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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오해와 이해
-퇴옹성철 오매일여론의 오류를 바로잡음
무심선원 김태완 씀.
※ 이하의 문장은 위 출처의 글 중 중요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이런저런 탐색에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대혜의 「서장」이나 고봉의 「선요」에 나오는 오매일여는 자나깨나 한결같은 경계가 있다고 여기며 경계에서 법을 찾으려는 삿된 견해를 부수어 주는 방편이지, 실제로 거쳐가야 할 오매일여라는 경계가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조계종에서 발행한 「간화선」의 오매일여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가야 할 삼매의 단계가 오매일여라고 주장하니, 이 주장은 도리어 서장과 선요에서 오매일여라는 방편을 통하여 부수려고 했던 삿된 견해와 같다.
"깨어서 생각할 때에는 곧 선이 있다가도 잠이 들자마자 곧 없어져 버린다. 만약 이와 같다면, 어떻게 생사(生死)와 맞설 수 있겠느냐?”
대혜가 말했다. “바로 제가 의심하던 것입니다.”
선이라면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변함없이 여여(如如)해야 할 것인데, 말을 하고 생각을 할 때에는 선이 있다가도 침묵하거나 잠들어 생각이 없으면 선이 없다면 이것은 여여하지 못한 것이고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분별의식(分別意識)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하나의 벽을 만드는 것이 바로 담당의 참된 방편이었다. 분별심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이러한 벽을 시설함으로써, 이 벽 앞에서 분별심은 힘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분별심이 아닌 깨달음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불교와 선의 방편이다.
(첨언 : 의식은 에고에 영향 받지 않는 이 광활한 공간임을 知見하면 오매에 상관없다. 즉 에고가 깨어 있든 잠들든 상관없다. 분별심이 곧 에고이므로.)
“그만, 그만하고, 망상을 쉬어라. 망상을 쉬어라.”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제가 아직 잠이 들기 전에는 부처님이 칭찬하신 것에 의지하여 행하고 부처님이 비난하신 것을 감히 범하지 않으며, 이전에 스님들에게 의지하고 또 스스로 공부하여 얻은 자질구레한 것들은 또렷하게 깨어 있을 때에는 전부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상에서 잠이 들락말락할 때에 벌써 주재(主宰)하지 못하고, 꿈에 황금이나 보물을 보면 꿈속에서 기뻐함이 한이 없고, 꿈에 사람이 칼이나 몽둥이로 해치려 하거나 여러 가지 나쁜 경계를 만나면 꿈속에서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이 몸은 오히려 멀쩡하게 있는데도 단지 잠 속에서 벌써 주재할 수 없으니, 하물며 죽음에 임하여 육체를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 흩어지며 여러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다가올 때에 어떻게 경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러면 바야흐로 마음이 허둥지둥 바빠집니다.”
원오 선사께서는 이 말을 듣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는 여러 가지 망상들이 끊어질 때에, 너는 저절로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늘 하나인 곳에 도달할 것이다.”
대혜가 당면하고 있는 실질적인 고민이 원오에게는 다만 망상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대혜로서는 이러한 실질적인 고민이 망상이라는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대혜는 아직 망상에서 벗어난 깨달음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망상들이 진실한 사실로 보이는 것이다. 대혜는 아직 아무런 분별경계가 없는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이법(二法) 속에서 분별되고 차별되었던 것이다.
잠자면서도 깨어 있을 때와 같은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망상이 사라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뒤에 원오(圜悟) 선사(先師)께서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에 따뜻한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온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홀연 가슴에 걸려 있던 것이 내려갔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한 말이며, 있는 그대로의 말이며, 속이지 않는 말이며, 망녕되지 않은 말이며, 사람을 속이지 않는 참으로 커다란 자비로서, 몸을 가루로 만들어 목숨을 버리더라도 갚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가슴에 걸려있던 것이 없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꿈꿀 때가 바로 깨어 있는 때이며 깨어 있는 때가 바로 꿈꾸는 때라는 것을 알았으며, 비로소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늘 하나라는 것을 저절로 알았습니다. 이러한 도리는 집어내어 남에게 보여 줄 수도 없고,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습니다. 마치 꿈속의 경계와 같아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입니까?” 하자, 운문이 “동산(東山)이 물 위로 간다.”고 한 것을 언급하고는 말씀하시길, “만약 나라면 그렇지 않다.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이냐?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 오니, 전각(殿閣)이 조금 시원하구나.”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을 듣자 문득 앞뒤의 시간이 끊어졌다.
一日聞悟陞堂, 擧: “僧問雲門: ‘如何是諸佛出身處?’ 門曰: ‘東山水上行.’ 若是天寧卽不然. 忽有人問: ‘如何是諸佛出身處?’ 只向他道: ‘熏風自南來, 殿閣生微涼.’” 師於言下忽然前後際斷.
비유하자면 마치 한 타래 엉긴 실뭉치를 칼로써 한 번에 몽땅 잘라 버린 것과 같았다. 원오의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엉클어진 실타래를 칼로써 단번에 싹둑 잘라 버리듯이 대혜의 가슴에 걸려 있던 장벽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말을 듣고서 문득 깨닫는다고 하는 언하변오(言下便悟)이다. 이렇게 깨닫고 나니 꿈속에서도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다만 깨어 있을 때에는 주인공 노릇하는데 꿈속에서는 왜 주인공 노릇을 하지 못하는가 하였던 망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깨어 있을 때에는 주인공 노릇하는데 꿈속에서는 왜 주인공 노릇을 하지 못하는가 하는 이 분별망상에 대혜는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을 때에 주인공 노릇하듯이 잠잘 때에도 동일하게 주인공 노릇하는 것이 진실한 불법(佛法)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에 주인공 노릇하는 것과 잠잘 때에는 주인공 노릇하지 못하는 것이 둘이 아님이 진실한 불법(佛法)이다. 있다거나 없다는 것이 불법이 아니라, 있다와 없다가 둘이 아님이 불법이다. 우주는 오직 색(色)이라거나 우주는 오직 공(空)이라는 것이 불법이 아니라,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것이 바로 불법이다.
망상분별에서 해탈하여 불이법문에 들어오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닫고 나면 꿈속에서도 마음대로 주재(主宰)하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재하는 깨어 있을 때와 주재하지 못하는 잠잘 때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가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은 뒤에 대혜가 꿈과 깸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자.
도리어 세간(世間)을 살펴보면 오히려 꿈속의 일과 같습니다. 경전 가운데 본래 분명한 글이 있습니다. “오직 꿈일 뿐이니 곧 전적으로 망상(妄想)이다. 그러나 중생은 거꾸로 뒤바뀌어 매일 대하는 눈앞의 경계를 실제(實際)라 여기고, 이 모든 것들이 꿈인 줄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이것을 또한 거꾸로 된 중생들에게 두루 보여 주어, 눈앞에 실제로 있는 경계를 안립(安立)된 바다로 여겨서 꿈과 꿈 아님이 모두 환상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꿈이 곧 실제이고 모든 실제가 곧 꿈이어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지인(至人)에게는 꿈이 없다는 뜻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
모든 것들이 다만 꿈과 같은 환상인데도, 중생은 도리어 매일 대하는 눈앞의 경계를 실제라고 여기고서 다시 허망한 분별을 내어 잠잘 때에 의식(意識)이 어지럽게 일어나는 것을 참된 꿈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것은 꿈속에서 다시 꿈을 말하는 것이다. 꿈과 꿈 아님이 모두 환상임을 깨달으면, 모든 꿈이 곧 실제이고 모든 실제가 곧 꿈이어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오매일여(寤寐一如)인 것이다.
처음에 대혜는 깨어 있는 것을 실제라고 여기고 꿈을 허망하다고 여겨서 꿈속에서도 실제를 구현하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대혜가 부딪힌 오매일여라는 방편의 장벽이었다.
시끄러운 때에도 주인공이 되고 꿈을 꿀 때에도 주인공이 된다고 하니, 드디어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서 주인공은 어디에 있느냐고 따져서 물었다.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앞서 대혜가 말했듯이, 앞에 나타나는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판단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말이다. 즉,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분별력과 자유의지를 마음대로 행한다는 말이다. 생각도 없고 의식이 깨어 있지도 않은 숙면(熟眠) 속에서는 주인공의 존재조차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할 말이 있을 수가 없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경계를 앞에다 놓아서 그 마음을 가로막아 버리는 것이 바로 방편이다. 이 장벽에 가로막혀 5년을 보낸 어느날 자다가 일어나 다시 이 생각을 하는데, 옆의 동료가 떨어뜨린 목침의 소리에 문득 이 장벽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그물 속에묶여 있다가 빠져나온 듯이 시원하였다.
고향을 떠나 멀리 떠돌던 사람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니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본래 그 사람이라는 말은, 깨닫기 전에는 중생과 부처가 다른 줄로 알고 부처를 찾아 길을 떠났는데 깨닫고 나니 본래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것이다. 깨닫기 전에는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고 세속의 세계가 따로 있는 줄 알고서 깨달음을 찾았는데, 깨닫고 보니 본래 세속 그대로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다. 깨닫기 전에는 일상의 삶이 모두 허망한 사바세계였는데, 깨닫고 보니 일상의 삶 그대로가 불세계이다.
목침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에 문득 깨달으니, 지금까지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숙면 속에서 주인공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방편도 사라져 버리고 없었던 것이
다. 망상분별이 부서지면서 그 망상분별을 부수려고 설치한 방편도 사라진다. 병이 나으면서 약도 내버리는 것이다. 애초 고봉이 가지고 있었던 망상분별의 병은 무엇인가? 주인공이라는 무엇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주인공이라는 무엇이 참으로 있다면, 세계 속의 온갖 차별되는 일들 역시 모두 참으로 있을 것이니, 어디에 불이(不二)의 법계(法界)가 있겠으며, 법도 얻을 수 없고 비법(非法)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나 아공법공(我空法空)이라는 말이 어떻게 옳겠는가? 분별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방편을 오해하여, 시끄러운 곳에서 주인공이 되고, 꿈속에서 주인공이 되고, 꿈도 없는 숙면 속에서 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주인공이라는 이름에 꽉 집착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깨달으면 주인공이라는 물건이 따로 분별될 수 없다. 집착이 없고 시끄러운 곳과 꿈속과 꿈도 없는 숙면이 차별되지 않고 둘이 아니다. 주인공이 있다면 어찌 아상(我相)이 없다고 하겠으며, 어찌 법계(法界)가 평등하다고 하겠는가?
이처럼 대혜는 깨어 있을 때에 주인공 노릇함을 분별의식(分別意識)하고 있듯이 잠잘 때에도 주인공 노릇함을 분별의식하는 것이 곧 오매항일인 줄로 오해하였다가, 원오의 한 마디 말을 듣고서 문득 깨달아 분별망상이 사라지니 깨어 있을 때가 곧 잠잘 때이고 잠잘 때가 곧 깨어 있을 때여서 두 가지 경계가 없으며, 깨어 있을 때이건 꿈꿀 때이건 모든 경계가 아공법공(我空法空)인 제법공상(諸法空相)임이 저절로 밝혀진 것이다.
반면에, 성철은 “꿈속에서도 일여한 몽중위.”와 “꿈도 없는 깊은 잠에서도 일
여한 숙면위.” 등의 차별경계를 내세워 그것이 실재하는 경계이니 그러한 경계를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철의 주장은 ‘그대가 인연(因緣)을 상대하는 마음으로 법(法)을 들으면, 이 법도 인연(因緣)일 뿐이다.’에 해당하는 잘못이며, ‘있음’과 ‘없음’으로 분별하여 취하고 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며, 방편의 말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유마경에서는 “법을 구하는 자라면, 경계(境界)를 구하지 않는다. 까닭이 무엇일까? 법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경계를 헤아린다면, 이것은 경계를 구하는 것이니, 법을 구한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성철의 주장대로라면 성철은 경계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꿈은 잠 속의 생각이요 생각은 깨어 있는 동안의 꿈이다. 생각과 꿈은 모두 오직 의식(意識)이 만드는 것으로, 상온(想蘊)의 본바탕 모습이다. 만약 상온이 사라진다면, 이 사람은 평소에 꿈과 생각이 모두 사라질 것이니, 잠잘 때에 꿈이 없고 깨어 있을 때에 생각이 없다. 그 때문에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한결같이 같다.”
“지금 상온이 사라지면, 티끌경계는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다시는 거치른 육진경계(六塵境界)의 그림자가 없고, 의식은 변하여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이룬다. 여기에서 모든 세간의 산하대지(山河大地)를 보면 꼭 거울이 영상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모습이 오더라도 들러붙을 것이 없고 모습이 지나가더라도 남아 있는 흔적이 없어서 다만 헛되이 비추고 반응할 뿐이다.”
상온이 사라지고 묘관찰지를 이루면 마치 거울이 영상을 비추는 것처럼, 깨어서 생각을 하여도 생각이 진실하지 않아서 생각의 흔적이 남지 않고 자면서 꿈을 꾸더라도 꿈이 진실하지 않아서 꿈의 흔적이 남지 않으니, 이것을 일러 깨어 있을 때와 잠잘 때가 한결같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능엄경의 말은 곧 “꿈과 꿈 아님이 하나일 뿐”이고 “모든 꿈이 곧 실제이고 모든 실제가 곧 꿈이어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라는 대혜종고의 말과 일치하는 것이고, 성철의 주장처럼 꿈속에서 어떤 실제 경계를 얻는다는 말이아니다.
무심이정(無心二定)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을 가리킨다. 이 제16송은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 무의식(無意識) 즉 무심(無心)의 경지를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 무상천에 태어나는 경우, 무상정에 든 경우, 멸진정에 든 경우, 깊은 잠에 빠진 경우, 기절한 경우 등 다섯 경우에는 의식이 없지만, 이 다섯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식이 늘 나타난다는 말이다.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 실제로 성취되어야 할 경지(境地)라면, 일여(一如)가 하나의 경계가 되어 버린다. 일여(一如)란 대혜가 말했듯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不二法)을 말하는 것이지 분별되는 경계가 아니다. 일여(一如)란 여여(如如)와 다름이 없는 말이니 불이(不二)의 법성(法性)을 가리킨다.
따라서 오매일여를 꿈속이나 숙면 속에서 나타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실지(實地) 경계(境界)라고 하는 주장은 여법(如法)하지 않다.
염불선과 관련 있는 몽산덕이(蒙山德異)와 몽산을 답습한 나옹혜근, 태고보우, 그리고 정토(淨土) 수행자인 감산덕청(憨山德淸)의 말을 제외하고는, 어떤 조사선의 선사나 간화선의 선사도 몽중일여․오매일여를 깨달음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육조혜능 이후 몽중일여․오매일여의 주장은 오직 몽산덕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얻어야 할 어떤 경계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람을 경계에 얽어매는 것이니 불교도 선도 아니다. 그러므로 암두(巖頭)는 “만약 진실한 법이라는 것으로 사람을 얽어맨다면, 보시를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니, 흙 한 줌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고, 혜충국사(慧忠國師)는 “얻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들여우의 울음소리이고, 얻을 것이 없다면 이것이 사자의 울부짖음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오매일여를 실지 경계라고 한다면 방편의 말을 실제라고 오해한 것이다.
성철이 오매일여의 근거로 들고 있는 주장을 보면, 꿈속에서도 소소영영하고 숙면 속에서도 소소영영한 경계를 성철 스스로가 체험하고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이나 어록의 말을 근거로 오매일여를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지식이 시설해 놓은 방편의 말을 성철이 실제의 경계라고 오해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전과 어록의 모든 말이 그렇듯이 오매일여는 방편의 말이니, 있다․없다라고 분별되는 경계로서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담당문준이나 대혜종고나 능엄경에서 말하는 오매일여는 잠과 깸이 둘이 아니라는 구경무심(究竟無心)의 불이법(不二法)을 말하는 것인데, 성철은 몽산덕이나 태고보우가 말하는 염불선(念佛禪) 방식의 화두공부 과정에 성취하는 경계를 도리어 구경무심의 불이법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미 경계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불이법이 아니요, 이미 불이법이라면 분별되는 경계가 아니다. 이처럼 성철의 오매일여론은 여법(如法)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하여 조계종 수행지침서 간화선에서 말하는 동정일여․몽중일여․숙면일여의 삼단계 삼매를 거쳐야 깨달음에 이른다는 주장은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