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마가복음 14장 71~72절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요한복음 13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지금은 네가 나를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나를 따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3년 동안 주님을 따른 베드로였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직장과 가족을 떠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믿음은 커졌지만 지금은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뜻이다.
주님이 폭풍우의 물위에 서 계실 때에도 물위로 따라간 사람은 베드로였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는 이제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구원은 인간의 결정을 통해 달성되지 않는다. 이는 내부 변화를 통해 일으나는 것이다. 내부 변화는 육적자아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죽으러 왔으니 대속물로 죽었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노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신자들은 기적을 보고 말씀을 배우면 믿음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다. 예수께서 “지금은 너희가 나를 따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내가 왜 지금은 따라올 수 없느냐? 나는 당신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13:37)라고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생각이다. 베드로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너희는 이제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때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니요, 나는 온 목숨을 다하여 따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있는가?
푸쉬켄은 혼이다. 혼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의미한다. 육체와 영이 만나 생명체가 된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혼:네페쉬 하야)이 되니라』네페쉬하야는 혼(살아있는 생명체)을 뜻한다.
신자는 육과 영과 혼을 이해해야 한다. 육체는 육체로부터 형성된 육적인 자아를 갖고 있다. 육적 본성과 혈연관계 등을 포함해 일곱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없는 자에게는 성령이 없으므로 영이 죽은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혼은 죽음과 영생에 반응하는 옷과 같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혼은 슬퍼진다. 이것이 혼이 반응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때 마음은 또한 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의미에서 신과 같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는 다른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옷과 같은 혼이 불타서 죽고, 하늘에서 오는 새혼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야고보서 5장 20절에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고 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믿음의 결국 곧 영혼(soul)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다. 영혼이라 번역된 것은 혼이다. 구원과 혼은 연결되어 있다. 오해하면 혼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생각하고 새롭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혼에는 육적 혼과 영적 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혼은 영과 흙이 결합하여 나온 것이므로 반드시 죽어야 될 것이다. 영적인 혼은 하늘에서 내려온 혼(새사람)을 말하며, 영의 몸, 즉 그리스도의 옷으로도 표현된다.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옷과 같고, 새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신령한 옷과 같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옛사람(옛혼)은 십자가와 연합되고, 새사람(새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혼은 부활한 몸을 의미한다. 부활한 몸은 육체가 아니라 혼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죽은 영이 살아나고 영과 혼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주제는 육신에서 나온 혼이다. 이는 부모에게서 육신을 받았기 때문이고, 하늘에서 혼을 받아야 하는데, 성경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난다고 표현하고 있다. 물에서는 옛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고, 성령을 통하여 새사람(성령세례:부활)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으로 나지 아니한 자는 베드로와 같이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육을 가지고 있으며, 육적 자아는 일곱의 형태로나타난다. 그러므로 다시 하늘에서 태어났더라도 육적자아와 싸워야 한다. 넘어지고 때로는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전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을 사용하신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의 법을 따른다. 로마서 8장 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했다.
성경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역시 주님을 3년 동안 따르는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는 신자들의 옛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따를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사람들이 믿고 있지만, 성경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믿음을 지적하고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믿음은 거듭난 자의 믿음이 아니다. 신앙의 핵심은 주체가 누구인가이다. 영적 자아인가, 육적 자아인가? 영적 자아는 성령께서 주신 마음이고, 육적 자아는 탐욕이 스며든 자아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의 육적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육체적 자아는 육체의 본성, 혈연,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 자기의 의, 지배욕을 뜻한다.
많은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한 구속의 죽으심을 믿고 있지만,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거짓으로 믿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돌이켜 회개하는 자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다. 베드로가 주님께 “내가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