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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목포문학상』희곡부문 남도작가상
『어느 제육주의자의 레시피』
박 웅 (나주시)
- 장소
요리 프로그램 <만국의 제육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의 실내 촬영장
- 인물
제육주의자 : 김태훈 / 제육주의를 이끄는 현 제육주의자들의 영수
채식주의자 : 이강아 / 다년간 채식주의의 최선봉에 서 있는 채식주의자들의 영도자
PD : 박천재 / 자신이 기획한 프로그램을 당대 최고의 화제로 부각시킨 베테랑 연출자
AD : 이승복 /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방송 초년병
MC : 천혜정 / 채식주의 성향으로 잘 알려진 유명 아나운서
리포터 : 나한울 / 제육주의 성향의 방송 진행자
기자 : 김슬기 / 중립일보의 에이스
그 외
(셰프정 : 정남기 / 전 제육주의 지도자)
(손부장 : 손성희 / <만국의 제육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를 본래 진행하던 아나운서)
(이교수 : 이윤아 / <혼합영양론>의 저자)
- 무대
객석을 향한 방송국 스튜디오의 모습이면 족하다. 중앙은 크게 2층으로 구분되어 1층은 촬영이 이루어지는 세트이고 2층은 부조정실이다. 촬영 세트에는 실제로 요리를 진행하는 테이블이 놓여있고, 배경이 되는 뒷벽에는 <특별 생방송! TV 요리 쇼!! 만국의 제육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프로그램 명칭이 담긴 장식용 패널이 달려 있다. 한편, 상수 쪽에 촬영 중간 틈틈이 분장을 고치고 간식을 먹는 용도의 휴게 공간이 있고, 하수 쪽에 녹화 영상을 재현하는 독립된 공간이 있다.
관객 입장이 개시되면, 생방송 준비에 분주한 촬영장의 모습이다. 조명을 손보는 사람, 음식 재료를 체크하는 사람, 카메라를 설치하는 사람 등등 모두가 제각기 바쁜 틈새에서 AD가 무전기를 든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그러다 입장하는 관객들을 발견한 AD는 그들을 객석으로 안내하여 앉히고는, 다시 세트로 올라가 뒷벽 패널의 평행을 맞추느라 낑낑댄다. 이 때 등장하는 PD.
PD : 승복이 어디 있냐? (자신에게 뛰어 오는 AD를 발견하고) 준비 다 됐어?
AD : 예! 근데, 손부장님이 아직 안 오셨는데요?
PD : 아, 손성희 부장님 당분간 휴가다.
AD : (놀라) 에? 휴가요?
PD : (대수롭지 않게) 이 기회에 좀 쉬시라고. (조명 에어리어를 조절하고 있는 staff에게) 좀 더 오른쪽! 좀만 더! 오케이! (다시 AD에게로 시선을 가져가며) 대신, 천혜정 씨 올 거야.
AD : 아아, 예. (다시 놀라) 네? 9시 뉴스, 천혜정 아나운서요?
PD : (씩 웃으며) 내가 간이고 쓸개고, 어제 보도국에다 죄 팔았다. 나 좀 홀쭉해지지 않았냐? 헤헤.
AD : (고개를 갸우뚱하며) 저기, 근데... 천혜정 아나운서는 채식주의...
PD : 그러니까 딱~이지!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하지 않냐? 제육주의의 최고봉과 채식주의자로 익히 알려진 KBC의 간판 아나운서... 두고 봐라. 오늘, 100% 대박이다. 좀 전에 봤더니만, 대타 MC 긴급 공지 뜬 이후로 홈피가 아주 폭발 직전이라니까.
AD : (우려 섞인 목소리로)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PD : (말을 끊으며) 갑자기라니? 어허, 이 덜떨어진 상황 판단 능력을 봐라. 이 친구야, 이 업계에서는 촉이 생명이에요. 너 그제 꼴통-제육 발언 터진 거 알아, 몰라? 멍석 깔린 거 아니야? 그럼, 지대로 놀아 줘야지. 너도 이제 좀 선수답게 굴어라. 벌써 입사한 지 몇 달이나 지났냐? 오늘 방송 중요해. 정신 바짝 차려.
AD : (기합이 잔뜩 들어가) 네! 열심히,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PD : (한숨) 이 물건 이거, 누가 뽑았는지 몰라? 넌 내가 면접 들어갔으면 회사에 절대 못 들어왔다, 이 자식아.
AD : 예?
PD :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무조건이야! 최선이 아니라. 국민에게 일임 받은 전파를 통해 유익한 정보와 재미, 무엇보다 정확하고 공정한 사실을 전달한다는 방송인의 사명 의식? 책에서 그렇게 배웠지? 근데 너무 길잖아. 앞에 거 다 빼. 사명 의식! 무조건 해 낸다! 게다가 오늘 특별 생방송이야. 특집 편성 받기가 쉬운 줄 아냐? 천혜정도 꼬셔낸 김에 에라, 아예 몰빵하자! 내가 백지사표 던지면서 따 온 거거든. 그래서 지금 국장급들도 다 같이 모여서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응?
AD : 예. 무조건!...입니다. (다소 생뚱맞지만 덧붙이듯 소심하게) 파이팅!
PD : 그래, 방청객 교육도 다 끝난 거지?
AD : 아, 맞다.
PD : 너, 죽을래?
AD : (눈치 보며) 지금부터 해서... 얼른 마치겠습니다.
PD : 아유, 저거...
PD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린 후, 객석의 가까운 전방에 카메라를 설치 중인 staff에게 다가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다. 한편, AD는 관객의 앞으로 가 선다.
AD : 안녕하세요. 조연출 이승복이라고 합니다. 방송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당부 말씀을 좀 드리려고 하는데요. 우선, 다들 휴대폰 전원 꺼져 있는지 확인해 주시고요. 생방인 거 아시죠? 혹시라도 전화 울리면 곧바로 방송 사고입니다. 신경 좀 써 주시고요. 그리고 다음은, 제가 보내는 수신호에 따라서 열렬한 리액션! 이거는 쉽습니다. 예능 프로 아니니까 오프닝이랑 엔딩에만 들어 갈 거구요. 자, 제가 팔을 이렇게 크게 돌리면? 그렇죠. 커다란 박수와 함성. 잘 하셨고요, 제가 이걸 좀 더 과격하게 빨리 돌리면? 그렇죠. 박수함성 곱빼기. 그냥 아낌없이 주시는 겁니다. 자, 그러다 제가 이렇게 손으로 엑스 자를 그리면? 네, 천재들이십니다. 그렇죠, 쉿~이죠. 한번 해 볼까요? 아뇨. 저기, 그렇게 갑자기 뚝 그치면... 네, 좀 작위적이죠? 자, 티 안 나게 자연스럽게 페이드아웃. 그렇죠. 자, 제가 이렇게 하트를 그리면? 아아~! 그렇죠. 싫어, 싫어. 그건 좀 너무 했다는 듯 미묘한 콧소리. 그리고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키면? 단발성 웃음. 둘은 좀 더 웃긴 거죠, 빅 재미라 이거죠. 그럼 세 개는? 이건 뭐 미치는 거죠. 네, 좋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넘어가서, 당연히 피곤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웬만하면 졸지는 마시라는 거. 물론, 카메라가 객석을 비추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아주 가끔씩 반응 샷을 쓸 때가 있으니까요, 그거 캡처 당해서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거 이미 각오하셨다면 주무셔도 되고요. 하지만 뭐, 아마 제육갤 같은 데 뜨면 한동안 편히 못 지내실 겁니다. 저번에도 한 분 졸고 계시는 걸, 그걸 또 옆의 분이 직찍으로 올리셔가지고, 그 분 테러 당한 게 장난도 아니었다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나마 한 자리에서 만나신 것도 인연인데 사이좋게 지내시구요. 서로 직찍이나 직캠으로 배신놀이하지 마시고요.
카메라맨과 이야기를 나누던 PD가 AD의 등을 툭 친다.
PD : 가자.
AD : 아, 예. (장내에 모두 들리도록 큰 소리로) 그럼, 지금부터 카메라 리허설 가겠습니다. 모두 정위치 해 주세요. 그리고 거기 두 분만 잠깐 도와주실래요?
AD는 관객 중 2명을 무대 위로 불러내어 카메라 리허설을 진행하고, 그 때 제육주의자가 등장한다. 제육주의자를 발견한 PD는 그에게 다가간다.
제육주의자 : (PD와 악수를 하며) 아이고, 좀 늦었습니다. 편성국장님 좀 만나고 오느라고.
PD : 아뇨, 별 말씀을. 그런데 시간 상 리허설하기가 좀 빠듯한데 건너뛰어도 괜찮으시겠죠?
제육주의자 : (고개를 끄덕이며) 뭐, 방송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어때요? 요새 광고 많이 붙죠?
PD : 아이고, 예!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제육주의자 : 에헤이, 제가 무슨... 그보단, 우리 제육인들 모두가 합심하고 있다는 증거죠.
PD : 하하, 그러게요. 아, 그리고 오늘 손성희 아나운서가 몸이 좀 불편하다고 해서 진행자가 바뀌었습니다.
제육주의자 : 그래요? 쯧쯧, 오늘 집에 가면 사골이라도 보내야겠네.
PD : 그래서 임시로 천혜정 아나운서가 올 겁니다.
제육주의자 : 천혜정이라면 그... 천혜정?
PD : (누군가를 발견하고) 아, 마침 저기 오네요.
종종 걸음으로 MC가 등장하고, 그즈음 카메라 리허설을 마친 AD는 관객 2명을 다시 제자리로 안내한다.
PD : (MC를 맞이하며) 지금 보도국 난리 났죠? 제가 객기 좀 부렸습니다. 근데 크게 걱정 안 해도 되요. 이거 클로징 하자마자 뛰기 시작하면 충분히 제 시간에 대서 뉴스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MC : 예, 뭐... 사정대로 움직여야죠.
PD : 그럼, 서로 인사도 나누시고 잠깐 대본도 맞출 겸 저리로 가실까요?
PD는 제육주의자를 무대 상수 쪽의 휴게 공간으로 이끌고, 제육주의자가 의자에 가 앉는 동안 MC를 슬쩍 붙잡는다.
PD : 저기, 천혜정 씨. 내가 따로 얘기 안 해도 잘 알죠? 뭐 원하는지?
MC : 돈만 받는다고 프로 아니잖아요. 성향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방송인답게 방송 할게요.
PD : 아이, 그럼! 난 그냥 노파심에.
MC : 게다가 저 대학 다닐 때 연극 동아리 했거든요.
PD : 그래, 역시 연극이 좋은 예술이야. 그럼, 대본 거기 있으니까 죽 한번 훑어보시고. 혜정 씨도 별문제 없지? 리허설 건너뜁니다.
MC : (제육주의자의 건너편에 앉으며) 아, 예.
PD : 오케이. (손을 한 번 비비고 나서, 허리에 차고 있던 무전기에 대고) 자, 스튜디오로 사운드 돌립시다. (AD에게) 나 이제 부조 올라간다. 잘 해!
곧바로 제육주의와 연관된 상업광고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PD는 1층 세트 뒤를 돌아 부조정실로 올라간다. PD가 부조정실의 자기 자리에 도달하는 동안, 객석등부터 시작하여 세트를 비추는 조명을 제외한 모든 빛이 차례로 사라진다. AD는 객석의 바로 앞에 자리하고, 제육주의자와 MC도 휴게 공간을 떠나 요리가 진행될 메인테이블에 붙어 선다.
PD : (무전기에 대고) 마지막 광고.
AD : (크게) 마지막 광고입니다.
PD : (광고가 끝나자마자 무전기에 대고) 타이틀 롤.
AD : (크게) 타이틀 돌았습니다. 5! 4! 3! 2! 1!
AD는 팔을 크게 돌리며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을 이끌어내고, 그와 동시에 시그널 음악이 울려 퍼진다. AD의 엑스 자 사인에 서서히 가라앉는 객석의 사운드.
MC : (인사하며) 안녕하십니까? 손성희 아나운서의 개인 사정에 의해 임시 진행을 맡게 된 천혜정입니다. 그리고 제 옆에는 여느 때처럼 제육셰프 김태훈 선생님 나와 계십니다.
제육주의자 :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제육주의여, 영원하라! 안녕하세요, 제육셰프 김태훈입니다.
MC : 자, 오늘 소개해 주실 요리는 어떤 것들인가요?
제육주의자 : 제가 오늘 준비한 레시피는 크게 3종류로 구성된 ‘시리즈’입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의 포문을 열게 될~ 제 1탄은 바로! 지난주에도 선보인 바 있는 요리 쇼크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요리 쇼크가 담지하고 있는 철학적 배경은 요리에서 주와 부를 바꿀 수도 있다는, 발상의 파격적인 전환인데요. 때문에 오늘의 모토 역시, 고정 관념의 전복입니다. 이미 지난주에, 고기로 빵을 싸 먹는 <제육버거>와 밥을 뿌린 <제육덮갈비>를 만들어 보았었죠. 이번 주 요리 쇼크는 밥을 곁들인 <전주비빔고기>와 면을 곁들인 <평양식 물냉고기>입니다.
MC : 아, 역시 이번에도 고기가 밥과 면을 대신하는 원리네요. 그렇다면 전주비빔고기는 육회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거겠죠?
제육주의자 : 그렇습니다. 밥은 그냥 깨소금 같은 거죠, 나중에 살짝 뿌리는.
MC : 이 요리의 주요 포인트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제육주의자 : 네,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는 육회의 순수한 맛을 즐기기 위해 기존 요리에 들어가는 나물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입니다.
MC : 예? 나물을 다 빼신다고요. 이거 참 놀랍습니다. 비빔밥, 아니, 비빔고기에 나물이 들어가지 않으면 대체 어떤 재료가 그걸 대신하나요?
제육주의자 : 제가 개발한 레시피지만, 가끔은 저도 놀랄 정도의 기막힌 발상입니다. 그건 바로, 준비한 육회의 반은 그대로 쓰면서 나머지 반은 3등분하여 각각 레어, 미디엄, 웰던으로 익힌 후에 채를 써는 겁니다. 마치, 비주얼은 나물처럼. 정말이지, 이야말로 진정한 육회의 향연이 아니겠습니까?
MC : 그럼, 채소는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까?
제육주의자 : 아뇨, 이게 또 흥미로운 것이 그렇게 편협한 요리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포용과 아량의 미덕을 충분히 갖추고 있죠. 녹색과 노란색의 데코를 위해 무려 상추 한 장과 콩나물이 세 줄기씩이나 들어가니까요.
MC : 아아, 예... 그럼. 평양물냉고기의 특징으로는 뭐가 있을까요?
제육주의자 : 두 단어로 간단히 표현하자면, 화려한 콤비네이션! 만드는 요령은 아주 쉬운데요, 보쌈고기와 족발 그리고 편육을 그릇에 가득 담습니다. 면은 계란 고명 정도로 사용하시면 되겠고요, 모든 재료를 담은 후엔 하이라이트로다가 차갑게 식힌 소고기 육수를 부어 주는 거죠.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두 가지 요리 쇼크는 공히,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고단백/저칼로리를 본격적으로 실현하는 고품격 영양식이라 불러도 아무런 손색이 없을 겁니다.
MC : 네에... 그럼, 실제 조리에 앞서 다시 한 번 재료를 정리해 주실까요?
제육주의자 : 예. 우선, 비빔고기의 경우, 우둔살 500g, 상추 한 장, 콩나물 세 줄기, 밥 반 큰술, 고추장 등 기본양념까지고요, 냉고기의 경우는 보쌈용 사태 100g, 편육 100g, 족발 100g, 육수용 사태 100g, 냉면사리 10줄이 되겠습니다.
MC : 시청자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무척 기대가 되는데요, 지금부터 본격적인 요리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육주의자는 MC의 보조 하에 요리를 시작한다.
MC : 요리를 하시는 도중에, 최근 거대한 파장을 일으킨 이강아 그린셰프의 문제적 발언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해 볼 수가 없겠는데요. 제육주의의 기수로서 그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요?
제육주의자 : 아, 그 꼴... 근데 이거 방송에서 쓰면 안 되는 용어이지 않나요?
MC : 아닙니다. 꼴통이라는 단어는 머리가 나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으니까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육주의자 : 예, 그럼. (목을 잠시 가다듬은 후) 우선, 이강아 셰프가 채식주의의 최고 지도자로서 그런 경솔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고요. 우리 제육주의의 공식 입장은 채식주의의 그러한 무분별한 태도가 버릇없는 응석받이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라고 꼴통-채식이라 못 불러서 안 부르겠습니까? 그들의 맹목적인 편협함에 대해, 저 역시도 쑥과 마늘 대신 밴댕이를 상징으로 삼아 보는 건 어떠냐~ 충분히 조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양이라는 전 지구적 가치에 보탬이 되고자 그에 맞추어 비전을 설정하다 보니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따라서 쑥과 마늘이 제육을 겨냥한 공격적 자세를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견지한다면, 우리들도 더 이상 좌시하지만은 않겠다는 강한 의사를 표명하는 바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소모적인 갈등을 획책하려는 어떤 간사한 무리들이 있어 그들이 벌이는 모종의 음모는 아닐까 한편 의심해 보기도 합니다.
MC : 음, 그렇다면... 범세계적인 영양을 추구하기 위해 모두가 화합하자는 데땅트 분위기 속에서 시의에 부적절하게 터져 나온 이번 발언, 과연 그 속셈은 무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제육주의자 : 우리 제육주의 진영만 하더라도 서로의 개성을 인정해보자는 취지에서 개성공간이라는 상호 교류 프로그램을 시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요리 대회 동시 참가도 추진하고 있었고요.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니까요. 그리고 제 사견이지만, 그제의 꼴통 발언은 아마도... 채식주의가 오히려 골다공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이후, 내부적으로 자체적인 불신이 싹트고 그 쌓여가는 불안감 속에서 답답함을 타개해 보고자 저지른 충동적인 수작이 아닐까 합니다만.
MC : 하지만 제육 입장에서도 쑥과 마늘은 적 아닙니까? 각종 루트를 통해 상대를 압박하고 위협하는 건 제육 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적대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좀 따르지 않을까요?
제육주의자 : 물론, 하루아침에 적이 친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들을 적대시할 만한 이유는 충분합니다. 저는 다만, 과정과 노력의 차원에서 우리는 좀 다르다! 그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MC : 그렇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서로가 그냥 각자 자신의 주장만을 펼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 법 한데요. 실제로 일각에서는 오십보백보라는 평도 나오고 있고요.
제육주의자 : 아뇨, 저희 제육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귀도 막고 눈도 막은 것은 단연, 채식주의 쪽이죠.
MC : 하지만 지금 하시는 말씀의 논리도...
제육주의자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 요리가 다 완성되었네요, 하하하.
MC : 아... 네... 그럼, 다시 요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금주의 요리 쇼크, <밥을 곁들인 전주비빔고기>와 <면을 곁들인 평양식 물냉고기>가 완성되었습니다. 어떠신가요? 과연, 먹음직스럽나요? 이 요리들은 프로그램이 끝난 후, 추첨을 통해 선정된 방청객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몹시도 기대되는 그 맛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다음 레시피는 무얼까요? 이번엔 시리즈의 제 2탄 차례죠?
제육주의자 : 2탄은 한마디로 말해, 요사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퓨젼입니다. 그리고 풍성한 하모니가 본질적 목표인 이 육류 3종 퓨젼레시피의 명칭은 바로, <특제 사골삼계란찜>입니다.
MC : 이름이 알 듯 모를 듯 상당히 독특한데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육류 3종인지 설명을 좀 부탁드릴까요?
제육주의자 : 이 레시피를 구상하게 된 데에는 제 개인적인 경험이 깊게 작용했습니다. 어느 날 친목모임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려는데 1차 장소에 관련하여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당시 일행 중에는 닭갈비를 먹고 싶어 하는 이도 있었고,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찾는 이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고통스런 고민으로 점철된 선택의 과정을 목도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골 국물, 즉, 소고기 육수에! 계란, 즉, 닭 알을 풀어! 돼지고기인 삼겹살을 다져 넣는! <사골삼계란찜>을 만들어 낸 거죠.
MC : 그런데 그 날은 어떻게 됐나요? 제육주의자들의 최종 선택이 과연, 소, 닭, 돼지 중 어떤 고기였을지 문득 굉장히 궁금해지는데요.
제육주의자 : (의아) 예?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연히, 3차 다 갔죠.
MC : 아아...
제육주의자 : 천혜정 아나운서가 아직 제육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시네요. 1차에서 고기를 먹은 후에 2차로 고깃집을 가지 않는다는 건 아주 미개한 발상입니다. 얼마나 일관되고 통일적인 동선입니까? 그리고 그~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 전 개인적으로 차돌박이 입가심을 가장 좋아합니다만. 여하튼 이 <사골삼계란찜>의 포인트는 기존의 파나 양파 대신 삼겹살을 잘게 썰어 넣는다는 것과 사골 국물을 베이스로 사용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삼계의 삼은 인삼의 삼이 아니라 삼겹살의 삼인 거죠. 또한, 때문에 이 찜은 꼭 압력솥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삼겹살이 설익는 걸 방지할 수 있겠죠?
MC : 그럼, 곧바로 재료 소개와 함께 요리를 시작하실까요?
제육주의자 : 자, 보시는 것처럼 미리 우려내어 따로 보관해 둔 사골 국물을 용기에 붓고요. 계란을 깨서 풀어줍니다. 그리고 잘게 썰어 놓은 삼겹살을 넉넉히 넣어 주고 소금으로 간을 한 후에, 압력솥에 넣고 이렇게 불을 켜면... 압력솥이 힘찬 소리를 내며 다 됐다는 신호를 줄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리면 되는 겁니다. 정말 간단하죠?
MC : 오늘의 레시피 시리즈 제 2탄은 여기 압력솥에서 맛있게 익어 가는 <특제 사골삼계란찜>입니다. 그럼, 찜이 익기를 기다릴 겸~ 3탄의 소개에 앞서 잠시 나한울 리포터가 전해 드리는 <오늘의, 오늘을 위한, 오늘을 통한!>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무대 하수 쪽의 독립 공간에 조명이 들어오는 대신, 세트를 비추던 빛은 약해진다. 조명 안에는 여러 가지 차트를 대동한 리포터가 서 있다.
리포터 : 나한울의 오늘의! 오늘을 위한! 오늘을 통한! 네, 오늘의 이론은 공극률 이론입니다. 다수의 사람들과 고기를 먹으러 갔을 때 좀 더 많은 고기를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는 아주 소중하면서도 획기적인 이론인데요. 경제학적인 합리성에 물리학적인 효율성이 추가된, 참으로 위대한 아이디어입니다. 우선, 제 1원칙! 반찬은 손대지 마라! 예, 경쟁자가 있는 상태에서 반찬은 공공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반찬으로 배를 채울 필요는 없겠죠. 제 2원칙! 공극은 클수록 좋다. (차트를 가리키며) 자, 이 그림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공극이 클수록 그 사이가 넓어지죠. 게다가 초반은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 3원칙! 초기 15분간은 고기를 씹지 말고 삼켜라! 네, 그렇습니다. 씹지 말고 최대한 큰 상태로 삼키는 겁니다. 신속하게 말이죠. 왜? 어차피 인간이 느끼는 포만감은 15분 후에야 오니까요. 그리고 다들 어느 정도 배가 불러 와 경쟁이 덜해지면, 그 때부터 비로소 잘근잘근 씹어 (다시 차트를 짚으며) 이 공극의 사이사이를 채워 주는 겁니다. 자, 이렇게 고기를 배불리 먹은 후에는! (차트를 넘기며) 마지막 단계, 밥으로 뚜껑 덮기. 어때요, 감이 오시나요? 자, 다음은 오늘을 위한 한마디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꼭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아포리즘이자, 한 줄 팁으로 전하는 식생활의 간단 지침서이죠. 오늘 한마디는 제육셰프 김태훈 선생님께서 어느 날 큰 깨달음을 얻어 읊조리신 한줄 잠언인데요. 그것은 바로! 액체가 주는 포만감은 거짓이다! 맞습니다. 제육인들에게 액체는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죠. 이 한마디만 잘 기억해 두신다면 나중에 고깃집에서 괜히 음료수로 헛배만 불리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으시겠지요? 마지막으로 오늘을 통한 바로잡기는 다름 아닌 감자탕의 명칭입니다. 우리는 그간 별 생각 없이 감자탕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해 왔는데요, 제육주의자로서 그건 당연히 등뼈탕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요. 하지만 표준어사전에조차도 감자탕이라고 등재되어 있는 만큼, 이 방송을 시청하시는 여러분들의 꾸준한 관심과 결연한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잘못된 용어 사용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근성이 필요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우리 다음 주에 또 만나요. “나 한울 좋아해, 음메~”의 한우-리포터 나한울이었습니다.
녹화 영상이 재현되는 동안, MC와 제육주의자는 휴게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 잠시 분장을 고친다. 이 틈을 이용해 AD는 간식으로 준비한 햄버거를 전달하고, 햄버거에서 채소를 모두 골라낸 후 고기 패티 두 개 사이에 빵을 끼우는 제육주의자. MC에게 권해 보지만 MC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사양한다. 한편, 부조정실에서는 다급한 표정의 PD가 무전기를 통해 AD를 불러올린다. 녹화 영상의 재현이 끝나갈 무렵 부조정실에서부터 헐레벌떡 뛰어내려온 AD는 무언가 적힌 메모를 MC에게 전달하고, 메모의 내용을 눈으로 확인한 MC와 제육주의자는 화들짝 놀란다. 이내 리포터의 대사가 말미에 이르자 신속히 세트로 다시 이동하는 MC와 제육주의자. 다시 조명이 전환된다.
MC : 속보입니다. 지금 현재 타 방송국에서 진행 중인 프로그램에서, 채식주의자 이강아 셰프가 충격을 금할 수 없는 도발성 발언을 감행해 엄청난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잠시 현장으로 카메라를 돌려 보겠습니다.
MC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무대 하수 쪽의 독립 공간에 조명이 들어오고, 녹화 영상의 재현 때와는 다른 옷을 걸친 리포터가 마이크를 들고 서 있다.
리포터 : MBS 방송국 앞에 나와 있는 나한울입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분통을 참을 길이 없는데요. (재빨리 눈물을 훔친 후) 방금 전 이강아 셰프는 <채식주의 만만세>라는 MBS의 간판 요리 프로그램에서 채식과 골다공증의 관계에 대한 논문이 제육주의자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하며, 이와 같은 만행이 계속될 경우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구제역과 조류독감 바이러스를 농가에 살포하겠다는 가히 망언에 가까운 발언을 입에 담아 수많은 사람들을 경악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는 또한 (훌쩍임을 조금 진정시킨 후) 불과 이틀 전 (그러나 또 눈물이 대롱대롱) 꼴통-제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해서 큰 물의를 일으킨 당사자가, 그에 대한 사과 의사를 표명하리라 예상했던 프로그램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발표한 내용이라 더욱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방송이 전파를 탄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현재 MBS 일대는 쑥과 마늘을 든 채식주의 진영의 군중들과 제육단결을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제육주의자들로 인해 일대 혼잡을 빚고 있으며 물리적 충돌을 우려한 경찰력이 만반의 출격 대기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입니다. 한편 <혼합영양론>의 저자 이윤아 교수는 특별 기자 회견을 통해, 영양을 둘러싼 양자의 갈등 해소 의지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조속한 시일 내의 긴급 3자 회담 개최를 제안했으며 이에 대한 양측 진영의 반응은 아직 확보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충격의 진원지, MBS 앞에서 나한울이었습니다.
무대 하수를 비추던 조명이 꺼진다.
제육주의자 : (씩씩대다가 문득 칼을 들어 도마를 내리치며) 이런 미친 마늘들!
MC : (깜짝 놀라) 어마! ... 저기... (그러나 계속 씩씩대고 있는 제육주의자의 열기에 도리가 없는 듯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애써 웃으며) 에, 네에. 김태훈 셰프께서 약간 흥분하셨는데요.
그 때, 제육주의자가 갑자기 미친 듯이 고기를 썰더니 집어먹기 시작한다.
제육주의자 : (눈을 감고 고기를 음미하며 몸을 부르르) 으음~! 으음~!
다행히 몸 안으로 고기가 들어가자, 점차 평정을 되찾는 모습이다.
MC : (조심스레) 어떻습니까? 이제 좀 흥분이 가라앉으셨나요? (제육주의자가 천천히 눈을 뜨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네, 그럼... 저희 프로그램도 제육주의의 상징이신 분을 모시고 방송을 하는 만큼, 방금 전 속보의 내용에 대해 그 입장을 여쭈어보지 않을 수 없는데요. 또 한 번의 강경한 발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육주의자 : (차분하게) 이건 이미 도를 지나친 망언이자, 분명히 선을 넘어 선 만행입니다. 또한,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명백한 도발입니다. (하지만 차츰 흥분하며) 제육주의의 본질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침략 행위입니다! 그 몹쓸 것들을 쏘겠다고 협박을 해요? 그것도 감히 우리의 신성한 농가에?
MC : 하지만 일전에, 제육주의가 노화를 촉진시키고 암을 유발한다는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제육 진영에서도 채식주의의 사주를 받은 더러운 사기 행각이라며 각종 매체를 동원한 전 방위 압박을 감행하지 않았었나요?
제육주의자 : 아니, 천혜정 아나운서는 과학과 사기도 구별 못 합니까?
MC : 네?
제육주의자 : 하나는 비열한 사기였고 다른 하나는 엄연한 과학이죠! 하여간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제 세상에만 갇혀 사니까 점점 비겁해지고 더욱 음침해지고 그러지. 편협하기 짝이 없는 외골수들이 말이야.
MC : 죄송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편협함을 언급하시는데 사실, 노력을 먼저 기울인 건 채식주의 쪽 아닌가요? 콩고기만 하더라도...
제육주의자 :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불쑥) 콩고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MC가 정색하여 쳐다보자 자신도 맞보며 도전적인 어조로) ...요! 흥, 그거야말로 위선자들의 사탕발림 같은 거 아닙니까? 고기가 먹고 싶으면 당당히 먹을 것이지. 뭐, 생명이 어째? 우리가 잔인해? 이런 사기꾼-쓰레기들 같으니라고.
MC : (기가 차다는 듯) 저기, 선생님. 흥분하신 건 알겠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지금 말씀은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닌가요?
제육주의자 : 제가 뭐 못 할 말이라도 했습니까? 살생을 따질 거면! 애초에 광합성 못 하는 인간, 그 자체부터가 문제 아닙니까? 그게 바로 자가당착! 자기모순! 자기혐오거든요! 자기부정에 빠진 불행한 낙오자들이 인간의 이기심을 논해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를. 그건 그냥, 식욕의 임포텐스일 뿐입니다!
MC : (어이가 없을 정도의 분노가 솟구쳐) 이... 임... 임포텐스요? 피로 물든 제육 주제에 그 따위 말을 해요?
제육주의자 : 뭐요? (야멸치게) 이! 쑥스러운 여자 같으니라고!
MC : (버럭) 뭐라고요!
부조정실에 조명이 들어오고 PD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 있다. 다급해진 AD가 손가락 3개를 쳐들자 객석의 때 아닌 웃음소리, 그리고 그제야 정면을 바라보는 MC. AD 역시, 손으로 목을 그으며 중지 신호를 보낸다.
MC : (간신히 표정을 수습한 후) 생방송 요리 쇼, 제... (그러나 다시 복잡 미묘한 얼굴로 머뭇대다가 결국 얼버무리며) ...단결하라. (환한 억지웃음) 광고 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광고 사운드 흘러나오고, 무대 전체가 밝아진다. PD는 이미 1층에 도달한 상태이다.
PD : (AD에게) 네가 올라가서 잠깐 상황 좀 봐라.
PD가 몸을 돌려 세트 쪽을 바라보면, MC는 휴게 공간의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열을 식히고 있다. 제육주의자 또한, 냉랭해진 분위기에 난감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 그러나 곧 묵묵히 다음 요리의 재료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PD : 천혜정 씨. (깊은 한숨) 다 좋은데요. <요리 쇼... 단결하라>라니요? 아니, 다 좋았다니까요! 근데, 프로그램 이름은 제대로 얘기했어야죠. 것도 뒤에 바로 광고 붙는데, 예?
한편, 부조정실에 올라간 AD는 쏟아지는 전화에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니다가, 양손 가득 수화기를 쥔 채, 1층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AD : 피디님! 지금 난리인데요. 저기, 그리고 보도국에서도 천혜정 씨 얼른 보내라고...
PD : 뭐?
AD : 잘 모르겠는데요, 여하튼 보도국장님이 지금 무조건 보내라십니다!
PD :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로) 그래, 과감한 것도 능력이야. 어차피 꿔 온 거, 돌려보낼 땐 미련 없이. (목소리를 키워 AD에게) 알았다 그러고, 너 얼른 내려 와.
AD : 예! (수화기에 대고) 네, 알았습니다. (다른 수화기에 대고) 네, 알겠습니다.
PD : (온화한 목소리로) 혜정 씨, 보도국에서 급히 찾나 봐. 서둘러 가야지. 그리고 오늘 고마워요.
MC :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아) 예, 그럼 저 가 볼게요. 클로징 못 하고 가서 죄송해요, 감독님.
PD : (손사래를 치며) 에이, 별 말씀을. 수고했어요. 오늘 잘 했어. 아주 좋았어.
MC : (웃으며) 예,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육주의자에게도 공손히) 셰프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스튜디오 전체에 대고) 수고들 하셨습니다. 먼저 갈게요.
종종걸음으로 MC가 빠져나가고, AD는 1층에 도착해 PD 앞으로 간다.
AD : (불안한 목소리로) 어떻게 하시려고요? 광고도 몇 개 안 남았는데.
PD : 나한울, 스튜디오로 들어오는 중이지? 도착할 때 안 됐나?
AD : 예? 나한울 리포터요?
PD : 얼른, 얼른 전화 걸어 봐. 다 왔을 거야, 얼른!
AD : (휴대전화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른 후) ... 어, 한울 씨. 어디야? ... 다 왔어? 잠깐만... (PD에게) 이 앞이라는데요?
PD :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좋아. (회심의 미소) 그래, 대타 작전 어게인이다!
AD : 네?
PD : 선생님,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만... 진행자가 한 번 더 바뀔 거 같은데, 이를 어쩌죠?
제육주의자 : (싱긋 웃더니) 더 쇼는 (살짝 윙크를 보내며) 머스트 고온 해야죠.
이 때, 리포터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온다.
AD : (리포터를 발견하고) PD님, 저기 한울 씨.
PD : (급히 다가가) 한울 씨, 시간 없으니까 그냥 내 말만 들어. 지금부터 한울 씨가 진행할 거야. 대본 훑을 시간도 없으니까 우선 올라가서는 시청자 사연이 있다 그 얘기만 해. 그러면 나머지는 셰프님이 다 알아서 리드하실 거야. 알았지? 마음 편하게 먹고, 자연스럽게 흐름만 잘 따라가면 아무 문제없어. 부탁한다, 응? 자, 숨 다 돌렸으면 바로 올라가.
부지불식간에 진행을 맡게 된 리포터는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진행자 위치에 서고, 그 경직된 모습에 제육주의자는 리포터의 등과 어깨를 토닥이며 긴장을 풀어주려 한다. 그런데 우상이라도 만난 듯,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몹시 흥분하며 좋아하는 리포터.
AD : 마지막 광고요, 피디님.
PD : 어, 그래. (2층으로 올라가다가 리포터에게) 긴장하지 말고! 파이팅, 응? 선생님 믿으면 돼, 아무 걱정 하지 마.
PD가 부조정실의 자기 자리에 도달하는 동안, 다시 차례로 조명이 꺼지고 세트 외의 공간은 모두 암흑 상태가 된다. AD는 예의 자기 자리로 이동한다.
PD : (무전기에 대고) 카운트 시작.
AD : (크게) 5! 4! 3! 2! 1!
AD의 카운트와 광고 사운드가 동시에 끝나면 조금 더 밝아지는 세트.
리포터 : 자, 다음 순서는 시청자 사연을 소개해 드리는 시간이죠. 선생님, 오늘의 시청자 사연은 어떤 내용인가요?
제육주의자 : 네, 인천시 부개동에서 정현석 씨가 보내주셨는데요. “제가 조만간 집들이를 하려고 합니다. 제육인의 한 사람으로서 제육주의를 몸소 실천하는 코스요리를 준비하고 싶은데 선생님께서 추천을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라고 코스요리 레시피를 문의해 주셨습니다.
리포터 : 아아, 제육인을 위한 코스요리라 정말 가슴 설레는 상상인데요. 선생님의 고견으로는 어떤 요리들이 적당할까요?
제육주의자 : 우선 애피타이저로, 등심수프에 부챗살양지빵, 갈비잼, 그리고 도가니시럽을 내어 놓습니다.
리포터 : (눈을 감으며) 으음, 듣기만 해도 식욕이 샘솟는 것 같습니다.
제육주의자 : 그리고 전채는, 오리젓을 곁들인 항정살무침에 닭다리젓으로 담근 닭가슴살장아찌, 치맛살젓을 쓴 치킨소박이와 안창살젓으로 간을 한 안심겉절이 등이 좋겠네요.
리포터 : (감정이 고조되어) 아아, 벌써 군침이 돌기 시작합니다.
제육주의자 : 가장 중요한 메인은 앞다리살샤브샤브와 뒷다리살스테이크.
리포터 : (두 손을 모으며) 아하, 행복합니다!
제육주의자 : 혹시나 살짝 느끼할 것 같다 싶으시면, 갈매기살국수와 함흥냉사태.
리포터 : (감동에 젖어) 환상입니다!
제육주의자 : 디저트로는, 차돌박이전병과 목살빙수, 닭봉샤베트와 삼겹살카나페가 그 대미를 장식하는 겁니다!
리포터 : (크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완벽합니다! (정면을 향해) 자, 시청자 여러분. 김태훈 표 제육식 코스요리, 감동 깊게 잘 들으셨죠? 지금부터 시청자 의견을 받습니다. 찬사도 좋고 감탄도 좋습니다. 혹시나 추가하고 싶으신 게 있다면 추천을 하셔도 좋습니다. 지금 바로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시거나 문자,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의견 주신 분들께는 소정의 고기와 다음 주 방송의 방청권을 드리겠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제육주의자에게 몸을 돌리며) 이제... (그러나 말문이 막힌 듯)
제육주의자 :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 네, 시리즈의 마지막! 제 3탄! 종합선물세트를 만들어 볼 시간입니다.
리포터 : (과장된 어조로 맞장구를 치듯이) 어머나! 마지막은 종합선물세트!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말 마음도 고우십니다, 선생님. 구체적으로 어떤 선물을 주실 건가요?
제육주의자 : (역시 맞장구를 치듯 다소 들뜬 목소리로) 이름 하여, <돈육풀세트꼬치구이>와 <멕시칸10종소고기샐러드>! 요리가 지향하는 바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제육종합선물세트! 즉, 모든 제육인의 기쁨과 행복인 것입니다!
리포터 : 엄청납니다! <돈육풀세트>와 <10종소고기>라니, 이야말로 제육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존경해마지 않는 선생님, 재료 소개도 마저 부탁드릴까요?
제육주의자 : 꼬치구이에 필요한 나무꼬치와 샐러드에 필요한 마요네즈, 그 말고는 모두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대로입니다. 자, 다 같이 읊어 볼까요? <다갈색 꽃항아리, 사시 안 경, 삼가 등목하고, 볼꼬집는 갈낙탕이여> 그렇죠. 다리살, 갈매기살, 꽃살, 항정살, 사태, 안심, 삼겹, 가브리살, 등심, 목살, 볼살, 꼬들살, 갈비, 낙엽살! 모조리 꼬치에 꿰어서 굽는 겁니다.
리포터 : 선생님, 소고기10종은 제가 한번 해 볼까요? 여러분도 같이 해요. <설사 우등생이 아니더라도 양질의 안목 앞에는 갈채를 보내야 한다.>
제육주의자 : 훌륭합니다. 설도, 사태, 우둔, 등심, 양지, 안심, 목심, 앞다리, 갈비, 채끝! 멕시칸 샐러드이기 때문에 이 10종을 모두 다~ 길이 4cm, 폭 1cm으로 썬 다음! 그 후 마요네즈에 버무리기만 하면 끝. 그럼, 실제로 한번 해 볼까요?
제육주의자는 리포터의 보조 하에 요리를 시작하고 그 사이 부조정실에 조명이 들어온다. PD가 빗발치는 전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전화목소리1 : 천혜정 아나운서를 도중에 하차시킨 것은 채식주의에 대한 경고인가요?
PD :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전화목소리2 : 김태훈 선생님, 너무 멋지세요. 그리고 천혜정 언니 말싸움 잘 하던데 원래 성격이 안 좋은가요? 그나저나 저도 다음 주 방청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PD : 예, 일단은 인터넷으로 홈페이지에 신청을...
전화목소리3 : 다른 쑥과 마늘들도 스튜디오에 한번 데려다놓고 우리 제육셰프랑 겨루게 하면 어떨까요?
PD : 네,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화목소리4 : 피비린내 나는 제육주의자들, 정말 이제는 TV에 좀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요.
한편, 세트의 제육주의자와 리포터는 꼬치와 샐러드를 완성하고, 이 시점부터 1층과 2층의 대사는 동시에 진행된다.
제육주의자 : 자, 여러분 이걸 보십시오.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로!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래야 한다는 겁니다! 단결! 합심!
전화목소리4 : 네들, 이런 저질 방송 계속 하면 방송국 폭파시켜버릴 거야, 알아들어?
제육주의자 : 오늘 우리는 또 한 번! 쑥과 마늘들한테 지독한 모욕을 당했습니다. 참아야 합니까? 우리가 왜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전화목소리3 : 이강아 불러다 놓고 청문회 한번 합시다! 거짓말 탐지기 같은 거 하나 준비해서 말이야, 그 쑥스러운 여자가 계속 거짓말만 지껄이는데 언론인이라는 작자들이 그냥 놔두고 볼 거야?
리포터 : 맞습니다. 위대한 제육의 힘을 느낄 수 있도록 쓴 맛을 보여 줘야 합니다!
PD : 저희도 예산 문제라는 것이 있어서...
제육주의자 : 우리도 채소 따위는 짓밟아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영광의 순간에 제 옆에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손 놓고 구경만 하시겠습니까?
전화목소리2 : 제육주의가 최곱니다! 채식주의를 없애야 합니다! 모두가 제육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김태훈 만세!
리포터 : 저는 옆에 서겠습니다. 결단코 옆에 서겠습니다! 꼭입니다! 당신과 언제나 함께 하겠습니다!
제육주의자 : 제육주의 내부에서도 여러 의견들이 있음을 저도 압니다.
전화목소리1 : 방송이 그렇게 편파적이면 어떻게 하죠? 당신네는 양심도 없습니까? 아니, 채식주의 성향이 죄입니까?
제육주의자 : 하지만 지금은 온 제육인들이 단결하여 힘을 합할 때입니다. 제게 힘을 주시겠습니까? 제육으로! 우리 모두 하나로! 뭉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의 마늘밭을 쑥밭으로, 저들의 쑥밭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제육입니까?
리포터 : 제육입니다! 제육입니다!
모두의 목소리가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금속성이 시끄럽게 울려 퍼진다. 요리가 다 되었음을 알리는 압력솥의 기운 찬 소리이다. 거짓말같이 찾아오는 정적. 부조정실을 비추던 조명도 사그라진다. 제육주의자가 버너에 손을 가져다대고 잠시 후, 서서히 멈추기 시작하는 압력솥 소리. 제육주의자는 압력솥에서 사골삼계란찜을 꺼내고 다른 요리들과 함께 테이블 전면에 정렬하여 놓는다.
제육주의자 : 지금까지 <특별 생방송, TV 요리 쇼! 만국의 제육주의자들이여, 단결하라!>였습니다.
리포터 :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더욱 새로운 레시피로 찾아오겠습니다.
제육주의자와 리포터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면, AD의 신호에 맞추어 관객들의 박수. 이후, 다시금 무대 전체가 밝아 온다. 제육주의자와 리포터는 휴게 공간의 의자에 앉아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AD는 “수고하셨습니다.”를 연발하며 무대 곳곳을 분주히 다닌다. 잠시 후,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리포터. 제육주의자에게 인사를 하고 퇴장하는데, 도중에 1층으로 내려온 PD와 마주치자 둘은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PD는 리포터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제육주의자에게로 향한다.
PD :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육주의자 : 방송 괜찮았죠?
AD : (헐레벌떡 뛰어오며) PD님! 밖에 지금 난리가 났다는데요. 기자들이 바글바글 몰려들어서, 어떻게든 들여보내달라고 생난리를 피우고 있답니다.
PD : (은근히)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 같은 현대 사회에서는 언론 플레이도 효과적인 전략 중에 하나인데... 이왕이면 선제공격을 하시는 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시는 방편이 아닐까 합니다만.
제육주의자 : (흥미가 동한다는 듯) 그래서요?
PD : 기자 하나 불러다가 특별 대담 형식으로 인터뷰 가볍게 따고, 좀 있다 뉴스 끝나면 붙여 볼까요?
제육주의자 : 껄껄. 우리 박피디님, 일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PD : 아뇨, 전 그냥... 선생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해 드릴 수도 있다는 거죠, 뭐.
제육주의자 : (허공을 보며) 중립일보 김슬기 기자로 합시다.
PD : 승복아! 빨리.
AD는 그 즉시 달려 나가고, PD는 여유롭게 제육주의자의 건너편 의자에 앉는다.
PD : 홈페이지 마비에, 시청률은 또 신기록 갱신입니다.
제육주의자 : 그래요? 몇 퍼센트나...?
PD : 퍼센트로 따질 수준이 아닙니다. 전주 대비 2.5배! 드라마, 스포츠 다 통틀어도~ 역대 베스트 쓰리 진입입니다.
제육주의자 : (놀라) 정말이요? (반색하며) 아이고! 이거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 때, AD가 기자를 대동하여 재등장한다.
PD :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아, 김기자! 여기 앉아요.
PD는 기자에게 자리를 내어 준 후, AD와 함께 객석 앞에 설치된 카메라로 향한다.
기자 : 그간 잘 지내셨죠?
제육주의자 : 덕분에요. 우리 김기자님은?
기자 : 네, 뭐. 그럭저럭. 그럼,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제육주의자 : 성미 급한 건 여전하시구먼. (앉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오케이, 갑시다.
기자 : 오늘 이윤아 교수가 발표한 성명 내용에 대해서는 들으셨습니까?
제육주의자 : 글쎄요... 기자 회견 했다는 것까지만 들었지,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자 : 지금 온 나라에는 제육과 채식이라는 두 마리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그런데 제육인치고 채식주의를 비난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며, 반대로 쑥과 마늘치고 제육을 혐오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는가? 이 사실로부터 하나의 분명한 결론이 도출된다. 즉, 양대 세력은 영양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난 양 진영으로부터 그를 향한 의지나 능력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하여, 조속한 3자 회담의 개최를 촉구한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육주의자 : 단테가 그랬죠.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기자 : 그렇다면 제육셰프께서는 혼합영양론 자체를 전면부정하시는 겁니까?
제육주의자 : 제 입장에서 혼합영양론이라는 것은 허울만 좋은, 말 뿐인 이론입니다. 말로만 영양을 외치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범세계적인 영양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 회색분자는 무용한 존재입니다.
기자 : 하지만 김태훈 셰프님 이전에 제육주의를 이끌던 셰프 정은, 달걀 정책을 표방하며 채식주의와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이루어내지 않았습니까? 채식주의 진영에서도 상당수가 계란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을 열고 싶어 했고요.
제육주의자 : (불쾌하다는 듯)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달걀 정책 같은 유약한 태도 때문에 오늘의 참사가 발생한 겁니다. 그렇게 만만히 보이니까 말이야, 벼랑 끝 전술도 유분수지, 세상에 구제역 바이러스로 협박을 해요?
기자 : 그러면 이제 ,더 이상의 대화나 화해는 없을 거라는 의미이신가요?
제육주의자 :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서로 다르니까.
기자 : 하지만 그래서 노력을 하는 것이잖습니까? 다르니까, 차이가 있으니까, 그걸 좁혀 보려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콩고기 같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의미 있는 노력의 일환이 아니겠습니까?
제육주의자 : (코웃음을 치며) 그건 본질을 오도하는 거짓이자 순수함에 대한 모독이죠. 눈속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허상이란 말입니다. 제가 좀 더 정확히, 보다 엄밀하게 표현해 볼까요? (선언하듯) 그들은 악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같아질 수가 없는 겁니다.
기자 : 그건 제육주의가 선이기 때문인가요?
제육주의자 : 채식주의가...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듯) 악의 쑥이기 때문입니다.
기자 : 오늘 짧은 시간이나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어나며) 그럼,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AD는 기자를 안내하여 출입구로 나가고, PD는 제육주의자에게 엄지를 치켜들어 보인다.
PD : 와우... 마지막 멘트, 장난 아니게 센데요. 악의 쑥... 이거, 이러다가 다음 주에는 정말 역대 탑 찍는 거 아냐? 껄껄껄.
이 때, 기자를 마중 나갔던 AD가 혼비백산하여 뛰어 온다.
AD : 피디님! 큰일... 큰일 났습니다! 저기, 그린셰프가... 채식주의 이강아 셰프가...
PD : 말을 해라, 말을. 그린셰프가 뭐?
AD : 지금 여기... 이 스튜디오로 오고 있습니다.
PD : 그래서?
AD : 이리로 오고 계신다니까요! 이러다 진짜 전쟁이라도 나는 거 아닐까요? 막아야 되지 않나요? 막을까요? 제가 어떻게든... (뛰어 나가려는데) 아니, 벌써 저기에...
채식주의자가 스튜디오 전체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여유로운 걸음으로 등장한다. 채식주의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제육주의자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 앞으로 간다.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에 가득 흐르고, 서로가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가운데 채식주의자의 오른손이 올라간다.
채식주의자 : (악수를 청하며) 너무 했어, 악의 쑥은.
제육주의자 : (손을 맞잡으며) 벌써 들었어? 혹시 나 도청해?
채식주의자 : (장난스럽게 손을 팽개치며) 넉살은... (인위적인 존댓말로) 김슬기 기자, 요 앞에서 만났습니다.
제육주의자 : 아이고, 김 기자 오늘 연타석 홈런이네. (역시 가식적인 존대를 써서)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채식주의자 : 우리가 악의 쑥이면 제육은 지옥이라고요. 채식천사-제육지옥, 내일 헤드라인에 대문짝만하게 뜰 겁니다!
제육주의자 : 이야, 순간적으로 잘도 생각하셨네, 응? 절묘하게, 초성으로 두운 맞춰서.
채식주의자 : 소싯적에 시 좀 썼잖아.
제육주의자 : 아아, 그렇죠. (과장된 어조로) 제가 또 시인을 몰라 뵙고 이런 결례를!
채식주의자 : (가볍게 주먹으로 한 대 치며) 그만 하지.
제육주의자 : (싱긋) 오케이, 오케이! 그나저나 이교수는 뭐야? 뜬금없이, 이 타임에 웬 3자 회담?
채식주의자 : 자기 딴엔 먹힐 줄 알았나 보지, 기막힌 반전으로.
제육주의자 : 에이, 그 친구는 항상 센스가 좀... 역시, 스릴러 과는 아니야?
채식주의자 : 그럼! 내츄럴 본 신파지. 클리셰가 과해.
제육주의자 : 박피디님 만나러 온 거지? 나 먼저 나갈게.
채식주의자 : 아무래도 그림 상 그게 낫겠지? (정중히) 그럼, 살펴 가십시오, 셰프님.
제육주의자 : (역시, 예의를 차려) 네, 얘기 나누시지요.
어안이 벙벙하여 둘의 대화를 바라보던 AD는 제육주의자가 몸을 돌려 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이미 조명이 하나 둘씩 꺼져 가고 세트를 치우는 사람, 설치했던 카메라를 정리하는 사람 등등 모두가 바삐 움직이고 있다. 채식주의자는 PD와 조용히 대화를 시작하고, AD도 객석 앞에 가 선다.
AD : 저기 그럼, 이제 추첨을 할 건데요. 어디 보자, F열 4번! 어디 계십니까? 손! 아하... 의자에 아무런 표시가 안 되어 있죠? 그러게... 헤헤... 그래서~! 제가 이럴 줄 알고 또 퀴즈를 준비했지요, 하하하. 기본적인 상식 문제입니다. 답 알겠다 싶으면 손드세요. 자, <6자회담의 당사국이지만 실제로 한반도의 통일을 바라지는 않고, 아직도 한반도가 군사적-이념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가장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원인을 제공하였으며, 결국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쭉 취해 왔던 나라들은 어디일까요?> 일, 베트남-콩고! 이...
PD : (AD의 등을 툭 치며) 이강아 셰프님 가신단다.
AD : (몸을 돌리며) 아! 예.
PD : (채식주의자에게 AD를 가리키며) 이 친구가 우리 조연출.
채식주의자 : 그래요? (악수를 청하며) 잘 부탁드립니다.
AD : (손을 잡으며 꾸벅) 예... 처음 뵙겠습니다. 이승복입니다.
PD : (채식주의자를 따르며) 주차장으로 가실 거죠?
채식주의자 : 에이, 괜찮아요. 피디님은 여기 정리하셔야죠.
PD : 밖에 난리일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채식주의자 :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렴 못 나갈라고? (살짝 목례를 하며) 자, 그럼. 마무리 잘 하시고요.
PD : 네, 들어가세요.
AD : (깍듯이) 안녕히 가십시오. (채식주의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피디님. 근데 아까... 그거... 그건... 뭐죠?
PD : 뭐가?
AD : 아니... 제육셰프님이랑 그린셰프님이랑...
PD : (AD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원래 시스템이란 게, 적이 없으면 무너지는 거야.
AD : 예...?
PD : 공공의 적이나 맞수가 있어야 오히려 내부 결속이 강해지는 법이거든. 자기들끼리는 서로가 적당한 대상인 거지. 그보다, 얼른 정리하자. 오늘은 거하게 회식 한 번 하는 거야! 너 아직 차돌박이, 육회로 안 먹어 봤지? 그게 입에서 살살 녹는 거거든. 그래, 간만에 기분 한 번 제대로 내 보자! 내가 실탄 떨어질 때까지 쏠 테니까~ 카메라고 조명, 분장이고 할 것 없이 감독님들이랑 스탭들 다 챙겨서 두 시간 후 로비에서 집합! 알았지? 아, 그리고 보도국에 연락해서 천혜정 씨도 꼭 부르고. 암, 오늘 같은 날 여우주연상이 빠지면 안 되지.
AD : (스스로 확인하듯) 예, 두 시간 후 로비요. 근데 고깃집 가신다면서 천혜정 아나운서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표정이 변하더니) 아... 아... 그런 건가요? 결국... 이 모든 게 다... 쇼...
PD : 우리 방송이 뭐냐?
AD : ... 예?
PD : 너 지금 하는 프로그램이 뭐냐고?
AD : 그야...
AD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세트 뒷배경의 패널로 향하고 때마침 무대 위의 조명은 거의 다 꺼진 상태인데, 패널을 비추는 조명들만 켜진 채로 남아 있다. 뒤이어 그마저도, 조명 하나만을 남긴 채 곧바로 꺼진다. 마지막 남은 조명은 패널의 글자 중에서도 <TV 요리 쇼!!>의 <쇼!!>를 비추고 있다. 이윽고, 전체 암전.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