(用事)하고 군자가 폐척(廢斥)되어 종묘사직이 망하게 됨에 이르러도, 만약 간사한 자가 정원(政院)에 앉았으면 임금에게 들어가는 문이 닫혀져 아랫사람의 실정이 막혀서 통하지 아니할 것이니, 그 국가의 해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임금의 한 가지 호령과 한 마디 말은 곧 법이 되는 것인데, 그 끝과 처음을 생각하지 않고 이와 같이 잘못할 수 있겠는가? 상이 이렇게 실언하였으니 아, 위태하도다. 경세창(慶世昌)은 도승지(都承旨)로서 정원에 있으면서 한 마디도 그 잘못을 밝히지 않았다. 경세창은 용렬하고 망령된 속인이라 진실로 헤아릴 것도 없거니와, 신상(申鏛)은 조금 지식이 있으면서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이자화(李自華), 윤세호(尹世豪), 성운(成雲), 윤은보(尹殷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박상(朴祥)등이 논한 중국에 명을 청한 과실과 왕비를 폐한 잘못은 정히 유자(儒者)의 곧은 의논이며, 그 주의가 지극히 충실하고 곧은 말이다. 비록 간혹 맞지않은 의논이 있긴 하나 어찌 감히 이때문에 나무라겠는가? 상은 출납을 미덥게 한다는 뜻을 몰랐고 아랫사람도 역시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그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註5809]관저(關雎):《시경》의 편명으로 문왕이 사씨(姒氏)를 얻어 상하가 화목하고 교화가 널리 퍼졌으므로 궁중(宮中)사람이 감동하여 찬미한 시.註5810]규구(葵丘)의 모임:규구는 춘추시대 제나라의 지명. 주양왕(周襄王)원년, 즉 노희공(魯僖公)9년에 제환공이 규구에서 제후들을 모아 수호(修好)하고 주나라 왕실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모임. 이때 맹세한 내용의 첫 조목에 이 말이 있다.《좌전(左傳)》희공(喜公)9년.註5811]태왕(太王),왕계(王季):태왕은 주나라 문왕의 할아버지 고공단보(古公亶父)인데, 무왕이 천자가 된 뒤에 태왕으로 추존하였다. 왕계는 태왕의 막내아들로 문왕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계력(季歷)인데, 무왕이 왕계라고 추존하였다.註5812]고공단보(古公亶父):태왕.註5813]강녀(姜女):태왕의 비 註5814]태임(太任):왕계(王季)의 비.註5815]주강(周姜):태왕의 비.註5816]종공(宗公):종묘와 선공(先公). 註5817]과처(寡妻):아내.註5818]상자(床笫):즉 평상과 삿자리. 이것들은 부인의 침실에 있는 것이므로 부녀(婦女)를 일컫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규문(閨門)을 가리킨다.註5819]추우(騶虞)와 인지(麟趾):모두《시경》의 편명. 추우는 문왕의 왕화가 백성에게 널리 퍼진 나머지, 초목과 금수에게까지 이른 것을 읊은 시. 인지는 공자(公子)의 신후(信厚)함과 공족(公族)의 창성함을 노래한 시로서, 공자들이 신후하고 예도에 서로 응함이 기린의 덕과 닮은 것을 읊은 시.註5820]관저(關雎)와 작소(鵲巢):모두《시경》의 편명. 관저는 문왕과 태사의 혼인에 대하여 찬미한 시이고, 작소는 제후국 부인이 문왕의 덕화를 입어 모두 순일(純一)한 덕이 있었음을 찬미한 시이다.註5821]당고종(唐高宗)같은 이는 왕황후(王皇后)를 폐함에:태종(太宗)의 아홉째아들로서, 황후 왕씨(王氏)를 폐하고 재인(才人) 무씨(武氏:측천무후)를 왕후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왕실에 큰 화를 초래하였다.《당서(唐書)》권2고종기(高宗紀).註5822]정강(靖康)의 변:정강은 송흠종(宋欽宗)의 연호. 정강2년(1127) 금군(金軍)이 남하하여 송나라 수도 변경(汴京)을 함락하고, 휘종(徽宗), 흠종을 납치하여 간 사변.註5823]일기(一紀):12년.註5824]종조(宗祧):종묘.註5825]정국(靖國):중종반정.註5826]용잠(龍潛):즉위하기 전.註5827]중곤(中壼):왕후의 자리.註5828]빈조(蘋藻):제물(祭物).註5829]자주(笫稠):임금을 모시는 내실인데 내교(內敎)의 뜻.註5830]항려(伉儷):배필.註5831]대저(代邸):왕위에 오르기 전을 말한다.註5832]사생결활(死生契闊):생사별리(生死別離)를 말한다.註5833]구오(九五):제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양효의 5번째.註5834]구연(九淵):깊은 못.註5835]근윤(巹酳):혼례식에서 마시는 술.註5836]보불(黼黻):옛날 임금의 대례복 치마에 놓는 수.註5837]빈번(蘋蘩):제물(祭物).註5838]내형(內刑):규문의 법도.註5839]선릉(宣陵):성조(成宗)의 능호.註5840]암담(黯黮):사리에 어둡다는 뜻.註5841]송인종(宋仁宗)의 그릇된 전철:북송 제4대 임금. 황후 곽씨(郭氏)를 소박하고, 아름다운 궁인(宮人)들을 괴었는데, 한번은 곽황후가 인종이 궁인에게 자기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궁인과 다투자, 이를 말리는 인종의 얼굴을 할퀴었다. 이로 인하여 인종이 곽황후를 폐하였는데, 성종(成宗)이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 윤씨(尹氏)를 폐위시킨 경우와 같으므로 인용하였다.註5842]여조(輿眺):여망.註5843]얼올(臲卼):흔들리고 불안함.註5844]삼령(三靈):천신(天神),지기(地祇),인귀(人鬼)를 말한다.註5845]극(極):한가운데, 즉 왕의 지위.註5846]초매(草昧):아직 질서가 정돈되지않은 것.註5847]동탁(董卓),조조(曹操):간신으로 모두 후한(後漢)때 사람. 이들은 당시 천자의 위세를 배경으로 하여 제후를 호령하였는데, 그 세력이 천자를 능가하여 천하가 어지러웠다.註5848]《춘추(春秋)》:공자가 비판 수정한 노(魯)의 역사서.註5849]한선제(漢宣帝)때에 곽씨(藿氏)가 모역하다가 일족이 주륙(誅戮):한선제때의 대장군 곽광(藿光)의 일을 일컫는다. 곽광은 무제(武帝) 이후 대사마(大司馬), 대장군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집권하였고, 소제(昭帝), 선제를 옹립하여 금위(禁闈)에 출입하기 20여년이어서 그 족당이 조정에 가득하였다. 곽광이 죽은 뒤 선제가 친정(親政)하면서 곽씨의 병권을 몰수하고, 그 일족을 모반죄로 주살하였다.《한서(漢書)》권68.註5850]심온(沈溫):조선조 태종때 정승. 자는 중옥(仲玉). 세종(世宗)의 국구(國舅). 세종 즉위 후 태종에게 죄를 얻어 사사(賜死)되었다.註5851]헌릉(獻陵):태종(太宗)의 능호.註5852]소헌왕후(昭憲王后):세종(世宗)비 심씨, 심온의 딸.註5853]옥도(玉度):왕후의 기거(起居), 체도(體度).5854]의친(議親):팔의(八議)의 하나인데 곧 임금의 단문(袒免)이상의 친족, 왕대비, 대왕대비의 시마(緦麻)이상의 친족, 왕비의 소공(小功)이상의 친족, 세자빈의 대공(大功)이상의 친족의 범죄자를 처벌할 때 형의 감면을 의정(議定)하던 일.註5855]독부(獨夫):악정을 하여 인민에게 배반당한 임금.註5856]구가(謳歌):임금의 어진 덕을 칭송함.註5857]삼보(三寶):토지, 인민, 정치.註5858]중화(中和):한쪽으로 치우치지않게 조화하는 것.註5859]위육(位育):천지가 자리하고 만물이 육성됨.註5860]불울(拂鬱):성을 내는 것.註5861]후정(後庭):후비나 궁녀 또는 그들이 거처하는 곳.註5862]장경왕후(章敬王后):인종(仁宗)의 어머니 윤씨(尹氏).註5863]낙막(落莫):마음이 쓸쓸한 모양.註5864]곤후(坤后):왕후.註5865]대인(大人):덕이 높은 사람.註5866]전형(典刑):법규.註5867]면총(冕聰):임금이 듣는 것.註5868]반목(反目):서로 다툼.註5869]출납(出納):임금의 명령을 신하에게 전달하고, 신하의 말을 왕에게 올리는 일.註5870]후설(喉舌):임금의 명을 출납(出納)하는 요직.註5871]봉사(封事):밀봉하여 왕에게 올리는 의견서.
○壬戌/潭陽府使朴祥、淳昌郡守金淨, 同上封事, 其疏曰:伏以, 帝王繼天立極之道, 莫不以正始爲本是故, 造端凝始者, 出乎正, 則大綱大源, 井井然光明, 動盪于上, 而達之于萬事、萬化者, 如影之隨形; 如響之應聲, 無往而不一于正矣。 反乎是而求化之成, 比猶溷其源, 而望流之淸, 不亦難矣哉, 《易》曰: “有天地然後, 有萬物; 有萬物然後, 有男女; 有男女然後, 有夫婦; 有夫婦然後, 有父子; 有父子然後, 有君臣; 有君臣然後, 有上下; 有上下然後, 禮義有所措。’《詩》大序曰: “《周南》、《召南》, 正始之道、王化之基。” 夫《易》首乾坤、《詩》始《關雎》, 配匹之際, 人倫之始, 萬化之原, 而綱紀之首、王道之大端也。 魯哀公問孔子曰: “冕而親迎, 不已重乎,” 孔子愀然作色而對曰: “合二姓之好, 繼先聖之後, 以爲天地、宗廟、社稷之主, 君何謂已重乎,” 齊桓公葵丘之會, 初命曰: “無以妾爲妻。” 夫聖人之愀然作色, 豈不以哀公慢天地、宗廟、社稷之主, 蔑裂其禮, 而爲之寒心乎, 桓公, 伯者耳。 猶能知配匹之重, 不欲舛逆其分焉。 是皆誠以造端、凝始之道, 王者所不可不愼也。 昔周家之創始也, 太王、王季、文王, 咸有盛德, 能隆齊家之道, 式禮不紊, 世得賢妃, 以正人倫之本; 以淑王化之源。, 故周人之詩曰: “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歧下, 爰及姜女, 聿來胥宇。”言太王當狄難遑遑, 而篤恩不違, 肇基乎王迹也。 又曰: “思齊太任, 文王之母, 思媚周姜, 京室之婦。” 言王季有此莊敬之德, 配能盡婦道于周姜, 不失爲周室之婦, 而毓慶源於子孫也。 又曰: “文定厥祥, 親迎于渭, 造舟爲梁, 不顯其光,” 又曰: “惠于宗公, 神罔時怨, 神罔時恫, 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言文王隆重婚禮, 得窈窕之妃, 爲廟社、神祇之主, 上以嗣聖任之徽, 下以儀法乎閨門, 而流化於邦國也。 夫周家之所以正始、端本者, 粹白而罔有瑕謬; 醲厚而罔有漓薄。 如是, 故其王化始于床第之間, 洋洋流動于朝廷之上, 沛然覃被于四方, 如天地之化, 本于陰陽, 橐龠乎星辰、寒暑; 磅礴乎山川、鳥獸、草木。 當是時也, 夫夫婦婦、父父子子、君君臣臣, 無有寸邪毫累, 敢干其間, 以至天地位、萬物育, 《騶虞》、《麟趾》休祥畢應, 緜歷于八百, 何莫非《關雎》、《鵲巢》之化也, 及其衰也, 內敎崩弛, 有無故廢斥后者, 而卒召戎狄之禍; 有陞妾爲嫡, 紊禮分者, 而竟速爭奪之亂。 其他如唐高宗廢王皇后, 而終見宗社覆滅、子孫勦絶, 宋哲宗廢孟皇后, 而本源顚錯, 陰邪釀蘗, 馴致靖康之變, 況以妾爲夫人, 瀆滅其常禮者, 其禍豈少哉, 魏文帝將立郭貴嬪爲后, 中郞棧潛爭之; 唐明皇將立武惠妃爲后, 御史潘好禮爭之。 夫古來治亂、興亡之迹, 燎然可驗如此, 誠欲重帝王之匹、正風化之本, 其可苟乎, 臣等伏見, 故妃愼氏, 被斥在外, 殆一紀于玆。 臣未詳厥初之由, 不知有何大故、擧何大名, 而爲此非常駭愕之事乎。 夫王者承統、纉緖, 先正夫婦之道, 以侔乎天地, 內以治陰敎, 外以理陽德, 齊主乎廟社、神祇。 夫配匹之際, 其重大如此, 苟非不順於親、獲罪於宗廟、社稷, 則雖有微諐雖細忒, 決無割絶之義, 矧無名無故而廢斥, 其何以享天心、承宗祧乎, 漢光武以怨懟而廢郭后, 宋仁宗以妬忌而亦廢郭后, 當世與後世, 猶譏刺不置, 以爲明君之大累。 今愼氏未聞有可廢之故, 而殿下之廢之, 果何名耶, 當靖國之初, 朴元宗、柳順汀、成希顔等, 旣除愼守勤, 則以爲妃乃其出也, 殺其父而立其朝, 慮有他日之患, 曲爲自全之私, 舞出廢黜之謀, 玆固無故而又無名也。
愼氏自殿下龍潛之初, 載嘉協貞卜, 以成好逑, 備儀以見於慈殿, 姑婦之義已定。 及殿下入承大統, 正位中壼, 受臣民之賀、膺廟社之主, 於殿下褕翟之尊已立, 於祖宗神祗蘋藻之奉有望, 於國人母后之分已明, 慈殿無違忤之譴, 第稠無可去之愆, 神人無恫怨之訧。 殿下受制於强臣, 不能保其伉儷之重, 豈不痛心哉! 古語云: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 愼氏備酒漿、奉灑掃於代邸, 凡幾年矣。 死生契闊, 義相孚也, 昏朝風雨, 備同嘗也。 一朝貴躋九五、富有千乘, 則棄之如遺, 崇、庳殊境, 若升雲天, 而入九淵之下。 以至尊之配, 琴瑟之友, 違絶玉殿, 下混閭閻, 景象蕭索, 聞者殞淚, 其與太王當狄難遑遑, 而篤恩不違者, 異矣。 《禮》曰: “子甚宜其妻, 父母不悅, 出; 子不宜其妻, 父母曰: ‘是善事我’, 子行夫婦之禮焉, 沒身不衰。” 以是觀之, 廢出之義, 一聽於父母, 明矣。 今也, 非出於慈殿之命, 而輕替京室之婦, 其與王季, 異矣。 《易》曰: “夫婦之道, 不可以不久也。” 《傳》曰: “夫婦, 終身不變者也。”其所以久而不變者, 守卺酳之禮, 重萬世之始, 不取敢遷易也。 今也不念始者, 文定之配, 不顧黼黻、蘋蘩之主, 播棄若塊, 以墜內刑, 其與文王異矣。 夫治國平天下之道, 本諸家, 一正家而天下定矣。 自古亂亡之作, 靡不原於家法之不正, 我朝家法, 未可謂一出於正也。 太祖以創業垂範之聖, 惑於嬖寵, 欲紊嫡庶之分, 逮乎宣陵, 以黯黮之故, 踵仁宗之弊軌。 立本一差, 其流波, 至燕山而遂蕩, 綱常淪斷, 宗廟社稷, 幾乎墟矣, 其禍慘矣。 殿下得大橫之吉, 順輿眺之屬, 披臲陒而旋于坦夷; 剔荒昧而登于淸郁, 此正三靈拭望顒然。 庶幾其更始之日, 宜端一家之本, 爲天地生民立極, 丕建萬世之宏基, 光昭暐曄, 如揭日月, 而中乎天, 斯其會也, 奄奄然不能自振。 人倫, 王化之源, 上自先汨, 以是而欲望治化之成, 猶緣木求魚, 多見其惑也。 嗚呼! 豈獨殿下之過也, 彼當初挾權用事之臣, 其罪可勝誅耶, 彼元宗等, 亦豈不知名分之大, 如天地之截然不可犯也, 惟其謀身之狡計勝, 故肆然無顧忌, 乘草昧危疑之際, 謂殿下惟其所爲, 而莫敢違拂, 刦制君父, 如弄諸股掌之間, 放逐國母, 有同抛雛,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推其心, 則雖至董、曺, 亦何所憚哉, 人臣無將, 將而必誅, 《春秋》之義, 正爲此輩設也。 若以愼氏, 罪人之出, 不可以配至尊, 而主宗祧, 以是而諉焉, 則守勤之罪, 固非關於宗社, 何足以累乎妃, 就使得罪于宗社而受誅, 妃無與聞之故, 則又非所以爲尤而及之也。 昔在漢宣帝時, 霍氏謀逆族誅, 而霍后以不與聞, 得不廢。 我朝沈溫被罪于獻陵, 而昭憲王后玉度不玷, 往軌皭然可徵。 況守勤初非關國之罪, 則以周家議親之典, 雖宥而全之, 可也。 今旣加罪, 而又必以累妃而廢黜之, 此不過愛身而無君也。 不特此耳, 殿下以王室之冑, 入纉大統, 名旣正而言旣順, 無愧於三代之繼世。 而元宗等謀國不藏, 立殿下於衰世之域。 何則, 燕山之無道, 極矣, 三綱泯滅, 無復人理, 神祇厭之, 祖宗絶之, 親戚畔之, 人心去之。 獨夫于已移之位, 將爲異姓之刺手, 賴冥冥之陰佑, 四方之謳歌, 三寶允屬于殿下, 故殿下得以至是。 夫纉統繼緖, 天下古今之大事, 固當明白正大, 無有纖毫之幽隱, 如太陽麗空, 萬物快覩, 其可苟哉。 反正之初, 宜擧大妃之命, 悉數燕山見絶于天地、祖宗、臣民之罪, 暴于廟社然後, 上告諸天子而請命焉, 以昭陞大位。
夫如是纉統繼緖之道, 明白正大無有幽隱, 四方萬世, 仰之如太陽之麗空, 豈不偉歟, 奈何元宗等, 闇於大義, 以殿下承統光明正大, 而姑借禪代之文, 以欺詐天朝, 惜哉! 殿下受制於强臣, 家敎乖舛, 人倫之本、王化之源、正始之道, 未能光植, 而弘颺之, 以何者而推致中和、位育之功, 克宅天心乎, 萬化隨而日駁, 風敎自然頹薄, 乖氣拂鬱, 陰陽易序, 日月薄蝕, 水泉沸騰, 花實冬敷, 繁霜夏實, 以至雨暘風雹, 星孛虹霓, 昆蟲之妖, 間見荐因。 頃者後庭之班, 綴悼未幾, 章敬王后遽爾上賓, 壼闈慘閴, 意者, 天其所以警殿下者深矣。 《傳》曰: “和氣致(傷)〔祥〕, 乖氣致異。” 昔“庶女抱冤, 飛霜擊燕。” 彼窮閭一女之賤, 眇焉微末, 若無預乎天, 而其冤結之氣, 猶足以感召飛霜之變。 若夫以至尊之配, 尸天地、廟社、神人, 上帝所冥顧者, 而無故廢斥, 落莫一室, 永結幽悶, 如是而傷天地之和氣, 來荐仍之諸沴者, 不足怪也。 聖念其亦有及於此耶, 嗚呼! 旣往之失, 則已矣, 豈遂不可以復正乎, 在殿下一轉移之機耳。 今內政缺主, 宜因此時, 廓然快斷, 正愼氏坤后之位, 天地之心所享也, 祖宗之靈所允也, 臣民之望所副也。 殿下將此位, 欲屬之於誰乎, 存大分於旣墜; 全舊恩於已睽, 此正合於大義正理, 洞然無疑矣。 假有或者, 諉以已廢, 妄生異議, 不過附於前日主議之臣, 有所觀望, 復亂殿下之家法也。 彼元宗等, 雖曰有大功於王室, 當其時, 天命、人心, 咸屬於殿下, 雖非此輩, 神器將誰歸乎, 適乘大人之會, 効其力耳。 負恃其功, 肆然不忌, 劫制君父, 放逐國母, 犯天下古今之大分, 此萬世之罪也。 功不可以掩之。 當其跋扈之時, 殿下確然不聽廢后之請, 考按脅制之狀, 明正典刑, 可也。 旣不能然, 使之榮富自若, 足以償其功矣。 今雖已死, 宜明正其罪, 追奪官爵, 曉諭中外, 使當世與萬世, 灼然知大分之截然不可犯也。 伏願殿下, 於此數事, 質諸義理, 處之制之無所滯難, 則可以一灑已往之謬, 人倫之本、王化之源、正始之道, 澄澈光大, 如天地(悔)〔晦〕塞, 而復開霽呈豁。 殿下又能精一、謹獨, 自誠意、正心, 上推去充諸政理, 則周家《麟趾》、《騶虞》之化, 從此而成, 王業過八百, 至萬歲而無窮矣。 臣等以疏遠之臣, 不避越位之責, 敢冒瀆冕聰, 誠以玆數事, 分義所關, 至重且大, 不可緘于心, 而不一聞于君后也。 臣等胸抱憤鬱久矣, 而前此不能申吐者, 正以章敬王后當壼, 若復愼氏, 難爲章敬地耳。 今則章敬上賓, 壼位復缺, 正反正之機會, 又當求言之秋, 此臣等所以汲汲覶縷陳之也。 方今天變不弭、政敎不純, 庶事乖方, 伏願殿下, 懋惟祗敬, 克享天心。 臣等區區鄙懷鬱念尙多, 有難悉獻, 伏惟殿下垂察焉。
【史臣曰: “此論甚正, 而傍議紛紛, 互有是非。 厥後有兩是兩非之語, 朝廷不靖, 士林反目, 其禍階慘矣。”】 上下疏于政院, 而傳曰: “此是大事, 豈可聽小臣之言而爲之乎, 雖下該曺, 亦難施行, 留此疏於政院, 可也。 且古云: ‘出納惟允。’政院居喉舌之地, 非徒自上所傳之事, 下之所啓, 亦當辨察而啓之然後, 可謂之出納唯允也。 常時上言等事, 則政院例當入啓矣, 如以求言而或上封事者, 則始面書上前開拆, 而不甚堅封, 則固當開見而啓之。 今後雖其上下端, 牢固糊封, 未可開見之書, 亦皆開見後, 啓之則可合於出納唯允。”【史臣曰: “朴祥等封事, 上下糊封, 使不得開見, 故有是敎。 然一令如此, 則其正直抗言, 不忌權奸宦戚, 吐露忠肝者, 必被抑遏, 不得上達矣。 然則雖至兇小用事, 君子廢斥, 宗社垂亡, 而一有憸人坐政院, 則君門閉隔, 下情壅鬱, 其爲國家之害, 可勝言哉, 人君一號一言, 卽爲成法, 其可不究終始如此其謬乎, 上, 於是乎失言, 嗚呼, 殆哉! 慶世昌珥承旨, 在政院, 不一言以釋其非。 世昌庸妄俗人, 固不足筭, 申鏛稍有知識而亦然, 其與李自華、尹世豪、成雲、尹殷輔, 相距何遠哉, 且朴祥等論請命之失、廢妃之誤, 正爲儒者直論, 其主意至爲忠讜。 雖間有不中之論, 豈敢以此訾之哉, 上不知出納惟允之意, 而下亦不任其職, 可勝痛歟,”】
중종 23권, 10년(1515 을해/명정덕(正德)10년) 10월 3일(병진) 2번째기사
유순, 정광필등이 중전을 정하는 것과 원자의 교육에 대해 논의하다
영의정(領議政) 유순(柳洵), 좌의정(左議政) 정광필(鄭光弼), 우의정(右議政) 김응기(金應箕), 우찬성(右贊成) 김전(金詮), 우참찬(右參贊) 남곤(南袞), 병조판서(兵曹判書) 신용개(申用漑), 이조참판(吏曹參判) 심정(沈貞), 예조참판(禮曹參判) 성몽정(成夢井)등이 빈청(賓廳)6111)에 모이니 전교하길,
“어제 대신이 아뢴 바를 듣고서,《대학연의(大學衍義)》에 표를 붙인데에 관한 일을 상고해보니, 제환공(齊桓公)이 규구(葵丘)에서 회맹(會盟)할 때에〈천자의 금제(禁制)를 밝혀〉 ‘첩(妾)을 아내로 삼지 않는다’하였으며, 노애공(魯哀公)이 첩을 부인(夫人)으로 삼으려〈그 예(禮)를 헌의(獻議)하게 하니〉종인(宗人)6112) 흔하(釁夏)가 ‘첩을 부인으로 삼는 것으로 말하면 워낙 그런 예가 없다’고 답하였으며, 위 문제(魏文帝)가 곽귀빈(郭貴嬪)을 후(后)로 삼으로 하니 중랑잔잠(棧潛)이 간쟁(諫諍)하였으며, 당명황(唐明皇)6113)이 무혜비(武惠妃)를 후로 세우려하니 어사(御史) 반호례(潘好禮)가 간쟁하였으며, 또 범조우(范祖禹)가 선인황후(宣仁皇后)6114)에게 ‘후를 맞아들이는 것은 국가의 큰일이고, 만세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복조(福祚)가 여기에 달려있고 교화가 여기서 진전하는 것이며,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이를 중하게 여겼는데, 첫째는 족성(族姓)6115)이고, 둘째는 여덕(女德)6116)이고, 세째는 융례(隆禮)6117)이고, 네째는 박의(博議)6118)이다’하였다.
경등이 이를 말하여 ‘지금 중궁(中宮)이 오래 비어 있으니 여기에 유념하여 미리 의향을 두라’하였는데, 이는 첩을 아내로 삼지말라는 말일 것이다.
적처(嫡妻)의 자리를 다투는 일을 막고, 임금에게 분수 밖의 마음과 만세의 화가 없기를 바라고, 정후(正后)를 가려서 맞아들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 뜻이 멀고도 지극하거니와 나도 매우 옳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 조종조(祖宗朝)의 고사로 보면, 정위(正位)가 비게되면 처녀 여러 사람을 미리 가려들이되, 새로 숙의(淑儀)가 되었건 전부터 숙의로 있었건 논하지않고 그 중에서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3년 뒤에 위(位)를 정하며, 가령 이미 숙의로 봉해진 사람은 명분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승봉(陞封)할 수 없으면 정후(正后) 한 사람만을 미리 정해 들인다.
그러니 의례(儀禮)가 여러 가지일 뿐더러 어진 것을 반드시 알 수도 없다.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가리자면, 이제 처녀 두 사람을 가려들이되 아직 숙의를 봉하지않고 어질고 덕이 있는가를 보아서 한 사람을 후로 정하고 남은 사람을 절로 숙의가 되게 하는 것이 옳을는지, 그러나 공상(供上)따위 일에 있어서 반드시 숙의라고 칭할 것인데, 숙의를 봉하지않고서 숙의라 칭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지금 바로 급한 일은 아닐지라도, 경등이 만약에 명분을 어지럽게 하지않으려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논한 뜻을 내가 잘 알지 못하므로 다시 묻는다.
이 일은 어려운 듯하니, 조종조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 또한 어떠한가?”하매,
유순등이 사연을 같이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니, 승지(承旨)를 시켜 면대(面對)하여 출납(出納)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하니,
‘면대하겠다’고 전교하고,
곧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유순,정광필,김응기,김전,남곤,성몽정등을 인견하였다. 유순이 아뢰기를,
“이번에 중궁을 책립(冊立)하는 것은 국가의 큰일이니, 근일에 행할 일이 아닐지라도 성려(聖慮)에 미리 헤아리셔야 합니다.
신이《대학연의》에서 범조우등의 바른 논의를 보고 상께서 아셔야하겠으므로 표를 붙여서 아뢰었습니다.
이 일은 상께서 반드시 고례(古禮)를 따르셔야 합니다.
진서산(眞西山)6119)이 옛일을 여러 가지로 인용하였으나, 오로지 첩을 아내로 삼지않는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옛 제후는 한 번에 아홉 여자를 얻고, 세 나라에서 잉녀(媵女)를 보내되6120), 한 사람만을 비(妃)로 삼았는데, 그 비의 자리가 비게 되어도 차서에 따라 계승(繼陞)하지않은 것은 한때 같은 무리로 있던 사람이 자리가 높아지면 아랫사람이 존경하지않게 될 것이므로 이를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졌는데 버금자리에 있던 자가 존위(尊位)에 오르면 적처의 자리를 다투어 국본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므로, 이처럼 염려한 것입니다. 후세에서 계립(繼立)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고는 하나 같은 무리에 있던 자를 올려서는 안되고, 새로 가려서 세워야 적처를 다투는 일이 없고 궁중이 다 새로운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어 체모가 매우 합당하므로, 표를 붙여서 아뢰었던 것입니다”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신등의 생각은 유순이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대개, 범조우의 말이 곧 정례(正禮)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상께서 정례에 따라서 행하게 하고자한 것입니다. 이제 국본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원자(元子)께서 어리더라도 인심은 크게 정해졌으니, 신의 마음에는 늘 ‘왕자가 많더라도 적서(嫡庶)와 상하의 분별은 하늘과 땅처럼 현격해야 하고, 또 이어서 중궁이 되신 이도 자기 소생을 사사로이 사랑하지말고 원자를 자기 소생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왔으며, 정례도 저러하므로, 신의 생각을 아뢰었습니다.
상께서 내정(內政)을 워낙 우연하게 하지않으시니 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어서 중궁이 되신 분이 만약에 ‘이는 내 소생이고 저는 남의 소생이다’라고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이런 생각이 싹트게 되면 일이 크게 어그러질 것입니다.
또, 뒤에 난 왕자도 ‘나도 정실(正室) 소생이고 저도 정실 소생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국가와 백성의 화가 마침내 막야(鏌鎁)6121)보다 참혹하게 될 것입니다. 정적(正嫡)을 존중하는 것은 바른 예에 맞을 뿐 아니라, 만세를 염려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조종조에서 승봉(陞封)한 전례가 있을지라도 실로 정례에 맞지 않으며, 시세(時勢)도 다릅니다. 그때는 국본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박절히도 참람한 마음이 없었으나, 지금은 국본이 이미 정해졌고 만세를 염려해야 하니, 성심(聖心)에 먼저 정해진 의향이 계셔야 하므로 아뢴 것입니다”하고,
김응기가 아뢰기를,
“신등이 한때에 함께 의논하였으므로 뜻도 같습니다. 이제 국본이 이미 정해졌으니, 적서의 분별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분명하게하지않고 문란하게 하면 마침내 염려할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적서의 분별을 현격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이 일에는 이미 옛 관례가 있으나, 국가의 전례(典禮)도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전(慈殿)께서 위에 계시니, 널리 가려서 보신다면 어찌 어질고 덕이 있는 자를 알아낼 수 없겠습니까?”하고,
유순이 아뢰기를,
“어질고 덕이 있는 자를 알고자 하신다는 분부는 지당하십니다.
처음 가릴때에 자전께서 덕용(德容)과 위의(威儀)를 두루 보신다면 어진지를 알 수 있으니, 궁중에 오래도록 두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의(衍義)》에 실린 옛사람의 말은 참으로 만세토록 지당한 말이다.
정위(正位)가 엄하지않으면 엿보는 폐단이 많을 것이다. 다만, 비(妃)를 맞아들이는 일은 한번 정해지면 가벼이 고칠 수 없고, 어질고 덕이 있는지도 하루아침에 알 수 없으므로 조종조에서 곧 정하지않고 궁중에 오래 들어와 있게 한 뒤에야 정하였다. 측실(側室)은 명분이 이미 정해져 있는 자이므로 승봉하는 것이 이미 온편치 못하고, 새로운 사람은 문득 그 어질고 덕이 있는지를 알 수 없으며, 또 대신의 의향을 아직 모르므로 묻는다”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이른바 융례(隆禮)는 우리나라에 있어서《오례의(五禮儀)》6122)가 또한 지극히 중요하므로 자전께서 위에 계시니 보고가리셔야하며, 문호(門戶)6123)도 가리지않을 수 없으므로 사족(士族)이라 하더라도 촌야(村野)의 가문이 여기에 당해서는 안됩니다. 고례(古禮)에 반드시 선대의 성왕(聖王)의 후손으로 비를 가리는 것은 예법(禮法)이 있는 가문을 가리기 위해서이니, 이제도 조사(朝士)6124)중에서 예법이 있는 가문을 가려야 합니다”하고,
유순이 아뢰기를,
“문호는 반드시 가려야 합니다. 공경(公卿)과 조사중에 어찌 예법이 있는 가문이 없겠습니까? 처음 가릴때에 여러 번 드나들게 하면, 거동하는 사이에 공경하고 조심하는지를 어찌 알 수 없겠습니까?
재주와 덕이 있고 없는 것도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열흘이나 한달동안 궁중에 들어와있게하여 대비(大妃)께서 보고 가리시되, 처음부터 측실의 예와는 달리 대우하는 것도 무방하나, 융례의 일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례에 관해서는 대신이 말한 것이 마땅하되, 족성(族姓)은 자연히 알 수 있으나 여덕(女德)은 곧 알 수 없으므로, 미리 궁중에 들어오게하여 가리고자 한다”하매,
유순이 아뢰기를,
“상께서 거기까지 염려하시는 것은 지당합니다. 덕이 없는 자가 계립(繼立)하여 자기 소생이냐 남의 소생이냐에 뜻을 두면, 국본이 계시므로 마침내 지극히 어려운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정중하게 가려야 합니다”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대신이 아뢴 것이 다 충성된 말이요 지극한 생각이며, 상께서 때아니게 전좌(殿坐)6125)하여 마음을 비워 놓고 받아들이시니, 참으로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국가에 어찌 이처럼 중대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제 국가에 변고가 있어 궁중의 정위가 비게 되었으니, 이어서 명분을 닦는 일을 처음부터 바르게 해야 합니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집을 다스리는데에 있으므로, 나라를 다스리자면 먼저 집안의 일을 바루어야 하니, 적서의 분별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근래 천재가 잇달아 이르며,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고, 남도(南道)에서도 세 발달린 닭이 났는데, 옛글에 다 여자로 인한 화난인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옛글은 비록 끌어대어 얽매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나, 내정(內政)은 더욱이 엄해서 처음부터 엿보는 조심이 없게 해야 마땅한데, 이 또한 천변에 참되게 응답하는 것이 됩니다”하고,
유순이 아뢰기를,
“근래 재변이 매우 많은데, 옛사람이 ‘천심(天心)은 임금을 인애(仁愛)한다’하였거니와 임금으로 하여금 경계하여 그른 일을 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니, 그 말이 마땅합니다.
신은 본디 매우 어리석어서 나라의 일이 올바르게 못하므로 늘 두려운 생각이 있습니다. 재변은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니, 참되게 하늘에 응답하는 일을 상께서도 애쓰셔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자에 뭇 재변이 잇달아 이르고, 이제 겨울 천둥의 이변이 있으니, 지극히 미안하다”하매,
유순이 아뢰기를,
“근래 풍속이 아주 나쁩니다. 과거(科擧)로 인재를 뽑는 것은 나라의 큰일인데, 이제 듣건대 외방(外方)에서 거자(擧子)가 난을 일으켜 시험을 정지한 일이 있다하니, 이는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유생(儒生)이 한 짓을 미치광이 아이의 짓이라 하나, 이일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크니, 미치광이라 하여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김전이 아뢰기를,
“근래 천재가 매우 많으니, 공경(公卿)의 자리에 있는 자라면 누구인들 두렵게 여기지 않겠습니까?《연의》에 표를 붙여서 바친 것은 처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군자의 도는 부부(夫婦)에서 시작한다’하고 또 ‘부부는 생민(生民)의 시초이고 만복의 근원이다’하였거니와, 적서의 분별이 조금이라도 어지러워지면 마침내 화환(禍患)이 클 것입니다. 조종조의 고사가 있기는 하나 시세가 다르니 지금에 있어서는 마땅하지않으며, 지금은 원자(元子)께서 어리시니 더욱 신중히 해야 할 때입니다.
신중할 수 있다면 미리 궁내에 들어오게 하지 않더라도 어진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융례(隆禮)에는 기한이 있는데, 처음부터 명분을 바르게 하지않고서 오래 궁중에 있는 것도 옳지않습니다”하고,
성몽정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중위(中位)가 일찍이 비게 되매, 비(妃)를 가리는 일을 어찌할 것인지를 유식한 사람들이 다 염려하는데, 지금 분부하시기를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진 사람은 승봉(陞封)할 수 없고 따로 가려야 한다’하시니, 이는 뭇사람이 바라는 데에 맞아서 인심이 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조종조의 일이 시세에 다름이 있는지는 신이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의 《오례의(五禮儀)》를 보면, 납채(納采), 납징(納徵), 견교서(遣敎書)등의 일은 고례(古例)를 인용하고 권의(權宜)6126)로 한 일이 없습니다.
상께서 이제 이미 뜻을 정하셨으니, 어질고 덕있는 사람을 가리고자 하신다면,《시경(詩經)》의 관저편(關雎篇)6127)을 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여기저기 다니며 가려낸다 찾아도 얻지못하니 밤낮으로 생각한다[參差荇菜 左右芼之 求之不得 窹寐思服]’하고, 또 이르기를 전전 반측한다’하였으니 온 주(周)나라가 다 배필을 가려내기에 마음쓴 것이 이처럼 지극하였습니다. 뒷날의 이해(利害)로 헤아려보면 진덕수(眞德秀), 범조우(范祖禹)의 말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고, 예(禮)로 말하면 《오례의》가 권의로 한 일이 없으니, 여기에 유념하셔야 합니다”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후(后)를 세우는 일이 물정(物情)에 맞지않는다면, 말을 하고자 하는 신하가 어찌 한둘뿐이겠습니까? 다만, 임금의 의향으로 한번 정하고 나면 침석(寢席)의 일이니 말로 다투기 어렵고, 또 화를 두려워한다면 생각이 있더라도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능히 말한 자로는 잔잠(棧潛), 반호례(潘好禮)가 있을 따름입니다.
오늘 대신을 불러서 면대하여 뜻을 서로 통한 것은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예전에 이필(李泌)이 덕종(德宗)에게 말하기를 ‘폐하(陛下)께서 환궁(還宮)하시거든 이 말을 드러내지 마소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종사(宗社)의 큰일은 다만 대신과 의논하고서 마음에만 두시고, 금중(禁中)에 퍼뜨리지 말고 잠잠히 정하셔야 합니다”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비를 가리는데에 관한 분부는 신등이 이미 잘 알았습니다.
원자(元子)를 배양(培養)하는 일에 관해서는 성종조(成宗朝)의 예를 따라 민간의 괴로움과 물정을 알게 하려고 나가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종조에서도 어렵게 생각하였었는데, 강희맹(姜希孟)의 아내가 지극히 어질고 희맹도 고사(古事)와 예법을 아는 재상이며 살림도 궁하지않으므로, 원자로 하여금 그 집에 나가게 하였으나, 어떻게 민간의 괴로움과 물정을 아실 수 있었겠습니까?
전에 시종(侍從)이 이런 뜻을 이미 아뢰었거니와,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자가 어디에서 본받을 것이냐하면, 궁중에서 양육하여 상께서 공사(公事)를 처결하시는 것과 환시(宦寺)를 대하고 궁첩(宮妾)을 대하고 대신(大臣)을 접하고 대간(臺諫)을 접하는 도리를 보여서 본뜨게 해야 합니다.
옛말에 ‘부호(富豪)의 집에는 예법이 있는 집이 드물다’하였거니와, 외간(外間)에서 예법이 있는 집을 어찌 쉽사리 많이 얻겠습니까?
원자께서 지금 나이가 어리시나, 국본은 소중하게 보호해야 합니다”하고,
김전이 아뢰기를,
“어려서부터 보양(保養)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태교(胎敎)라는 것도 있었는데, 하물며 이미 탄생하셨음에리까?
외간에 나가 계시는 것은 지극히 미안합니다”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문천부정(文川副正)은 남천군(南川君)의 아들인데, 무슨 본받을 것이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뜻은 시종도 흔히 말한다. 고사가 저러하므로 지금 밖에 있으나, 어찌 대내(大內)로 들여오지 않겠는가?”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여느 사람의 정으로 말하면, 부모나 서모와는 친애하는 것이 도리인데, 그것도 궁중에 계셔야 알 수 있습니다”하고,
유순이 아뢰기를,
“세종조(世宗朝)에서는 여덟 대군(大君)께서 궁중에서 생장하셨다는 것을 신이 들었습니다. 제왕자(諸王子)일지라도 궁중에서 양육해야 마땅한 것이니, 성종조에서 그렇게하지 않았더라고 세종조의 일이 오히려 본떠서 행할 만한데, 이제 여염에 나가 사시게 한 것은 지극히 미안합니다.
왕자나 옹주(翁主)일지라도 미안할 바인데, 하물며 원자이겠습니까?
광필이 아뢴 바와 같이 문헌(文獻)이 있는 어진재상의 집이라면 모르거니와, 예법이 없는 집이라면 더욱이 원자로 하여금 옮겨사시게 해서는 안됩니다”하고, 김응기가 아뢰기를,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동몽(童蒙) 때에 바르게 기른다’하였으니, 동몽 때에 바른 도리로 보양하여야 합니다. 여염에서라면 언어와 거둥을 어디서 본받을 것이 있겠습니까? 궁중에서 양육하는 것이 옳습니다”하였다.
註6111]빈청(賓廳):대신(大臣)이 모여 의논하고 사무를 집행하는 청사(廳舍). 註6112]종인(宗人):직명.註6113]당명황(唐明皇):현종(玄宗).註6114]선인황후(宣仁皇后):송영종(宋英宗)의 후.註6115]족성(族姓):문벌(門閥).註6116]여덕(女德):부녀로서의 덕성.註6117]융례(隆禮):예의를 융숭히하다.註6118]박의(博議):널리 의논하다.註6119]진서산(眞西山):송영종(宋寧宗)때의 사람. 이름은 덕수(德秀). 세칭 서산선생이라 한다.《대학연의(大學衍義)》는 이 사람의 저서이다 註6120]세 나라에서 잉녀(媵女)를 보내되:제후가 세 나라중에서 한 나라에 장가들면 다른 두 나라에서는 측실(側室)로서 여자를 보낸다.《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장공(莊公)19년.註6121]막야(鏌鎁):명검(名劍)의 이름인데, 이에 얽힌 비참한 옛이야기가 있다. 초(楚)나라의 간장(干將), 막야(莫耶:鏌鎁로도 쓴다) 부부가 왕을 위하여 자웅(雌雄) 두 검을 만들었는데, 3년만에야 완성하니 왕이 노하여 죽이려하였다. 왕에게 가기에 앞서 지아비가 아내에게 왕이 노하여 나를 죽일 것이라고 하며 웅검(雄劍)을 감추어두고 감춘 곳을 가르쳐 주고서 자검만을 가지고 가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막야의 유복자 적비(赤比)가 커서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일을 물어 알고서 막야검을 찾아얻고 밤낮으로 복수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왕이 한 아이가 왕에게 복수하려 한다고 말하는 꿈을 꾸고서 천금을 걸고 찾으니, 적비가 도망하여 산에 들어갔다. 산에서 만난 길손의 물음에 지난 얘기를 하니, 길손이 네 머리와 검을 가지고 가서 복수해 주겠다고 하므로 응낙하고 자진하였다. 길손이 그 머리를 가지고 왕에게 가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는데, 길손이 말하기를 “이것은 용사(勇士)의 머리이니 솥에 삶아야 합니다”고 하였다. 왕이 그대로 하였는데, 사흘이 지나도 썩지않고 탕(湯)에서 머리가 솟아나와 눈을 부릅뜨고 크게 노하였다. 길손이 “그 아이의 머리가 썩지않는데, 왕께서 가서 보시면 썩을 것입니다”하므로 왕이 가까이 갔는데, 길손이 검을 왕의 목에 댔더니 왕의 머리가 탕안으로 떨어졌다. 길손도 제 목에 검을 대어 머리가 또 탕 안으로 떨어지니, 머리 셋이 함께 썩어서 식별할 수 없으므로 탕육(湯肉)을 나누어서 장사지냈다.《수신기(搜神記)》.註6122]《오례의(五禮儀)》:길례(吉禮),흉례(凶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로 나누어 국각의 전례절차(典禮節次)를 기술한 책. 세종때에 착수하여 성종5년에 완성하였다.註6123]문호(門戶):문벌.註6124]조사(朝士):조정의 벼슬아치 註6125]전좌(殿坐):임금이 임어하는 것 註6126]권의(權宜):임시하여 시세에 맞추는 것 註6127]관저편(關雎篇):여기에 인용한 글귀는 관저편 제2장에 있다. 다만, 원문의 ‘左右芼之’는 제3장에 보이고, 제2장에는 ‘左右流之’로 되어있다. 제2장의 전문은 이러하다. “들쭉날쭉한 마름풀을 여기저기 다니며 찾는도다. 얌전한 어진 여인을 밤낮으로 찾는도다. 찾아도 얻지못하니 자나깨나 생각하여, 오래고 오랜지라 전전반측(輾轉反側:마음이 불안해서 몸을 뒤척이는 모양)하노라[參差荇菜 左右流之 窈窕淑女 窹寐求之 求之不得 窹寐思服 悠哉悠哉 輾轉反側]”
○領議政柳洵、左議政鄭光弼、右議政金應箕、右贊成金詮、右參贊南袞、兵曹判書申用漑、吏曹參判沈貞、禮曹參判成夢井等, 承召會賓廳, 傳曰: “昨聞大臣所啓, 而考《大學衍義》付標之事, 則齊桓葵丘之會‘毋以妾爲妻’; 哀公將以妾爲夫人, 宗人釁夏對曰: ‘若以妾爲夫人, 則固無其禮。’; 魏文將以郭貴嬪爲后, 中郞棧潛爭之; 唐明皇將立武惠妃爲后, 御史潘好禮爭之。 又有范祖禹言於宣仁皇后曰: ‘納后, 國家大事, 萬世之本, 福祚所繫, 風化所先。 自古聖王重之, 一曰族姓, 二曰女德, 三曰隆禮, 四曰博議。’ 卿等以是爲言曰: ‘當今中宮久曠, 留念於此, 預爲指向。’ 此必以爲, 勿以妾爲妻。 欲防爭嫡, 覬覦非分之心, 萬世之禍, 擇納正后, 其意遠且至矣, 予意甚以爲然。 但我祖宗朝故事, 則正位有缺, 預擇納處女累人, 勿論新舊淑儀, 擇其賢德, 三年後定位。 假令已封淑儀之人, 名分已定, 故不可陞封, 則可擇正后一人, 預定納之。 然則非但儀禮多端, 而其賢未必可知也。 若欲擇其賢德, 今當擇納處女二人, 姑不封淑儀, 而見其賢德, 定一爲后, 使其餘, 自爲淑儀, 可乎, 然其供上等事, 必稱淑儀, 不封淑儀, 而稱淑儀, 何如, 雖非今日之所急, 卿等若欲不紊名分, 何爲而可乎, 其所論之意, 予不詳知, 故更問焉。 此事似難, 依祖宗朝之例, 亦何如,” 柳洵等合辭以啓曰: “此事甚重, 使承旨面對而出納, 何如,” 傳曰: “當面對。” 上卽御宣政殿, 引見柳洵、鄭光弼、金應箕、金詮、南袞、成夢井等。 柳洵曰: “今之冊立中宮, 國家大事。 雖非近日所爲, 於聖慮當預計。 臣見《大學衍義》范祖禹等正論, 上須知之, 付標以啓。 此事, 上須依古禮。 眞西山雜引古事, 專以無以妾爲妻爲主。 古之諸侯, 一娶九女, 三國往媵, 一人爲妃。 其妃闕焉, 不以次繼陞者, 一時儕輩陞位, 則下之尊敬, 必不至, 故以此爲慮也。 且國本, 若已一定, 而亞者陞爲尊位, 則抗嫡, 而國本亦必有難, 故如是爲慮也。 後世繼立, 雖云成例, 然不可以儕輩陞之, 新擇立之然後, 無抗嫡之事, 而宮中皆以新心尊敬, 體貌甚當, 故付標啓之耳。” 鄭光弼曰: “臣等所懷, 柳洵已盡啓之矣。 大槪以爲, 范祖禹之言, 乃是正禮, 故欲使上, 依正禮而行之也。 今國本已定, 元子雖在幼沖, 人心則大定。 臣之心常以爲, 諸王子雖多, 嫡庶上下之分, 如天地之懸絶, 可也。 且繼主中宮, 不以己出爲私, 而視元子猶己出, 然後可也, 而正禮又如彼, 故以臣之所懷啓之。 上之內政, 固非偶然, 豈有是事, 然繼主中宮, 若以爲:‘此則己出, 而彼則他出。’ 一片之念萌焉, 則事必大乖矣。 且後生王子, 亦以爲:‘吾亦正出, 彼亦正出’ 云, 則國家生民之禍, 終必慘於鏌鎁。 尊重正嫡, 非徒合於正禮, 而萬世之慮亦重。 祖宗朝雖有陞封之例, 實未合於正禮, 而時勢亦異。 其時國本未定, 故無逼僭之心, 今則國本已定, 當爲萬世之慮, 聖心宜先有定向, 故啓之耳。” 金應箕曰: “臣等一時同議, 故其意亦同。 今者國本已定, 嫡庶之分, 須使分明, 若不分明而紊亂, 則其終必有可慮之事, 使嫡庶之分隔絶, 可也。” 鄭光弼曰: “此事旣有古例, 而國家典禮, 亦不可謂之無也。 慈殿在上, 若廣擇而見之, 則豈不知其賢德乎,” 柳洵曰: “欲知賢德之敎, 至當。 當初選擇之時, 慈殿屢見其德容、威儀, 則賢否可知, 不須在宮中日久, 然後可知也。” 上曰: “《衍義》古人之論, 實萬世至當之言也。 正位若不嚴峻, 則窺覦之弊必多。 但納妃若一定, 則不可輕改, 賢德又不可一朝知之, 故祖宗朝不卽定, 而入宮中日久, 然後定之。 側室已定名分者陞封, 旣爲未便, 而新人未可遽知其賢德, 且未知大臣意向, 故問之。” 光弼曰: “所謂隆禮, 在我國, 《五禮儀》亦至重。 慈殿在上, 當見而擇選, 門戶亦不可不擇。 雖云士族, 村野家門, 不可當之。 古禮擇妃, 必以先代聖王之後者, 擇其有禮法之家也, 今須擇朝士有禮之家。” 柳洵曰: “門戶, 必須擇之。 公卿朝士, 豈無有禮法之家, 其初選擇也, 累使出入, 則其擧動之間, 敬畏與否, 豈不可知, 才德有無, 亦不難知。” 光弼曰: “旬月間入宮中, 大妃見而擇之, 自初待之, 不如側室之例, 亦不妨。 然不合於隆禮之事也。” 上曰: “正禮之事, 大臣言之當矣。 族姓自然可知, 而女德不可卽知, 故欲預入宮中而擇之矣。” 柳洵曰: “上之憂慮及此, 至當。 若無德者繼立, 而以己出他出, 爲指向則國本在焉, 終有至難之事, 鄭重擇之可也。” 南袞曰: “大臣所啓, 皆忠言至計, 而上不時殿坐, 虛懷聽納, 實宗社之福也。 國家安有如是重事乎, 今國家有厄, 故宮中正位有闕, 繼治名分, 當初正之可也。 夫治國之本在家, 欲治其國, 必須先正一家之事, 嫡庶之分, 不可紊亂也。 近來天災沓至, 雌雞化雄, 南道又生三足雞, 古書皆云: ‘近女, 禍也。’ 古書雖不可牽拘取信, 然內政尤當嚴峻, 而自初使無窺覦之漸也, 是亦應天變以實也。” 柳洵曰: “近來災變甚多。 古人云: ‘天心仁愛人君, 欲使人君警戒, 而不爲非事。’ 此言當矣。 臣本庸甚, 不能使國事得宜, 念慮之間, 常懷恐懼。 災變, 惟人所召, 應天以實之事, 上亦所當勉勵。” 上曰: “近者衆災沓至, 而今有冬雷之變, 至爲未安。” 柳洵曰: “近來風俗至惡。 科擧取人, 國家大事。 今聞, 外方有擧子作亂, 停罷不試。 此, 古之所無事也。 儒生所爲, 雖指爲狂童, 然此事甚關, 不可以狂童, 而寬其罪也。” 金銓曰: “近來天災甚多, 在公卿之位者, 孰不恐懼, 付標《衍義》以進者, 重正始之道也。 古云: ‘造端乎夫婦。’ 又云: ‘生民之始, 萬福之原。’ 若使嫡庶之分, 少有紊亂, 則其終禍患必大矣。 祖宗朝故事, 則雖有之, 時勢有異, 不宜於今也。 今者元子幼弱, 尤當愼重之際也。 若能愼重, 則雖不預入宮內, 而可知賢否。 且隆禮有期限, 初不正名分, 而久在宮中, 亦不可也。” 成夢井曰: “國家不幸, 中位早缺。 擇妃事, 何以爲之, 有識之人, 皆以爲慮。 卽今敎曰: ‘名位已定之人, 不可陞封, 當別擇之。’ 此, 協於衆望, 而人心所快者也。 祖宗朝事, 時勢有異, 臣未知之。 以我朝《五禮儀》見之, 則如納采、納徵、遣敎書等事, 援引古例, 無有權宜之事。 上意今已定之, 若欲擇賢德, 則當見《詩》之《關雎》一篇, 可也。 其詩曰: ‘參差荇菜, 左右芼之。 求之不得, 寤寐思服。’ 又云: ‘轉輾反側。’ 周之一國, 皆以擇配爲心, 如是其至也。 以後利害計之, 則眞德秀、范祖禹之論, 無出於此; 以禮言之, 則《五禮儀》無有權宜之事, 留念於此, 可也。” 南袞曰: “立后, 若不合物情, 則人臣之欲言者, 豈啻一二乎, 但以人主意向一定, 則衽席間事, 難以口舌爭之。 又若畏禍, 則雖有所懷, 亦不敢言。 是故, 古之能言者, 只有棧潛、潘好禮而已。 今日召大臣面對, 情志相孚, 實稀罕事也。 昔李泌言於德宗曰: ‘陛下還宮勿露。’ 此言如此, 宗社大事, 只與大臣議之, 而存諸心上, 勿宣露禁中而默定焉, 可也。” 光弼曰: “擇妃之敎, 臣等已悉矣。 元子培養事, 依成宗朝例, 使知民間疾苦及物情, 而出寓也。 然成宗朝亦以爲難, 而姜希孟之妻至賢, 希孟亦知古事、禮法之宰相, 而家計又不窮, 故使元子出寓其家。 然何以知其民間疾苦及物情乎, 頃者侍從已啓此意矣。 臣意以爲, 元子何所取法乎, 須於宮中養育, 而使上之公事處決及待宦寺、待宮妾、接大臣、接臺諫之道, 示而效之, 可也。 古云: ‘豪富之家, 鮮克有禮。’ 外間有禮法之家, 豈易多得乎, 元子今雖年幼, 國本當持之以重也。” 金詮曰: “須自孩提而保養, 可也。 古有胎敎, 況旣誕生乎, 出在外間, 至爲未安。” 光弼曰: “文川副正, 乃南川君之子, 有何取法,” 上曰: “此意, 侍從亦多言之。 古事如彼, 故時雖在外, 豈不入內乎,” 光弼曰: “以常人之情言之, 父母及諸母間, 親愛道理, 亦在宮中, 然後可知。” 柳洵曰: “世宗朝八大君, 在宮中生長, 臣已聞之。 雖諸王子, 亦當養育于宮中也。 成宗朝雖不如是, 而世宗朝事, 猶可倣而行之。 今使出寓閭閻, 至爲未可。 雖王子、翁主, 亦所未安, 況元子乎, 如光弼所啓, 而有文獻賢宰相家則已矣, 若無禮法之家, 則尤不可使元子移寓。” 應箕曰: “《易》云: ‘蒙以養正。’ 童蒙之時, 須以正道養保。 閭閻之間, 言語擧動, 何所取法乎, 養于宮中, 可也。”
중종 32권, 13년(1518 무인/명정덕(正德)13년) 2월 26일(을미) 3번째기사
석강에서 국본을 세우는 일과 원자를 보양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석강에 나아갔다. 특진관(特進官) 김극핍(金克愊)이 아뢰기를,
“아침 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한 글에 제환공(齊桓公)의 일이 있습니다. 환공은 비록 인(仁)을 위장한 임금이나 삼대(三代) 이후에는 그와 같은 이도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본(國本)을 일찍 정하지 못했으므로 나라를 어지럽게 하여 오랫동안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적자(嫡子)를 세우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고 나이 많은 사람이거나 어진이를 세우는 것은 권도입니다. 의당 일찍 선택하여 정할 것이요, 또 민심과 물정이 귀속하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옛날 성인(聖人)은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고 받을 즈음에 인심과 물정의 귀속하는 것을 보아서 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회하고 노래하며 송사를 하는 자가 요(堯)임금의 아들에게 가지않고 순(舜)임금에게 갔으며, 순임금의 아들에게 가지않고 우(禹)임금에게 갔으며, 익(益)에게 가지않고 계(啓)에게 갔으니 과연 위에서 시켜서 그렇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제환공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의를 다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지않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의에 빠져 들어가되 한결같이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만약에 마음을 바르게 하며 성심을 다하여 정애(情愛)에 치우치지 않고 저사(儲嗣)를 선택해 세웠다면, 만대에 영원히 힘입었을 것이니 어찌 환관이 일어날 리가 있었겠습니까?”하고,
시독관(侍讀官) 정응(鄭應)은 아뢰기를,
“천한 것이 귀한 것을 괴롭히거나 작은 것이 큰 것을 능멸하는 일이 없이 귀천의 한계를 엄격히 하여, 용모와 위의를 차릴 때에 절도있는 태도로 대하면 등급이 분명하여 자연 간범(干犯)하지못하게 될 것입니다.
대개 부부간에도 삼가고 분별하지 아니하면 그 폐단은 반드시 적자를 빼앗게 되리니, 이 일이 작은 것 같으나 실은 큰일입니다.
다시 체념하소서. 지금 극핍이 아뢴바 ‘적자를 세우는 것은 상도이고 어진이를 택하는 것은 권도이다’했는데, 이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종사(宗社)의 위망에 관계되는 것이라 어진이를 택하는 것은 부득이하여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적자가 단주(丹朱)나 상균(商均)같이 크게 무도(無道)한 자가 아니라면, 세우지 못할 자에게 함부로 대기(大器)를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같이 천지의 이기(理氣)를 받아 태어났으므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성(德性)을 처음에는 갖추지 않음이 없으니, 만약 보양하고 교회(敎誨)하는 도리가 바르다면, 어찌 그를 세우지 못하고 어진이를 택하여 세우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하고,
참찬관 문근은 아뢰기를,
“후세에 어진이를 세우게 된 것은 곧 적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적자가 있다면 마땅히 가르쳐 보도(輔導)하여 덕성을 함양하여 그 성과를 보는 것이 옳거늘, 어찌 그리 급히 적자를 버리고 어질거나 나이 많은 이를 세우기까지 하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경공(齊景公)은 세자(世子)가 없어서 여러 아들 중에서 어진 맏아들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세자가 출생하였다면 가르칠 따름이다.
어찌하여 선택을 일삼겠는가?”하매,
검토관 기준이 아뢰기를,
“위장공(衛莊公)의 일로 보면 환공(桓公)은 장공(莊公)의 적자이고 공자(公子) 주우(州吁)는 장공의 서자인데, 그가 장공의 총애를 받고 또 병장기를 좋아하자, 석작(石碏)이 간하기를 ‘자식을 사랑함에는 옳은 도리로 가르쳐 그 좋지못한 기미를 예방하여 사특한데 빠지지않게 하고, 지위가 낮은 자가 지위가 높은 자를 능가하거나 천한 자가 귀한 자를 해롭히거나 방종한 자가 정의로운 자를 무너뜨리게 할 수 없게 해야 한다’하였는데, 장공이 이를 듣지 아니하므로 주우가 끝내 환공을 죽였으니, 주우가 어찌 처음부터 시해(弑害)할 마음을 두었겠습니까? 장공이 총애하기만 하고 제재하지 아니하여 스스로 큰 화(禍)를 빚어내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어찌 유독 주우에게만 죄가 있겠습니까? 일찍 그 등위(等威)를 밝혀서 스스로 습관이 되도록 하였어야 옳았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연관(經筵官)을 자주 체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전일 경연에서 여러 번 말하였거니와, 이 직책은 오랫동안 맡긴 뒤에야 학문이 정숙해지고 교도(敎導)에 효과가 있을 것이다”하였다.
극핍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원자(元子)는 기도(氣度)를 잘 타고났다하니 실로 우리나라의 복입니다. 보양대신(輔養大臣) 네 사람을 택정(擇定)하였는데, 혹 병이 있거나 유고(有故)하여 가르침에 열중하지 못합니다. 지금 아직 나이가 어리니 날마다 억지로 가르칠 수는 없으나 또한 가르치다 말다 할 수도 없습니다. 또 꼭 글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말하는 사이에도 족히 취할 것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나이 젊고 단정한 조사(朝士)를 택하여, 혹 대신이 나오지 못할 때에 나아가서 가르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자가 과연 글을 아니 보양의 일에 대해 그 방법을 다하라. 만일 시강원(侍講院)을 설치한다면 당상요좌(堂上僚佐)가 갖추어지리니, 이제 꼭 연소한 사람만 참여시킬 필요는 없고 대신으로 하여금 항상 가서 가르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대신의 병이 어찌 오래가랴.”하매,
기준은 아뢰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려는 것은, 급박하게 하지않고 여유를 두어 점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3∼4품의 위계나 혹 당상(堂上)에 오른 사람으로 학식이 있어 모범이 될 만한 자로 하여금 드나들며 가르치게 하면, 대신의 존엄함과는 같지않으나 족히 원자의 총명을 열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정응(鄭應)은 아뢰기를,
“사람이 태어날 때 그 기질이 일정하지 않으나, 성지(聖智)의 자질은 어릴 때부터 이미 이루어지는 법이니, 규구(規矩)의 보양은 일찍부터 해야 합니다. 대신에게 가르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여유를 두어 급박하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송(宋)나라때 정자(程子)가 태자 가르치는 법을 논하면서, 사대부의 자제 중 연소하고 영리한 자를 택하여 같이 거처하며 수업하게 하라 하였으니, 대저 가르치는 도가 어찌 반드시 한 길뿐이겠습니까?”하였다.
○御夕講。 特進官金克愊曰: “朝經筵進講書, 有齊桓公之事。 桓公雖假仁之君, 然三代以下, 亦不易得。 然不能早定國本, 使其國亂久不定。 夫立嫡, 經也; 立長且賢, 權也。 當擇而早定, 又察民心、物情之所屬可也。 古之聖人, 於禪授之際, 亦以人心、物情之所歸而定之, 故朝覲、謳歌、訟獄者, 不之堯之子而之舜, 不之舜之子而之禹, 或不之益而之啓。 是果上之所使而然耶, 齊桓公不以正心誠意爲急, 故於情意比昵之私, 一向陷溺, 不之察焉。 若正心誠意而不偏於情愛, 擇立儲嗣, 則萬世永賴, 何有禍亂之作也,” 侍讀官鄭譍曰: “毋以賤妨貴, 〔以〕小加大。 貴賤之分, 所當嚴峻。 容貌威儀之際, 截然待之, 則等級分明, 而自不能干犯矣。 大抵夫婦之間, 不能謹別, 則其漸必至於奪嫡。 此事似微而實大, 更當體念。 今克愊所啓, 立嫡常道, 擇賢權道, 此言是也。 然必關於宗社之危亡, 則猶可不得已而爲之, 若不至如丹朱、商均之大無道, 則不可輕以大器, 授於不當立者也。 夫人同受天地之理氣以生, 仁義禮智之德, 初無不備。 若輔養敎誨之得其道, 則豈至於不可立, 而必擇賢者以立之哉,” 參贊官文瑾曰: “後世有立賢者, 此乃無嫡子故也。 若有嫡子, 則當敎養輔導, 涵養德性而有所成效可也。 何可遽至於棄嫡子而立賢長乎,” 上曰: “齊景公無世子, 擇諸子中賢且長者爾。 若世子旣生, 則敎誨而已, 何事於擇也,” 檢討官奇遵曰: “以衛莊公之事見之, 桓公, 莊公之嫡子也, 公子州吁, 莊公之庶子也, 寵愛而好兵。 石碏諫曰: ‘愛子敎以義方, 防微杜漸, 不納於邪, 不可以小加大、賤防貴、淫破義也。’ 莊公不聽, 州吁竟弑桓公。 夫州吁初豈有弑逆之心哉, 莊公寵愛無制, 自釀大禍, 以至於此也。 豈獨州吁之罪也, 須自蚤歲, 明其等威, 使自成習, 可也。” 上曰: “經筵官不得數遞之意, 頃於經筵屢言之, 此職不得已久任, 然後學問精(孰)〔熟〕, 而敎導有效也。” 克愊曰: “臣竊聞之, 元子氣度天成, 俗方之福也。 輔養大臣, 擇定四人, 或有病或有故, 不能勤於敎誨。 當此幼沖之時, 不可逐日拘迫而敎之, 亦不可或作或輟也。 又不必敎之以書也, 周旋進退語默動靜之間, 有足取則。 臣之意, 又擇端方年少朝士, 或於大臣未進之日, 往誨當矣。” 上曰: “元子果能解文, 輔養之事, 當盡其方。 若設侍講院, 則堂上僚佐, 固當備具, 今不必以年少之人參之, 令大臣常常往誨當矣。 大臣之病, 亦豈久哉,” 遵曰: “其所以欲令大臣敎之者, 必能優游漸漬, 不急迫也。 位至三四品, 或陞堂上, 有學識可爲法則者, 使之進退敎誨, 則非如大臣之嚴, 足以發其聰慧也。” 譍曰: “人生天地, 氣質非一, 聖智之資, 自孩提之時已成。 規矩養之, 其可不蚤乎, 以大臣敎之者, 必能優游不迫也。 然宋之時, 程子論敎太子之法, 擇士大夫子弟年少穎悟者, 使與同處受業。 大抵敎之之道, 豈必一途哉,”
중종 34권, 13년(1518 무인/명정덕(正德)13년) 8월 18일(을유) 1번째기사
조강에 나아가니, 이지방을 보내는 것으로 왕도와 패도 논의를 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이 책에 ‘기내(畿內)의 황충(蝗蟲)이 죽으매 하례하려 하였다’8804)하였는데 대저 재변이 있으면 두려워하고 몸을 닦고 반성하여야 하며, 그 재변이 없어졌더라도 지금 없어졌다하여 마음을 놓아서는 더욱 불가하다.
이 윗글에서 말한 ‘일식(日食)할 날에 일식이 응하지아니하여 여러 신하들이 표(表)를 올려 하례하였다’고 기록한 것도 이러한 유이다.
왕단(王旦)이 말하기를 ‘황충이 나온 것은 재변이오, 재변이 저절로 그친 것은 다행인데 또 무슨 하례입니까?’하며 굳이 불가하다하였으니, 이 말이 옳다”하매,
참찬관 박호(朴壕)가 아뢰기를,
“이런 일이 있은 뒤 며칠 만에 황충이 하늘을 뒤덮었으니, 이때에 하례를 받았더라면 천하 만세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단이 굳이 말리지 않았다면 반드시 하례를 드렸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대신의 처사는 신중해야 합니다”하였다.
설경 심달원이 아뢰기를,
“속고 내가 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왕자(王者)의 처사는 광명한 도를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만약 성의로 움직이면 감동하지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상께서 일의 기틀을 살피시어 곧 조광조의 말을 들어 중지하시는 것이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또 임금이 주고 빼앗는 것은 하찮은 것이라도 신중히 해야하는데, 이지방(李之芳)을 보내는데에 상사(賞賜)가 매우 많았으니 이 역시 불가합니다”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이지방은 취할만한 사람입니다만, 만약 간활(奸猾)한 자라면 반드시 조정의 천심(淺深)을 엿볼 것입니다. 어제 융숭한 예로 거행함을 보니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옛날 야율휴가(耶律休哥)8805)는 송나라 지역의 마소가 북쪽으로 넘어온 것을 다 돌려주게 하였고, 조빈(曹彬)8806)은 강남(江南)을 칠적에 아무날 싸울 것이라고 기약하고 오직 성의와 믿음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요즘 대신이 혹 ‘삼대(三代)의 일을 다시 행할 수 없다’하였는데, 이 말이 크게 폐단이 있습니다.
대저 왕패(王覇)의 도8807)는 선유(先儒)들이 자세히 분변하였는데, 중니(仲尼)의 문하에는 오패(五覇)를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8808)
비록 패왕(覇王) 노릇을 한 이도 오히려 인의(仁義)를 빌어서 행하였으니, 대개 인의를 빌어서 행하기는 하였으나 성의가 없었으므로 패(覇)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이 일은 패술(覇術)이라 할 수도 없고 오로지 간사한 꾀입니다. 패도가 왕도(王道)보다 매우 격이 낮은데 또 패도보다도 더 낮은 것이야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이적(夷狄)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으니, 만약 성의로 움직이면 복종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 일을 행하면 하늘도 옳게 여겨서 몰래 도와 줄 것입니다. 바야흐로 왕도를 행하려 하시면서 어찌 차마 패도보다 낮은 일을 행하시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삼대(三代)를 본받을 수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기모(奇謀)가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하였다.
영사 안당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매새끼를 둥지에서 내릴 때에 곰이 잡아먹을까 두려워하여 보금자리를 친 나무에 가시나무를 막아 놓아 곰이 올라가는 것을 막았는데, 호인(胡人)이 그 설치한 장애물을 보고 매 잡는 사람이 왔음을 알고 잠복하여 기다리다가 노략질해 갔으나, 변장이 숨기고 아뢰지 않았다합니다”하고,
이유청이 아뢰기를,
“보금자리에 든 매를 가져가는 일은 매우 폐단이 있습니다.
처음에 매새끼를 가져올 때에는 갓 알에서 나와 털이 없으므로 기르기가 매우 어려운데, 수령이 백성에게 기르게 합니다. 민간에서 닭과 개도 기르기가 어려운데 이는 큰 폐단입니다.
또 수령이 공용을 빙자하고 스스로 가져가는 자도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폐단이 있다고 여겼으므로 전에 이미 감하여 일도에 1∼2련(連)만 두게 하였다. 비록 감하였더라도 수령이 예전처럼 가져갈까 염려된다”하였다.
註8804]‘기내(畿內)의 황충(蝗蟲)이 죽으매 하례하려 하였다’:송진종(宋眞宗) 때 천하에 황충(蝗蟲)이 크게 일었는데, 사자(使者)가 들판에서 죽은 황충을 얻었다. 진종이 대신에게 보이자, 이튿날 집정(執政)이 죽은 황충을 올리며 “황충이 진실로 죽었으니, 조정에 보낸 뒤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하겠습니다”하니, 왕단(王旦)만이 불가하다고 하였다.註8805]야율휴가(耶律休哥):요(遼)나라사람. 송(宋)나라와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성종(聖宗)때에 요,송 국경의 군무를 총괄하였다. 연(燕)지방 백성이 피폐(疲弊)하다하여 부역을 덜어주고, 수병(戍兵)을 경계하여 송(宋)나라 경내를 침범하지못하게 하고, 송나라의 마소라도 요의 영지인 북쪽으로 넘어오면 다 돌려주었다. 그래서 원근이 귀화하고 변방이 편안하였다.《요사(遼史)》권83야율휴가전(耶律休哥傳).註8806]조빈(曹彬):송나라 명장. 처음에는 주(周)의 하중도감(河中都監)을 지냈고 뒤에 송나라로 돌아와서 촉(蜀)을 정벌하여 공이 있었다. 벼슬은 검교태사겸시중(檢校太師兼侍中)을 지냈고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졌다.《송사(宋史)》권258 조빈전(曹彬傳).註8807]왕패(王覇)의 도:왕도(王道)와 패도(覇道)로 맹자(孟子)가 주창하였다. 왕도는 천하에 왕노릇하는 도로 즉 덕으로 인정(仁政)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패도(覇道)는 패자(覇者)가 지니는 도로 즉 인의(仁義)를 경시하고 권술(權術)과 무력을 숭상하는 것을 말한다. 왕도를 행한 대표적인 이는 은탕왕(殷湯王)과 주문왕(周文王)이고, 패도를 행한 대표적인 이는 제환공(齊換公)과 진문공(晉文公)등이다.《맹자(孟子)》양혜왕상(梁惠王上), 공손축상(公孫丑上).註8808]중니(仲尼)의 문하에는 오패(五覇)를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중니는 공자(孔子)의 자(字). 오패(五覇)는 다섯 사람의 패자(覇者)로 즉 제환공, 진문공, 진목공(秦穆公), 송양공(宋襄公), 초장왕(楚莊王)이다. 송양공 대신에 오왕합려(吳王闔廬)를 넣기도 한다. 제선왕(齊宣王)이 맹자에게 패왕 노릇을 한 제환공, 진문공의 일에 대해 묻자, 맹자는 “중니(仲尼)의 문도중에서 제환공과 진문공의 일을 말한 이가 없어 후세에 전함이 없으므로 신이 듣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맹자(孟子)》양혜왕상(梁惠王上).
○乙酉/御朝講。 上曰: “此書云: ‘畿內蝗死欲賀。’夫有災, 則當恐懼修省, 其災雖殄, 尤不可以爲今弭而放弛也。 此上文言: ‘日食不應, 而群臣表賀’ 者, 亦此類也。 王旦之言曰: ‘蝗出爲災, 災弭幸也, 又何賀,’ 固稱不可。 是言當矣。” 參贊官朴壕曰: “是後數日, 飛蝗蔽天。 是時若受賀, 則爲天下萬世之笑矣。 然非王旦固止之, 則必陳賀也。 是故大臣處事, 貴重愼也。” 說經沈達源曰: “束古乃之有罪, 未知也, 但王者處事, 當揭示光明之道, 若以銷, 則無所不憾焉。 上能審機, 卽聽光祖之言而止之, 此崖矣。 且人主之予奪雖微, 而當愼之。 遣李之芳, 賞賜甚多, 此亦不可。” 趙光祖曰: “李之芳, 可取人也。 若奸猾者, 則必窺朝廷淺深焉。 見昨日有隆禮之擧, 甚可寒心。 昔耶律休哥, 以宋地牛馬之逸于北者, 令皆還之; 曺彬之伐江南也, 期以某日將戰, 唯示誠信焉。 近日大臣或云: ‘三代之事, 不可復也。’此言大有弊焉。 夫王、伯之道, 先儒詳加分辨。 在仲尼之門, 羞稱五伯。 雖伯者, 亦猶借仁義而行之。 蓋雖假仁義而不誠, 故云伯也。 今此之事, 亦不可曰伯術也, 專是詐謀。 伯道於王道甚卑, 而又下於伯道, 豈不羞愧哉, 雖夷狄亦有人心, 若以銷, 則無所不服焉, 若行是事, 則天亦是之而有陰助焉。 方欲行王道, 而豈忍爲下於伯道之事乎,” 上曰: “大臣非曰不可倣三代, 當有奇謀云耳。” 領事安瑭曰: “臣聞鷹子下巢也, 恐熊之食, 故所巢之樹, 爲拘梗之事, 以防熊之上也。 胡人見其設具, 知有捉鷹者來, 潛伏待之, 擄掠而去。 然邊將匿不以聞。” 李惟淸曰: “取巢鷹事, 甚有弊焉。 其初取雛也, 纔拆卵而無毛, 養之甚難, 而守令令民養之, 民間雞犬, 不得保畜, 此大弊也。 且守令托公自取者, 亦有之。” 上曰: “以爲有弊故前已減之, 一道或存一二連耳。 雖減之, 恐守令取之如舊也。”
중종 35권, 14년(1519 기묘/명정덕(正德)14년) 4월 17일(경진) 1번째기사
《속강목》을 강하고, 홍문관 선발을 의논하고, 이태, 이하를 체직하다
조강에 나아갔다.《속강목(續綱目)》을 강하다가 정협(鄭俠)이 소(疏)를 올린 데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신종(神宗)이 ‘협(俠)의 말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 그 충성이 가상하다.’하였는데, 과연 이러한 줄 알았으면 마땅히 그를 사형에 처하지않아야 하고 또 죄를 가하지도 않았어야한다. 이것이 신종의 밝지못한 점이다”하매, 대사헌 김정이 아뢰기를,
“신종은 도(道)를 분명히 알지못하고 덕을 지님도 굳지 못했습니다.
처음 유민도(流民圖)를 보고서는 마음에 측연(惻然)하여, 신법(新法)을 혁파하고 군자와 더불어 잘 다스리기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이런 마음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마침내 소인(小人)을 기용하는 반면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다 쫓아내고 없앴으므로 나라가 거의 망할 뻔하였습니다.
대저 임금의 덕(德)은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선악을 알았으면 마땅히 진퇴(進退)를 명백하게 분변하여 소인으로 하여금 군자와 섞여있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 사람의 선악만 알 뿐 능히 진퇴시키지 못함으로써 국가의 환란을 만들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곽공(郭公)이 나라를 망친 이유입니다.9108)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근일 홍문관(弘文館)에 결원(缺員)이 많은데, 식년급제(式年及第)와 천거과(薦擧科)에서 얻은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즉시 홍문록(弘文錄)9109)에 선발하여야 한다”하였다. 대간이 여악(女樂), 이하(李하), 이태(李태), 안서황(安瑞凰)등의 일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인물의 진퇴는 진실로 신중하게 하여야 하며, 대신도 마땅히 가부(可否)를 논하여야 한다”하매,
지사(知事) 이장곤(李長坤)이 아뢰기를,
“아뢴바 사람들에 대하여는 대간이 상세히 알고 있으니 마땅히 체직하여 징계하여야 합니다. 다만 무신(武臣)으로서 혹 탐오(貪汚)하거나 잔혹(殘酷)하다는 것으로 논박받은 자라도, 어쩌다 일시적으로 이와 같은 소행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니, 허물 고치기를 기다려 기용하여야 합니다. 김양필(金良弼)도 일찍이 잔혹한 것 때문에 논박을 받았으나, 또한 지난날의 허물을 반드시 뉘우치고 경계하여 고쳤을 것이니 서용(敍用)할 만합니다”하고,
김정은 아뢰기를,
“인물은 진실로 한때에 논박받았다는 것으로 영원히 버리고 서용하지 않는 것은 불가합니다. 자신(自新)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았으면 다시 서용하여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때의 과오로 영원히 폐기하고 서용하지않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다.
만약 능히 개과천선(改過遷善)하였다면 다시 서용하는 것이 가하다.
전일 신옥형(申玉衡)이 죄를 받았는데, 그 문적(文籍)을 상고하여 보니 진실로 의심스러웠다”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윤자임(尹自任)이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유옥(柳沃)이 사망하였는데 집이 가난하여 장사를 치를 수 없다고하니 참으로 애도(哀悼)를 금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공사(公事)에는 힘을 다하고 사사일을 돌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부의(賦儀)를 보내는 예(禮)에 관하여는 비록 성법(成法)이 있으나, 시종(侍從)의 신하가 죽으면 마땅히 따로 부의하는 법전(法典)이 있으니, 청컨대 특별히 법규(法規) 밖의 은전(恩典)을 베푸시어 애석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시종의 신하로서 죽은 자가 하나둘이 아니니, 사람마다 특별히 부의 하기는 어렵다. 단 유옥같은 사람은 나라일에만 전심하였을 뿐 사사일은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이 가난하여 장사를 치를 수 없다고 하니 진실로 애련(哀憐)하기 짝이 없다. 마땅히 그 도감사(監司)에게 하서(下書)하여 부의를 보내고 호상(護喪)하게 하겠다. 이태(李迨),이하(李하)는 논박받은 지 이미 오래고 직사(職事)에 태만함이 많았으니 오늘 체직하라”하였다.
註9108]곽공(郭公)이 나라를 망친 이유입니다:춘추시대 제환공(齊桓公)이 놀러나갔다가 어떤 폐허(廢墟)를 보고 마을 노인에게 “누가 살던 폐허인가?”물으니, 노인이 “곽공이 살던 폐허입니다”하였다. 또 “곽공은 어찌하여 망하였는가?”하니, 노인이 “곽공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였으나, 선을 좋아하면서도 선한 사람을 기용하지 못하고 악을 싫어하면서도 악한 사람을 제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망하였습니다”하였다” 註9109]홍문록(弘文錄):홍문관 관원(弘文館官員)은 임금의 교서(敎書)를 제술하는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고 또 경연관(經筵官)을 예겸(例兼)하여 임금의 고문(顧問)에 응하도록 되어있으므로, 임금의 측근에 조정의 득실(得失)을 논하게 되니 삼사(三司)가운데서도 으뜸의 청요직(淸要職)이다. 그러므로 전선(銓選) 또한 신중히하여 문과(文科)의 방목(榜目)이 나게 되면, 홍문관7품 이하의 관원이 모여 홍문관관원으로서의 적격자를 초출(抄出)한 뒤 부제학(副提學)이하 응교(應敎),교리(校里),수찬(修撰)등이 거기에 권점(圈點)을 치는데 이를 홍문록 또는 본관록(本館錄)이라 한다. 이것을 다시 의정(議政),찬성(贊成),참찬(參贊),이조(吏曹)의 삼당상(三堂上)이 모여서 제2차 권점을 치는데 이를 도당록(都堂錄)이라 한다. 이 도당록을 상주(上奏)하여 득점(得點) 순으로 교리, 수찬에 임명한다.《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庚辰/御朝講, 講《續綱目》。 至鄭俠上疏, 上曰: “神宗謂俠之言, 非爲其身, 忠誠可嘉。 果知如是, 則不當置之於死, 又不可加以罪也。 此神宗不明處也。” 大司憲金凈曰: “神宗見道不明, 執德不固, 初見流民圖, 惻然於中, 欲罷新法, 期與君子圖治。 此心不繼, 卒用小人, 忠良之臣, 退斥殆盡, 而國幾於亡。 夫人君之德, 在於善善而惡惡。 知其善惡, 則當明辨進退, 不可使小人君子雜處。 徒知善惡而不能進退, 則鮮不爲國家患。 此, 郭公之所以亡國也。” 上曰: “近日弘文館多闕員。 式年及第與薦擧科, 得人必多。 速選弘文錄可也。” 臺諫啓女樂、李、李迨、安瑞凰等事, 上曰: “人物進退, 固當愼重。 大臣亦當論其可否。” 知事李長坤曰: “所啓之人, 臺諫詳知之, 則當遞以懲, 但武臣或以貪汚, 或以殘酷被駁者, 其一時所行, 雖或如是, 待其改過, 當用之。 金良弼曾以殘酷被論, 亦必懲艾已往之愆, 猶可恕也。” 金淨曰: “人物固不可以一時被論, 永棄不用矣。 見其有自新之心, 在所復用。” 上曰: “以一時之過, 永廢不用, 固不可。 若能改過遷善, 可復敍用。 前日申玉衡被罪, 考其文籍, 固可疑也。” 參贊官尹自任曰: “今聞柳沃之死, 家貧無以爲葬, 誠爲可悼。 其爲人力於公事, 不顧其私。 致賻之禮, 雖有成法, 然侍從之臣死, 則當別施賻典。 請特擧規外之恩, 以示悼惜之意。” 上曰: “臺諫、侍從之臣,死者非一, 難可人人而別賻。 但如柳沃者, 非徒國耳, 忘私家貧, 不能治喪, 誠可哀憐。 宜下書其道監司, 使之致賻護喪。 李迨、李被論已久, 職事多曠, 今日可遞。”
중종 39권, 15년(1520 경진/명정덕(正德)15년) 5월 11일(무술) 3번째기사
전라도 관찰사 김양진의 벼슬을 갈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헌(大司憲) 성운(成雲)이 아뢰기를,
“김양진(金楊震)이 이제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도내(道內)에서 바야흐로 죄인을 수포(搜捕)하는데 양진의 사위도 도망중이니, 이제 그 아내의 아비를 시켜 사위를 잡게 하는 것은 사체에 맞지 않습니다. 빨리 가소서”하고,
대사간(大司諫) 서지(徐祉)가 아뢰기를,
“관찰사는 한 도의 주인이니, 도내의 백성이 잡을 수 있더라도 아마 관찰사의 사위라 하여 고하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진의 사위가 도망중이므로 과연 상피(相避)해야 하겠으나, 죄인은 윤종(胤宗)뿐이 아닌데다가 도사(都事)도 있다”하매,
영사(領事) 남곤이 아뢰기를,
“방면(方面)을 맡은 대신(大臣)은 맡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 때문에 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양진의 집과 신의 집은 이웃에 근접하여 있는데, 듣기로는 양진이 상의 분부를 들은 뒤에 더욱 스스로 황송하게 여긴다 하니, 이제 이 사람을 보낸다면 반드시 송구하게 여기고 잡을 것입니다.
어찌 사사로운 뜻을 품겠습니까?
이제 대간이 아뢴 것도 옳지 않습니다마는, 상의 분부가 이러하시면 미관(微官)일지라도 피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관찰사의 대임(大任)이겠습니까?
어찌 감히 마음을 써서 수포하지 않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진은 어찌 감히 사정(私情)을 쓰겠는가? 다만 아랫사람이 숨기고 고하지 않을까 염려되나, 이 때문에 갈 수는 없다”하였다.
남곤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외방(外方)에서는 죄인을 수포하기 위하여 진로(津路)에 둔 도직(盜直)을 다 장정(壯丁)으로 차출하였으므로 바야흐로 농사철인데 경종(耕種)할 수 없으며, 여행하는 사람이 혹 길에 나가면 위협하여 폐단을 짓는다하니 지극히 미안합니다. 이번 죄인을 버려두고 잡지 않으면 국가의 기강이 손상되거니와, 각 고을의 수령들이 힘을 합쳐 끝까지 찾으면 숨을 데가 없을 터인데, 아직도 잡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하고,
서지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하정(河珽)이 도망할 때에 여자 옷을 입고 너울[羅火]【방언으로 얼굴을 가리는 물건을 말한다】을 쓰고서 나갔다 합니다”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산골에 숨었으면 쉽게 잡힐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도망중인 자는 다 사대부(士大夫)이니, 폐단이 매우 크므로 대신과 의논하여 수포하는 것이다. 장죄(贓罪)를 범한 자라면 오히려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으나, 이 사람들은 끝까지 찾지 않아서는 안된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 관찰사는 오래 비어있으며, 김양진도 피혐(避嫌)하여 빨리 가지않을 것이니 갈도록 하라”하였다.
서지가 아뢰기를,
“이환은 이조 좌랑에서 수찬이 되었는데, 서너달 사이에 이와 같이 옮겼으니 빨리 가소서. 박숭질의 아내의 일은 온 나라안이 다 아는 것이니 그 작첩을 도로 주어서는 안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파된 말은 밝히기 어려운 것이므로 도로 내려 준 것이다”하매,
서지가 아뢰기를,
“그때 사람들이 비평하기를 ‘노나라로 가는 길이 평탄하니 제자가 편히 왕래한다.[魯道有蕩齊子翺翔]’10045)하였으니 이것은 밝히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그러나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심정(沈貞)이 아뢰기를,
“당번 군사는 군영(軍營)에 들어가 거처하는 것이 매우 온편한데, 근일에 상번하는 군사를 보면 다 사가(私家)에 거처하고 전혀 군영에 들어가 거처할 생각이 없으니, 이것은 처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듣건대 근일 군사 중에는 한 달 동안에 장죄(杖罪)를 받는 자가 1천5백 명이나 되어 죄다 죄줄 수 없다하니, 이것은 상께서 짐작하셔야 하겠으나 버려두고 다스리지않으면 또한 징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군사들이 군영에 들어가기를 어려워하는 것은 마초(馬草)나 염장(鹽醬)을 장만할 수 없기 때문이니, 국가에서 근교의 풀을 쌓아 두고 3일마다 헤아려 주고 오래 묵은 염장도 때때로 주면, 군사들이 원망하는 마음 없이 군영에 들어가 붙여 있게 될 것입니다”하고,
특진관 황형(黃衡)이 아뢰기를,
“군사에게 으레 보솔(保率)을 주는 까닭은 식량을 장만하고 말을 갖추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근일에는 군사가 된 자들이 그 값을 요구해 받고서는 당번이 되면 몸만 올라오니, 이 때문에 습속이 되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일 병무(兵務)가 해이하므로 병조(兵曹)에서 더욱 규검(糾檢)하려 하는데 군졸 중에 원망하는 자도 있으니, 너무 엄하게도 하지말고 너무 늦추지도 말아서 중도에 맞도록 힘쓰라”하였다.
註10045]노나라로 가는 길이 평탄하니 제자가 편히 왕래한다[魯道有蕩齊子翺翔]:이것은《시경(詩經)》제풍(齊風) 재구(載驅)의 한 구절이다. 제자(齊子)는 제양공(齊襄公)의 누이 문강(文姜)을 가리킨다. 양공이 평소에 문강과 간통하다가 노환공(魯桓公)에게 시집보냈는데, 환공이 알고 꾸짖었다. 뒤에 환공이 문강과 함께 제나라에 갔을 때에 문강이 양공에게 호소하니, 양공이 공자(公子) 팽생(彭生)을 시켜 환공을 죽였다. 이 시를 인용하여 연산군(燕山君)과 박숭질(朴崇質)의 아내 정씨(鄭氏)의 간음을 풍자한 것이다.
○御朝講。 大司憲成雲曰: “金楊震, 今爲全羅道觀察使, 道內時方搜捕罪人, 而楊震之壻, 亦齋。 今使妻父, 搜捕其壻, 事體不合。 請速遞之。” 大司諫徐祉曰: “觀察使, 一道之主也。 道內人民, 雖得捕捉, 恐其以觀察使之壻而不告也。” 上曰: “楊震女壻齋, 果可相避, 然罪人非獨胤宗也, 而且都事存焉。” 領事南袞曰: 方面大臣所任, 非一二事, 以此遞之, 不可也。 楊震之家, 與臣之家接隣。 聞楊震聞上敎之後, 尤自惶悚。 今若遣此人, 則必當懼而捕捉。 豈懷私意乎, 今臺諫所啓, 亦不可, 但上敎如此, 雖微官亦所不避。 況觀察使大任乎, 豈敢不用心搜捕乎。” 上曰: “楊震則何敢用私, 但慮下人隱而不告也。 然不可以此遞之。” 袞曰: “臣聞外方, 以搜捕罪人, 津路盜直者, 皆以丁壯差之。 今方農候, 未得耕種, 行旅之人, 或出於街路, 脅人作弊, 至爲未安。 今此罪人, 若棄而不捕, 則有傷國綱, 各官守令, 若同力窮搜, 庶無容匿, 迨未荀, 此亦非小事也。” 祉曰: “臣聞河珽逃躱時, 具女服着羅火【方言蔽面之名。】 而出。” 袞曰: “若隱山谷, 必易見捕。” 上曰: “今之齋者, 皆士大夫, 此弊至大, 故與大臣議而搜捉矣。 如犯贓者, 猶可寬赦, 此人等, 不可不窮搜。” 上曰: 全羅道觀察使久闕, 楊震又避嫌, 必不速往。 可遞。” 祉曰: “李芄, 自吏曹佐郞, 爲修撰三四朔間, 遷移如此。 請速遞之。 朴崇質妻事, 通國所知, 不可還授其爵。” 上曰: “傳播之言, 在所難明, 玆以還賜矣。” 祉曰: “其時人譏之曰: ‘魯道有蕩, 齊子(翔翔)〔翺翔〕。’ 此非難明之事。” 袞曰: “然, 不可的知也。” 特進官沈貞曰: “當番軍士, 入處軍營甚便, 觀近日上番軍士, 皆接寓私家, 了無入寓軍營之意, 此則以其無罰故也。 臣聞近日軍士, 一月受杖罪者, 一千五百, 不可盡罪。 此當自上斟酌之, 然棄而不治, 則亦無所懲。 軍士難於入營, 以其不能具馬草備鹽醬也。 國家若積置郊草, 間三日計給, 久陳鹽醬, 亦以時給, 則軍士當入寓軍營, 無怨憤之心。” 特進官黃衡曰: “軍士例給保率者, 欲其備糧具馬匹也。 近日則爲軍土者, 責受其價, 當番則身獨上來, 以此成風。” 上曰: “近日兵務解弛, 故兵曹欲加紏檢, 而軍卒又有怨之者。 勿太嚴太弛, 務令得中。”
중종 52권, 20년(1525 을유/명가정(嘉靖)4년) 1월 21일(경진) 2번째기사
홍문관이 역대의 여역을 상고하여 아뢰나, 구제 방도를 상고하지 못하다
홍문관이 역대의 여역을 상고하여 아뢰기를,
“역대의 여역은 이러하나, 그 재변을 구제한 방도는 상고할 수 없었습니다.《춘추(春秋)》에 ‘노장공(魯莊公) 20년(B.C.614) 여름 제(齊)나라에 큰 재변이 있었다’하였는데, 유향(劉向)은 ‘제환공(齊桓公)이 여색을 좋아하여 여인의 말을 듣고 첩을 아내로 삼아 적서(嫡庶)가 여러번 바뀌었으므로 큰 재변을 가져왔으나 환공이 깨닫지못하였는데, 죽고 나니 적서가 어지러이 다투어 아흡 달동안 장사지내지 못하였다’하였고,《공양전(公羊傳)》에는 ‘큰 재변이란 염병이다’하였고, 동중서(董仲舒)는 ‘노(魯)나라의 부인(夫人)이 제(齊)나라에서 간음하고 시집가지 못한 제환공의 자매가 7인이다.
임금은 백성의 부모이고 부부는 생화(生化)의 근본인데, 근본의 상하면 말단이 굴(屈)하므로 천재(天災)가 여기서 나왔다’하였습니다.
후한(後漢) 안제(安帝) 원초(元初)2년(115) 여름 4월에 회계(會稽)에 염병이 크게 일었으므로 광록대부(光祿大夫)를 보내어 태의(太醫)를 거느리고 질병을 순행하여 보게 하고, 관목(棺木)을 내리고 전조(田租)를 면제하였습니다. 환제(桓帝) 원가(元嘉)원년(151) 정월에 경사(京師)에 염병이 크게 일었으므로 광록대부를 시켜 의약(醫藥)을 가지고 안행(按行)하게하였고, 연희(延憙) 4년(161) 정월에 염병이 크게 일었는데, 태공(太公)의《육도(六韜)》에 ‘임금이 부역(賦役)을 무겁게 하고 궁실(宮室)을 크게 하고 대유(臺遊)를 많게 하면 백성에게 염병이 많다’하였습니다.
영제(靈帝) 건녕(建寧)4년(171) 3월에 염병이 크게 일었으므로 중알자(中謁者)를 시켜 순행하며 의약을 가져다주게 하였습니다.
당문종(唐文宗) 태화(太和)6년(832) 봄에 검남(劍南)부터 절서(浙西)까지 염병이 크게 일었으므로 염병으로 죽은 백성에게 관(棺)을 주고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10세 이하인 자에게 두 달의 양식을 주었습니다.
송태종(宋太宗) 순화(淳化)3년(992)에 명하여, 태의서(太醫署)의 양의(良醫)가 경성(京城)의 병자를 보고, 50만전(錢)을 내려 약을 갖추고, 중황문(中黃門) 1인이 이를 살피게 하였습니다. 5년에 도성(都城)에 염병이 크게 일었으므로 시호(柴胡)12735)를 내어 약을 지었는데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고려사(高麗史)》현종기(顯宗紀)9년(1018) 4월조에 경성에 염병이 크게 일었으므로 임금이 의원을 나누어보내어 구완하였다하였고, 명종(明宗)17년(1187) 5월에 경성에 염병이 크게 일었으므로 오부(五部)에 명하여 도부신(道符神)의 초제(醮祭)를 베풀어 쫓게 하였습니다.
《주례(周禮)》에는 ‘나라에 대고(大故), 천재(天災)가 있으면 사직(社稷),도사(禱詞)에 미사(彌祀)12736)한다’했고, 한(漢)나라의 제도는 염병의 재앙이 있으면 천지, 일월성신, 사시(四時), 음양(陰陽)의 신(神)에게 제사하여 재앙을 쫓고 이대(二代)의 위교(葦茭)12737), 도경(桃梗)12738)도 아울러 썼습니다. 진무제(晉武帝) 태시(太始)2년(266)에 유사(有司)가 여귀(癘鬼)를 제사하고 양사(禳祀)12739)할 것을 아뢰니, 조(詔)에 이르기를 ‘사전(祀典)에 실려있지 않으니 하지말라’하였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것은 알았다. 빌고 제사하는 일과 의약에 관한 일은 다 지금 거행하는 것이다”하였다.
註12735]시호(柴胡):약초(藥草)의 이름. 뿌리를 말려 두었다가 발한(發汗),해열(解熱)에 쓴다.註12736]미사(彌祀):그치게 하기 위하여 비는 것.註12737]위교(葦茭):갈[葦]을 엮어 만든 밧줄. 문에 걸어 재앙을 쫓는다.註12738]도경(桃梗):복숭아나무로 만든 인형(人形). 악한 귀신을 쫓는데에 쓴다.註12739]양사(禳祀):재앙을 쫓는 제사.
○弘文館以歷代癘疫考啓曰: “歷代癘疫, 則如此矣, 其禦災之方, 則未得以考也。 其曰: ‘莊公二十年夏, 齊大災。’ 劉向以爲: ‘齊桓好色, 聽女口, 以妾爲妻, 嫡庶數更, 故致大災。 桓公不悟, 及死, 嫡庶紛爭, 九月不得葬。’ 《公羊傳》曰: ‘大災疫也。’ 董仲舒以爲: ‘魯夫人淫於齊, 齊桓姊妹不嫁者七人。 國君, 民之父母; 夫婦, 生化之本。 本傷則末夭, 故天災所出也。’ 後漢安帝元初二年夏四月, 會稽大疫, 遣光祿大夫, 將太醫, 循行疾病, 賜棺木、除田租。桓帝元嘉元年正月, 京師大疫, 使光祿大夫, 將醫(導)〔藥〕按行。 延熹四年正月大疫, 太公《六韜》曰: ‘人主好重賦役、大宮室、多臺遊, 則民多溫病也。’ 靈帝(建靈)〔建寧〕四年三月大疫, 使中謁者巡行, 致醫藥。 唐文宗太和六年春, 自劒南至浙西大疫, 給民疫死者棺, 十歲以下不能自存者, 給二月糧。 宋太宗淳化三年, 詔太醫署, 良醫視京城病者, 賜錢五十萬具藥, 中黃門一人視之。 五年都城大疫, 出柴胡劑藥, 活者甚衆。 《高麗顯宗紀》, 九年四月, 京城大疫, 王, 分遣醫療之。 明宗十七年五月, 京城大疫, 命五部, 設道符神醮, 以禳之。 《周禮》: ‘國有大故、天災, 彌祀社稷, 禱祀。’ 漢制, 厲殃, 祀天地、日月星辰、四時、陰陽之神, 以禳災, 兼用二代葦茭、桃梗。 晋武帝太始二年, 有司奏: ‘春分祀厲及禳祀。’ 詔曰: ‘不在祀典, 其除之。” 傳曰: “所啓知道。 禱祀、醫藥, 皆今之所已行者也。”
중종 98권, 37년(1542 임인/명가정(嘉靖)21년) 5월 22일(임인) 2번째기사
왜사신의 은의 처리문제와 가뭄의 재변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다
선위사(宣慰使) 나세찬(羅世纘)의 서장(書狀)에 말하기를,
“이달 19일 아침에 통사(通事) 한억년(韓億年)을 시켜 안심동당(安心東堂)등에게 말하기를 ‘어제 이미 행하도록 허가하였는데 이제까지 서로 만나지 못하여, 전하의 사명을 묵혔으니, 사신의 체모를 크게 잃은 것이다.
그대들도 역시 신하인데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니, 안심동당등이 대답하기를 ‘거듭 생각하여도 서울에 올라갈 수 없으니, 만난들 무엇하겠는가?’하기에, 신(臣)이 대답하기를 ‘그대들의 거취는 내가 모르는 바이나, 나는 명을 받들고 왔으니, 그대들이 만나지 않을 수 없다’하며 두세번 타일러서야 서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위임되어 온 뜻을 두루 설명하니, 동당 등이 대답하기를 ‘전에 인동(仁同)에다 국왕(國王)이 보낸 은(銀)을 놓아둔 것이 마음에 매우 미안하다. 애써 올라와서 국왕의 서계(書契)만이라도 전달하려 하였는데, 선위사가 뜻밖에 내려왔기에 조정이 특별히 새 법을 만들어 우리들을 구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제 하교(下敎)를 듣고보니 감사하다.
다만, 우리들은 길이 험하여 몹시 힘들었는데 마침 전 선위사와 더불어 여러 날 같이 와서 정이 두터워졌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우리들로 말미암아 뜻밖에 체직되어 떠났으니, 이 생각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참으로 당연한 인정이겠으나, 선위사가 예전부터 행하여 온 사목(事目)을 지키지 않아서 그대들을 수고롭게 하였으니, 이것은 스스로가 잘못한 것으로 그대들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그대들의 마음이 어찌 이토록 편치 못한가?’하니, 안심동당등이 대답하기를 ‘국왕의 본의는 보물만을 바치고 말 뿐이 아니라,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유통하자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은을 가져왔는데, 선위사가 포소(浦所)에 그대로 두지않았다고 체직되었다. 이 행차가 무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우리나라로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군자(君子)가 사귈때에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신의(信義)이지 물건이 아니다. 더구나 전에는 은을 가져온 때가 없었다. 인동에 있는 가벼운 짐은 뒤에 남아 있는 정관(正官)들을 시켜 가져오게 하는 것이 매우 온당하다’하니, 안심동당등이 대답하기를 ‘신의는 실로 귀중하게 여기지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만, 우리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멀리 온 것은 구구한 음문(音問)20231)을 전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국왕이 보낸 은을 버려 두고 한낱 자기의 사물만 무역한다면 이 몸이 끝내 본국에서 보전되기 어려울 것이니, 사삿짐을 결코 가져갈 수 없다. 동행과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겠다’하고,
각각 나뉘어 처소로 갔습니다.
이윽고 안심동당등이 도선주(都船主) 귤성광(橘盛廣)을 보내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일행은 결코 갈 수 없으니, 가져온 서계와 바치는 물건들을 선위사에게 부탁하고 우리들은 곧 떠나 돌아가려 한다’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나는 명을 받은 신하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받을 수 없다. 설령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대들은 본국에 돌아가서 국왕에게 무엇이라고 아뢰겠는가?’하니, 귤성광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의 진퇴가 이렇게 낭패하니 어쩔 줄 모르겠다. 은은 지극히 귀한 보배이고 있는 것을 없는 것과 바꾸는 것도 전례가 있으니, 은을 사고 안사는 것을 알려 주기 바란다. 그런 뒤에 가고 안가는 것을 결정하겠다’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무릇 물건에는 본디 귀천이 없고, 그 나라의 풍속이 숭상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본디 보배롭고 진기한 물건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 물건은 결국 쓸 데 없는 것이다. 나는 접반(接伴)하여 올라가는 것을 알뿐이고, 조정의 처분은 내가 모르는 것이다’하니,
귤성광이 대답하기를 ‘대국(大國)이 실로 은을 쓸 데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대내전(大內殿)의 사송(使送)과 여느 왜인들이 앞서 두세해 동안에 은 등의 물건을 많이 가져와서 무역하여 갔는가? 이것은 보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무릇 이런 일을 국왕이 잘 알고서 맡겨 보내 왔는데, 어찌하여 여느 왜인의 보배는 보배로 여기고 우리 국왕이 보낸 보배는 보배로 여기지 않는가?’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전한 자가 잘못 전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참으로 은을 보배로 여긴다면, 여느 왜인의 은과 그대들의 은을 어찌하여 가리겠는가? 그럴 리가 만무하다. 돌아가서 상관(上官)에게 빨리 떠나자고 고하라’하였습니다.
그래도 결정하지 않고 두세번 이렇게 하다가 신시(申時)가 되어서야 말하기를 ‘서계를 전달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상경은 하겠다. 다만, 이틀 길을 하루에 가려 하니, 이제 곧 떠나기 바란다’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오늘은 이미 저물었고 앞길이 매우 험하니, 밝거든 일찍 떠나도 무방하겠다’하였으나 듣지않으므로, 그날로 떠나서 문경(聞慶)에서 잤습니다. 인동에 놓아둔 사삿짐과 정관인(正官人)등을 데리고 오는 일은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하였는데,
대신들에게 전교하기를,
“이제 나세찬의 서장을 보니, 객사(客使)가 올라온다고는 하였으나, 우리나라의 접대는 매몰한 듯하다. 어제 예조판서가 ‘조종때부터 번번이 후대하였으니 이제 박대하여서는 안 되는데, 박대하므로 이렇게 성낸 것이다.
올라온 뒤에 말하는 것을 들어 주고 각별히 후대해야 한다’고 하였다.
시사(時事)를 보면 해마다 가물고 재변이 끊이지 않는데,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서계(書契)에 공손하지않은 말이 많이 있었고 이제 또 객사가 성을 내니, 매우 우려된다. 이제 마침 대신(大臣)이 왔으므로 내 뜻을 말하는 것이다.
오고 가는 사이에 빠뜨리는 말이 있을 듯하니, 내가 면대하겠다”하였다.
상이 사정전에 나아갔다.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윤인경(尹仁鏡), 예조판서 김안국(金安國), 좌참찬 권벌(權橃), 병조판서 이기(李芑)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가뭄의 기세를 보니 날마다 점점 말라간다. 지난해에 큰 흉년이 들고 이제 또 이러한데, 이달에 비가 내리지않으면 가을에 추수할 희망이 아주 없다. 비는 것이 말단의 일이라고는 하나 하지않는 것이 없어야 하겠으므로 옛일을 본떠서하려 하였는데, 어려운 형세라고 의논하므로 거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재변이 아니므로 염려스럽다.
객사의 일은, 선위사가 처리를 잘못하였으므로 체직하였다. 올라온 뒤에 체직하면 마땅할 듯하였는데 의논이 같지않아 파직된 관원이 공무를 집행할 수 없다하므로, 다른 관원을 보내어 그 직임을 대신하게하여 객사가 성을 내게 되었다. 조정이 잘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하니,
윤은보가 아뢰기를,
“가뭄의 재변이 절박하여 해마다 농사를 그르쳤으므로 비는 것이라면 하지않는 것이 없이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염려하여 옛일을 살펴 사흘 동안 한데에서 빌려 하셨는데, 비를 꼭 바랄 수 있더라도 성체(聖體)는 결코 한데에 앉아 계실 수 없습니다. 더구나 꼭 바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를 빈 뒤에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백관(百官)을 모아 뜰에 서서 비는 것은 오히려 할 만합니다. 객사가 온것은 오로지 은을 위한 것인데, 중도에 그 은을 그대로 두라는 말을 듣고는 실망하여 ‘국왕의 물건도 사지 않는데 더구나 사물이겠느냐?’하고 저희 무리 열다섯 사람을 인동에 남겨두었고, 도선주(都船主)가 ‘사고 안사는 것을 자세히 들은 뒤에 가고 머무는 것을 결정하겠다’하였습니다. 왜사의 생각은 국가에서 어찌 중도에 두었다가 돌려보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올라온 뒤에 각별히 위로하고 타이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고,
김안국이 아뢰기를,
“한데에 앉아서 비는 것은 예전부터 없던 일인데, 한 나라의 신민의 임금으로서 어찌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몸을 단속하고 행실을 닦는 일과 직언을 구하고 원옥(冤獄)을 다스리는 등의 일을 전에도 써서 아뢰었는데, 세번째 비를 빈 뒤에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이런 일들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권벌이 아뢰기를,
“지금의 가뭄이 해마다 이러하니,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큰물과 가뭄의 재변은 요(堯)임금과 탕(湯)임금도 면하지 못하였다고는 하나, 요임금 때의 큰물은 천지가 처음 열려 물길이 통하지않아서 그런 것이라 오히려 ‘큰물이 나를 경계한다’하였고, 탕임금때의 가뭄은 허물이 없었는데도 육책(六責)으로 스스로를 반성하여 마침내 하늘의 뜻을 돌렸으니, 지금도 육책의 일을 유념하고 살펴야 하겠습니다. 임금의 마음이 향하는 것을 하늘은 반드시 아니 하늘이 아득하기는 하나 그 보는 것이 매우 밝다하였는데, 이것은 옛사람의 격언(格言)이니, 한갓 빌기만 하는 것으로 비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육책의 일에 따라 무슨 일이 내 정치의 잘못인지를 돌이켜 보고 살펴 생각하면, 그 사이에 어찌 병폐를 일으킨 근원이 없겠습니까?
근래 정사(政事)가 매우 잦은데, 지방에 나가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이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면 체직해야 되겠으나, 경관(京官)도 임기를 헤아리지 않고 자주 서로 옮기니, 정사에 절도가 없다 하겠습니다.
또 백성이 번성한 것은 지금만한 때가 없으나 발과 집을 죄다 팔고 떠돌며 입에 풀칠하여 일정한 주거가 없고, 군역(軍役)을 정하면 곧 도피하여 거의 다 유망(流亡)하니, 백성이 직업을 잃었다 하겠습니다.
중국 사람은 부녀자일지라도 다 글을 알아 사리를 아는데, 우리 동방은 글을 아는 부인이 적으니 어찌 사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궁중(宮中)의 청탁에 관한 말이 밖에 들리는데 항간에서 전하여 떠도는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으나, 이러한 일은 여알(女謁)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또, 왕자(王子)의 집이 제도보다 지나치게 한없이 높아서 편안히 살지못하고 작읍 집으로 옮기는데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두 그러하니, 궁실(宮室)이 높은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뇌물이 성행하는 것은 어제 임형수(林亨秀)도 임금의 측근을 잘 섬기는 폐단을 아뢰었습니다. 전에 권신(權臣)이 조정에 있어서 매우 심하게 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못되며, 지금은 전의 심하던 것과는 같지 않으나 서로 보내고 청탁하여 백성에게 폐해를 끼칠 만한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참소하는 자가 득세하는지는 지금 알 수 없으나,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구설이 매우 많아서 인심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여섯가지 일이 지금의 폐단에 맞는 듯하니, 이러한 일을 경계하고 살펴서 스스로 책망하여 선뜻 뉘우쳐 깨달으면 하늘이 반드시 알아서 그 뜻을 돌이킬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한갓 겉모양의 말단에 구구하면 하늘의 뜻에 맞지 않을 것이니, 어찌 빌어서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늘 우려하고 삼가시면 비는 실속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덕을 잘 닦는 것으로도 하늘에 빌어서 명을 길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하늘에 빈다고 하는 것은 사사롭게 비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니, 그 덕을 잘 닦아서 끝내 하늘의 마음에 맞으면 위아래가 화합하여 나라의 명맥을 길게 할 것입니다”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인사(人事)를 잘 닦는 것이 근본이기는 하나 비는 것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지않는 것이 없이 다해야 하므로 전례에 따라 하려한다.
인동(仁同)에 머물러 있는 왜인은 객사(客使)가 올라온 뒤에 그 뜻을 물어서 처리해야겠다”하였다.
이기(李芑)가 아뢰기를,
“근래 가뭄의 재변이 해마다 잇달아서 나라의 저축이 없으므로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앉아서 보고 구제하기 어려울 형세이나, 위에서 근심하고 애쓰며 대신을 만나서 좋은 방도를 물으시니, 하늘이 반드시 알아서 비를 내릴 것입니다. 대저 비를 비는 방도는 민간의 병폐와 정사의 잘못을 모두 강구하여 고쳐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끝내 비가 내리는 것을 바랄 수 없습니다. 인사의 잘못을 다 고쳐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빌어야 하겠으나, 끝내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상체(上體)가 어찌 친히 한데에 앉으실 수 있겠습니까?한데에 앉는 것으로 반드시 비를 얻을 수 있었다면, 예전의 거룩하고 밝은 임금들이 인사(人事)에서 찾지 않고 늘 먼저 이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신은 가난한 여염(閭閻)에서 나서 자랐어도 더위를 먹는데, 더구나 성체이겠습니까? 지금의 가뭄은 신처럼 변변치 못한 자가 정사하는 사이에 끼어서 이러한 꾸중을 가져온 것입니다.
객사는 은을 위하여 왔으니, 국가가 무역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들의 화를 풀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화를 풀자면 그들의 청을 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방책은 그들의 청을 들어주느냐 아니냐 두 가지뿐이나, 조정이 사지 않기로 의논을 정하였으니,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이 밖에는 각별히 할 일이 없겠습니다”하고,
김안국이 아뢰기를,
“이웃 나라의 사자를 어찌 중도에 머무르게 했다가 바로 돌아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인동에 있는 왜인은 어쩔 수 없이 데려와야만 이웃사자를 대우하는 도리에 맞거니와 가져온 다른 상물(商物)도 다 올려와야 옳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도에서 성을 냈다고 하는데, 이제 그 청을 들어주면 겁내는 듯하겠고, 그렇게 하지않으면 상물을 강제로 날라오게할 수 없을 것이니, 들어온 뒤에 그 뜻을 다시 살펴서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공물(公物)도 무역을 허가하지 않는데, 사물(私物)을 어찌 감히 가져오겠는가?”하였다.
권벌이 아뢰기를,
“예전에 포숙아(鮑叔牙)가 제환공(齊桓公)에게 말하기를 ‘거(莒)에 있던 때20232)를 잊지말라’하였는데 사람들이 어려웠던 때를 잊지않아야 마음이 방자해지지 않습니다. 위에서 폐조(廢朝)를 겪으셨으니 폐조때에 어렵고 위태로움이 극진하였던 것을 위에서 어찌 잠시라도 잊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때에 백성들이 시름하고 몹시 어지러워 다스려지기를 바라더니, 추대하기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의 신민이 누구나 다 기뻐 날뛰며 다들 태평한 정치를 기대했습니다. 즉위하신 이래로 부지런히 다스리기를 꾀하여 별로 잘못된 일이 없었으나,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고 국용(國用)이 궁핍하며 재변이 거듭 일어나니, 지극히 두렵습니다. 위에서 옛날의 어려움을 깊이 생각하고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아서 몸소 솔선하여 검약(儉約)하시고 대신도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으면, 사치한 버릇이 저절로 크게 변하여 다스릴 것조차도 없게 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방(外方)의 음식은 그릇 수를 정하지않았으므로, 하유(下諭)하더라도 나라의 영을 따르지 않는다. 그 수를 정하여 규찰(糾察)하면 고쳐질 것이다”하였는데, 홍언필이 아뢰었다.
“감사(監司)가 굳세고 밝은 자라면 도내(道內)에 들어가면서 ‘음식은 세 그릇을 넘지 못한다’고 선문(先文)에 써서 보내겠으나, 감사가 살피지않으면 음식의 수가 절로 많게 될 것입니다. 그릇 수를 정하는 것은 연방(延訪)이 끝난 뒤에 물러가서 의논하겠습니다.”
註20231]음문(音問):편지로 안부를 묻는 것 註20232]거(莒)에 있던 때:춘추(春秋)시대 제환공(齊桓公)이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에 국란(國亂)을 피해 거(莒) 땅으로 망명해 있을 때, 공자규(公子糾)의 음모에 의하여 그의 군사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화살을 맞는 등 죽을 곤욕을 겪었다.
○宣慰使羅世纉書狀云: ‘本月十九日朝, 令通事韓億年, 說與安心東堂等曰: ‘昨已許行, 至今不得相見, 以宿殿下之使命, 大失使臣之體。 君等亦人臣, 此何道理,’ 安心東堂等答曰: ‘反覆思之, 不可上京, 見之何益,’ 臣答曰: ‘君等去就, 俺所未知, 俺奉命而來, 則君等不得不見’, 再三開諭, 乃得相會, 歷陳委來之意, 則東堂等答曰: ‘前於仁同, 留置國王所送之銀, 心甚未安, 勉强上來, 只欲達國王書契, 宣慰使不意下來。 慮朝廷別作新法, 以迫我等, 今知下敎, 可謝。 但吾等艱關勞苦之極, 適與舊宣慰使, 累日從來, 以至情厚, 一朝由我輩, 不意見遞離去, 此懷焉有窮已,’ 臣答曰: ‘此固人情之所不能無, 宣慰使不遵終古通行事目, 致使君等受苦。 此乃自作之誤, 萬無關於君等, 何至如是屑屑乎,’ 安心東堂等答曰: ‘國王本意, 則非徒進獻寶物而已, 有無相通, 是以齎來銀兩, 宣慰使不留浦所, 至於見遞, 此行之無益可知。 不如返吾國也。’ 臣答曰: ‘君子之交, 貴在信義, 不在於物。 況在前無齎銀之時。 在仁同輕卜, 則使落後正官等持來, 至爲便當。’ 安心東堂等答曰: ‘信義固不可不重, 但吾等之萬死遠來, 不但爲區區之音問。 況舍國王所送之銀, 貿一己之私物, 此身終難保於本國。 私駄決不可率歸, 當與同行, 更議處之,’ 各分下處。 有頃, 安心東堂等, 遣都船主橘盛廣, 言于臣曰: ‘吾行決不可往。 所齎書契及進獻等物, 願付宣慰使, 吾等卽欲發還。’ 臣答曰: ‘俺以奉命之臣, 不可擅受。 假使當受, 君等返國, 何以達國王也,’ 橘盛廣答曰: ‘吾等進退, 如此狼狽, 罔知奈何。 銀之爲寶, 如此極貴, 以有易無, 亦有古例。 銀之貿不貿, 請知之, 然後決其往否。’ 臣答曰: ‘凡物本無貴賤, 而只由於國俗之所尙。 我國本不好寶玩之物, 則此物適歸於無用。 俺但知接伴上來, 朝廷處分, 俺所未知。’ 橘盛廣答曰: ‘大國實以銀兩, 爲無用, 則大小殿使送及常倭等, 退計二三年間, 多齎銀兩物貨而貿去, 此非不好寶也。 凡此事, 國王細知之, 委送而來, 何寶其常倭之寶, 而不寶我國之寶也,’ 臣答曰: ‘此言何自而出, 傳之者妄也。 我國實寶銀兩, 常倭之銀, 與君等之銀, 何擇焉, 此萬萬無理。 歸告上官, 斯速發行,’ 猶且不決, 如是再三, 至於申時, 乃言曰: ‘書契不可不達, 故可勉上京, 但欲倍道, 今欲卽出。’ 臣答曰: ‘令日已暮, 〔前〕路甚險, 待明早發無妨,’ 不聽, 當日發行, 止宿聞慶。 仁同留置私駄, 及正官人等率來事, 終不聽從。” 傳于大臣等曰: “今觀羅世纉書狀, 客使雖曰上來, 我國接待, 似爲埋沒。 昨日禮曹判書以爲, 自祖宗朝每, 爲厚待, 今不可薄待。 薄待故如是發怒, 上來後聽其所言, 各別厚待云。 以時事見之, 年年旱荒, 災變不絶。 對馬島主書契, 多有不遜之語, 今又客使發怒, 至爲憂慮。 今大臣適來, 故敢言予意, 往復之間, 恐有遺漏, 予當面對。” 上御思政殿, 領議政尹殷輔、左議政洪彦弼、右議政尹仁鏡、禮曹判書金安國、左參贊權橃、兵曹判書李芑等入侍。 上曰: “近見旱氣, 日漸焦枯。 前年大歉, 今又如是。 今朔若不雨, 則頓無西成之望。 祈禱雖云末節, 當無所不爲, 故欲倣古事而爲之, 議以爲勢難, 故不得行也。 然此非小災, 至爲可慮也。 客使事, 宣慰使處置失宜, 故遞之, 然上來後遞之則似當, 而議論不一, 以爲罷職之官, 不可行公, 故以他官往代其任, 而至於客使發怒, 朝廷當熟議而處之可也。” 殷輔曰: “旱災迫切, 年年失農, 祈禱當無所不爲, 自上軫念, 至考古事, 欲暴露三日。 雨雖可必, 聖體決不可露坐也。 況不可必乎, 若三祈雨後, 猶且不雨, 會百官庭立祈禱, 尙可爲也。 客使之來, 專爲銀兩, 而聞中路留置其銀, 失望曰: ‘國王之物, 猶且不貿, 況私物乎,’ 乃留置其徒十五人於仁同, 都船主, 當細聞貿不貿, 然後決去留云。 其意以爲, 國家豈可置諸中路而還送乎, 上來後, 各別慰諭爲當。” 安國曰: “露坐祈禱, 自古所無。 以一國臣民之主, 豈可行如此之事乎, 如側身修行, 求言理獄等事, 前亦書啓。 三祈雨後, 猶且不雨, 謹修此等之事何如,” 橃曰: “今玆之旱, 年年如此, 至爲可慮。 水旱之災, 雖曰堯、湯所未免, 堯時之水, 天地初闢, 水道不通而然也, 猶曰 ‘洚水儆予。’ 湯時之旱, 無有愆尤, 猶以六責自省, 而竟回天意。 方今亦當以六責之事, 留念省察也。 君心所向, 天必知之。 天雖邈然, 其鑑孔昭, 此古人之格言也。 不可徒以祈禱而期雨也, 以六責之事, 反顧省念, 何事爲吾政治之失乎, 則其間豈無起病之源乎, 近來政事大數, 臨民之官, 若非其人則遞之, 京官亦不計莅任之間, 而頻數相遷, 可謂政不節也。 且生齒蕃盛, 莫如今時, 而盡賣田宅, 流移糊口, 靡有定居。 若定軍役, 則旋卽逃避, 流亡殆盡, 可謂民失職也。 中國之人, 雖婦女, 皆知文字識事理, 吾東方, 則婦人之解文者少, 豈能識事理乎, 宮中干謁之言, 流聞於外。 閭巷傳聞, 未可盡信, 然如此之事, 不幾女謁之盛乎, 且王子第宅, 崇高過制, 無有紀極, 而不能安居, 遷徙小屋, 前後皆然, 不幾於宮室之崇乎, 苞苴之行, 昨日林亨秀, 亦啓其善事左右之弊。 往時權臣之在朝, 至於已甚, 不足道也。 今雖不如往時之甚, 然相遺干謁, 足貽民弊者, 豈少哉, 讒夫之昌, 今時未可知也, 然士大夫之間, 口舌甚多, 人心不定, 則今此六事, 似合當今之弊。 以如此之事, 警省自責, 翻然改悟, 則天必知之, 而回其意矣。 若不知此, 而徒區區於外貌之末, 則不合於天意所在, 豈可以祈禱而回天乎, 自上每每憂慮, 乾乾惕若, 則祈禱之實, 莫過於此。 若能修德, 則猶足以祈天永命。 所謂祈天者, 非所謂私自祈禱也, 克修厥德, 終亨天心, 和上下以永國脈矣。” 上曰: “克修人事, 是本務也, 然祈禱亦不可廢也。 當無所不爲, 故欲依例爲之。 仁同留在之倭, 客使上來後, 問其意而處之耳。” 李芑曰。 “邇來旱災連年, 國儲告匱, 民之飢餓, 勢將坐視而難救。 自上憂勤, 延訪大臣, 咨諏善道, 天必知之而下雨。 大抵祈雨者, 民間弊瘼, 政事之失, 靡不講求而盡革之。 不然則終無下雨之期。 盡人事之失, 而猶且不雨, 則可以祈禱。 終雖不雨, 上體豈可親自露坐乎, 露坐而必得其雨, 則古之聖帝明王, 不求之人事, 而常先爲此矣。 臣生長窮閻, 猶爲中暑, 況聖體乎, 今玆之旱, 如臣之不肖者, 側於政事之間, 以致如此之咎矣。 客使爲銀而來, 國家若不許貿, 則雖百言, 不能解其怒也。 今若解其怒, 必當聽其請。 當今之策, 只此二條, 然朝廷定議不貿, 其怒似不可計。 此外無各別之事。” 安國曰: “隣國之使, 豈可置諸中路而徑還乎, 在仁同之倭, 不得已率來, 然後合於待隣使之道矣。 其所齎來他商物, 亦皆盡數上來然後可也。” 上曰: “聞中路發怒, 今若從其請, 則有似畏㤼, 不然, 商物不可强令輸來。 入來後, 當更審其意而爲之。 但公物猶不許貿, 私物何敢齎來,” 權橃曰: “昔者叔牙, 言齊桓公曰: ‘願君無忘在莒。’ 人不忘艱難之時, 然後其心不肆也。 自上已經廢朝。 廢朝之時, 艱危巳極, 自上豈可頃刻忘于懷乎, 當是之時, 民生嗷嗷。 亂極思治, 至於推戴, 一國臣民, 罔不喜躍, 皆望太平之治。 卽位以來, 孜孜圖治, 別無過擧, 而民不聊生, 國用窮乏, 災變疊臻, 至爲恐懼。 自上深思昔日之艱難, 不忘初心, 躬率儉約, 大臣亦且承宣無愆, 則奢侈之習, 自然丕變而不足治也。” 上曰: “外方飮食, 不定器數, 故雖下諭, 不從國令。 定其 數而糾察, 則可以變矣。” 彦弼曰: “監司若剛明者, 則初入道內, 以飮食毋過三器, 書於先文而送之。監司若不察,則飮食之數,自至煩夥也。定器數之事,則延訪後,當退而議之。”
명종 9권, 4년(1549 기유/명가정(嘉靖)28년) 2월 3일(계묘) 1번째기사
조강에서 남응룡이 임금의 도에 대해서 아뢰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시강관(侍講官) 남응룡(南應龍)이 임문(臨文)하여 아뢰었다.
“대저 원수(元首)878)가 밝으면 고굉(股肱)879)이 어질어서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도와 정치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임금이 현명해야만 신하가 어질고 모든 일이 잘 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제(齊)환공(桓公)은 관중(管仲)을 얻고서 일광지공(一匡之功)880)을 이루었고, 당(唐)태종(太宗)은 위징(魏徵)을 얻어서 정관지치(貞觀之治)881)를 이루었습니다. 비록 당우(唐虞) 시대의 군신(君臣)과 견줄 수야 없겠지만 서로 도와 다스린 도를 대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천하에 현인(賢人)이 없는 것이 아니니 오직 임금이 밝게살펴 기용하는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임금이 신하를 통솔하여 일을 일으키되 법도를 삼가서 한다’는 말은 임금이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할 곳입니다.
무릇 일 만들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법을 분분하게 고치기가 쉬우므로 성헌(成憲)을 변경하지 않는 경우가 드뭅니다.
송(宋)나라때 왕안석(王安石)이 경솔하게 조종(祖宗)의 법도를 고치고 다시 신법(新法)을 만들었다가 정강(靖康)의 화(禍)882)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명백한 증거입니다.
대저 임금이 어진이를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힘쓴 뒤에 편하게 되는 것이 바로 편안한 것이요, 임금이 신하의 직분을 행한다면 이는 잗단 간섭에 가까워 모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임금으로서 매우 조심할 일입니다.
순임금은 의상(衣裳)만을 드리우고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어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는데, 진시황(秦始皇)은 결재하는 서류가 매일 산더미 같았고, 수문제(隋文帝)는 정사(政事)에 바빠서 호위하는 군사가 밥을 날라다 주어야 겨우 먹었어도 공연히 수고롭기만 하였을 뿐 아무런 이익이 없었습니다.
임금은 마땅히 삼공(三公)을 시켜 도를 논하게 하고 육경(六卿)에게 직분을 나누어 준 뒤 권강(權綱)을 총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진이를 구하는데는 수고롭고 사람에게 직분을 맡긴 뒤에는 편안하다’고 한 것입니다. 적격자를 얻어 각각 마땅한 직을 맡긴다면 천하사람들이 모두 임금의 신하되기를 생각하고 따라서 쓰여지기를 즐거워할 것입니다. 어진이를 구하는 방도에는 선비를 기르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데, 선비를 기르는 요점은 마땅히 마음을 바로잡고 배움을 좋아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 것입니다.”
註878]원수(元首):임금을 가리킴 註879]고굉(股肱):신하를 가리킴.註880]일광지공(一匡之功):제환공이 관중의 도움을 받아 패제후(覇諸侯)한 다음, 주실(周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내치는 의리를 바로잡은 것을 가리킨다.《논어(論語)》헌문(憲問).註881]정관지치(貞觀之治):정관은 당태종의 연호인데, 방현령(房玄齡)·위징등 명신을 기용하여 국정을 쇄신, 선정을 베풀었던 때를 말한다. 후세에 선정의 표본으로 일컬어진다.註882]정강(靖康)의 화(禍):정강은 송흠종(宋欽宗)의 연호. 금태종(金太宗)이 송의 변경(汴京)을 쳐서 휘종(徽宗)·흠종을 비롯하여 많은 정신(廷臣)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을 가리킴
○癸卯/上御朝講。 侍講官南應龍臨文啓曰: “夫 ‘元首明, 股肱良, 庶事康’ 者, 此君臣相須爲治之道也。 然必君明然後臣良, 而庶事康矣。 是以齊桓公得管仲, 而成一匡之功; 唐太宗得魏徵, 而致貞觀之治。 雖不可擬之於唐、虞之君臣, 然其相須爲治之道, 蓋可想見。 天下未嘗無賢人, 惟在人君明而察之, 擧而用之耳。 至於率作興事愼乃憲之言, 爲君所當體念處。 凡樂於興事者, 易至紛更, 能不變改成憲者鮮矣。 在宋之世, 王安石輕變祖宗之法, 更爲新法, 以致靖康之禍, 此其明驗也。 大抵人君, 孜孜求賢, 以勤居逸, 則乃逸也。 若下行臣職, 則近於叢脞, 而庶事隳矣, 此人君之大戒也。 如舜則垂衣裳而天下治, 秦皇之衡石程書。 隋帝之衛士傳餐, 徒勞而無益。 人君當使三公論道, 六卿分職, 摠攬權綱而已。 故曰: ‘勞於求賢, 逸於任人。’ 如得其人而各授其職, 則光天之下, 共惟帝臣, 而樂爲之用矣。 然求賢之方, 莫急於養士, 而養士之要, 當以正心好學, 爲先。”
명종 32권, 21년(1566 병인/명가정(嘉靖)45년) 4월 11일(임신) 3번째기사
정원이 내수사의 인신에 대해서 아뢰다
정원이 아뢰기를,
“상께서는 학문이 고명하여 치란을 꿰뚫어 아시며 그 사정과 시비의 분별에 있어서는 군하(群下)의 논열(論列)을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요즈음에 와서 법령을 개정하며 강기(綱紀)를 정돈하고 진작시키시니, 중앙과 지방에서 다스려지기를 희망하는 것이 주리고 목마른 자가 음식을 바라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었으며, 지난번에 새로 세운 과조(科條)를 기록하여 아뢰라는 명령이 한번 내리자 온 나라의 인심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모두들 좋지 못한 정사와 결함이 있는 전교는 앞으로 모두 씻어버리고 청명(淸明)한 정치로 조금도 결점이 없기를 발돋움하고 바라면서 기다린 지 오래였습니다.
양종 선과와 내수사(內需司) 인신(印信)은 실로 정치를 방해하는 것의 큰 것입니다. 수십 년을 내려오면서 국가의 명맥이 상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어렵게 된 것은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았으므로, 공경 대신이 그것을 산정할 때에 온 나라의 공론(公論)을 가지고 조야의 남은 분노를 따라 삭제해 버린 부류에 다 두었으니, 장구한 생각과 원대한 근심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상께서는 아직도 치우친 생각을 두시어 특별히 부표(付標)하게 하려고 하시니 그 치체(治體)에 방해되고 오도(吾道)에 해로와서 성덕(聖德)에 누(累)가 됨이 심합니다. 국가의 정신과 명맥이 이 한 가지의 거사에 달려 있기에 신들이 근시(近侍)의 직에 있으면서 잠자코 있을 수 없어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양종 선과를 혁파할 수 없다는 뜻을 어제 공경에게 답하였고 오늘 양사에 답할 때에 모두 말하였다. 그리고 내수사 인신에 대한 일은 어제 공경에게 답할 때 또한 말하였다. 공경이 하는 바가 과연 정당한지 나는 모르겠다.
정원이 근년에 와서 경솔하게 아뢰기를 좋아하여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키는데, 어찌하여 그 풍속이 순박하지 않음이 이와 같은가, 아뢴 뜻은 알았다”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옛날의 제왕이 말로써 아랫사람을 인도하되 군신(群臣)에게 구(求)할 뿐만 아니라 방목(謗木)을 세우고 간고(諫鼓)를 설치하여2991) 말할 자를 오게 하였기 때문에 집예착륜(執藝斲輪)의 설2992)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간(諫)하는 관직이 따로 없었다. 후세에 와서 간관을 설치한 것은 역시 덕이 쇠한 세상의 일이었다. 정원(政院)은 후설(喉舌)의 역할을 하면서 진실되게 출납하는 것이 바로 그 책임이니, 사실 언관과 다름이 없는데, 어찌 근시하는 신하가 아뢴 말을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풍속을 순박하지않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정원의 관원이 된 자로서는 의당 그것이 직분의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거듭 아뢰어야 하는데도 한번 꺾인 뒤로는 말 한마디 못하고, 대간도 역시 바로 지적하는 한마디 말로 세상을 광구(匡救)함이 없으니, 그렇다면 온 세상이 모두 입을 봉하고 잠자코 있어야만 순후(淳厚)한 풍속이 될 수 있겠는가, 인군의 한 마디 실언(失言)은 그 화(禍)가 중한 것이다.
註2991]방목(謗木)을 세우고 간고(諫鼓)를 설치하여: 방목은 비방목(誹謗木)을 말하는 것으로 순(舜)임금이 조정에 비방목을 세워 누구든 임금의 잘못을 그 나무에 기록하도록 하였다는데서 온 말이고, 간고(諫鼓)는 감간고(敢諫鼓)로 요(堯)임금이 직간(直諫)을 듣고자 하여 궐문 앞에 북을 달아매고 누구든 간할 일이 있으면 그 북을 치도록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후한서(後漢書)》양진열전(楊震列傳).註2992]집예착륜(執藝斲輪)의설:윤공(輪工)이 수레바퀴를 깎는데 대한 설. 그 일에 노련하려면 풍부한 경험을 쌓아야 하고, 보거나 듣고서 배울 수 없다는 뜻. 제환공(齊桓公)이 당상(堂上)에서 글을 읽고 있는데, 윤공 편(扁)이 “임금께서 읽는 글은 옛사람의 지게미입니다”하고, 자기의 경험을 미루어 “노련한 기술은 풍부한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보고서 배우거나 말로써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이 읽은 글은 옛사람의 지게미일 뿐입니다”고 하였다.《장자(莊子)》천도(天道).
○政院啓曰: “自上學問高明, 洞貫治亂, 其於是非邪正之分, 不待群下之論列。 況近日以來, 改絃易轍, 頓綱振紀, 中外望治, 不啻飢渴。 頃新立科條抄啓之命一下, 擧國人心, 莫不欣悅。 皆以爲稗政疪敎, 將盡滌去, 使淸明之治, 無少瑕累, 翹足以待者有日矣。 兩宗禪科、內需印信, 實妨政害治之大者也。 數十年來, 國脈夷傷, 民生窮蹙者, 皆由於此。 公卿大臣刪定之時, 持一國之公論, 循朝野之餘憤, 置諸削去之類, 其長慮遠憂, 可謂至矣。 而自上尙留偏係, 特欲付標, 其妨治體, 害吾道, 有累於聖德者甚矣。 國家精神命脈, 在此一擧。 臣等職忝近侍, 不敢容默, 敢啓。” 傳曰: “兩宗禪科, 不可革罷之意, 昨日答公卿, 今日答兩司時盡言, 而內需印信事, 昨於答公卿時, 亦言之矣。 公卿所爲, 予未知果當也。政院近年以來,好尙輕啓,動搖君心,何其風俗之不淳若此耶,啓意知道。”
【史臣曰: “古昔帝王, 導下以言, 不惟求之於群臣, 乃至立木置鼓以來之。 故有執藝斲輪之說, 是以諫無官, 後世設之, 亦衰世之事也。 政院居喉舌, 出納惟允, 乃其責也。 實與言官無異, 安有以近侍之戒, 爲動搖君心, 而風俗不淳者哉, 爲政院者, 亦當申奏以職分之當然, 而一折之後, 容默無言, 臺諫亦無一語之直斥, 而匡救, 則擧一世而緘默, 然後方爲淳厚之風乎, 人君一言之失, 其禍重哉!”】
선조 8권, 7년(1574 갑술/명만력(萬曆)2년) 4월 23일(정묘) 1번째기사
경연에서 유희춘이 진강하고, 김안국의 자손을 서용할 것을 아뢰다
경연이 있었다. 유희춘이 열명 중편에 ‘치란(治亂)은 오직 여러 관원에게 달렸으니, 벼슬은 사사로운 친근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오직 유능한 사람에게 주며, 작위는 악덕한 사람에게 주지말고 오직 현철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한 대문을 진강하고 아뢰기를,
“벼슬은 직사(職事)에 배치된 것을 말한 것이고 작위는 위계(位階)의 고하(高下)를 말한 것입니다. 맹자가 ‘현자(賢者)가 지위에 있고 유능한 사람이 직책을 맡아야 한다’한 것을, 주자(朱子)가 해석하기를 ‘현자란 덕이 있는 사람이니 지위에 있게하면 임금을 바로잡아 풍속이 착해지게 할 수 있고, 유능한 사람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 직책을 맡게 하면 행정을 닦아가고 일을 이룰 수 있다’한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임금이 벼슬을 사사로운 친근한 사람에게 주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오직 참소하는 사람을 제거하고 여색(女色)을 멀리하며 재물을 천시하고 덕을 귀중히 여길 수 있다면 자연히 현자를 임용(任用)하게 되고 유능한 사람을 부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하고,
또 ‘착한 것인지 생각해보아 행동하고 행동은 오직 때에 맞게 해야 한다’한 대문을 풀이하고 아뢰기를,
“착함이란 구갈(裘葛)이 정밀하게 만들어진 것과 같은 것이고, 때란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움과 같은 것입니다. 구갈이 비록 정밀하게 만들어졌다하더라도 진실로 때에 맞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어디에 합당하겠습니까?”하고,
또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착한 일을 잃어버리게 되고, 능한 것을 자랑하면 공을 잃게 된다’한 대문을 해설하고 아뢰기를,
“요순(堯舜)은 대성인이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놓아두고 남의 의견을 따랐으며 남들의 의견을 취해서 선(善)을 하는 것을 즐겁게 여겼고, 대우(大禹)는 자만(自滿)하지않아 뽐내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았으며, 공자는 ‘달변은 사(賜)502)만 못하고 용맹은 유(由)503)만 못하다’하였고, 안자(顔子)는 능하면서도 능하지못한 사람에게 묻고 아는 것이 많으면서도 아는 것이 적은 사람에게 물었으며, 주자(朱子)는 의리가 정밀하고 인(仁)에 익숙하면서도 항상 의리는 한이 없는데 세월은 한이 있다고 여겨 늘 겸연(慊然)히 부족해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대개 날로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기를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이만이 진실로 이처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성현들은 깊이 의리가 한이 없음을 알았고 마음의 도량이 넓고 크기 때문에 자연히 선을 자랑하거나 공을 뽐내는 일이 적었습니다.
세상의 용렬하고 망령된 사람들은 하나라도 조그만한 선이나 소소한 재주가 있으면 곧장 자기를 만족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 자기 만족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성인인 체합니다.
옛적에 제환공(齊桓公)이 한번 자기의 공을 자랑하자 배반한 나라가 아홉이었고 조조(曹操)도 잠시 스스로 교만하고 뽐내는 짓을 하다가 천하가 삼분(三分)되었었는데, 선유(先儒)들이 이를 비난했었습니다.
대개 조조가 원소(袁紹)를 이긴 다음에 유종(劉琮)을 항복받고 유비(劉備)가 도망가게 하고서는 그만 교만한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유장(劉璋)이 촉(蜀)에 있으면서 모사(謀士) 장송(張松)을 보내어 조조에게 화친을 청하게 했는데, 조조가 형주(荊州)에 있으면서 장송이 단소(短小)하고 정채(精彩)가 없으므로 경홀히 대하고 받아들이지않자 장송이 돌아와 유장에게 말하니 곧 외교가 끊어지고 통하지 못했습니다.
임금은 진실로 도량을 넓게가져 자기만족을 하지않아야 하는 법이니, 이른바 ‘네가 오직 뽐내지않으면 천하에 너와 더불어 능력을 겨룰 자가 없을 것이다’한 것이 곧 이것입니다.
임금이 자신의 능함을 뽐내면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 물러가 불가하게 여기는 법이니, 이는 마치 그릇안에 물이 담겨 있으면 자연히 다른 물이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하였다.
또 ‘총애를 베풀어 모욕받지 말라’한 대문을 설명하기를,
“이 대문에 이른바 총애를 베푼다는 것은 바로 궁첩(宮妾)·환관(宦官)과 말을 교묘하게 하고 안색만 좋게하며 아양떨며 아첨하는 신하를 대하는 것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한문제(漢文帝)가 꿈때문에 등통(鄧通)을 총애하자 등통이 전상(殿上)에서 희만(戲慢)했었으니 이 또한 총애를 베풀어 모욕을 받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문제는 단지 상을 내리기만 하고 직사(職事)는 맡기지 않았습니다. 또 신도가(申屠嘉)에게 격소(檄召)504)를 허락했다가 곤욕이 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역대의 혼매한 임금이 총애를 베풀다가 모욕을 받은 일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고찰하건대 총행(寵幸)과 총권(寵眷)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만일 임금이 복심(腹心) 대신이나 글을 강론하는 유신(儒臣)들을 친근히 여기고 정성스럽게 대하기를, 원위효문(元魏孝文)이 현명한 사람을 좋아하고 선(善)을 반갑게 여기기를 마치 시장하고 목마른 듯이 했던 것과 같이 하며 명효종(明孝宗)이 대신을 공경하여 예우하고 강관(講官)을 친근히 대하고 후대했듯이 한다면, 이는 곧 임금의 아름다운 덕인데 어찌 모욕 받는 일이 있겠습니까?
‘과오를 부끄럽게 여겨 그른 일을 저지른다’는 말은, 대개 부끄러움 때문에 과오를 숨기며 문식(文飾)하여 커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오라는 것은 무심히 사리를 잃는 것이고 악이라는 것은 마음먹고 사리를 어기는 것입니다. 대개 군신(君臣) 상하가 이런 병폐가 있지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신하들이 이미 계달(啓達)하자 경계하여 신칙하는 글을 내리셨습니다마는, 성상께서도 또한 마땅히 살피고 생각하시어 착한 말을 따르기를 구슬이 굴러가듯 하고 허물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으셔야 합니다”하고,
‘작위를 악덕한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한 대문의 주에 ‘악덕한 사람은 비록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작위를 줄 수 없다’한 대문을 추기(追記)하고서 이어 설명하기를,
“진(秦)나라의 이사(李斯), 한(漢)나라의 조조, 당(唐)나라의 이임보(李林甫)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심술이 사특하고 악했기 때문에 드디어 몰락한 것입니다.
오기(吳起)가 위(魏)나라 정승 전문(田文)과 공을 논할 적에 전문이 ‘내가 공은 모두 오기의 아래이지만 임금은 어리고 국가는 의구(疑懼)스러워 백성이 화합하지 않고 대신들이 따라붙지 않으니, 이런 때에 자네에게 맡기겠는가 아니면 나에게 맡기겠는가?’하니,
오기가 역시 스스로 알아차리고서 사퇴했었습니다.
대개 재주만 있고 덕이 없는 사람은 백집사(百執事)나 변장(邊將)의 자리에 두고서 윗자리에 있는 현철한 사람이 그의 병통을 짐작하여 제어해 간다면 또한 쓸 만하게 될 수 있지만, 만일 높은 벼슬을 맡기어 큰 권한을 부여하면 난을 만들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대개 소인은 재주를 믿고 착하지 못한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상서(尙書)》안의 우서(虞書)에 ‘정일(精一)’이란 교훈이나 이윤(伊尹)·중훼(仲虺)가 임금에게 고한 말들이 정밀하고 지극하지않은 것이 없지만 열명(說命) 3편에 있어서는 부열(傅說)의 학문과 덕정(德政)이 더욱 자세하고 극진하니, 상께서 진실로 마음을 씻고 정신을 들이신다면 곧 부열이 좌우에 있으며 교훈을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하였다.
진강이 끝나고 유희춘이 아뢰기를,
“전일에 수찬(修撰) 김우옹(金宇顒)이 육잠(六箴)을 지어올리자, 성상께서 깊이 칭찬하고 감탄하시며 또한 옥당(玉堂)에 내려 보도록 하시므로 무릇 신료(臣僚)들치고 감격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개 김우옹은 학문이 있고 또 문장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라면 비록 견식(見識)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잠을 그처럼 짓지 못할 것입니다. 당초에 성상께서 특별히 김우옹에게 잠을 짓도록 명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신하를 알아봄이 임금만한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모름지기 십분(十分) 체념(體念)해 보신 다음에야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의 시호를 오래 짓지못하고 있는 것은, 옥당의 동벽(東壁)인 직제학(直提學)·전한(典翰)·응교(應敎)·부응교중에서 2인이 가서 참예해야 하는데 동벽의 2원(員)을 전년부터 항시 채우지못해서 걱정이었고 더러는 오래되지 않아서 체직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변통한다면 교리(校理) 1원이 가서 동벽의 인원수를 채우더라도 어찌 방해롭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호 의논은 단지 공론이 어떤지를 취택하는 것이다.
동벽(東壁)과 서벽(西壁)에 구애될 게 뭐 있는가?”하였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중종조의 명신 김안국(金安國)은 박학(博學)하고 계고(稽古)하였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선을 좋아하며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여 정신과 힘을 쏟았었습니다. 일찍이 정덕(正德) 무인년505)에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주자대전(朱子大全)》과《주자어류(朱子語類)》·《이락연원(伊洛淵源)》등 성리(性理)에 관한 모든 서적을 사들이고서 인하여 시를 짓기를,
‘광풍 제월 그득히 실었으니
동으로 가면 마음에 묵계할 이 있으리‘라고 하였었습니다.
돌아와서 인출(印出)하기를 계청했었는데 미처 시행하지 못한 채 기묘년에 사림들이 몰락하였고 김안국도 19년 동안 폐기되었습니다.
정유년506) 겨울에 다시 서용되어 조정으로 돌아와 교서제조(校書提調)가 되자 드디어 인출하여 유포(流布)했습니다.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가 되어서는 이습관(肄習官)507)들에 대한 권면과 감독을 지극히 근실하게 하였고, 주문(主文)508)이 되어서는 사대(事大)에 관한 표문(表文)을 지제교(知製敎)에게 맡기지 않고 반드시 자신이 지었으며 혹시 한 마디라도 미안스러운 것이 있으면 밤에도 자지않고 반드시 합당한 말을 찾아냈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표문의 글이 성실하고 간절하게 되었음을 칭찬하고 감탄했었습니다. 김안국은, 문장은 김종직(金宗直)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만일 그가 나랏일을 근심하여 직책을 다한 것을 논한다면 김종직보다 휠씬 낫습니다.
신이 이탁(李鐸)과 함께 봉상시제조(奉常寺提調)가 되었기에 올봄에 만나보러 갔었다가 말이 김안국의 일에 미쳤었는데, 이탁의 말이 ‘듣건대 김안국의 자손에 백집사(百執事)에 가당한 사람이 있으므로 이조(吏曹)가 초입사(初入仕)509)에 의망(擬望)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들이 직접 주상께 계달(啓達)하여, 포장(褒奬)하여 임용하는 일이 성상에게서 나와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임용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비록 심상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한 버려둘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사람의 손자이겠는가?”하였다.
영상 홍섬이 이른 아침에 경연청에서 책을 교정하고 있었을 때 유희춘이 김안국을 찬양했다는 말을 듣고서, 이에 이르러 또한 진언하기를,
“유희춘이 아뢴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김안국은 나랏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승문원제조가 되었을 적에 이습관들을 부지런히 권면하다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논박을 당하기까지 했었는데도 바야흐로 중국 사신의 관반(館伴)이 되었을 때 인피(引避)하지 않고 주저없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대개 나랏일을 중히 여기고 그 나머지는 헤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사대(事大)와 교린(交隣)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니 어디에 이처럼 충성스럽고 성실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타의 도덕과 의리에 있어서는 알지못합니다마는 임금을 위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짝이 될 만한 사람이 드뭅니다. 임인년510) 8월에 능을 봉심하는 일로 몸소 답사하여 두루 도느라 험악한 길도 피하지 않다가 목이 마르게 되므로 물을 마셨었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병이 나 죽었습니다.
신이 감히 어느 일을 시행한 것을 아뢰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김안국의 사실을 진달하려는 것뿐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명종조(明宗朝) 때에 누군가가, 김안국이 일본 사람들을 지나치게 대우하여 그들이 교만해지게 했다기에, 신이 어전에서 되풀이하여 진달했었습니다.
대개 김안국은 단지 국가를 위해 교린하는 도리를 다한 것이고 이 때문에 교만해지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하였다.
제신(諸臣)들이 아뢴 말중에는, 김응남(金應南)이, 고려왕들의 여러 능에 잡초가 우거져 파묻히고 나무하거나 방목한다고 하다가 드디어 아뢰기를,
“노산군(魯山君)의 묘가 영월(寧越)에 있는데 거칠고 우거져 돌보지않은 채로 있습니다. 중종(中宗)께서 즉위하신 지 12년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수호군(守護軍)을 두었습니다.
이번에도 또한 거듭 밝혀 수호하게 하소서”하였다.
이미 끝나고 나서 빈청(賓廳)으로 물러나와 선반(宣飯)을 먹었다.
註502]사(賜):자공(子貢)의 이름. 註503]유(由):자로(子路)의 이름 註504]격소(檄召):글을 보내 부름.註505]무인년:1518 중종13년. 註506]정유년:1537 중종32년. 註507]이습관(肄習官):연수하는 관원. 곧 정식관원으로 임명되지 않고 일을 익히는 임시 벼슬아치.註508]주문(主文):대제학을 뜻함 註509]초입사(初入仕):처음으로 하는 벼슬 註510]임인년:1542 중종 37년.
○丁卯/經筵希春講《說命》中, “惟治亂在庶官, 官不及私昵, 惟其能, 爵罔及惡德, 惟其賢。” 曰: “官, 以布列職事爲, 言; 爵以位秩高下爲言。 孟子曰: ‘賢者在位, 能者在職。’ 朱子釋之曰: ‘賢有德者, 使之在位, 則足以正君而善俗; 能有才者, 使之在職, 則足以修政而立事。’ 正此意也。 人君所以官不及私昵者, 惟能去讒遠色, 賤貨而貴德, 則自能任賢而使能矣。” 又釋慮善人, 動惟厥時曰: “善猶裘葛之精者, 時猶冬寒夏熱, 裘葛雖精, 苟非時中, 亦何所當乎,” 又說: “有其善, 喪厥善, 矜其能, 喪厥功。” 曰: “堯舜以上聖, 猶舍己從人, 樂取於人, 以爲善; 大禹不自滿暇, 不矜不伐; 孔子自謂達不如賜, 勇不如由; 顔子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朱子義精仁熟, 常以爲義理無窮, 歲月有限, 常慊然有不足之意。 蓋日新又新, 不能自已者, 固如是也。 蓋聖賢深見義理之無窮, 而心量又廣大, 故自無伐善矜功之少矣。 世之庸妄之人, 一有少善小技, 輒懷自足之心, 由自足, 而爲自聖, 昔齊桓一矜其功, 叛者九國; 曹操暫自驕伐, 天下三分, 先儒譏之。 蓋曹操降劉琮走劉備於克袁紹之後, 驕心便生, 劉璋在蜀, 遣謀士張松, 通款於操, 在荊州, 以松短小無精釋, 忽而不錄, 松歸言於璋, 便絶不通。 人君誠廓其度量, 不自滿足, 所謂汝惟不矜, 天下莫與汝爭能者也。 人君自矜其能, 天下士子, 皆退而不可。 此猶器中有水, 自然他水不能入矣。” 又說無啓寵納侮: “此所謂啓寵, 正(措)〔指〕侍宮妾宦官與巧言侫色、便儇諂諛之臣也。 漢文帝以夢而寵鄧通, 通也戲慢殿上。 此亦啓寵而納侮, 然文帝但爲賞賜, 而不任以事。 又許申屠嘉檄召, 而困辱至此, 歷代昏主, 以寵倖而納侮, 不可勝數。 又按, 寵倖與寵眷有異。 若人主於腹心大臣, 講論儒臣, 親近款曲, 如元魏孝文好賢樂善, 情如飢渴; 大明孝宗敬禮大臣, 親厚講官。 是乃人主之美德, 何納侮之有, 恥過作非者, 蓋因恥伏其過文开, 以至於大過者, 無心失理, 惡者有心悖理。 此蓋君臣上下, 莫不有此病。 臣下頃已啓達, 而戒飭下書矣。 自上亦當省念, 從善如轉環, 改過不吝, 追記爵罔及惡德註, 凶德之人, 雖有過人之才, 爵亦不可及。” 因說曰: “秦之李斯, 漢之曹操, 唐之李林甫, 非無過人之才, 心術邪惡, 遂至於覆。 吳起與魏相田文論功, 田文自謂功皆在起下, 而主少國疑, 百姓不親, 大言未附, 方是之時, 屬之子乎, 屬之我乎, 吳起亦自知而辭避。 蓋有才無德之小人, 可以置之於百執事及邊將, 而在其上之賢者, 知其病而駕馭之, 則亦有可用之理。 若任以高官, 授之大柄, 未有不生亂者。 蓋小人挾才, 以爲不善故也。” 又曰: “《尙書》中, 如《虞書》精一之訓, 伊尹仲虺告君之言, 非不精至。 至於《傅說》三篇, 說學問德政, 尤爲詳盡。 自上苟能洗心留神, 則卽是《傅說》在左右納誨矣。” 講畢, 希春曰: “頃日修撰金宇顒, 製進六箴, 上深加奬歎, 又下示玉堂。 凡在臣僚, 孰不感激, 蓋宇顒有學問, 又有文章。 若他人, 則雖有見識, 亦不能作箴如是也。 當初上特命宇顒作箴, 此正知臣莫如君也。 然自上須十分體念, 然後乃爲有益。” 又曰: “金宏弼、鄭汝昌之諡, 久未能成者, 以玉堂東壁, 直提學、典翰、應敎、副應敎中二人往參, 而東壁二員, 頃年常患未充, 或不久而遞。 若變通, 則校理一員往充東壁之數, 何妨,” 上曰: “議諡, 但取其公論之如何耳。 東壁、西壁何足拘也,” 希春曰: “中廟朝名臣金安國, 博學稽古, 愛人好善, 盡心國事, 畢精竭力, 豈於正德戊寅, 以使赴京, 收買《朱子大全》、《語類》、《伊洛淵源》等《性理》諸書, 因作詩云: ‘滿載光風兼霽月, 東歸應有契心人。’ 旣來, 啓請印出, 未及施行, 而己卯士林敗。 安國廢棄十九年, 至丁酉冬, 敍復還朝, 逮爲校書提調, 遂印出流布。 其爲承文提調也, 勸督隷習官, 極爲勤悉; 其主文也, 於事大表文, 不委知製敎, 而必自製。 其或一詞未安, 至夜不寐, 必求其當, 故華人以表詞誠切稱嘆。 安國文章, 則不逮金宗直, 若論其愛國盡職, 則過宗直遠矣。 臣與李鐸, 同爲奉常提調, 今年春往見, 語及安國事, 鐸曰: ‘聞安國之孫, 有百執事可當之人, 吏曹擬于初入仕。 然此事, 吾等不若直啓天聽, 使褒奬錄用之事, 出於上。’ 乃爲美耳。” 上曰: “苟有可用之人, 雖尋常人, 亦不可棄, 況此人之孫乎,” 領相洪暹, 早朝在經筵廳校冊時, 聞希春追讃安國之言。 至是, 亦進言曰: “柳希春之言誠是。 安國盡忠國事, 爲承文院提調, 勤勸隷習官, 至爲人所憎, 被論駁, 而方爲華使館伴, 不爲引避, 直前行任。 蓋以國事爲重, 而不計其他也。 其於事大交隣之事, 莫不竭心, 安有如此忠誠乎, 其他德義, 未詳知也。 爲君之心, 罕有其雙。 壬寅八月, 安國以陵奉審, 躬踏遍歷, 不避險阻, 至於渴而飮水, 竟以此病死。 臣不敢以施行某事爲啓, 只陳安國事實而已。” 又曰: “在明廟朝, 人有議安國過待日本, 以致其驕, 臣反覆陳達於御前。 蓋安國只爲國盡交隣之道, 非以是而致驕也。” 諸臣說中, 金應南因歷見王高麗諸陵, 蕪沒樵牧, 遂言魯山君墓在寧越, 蕪穢不治。 中廟卽位之十二年, 遣承旨致祭, 置守護軍。 今亦請申明守護。 旣畢, 退食宣飯于賓廳。
선조 13권, 12년(1579 기묘/명만력(萬曆)7년) 3월 26일(신미) 1번째기사
조강에서 김우옹이 군신의 의리, 호강의 억제, 부역의 불균등을 논하다
조강이 있었다. ‘제(齊)나라 고자(高子)가 와서 회맹(會盟)하다’867)에서 ‘정(鄭)나라가 그 군사를 버리다’868)까지 강하였다. 신하의 의를 밝히고 봉사(奉使)의 마땅함을 얻은데 대하여 김우옹이 아뢰기를,
“임금의 의를 따르고 임금의 명(命)을 따르지않는 것이 바로 신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하였다.
위(衛)나라가 적인(狄人)에게 멸망869)하게된 원인에 대하여,
김우옹이 아뢰기를,
“위나라는 큰 나라이지만 음란하고 무례함 때문에 인륜의 기강이 상실되어 없어진 뒤에 적인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노(魯)나라도 그 당시 어지럽고 퇴폐된 것이 극도에 달했었지만 그래도 주례(周禮)를 지키고 있었기때문에 중손(中孫)은 멸망시킬 수 없음을 알았으니 예절이 나라에 관계됨이 큽니다. 이 때 경보(慶父)가 병권(兵權)을 주관하고 있었고 부인(夫人)이 내란(內亂)을 일으켰음에도 망하지않은 것은 비록 계자(季子)870)의 공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러나 계자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여 마침내 그 공을 이루게 한 것은 또한 노나라 사람들이 예절을 지킴으로써 경보를 따르지않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나라가 망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교화와 풍속을 소홀하게 여길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하였다. 《좌전(左傳)》에 ‘내총(內寵)이 왕후(王后)와 같고 얼자(孼子)가 적자(嫡子)와 맞먹는다……’한데에 대하여, 김우옹이 아뢰기를,
“진헌공(晉獻公)은 아주 무도(無道)한 임금으로 마침내 여희(驪姬)의 난을 초래하여 세자 신생(申生)을 죽였습니다.
성명(聖明)한 시대에는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못되는 듯합니다만, 그러나 예(禮)는 작은 데에서 삼가야 하고 환(患)은 처음의 조짐에서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궁곤(宮閫)의 사이에 예를 삼가는 일은 마땅히 더욱 엄하게 하고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삼가지않으면 왕후와 맞먹고 적자와 맞먹는 난(亂)이 있게 될 것이니, 이런 조짐이 없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전하께서는 날로 성찰하실 것이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하였는데,
정언 이길(李洁)도 궁위(宮闈)에서는 마땅히 삼가고 엄하게 해야한다고 하였다. ‘위문공(衛文公)이 가르침을 공경히 하고 학문을 권장했다……’고 한 데 대하여, 김우옹이 아뢰기를,
“위(衛)나라가 패망한 나머지 초래(草萊)에서 겨우 국맥을 보존하고 있었는데도 문공(文公)은 중흥의 임금으로 학교(學校)·교화(敎化)의 일에 힘을 썼으니 이것으로써 교화란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하루도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국가가 한가할 때에 어찌 교화하는 일을 치지도외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조강이 끝나자 김우옹이 아뢰기를,
“신이 영남(嶺南)에 있을 적에 본 바로는 백성들의 기근이 너무 극심하여 미죽(糜粥)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으니, 만약 보리와 밀이 여물지않기라도 한다면 민생이 매우 염려됩니다.
이것은 대체로 여러 해동안 풍년이 들지않아서 수령이 해유(解由)871)를 걱정한 나머지 구차스럽게 환자(還上)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모두가 실속이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곡(官穀)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다 빈이름뿐이고 백성이 받는 환자란 겨우 용미(舂米)로 1두(斗)에 불과하니 이것으로는 끼니를 이어가기가 곤란합니다.
그리고 또 어사가 내려가서 각 고을의 관곡을 모두 출고(出庫)하여 숫자를 헤아려 보고 도로 입고(入庫)하였습니다만 내고들일 즈음에 석수(石數)만을 헤아렸을 뿐이어서 속의 곡물이 태반을 누락되었습니다.
이래서 환자가 더욱 부실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관곡은 이미 모두 실속이 없습니다. 민간의 부잣집에 옛날에는 곡물이 많이 있어서 어떤 때는 민간의 사저(私儲)를 봉납하게 하여 백성을 구제하고서 그에 상당하는 상격(賞格)을 주었었는데, 지금은 백성의 힘이 고갈되고 부잣집도 저축된 곡식이 없으니 구황(救荒)할 일이 있더라도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민생이 극도로 어려운 터이니 마땅히 우물로 들어가는 어린 아이 보듯이 서둘러 구제해야 합니다.
지금 호강(豪强)들을 억제하는 하나의 일에 대해서는 조정이 자못 치우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리가 그 풍세(風勢)에 따라 오로지 엄한 위엄만을 숭상하면서 이렇게 하지않으면 상하의 분수를 밝힐 수 없다고 여겨 거만하게 스스로 높은 체하면서 하민의 실정을 통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가지 일이 생기면 모두 호강들의 소행이라 여겨 함부로 엄형(嚴刑)으로 다스리되 조금도 애석하게 여기지않고 있습니다.
이것으로는 호강들을 반드시 참으로 굴복시키지도 못하는데, 호소할데 없는 소민(小民)들만 먼저 그 폐를 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탐관오리가 백성의 위에서 횡포를 부리며 국법(國法)을 두려워하지않고 의롭지못한 일을 많이 저지릅니다. 그러다가 그 못된 일이 발각되면 으레 허물을 호강들에게 돌리고 자기들은 죄를 면하고 있는데 조정에서는 모두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래서 그 폐해가 적지 않고 소민들은 더욱 호소할 길이 없게 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은 것같다. 다만 양남(兩南)872)의 풍속이 요즈음 와서 너무도 완악해졌다. 문란한 자를 형벌함에 있어서는 나라가 이와 같이 중전(重典)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하였다.
김우웅이 아뢰기를,
“신이 민간에 있었으니 어찌 민간의 일을 모르겠습니까?
백성들은 본디 교육하지 않아서 혹 부역(賦役)이 고르지않으면 여염에서 악담을 하는 자는 있습니다만 국법을 거역하고 관령(官令)을 듣지않는 자는 진실로 못보았습니다. 참으로 수령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처치할까 두렵습니다. 만약 수령들이 의리로 제어하고 처치하고 호령을 발한다면 어찌 제재하지 못할 백성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가령 이런 완악한 백성이 있다고 한들 또한 어찌 많이 있겠습니까? 남의 위가 된 자는 마땅히 불쌍하게 여겨 사랑하는 마음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는 것이며 그중에 악한 자를 제거하는 것은 바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성취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앞세워 성난 기색으로 임한다면 어찌 백성의 부모된 자의 마음이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민생이 급급하기가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한데 어떻게 차마 중법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는 마땅히 애통해 하고 측은해 하는 마음으로 관대한 명령을 내려 백성들의 고통을 보살펴 주고 가혹한 관리가 있으면 가차없이 통렬히 다스림으로써 호오(好惡)를 분명하게 보인다면 조금은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일 진주목사(晉州牧使) 이제신(李濟臣)이 올린 상소에 대해 위에서 ‘그대는 백성들을 덕(德)으로 인도하고 예(禮)로 일매지게 하되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확립되게 하라’고 분부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임금다운 말씀입니다.
마땅히 이런 뜻을 선화(宣化)를 받드는 신하에게 분명하게 보이셔야 합니다. 다만 이제신(李濟臣)이 상의 뜻을 봉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하였다.
註867]회맹(會盟)하다:고자(高子)는 제대부(齊大夫) 고혜평(高傒平)임. 제환공(齊桓公)이 고자를 보내어 남양(南陽)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희공(僖公)을 세우고 노(魯)에 성을 쌓게 하였다.
그 때 노나라는 장공(莊公)이 죽은 뒤로 자반(子般)이 어인(圉人) 뇌(犖)에게 시해당했고 민공(閔公)이 공중(共仲)에게 무위(武圍)에서 시해되었는데 제환공이 고자를 시켜 회맹하고 희공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2년동(閔公二年冬).註868]‘정(鄭)나라가 그 군사를 버리다’:정나라 사람이 대부(大夫) 고극(高克)을 미워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하상(河上)에 주둔하게 하고 부르지않으니 군사들이 흩어져 돌아갔다. 그러자 고극이 진(陳)으로 달아났다. 이 때문에 정나라가 자기 나라의 군사를 버렸다고 한 것이다.《춘추좌전(春秋左傳)》권4 민공(閔公)2년12월 註869]위(衛)나라가 적인(狄人)에게 멸망:위의공(衛懿公)이 학(鶴)을 좋아하여 헌(軒:대부가 타는 수레)을 타는 학도 있었다. 12월에 적인(狄人)이 쳐들어오니, 군사들이 모두들 “학을 시켜 싸우게 하라. 학은 실로 녹위(祿位)가 있다. 우리가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리하여 형택(熒澤)에서 적인과 싸우다가 패하여 결국 적에서 멸망하고 말았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권4 민공(閔公)2년12월.註870]계자(季子):공자우(公子友).註871]해유(解由):관의 물품을 관장하던 관원이 교체할 때 후임자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호조(戶曹)에 보고하여 책임의 해제를 받음. 해유에 결격 사유가 있으면 실직(實職)에 임명될 수 없음. 註872]양남(兩南):경상도와 전라도
○辛未/朝講。 齊高子來盟, 至鄭棄其師, 明人臣之義, 得奉使之宜。 宇顒曰: “從君之義, 不從君之命, 是爲人臣之義哉,” 衛爲狄所滅之因, 宇顒曰: “衛大國, 而以淫亂無禮, 人紀失亡, 而後狄入之。 魯是時亂敗極矣, 而以猶秉周禮, 故仲孫知其不可亡, 禮之有關於人國也大矣。 是時, 慶父主兵, 夫人內亂, 而不至於亡者, 雖以季子之功, 然使季子來歸, 卒濟其功者, 亦以魯人秉禮, 不從慶父者多。 故其國不可亡耳。 以此知敎化風俗之不可忽也。” 《左傳》內寵並后, 嬖子配適云云。 宇顒曰: “晋獻公, 大無道之君, 終致驪姬之亂, 殺世子申生。 若盛明之世, 似不足言此。 然當謹禮於微, 防患於漸, (乎)〔平〕時宮閫之間, 謹禮之事, 當愈嚴愈謹。 一日不謹, 則並后配適之亂, 不可謂無是兆也。 唯殿下日省焉, 不可忽也。” 正言李洁亦言: “宮闈當謹嚴云云。 衛文公敬敎勸學云云。” 宇顒曰: “衛敗亡之餘, 僅存於草萊, 而文公以中興之君, 能從事於學校敎化之事。 以此知敎化者, 爲國之不可一日無也。 況國家間暇之時, 豈可置敎化於度外, 而不以爲念乎, 講畢, 宇顒啓曰: “臣在嶺南, 見民飢困太甚, 糜粥亦不繼。 脫有兩麥不實, 則民生深可慮也。 蓋緣累年不稔, 守令念其解由, 苟捧還上, 皆爲無實, 故官穀皆爲虛名, 民受還上者, 舂米不過一斗, 以此難以接食。 且又御史下去, 盡出各邑官穀, 量數還入, 其出入之際, 只計石數, 其中穀物漏落太半, 以此還上, 尤爲不實矣。 當今官穀旣皆無實, 而民間富室, 古則多有穀物, 或封私儲以濟民, 而爲賞格矣。 今則民力殫竭, 富室亦無之, 脫有救荒之事。 不知何以爲策。 且今民生極難, 視之當如入井之赤子, 而汲汲救之。 今以抑豪一事, 朝廷頗有偏主之意, 官吏承風, 專尙嚴威, 以爲: ‘不如是, 不足以明上下之分。’ 傲然自高, 不通下情。 凡有一事, 皆意其豪强所爲, 肆爲嚴刑, 略不顧惜。 以此豪右, 未必眞能戢伏, 而無告小民, 先受其弊矣。 又況貪官汚吏肆於民上, 不畏國法, 多行不義, 及其敗露, 則例爲歸咎於豪右之口, 以自免其罪, 而朝廷皆信之。 此其爲弊不少, 小民益無告訴之路矣。” 上曰: “此言似矣。 但兩南風俗, 比來頑惡, 太甚刑亂, 國用重典, 不得不如是也。” 宇顒曰: “臣在民間, 豈不知民事乎, 民不素敎, 或有不均賦役, 爲惡於閭閻者矣。 若拒逆國法, 不聽官令者, 誠未之見也。 誠恐守令處置乖方矣。 若守令以義制置, 發爲號令, 寧有不可制之民乎, 此則必無也。 假曰有此頑民, 亦豈多有之乎, 爲人上者, 但當以惻惶慈愛爲本, 其中爲惡者去之, 乃所以成其慈愛之心耳。 若先有忿疾之心, 厲色臨之, 豈爲民父母之意哉, 況今民生汲汲如淺, 豈忍以重法繩之哉, 朝廷宜以哀痛惻惶之心, 發爲寬大之令, 以恤民隱, 而其有嚴酷之吏, 當深惡痛疾, 以此明示好惡, 庶乎其少救也。 近日晋州牧使李濟臣上疏, 而上敎之曰: ‘爾其道德齊禮, 恩威竝立。’ 此誠人君之言也。 當以此意, 明示承化之臣。 但未知濟臣, 能奉上意否耳。”
선수 17권, 16년(1583 계미/명만력(萬曆)11년) 7월 1일(경진) 2번째기사
호군 성혼이 상소하여 이이의 결백함을 아뢰다
호군 성혼(成渾)이 상소하기를,
“신은 헛된 이름으로 상을 속여 높은 벼슬을 받았으므로 이미 본래의 마음과 어긋나 항상 마음속으로 황공하게 여긴 나머지 바야흐로 시골에 내려가 생을 마치고 감히 서울에는 오래 머무르려 하지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삼가 삼사 전체가 전판서 이이를 탄핵한 것을 보건대,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 일을 그르쳤다고 죄를 가하여 이이로 하여금 용납할 곳이 없이 물러나게 하였으니, 정치와 형벌의 잘못됨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성상의 망극한 은혜를 받은 신이 시사(時事)가 잘못되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이 조정의 잘못을 알고서도 화를 두려워한 나머지 말하지 않아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삼가 이이의 사람됨을 살펴보건대 막힘없이 통하고 명민하며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명한데, 젊어서부터 구도(求道)에 뜻을 두고 분발하여 학문을 연마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치에 널리 다 통했다고 할 수는 없어도 의리(義理)의 대체에 대해서는 터득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앉아서 장구(章句)나 따지는 속된 선비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여 나라가 있는 것만을 알뿐 자기 몸이 있는 것은 알지못한 채 시대를 구제하려는 데에 급급하여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평생 지니고 있는 소신이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기질이 이러한 관계로 병통 또한 있습니다.
막힘없이 통하다 보니 경솔한 병폐가 있어 차분하고 치밀한 기품이 적으며, 그 성품이 곧고 근실하기 때문에 겉모습을 꾸며 남의 뜻에 맞추려는 태도가 전연 없습니다. 뜻이 크다 보니 미세한 일에는 소홀하며, 자신감에 넘치는 관계로 시속에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자는 매우 적고 비웃는 자가 많으며 걱정해주는 자는 진실로 적고 미워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시론과 맞지않자 여러 번 상소하여 현재의 폐단을 깊이 거론했는데, 그것이 현실을 꼬집는 것이었으므로 더욱 당시 사람들의 꺼리는 바가 되었습니다. 또 정철을 쓸 만한 사람이라고 추천하였는데, 이 때문에 더욱 여러 사람의 뜻과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이는 조정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전하로부터 세상에 드문 대우를 받았기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고 뜻하여 몇 년 동안이나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탄핵한 내용중에 ‘말을 바치게 하고 부방을 면제시켜 주었다’고 한 내용의 곡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이는 일찍이 을묘년275) 왜변때에 전쟁터로 가는 군사가 서울에서 말을 노략질하는 것을 보고 혼란의 계제가 될 것으로 여겨 깊이 우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그 일을 계청하려 하다가 말을 바칠 자가 있을지 없을지를 예측할 수가 없어 감히 계청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말이 이미 모이고 군사가 떠나려고 하자 한편 나누어 주고 한편 품계하게 되었는데, 급한 상황에서 경솔하게 잘못 처리한 결과로 이런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청명(請命)하지않고 먼저 명령을 내린 이것이야말로 이이의 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리켜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닙니다. 정원에 나아가지않았던 것도 현기증이 재발했기 때문인데, 이를 가리켜 교만하여 임금을 무시했다고 한다면 실정에 맞지않습니다.
그 말이 한 사람의 대간의 입에서 나오자 여러 대간이 따라서 화답하였는데, 대신은 이이를 위해 출사를 청하면서도 감히 대간의 말이 정도에 지나쳤다고는 하지않았습니다. 아, 대간의 과격한 말은 그 실수가 적은 것이고 이이의 임금을 무시한 죄는 그 죄악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적은 실수를 보호하려고 하여 지극히 큰 죄악을 씻지 않고서 억지로 출사하게 하였으니, 이는 그를 들어오게 하면서 문을 닫아버리는 격입니다.
다만 성상의 하교가 정성스럽고 곡진하여 이이에게 직무를 충실하라고 설득하였으므로, 이에 이이가 안타깝고 절박한 심정을 금할 수 없어 그 죄의 경중을 헤아려 주기를 청한 것이지 그 뜻이 어찌 대간과 승부를 다투는 데에 있었겠습니까? 다만 출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상의 명을 받들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만약에 탄핵을 받고서 물러갈 수 있고 출사해야 할 한가지 절차가 없었다면, 이이가 어찌 감히 계사를 올렸겠습니까? 이이가 감히 섣불리 나가지 못했던 것이야말로 공론을 두려워하고 대간을 중시했던 것인데, 도리어 대간을 경시하고 공론을 무시한다고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송(宋)나라의 구양수(歐陽修)276)와 유지(劉摯)277)는 모두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했지만 꼭 소인의 행위라고 할 수 없는데, 더구나 이이의 말은 출사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스스로 변명하는 데 있지 않음이겠습니까?
그런데 삼사의 논박이 크게 일어나 또 ‘나라 일을 그르친 소인으로서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다’는 죄를 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죄를 가지고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 일을 그르쳤다’는 죄명을 씌우더니 또 이번에는 이 죄명을 갖고 장차 법에 의해 죄를 청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죽는 지경에 몰아놓고야 말려는 것이었습니다.
아, 지금 말하는 자들은 스스로 공론이라고 하나 그 말의 공평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인심을 승복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이가 진실로 소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씀을 곧바로 공격하기를 여회(呂誨)가 왕안석(王安石)을 공격하듯278)해야 옳지, 어찌 하나의 과실때문에 곧 각박하게 죄명을 가하려고 하며 준엄한 법망에 빠뜨리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그 마음속에 품고있는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 사람들이 이를 꿰뚫어 보는데도 근심하지 않는 것이니, 이 또한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사대부는 마땅히 공평정대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사심을 버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무리 소인을 공격하다가 형편상 이기지 못하여 물러나게 된다하더라도 오직 그 바름을 잃지 않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개 우활한 이이를 공격하면서 술수를 부리고 사대부의 명분과 체면은 전연 돌아보지 않았으니, 지금 만약 당사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면 과연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그렇긴 하나 오늘날의 대간이 어찌 다 의도적으로 이이에게 죄를 주기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이는 시류(時流)를 타고 부회(附會)하여 질투한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써 이이를 제거시키고자 한 것인데, 해묵은 원망을 품고 있는 자들이 이 기회를 잡고서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신에게 ‘나라가 망하려고 하는데 어질거나 간사한 자를 분별하지 않는다’라고 하문하셨는데, 대신이 그들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한 마디도 분변하는 말을 하려고 하지않으므로 성상께서 마음이 답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십니다. 신은 이 일을 듣고 지극히 통탄스럽게 여겼습니다.
군신(君臣)의 의리가 어찌 여기에서 그쳐야 하겠습니까? 천하의 충신과 의사(義士)가 이 말을 들으면 마땅히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날 것인데, 더구나 부름을 받고 이르러 그래도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신의 경우이겠습니까? 신은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명철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말씀을 드리는 것을 도리로 여겼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의 이 글을 공경(公卿)에게 회부시켜 반드시 그 충실함과 간사함을 분별하고 그 잘잘못을 상의하게 하여 참소와 모략의 화가 오늘날에 일어나지 않게 한다면, 종사(宗社)의 복이겠습니다.
그리고 대간은 말하는 것이 책임이니 공론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대간의 간사함과 정직함에 따라 말에 잘잘못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대간은 지적하여 논의할 수가 없고, 말하는 자는 그르다고 흠잡을 수가 없다.’고 한다면 장상영(張商英)이 사마광(司馬光)을 공격하고 윤색(尹穡)이 장준(張俊)을 공격한 것은 장차 언로(言路)가 막힐 것을 염려하여 잘못이라고 하지 못하겠습니까? 지금 옥당이라야 대간의 잘못을 논의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대간을 논의하면 곧바로 흉악스럽고 간사한 죄를 뒤집어 씌우고자 하니, 어찌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역시 그 말이 간사한가 올바른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공승흥(公乘興)은 ‘어사(御史)가 없는 일을 꾸며내어 지나치게 헐뜯으면서 죄없는 사람을 참소한다’고 하였고, 송인종(宋仁宗)은 ‘어사가 애매한 말로 대신을 중상모략하니 이런 풍조는 키울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일이 그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한번 이이를 공격하는 말이 나오자 온 조정이 휩쓸려 감히 그 사이에서 평형을 유지하려 하는 자가 없으니, 이는 한나라나 송나라 때에도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현재 내우외환의 상황속에서 천재와 시변이 동시에 겹쳐 일어나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어 거의 망할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하된 자들이 그런 것은 근심하지 않고 서로 흠이나 잡고 배척하면서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몸 바치는 신하로 하여금 용납할 곳이 없어 떠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떠나게 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또 그 죄를 꾸며내어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 일을 그르쳤다는 죄목을 가하였으니, 성상의 시대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시비를 규명하고 충사(忠邪)를 분별하는데 마음을 쓰지않으시고 가능한 한 양쪽을 다 감싸주려고 하실 경우, 착한 것을 좋아해도 권장되는 바가 없고 악을 미워해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간사한 마음을 품은 무리가 성상의 의리를 엿보고 꺼리는 바가 없게 될 것이며, 편당을 심고 권력을 독차지하여 항상 세력을 믿고 충현(忠賢)을 공격하여 떠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충현들이 당하는 화가 바야흐로 온 세상에 미치게 되어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변변치 않게 여기지 마시고 권력과 기강을 총괄하셔서 시비의 갈피를 먼저 바로 잡으시고 충사(忠邪)의 추세를 밝게 분별하시며 기미를 깊이 살펴 그 근원을 막으소서.
그리하여 전하의 착함을 좋아하고 악함을 싫어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마치 강하(江河)의 흐름처럼 유통되게 하시면 나라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근심하는 바가 어찌 한 사람의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겠습니까? 착함을 좋아하면서 등용하지 못하고 악함을 싫어하면서 제거하지 못하는 이것이야말로 곽공(郭公)이 망하게 된 이유279)에 대해 제환공(齊桓公)이 징계된 바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이이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아시고 또 말한 자가 참소하고 질투한 것임을 아시고서도 양쪽 다 논평하는 바가 없으시면 장차 어떻게 중앙과 지방의 의혹을 풀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온 조정에서 어느 한 사람 말하는 이가 없는데 일개 미천한 외톨이인 신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마치 한 손으로 홍수를 막으려 하는 것과 같으니, 이 또한 어리석고 망령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의 말이 실행될 수 있어서 시론(時論)이 이로 말미암아 화평해지고 사림이 이로 말미암아 화합되고 국가가 이로 말미암아 구제된다면, 신은 비록 죄를 받는다 하더라도 전혀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서로가 과격하게 승부를 겨루며 오직 나의 극한적인 기세를 다하고자 할 뿐이라면, 신의 한 몸이야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지만 나라 일이 과연 어떻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신하가 나라를 위해 일을 처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남의 원망을 쌓게 되면 화가 곧바로 이르게 마련입니다.
바로 이 점이 세태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용납되기만을 구하는 선비가 이 세상에서 작록(爵祿)을 유지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지금 이이는 자기 몸을 잊고 원망을 도맡으면서 혼신의 노력을 다했는데도 하루아침에 이러한 중상을 받아 장차 여생을 보전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뒷날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 누가 전하를 위하여 기꺼이 일을 떠맡으려고 하겠습니까? 앞으로 숫자나 채우는 신하들이 자리를 지키고 대소관원들이 서로 추종하여 감히 조금도 그 뜻을 거역하지 못한 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닥거리다가 일과가 끝나기만을 기다린다면, 전하의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도모하는 뜻도 시행될 수가 없어 게으른 생각이 생기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염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삼가 오늘의 일을 보건대 말씀드릴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조정이야말로 사방의 근본인데, 근본이 다스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신이 어느 여가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구양수(歐陽修)가 한기(韓琦)와 부필(富弼)의 죄가 아니라고 변론한 것280)은 공론이 중하기문에 친구 간의 혐의를 피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이와 친구입니다. 신이 옛 사람에 미치지는 못하나 그렇다고 감히 아랫사람에게 붙고 윗사람을 기망하여 전하를 저버릴 인간은 아닙니다.
그리고 생각하건대 신은 질병이 이미 깊어졌는데 만약 서울에 있다가 죽게 될 경우 여츤(旅櫬)281)마저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놓아주셔서 서쪽으로 국문(國門)을 나가죽을 수 있게 해주소서. 이것이 신의 큰 소원입니다”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건대 충성심이 열렬하니 간사한 자가 듣게 되면 그 간담이 찢어질 것이다. 정말 군자의 한 마디 말이야말로 나라의 큰 비중이 된다 하겠다. 그리고 이미 서울에 온 이상 병을 조리하면서 경연에 출입하여 덕이 적고 밝지 못한 나의 마음을 일깨워 주어야지 사퇴할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된다”하였다.
註275]을묘년:1555 명종10년.註276]구양수(歐陽修):송(宋)나라의 문학가(文學家). 당시 범중엄(范仲淹)이 언사(言事)로 인하여 귀양을 가자 구양수와 윤수(尹洙)·여정(余靖)등이 모두 범중엄을 옳다고 지지하다가 쫓겨났는데, 이들을 당인(黨人)이라고 하는 붕당론(朋黨論)이 일어났다. 구양수는《붕당론》이라는 글을 지어 군자(君子)의 당(黨)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송사(宋史)》권319.註277]유지(劉摯):송신종(宋神宗)때에 한기(韓琦)의 추천으로 관각교감(館閣校勘)이 되었는데, 왕안석(王安石)이 그를 보고 비범하게 여겨 검정중서예방(檢正中書禮房)으로 발탁시켰다. 어느 날 신종이 “그대는 왕안석에게 배웠는가?”하고 물으니, “저는 독학을 했으므로 왕안석은 알지못합니다”하고, 물러나와 상소하여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의(義)와 이(利)에 달려있다고 하면서, 자신은 왕안석과 같은 소인의 무리가 아님을 시사하였다.《송사(宋史)》권321.註278]여회(呂誨)가 왕안석(王安石)을 공격하듯:여회는 왕안석이 집정할 때의 어사중승(御史中丞). 모두들 왕안석의 시책을 옳게 평가하는 상황에서 시사(時事)를 모른다고 탄핵하였다. 세 차례나 언책(言責)을 맡으면서 대신을 탄핵하다 쫓겨났다.《송사(宋史)》권321.註279]곽공(郭公)이 망하게 된 이유:곽은 춘추시대의 국명. 곽공이 선인을 선하게 여기면서도 쓰지아니하고 악인을 미워하면서도 버리지아니하다가 나라를 잃었다.《춘추대전(春秋大全)》장공(莊公).註280]구양수(歐陽修)가 한기(韓琦)와 부필(富弼)의 죄가 아니라고 변론한 것:이 말은 두연(杜衍)·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부필(富弼)등이 당의(黨議)로 인하여 연달아 파직되자 구양수가 상소하여 그들의 무고함을 변론한 것을 말한다.《송사(宋史)》권319.註281]여츤(旅櫬):객지의 상여.
○護軍成渾上疏曰:
臣盜名罔上, 坐受高爵, 旣違素心, 內切惶懼, 方將歸死丘壑, 不敢久留都下。 而頃者, 伏遇三司擧劾前判書臣李珥, 加以無君誤國之罪, 使珥無所容而去, 政刑之失, 無大於此。 臣受聖明罔極之恩, 目見時事之非而不言則是, 臣知朝廷過擧, 而畏禍不言, 以負殿下也, 臣請昧死而言之。 臣竊觀, 珥之爲人, 疏通明敏, 天分甚高, 少有求道之志, 慨然以學自勵。 於衆理雖不能周遍, 而義理大槪, 不可謂無見, 非如拘儒曲士, 坐守章句之徒也。 其愛君憂國, 出於至誠, 唯知有國, 而不知有其身, 急於濟時, 不以溫飽爲念者, 乃其平生素所有也。 雖然, 氣質如此, 故其病痛亦有之。 惟其疏通, 故有率爾之病, 而少沈潛縝密之氣, 其性白直迂愿, 故絶無修飭外貌, 調適人情之態, 志大而闊, 略於細微, 自信而不徇乎時俗。 是以, 愛者絶鮮, 而笑之者多; 憂之者固少, 而嫉之者衆矣。 且與時論不合, 屢陳疏章, 深論時弊, 以其觸實, 故益爲時人所忌。 且論薦鄭澈以爲可用, 以是, 尤不合於衆情。 珥知不可久在朝廷, 而被殿下不世之遇, 思欲鞠躬盡瘁, 以報萬一, 所以遲回數歲, 而不能去也。 至於論劾中, 納馬免防一事, 則珥嘗見乙卯倭變時, 赴戰軍士, 掠馬於都中, 深以階亂爲憂。 初欲啓請, 而又不料納馬者之有無, 不敢請焉。 及其馬旣集, 而軍士臨行, 旋給旋啓, 在急遽之時, 固率爾之失, 而有此罪也。 不請命而先下令, 此固珥之罪也。 然謂之專擅國柄, 則非其罪也。 不進政院, 乃眩暈重發之故耳。 謂之驕蹇慢上, 則非其情也。 此言發於一臺諫, 而諸臺諫隨而和之, 大臣爲珥請出, 而不敢以臺諫之言爲過中。 噫! 臺諫過激之言, 其失小; 李珥無君之罪, 其惡大。 欲護至少之失, 而不雪至大之罪, 强令出仕, 則是欲其入, 而閉之門也。 秖緣聖敎至誠委曲, 諭珥供職, 珥於是時, 不勝悶迫, 以請稱量其罪之輕重者, 其意豈在於與臺諫爭勝負乎, 只欲開出仕之路, 以承上命耳。 若被論而得去, 無出仕一節, 則珥豈敢爲啓辭乎, 珥之不敢易出, 乃所以畏公論、重臺諫, 而反以爲輕臺諫、蔑公論, 不亦異乎, 宋之(歐陽脩)〔歐陽修〕劉摯皆上章自明, 未必爲小人, 況珥之言, 在於出仕, 而不在於自辨者乎, 而三司之論大作, 又加以 “誤國小人, 恣肆無忌憚。” 之罪。 初因微罪, 而加以無君誤國之名, 又因此名, 而將欲據法請罪, 是必欲置之死地而後已也。 嗚呼! 今之言者, 自以爲公論, 而其言之不公、不平如此, 將何以服人心乎, 若使珥爲眞小人, 自當直攻其心術, 如呂誨之於王安石可也。 安有因一過失, 輒持之以深文, 陷之以峻法者乎, 此其腹心意態, 披露於外, 不復以人人覷破爲憂, 不亦可羞之甚者乎, 士大夫當以公平正大爲心, 克去己私爲務, 雖攻擊小人, 勢將不勝而去, 惟當不失其正, 無愧於方寸可矣。 今乃攻一迂闊之李珥, 而乃設機關, 不復顧惜士大夫名節, 今使當事者, 自顧其中, 果能無愧於心乎, 雖然, 今日臺論, 豈皆作意罪珥, 至於此哉, 不過附會乘時嫉妬。 故務欲去珥, 而挾宿怨者, 持其機, 以至於此耳。 殿下詢于大臣以 “國家將亡, 賢邪無辨。” 爲敎, 大臣畏其氣焰, 莫肯出一言以辨之, 聖心鬱鬱, 無所底向。 臣聞之以爲至痛。 君臣之義, 寧可止此而已乎, 天下之忠臣、義士聞之, 當有投袂而起者, 況臣被徵而至, 猶在可言之地者乎, 臣, 故不以含默爲哲, 而以進言爲義。 伏願殿下, 下臣此章于公卿, 必令辨別其忠邪; 商議其得失, 使朋讒奇中之禍, 不作於今日, 則宗社之福也。 且臺諫以言爲責, 公論之所寄也。 然隨其人之邪正, 而言有得失之異焉。 今謂, 臺諫不可以指議; 言者不可以非間則彼張商英之攻司馬光; 尹穡之攻張浚, 其將慮言路之杜塞, 而不可謂之非耶, 今謂, 玉堂然後, 可以議臺諫之失, 而他人之議臺諫, 則輒欲加以凶邪之罪, 夫安有是理哉, 亦在乎其言之邪正而已。 昔漢公乘興言: “御史飾文深詆, 以愬無辜之罪。” 宋仁宗謂: “御史以黯黮之言, 中傷大臣, 此風不可長也。” 今日之事, 何以異此, 而一唱攻珥, 擧朝靡然, 無敢持平於其間, 則又非漢、宋之所有也。 當今外警內憂、天災時變, 一時竝作, 國勢岌岌, 有危亡之象, 而爲臣子者, 不此之憂, 乃相與媒孽排擯, 使竭忠徇國之臣, 無所容而去。 非惟不容, 又將文致其罪, 置諸無君誤國之科, 曾謂聖明之世, 有此事哉, 殿下不以究是非、辨忠邪爲意, 而以含容兩可爲務, 則臣恐善善而無所勸; 惡惡而無所懼。 將使懷姦之徒, 有以窺聖意之所在, 而無所忌憚, 植黨專權, 常以多寡之勢, 攻擊忠賢而去之則忠賢之禍, 方橫挐一世, 而不可求矣。 伏願殿下, 勿自菲薄, 摠攬權綱, 有以先正是非之理, 辨別忠邪之趨, 深燭幾微, 杜塞其源。 而使殿下善善、惡惡之心, 沛然若決江河, 則國家幸甚。 且臣之所憂, 豈在於一人之進退哉, 善善而不能用; 惡惡而不能去, 此固齊桓公, 懲創於郭亡也。 殿下旣知珥之無他, 又知言者讒嫉, 而兩無所問, 則將何以解中外之惑耶, 今擧朝無一人言者, 而臣以一介孤賤, 出而言之, 欲以隻手, 障其橫流, 亦可謂愚妄矣。 然使臣言得行, 而時論由是而平, 士林由是而和; 國家由是而濟, 則臣雖得罪, 萬萬無恨。 不然, 相激相勝, 惟欲盡我氣勢之所極而已, 則臣之一身, 固不足惜, 而不知國事, 稅駕之所也。 人臣爲國當事, 斂怨於身, 禍必立至。 此, 浮沈取容之士, 所以持祿於世也。 今者忘身任怨, 竭股肱之力, 而一朝受此中傷, 將不能保全餘生, 則異日緩急, 孰肯爲殿下任事哉, 從今具臣保位, 大小相徇, 無敢少拂其意, 而悠悠玩愒, 以取日闋而已, 則殿下勵精之志, 亦無所施, 而懈意生矣, 豈非可虞之大者乎, 臣竊見, 今日之事可言者多矣。 然朝廷者, 四方之本也。 本之不治, 臣何暇及他說哉, 且(歐陽脩)〔歐陽修〕論韓琦、富弼之非罪, 公論所重, 不避相友之嫌。 臣, 珥之友也。 臣雖不及古人, 亦不敢附下罔上, 以負殿下也。 且念, 臣疾病已深, 若在京而死, 則旅櫬難歸。 伏望放臣歸田, 使之西出國門而死, 則臣之大願也。
答曰: “觀爾上疏, 忠奮激烈, 如使奸邪聞之, 足破其膽。 信乎君子一言, 爲國重輕也。 且旣來在于京, 可調病出入經筵, 以啓沃寡昧, 未可爲辭退之計也。”
선조 17권, 16년(1583 계미/명만력(萬曆)11년) 7월 15일(갑오) 1번째기사
성혼이 이이가 공박받자 이이를 해명하는 상소를 올리다
성혼(成渾)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신은 이름을 도둑질하고 주상을 속여 앉아서 높은 관작을 받았으니, 이미 소심(素心)에 위배되는 일이라서 내심 두려운 생각이 간절합니다. 감히 도하(都下)에 오래 머물러 있지못하고 곧 구학(溝壑)으로 돌아가 죽으려던 차에 삼사(三司)가 전병조판서 이이를 탄핵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군(無君)·오국(誤國)의 죄를 가하여 이이로 하여금 꼼짝 못하고 가게만들었으니 잘못된 형정(刑政) 중에서도 이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신이 성조(聖朝)의 망극한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 시사(時事)가 잘못되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말을 않는다면, 이는 신이 조정의 잘못임을 알면서도 화가 두려워 말하지 않는 것이니 전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말을 합니다.
신이 보건대, 이이의 사람됨은 소통(疏通)·명민(明敏)하고 천성이 매우 고매하여 젊은 시절 구도(求道)의 뜻을 가지고 개연히 학문으로 자신을 격려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가 비록 모든 이치에 있어 두루 원만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의리(義理)의 대원(大原)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구유(拘儒)1038)나 곡사(曲士)처럼 앉아서 장구(章句)나 지키는 무리들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의 지성에서 나온 것으로, 오직 나라가 있는 것만 알고 자신이 있는 것은 모르며 시무(時務)를 구제하는 데 급급하여 자신의 온포(溫飽) 따위는 생각에도 두지않음이 바로 그의 일생의 소양입니다.
그러나 그의 성취된 기질(氣質)이 그러하기 때문에 병통 또한 없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소통(疏通)했기때문에 소탈한 병통이 있어 침착하고 치밀한 기풍이 적습니다. 그리고 그 성품이 결백하며 정직하고 오활한 만큼 진실하기 때문에 겉모양을 꾸민다거나 남의 뜻을 맞추려고 하는 태도는 전혀 없고, 뜻이 큰 만큼 미세한 일에는 소략하며, 스스로를 믿어 시속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자는 매우 적고 비웃는 자가 많으며, 그를 걱정하는 자는 적고 미워하는 자는 많습니다.
게다가 시론(時論)과도 맞지 아니하여 누차에 걸친 소장(疏章)으로 시폐(時弊)를 깊이 있게 논한 것이 현실과는 저촉되기 때문에 더욱 당시 사람들의 꺼리는 바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정철(鄭澈)을 쓸 만한 사람이라고 논천(論薦)했던 것이 더욱 중정(衆情)과 맞지않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이 자신도 조정에 오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하의 세상에 드문 은우를 입고서 자기 몸이 다하고 힘이 다할 때까지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해 보려는 생각에서 몇 해를 두고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번 논핵(論劾)중의 말[馬]을 바치면 북변 방어의 임무를 면제해준 그 한 가지 일은, 이이가 일찍이 을묘년1039) 왜변(倭變) 당시, 전쟁에 임하는 군사들이 도중(都中)에서 말을 약탈해가는 것을 보고 그것이 난계(亂階)가 될 것을 깊이 우려한 나머지, 당초에는 아뢰어 청하려 하였으나 말을 바쳐올 자가 있을지 없을지를 알 수 없어 감히 청하지못했던 것이고, 급기야 말들이 모였을 때는 군사의 갈 길이 임박하여 주고 나서 곧 아뢰었던 것인데 급급한 가운데 경솔하게 했던 탓으로 그러한 죄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명(命)을 청하지않고 먼저 영(令)부터 내린 것은 당연히 이이의 죄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국병(國柄)을 마음대로 휘두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죄는 아닐 것입니다. 또 그가 정원에 나가지 않았던 것은 현훈증(眩暈症)이 거듭 일어났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을 교만하여 주상을 업신여겼다고 한 것 역시 그러한 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한 대간의 입에서 나오자 여러 대간들이 뒤따라 입을 맞추었고 대신들도 이이를 위하여 출사하기를 청하면서도 감히 대간의 말이 지나쳤다고 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아, 대간의 말이 과격했던 것은 그 잘못이 작은 것이고, 이이가 무군(無君)한 죄는 그 악(惡)이 큰데, 지극히 작은 잘못을 옹호해 주기 위하여 지극히 큰 죄를 씻어주지는 아니하고 억지로 출사하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문을 닫아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성교(聖敎)가 너무도 진지하고 간곡하게 이이에게 공직(供職)하도록 하유하셨기 때문에 이에 이이로서는 민망하고 절박함을 감당하지 못하여 부득이 계사(啓辭)하여 죄의 경중(輕重)을 헤아려 주실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뜻이 어찌 대간과 승부를 겨루자는 것이었겠습니까?
다만 출사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상의 명을 따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만약 논핵을 입었으니 떠나갈 뿐 출사와는 관계가 없었다면 이이가 무엇때문에 감히 계사를 썼겠습니까? 이이가 감히 쉽게 출사를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공론을 두려워하고 대간을 존중해서인데 그것을 가리켜 도리어 대간을 가볍게 보고 공론을 멸시한다고 하고 있으니 역시 괴이하지 않습니까?
송(宋)의 구양수(歐陽脩)나 유지(劉摯)도 논핵을 당하고는 모두 글월을 올려 자신을 변명했지만 그들 역시 반드시 소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이가 말한 것은 그 목적이 출사하기 위함이었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는데도 삼사(三司)의 논의가 크게 일었고, 게다가 또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든가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다는 죄까지 뒤집어씌웠습니다. 처음은 경미한 죄였는데 거기에다 무군(無君)·오국(誤國)의 죄명을 씌웠고 이제는 또 그 죄명으로 법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려고 하니 이는 그를 꼭 죽을 땅으로 몰아넣고야 말겠다는 심산인 것입니다.
아아, 지금 말하는 자들이 저들 스스로 공론이라고 하면서 그 말의 불공(不公)·불평(不平)함이 이 정도이니 어떻게 사람마음을 승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이가 만약 참으로 소인이라면 여회(呂誨)가 왕안석(王安石)을 공격하듯 마땅히 곧바로 그의 심술(心術)에 대하여 공격하는 것이 옳지 한 가지 과실을 꼬투리로 하여 그것을 심문(深文)으로 주장하고 준법(峻法)으로 다스리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들의 속셈이 전부 겉으로 드러났는데도 이제는 사람들이 그 속셈을 간파하는 것조차 걱정하지 않을 정도이니,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사대부(士大夫)라면 의당 공평하고 정대(正大)한 마음가짐으로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을 극복하고 제거하기에 힘써 비록 소인을 공격하다가 형세상 이기지 못하고 떠나더라도 오직 올바름만은 잃지 않음으로써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지금 한사람 오활한 이이를 공격하면서 거기에 기관(機關)을 만들어 사대부의 명예나 절의쯤은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으니 지금 그 당사자들은 자기자신을 들여다볼 때 과연 마음이 쾌하단 말입니까? 그러나 오늘날 조론(朝論)이 어찌 모두 다 고의적으로 이이를 죄주기 위해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이렇게 된 것은 부회(附會)하는 무리들이 이 시기를 타 빨리 공격을 하여 되도록 이이를 몰아내려 하고 있는데다가 숙원(宿怨)을 가진 자들이 가세하여 기틀을 잡으려고 함으로써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전하께서 대신들에게 ‘나라가 망해가는데 충사(忠邪)를 구별할 길이 없단 말인가?’고 물으셨을 때, 대신들은 그들의 기염(氣焰)이 무서워서 누구 하나 분명하게 말 한마디하는 이가 없어서 답답한 성상의 마음을 둘 곳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신은 그것을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군신간의 의(義)가 어찌 이 정도에 그칠 뿐이란 말입니까?
천하의 충신(忠臣)·의사(義士)들이 이것을 듣는다면 너도 나도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날 일인데, 더구나 부름을 받고 서울에 도착하여 오히려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신이겠습니까. 신은 그렇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것을 명철한 일이라 생각하지 아니하고 말씀을 올리는 것을 의리로 생각하였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글월을 공경(公卿)들에게 내리시어 반드시 충과 사를 변별(辨別)하고 득과 실을 논의하게 하여, 붕당이 참소하여 기이하게 목적을 달성시키는 화가 오늘날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신다면 종사(宗社)의 복이겠습니다.
그리고 대간(臺諫)은 말하는 것이 책무이고 공론(公論)이 달려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사정(邪正)에 따라 말의 득실(得失)도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대간이라 하여 지적하여 논의할 수 없고 언자(言者)라 하여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없다면, 저 장상영(張商英)이 사마광(司馬光)을 공격했던 것이나 윤색(尹穡)이 장준(張浚)을 공격했던 일1040)에 있어서도 앞으로 언로(言路)가 막힐까를 염려해서는 그르다고 할 수 없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옥당(玉堂)이라야 대간의 잘못을 논의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대간을 논의했을 때는 곧 흉사(凶邪)하다는 죄를 가하려고 한다면 그러한 사리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역시 그의 말이 사(邪)인가 정(正)인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옛날 한(漢)의 공승흥(公乘興)은 어사(御史)가 꾸며내어 깊이 헐뜯고있다고 말하여 죄 없음을 호소하였고, 송(宋)의 인종(仁宗)은 어사가 애매한 말로 대신(大臣)을 중상(中傷)하는데 이 풍조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일도 그와 다를 게 무엇입니까? 그런데도 한번 이이를 공격하는 소리가 나오자 조정 전체가 그쪽으로 휩쓸려 감히 중간에서 형평을 유지한 이라곤 없으니 이 역시 한나라·송나라에서도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외경(外警)·내우(內憂)·천재(天災)·시변(時變)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어 나라의 형세가 곧 위망(危亡)이 닥쳐올 것처럼 급급한데 신하된 자로서 이를 걱정하지 아니하고 기껏 서로 배척(排斥)할 계책이나 빚어내어 충성을 다해 나라에 몸바치려는 신하를 발붙일 곳이 없어 가게 만들고, 이 뿐만이 아니라 죄까지 만들어내어 무군(無君)·오국(誤國)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니, 일찍이 성명(聖明)의 세상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시비(是非)와 충사(忠邪)를 끝까지 추구하여 분명하게 가려내는 것을 급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저 어물어물 두 쪽이 다 옳은 것처럼 용납하시는 데만 힘쓰신다면, 앞으로 선선(善善)·오악(惡惡)에 있어 권장하거나 두렵게 만들 만한 표준이 없어 간사한 마음을 가진 무리들로 하여금 성상의 뜻이 어디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저들만의 붕당을 심고 권세를 독차지함으로써 항상 다과(多寡)의 세(勢)를 가지고 충현(忠賢)을 공격하여 몰아낼 것입니다.
그리되면 충현들의 화가 온 세상에 뻗쳐도 다시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신은 두렵습니다. 이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스스로 변변하지 못하다고 하지마시고, 모든 권강(權綱)을 잡으시어 우선 옳고 그른 이치를 바로잡고, 충직함과 간사함을 구별하여 깊이 그 기미를 살피고 근원을 막아 버림으로써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전하의 마음이 마치 강하(江河)를 터놓은 듯 막힘이 없어 드러나게 하신다면 국가에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걱정하는 것이 어찌 한 사람의 진퇴(進退)에 있겠습니까?
선을 좋아하면서도 선한 자를 기용하지 못하고 악을 미워하면서도 악한 자를 제거하지 못한 것은 곽(郭)1041)이 망한 원인이라하여 제(齊)의 환공(桓公)이 징창(懲創)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이이가 다른 뜻이 없음을 알고 또 언자(言者)가 그를 미워하여 참소한 것임을 알면서도 둘 다 따져 묻지 않으신다면 중외(中外)의 의혹을 어떻게 풀겠습니까? 지금 조정에 말하는 자라곤 한 사람도 없는데 한낱 고천(孤賤)한 신이 나서서 말해 보았자 고작 한 손으로 횡류(橫流)를 막으려는 격이어서 역시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의 말이 실현이 안 되더라도 시론(時論)이 이로 인해 공평해지고, 사림(士林)이 이로 인해 화합하며 국사가 이로 인해 해결될 수 있다면 신이 비록 죄를 얻어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으나, 그렇지 못하고 서로 격동하고 서로 이기려 하여 오직 나의 기세(氣勢)만 최고로 높이려 할 뿐이라면, 신의 이 한 몸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국가가 안정할 곳이 어디일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일을 담당하게 되면 원망이 한 몸에 모여 화패(禍敗)가 즉시 오기 마련이니, 이것이 세속을 따르면서 허용을 받는 선비들이 세상에서 녹(祿)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지금 이이는 자기 몸을 잊고 원망을 가로맡아 가면서 고굉(股肱)의 힘을 다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그러한 중상(中傷)을 받아 장차 여생을 보전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다른 날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누가 전하를 위해 일을 맡으려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구신(具臣)1042)들이 지위를 확보하고 대소(大小)간에 서로 따르기만 하여 감히 조금도 그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별로 하는 일 없이 그날그날 날짜나 보낼 뿐이라면 잘 다스려보려는 전하의 뜻 역시 시행할 곳이 없어 점점 해이해지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오늘날의 일들을 보건대 말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조정은 사방의 근본이니, 근본이 다스려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신이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말하겠습니까?
또 구양수(歐陽脩)가, 한기(韓琦)·부필(富弼)이 죄가 없음을 논했듯이 공론이 중한 곳에도 서로 친구라는 혐의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이이의 친구입니다. 신이 비록 옛사람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렇다고 감히 아래에 붙고 위를 속여 가면서 전하를 저버리지는 못합니다.
신이 서울에 와 품질(品秩)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때마침 치란(治亂)과 안위(安危)가 달린 큰 시폐(時弊)가 있음을 보고 걱정되고 놀라 한탄한 나머지 말하려 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노쇠(老衰)하고 시훼(紫毁)1043)되어 부궐(赴闕)을 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말하니 신의 죄가 큽니다.
또 생각하면 신의 질병이 이미 깊어 만약 서울에서 죽으면 관에 담아 돌아가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을 전원으로 돌아가도록 놓아주시어 서쪽으로 국문(國門)을 나가 죽을 수 있게 해주소서. 이는 신의 큰 소원입니다.
신엄(宸嚴)을 예모없이 범하여 너무도 황공하고 지극히 죄스럽습니다”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충분(忠憤)이 격렬하여 만약 간사한 무리들이 듣게 한다면 충분히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말 한마디가 나라를 위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참으로 알겠다. 그리고 이미 서울에 왔으니 병을 조리하면서 경악(經幄)에 드나들며 어두운 나를 계옥(啓沃)하여 주도록 하고 금방 물러갈 생각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직하지 말라”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삼공(三公)을 명초(命招)하라.”하였다.
영상(領相) 박순(朴淳)과 좌상(左相) 김귀영(金貴榮)은 명을 받고 예궐하였고, 우상(右相) 정지연(鄭芝衍)은 병 때문에 오지 않았다.
영상·좌상에게 전교하기를,
“나는 과매(寡昧)하여 아는 것이 없고, 어둡고 불민하여 충(忠)과 사(邪)도 알지 못하고, 시(是)와 비(非)도 구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번 경들에게 물었던 것인데 경들은 감히 우물우물 넘기고 말았다.
내 그때 이미 경들의 마음을 훤히 알았지만 뒤에 형편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는 뜻으로 경들에게 하유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성혼의 상소문을 보니 대신(大臣)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과연 그러해도 된다는 말인가? 당초에 이이를 배척한 것이 누구의 짓이며 또 붕간(朋奸)의 무리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분명히 가려내어 말할 것이요, 다시 어물어물 넘김으로써 국가에 부끄러움을 끼치지 말게 하라”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면대(面對)를 청합니다”하니, 인견(引見)하겠다고 전교하였다.
註1038]구유(拘儒):고지식한 유학자.註1039]을묘년:1555 명종10년.註1040]장상영(張商英)이 사마광(司馬光)을 공격했던 것이나 윤색(尹穡)이 장준(張浚)을 공격했던 일:언관(言官)으로서 부당한 논핵을 했음을 말함. 즉 장상영은 송철종(宋哲宗)때 당시의 대신들이 자기를 써주지 않는다하여 사마광(司馬光)·여공저(呂公著)·유지(劉摯)등을 붕당을 끌어들여 감히 남을 헐뜯는다는 내용으로 상소를 하여 탄핵하였다.《송사(宋史)》권351. 윤색(尹穡)은 송효종(宋孝宗) 당시 금인(金人)의 침공을 받았을 때 우정언(右正言)으로서 형편상 적과 강화(講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반대파인 장준(張浚)을, 발호(跋扈)를 시도하고 있다고 논핵하다가 얼마 안가서 파직당하였다.《송사(宋史)》권372.註1041]곽(郭):춘추 시대의 나라 이름註1042]구신(具臣):숫자만 채우는 신하.註1043]시훼(紫毁):상(喪)에 너무 슬퍼하여 야윔. 애훼(哀毁).
○甲午/成渾疏曰:
伏以, 臣盜名罔上, 坐受高爵, 旣達素心, 內切惶懼。 方將歸死溝壑, 不敢久留都下, 而頃者伏遇三司擧劾前兵曹判書李珥。 加以無君誤國之罪, 使珥無所容而去, 刑政之失, 無大於此者。 臣受聖朝罔極之恩, 目覩時事之非而不言, 則是臣知朝廷過擧, 而畏禍不言, 以負殿下也。 臣請昧死而言之。 臣竊觀李珥之爲人, 疏通明敏之分甚高, 少有求道之志, 慨然以學自勵於衆理。 雖不(用)〔周〕遍, 而義理大原, 不可謂無見, 非如(俗)〔拘〕儒曲士, 坐守章句之徒也。 其愛君憂國, 出於至性, 惟知有國, 而不知有〔其〕身, 急於濟時, 而不以溫飽爲念者, 乃其平生素所有也。 雖然氣質所就如此, 故其病痛亦有之。 惟其疏通, 故有率(爾)〔易〕之病, 而〔小沈潛縝蜜之風〕(有沈潛之氣), 其性白直迂愿, 故絶無修飾外貌, 調適人情之態, 志大而闊略於細微, 自信而不徇乎時俗。 是以愛之者絶鮮, 而笑之者多, 憂之者固小, 而嫉之者衆矣。 且與時論不合, 屢陳疏章, 深論時弊, 以其觸實, 故益爲時人所忌。 且論薦鄭澈以爲可用, 是以尤不合於衆情。 珥知不可久在朝廷, 而被殿下不世之遇, 思欲鞫躬盡瘁, 以報萬一, 所以遲廻數歲而不能去也。 至如論劾中, 納馬免防一事, 則珥嘗見乙卯倭變, 赴戰軍士, 掠馬於都中, 深以階亂爲憂, 初欲啓請, 而又不能料納馬〔者〕之有無, 不敢請焉, 及其馬旣集, 而軍士臨行, 旋給旋啓。 〔在〕急遽之中, 因率爾之失, 而有此罪也。 不請命而先下令, 此固珥之罪也, 然謂之專擅國柄, 則非其罪也。 不進政院, 乃眩暈重發之故耳, 謂之驕蹇慢上, 則非其罪也。 此言發於一臺諫, 而諸臺諫隨而和之, 大臣〈珥〉爲請出, 而不敢以臺諫之言爲過中。 噫! 臺諫過激之言, 其失小, 李珥無君之罪, 其惡大, 欲護至小之失, 而不雪至大之罪, 强令出仕, 則是欲其入而閉之門也。 只緣聖敎至誠委曲, 諭珥以供職, 珥於是時, 不勝悶迫, 不得已而爲啓辭, 以請稱量其罪之輕重者。 其意豈在於與臺諫爭勝負乎, 只欲開出仕之路, 以承上命耳。 若被論而得去, 無出仕一節, 則珥豈敢爲啓辭乎, 珥之不敢易出, 乃所以畏公論重臺諫, 而反以此爲輕臺諫蔑公論, 不亦異乎, 宋之(歐陽脩)〔歐陽修〕、劉摯被劾, 而皆上章自辨, 亦未必爲小人。 況珥之言在於出仕, 而不在於自辨者乎, 而三司之論大作, 又加以誤國小人, 恣肆無忌憚之罪。 初因微罪, 而加以無君誤國之名, 又因此名, 而將據法請罪, 是必置之死地而後已也。 嗚呼! 今之言者, 自以爲公論, 而其言之不公不平如此, 將何以服人心乎, 若使珥爲眞小人, 自當直攻心術, 如呂誨之於王安石可也, 安有因一過失, 輒持之以深文, 陷之以峻法者乎, 此其腹心意態, 披露於外, 不復以人人覷破爲憂, 不亦可羞之深乎, 士大夫當以公平正大爲心, 克己袪私爲務, 雖攻擊小人, 勢將不勝而去, 惟當不失其正, 無愧於方寸可矣, 今乃攻一迂闊李珥而乃設機關, 不復顧惜士大夫名節, 今使當事者, 自顧其中, 其果能慊於心乎, 雖然今日朝論, 豈皆作意罪珥至於此哉, 不過附會者乘時疾攻, 務欲去珥, 而挾宿怨者, 又將持其機, 以至於此耳。 殿下詢于大臣: ‘以國家將亡忠邪無卞。’ 爲敎, 而大臣畏其氣焰, 莫肯出一言以辨之, 聖心鬱鬱, 無所底向。 臣聞之, 以爲至痛。 君臣之義, 寧可止此而已乎, 天下之忠臣義士聞之, 尙有投袂而起者, 況臣被徵(在)〔至〕京, 猶在可言之地者乎, 臣故不以含默爲哲, 而以進言爲義。 伏願殿下, 下臣此章于公卿, 必令辨別忠邪, 商議其得失, 使朋讒奇中之禍, 不作於今日, 則宗社之福也。 且臺諫以言爲責, 公論之所寄也。 然隨其人之邪正, 而言有得失之異焉。 今謂臺諫不可以指議, 言者不可以非間, 則彼張商英之攻司馬光, 尹穡之攻張浚, 其將慮言路之杜塞, 而不可謂之非也。 今(謂)〔爲〕玉堂然後可以議臺諫之失, 而他人之議臺諫, 輒欲加以凶邪之罪, 則夫安有是理哉, 亦在乎其言之邪正而已。 昔者漢公乘興言御史飾文, 深詆以愬無辜, 宋仁宗謂御史以黯(黮)〔昧〕之言, 中傷大臣, 此風不可長也。 今之事何異於此, 而一唱攻珥, 擧朝靡然, 無敢持平於其間, 則又非漢、宋之所有也。 當今外警內憂天災時變, 一時竝作, 國勢岌岌有危亡之象, 而爲臣子者, 不此之憂, 乃相與媒孽〔排擯〕, 使竭忠徇國之臣, 無所容而去, 非唯不容, 而又將文致其罪, 置諸無君誤國之科, 曾謂聖明之世, 而有此事哉, 殿下不以究極是非, 辨別忠邪爲(意)急, 而以含容兩可爲務, 則臣恐善善而無所勤, 惡惡而無所懼, 將使懷奸之徒, 有以窺測聖意之所在, 無所忌憚, 植黨專權, 常以多寡之勢, 攻擊忠賢而去之。 則忠賢之禍, 方橫挐一世, 而不可救矣。 豈不痛哉! 伏願聖明勿自菲薄, 摠攬權綱, 有以先正是非之理, 辨別忠邪之趣, 深燭幾微, 杜塞其源, 而使殿下善善惡惡之心, 沛然若決江河, 則國家幸甚。 且臣之所憂, 豈在於一人之進退哉, 善善而不能用, 惡惡而不能去, 此固齊桓公所以懲創於郭亡也。 殿下旣知珥之無他, 又知言者之讒嫉, 而兩無所問, 將何以解中外之惑耶, 今擧朝無一人言者, 而臣以一介孤賤, 出而言之, 欲以隻手障其橫流, 亦可謂愚妄矣。 然使臣言不行, 而時論由是而平, 士林由是而和, 國家由是而濟, 則臣雖得罪, 萬萬無恨。 不然相激相勝, 惟欲盡我氣勢之所極而已, 則臣之一身, 固不足惜, 而不知國家稅駕之所也。 人臣爲國當事, 斂怨於身, 禍敗立至, 此浮沈取容之士, 所以持祿於世也。 今珥忘身任怨, 竭股肱之力, 而一朝受此中傷, 將不能保全餘生, 則異日緩急, 孰肯爲殿下任事哉, 從今具臣保位, 大小相徇, 無敢少排其意, 而悠悠玩揭, 以取日闋而已, 則殿下勵精之志, 亦無所施而懈意生矣, 豈非可憂之大者乎, 臣竊見今日之事, 可言者多矣。 然朝廷四方之本也, 本之不治〔如此〕, 臣何暇及他說哉, 且(歐陽脩)〔歐陽修〕論韓琦、富弼之非罪, 公論所重, 不避相友之嫌。 臣珥之友也。 臣雖不及古人, 亦不敢附下罔上, 以負殿下也。 臣身到京師, 爵在高秩, 適見時弊係治亂安危之大者, 憂傷駭嘆, 久欲言之, 而疲癃紫毁, 不能赴闕, 今始言之, 臣之罪大矣。 且念臣疾病已深, 若在京而死, 則旅櫬難歸, 伏望聖慈, 放臣歸田, 使之西出國門而死, 則臣之大願也。 干冒宸嚴, 無任競惶殞越之至。
答曰: “觀爾上疏, 忠憤激烈, 如使奸邪聞之, 足破其膽。 信乎! 君子一言, 爲國輕重。 且旣來在于京, 可調病, 出入經幄, 以啓沃寡昧, 未可爲遽退之計, 勿辭。” 仍傳曰: “三公命招。” 領相朴淳, 左相金貴榮, 承命詣闕。 右相鄭芝衍以病不來。 傳于領、左相曰: “以予寡昧, 不識昏昧不敏, 不知忠邪, 莫曉是非。 故頃日問卿等, 乃敢爲含糊之說, 予固已洞知卿等之心矣, 而隨後處之之敎, 則已諭於卿等矣。 今觀成渾上疏, 大臣事君之道, 果如是乎, 當初李珥之排擯誰所爲, 朋奸之類又誰耶, 其辨別以啓, 毋更含糊, 以貽國家之羞。” 回啓曰: “請面對。” 傳曰: “引見。”
선수 23권, 22년(1589 기축/명만력(萬曆)17년) 11월1일(을사) 10번째기사
조헌을 방면하여 향리로 돌아가도록 명하다
조헌(趙憲)을 방면하여 향리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조헌이 유배(流配) 중에 있으면서 조정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감사(監司)를 통하여 소장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형(荊)땅 사람이 박옥(璞玉)을 안고 세번이나 발꿈치가 잘렸어도 징계되지 않은 것616)은 품고있는 것이 옥이기 때문이었고, 장준(張浚)617)이 적소에 있으면서 열번이나 소장을 올리면서도 중지하지않은 것은 원하는 것이 충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이 죽지않은 것 또한 천지와 같은 성은(聖恩)을 입은 것입니다. 해산(海山)의 황폐한 역참(驛站)에도 해와 달이 비추지않는데가 없으니 의리상 입을 다물고 명을 편히 여기면서 시사(時事)가 끝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천상(天象)을 우러러 살펴보면 형혹성(熒惑星)이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을 관통하여 남두(南斗)에 들어간 지 열흘이 넘었고 낭성(狼星)이 또 광채가 있으니, 옛날 서적에서 찾아보면 모두 병상(兵象)에 관계됩니다.《춘추(春秋)》의 일식과 역대의 성변(星變)은 반드시 천자에게만 해당될 뿐만 아니라, 흔단이 있는 나라는 실로 패망을 당해왔습니다. 성상(聖上)의 총명으로 어찌 이를 생각하지 못하시겠습니까?
멀리서 듣건대, 왜사(倭使)가 반년동안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면서 패악한 말을 함부로 하여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한다고 말하여도 온 조정이 두려워하여 한 사람도 지론(持論)을 주장하여 원호(元昊)618)의 간사함을 꺾는 자가 없다하니, 조선(朝鮮)의 사기(士氣)가 이처럼 꺾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는지라 신은 목에 음식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더욱이 신의 스승이 죽은 뒤로는 독서한 사람이 우리 임금의 좌우에 있지 아니함을 더욱 한탄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승부의 형세가 어찌 군사의 강약(强弱)에만 달려있을 뿐이겠습니까? 춘추(春秋)때의 열국(列國)중에 초(楚)나라가 막강하였으나 제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을 임용하여 의리에 의거하여 지론(持論)을 주장하니 소릉(召陵)의 군사가 전쟁을 하지아니하고 맹약을 하게 되었고619), 항적(項籍)은 싸움을 잘하여 천하에 대적이 없었으나 한왕(漢王)이 동공(董公)의 말을 들어620) 명분있게 군사를 출동시키니 해하(垓下)에서 군사가 흩어져 비가(悲歌)를 부르고 스스로 목찔러 죽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시역(弑逆)의 죄를 지고 있어서 천지에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가 기세를 부릴 즈음에는 혹 바람과 우레를 부릴 수도 있으나 인도(人道)에 순응하지않는 것은 하늘의 뜻도 도와주지 않는 것이니, 여기에서 도의(道義)의 기운이 1만명의 군사보다 장대함을 알겠고 어진 자는 적이 없다는 맹자(孟子)의 훈계가 더욱 분명합니다. 당당한 우리나라가 부여받은 은택(恩澤)이 다하지 않아 또한 스스로 지킬 수 있는데 어찌 죽음에 몰아넣는 술책에 빠져 억지로 화친 요청에 부응해야겠습니까?
원하건대, 오늘날 세상에서 왕손만(王孫滿)621)과 같은 사람을 가려서 사자에게 말하게 하기를 ‘너희들이 우리의 신사(信使)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강하다하여 몰래 군사가 가서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약한데다가 흉년이 든 것을 다행하게 여겨 침략 유린하려고 해서 그러는 것인가?
몰래 군사를 보내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조선조(祖先朝)로부터 하지않는 바인데 내 대에 와서 차마 전대의 아름다운 덕을 말살할 수 있겠는가? 이웃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겨 침략하는 것은 사서(史書)에서도 부도(不道)하다고 기평(譏評)하였다.
너희 나라가 새로 이루어져 안정되지 못한 시기에 또 천하에서 이 경계를 범하려 한단 말인가? 아비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자는 공자(孔子)·맹자(孟子)가 배척한 바이다.
원왕(源王)이 죽은 일에 대해 내가 자세히 알지못하니 내가 사신을 교통(交通)하고자 하나 우리 경사(卿士)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만일 내가 회답하지 않는 것에 성내어 기필코 군사를 동원하려 한다면 내가 덕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사(將士)들이 자못 임금을 사랑하는 의리를 알고 변방을 지키는 군졸들도 부모의 은혜를 알고 있으니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 성을 굳게 지키며 마땅히 힘을 다할 것이다.
상사(上使)가 타국 임금을 현혹시킨 죄는 《춘추(春秋)》에 나타나 있다.
신하들의 대다수가 천조(天朝)에 주달하여 주벌하기를 청하고 있으나 바다를 건너 와서 쟁론(爭論)하는 것은 각각 자기 임금을 위하는 것이므로 지금 우선 용서하여 보내주니, 제도(諸島)에 두루 고하라’하소서. 그렇게 하면 은애(恩愛)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져서 절대로 범하기 어려울 것입니다”하였는데,
감사(監司) 권징(權徵)이 당로자(當路者)의 마음을 거듭 거스를까 두려워하여 잘못 썼다 핑계하고 재삼 물리쳤다. 마침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호남유생 양산숙(梁山璹)이 상소하여 조헌의 원통함을 송변(訟辨)하면서 그가 정여립이 반드시 반역할 것을 예언한 선견(先見)의 충언(忠言)이 있었음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찬배(竄配)한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니, 석방하도록 하라”하였다.
조헌이 돌아오는 도중에 다시 감사에게 올렸던 전의 소장을 인하여 또 한통의 소장을 작성하여 반역의 일이 일어나게 된 까닭을 논하니,
권징이 또 물리치며 말하기를,
“역옥(逆獄)이 크게 일어나서 인심이 흉흉하고, 사신을 보내어 통호(通好)하는 것은 조정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 소장은 도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화를 한층 더 유발시키게 될 것이다.
우선 입을 다물고서 시변을 살피라.”하였다.
조헌이 말하기를,
“위망의 기틀이 호흡사이에 결정되는데 두려워하여 말하지않는 것이 어찌 신자의 도리이겠는가? 그리고 죽은 여립을 공이 오히려 이처럼 두려워하니 산 수길(秀吉)이 오면 공이 마땅히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권징이 이에 받아서 올렸다.
註616]형(荊)땅 사람이 박옥(璞玉)을 안고 세 번이나 발꿈치가 잘렸어도 징계되지 않은 것:형(荊)은 초(楚)를 말함. 초(楚)나라사람 변화(卞和)가 초나라 산중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초여왕(楚厲王)에게 바치니, 여왕이 옥인(玉人)에게 감정을 의뢰하였는데 돌이라 하자 속였다하여 변화의 왼쪽 발꿈치를 잘랐다. 초무왕(楚武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또 박옥을 바쳤는데 옥인이 감정하고는 역시 돌이라 하니 그의 오른쪽 발꿈치를 잘랐다. 초문왕(楚文王)이 즉위하자 변화가 박옥을 안고 우니, 문왕이 옥인을 시켜 쪼깨어 보옥(寶玉)을 얻었다 한다.《한비자(韓非子)》화씨(和氏).註617]장준(張浚):송(宋)나라 명신. 고종(高宗)때 천섬경서제로선무사(川陝京西諸路宣撫使)로서 실지(失地) 회복에 뜻을 두고 금인(金人)을 힘껏 막았다. 마침 진회(秦檜)가 화의를 주장하여 영주(永州)로 좌천되었다. 효종(孝宗)때 추밀사(樞密使)에 제수되었다.《송사(宋史)》권361.註618]원호(元昊):서하(西夏) 이낭소(李曩霄)의 본명. 송(宋)나라에서 조씨(趙氏)로 사성(賜姓)하였으므로 조원호(趙元昊)라고도 부른다. 송나라 신하노릇 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다가 송인종(宋仁宗) 명도(明道:1032∼1033)초에 서하의 왕위를 세습, 현도(顯道)란 연호를 쓰고 보원(寶元:1038∼1039)초에 천수(天授)란 연호를 참칭(僭稱)하여 황제 노릇을 하였다. 뒤에 송과 싸워 승리하였으나 사망과 부상자가 상반되므로 화의를 애걸하여 하국주(夏國主)로 봉해져서 그대로 나라에서 제(帝) 노릇을 하였다.《송사(宋史)》권485. 일본이 참람하게 연호를 쓰고 통신(通信)을 청해온 것을 원호(元昊)가 송나라에 화의를 청한 일에 비유한 것이다.註619]소릉(召陵)의 군사가 전쟁을 하지아니하고 맹약을 하게 되었고:소릉은 춘추(春秋) 때 초(楚)의 지명. 초나라 대부(大夫) 굴완(屈完)이 군사을 거느리고 소릉(召陵)에 주둔하여 맹약을 청하므로 제환공(齊桓公)이 제후(諸侯)의 군사를 진열하고 굴완과 수레를 함께 타고 만나 대화한 다음 맹약을 맺었다.《좌전(左傳)》희공(僖公)4년.註620]항적(項籍)은 싸움을 잘하여 천하에 대적이 없었으나 한왕(漢王)이 동공(董公)의 말을 들어:항적은 초패왕(楚覇王), 한왕(漢王)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초한(楚漢)전쟁때 한왕(漢王)이 낙양(洛陽) 신성(新城)에 이르자 삼로(三老:교화 맡은 사람) 동공(董公)이 길을 막고 한왕에게 “명분있는 군사를 출동해야 한다”고 말하니, 한왕은 항우에 의해 시해된 의제(義帝)를 위해 초상을 발표하고 군사에게는 모두 흰 상복을 입혀 진격하였다. 그 뒤 초패왕은 해하(垓下)에서 한군에게 포위당하였는데 밤에 우미인가(虞美人歌)를 지어부르고 나서 탈출하였으나 오강(嗚江)에 이르러 목찔러 죽었다.《사기(史記)》권8 항왕본기(項王本紀).註621]왕손만(王孫滿): 주정왕(周定王)때의 대부(大夫). 초자(楚子)가 육혼(陸渾)의 융적(戎狄)을 칠 적에 낙양(洛陽)에 이르러 주(周)의 경내에서 관병(觀兵)하려 하자, 주정왕이 왕손만을 보내어 초자를 위로하게 하였다. 초자가 전국보(傳國寶)인 주정(周鼎)의 대소와 경중에 대해 묻자, 왕손만은 “덕에 있는 것이요 주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덕이 아름답고 밝을 적엔 작더라도 무겁고, 간사하고 혼란할 적엔 크더라도 가볍다. ……주덕(周德)이 쇠퇴하기는 하였으나 천명(天命)이 바뀌어지지 않았으니 주정의 경중을 물을 수 없다”하였다. 초자가 주정의 경중을 물은 것은 주(周)를 핍박하여 천하를 취하려는 의도를 보인 것인데, 왕손만이 명분을 들어 준엄히 나무란 것이다.《좌전(左傳)》선공(宣公)3년.
○命放趙憲歸鄕。 憲在謫中, 聞朝廷將遣使日本, 因監司上疏, 略曰:
荊人抱璞, 三刖而不懲者, 以其所蘊者玉也; 張浚在謫, 十疏而不休者, 以其所願者忠也。 臣之不死, 亦荷天地之恩。 海山殘馹, 莫非日月所照, 義當結舌安命, 以見時事之所終極矣。 惟是仰觀乾象, 則熒惑貫于箕尾, 入南斗浹旬, 狼星又有光耀, 求之古籍, 俱係兵象。 《春秋》日食、歷代星變, 非必天子當之, 有釁之國, 實當其敗。 上聖聰明, 何所不思乎, 逖聞, 倭使半歲留館, 肆其悖語, 以興兵犯境爲辭, 擧朝惶怖, 無一人執言, 折元昊之姦者。 朝鮮士氣, 不圖摧折之至此, 臣食不下咽。 益歎臣師之亡, 而讀書之人, 不在吾王之左右也。 自古勝負之勢, 豈徒以兵之强弱乎, 春秋列國, 楚惟無强, 而齊桓用管仲, 仗義執言, 則召陵之師, 不戰而致盟; 項籍善戰, 天下無敵, 而漢王聽董公兵出有名, 則垓下人散, 悲歌自刎。 蓋其身負弑逆之罪, 天地之所不容也。 雖其假氣游魂之際, 或能指使風霆, 而人道所不順, 天意亦不佑, 斯知道義之氣, 壯於萬甲, 而仁者無敵, 孟訓益昭。 堂堂我國, 資澤未殄, 亦自可守, 豈宜陷於死術, 而强副要盟乎, 願擇今世之王孫滿, 俾語其使曰: “爾之求我信使者, 謂我之强, 而恐其潛師往襲耶, 謂我之弱, 而幸我飢饉, 要以侵軼耶, 潛師盜隣, 自祖先所不爲, 其在眇躬, 忍沫前徽乎, 幸災侵隣, 史譏不道。 新造未定之秋, 又犯斯戒於天下耶, 無父無君, 孔、孟所闢。 源王所終, 吾未詳知, 吾雖欲交使, 吾卿士恥之。 如其怒我不報, 必欲用兵, 則我雖涼德, 而吾家將士, 頗知愛君之義; 戍邊厮卒, 亦知父母之恩, 爲君親, 嬰城固守, 宜自戮力矣。 上价熒惑之罪, 著在《春秋》。 臣庶多請, 奏天朝誅之, 而越海爭論, 各爲其君, 故今姑恕送, 其以遍告諸島。” 云則恩威竝行, 截然難犯矣。
監司權徵, 恐其重忤當路, 託以誤書, 再三却之。 會逆獄起, 湖南儒生梁山璹上疏, 訟憲之冤, 言其預言汝立必叛, 有先見之忠言, 上曰: “當初竄謫, 非予本意, 可放釋。” 憲歸途, 復因監司, 上前疏, 又爲一疏, 論逆節之所由起, 徵又却之曰: “逆獄大起, 人心洶懼, 遣使通好, 朝議已定。 此疏不惟無益, 必將滋禍。 姑且含默, 以觀時變。” 憲曰: “危亡之機, 決於呼吸, 畏縮不言, 豈臣子愛君之道乎, 且死汝立, 公尙畏之如此, 生秀吉來, 公當何如,” 徵乃受而進之。
선조 39권, 26년(1593 계사/명만력(萬曆)21년) 6월 14일(정유) 1번째기사
평양과 경성의 난동을 걱정하며 유의하여 조치하라고 전교하자 비변사가 올린 회계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어제 세자로 하여금 잠시 평양에 머무르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 일의 깊은 뜻은 말로서는 이루 다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당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려는 단지 왜적의 재침에 있을 뿐만이 아니니 성중의 내변도 고려하지않을 수 없다. 오늘날 사방에 기근이 겹쳐 사람들이 의지해 살 길이 없으니, 난동이 일어날 만한 동기는 그 속에 한없이 숨어 있다. 지금은 중국 군사가 각 지경을 진압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간악한 무리가 있어도 감히 움직이지 못하지만 중국 군사가 철수하여 귀환한 후에는 깊이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성에는 조금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장수로 말한다면 모두 영남으로 내려갔고 군수품과 무기로 말하면 씻은 듯이 남아있지 않으며, 병사와 군마로 말하더라도 무슨 병사가 있는가?
나의 과도한 걱정은 한 가지 뿐만이 아니니, 유의하여 조치하라”하니,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인정이란 대체로 어떤 일을 두번 당하게 되면 처음만큼 걱정하지 않을 뿐더러 뒤에는 편안히 여겨 변화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걱정은, 저 왜적이 혹 진금(珍禽)·명마(名馬)로써 우리를 유도하면 우리는 그들이 무슨 뜻으로 그렇게 하는지를 깨닫지못하고, 혹은 양국이 통신하자는 일을 우리에게 요청하면 우리는 그들이 덫을 설치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임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인데, 이는 이른바 화의(和議)로써 송나라를 우롱한다1794)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제 장수를 선발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는 한편 무기를 준비하고 성곽을 수축하는 것은 비록 말 잃고 마굿간을 고치는 격이지만, 그렇다고 조치하는 계책과 예방하는 경계를 결코 중지해서는 안됩니다.
또 병란과 기근을 겪은 후에는 으레 내변이 일어난다는 것을 성상께서 예측하시니 이는 사직의 복입니다. 이제 돌이켜보면, 왕을 호위하는 숙위(宿衛)가 미약하고 지킬 만한 장수도 없다는 것을 군신 상하가 모두 알고 있어 그 경계를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적을 방어하는 대책과 국토를 수비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극한 정성을 쏟지 않음이 없어 재거지우(在莒之憂)1795)를 잊지말아야 거의 서계지치(棲稽之恥)1796)를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듣기에,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중대한 군기(軍機)에 관한 일은 다만 상신(相臣)·장신(將臣)들과 더불어 모의할 뿐, 더할 수 없이 엄밀히 하여 외인은 절대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대체로 군대란 나라를 가진 자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성인이 신중히 했던 것입니다.
오늘 날에는 말 한마디, 사건 하나가 있을 때마다 항론(巷論)이 날카로와 갖가지로 의심하고 저지(沮止)하니, 이 또한 미리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절하신 성교를 받고 이런 일까지 감히 언급하였습니다”하였다.
註1794]화의(和議)로써 송나라를 우롱한다:송고종(宋高宗) 소흥(紹興)년간에 금란(金亂)으로 인해 곤궁에 처했을 때, 왕륜(王倫)·진회(奏檜)·손근(孫近)등 간신들이 화의(和議)를 주장하며 말하기를 ‘금에게 무릎 한번 꿇는다면, 이제(二帝)의 재궁(梓宮)과 태후(太后)를 모셔올 수 있고, 빼앗겼던 땅도 되찾아 중원(中原)을 회복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고종에게 항복하기를 권했다. 이에 대하여 호담암(胡澹庵)은 ‘오랑캐는 정위(情僞)를 헤아릴 수 없으니, 무릎을 꿇는다해도 결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니, 이는 금이 송을 우롱함이요, 간신들의 매국 논의이다’라고 고종에게 봉사(封事)를 올렸었다.《송사(宋史)》권374 호전전(胡銓傳). 註1795]재거지우(在莒之憂):춘추(春秋)시대에, 제(齊)양공(襄公)이 무도(無道)하여 무지(無知)가 그를 시해하자,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은 공자 규(公子糾)를 보호하여 노(魯)로 망명하였고, 포숙아(鮑叔牙)는 환공(桓公) 소백(小伯)을 보호하여 거(莒)로 망명하였다. 그 후 환공은 형님인 공자 규를 죽이고서 제후위에 올랐다. 환공은 관중을 등용하여 패제후(覇諸侯)가 되었는데 그는 거(莒)로 망명해 있을 때의 겪은 고초를 마음에 항상 잊지말라는 신하의 독려를 받았었다.《관자(管子)》권11 소칭(小稱)32.註1796]서계지치(棲稽之恥):춘추(春秋)시대에 오(吳)와 월(越)이 서로 원수로 지냈다. 그러던 중에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공격을 입어 패전(敗戰)을 당하자, 회계(會稽)에서 서식(棲息)하면서 대부 종(大夫種)을 데리고 오왕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신하되기를 애원하니, 오왕은 자서(子胥)의 간언을 듣지않고 월왕을 살려주었다. 그 후부터 월왕은 와신상담(臥薪嘗澹)하면서 국력을 길러, 끝내는 오를 패망시켜 회계에서 당했던 모욕을 씻었다.《사기(史記)》권41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丁酉/上敎政院曰: “昨日(人)〔王〕世子姑留平壤事, 有微意, 而言不敢盡。 我國今日之憂, 不但在於倭奴之復來, 城中之變, 亦不可不慮。 目今四方飢饉, 人不聊生, 禍亂之作, 其伏也無窮。 今則天兵壓境, 雖有姦人, 莫之敢動, 天兵撤還之後, 不可不致深慮也。 京城少無所恃。 以言其將帥, 則盡赴嶺南; 以言其軍資、器械, 則蕩然無存; 以言其士馬, 則有何兵士, 予之過慮, 不一而足, 留意措置。” 備邊司回啓曰: “人情再遇, 不如初遇。 後則恬不知變者, 我國之患。 彼賊或以珍禽、名馬導我, 我則不覺其有意而爲之; 或以通信一事要我, 我則不知其設機而陷之, 所謂以和議愚宋, 正此謂也。 後之視今, 爲如何哉! 今欲選將、鍊兵, 備器械、修城郭, 雖似失馬治廐, 其措置之策、綢繆之戒, 斷不可已。 且師旅, 飢饉之後例有內寇之作。 聖念及此, 社稷之福也。 顧今宿衛單弱, 將帥無人。 君臣上下, 皆知此意, 儆戒不怠, 凡可以禦敵之策、防備之術, 無所不用其極, 毋忘在莒之憂, 庶雪棲稽之恥。 且臣等聞(得)〔在〕祖宗朝, 凡干軍機關重之事, 只與相臣、將臣謀之, 嚴密莫甚, 外人無得以知之。 蓋兵者, 有國之不可去, 而聖人之所愼也。 今則一言之出, 一事之興, 巷論崢嶸, 疑沮萬端, 此亦不可不預慮也。 奉承聖敎之勤, 敢幷及之。”
선조 43권, 26년(1593 계사/명만력(萬曆)21년) 10월28일(무신) 2번째기사
사간원이 이빈·최원등을 처벌할 것을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한 사람을 처벌하여 천만 사람을 징계시키는 것은 형벌의 적용이 균일하기 때문입니다.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은 사변이 발생한 처음 외람되이 적을 토벌하는 중한 소임을 제수받고서 영로(嶺路)를 지나자마자 적을 보고는 먼저 도망했고, 임진(臨津)을 지킬 적에 미쳐서는 이빈이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선봉(先鋒)이 한번 패하자 겁을 먹고 후퇴했고, 제군(諸軍)의 구원 요청이 경각간에 세번이나 왔는데도 끝내 싸우러 나가지 않았습니다.
해암(蟹巖)에서 군사가 무너질 때에는 도망하여 먼저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가 마치 힘써 싸운 사람인 양 함으로써 죄를 벗어날 소지를 만들었으므로 사람들이 통분하게 여겨온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창황한 즈음이라서 어떠한 기율이 없었으므로 조정이 죄를 주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수용(收用)하여 맹명(孟明)과 조말(曹沫)2108)이 했던 일을 이루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빈으로서는 마땅히 마음을 고치고 힘을 다하여 사졸들의 선봉이 되어 전일의 잘못을 속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진주가 포위당해 위급하게 되어 아침에 저녁 일도 보장할 수 없는 판에 지척에 있으면서도 가만히 보고만 앉아있고 구원하지 않음으로서 성안의 혈전(血戰)하는 군사들이 구원받지못한 채 섬멸당하게 만들었으므로 들은 사람들은 이를 갈지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조정에서 전후 군율을 범한 수신(帥臣)들의 죄상을 소급해서 순차적으로 징치(懲治)함에 있어 이빈만은 유독 면하게 되었으니 실형(失刑)이 너무 심합니다. 군율대로 죄를 정하도록 명하소서.
전첨지중추부사 최원은 외람되이 곤수(閫帥)의 임무를 전담하여 몸소 남쪽군사를 이끌고 해도(海島)에서 해를 보내며 한번도 적을 치지않았고, 인천(仁川)이 포위당해 위급했을 적에도 바라만 보고 구원하지않았으며 해암(蟹巖)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도 머뭇거리면서 나아가지 않았으니, 군율로 다스린다면 이미 참형을 받아야 합당했었습니다.
진주에 갔을 적에는 비록 신급제(新及第)들을 거느리고 가서 원수(元帥)에게 교부하는 것이었지만 이미 싸우는 곳에 갔었고 눈으로 위급함을 보았었으니 마땅히 자신을 잊고 스스로 힘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를 만에 하나라도 보답했어야하는데, 종시 겁을 내어 들어가 구원할 뜻이 없었습니다.
그가 전후 물러나 움츠리기만 한 죄가 크니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최원등의 일은 비변사와 의논하여 정한 것이다”하였다.
註2108]맹명(孟明)과 조말(曹沫):맹명은 춘추시대 진(秦)나라의 명신 백리해(百里亥)의 아들. 진(晉)나라에 세 번이나 패전했는데도 오히려 써주었으므로 진나라가 두려워하였고 마침내 승리하였음. 그리하여 진나라를 패자(覇者)가 되게 만들었음.《좌전(左傳)》문공(文公)2·3년. 조말은 춘추시대 노(魚)나라 사람. 제(齊)나라와 싸우다가 세 번 패전했는데 비수(匕首)를 품고 제환공(齊桓公)을 위협하여 잃었던 땅을 회복했음.《사기(史記)》권86.
○司諫院啓: “罰一人, 而千萬人懲者, 以其用罰均也。 巡邊使李薲, 變生之初, 猥授討賊重任, 纔過嶺路, 見賊先走。 及守臨津, 薲爲中衛將, 先鋒一敗, 恇怯却步。 諸軍之請援, 頃刻三至, 而終不赴戰。 至於蟹巖潰師之日, 挺身而走, 先詣行在所, 有若力戰者然, 以爲脫罪之地。 人情之痛惋久矣, 而蒼黃之際, 無復紀律, 朝廷不惟不加之罪, 而仍使收用, 至以孟明、曹沫之事責之。 爲蟹者, 所宜洗心竭力, 爲士卒先, 以贖前愆之不暇, 而晋州圍急, 朝不保夕, 身在咫尺, 坐視不救, 使一城血戰之士, 無援就殲, 聞者莫不切齒。 今者朝廷, 追咎前後帥臣失律罪狀, 將次第懲治, 而薲獨免焉, 其失刑甚矣。 請命依律定罪。 前僉知中樞府事崔遠, 濫叨專閫, 身擁南兵, 終年海島, 一不討賊。 仁川圍急, 觀望不救; 蟹巖約會, 逗留不進, 繩以軍律, 已合就誅。 及往晋州之日, 雖曰率領新及第, 交付元帥, 而旣赴戰所, 目見危急, 則所當忘身自効, 以報國恩之萬一, 而終始恇怯, 無意入援。 其前後退縮之罪大矣。 請命拿鞫定罪。” 答曰: “崔遠等, 與備邊司議定。”
선조 53권, 27년(1594 갑오/명만력(萬曆)22년) 7월 13일(기축) 3번째기사
공마의 일로 공물을 빠뜨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다
예조(禮曹)가, 동지의 공마를 대신이 의정하여 성절례(聖節例)에 따라 봉진하지말자고 한 일을 사복시공문으로 인해 부표한 것을 입계하니, 전교하였다.
“포모(包茅)를 바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제환공(齊桓公)이 그 죄를 물었다. 2539) 번방(藩邦)이 천자(天子)의 궁정(宮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은 곧 상국을 받드는 지엄(至嚴)한 예이다.
비록 경황이 없는 때지만 최소한이라도 마련할 수 있으면 폐해서는 안된다. 혹시 정해진 수효를 갖추기 어렵다면 작은 정성만이라도 표해야 한다.
그러나 혹 형편이 극히 어려운 점이 있으면 역시 군신이 함께 상의하여 가부를 결정한 다음에 시행해야 할 것인데 이제 대신의 계(啓)가 들어오지않고 윤가(允可)의 명이 내리지않았는데도, 유사가 해사(該司)의 이첩(移牒)만을 듣고 우연히 있었던 한때의 사례를 구차하게 끌어대면서 우리나라가 일반적으로 바치는 공물과 대등하게 간주하고 스스로 부표하여 장차 공물을 빠뜨리려고 계획하였다.《서경(書經)》에 ‘모든 나라가 방물(方物)을 바친다’는 뜻은 이와 같지않은 듯하니, 잘못된 일이 아닌가?”
註2539]포모(包茅)를 바치지않은 자에 대해서는 제환공(齊桓公)이 그 죄를 물었다:포모는 강신(降神)할 때 쓰는 띠묶음. 노희공(魯僖公)4년에 초(楚)나라가 주(周)나라에 포모를 바치지않자 왕실(王室)의 제사를 올리지 못하게 한 죄목으로 제환공이 제후의 군사를 거느리고 초를 정벌한 것을 말한다.
○以禮曹冬至貢馬, 大臣議定, 依聖節例, 勿爲封進事, 因司僕寺公文, 付標入啓, 傳曰: “苞(芽)〔茅〕不貢, 齊桓伐罪。 藩邦旅庭之實, 乃享上至嚴之禮。 雖顚沛之際, 苟一分之可辦, 不可廢也。 倘曰難於恒數, 只合貢其微誠。 然或勢有所極難, 則亦必君臣商議, 定其可否, 然後乃可施行。 今大臣之啓未入, 允可之命未下, 有司只聽該司之移牒, 苟援偶然一時之例, 視若我國尋常貢物之比, 自爲付標, 擬將闕貢。 畢獻方物之義, 似不如此, 無乃不可乎,”
선조 64권, 28년(1595 을미/명만력(萬曆)23년) 6월 10일(신해) 2번째기사
오정에 별전에 나아가 주역을 강하다
오정(午正)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주역(周易)》을 강하였다.
특진관 행판돈녕부사 정곤수(鄭崑壽)【위인이 온아하고 인자하여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오직 구제해 주는 데에 마음을 썼다. 또 서적을 몹시 좋아하고 전고(典故)에 밝았으며 고금세가(世家)의 족계(族系)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자손 중에 자기 선대를 몰라 와서 묻는 자까지 있었으니, 세상에서 정모족보(鄭某族譜)라고 일컬었다. 다만 진솔(眞率)할 뿐 위엄이 적었으며 본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없었으니, 어찌 난세의 재상이 될 만하겠는가?】, 지경연사 호조판서 김수(金睟)【도량이 좁고 세밀히 따지는 성격이다. 일찍이 영남의 방백이 되었을 때 변성(邊城)을 쌓고 군정(軍丁)을 군적에 올리는 일로 거듭 인심을 잃어 전 도민이 원망하여 ‘왜구들이 오는 것이 어찌 이리 더딘가,’하였다. 왜구가 이르자 사람들이 다 무너져 흩어졌는데 절제하여 수습하지 못했다. 당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김수를 참수하여 군정(軍情)을 위로하려고까지 했는데 김성일의 구원에 힘입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참찬관 우승지 유영순(柳永詢), 검토관수찬 정경세(鄭經世), 전경(典經)정자 윤의립(尹義立)이 입시하였다.
상이 김수에게 이르기를,
“접대도감의 계사(啓辭)중에 있는 동작진의 나룻배를 숨기라는 일에 대해서 판서는 아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아직 모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심상히 포착(捕捉)하는 일이 아니었다. 지난밤 나는 그 적중에서 정탐자가 왔는가의심했으나 그 곡절을 깊이 추구하지 않았는데, 심유경이 몰래 왜노를 보냈을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하고,
이어 접대도감의 초기(草記)를 제시하였다.
유영순이 아뢰기를,
“정원도 정탐자가 왔는가하고 의심했을 뿐 다른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유경이 왜노 2인을 보내어 정탐시켰다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 왜인이 오다가 붙잡혔는가? 이미 여기에 이르렀다가 돌아가면서 서로 만났는가? 만일 정탐하고 돌아갔다면 반드시 그 간교한 음모를 이룰 것이니, 몹시 통분하다”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초기로써 본다면 이미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한번 만난 것만이 아니고, 평시에도 적이 반드시 번번이 와서 정탐해 가지고 갔을 것이니, 우리나라의 동정을 어느 것인들 모르겠는가?”하니, 유영순이 아뢰기를,
“만일 정탐했다면 반드시 우리나라 사람과 사귀어서 했을 것입니다”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중국옷으로 갈아입으면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옷으로 갈아입으면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다.
우리나라 옷을 입더라도 식별할 길이 없으니, 남대문으로 들어온다 한들 어떻게 알아서 금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유영순이 아뢰기를,
“근간의 제향절차를 신이 차제관(差祭官)에게 들으니,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상사기(常沙器)와 상종자(常鍾子)로 술잔을 대신하여 사용하는데 크고 작은 것이 고르지않을 뿐만 아니라 깨지고 너절하여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저번에 예조의 공사(公事)를 보니 사옹원으로 하여금 기명(器皿)을 구워만들게 한 일이 있었는데, 관원을 추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명은 또한 구워 만들 수 있습니다”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크기가 고르지않고 깨지고 너절하여 미안하다는 것은 과연 영순이 아뢴 것과 같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정결하게 개비(改備)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유영순이 아뢰기를,
“각 능소(陵所) 주변의 촌가에서 빌려쓰는데 솥과 수저까지도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거칠고 불결하여 체통을 이루지못하니 이러한 기명은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이 또한 해조에 말하여 개비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지난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던 때에 능(陵)아래의 주민들은 모두 굶주려 구걸하였고 죽은 사람의 고기로 연명하던 자들이다. 그들에게 기명을 차용하여 제향에 쓰니 그 불결함은 차마 형언하기 어렵다.
양양(洋洋)히 하늘에 계신 선령들도 어찌 흠향하러 내려오겠으며 명명(冥冥)한 가운데 가호하겠는가? 【애통하다】
정곤수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헌관(獻官)으로서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도 직접 보니, 기명등의 물건이 참으로 미안하였는데 지금까지 역시 제기가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상하가 결연히 검소함을 숭상해야 될 때를 만났으니, 상께서 먼저 검소한 덕을 숭상한다면 공경대부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검소함을 숭상할 것이어서 재용이 저절로 넉넉해질 것입니다.
옛날 위문공(衛文公)이 큰 베옷과 큰 명주갓으로 검소의 덕을 밝게 보였으므로 초년에는 혁거(革車)가 30승(乘)이었는데 말년에는 3백승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것은 비용을 절약하고 검소함을 숭상한 결과였습니다.
지금 잔파된 나머지에 온갖 것이 탕진되었고 변두(籩豆)와 기명도 갖추지 못했는데 수라상에 은그릇을 쓰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니 사기그릇으로 대용해야 합니다. 또 반드시 애통해 하는 교서를 여러번 내리고 모든 일을 평소보다 줄인다면 백성이 일푼의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재용이 넉넉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종묘의 제기를 점차로 갖추는 것도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하니,
정경세가 나아가 아뢰기를,
“정곤수가 아뢴 말이 매우 훌륭합니다. 내정(內庭)의 일은 외인이 알기 어려운 바라, 서신이 감히 내간의 의복과 수라【어선(御膳)이다】가 어떠한지는 알지못합니다. 옛사람의 말에 ‘임금님은 거(莒)에 계셨을 때를 잊지말라’2918)고 했습니다. 상께서 관서에 계셨을 때를 명심하신다면 토적(討賊)하고 복수함에 있어 그 생각을 조금도 해이하게 가지지 못하실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상방(尙方)에서 바야흐로 은그릇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외간에 들리는 말이 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그런 일이 있다면 또한 이때에 할 일이 아닙니다”하였다.
윤의립이 아뢰기를,
“환도한 뒤로 연달아 사고가 있어 한번도 종묘에 친히 제사지내지 못하셨으니 더욱 미안합니다.
서늘한 가을을 기다려 친히 제사지내심이 합당할 듯합니다”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종묘를 사가(私家)에 설치했는데 지세가 협착합니다. 친히 제사지내신다면 예절을 이루지 못할 것이어서 거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하였다.
윤의립이 아뢰기를,
“친히 제사지내야 될 것인지의 가부만을 논할 일이지 지세가 좁은 것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하니,
정곤수가 아뢰기를,
“환도한 뒤로 아직까지 친히 제사지내시지않은 것은 과연 온당치 않으니 대행(代行)시키더라도 폐지해선 안됩니다”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역경(易經)》에, 일을 할 때는 처음에 잘 꾀하라고 했으니, 모든 일은 처음에 잘 꾀하지않아선 안됩니다. 행장(行長)이 철병한다면 앞으로 반드시 조처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이때에 대신과 상의하여 미리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행장이 만일 물러가서 통신사 보내기를 강요한다면 우리 나라는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저 적들은 바로 만세토록 불공대천의 원수이니, 이치상 다시 통신사를 보낼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통신사의 설이 이미 나왔는데 지금 만약 통신사를 보낸다면 천지간에 어떻게 다시 얼굴을 들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이러한 일들은 조정이 미리 강구하여 정해야 한다고 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그렇지않다. 이미 봉왜(封倭)를 청했는데 달리 또 무엇이 부끄럽겠는가?”하자,
정경세가 아뢰기를,
“일을 처음에 잘 꾀하지 않았기에 번번이 이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이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봉한 고명(誥命)에 ‘조선 국왕이 너를 위하여 대신 청했다’는 말이 있다. 원수인 왜적을 위하여 총장(竉章)을 청하기까지 했는데, 유독 통신사를 아낄 것인가? 내 뜻에는 그리해선 옳지않을 듯하다.
만일 황제가 칙서를 내려 통신사를 보내게 한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만약 따르지않는다면 황명(皇命)을 어기는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이 점을 두려워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시비를 의논하는 사이에 갑자기 결정하여서 마침내 이러한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아마도 반드시 그렇게 된 까닭이 있을 것이다”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이른바 ‘기미(羈미)’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곤경에 몰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렇게 구차히 미봉(彌縫)하는 계책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 만세 불공대천의 원수는 진실로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국력을 기르며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은 뒷일을 도모하려는 것인데 지금 만약 통신사를 보낸다면 국력을 기르며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왜노가 왕래하면 반드시 폐단을 끼치는 일이 많을 것이니 평시에도 오히려 지탱하기 어려웠는데 하물며 지금 잔파한 지방이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대신의 말을 들으니, 통신사를 보내는 것은 동쪽집의 담을 넘어가 그 집의 처녀를 꾀어내는 짓과 다름이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다는데 이 말이 꼭 맞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길을 위하여 중국조정에 청하여 총장(竉章)을 베풀도록 하기까지 했으니, 어찌 친영(親迎)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청봉(請封)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중국이 고집을 부려 이렇게 말했으니, 통신사 문제는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신사에 대해 예부(禮部)가 성지(聖旨)를 제본(題本)하거나 병부(兵部)가 협박하여 들여보내게 하여 칙서가 내려오게까지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이왕의 일은 다시 말할 것이 없으나 당초에 김응서(金應瑞)를 죄주었던들 지금 또한 할말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처음에 잘 꾀하지 못했으니 무슨 말로 변명하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칙서를 내리지는 않더라도 성지가 병부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이자(移咨)하여 통신사를 보내게 한다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우리에게 잘못이 없다면 할말이 있으나 우리가 이미 먼저 잘못하였으니 병부의 말까지도 필요없이 심유격의 말이라도 거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종전에 말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일도 알 수 있습니다. 왜적이 멀리 우리나라 변방에 떨어져 있으면서 중국에 요구하는데도 중국에서는 뒤질세라 그 요구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심유경(沈惟敬)이 왜의 군영에 선유(宣諭)하고 중국사신이 왕경에 와서 머문 뒤에 행장이 관백에게 면품(面稟)하겠다고 말을 하고 비로소 돌아갔는데, 품하지않고 곧장 중국 사신을 요청했으니 이것은 불경(不敬)한 것이요, 이미 품하고서 지금 와서 말을 바꾸었으니 이것은 간교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힐책해야 마땅한데도 도리어 요구를 들어 주었으니, 중국의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관원이 소서비(小西飛)를 경대(敬待)하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입니다. 사관(舍館)을 처음 정하던 날에 유경이 그 하처의 포진(舖陳)을 다 거두어 보냈고 소서비가 또 거처가 좁다고 화를 내자 유경이 자기가 들었던 집을 내주었으니 소서비가 중국에서도 매우 공경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황신(黃愼)의 장계를 보건대 수길이 크게 기뻐했다고 했으니, 신의 생각에는 봉작을 허용해준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중국조정을 기만한 것을 기뻐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가 통신사를 보내려 할 때 의지(義智)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했으니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때에 통신사를 보낸 것도 또한 실책이었는데 하물며 오늘날이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 통신사는 우리에게 잘못이 없었지만, 지금은 왕장(王章)을 천하의 적에게 베풀었으니 큰 도둑에게 상을 준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의리가 완전히 끊어지게 된 것이다.”하니, 정경세가 아뢰기를,
“수길은 곧 찬탈하고 시해한 도적입니다.
따라서 그때 통신사를 보낸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맞다. 지금 통신사 문제를 병부에서 이자하거나 성지를 내려보내도록 재촉한다면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오늘 강구할 일은 이것일 뿐 다른 것은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병부의 이자만이라면 그래도 사피할 수 있겠으나 성지를 내린다면 대단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에 하나라도 왜적이 중국사신을 억류해 놓고 조선 통신사도 함께 오라고하고 게다가 다시 준엄한 성지가 있다면 이것은 난처한 일이니 염려할 만한 것이다”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적이 만일 ‘그대 나라는 처음부터 전심(專心)으로 사대(事大)해 왔는데 어찌해서 상국의 말을 따르지 않는가?’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우려할 만한 것입니다. 조정이 이에 대해 미리 강구하여 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데도 필경에 통신사를 보낸다면 이것은 원수들에게 놀아나는 것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하니,
유영순이 아뢰기를,
“이런 방법으로 보존할 수 있다해도 오히려 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런 식으로 해서 제대로 보존한 예가 없는 데이겠습니까?”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지난번 포수(砲手)·살수(殺手)의 시재단자(試才單子)에 ‘토적 복수(討賊復讐)’ 4자를 써서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상께서 이렇게 마음을 쓰시는데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잘 본받지 못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도 온당치 않다. 우리나라는 마침내 적과 통호(通好)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말이 어떠한가? 이 적은 불공대천의 원수이나 천만세토록 이웃 나라가 되어 번번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끝내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그 형세가 마침내 반드시 통호하는데 이를 것입니다”하였다.
註2918]거(莒)에 계셨을 때를 잊지말라:무망재거(毋忘在莒)의 풀이로 곤난했던 시절을 잊지말라는 뜻. 제환공(齊桓公)이 공자(公子)시절 왕위계승전에서 공자 규(公子糾)를 편들던 관중(管仲)에게 거(莒)에서 허리띠에 화살을 맞았다. 왕위에 오른 뒤 관중을 재상으로 중용하자 관중이 어느 술자리에서 어려웠던 옛일을 잊지말라고 깨우쳐준 고사.《관자(管子)》권12 소칭(少稱) 33.
○午正, 上御別殿, 講《周易》。 特進官行判敦寧府事鄭崑壽、【爲人溫雅, 過於慈仁, 人無知與不知, 唯以救濟爲心。 且酷愛書籍, 備(請)〔諳〕典故, 古今世家族係, 亦無不通, 至有子孫, 不知其先係而來問者, 世稱鄭某族譜。 但眞率少威重, 素無弘濟之才, 豈足爲亂世之宰輔乎,】知 經筵事戶曹判書金睟、【局量褊狹, 未免察察。 嘗爲嶺南方伯, 以築邊城, 籍軍丁, 重失人心, 一道之人怨之曰: “倭寇來何遲,” 及倭寇至, 人皆潰散, 而莫能節制收拾。 時(郭再佑)〔郭再祐〕, 以義兵起, 至欲斬睟, 以慰軍情, 賴金誠一之救解, 得免於死。】參贊官右承旨柳永詢、檢討官修撰鄭經世、典經正字尹義立入侍。 上謂金睟曰: “接待都監啓辭中, 銅雀藏船事, 判書知之乎,” 對曰: “臣未得知之矣。” 上曰: “蓋非尋常捕捉事也。 去夜予疑其賊中偵探者來, 而未究其曲折。 豈料沈惟敬, 暗送倭奴乎,” 仍以接待都監草記示之。 柳永詢啓曰: “政院亦疑偵探者之來, 而未料其他。” 上曰: “沈惟敬送倭二人偵探云, 甚可駭也。 此倭方來而見捉乎, 旣到此還歸而相遇乎, 若偵探而還歸, 則必遂其奸謀, 痛心痛心。” 金睟曰: “以草記見之, 似是旣來而還歸矣。” 上曰: “非特此一遭爲然, 平時賊必每來偵探而去也。 我國動靜, 何事不知,” 柳永詢曰: “如或偵(採)〔探〕, 必交我國人而爲之。” 金睟曰: “變着唐服, 則誰能知之,” 上曰: “變着唐服, 則無處不行矣。 雖着我國之服, 無由識別, 入于南大門, 豈能知而禁之乎,” 柳永詢曰: “近間祭享節次, 臣聞之于差祭之官, 則宗廟行祭時, 以常沙器、常鍾子, 代爵用之, 非徒大小不均, 破陋未安。 頃見禮曹公事, 有令司饔院, 燔造器皿之事, 至於推考官員。 如此器皿, 亦可燔造也。” 金睟曰: “大小不均, 破陋未安, 果如永詢之所達。 令該曹, 精潔改備, 何如,” 柳永詢曰: “各陵(氐)〔底〕村家, 借而用之, 至於釜鼎、匙筯, 亦莫不然, 麤陋不潔, 不成貌樣, 此等器皿, 極爲未安。 亦言于該曹, 使之改備何如,”【當上年, 人相屠食之日, 陵(氐)〔底〕居人, 率皆飢饉丐乞, 以死人之肉, 爲命者也, 而借用器皿, 以供祭享, 其爲不潔, 有難忍言。 洋洋在天之靈, 亦豈陟降庭止, 而默佑於冥冥之中也, 痛哉!】鄭崑壽進啓曰: “臣以獻官, 行祭于宗廟時, 亦親見之, 器皿等物, 誠爲未安。 方今祭器, 亦嘗不備, 上下固當刻意崇儉之秋, 自上若先崇儉德, 則公卿大夫以至庶人, 莫不崇儉, 而財用自足矣。 昔衛文公, 以大布之衣、大帛之冠, 昭示儉德, 故初年革車三十乘, 而季年至於三百乘云。 此節用崇儉之所致也。 今當殘破之餘, 百物蕩盡, 籩豆器皿, 亦不能備, 則銀器之用於御供者, 固爲不可, 當以沙器代之。 又必屢下哀痛之敎, 而凡事減損於平日, 則民可鎰蒙一分之惠, 而因此亦可足用矣。 如此則宗廟祭器, 次次漸備, 亦何難之有,” 鄭經世進曰: “鄭崑壽啓達之言極好。 內庭之事, 外人所難知。 臣不敢知內間衣服、水刺【御膳也。】之何如, 而古人有言曰: ‘願君(母忌)〔毋忘〕在〈莒〉 之時。’ 自上若以在關西之時爲心, 則其於討賊復讎, 自不敢少弛其思慮也。 臣竊聞尙方, 方造銀器云。 外間所聞之言, 雖未知其皆實, 而若果有之, 則亦非此時所可爲者也。” 尹義立啓曰: “還都以後, 連有事故, 一未得親祀於太廟, 尤爲未安。 待秋涼親祀, 恐爲合當。” 金睟曰: “太廟設於私家, 地勢狹窄。 若親祭, 則不能成禮, 似難行矣。” 尹義立曰: “只論親祀當否, 地勢狹窄, 非所論也。” 鄭崑壽曰: “還都之後, 尙未親祭, 果爲未安。 雖使代行, 亦不可廢也。” 鄭經世曰: “《易》曰: ‘作事謀始。’ 凡事不可不謀始。 行長若或撤兵, 則前頭必多有措處之事。 須及此時, 與大臣商議預定可也。 行賊若退, 而强要通信使, 則我國終將何以處之, 彼賊乃萬世不共戴天之讎, 更遣通信, 決無是理, 而信使之說, 旣已發端。 今若遣使, 則天地間, 更擧何顔, 臣意如此等事, 朝廷當預爲講定。” 上曰: “此則不然。 旣請封倭, 他又何愧,” 鄭經世曰: “事不謀始, 每每如此。 此臣所以云云者也。” 上曰: “封秀吉誥命, 有曰: ‘朝鮮國王, 爲爾代請。’ 爲讎賊至請寵章, 而獨惜通信使乎, 予意恐不宜如此。 萬一, 皇帝降勑, 使送信使, 則我國以何說辭, 若不從, 則是違逆皇命, 亦豈可乎,” 鄭經世曰: “臣以(比)〔此〕爲懼矣。” 上曰: “大槪議論是非間, 忽然定之, 而終至於如此, 疑必有使之然者矣。” 鄭經世曰: “所謂羈縻者, 以我國迫不得已, 爲此苟延之計而已。 其萬世不共之讎, 固未嘗忘也。 我國生聚訓鍊, 將以圖後事, 而今若通信, 則生聚訓鍊, 亦奚用哉, 且倭奴往來, 必多貽弊之事。 在平時猶難支, 況今殘破地方, 何以能支, 臣聞大臣之言, 或以爲: ‘通信使, 無以異於踰東家墻, 而摟其處子。’ 此言政好。” 上曰: “爲秀吉, 請于天朝, 至加寵章, 豈可謂之親迎乎,” 鄭經世曰: “我國不言請封, 而中國之執言如此。 通信一事, 尤不可不愼。” 上曰: “通信使, 或禮部題本、聖旨、或兵部, 迫脅入送, 至於降勑, 則何以爲之,” 鄭經世曰: “已往之事, 不須更言, 而當初若罪金應端, 則今亦可以有言矣。 旣不能謀始, 其何說之辭,” 上曰: “雖不至於降勑, 聖旨若令兵部, 移咨於我國, 使之通信, 則何以答之,” 鄭經世曰: “在我無失, 則可以有言, 而我旣先失, 不必兵部之言, 雖沈遊擊之言, 亦不能拒矣。 臣之所以從前多費辭說者此也。 且中原之事, 亦可知也。 此賊邈在我國邊上, 要索中原, 而中原聽命, 猶恐不及。 沈惟敬宣諭倭營, 天使進駐王京之後, 行長乃以面稟爲辭, 方始入歸。 不稟而徑請天使, 則是不敬也; 旣稟而到今變辭, 則是姦狡也。 中原所當詰責, 而反聽命焉, 中原之事, 可知也已。 聞唐官敬待小西飛。 當舍館初定之日, 惟敬盡撤其下處鋪陳而送之, 小西飛又怒居處之狹窄, 惟敬以其所入之家許之。 小西飛之見敬於中原, 亦必多矣。 觀黃愼狀啓, 秀吉大喜云。 臣以爲非喜許封, 喜其欺瞞天朝也。 往時, 我國將送通信使, 義智聞其言而大悅云, 何以異也, 其時通信使, 亦爲失策, 況今日乎,” 上曰: “其時通信使, 在我無失; 今則王章, 加於天下之賊, 可謂賞大盜也。 義理斁絶矣。” 鄭經世曰: “秀吉, 乃簒弑之賊, 故其時送通信使, 亦以爲失也。” 上曰: “此言則是也。 今之通信一事, 兵部移咨, 或 聖旨催送, 則何以處之, 今日講究者, 只此而已。 他不須言也。” 金睟曰: “只有兵部之咨, 則猶可以辭, 若進於此, 則似甚難矣。” 上曰: “萬分有一, 賊或留天使, 使與朝鮮使臣偕來, 而其間更有聖旨之嚴峻, 則此難處而可慮者也。” 鄭經世曰: “賊若謂, ‘爾國自初專心事大, 而上國之言, 何不聽從,’ 云云, 則此最可虞。 朝廷於此, 不可不預爲講定也。 如此而畢竟送通信使, 則是未免爲讎人之役也。” 柳永詢曰: “用是保存, 猶不可爲。 況未有若是而能保存者乎,” 鄭經世曰: “臣聞頃日砲、殺手試才單(字)〔子〕, 御書 ‘討賊復讎’ 四字而下云。 自上存心如此, 而在下之人, 不能體之, 豈不痛哉,” 上曰: “此言亦未安。 我國終不得不與賊通好。 予言何如, 此賊乃不共之讎, 而千萬世作爲隣國, 每每如是, 則終豈能拒之,” 金睟曰: “其勢終必至於通好矣。”
선조 162권, 36년(1603 계묘/명만력(萬曆)31년) 5월 13일(무진) 6번째기사
교서를 제대로 짓지 않음을 지적하다
영상 이덕형(李德馨)이 정사(呈辭)하니, 상이 비답을 지어 윤허하지않는 뜻으로 하유하도록 하였다.
지제교 홍문관 수찬 이준(李埈)이 비답을 지어 올렸는데, 전교하였다.
“교서(敎書)는 바로 임금의 말이니 모름지기 전아하게 해야 한다.
이 교서를 보니 말을 함부로 만들어 대신을 제환공(齊桓公)의 늙은 말5123)에다 비유하기까지 했으니, 설만과 모욕이 심한 것이다.
예로부터 군주가 대신을 대우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한 경우가 있었겠는가? 중국군사가 많기는 했지만 그 수효가 억(億)이 넘기까지야 했겠으며, 조정의 계책이 전도되기는 했지만 날마다 끝없이 전도되기까지야 했겠는가?
이는 맹랑한 말이다. 이른바 ‘조정의 계책이 전도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일을 가리킨 것인가? 중국의 일을 가리킨 것인가? 중국을 가리킨 것이라면 더욱 미안한 말이다.
‘사람들이 감히 그 뒤에 비평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도 뜻을 따져 본다면, 사기(事機)에 임해 더할나위없이 훌륭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지않았다는 뜻인 듯하다. 만일 그렇다면 마땅히 ‘사람들이 그 뒤에 비평할 수가 없었다’고 해야할 것인데, 그만 ‘감(敢)’이란 한 글자를 넣어놓았기 때문에 마치 제멋대로 했다는 기롱을 내포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또 ‘나라가 멸망하지않게 된 것이 누구의 힘이겠는가?’라는 말도, 영상이 진실로 국가에 큰 공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여러 신하들은 조그만 공도 없다는 것인가? 이상의 말에 대해 나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승정원은 사륜(絲綸)을 맡아 보는 소임이 있으니, 대신에게 내리는 비답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상이 당초에 이 교서를 정원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교서가 정원이 보기에는 어떠한가?’하니, 정원이 회계하기를 ‘신들의 소견에는 별로 미진한 데가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그 말을 달갑지 않게 여겼으므로 이런 분부가 있게 된 것이다】
註5123]제환공(齊桓公)의 늙은 말:춘추시대 관중(管仲)이 제환공을 따라 싸움에 나갔다가 돌아올 적에 길을 잃게 되었는데, 늙은 말을 놓아 뒤를 따라 옴으로써 길을 찾게 되었다고 함. 《한비자(韓非子)》 설림(說林).
○領相李德馨呈辭, 上命製批答, 以諭不允之意, 知製敎弘文館修撰李埈製進, 傳曰: “敎書, 乃王言, 須以典雅爲體。 觀此敎書, 妄爲措語, 比大臣於齊桓之老馬。 其慢褻侮辱甚矣。 自古人君之待大臣, 豈有如此者乎, 天兵雖衆多, 豈至於其數不億; 廟謨雖顚倒, 豈至逐日無窮, 此則孟浪之說。 所謂廟謨顚倒者, 指我國乎, 指天朝乎, 指天朝, 則尤爲未安。 人莫敢議其後云, 推究其意, 似以爲臨機盡善, 人無間言者。 若然, 則當曰人莫能議其後, 而乃下一敢字, 有若譏其專擅者。 國之不亡, 伊誰力乎云, 領相固有大功於國家, 然他群臣, 則更無一毫之力乎, 右等措語, 皆予之所未解也。 政院以絲綸之任, 大臣批答, 所當致察也。”【上初下敎書於政院曰: “敎書於政院所見如何,” 政院回啓曰: “臣等所見, 別無未盡處。” 上不悅, 故有此敎。】
광해 21권, 1년(1609 기유/명만력(萬曆)37년) 10월 26일(갑술) 4번째기사
사직하기를 청한 좌찬성 정인홍이 올린 차자의 내용
의정부 좌찬성 정인홍이 상차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아룁니다. 이달 3일에 내리신 유지를 신이 12일에 병든 몸을 부축받으며 겨우 받들었는데 감격스럽고 황공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지니고 있는 질병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진달하였으므로 전하께 다시 아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으면서 성명께 실정을 숨길 수 없으므로, 아무리 병에 시달리는 처지에 있더라도 한마디 말을 써서 올리고 죽지 않을 수 없으니,
성명께서 가엾게 여기시어 살펴주소서.
신이, 전후 하유하신 것을 삼가 보건대 ‘그대가 오기를 기다려 경연을 열려고 하니 조리하고서 올라오도록 하고 중도에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라’하셨고, 또 ‘음증 양증의 병으로 어찌하여 중도에 머무르게 되었는가?
하늘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편안한 마음으로 조리하고 질병을 참고 올라오라’고 하시고 끝내 체면시키는 윤음을 내리지 않으셨는데, 신은 더욱 불안하여 두려움을 견딜 수 없을 뿐더러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아무리 형편없는 인물이지만 충의(忠義)의 천성을 지니고 있는데 어떻게 더없이 은혜를 주시는 이때에 은둔할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삼가 스스로 반성해보건대, 어떠한 학술을 지녔기에 성명께서 고문하시는 데에 대비할 수 있으며, 어떠한 도덕을 지녔기에 성명께서 맡겨주신 책임을 감당할 수 있으며, 어떠한 재국을 지녔기에 국가의 위급함을 부지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살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형편없는 몸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조정에 뛰어난 인재로서 훌륭한 의논을 할 수 있는 선비들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번 경연을 열어 그들과 강구해 보시고 널리 자문하신다면 전하의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고 공정한 도리가 날로 펴지며 모든 일이 날로 잘되고 태평시대가 날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처럼 하지 않으시고 신에게만 기대하시며 가까운 곳을 버려두고 먼 곳에서 구하려고 하시니, 대소 관원으로서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이 서로 맥이 풀리고 잘못된 처사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비난할 뿐만 아니라 신도 무슨 마음으로 스스로 헤아리지않고 늙고 추한 모습으로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회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도에서 돌아가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고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 길을 나서는 것도 신이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신은 듣건대, 원고(袁固)가 80세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나가자 공손홍(公孫弘)이 곁눈질로 보았다고 합니다.
공손홍이 곁눈질을 한 것은 자기보다 훌륭한 것을 시기하고 총애받는 것을 질투한 것이 아니라, 늙은 나이에 출사하는 것이 적합하지않은 것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은택을 받기 위하여 천리길을 온 것에 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신의 나이가 원고와 별 차이가 없고 무식한 것이 또한 심한데 길을 떠나 도성으로 들어가서 대신들의 반열에 버젓이 얼굴을 들고 서게 된다면 젊은 관료들이 서로 비평할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흘겨볼 것이니, 어찌 공손홍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이러한 것은 실지로 신 자신이 염치없는 짓을 하여 멸시를 받게 된 것인데 어떻게 사람들이 추하게 대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의 성품이 소활하고 고집스러우며 재능이 기용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말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은 전하께서 상세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신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물러가는 것을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참으로 성상의 뜻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점이 신의 마음에 부끄럽고 스스로 망설이는 첫째 사항입니다.
신은 듣건대,《예기(禮記)》에 ‘자신이 임금을 섬길 수 있는지의 여부를 헤아려본 뒤에 조정에 들어가 벼슬한다’고 하였는데 신이 스스로 헤아려보기를 분명히 하였고,《역경(易經)》에 ‘자신이 한 일을 살펴보아 진퇴를 결정한다’고 하였는데 신이 자신의 한 일을 살펴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스스로 헤아려보기를 분명히 하였고 자신이 한 일을 살펴본 지 오래되었는데도 또 애써 나가려고 한다면, 신 역시 한 사람의 비천한 자이고 은택을 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신 스스로 평소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 이러한 인물을 기용하여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고 시대에 어떤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경우 여러 사람들의 비난이 있지 않더라도 신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신이 몹시 쇠약하고 병이 심한 것에 대해서 시골 사람들이 모두 알고 사대부와 온 나라 사람이 다 알고 있으며 의관이 자세히 살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길을 떠나 중도에서 죽거나 서울에서 죽어, 살아서 떠나갔다가 죽어서 돌아오게 된다면 한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추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천하 후세의 사람들도 신의 이름에 대해서 매도하며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평생에 수련한 학문이 이에 이르러 모두 허사로 돌아갈 것인데 신 스스로 애석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전하께서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정 신이 매우 노쇠하지 않았고 질병도 없으며 재질이 성명의 시대에 얼마쯤 도움이 될 수 있는데도 여러번 조정의 명을 거역하여 성상의 은총을 저버리고 부귀를 싫어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참으로 인정에 근사하지 않은 것으로서 전하께서도 의심하실 것입니다.
지금 만약 병든 몸으로 억지로 길을 떠나 죽음을 초래할 경우 전하께서 소명에 응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시더라도 신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스스로 망설이는 둘째 사항입니다.
신이 본직을 체면시켜 주시기를 청하는데 있어서 작년부터 지금까지 소장을 올린 것이 10여번으로서 옛날에 20번 올린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데 아직 윤음을 받지 못했으니, 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전하께서 유일(遺逸)의 인재를 수용하는 것이 바로 조정의 훌륭한 일이기 때문에 우선 곽외(郭隗)로부터 시작한 것처럼251) 하시어 풍성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겠으며, 어쩌면 신의 의향이 정직하고 지조가 올바르다고 하여 다른 것은 묻지않고 단지 신의 마음가짐만을 가상하게 여기시어, 성인이 국가가 보존하고 망하는데 있어서 군자를 먼저하고 소인을 나중에 하는 뜻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러한 것이라면 조정에도 그러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리를 당했을 때 몹시 걱정하며 정성을 다해 울부짖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하였으나 난리가 끝난 뒤에 현직에 오르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 신이 몇몇 사람을 알고 있는데, 이들을 선발하여 위임할 경우 인망(人望)을 수습할 수 있는 것으로서 노쇠하여 쓸모없는 신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잘 처리해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생각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이 신이 스스로 망설이는 세째 사항입니다.
신이 듣건대, 전하께서 지난번에 편당을 감싸주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는 분부를 내리시어 정원을 배척하셨다고 하는데, 신의 생각에 한편으로는 전하에 대해서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겨지고 한편으로는 전하를 위해서 걱정스러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신이 편당이란 말에 대해서 설명을 드려볼까 합니다. 대체로 편당이란 것은 필시 소인들만이 갖는 것이 아니라 군자들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소인들이 군자를 모함하려고 할 때 억지로 지적하여 명목을 붙여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을 삼기 때문에 편당이란 말은 태평시대에는 들을 수 없고 항상 어지러운 시대에 발생하는데 과거 역사를 상고해보면 손바닥을 보듯이 환히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지난번 조정에 있을 때 관료들이 3, 4개의 당파로 분열되어 서로 배척하고 모함하는 풍조가 조성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신은 실지로 전하께서 이러한 습관을 매우 증오하시어 이번에 엄한 분부를 내리신 것도 이런 습관을 제거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이 매우 다행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오랜 세월을 거쳐 고질화된 습관을 제거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군자와 소인을 환히 알고 분명히 선택하여 호오(好惡)와 취사(取舍)에 있어서 매우 엄정하게 하며, 한번 직임을 맡긴 이상 의심하거나 교체시키지 말고 1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한 뒤에야 그른 풍습을 개혁시킬 수 있고 선비들의 풍조를 변화시킬 수 있어서 편당이 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하지않을 경우 옳은 사람과 그른 사람이 서로 현혹하고 사악한 자와 정직한 자가 서로 싸우게 되어 사악한 자를 정직한 사람으로, 소인을 군자로 인식하고 끝내는 역적을 자식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신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천하의 사물(事物)이 유(類)로 모이고 무리로 나누어지는데 있어서 길흉(吉凶)이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군자는 군자끼리 무리가 되고 소인은 소인끼리 무리가 되어 같은 유로 모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군자는 도리로써 모이기 때문에 길하고 소인은 이익으로 모이기 때문에 흉한 것인데, 이것 역시 변할 수 없는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엄하게 하여 멀리하지않을 수 없는 것은 소인의 무리이고 친애하여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군자의 무리인 것입니다.《역경(易經)》의 태괘(泰卦) 초구효사(初九爻辭)에 ‘띠뿌리가 연결되듯하여 무리로 나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세 사람의 군자가 윗자리로 올라가 화평한 상을 이루는 것으로서 편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쾌괘(夬卦)의 단사(彖辭)에 ‘임금의 조정에서 호령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섯 사람의 군자가 한 사람의 소인을 물리치는 것이 결단을 내리는 상이 되는 것으로서 역시 편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임금은 군자의 무리에 대해서 서로 교제하고 성의로 신임하여 같은 편당인 것처럼 한 뒤에야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송나라 신하인 주희(朱熹)는 ‘편당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또 자기 임금으로 하여금 군자의 편당이 되게 하고자 한 것이 바로 때문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임금은 군자들이 편당을 갖지 않을까 염려하고 또한 자신도 그들의 편당에 들어가지 못할까 염려했습니다.
예컨대 주즙(舟楫)이 되고 염매(鹽梅)가 되라고하여 상고종(商高宗)은 부열(傅說)의 편당이 되었고, 내외에 정사를 펴게하여 주선왕(周宣王)은 방숙(方叔)·소호(召虎)·윤길보(尹吉甫)의 편당이 되었고, 배운 뒤에 신하로 삼은 것은 제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의 편당이 된 것이고, 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고 한 것은 한소열(漢昭烈)이 제갈양의 편당이 된 것인데, 이들이 이러했기때문에 사업을 성취하여 천고에 빛나게 되고 후대의 임금들이 따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세(末世)의 임금들은 가노(家奴)를 친애한 자가 있고 척리(戚里)들에게 편혹된 자도 있으며 간흉들의 명령에 따른 자도 있었는데, 이들도 편당이 있었으나 같은 편이 되는 즉시 난망(亂亡)의 일이 뒤따랐습니다.
진실로 만약 임금이 소인을 편애하는 마음으로 군자를 편애한다면 왕망(王莾)이 도성을 옮기고 왕위를 차지한 일, 조고(趙高)가 찬탈한 일, 변방의 오랑캐가 침범하는 일들이 알지못하는 사이에 사라질 것이고 술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절충하여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편당해서 안 되는 것은 소인들이고 편당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군자들인데 임금도 어찌 편당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전대 임금들이 잘하고 잘못한 것을 전감(前鑑)으로 삼으시어 갑자기 편당이란 명목으로 관료들을 배척하지 마소서.
그리고 자신의 덕을 밝히시어 인물을 알아보시는 데 있어서 분명히 하시고 관료를 선발하시는데 있어서도 세심하게 하시며, 호오(好惡)와 취사(取舍)를 엄하게 하소서.
이리하여 훌륭한 보필의 신하를 얻어 자신의 편당으로 삼으실 것을 생각하신다면 하늘이 반드시 세상에 명성을 떨칠 인재를 내보내어 전하와 편당이 되어서 함께 태평시대를 이루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물을 꿈에 점지해주고 때로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할 것인데 어찌 그러한 사람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신은 쓸모없는 인물이었는데 전하께서 잘못아시고 수용하여 불러주심을 받아 제격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오래 있었으나 산과 바다 같은 은덕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을 뿐더러 죄가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데 우매한 소견을 아뢰면서 편당을 지지하는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주위를 돌아보며 주저하면서 스스로 망설이는 네째 사항입니다.
이상의 망설이는 사항이 앞을 가로막고 질병이 뒤에서 끌어당기는 듯하여 물러갈 수도 없고 길을 나설 수도 없기에 다시 답답하고 절박한 사정에 대해서 모두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신은 듣건대, 병을 조리하는 방법은 마음을 편안히 가져야 하는 것으로서 마음이 편안하면 기운이 순조롭고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순조로우면 음식을 잘 먹게되어 병이 나아지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온갖 병을 치료하는 묘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은 직명을 아직 지니고 있으면서 오래도록 소명에 응하지 못했기에 산을 지고 있는 듯하여 마음이 늘 걱정스러워서 자다가 꿈속에서도 놀라는데 마음을 편안히 가지려고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또 의관이 왔는데 전하께서 분부하시기를 ‘지금 가더라도 그의 곁을 떠나지 말고 간호하여 그의 병이 낫기를 기다려 함께 올라오도록 하라’고 하셨다하니, 신은 더욱 놀랍고 황송하여 잠을 잘 수 없고 입맛도 없는데 아무리 안심하려고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의 직명을 체면시키고 의관이 오래 머무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시더라도 신자의 분의에 있어 어떠한 심정이겠습니까? 신이 전하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전하를 한번 뵙고 시골집으로 돌아가 죽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어떻게 직명이 있고 없는 것으로 떠나거나 떠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병에 써야 할 약이 있는 것이라면 병이 낫고 심해지는 것이 어찌 의관이 오래 머물며 간호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의 직명을 체면시키고 내의를 소환하신다면 신의 심기가 화평해지고 침과 약으로 병을 치료하여 빠른 시일에 회복되어서 길을 떠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신은 속병이 발생하여 점점 고질이 될 것이니, 직명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내의가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마치 기름을 뿌리며 불을 끄려하고 불을 때면서 물이 끓는 것을 멈추게 하려는 격으로서 병이 회복될 날이 없고 길을 떠날 가망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할 경우 신이 평소의 소원을 영원히 저버릴 뿐만 아니라 마침내 성명께서 수용하여 불러주신 의도가 허사로 돌아갈 것이기에 신은 실로 안타깝습니다. 전하께서 유념해 주소서”하였는데,
답하기를,
“나는 날마다 경이 나를 버리지않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또 사직하는 소장을 보게 되어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종이를 가득 채운 충언이 모두가 나의 혼매한 것을 깨우쳐주고 인도해주는 말들이기에 내가 유념하여 가슴에 새겨둘 것이다.
하지만 나의 조정 신하들이 어찌 경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또한 공손홍과 같은 사람이 있을까 염려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의 병이 낫지 않았으니 의관이 경의 곁을 떠날 수 없는 것이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경이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체직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참으로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평생에 한번 만나보려고 하니, 멀리 떠날 생각을 갖지 말고 조리하고 올라오도록 하라”하였다.
【정인홍이 왕의 편당을 증오하는 유지가 이이첨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이런 논의를 하여 지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난리를 당하여 매우 걱정하고 정성을 다해 울부짖었다는 것은 바로 이이첨 등이 유영경(柳永慶)을 공척한 일을 지적한 것이다】
註251]곽외(郭隗)로부터 시작한 것처럼:전국(戰國)때 연소왕(燕昭王)이 자신을 낮추고 예물을 후하게하여 어진 선비를 초빙하기 위하여 곽외에게 묻자, 곽외가 말하기를 “왕께서 어진 선비를 초빙하시는데 있어 우선 곽외로부터 시작하신다면 곽외보다 훌륭한 사람이 천리길을 멀다 하겠습니까?”하였다. 《사기(史記)》권34 연세가(燕世家).
○(伏以月初三日諭旨, 臣以十二日力疾扶曳僅僅祗受, 感激驚惶, 罔知所爲。 臣所帶疾病, 陳達已盡, 不敢更塵天日之鑑也。 竊念臣僅有朝夕之息, 不容有隱情於聖明之下, 雖在病困中, 不得不强就紙筆, 一言而死也。 惟聖明少垂憐察焉。 臣伏見前後下諭, 有曰“將待以開筵, 須調理上來, 毋作中途返歸之計”, 又曰“陰陽之寇, 胡泥於中途, 天不欲使吾民蒙惠耶, 安心調理, 力疾上來”, 而終閟遞免之音。 臣尤不勝蹙然驚懼, 無所容措。 臣雖無狀, 蜂蟻之性亦得於天, 曷嘗有遁思於不世恩遇之日也, 第以竊自環顧, 有何學術可以備聖明之顧問, 有何道德可以當聖明之責任, 有何才局可以扶國家之急、活蒼生之命, 而殿下之望於臣者, 有非無狀之身所敢當者, 而滿朝髦俊訏謨宏議之士, 不爲不多。 殿下試爲之開筵講究, 廣加諮訪, 則聖學日新, 公道日伸, 庶績日熙, 治平日臻矣。 殿下不此而望於臣, 舍近而求諸遠, 不獨大小近侍之人相與解體而竊議其謬, 臣亦何心, 曾不自量, 敢以耄荒老醜之物, 偃然當之而不自廻避也, 中途而返, 非臣之志也; 裂裳裹足而行, 亦非臣之所敢也。)議政府左贊成鄭仁弘上箚辭職。 略曰: 臣聞袁固年八十而被徵, 公孫弘側目視之。 弘之側目也, 未必是忌克而妬寵也, 蓋未必不曰不自量于/其衰朽不合仕進, 千里干澤而來也。 今臣牛馬之齒, 與袁固多少無幾, 空空又甚, 而行入國門, 靦面鵷鷺之班, 則黑頭時流必相譏議而衆目睽睽, 豈獨公孫子一人而已, 是臣實自冒昧而取笑侮, 何怪人之鄙薄也, (況臣之迃疎偏滯, 才不適於施用, 言不合於時宜, 殿下之所詳知。 而眷眷至此, 不許其退, 臣實不知聖意之所在。 此臣心實羞愧, 又自疑外者一也。 臣聞“《記》曰“量而後入”, 臣量之審矣; 《易》曰“觀其生進退”, 臣觀其生久矣。 自量已審, 觀生旣久, 猶復黽勉而行, 臣亦一鄙夫耳, 干澤人耳。 不獨臣自負平生之志, 殿下用此等人物, 何補於國, 何益於時, 此不待衆人之非議而自不安於心。 況臣之衰朽已甚, 癃病已甚, 鄕曲之所共見, 搢紳之所共聞, 國人之所共知, 醫官之所審視也。 若復强勢前進, 或殞於中途, 或斃都下, 生待行而死歸, 則不惟一時之人皆見唾鄙, 天下後世亦將罵名而不饒。 平生所學, 至此而掃地盡矣, 臣雖不自惜, 殿下豈得不爲之悶然也, 誠使臣不甚衰朽, 又無疾病, 才地亦可少補於明時, 而屢違朝命, 孤恩寵而厭富貴, 則是誠大不近於人情, 殿下固亦疑之。 今若抱病强進, 徒取一死而已, 則殿下雖許其趨命, 亦未必不疑其心。 此臣深自疑外者二也。) 臣之請遞本職, 自上年以至于今, 章疏十數上, 與古之二十上者不相遠, 而迄未蒙一兪之音, 臣反覆思惟, 莫知其由。 殿下豈不以收用遺才寔朝廷美事, 姑從隗始, 樹之風聲也, 豈不以臣所向者正, 所守者義, 不問其餘, 只賞其心, 以示聖人存亡先後之意也, 若果如此, 則朝廷之上, 亦不無其人。 臨難深憂, 竭誠號咷, 實先於同人, 而未顯於後笑者, 臣知若干人。 若得闡幽而委信, 則亦可以收係人望, 不必待衰朽無用一介臣然後可也。 聖意所在, 臣不敢知, 此臣尤自疑外者三也。又曰臣竊聞殿下頃日以不免護黨之習斥政院, 以臣愚見, 一以爲殿下幸, 一以爲殿下慮也。 臣請就黨之一字而究其說焉。 夫黨者, 非必小人有之, 君子亦所不免也。 小人將陷君子而强斥爲名, 以爲打盡之一網。 故黨之說, 未聞於治平之世, 恒起於衰亂之時, 考之前史, 明如視掌也。 嘗見搢紳分裂, 三四其黨, 互爲排軋, 轉成傾險之風。 臣固知殿下深惡此習, 而嚴威之敎亦出於欲去之意。 臣之深以爲幸者, 此也。 然此不足以去積久沈痼之習。 必知之明, 擇之審, 好惡取舍極其嚴, 勿疑勿貳, 持以十年之久, 然後習非可革, 士風可變, 而群黨自去矣。 不然, 是非相眩, 邪正相戰, 將不免認邪爲正, 認小人爲君子, 終至於認賊爲子者多矣。 臣之不能不爲慮者, 此也。 答曰: “予日望卿不我棄也, 又見辭章, 不勝缺然。 滿紙忠言, 無非啓發昏蔽、開示指南之說, 予當留省而佩服。 但予廷臣, 寧有議卿之人, 而至有公孫子之虞耶, 卿病未差, 醫不可離, 國是靡定, 卿不可歸, 何以遞職, 且予誠不自量, 平生思欲一見, 毋作遐心, 調理勉來。” 【仁弘疑王惡黨之旨, 或及於爾瞻, 爲此論以持之。 且所謂臨亂深憂、謁誠號咷者, 乃指李爾瞻等攻柳永慶事也。】 (臣嘗聞孔子曰: “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 君子與君子爲群, 小人與小人爲群, 以類而群聚, 自然之理也。 君子仁道而吉, 小人仁利而凶, 此亦不易之理也。 然不可不威而遠之者, 小人之黨也; 不可不親而近之者, 君子之黨也。 《易》泰之初九曰: “拔茅茹以其彙征”, 三君子上交而成泰, 固可謂之黨也。 夬之彖曰: “揚于王庭”, 五君子決一小人而爲夬, 亦不可不謂之黨也。 國君於君子之黨, 上下交而誠意孚, 有若黨者, 然後方可以有爲。 故宋臣朱熹自謂其不免爲黨, 又欲使其君亦爲君子之黨者, 正爲此也。 故人主唯恐君子之不黨, 又當恐其身不得入於其黨。 舟楫、鹽梅, 而商高宗爲傅說之黨; 敷政內外, 而周宣王爲方、召、吉甫之黨; 學而後臣之, 齊桓之黨管仲也; 猶魚之有水, 昭烈之黨諸葛也。 夫如是, 故其事業成就輝映千古而不可及也。 衰末之君, 或私昵於家奴, 或偏感/惑於戚里, 或聽命於奸兇, 此亦黨也, 纔與爲黨, 而亂亡隨至。 誠使以所黨於小人者黨君子, 則賊莽之移鼎當塗, 高之篡奪, 裔戎之呑噬, 潛消於不見中, 而折衝於尊俎間矣。 故不可黨者小人也, 不可不黨者君子也, 人君亦豈得無黨也, 今殿下鑑前代得失之迹, 無遽以黨字斥搢紳。 而自昭明德, 知之必欲其明, 擇之必求其審, 好惡取舍必得其嚴。 而思得良弼以爲之黨, 則天必生名世之人, 以與殿下爲黨, 共濟治平, 或賚於夢卜, 或隕之自天, 何患不得其人也, 如臣無用之物, 謬被收召, 久忝匪據, 涓埃無補於山海, 罪戾不容於天地。 而妄效愚見, 言涉右黨, 此臣環顧廻遲, 深自疑外者四也。 疑外阻於前, 疾病掣於後, 不能退, 不能遂, 敢復以悶迫之情, 冒萬死傾倒焉。 臣聞凡調病之術, 要在平心, 心平則氣和。 心平而氣和, 則食自進而病可已, 此乃百疾之妙劑也。 臣職名猶在, 而久未趨命, 如負丘山, 心常憂悶, 夢寐猶驚, 雖欲平心得乎, 今又醫來, 聞有“雖今上去, 不離看護, 待其病差, 一時上來”之敎云。 臣尤自驚惶, 目不得眠, 口不思食, 雖欲安心得乎, 殿下雖不以職名之仍遞、醫官之久留爲意, 在臣子分義, 何以爲心, 臣受殿下厚恩, 常願竊仰天顔, 歸死田廬, 則曷嘗以職名之有無爲行止也, 如有對病之藥, 宿病之差劇, 亦豈係於醫官看護之久速也, 伏願殿下命遞職名, 召還內醫, 則臣庶得平心, 以召和氣, 鍼藥以攻疾病, 時月之間, 宜召差復之望, 而登途自當有日矣。 不然, 臣心病必作, 轉至沈痼, 職名之仍帶、內醫之久留, 如投膏以救火、揚湯以止沸, 差復無期, 登途無望。 不獨臣永負平素之願, 終亦虛聖明收召之意, 臣實悶焉。 惟殿下留意焉。)
광해 26권, 2년(1610 경술/명만력(萬曆)38년) 3월 23일(기해) 2번째기사
예조가 생모 추숭에 대해 반대를 건의하였으나 불허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이 일은 본래 마땅히 의논 처리해야 할 일이고 신들도 또한 일찍이 사적으로 강구하였으나 감히 여쭙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성교(聖敎)는 실로 정(情)과 예(禮)에 말 수 없는 바입니다.
다만 그 위호(位號)의 절목은 합당함을 참작하여 중도(中道)를 얻는 것이 매우 용이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높이면 제도에 넘게 되니, 아마도 《춘추》에 왕후와 똑같이 했다는 비방을 면하지못할 것이고, 너무 가볍게 하면 사은(私恩)에 소략하여 성상의 추효(追孝)하는 정(情)을 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고례(古禮)를 따르려고 하니, 중자(仲子)의 사당300)을 이룬 것과 성풍(成風)의 수의(隧衣)301)를 보낸 일이 모두《춘추》에서도 비방을 받았고 선유(先儒)들도 실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고사(古事)를 따르려고 하니,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여러 임금들이 모두 각각 추숭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하게 되었다는 말에 구애되어 성인이 예를 제정한 본뜻에 위배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강목(綱目)》에 쓸 때에 모두 폄하하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삼대의 정치를 본받으려는 훌륭한 마음으로 장차 위로 성인의 예법을 따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아래로 한나라와 당나라의 잘못된 규정을 따르시겠습니까? 신들이 예를 집행하는 관직에 있으니, 삼대의 법이 아니면 본받지않는 것은 실로 평일에 배운 바이니, 감히 다시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의인 왕후께서 아들이 없으시므로 선왕(先王)께 건의하여 여러 아들 중에 전하를 택하여 사왕(嗣王)으로 삼아 세자로 세웠으니, 의인왕후는 이미 전하의 어머니이십니다.
전하께서 사친(私親)에게는 자연 복(服)을 강등하는 예가 있으니, 일체(一體)로 높일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공빈(恭嬪)이 선조(先朝)에게는 이미 맨 앞의 후궁이고 또 성상을 탄생시킨 덕이 있으니, 그 사체(事體)가 실로 송(宋)나라의 이신비(李宸妃)302)와 서로 같으나 다만 유황후(劉皇后)가 몰래 인종(仁宗)을 기른 것은 또 의인왕후가 전하에게 있어 위로 천자에게 고하여 광명정대한 종통(宗統)의 세자로 정한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신들이 또 상고해보건대, 명나라 효종황제가 생모인 귀비(貴妃) 기씨(紀氏)를 추존하여 효목황후(孝穆皇后)로 삼고 조서하기를 ‘효목황후는 나를 낳은 생모이나, 황태후라 칭하는데 그치고 봉자전(奉慈殿)에 별도로 제사지내라’하고는, 인하여 여러 신하들과 그 가부를 의논하니, 예부상서(禮部尙書) 오관(吳寬)이 아뢰기를 ‘노송(魯頌)에 강원(姜嫄)303)의 깊숙한 사당[閟宮]이라 한 것은 예에 별도로 사당을 세운 제도이고 한나라, 당나라도 또한 그러하였는데, 송나라에 이르러 병부(竝,)한 자가 있었으니, 그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여러 임금의 계실(繼室)로서 살아서 배위가 된 자이니, 후일 자손들이 추숭하는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이신비가 별세하자 인종이 몹시 애통하여 이에 추존하고 부제(祔祭)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후세에 본받을 만한 것이겠습니까?’하니, 효종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비답하기를 ‘배향(配享)하는 중대한 일은 예에 마땅히 상세히 하고 삼가야 한다. 경들이 고전(古典)과 조종(祖宗)의 묘제(廟制)를 이미 명백하게 상고하였으니, 모두 의논에 준하여 사당을 세워 봉향하고 인하여 황태후라 칭하여 어버이 존숭하는 뜻을 펴게 하고 후세 자손들은 준수하고 숭봉하여 영구한 제도로 삼으라’하니, 이에 중외(中外)가 화합하여 예에 맞는다고 하였습니다.
명나라에서 올바른 가법(家法)을 시행한 자는 효종이 제일이고 홍치(弘治) 304)연간의 훌륭한 정치와 교화는 한나라와 당나라 때보다 월등하였으니, 이는 바로 시왕(時王)의 제도이고 사례(事例)도 동일하니, 이를 근거로 의논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다만 위호(位號)는 사적으로 국중(國中)에서만 칭하고 국경 밖으로 나가지않게 한다는 고인(古人)의 말이 있으나, 우리나라는 위로 천자가 있어 형세가 명나라와는 다릅니다.
신들의 뜻은 본래의 위호(位號)를 그대로 둔다면 추숭하는 실상이 없을 듯하고, 위로 왕후와 똑같이 한다면 반드시 둘을 높였다는 혐의를 끼칠 것입니다. 따라서 강등(降等)하는 의의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존하였을 때에는 비(妃)라 칭하고 별세하면 왕후라 칭하는 것은 이미 조종조에서 이루어 놓은 준례입니다만, 고전(古典)을 상고해보건대 왕비를 왕후로 올렸다고 하였으니, 왕후와 왕비는 등급이 다소 다릅니다. 지금 마땅히 추존하여 왕비를 삼아 다소 높이는 분별을 보여주고 휘호를 더하여 별묘(別廟)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지극히 높이는 것입니다.
그 밖의 절목(節目)은 아울러 홍치연간 봉자전(奉慈殿)의 고사대로 하면 성상께서 종통(宗統)을 중히 여기고 본생(本生)에 보답하는 도리에 양쪽 다 지극히 아름다울 것이고 정(情)과 예(禮)에도 참작한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신들은 모두 용렬한 자들로서 이 대례(大禮)를 당하여 구구한 소견이 이 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모두가 그렇다고 하므로 황공스럽게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아뢴 뜻이 명백하여 내가 분명하게 알았다.
부묘에 관하여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우면 천천히 후일을 기다려 숙의해서 처리하라. 다만 왕비라는 칭호를 올리는 것은 추숭하는 법에 흠이 될 듯하고 또 명나라의 효종황제도 이미 소생모인 귀비 기씨(紀氏)를 효목황태후(孝穆皇太后)로 높였으니, 지금 또한 왕후의 호를 올리고 별묘(別廟)를 세워 책보(冊寶)를 올리고 의식을 갖추어 능(陵)을 봉하는 등의 절목(節目)을 다시 상세히 의논하여 속히 거행하라”하였다.
註300]중자(仲子)의 사당:중자는 춘추시대 혜공(惠公)의 부인이고 환공(桓公)의 어머니이다. 은공(隱公)이 환공을 대신하여 집정(執政)하였으므로 환공의 어머니인 중자를 존숭하기 위하여 별도로 사당을 세운 일이 있다.《춘추(春秋)》권1 은공(隱公)5년.註301]성풍(成風)의 수의(隧衣):성풍은 춘추시대 희공(僖公)의 어머니이다. 성풍은 문공(文公)4년에 죽었고 희공은 죽은 지 이미 10년이 되었는데, 진(秦)나라 사람이 문공(文公)9년에 이르러 희공과 성풍의 수의를 보낸 고사가 있다.《춘추(春秋)》권8 문공(文公)10년.註302]이신비(李宸妃):진종의 후궁이며 인종의 생모.註303]강원(姜嫄):제곡(帝嚳)의 비(妃)이고 후직(后稷)의 모(母)이다.註304]홍치(弘治):명효종의 연호.
○禮曹啓曰: “臣等伏以此事, 本當有議處之擧, 臣等亦嘗私講, 而未敢仰稟。 今者聖敎實情禮之所不可已。 第其位號節目, 酌宜得中, 甚不容易。 過隆則歸於踰制, 恐不免《春秋》竝后之譏; 太輕則略於私恩, 無以伸聖上追孝之情。 今欲遵倣古禮, 則考仲子之宮, 歸成風之隧, 皆見譏於《春秋》, 而先儒以爲越禮。 今欲遵倣古事, 則漢、唐、宋諸君, 俱各有追崇之擧, 此皆拘於‘母以子貴’之說, 而不覺有違於聖人制禮之本意。 朱子書於《綱目》, 皆著貶辭。 以聖上治法三代之盛心, 其將上遵聖人之制禮乎, 抑將下襲漢、唐之謬規乎, 臣等待罪執禮之官, 非三代不法, 是實平日所學, 不敢更有他議也。 況懿仁王后無子, 贊議先王, 擇於諸子中, 取殿下爲嗣, 立爲儲宮, 懿仁王后旣是殿下之母。 則殿下之於私親, 自有降服之禮, 其不可尊之以一體明矣。 然而恭殯/嬪於先朝, 旣位冠後宮, 又有誕育聖躬之德, 其事體實與宋之李宸妃相似, 而但劉皇后之潛養仁宗, 又不如懿仁王后之於殿下, 上告天子定爲宗儲之光明正大。 而臣等又考皇朝孝宗皇帝追尊生母貴妃紀氏爲孝穆皇后, 詔曰: ‘孝穆, 朕身生母, 止稱爲皇太后, 而別祀於奉慈親/殿’, 仍與群臣議其可否, 禮部尙書吳寬上奏: ‘《魯頌》姜嫄閟宮, 於禮爲別廟之制, 漢、唐亦然, 至宋乃有竝祔者, 其禮已謬。 然皆諸帝繼室, 生而爲配者, 非後子孫追尊之比。 惟李宸妃之歿, 仁宗傷痛, 乃用追尊而祔祭, 此豈後世所當法哉,’ 奏上, 孝宗嘉納, 御批曰: ‘配享重事, 禮當詳愼, 而卿等稽考古典及祖宗廟制已明白, 都准議建廟奉享, 仍稱皇太后, 以伸尊親之意, 後世子孫遵守崇奉, 永爲定制。’ 於是中外翕然稱得禮云云。 皇朝家法之正, 孝宗爲最, 弘治治化之盛, 高出漢、唐, 此正時王之制, 而事例又同, 似當據此爲議。 而惟其位號, 則古人有私稱國中, 取/不加境外之說, 我國則上有天子, 而勢與天朝有異。 臣等之意, 只仍本位, 則似無追崇之實, 上竝母后, 則必貽貳尊之嫌, 又無降殺之義。 我國生時則稱妃, 上仙則稱后, 旣有祖宗成例。 考之古典, 以妃陞后, 后之與妃, 等級稍別。 今宜追尊爲妃, 以示稍隆之別, 而加以徽號, 別廟享祀, 極其隆盛。 其他節目, 竝依弘治奉慈殿故事, 則其於聖上重宗統、報本生之道, 兩盡其美, 而情文庶有參酌之宜矣。 臣等俱以譾劣, 當此大禮, 區區所見, 此外無他。 議于大臣, 則皆以爲然, 惶恐敢啓。” 答曰: “啓意明白, 予曉然具悉。 祔廟如難輕議, 則徐俟後日, 熟議以處。 但只上妃號, 似欠於追崇之典, 而且皇朝孝宗皇帝, 旣以所生母貴妃紀氏, 尊爲孝穆皇太后, 今亦上以后號, 建別廟進冊寶, 備儀封陵等項節目, 更加詳議, 急速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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