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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박 지원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
그는 1737년 약용보다 25년 전에 노론 벽파 계열의 아버지 박사유와 어머니 함평 이씨 사이 2남 2년 중 막내로 출생.
연암의 정치적 배경과 입장에 대해 알아 보자. 당시 당파는 시파와 벽파,노론과 소론, 남인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노론과 소론은 서인에서 분화된 것이다. 시파와 벽파는 노론에서 분화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경계에서는 서로 섞이는 부분이 있다. 시파와 벽파는 세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생긴 것 같지만 공식적으로 불려진 것은 정조 12년 교리 정만시의 상소를 통해 공식적으로 등장한 말이다. 그 연원을 따져 보니 영조때 까지 소급된 것 뿐이다. 시파는'시의를 쫓는다'는 것이고 벽파는 '시의보다 명분과 원칙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영,정조때 쓴 탕평책에 찬성하면 시파,반대하면 벽파라 구분했다.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경종 때 일어난다. 당시 집권세력인 소론이 경종의 후계자로 노론이 후에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왕세제로 밀자 노론 4대신을 역모로 몰아 참살한다. 이 사건이 신임사화다. 결국 영조가 왕이 되고 노론이 권력을 장악한다. 이때 소론과 일부 남인은 이인좌의 난(영조 4년)을 비롯한 역모사건을 일으키지만 모두 실패한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오르지만 탕평책을 쓴다. 노론의 일부는 이를 반대하게 되는데 이들이 벽파다. 즉 노론벽파는 신임사화때 죽어간 대신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을 죽인 소론과는 같은 정치를 할 수 없고 그들과 하고자 했던 시파들을 싫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암은 정치적으로는 노론 벽파의 입장에 섰으나 이는 당론이라기 보다는 '의리 혹은 철학의 문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정치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큰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체질이 안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연암은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잘 했고 가족들에게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살갑게 지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삶을 풍미했다. 그러나 그의 주변인들을 돌연사가 많았다. 19세에 처숙 이양천이 죽었고,2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24세에 할아버지가,31세에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35세에 맏누님과 벗 이희천을 잃었고,42세에 큰형수,45세에 정석치,47세에 홍대용,51세에 형님과 아내를 잃었다. 52세에 맏며느리,57세에 벗 이덕무,60세에 지기 유언호가 ㅈㄱ었고 생의 마지막 해인 69세에 죽기 몇 달 전에 박제가가 먼저 떠났다. 이 부분을 길게 인용하는 이유는 연암이 관계를 중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족과 절친과의 이별은 곧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연암은 16세에 혼인을 했다. 연암은 처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장인과 처숙 이양천에게 공부를 배웠다. 처남 이재성은 연암의 작문에 평론을 도맡아 했고 연암의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연암의 10대 후반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를 고치기 위해 저작거리에 나서서 여러 계층의 사람과 어울려 지냈다. 이때 만난 이들과의 이야기를 정리해 21세에 <방경각외전>을 지었다.
연암은 '20대는 방황과 유람으로 30대는 지성과 우정을 연마하면서 보냈다.'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장에는 갔으나 빈종이를 내거나 그림을 그려 내곤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31세에 돌아가시고 노원에다 장지를 마련했는데 여기서 산송이 일어났다.(49쪽) 이 산송에서 애먼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것을 보고 아예 과거의 꿈을 접었다 한다. 34세에 감시에서 장원급제를 하고 영조를 친견하였으나 이후 과거를 보지 않았다 한다. 32세때인 1768년에 백탑으로 이사하여 이사,이덕무,이서구,서상수,유금,유득공과 어울려 지냈다.
1777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 홍국영의 세도가 세찼다. 연암은 평소 관계가 좋지 않았던 홍국영의 화를 피하기 위해 금천 연암골로 피신했다. 여기에 그의 벗 유언호가 큰 역할을 했다. 1780년 44세가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그 해 5월 건륭황제 만수절의 사절단을 따라 중국으로 떠난다. 10월에 귀국한 그는 열하일기 집필에 들어 간다. 1783년 그의 나이 47세에 <열하일기>를 완성한다.
그는 가난했다. 그는 나이 50에 음직에 나서게 된다. 그의 벗 유 언호의 천거가 있었다.1791년 55세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했다. 1793년에 문체반정이 일어났다. 정조는 간접적으로 잘못된 문체에 대한 잘못을 사죄하라는 취지의 하교를 전달한다. 당시 패사소품체의 문체의 배후에 열하일기가 있고 박지원이 있다고 보았다. 연암은 은글슬쩍 무리없이 시선을 비껴간다. 1797년 61세에 면천군수에 임명되어 정조를 알현한다. 1801년 봄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상경. 그 이듬해 66세에 말도 안 되는 산송를 또 겪게 됨. 홧병이 생기게 됨. 1805년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침.
정리하면, 정치적으로 노론벽파 계열의 서울 양반 적자 출신. 체질적으로 정치가 맞지 않았음. 다만 신임사화때 상을 당한 노론4대신에 대한 의리로서 정치적 입장을 갖고자 했음. 10대 후반에 우울증이 있어 고생함.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치유 됨. 20대도 과거는 보나 과거를 거부했음. 30대 백탑 주변에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며 후에 북학파라는 집단지성을 창출함. 홍국영의 세도 때 잠시 시골로 은신하는데 그 곳 지명을 때 연암이라 함. 44세에 연행에참여 함. 47세에 <열하일기>를 간행 함. 이 때가 득의의 시절.인생하이라이트. 50세에 생계형 관직에 나섬. 57세에 문체반정을 당함. 적당히 넘어 감. 정조가 죽고 이듬해 65세에 관직에서 물러 남. 69세에 세상을 뜸.
책에서는 다산과 연암을 비교해서 이야기를 풀어 낸다. 서로 합쳐 질 수 없는 양 극단의 이질성을 갖는 존재들이었다고 사주를 풀어 가며 설명한다. 인생 연표를 보며 차이를 밝혀 낸다. 정치적 성향(신임의리와 임오화변)과 인생관(주변과 중심),문체의 차이(소품체와 정학체)를 통해 둘을 대립시킨다. 그러면서 이 둘이 동시대 사람이면서 전혀 만나지 못했던가를 풀어 본다. 그 것은 서로 너무나 달랐고 나름 서로 강적이었다는 것. 이는 시라소니와 김두환이 붙지 않았다는 비유와는 다르다. 서로 접점이 없는 세계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기 독립적이면 의미가 퇴색된다. 서로 빛을 비출 때 만이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18세기 지성사의 큰 별이다. 큰 지도이다. 이둘은 각기 다른 맥락으로 이해되고 접근되어야 할 것이다. 다산은 근대성에 맞는 빛 입자의 특성을 갖고 있다. 연암은 근대성이 해체되는 21세기 노마드의 시대에 어울린다. 그 빛은 파동이다. 다산은 하나의 큰 산이라면 연암은 고원이다. 조선은 다산과 연암이라는 18세기 지성사를 끝으로 암흑의 시대로 빠져 든다. 식민지의 시대를 거쳐 그 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사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그 둘은 실학이라는 영역으로 묶여져 한 때 사유되었다. 북학파와 다산학파,하나는 중상주의 하나는 중농주의라든가 해서 근대성의 맹아로 의미지워졌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같은 점도 있다.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 해학과 패러독스로 당시의 가벼운 소품체 수준을 벗어나면서 동시에 전혀 새로운 사유성을 선사한 연암의 글은 그저 괴이한 글로 치부받았다.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것은 식민지 시대 1920년대에 가서나 가능했다. 다산도 마찬가지다. 갑신정변 후 고종 때나 되어서야 공식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곧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버렸다.
이제 다산과 연암의 지적 결과물은 우리가 써먹을 차례다. 연암의 상상력과 다산의 지구력을 합한다면 정말 상상하기 힘든 지류들이 탄생할 것이다.먼저, 책에 나온 인상깊은 문장과 정리글을 인용해 본다. 고미숙의 글은 독자의 상상력을 이끌어 낸다. 산문인데 다분히 시적이고 시적인데 평론이다. 그것도 커피숍의 수다처럼 긴장되지 않게 그러나 세미나의 뒷풀이처럼 간단 명료하게.
1. 정조시대 정파적 대립을 설명하며,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 발전의 발목을 잡는 벽파! 사도세자는 잘못이 없었다! 남인의 처세는 항상 옳다.는 인식이 실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의미의 표현(42쪽)
우리는 늘 역사를 거대하게 절단한다. 선과악,시와비,좌와우 등으로.몹시 선명해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은 망상이요,편견이다. 통계치대로 살아가는 이가 없는 것처럼,권력과 인생이란 언제나 미시적 선분 위에서 작동한다.
2. 연암이 과거를 포기한 이유에 대해 10대 후반에 앓았던 우울증, 처숙 이양천의 갑작스런 죽음,벗 이희천의 억울한 죽음,31세 때 겪은 산송사건으로 한사람(이상지)을 결과적으로 폐인으로 만든 일을 듣는다. 그러나 그렇게 이유가 외적인 것일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51쪽)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간주한다. 정치적 명분이나 대의 아니면 출생의 비밀 혹은 사랑의 아픔...등등. 하지만 삶은 그런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솔직히 이런 전제야말로 인생에 대한 거대한 망상체계에 불과하다. 왜 과거를 작파했느냐고? 연암은 말하리라.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뿐이다!"라고.
3. 연암에게는 친구 유언호가 있었다면, 다산에게는 중형 약전이 있었다.(58쪽,67쪽)
4. 과거를 포기한 연암에게는 또 다른 공간과 그 곳을 여행할 자유와 시간이 생겼다. 이 곳에 벗들이 함께 했다. 우정과 유람.연암 청춘의 키워드. 추동력은 지성. 30대 이후 백탑 주변에 모여 살면서 지식의 융합과 통섭을 시도하였다. 이름하여 백탑청연! 이들의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영.정조라는 배경이 있었지만 명말청초의 변환도 한 몫 했다. 중국은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문명의 최고 절정기였다. 서양의 고학기술과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동방을 공략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이중 연암사단을 자극한 것은 청 문명의 저력과 명청소품. 주자에서 양명으로 양명에서 이탁오로 이어지는 양명좌파의 패러다임과 그것을 가능케한 청 문명의 역동성에 열광했다. 소품체와 북학. 백탑청연의 두가지 키워드다. (73쪽)
그러나 다산은 서양의 기술과 천주교에 열광했다. 청문명의 용광로속에 천주교에 끄집어 냈다. 그들에게 그건 기술과 학문을 넘어 존재와 우주에 대한 고귀한 가르침이었다. 다산은 정조를 만나면서 천주교를 버렸다.(기교) 그 빈 공간을 정조가 채웠다. 다산은 중심과 이상,유토피아를 지향했다. 그 것이 다만 천주교에서 정조로 후에 학문 자체로 바뀌었을 뿐이다.(77쪽 약간 변주)
5. 연암이 첫 관직에 나선 것이 1786년. 다산이 대과에 급제한 때가 1789년.문헌에 같은 시공성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1789년 평시서주부로 있던 연암은 배다리 낙성식에 참석하라는 정조의 명을 받는다. 다산은 물론 이를 설계 했으니 당근 참석이고. 상황은 어땠을까? 독자의 상상이 즐겁다(88쪽)
6. 정조와 벽파는 앙숙이었을까? 실제 벽파의 핵심 심환지와 정조는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긴밀한 관계였다.그가 다산의 후원자였다. 정작 그를 공격한 것은 젊었을 적 친구였던 남인들 후에 공서파로 갈려진 사람들이다. 홍낙안,이기경,목만중,아~! 암행어사때 악심을 품은 서인보 추가. (90쪽,95쪽) 연암에게도 원한이 있다. 유한준. 젊을 적 그의 문장을 비판한 일이 있었는데 이 것이 그의 저존감을 확~긁었나 보다. 그는 평생,죽을 때 까지 연암을 괴롭혔다.(99쪽)
이기경그룹은 잔인하고 집요, 서안보는 비열하고 쪼잔하다. 인간의 시기심과 질투심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참자! 이렇게 역사의 비평을 받는 쪽팔린 일은 당해야 싸겠느냐! 이들의 후손은 얼마나 조상을 자랑하겠냐. 큰 벼슬을 한 선조가 있는 명문 양반집이라고 그 알량한 술좌석에 얼마나 침 튀기며 자랑할 쏜가~! 후손의 헛탕질에 조상도 일정 부분 잘못이 있다는 거 알아두길.
7. 부귀공명과 지성은 양립할 수 없음을 이보다 잘 보여 줄 수 있을까. 또 배움과 익힘,독서와 글쓰기만이 생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 줄 수 있을까. 연암이 '연암'이 되고 다산이 '다산'이 된 건 이 시간들을 통과했기 때문이다.(123쪽)
8. 연암과 다산,정조의 삼각형구도에서 삼중주로 전환을 이야기 하며,(127쪽)
연인관계는 둘 밖에 모른다는 말이 있다. 겉 다르고 속 다르기 때문이다. 부러 속이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욕망과 표상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즉,욕망은 기질이나 품성등 '자연'에 속하는 데 반해 표상은 언어라는 사회적 그물망을 통과해야 한다. 그때 미끄러진다. 즉, 모든 욕망은 언어의 회로를 거치면서 변주,왜곡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각자 구사하는 문법도 다 다르지 않은가. 그러니 관계를 맺는다는 건 기본적으로 '다중추돌'에 다름 아니다. 회한과 미련,동경과 좌절이 수없이 교차할 수 밖에 없다. 연인관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기본적으로 엇갈림의 연속이다. 군신,사제,우정의 근대 이전의 관계들이 바로 그 엇갈림의 지점들이다. 열렬한 사모와 동경,쓰라린 결별의 아픔,배신과 음모등등..
-욕망이란 언어를 통해 사회화 되고 타자의 인식망을 통해 세탁된다. 여기서 오독과 오해가 발생한다. 하여 욕망은 왜곡되고 사회화된 그 욕망을 내재화하며 나는 살아가게 된다. 그러한 불일치는 또 다른 욕망의 가지를 치게 되고 말이다.
연암 1737년~ 1805년, 정조 1752년~ 1800년, 다산 1762년~ 1836년. 1 세기에 걸친 18세기 조선 후기 르네상스이 상징.
그들이 빚어낸 삼중주의 상징년도. 1783년,1792년,1801년. 83년은 열하일기의 완성 년도. 다산은 22세 진사과 함격 성균관 입학 시기. 열하일기는 북학이라는 코드로 환원되는 저술이 아니다. 그안에는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 했던 사유의 잠재적 힘들이 난무한다.(158쪽). 1752년은 정조가 주인공 문체반정을 일으킨다.그 때 지목된 배후인물은 연암. 물론 전해 있었던 진산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남인 신서파들을 위해 국면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겠다. 그러나 문체에 대한 혁명성에 이슈파이팅을 하려는 정조의 본 뜻도 잇었다. 문체란 지성의 원초적 리듬과 강밀도를 표현한 것. 고문의 규범과 권위가 무너지면 사학이 범람하게 된다. 그것이 한쪽으로 패관문학이 한쪽으로 서학을 부추긴다고 본 것이다. 정학을 바로 잡기 위한 승부수! 이 것이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자세문제도 건드렸다.당나라 서적을 금한 것. 이 서적은 부드러워 누워서도 보고 엎드려서도 볼 수 있어 사대부의 독서 자세를 흐트린다는 것. 닥나무로 만든 조선 서책은 딱딱하고 두껍고 무거워 앉아 서안에 올려 놓고 볼 수 밖에 없는 것. 올바른 자세에 올바른 문체와 공부가 나온다고 본 것이다. 1801년은 다산이 주인공 정조가 죽고 다산은 유배가 된다. 정조 부재를 통해 다산에게 있어 정조의 존재성이 증명된 것이다. 연암은 관직을 그만두고 삶의 정리기에 진입한다. 정조와 연암은 가고 다산은 학문에 집중하여 큰 산을 이룬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는 배제된 상태. 그렇게 삼중주는 끝이 난다. 그러면서 18세기 찬란한 지성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9. 문체 반정에 대하여
노론계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건 소품체엿다 소품체란 명말청초 양명학의 이단아 이탁오의 철학을 문학비평으로 변주한 원굉도그룹(공안파)의 문체적 실험을 의미한다. 고문이 규범과 권위 안에 갇혀 버렸다면 소품은 짧고 강렬했다. ..고문의 휘장을 벗어던지니 세상은 무수한 차이들의 향연이었다. 고문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던지니 존재와 세계는 마치 '등 푸른 고등어'처럼 펄떡거렸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은 이 역동적인 에너지에 열광하였다. 북학 또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원천도 바로 이것이었다.(192쪽) 양명학은 성리주자학이 원낙 기세를 떨치는 조선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허나 그의 분지인 공안파의 비평론은 적극 수용하여 임진,병자 양난 이후 문물이 무너진 세계에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려 했다. 그러니까 소품체는 스타일 혹은 수사학이 아니라 사상적,인식론적 첨점이었던 것이다.(195쪽)
문체는 신체성,또는 체력이다. 따라서 문체가 그릇되면 인재를 기를 수 없고 그러면 국가장치가 위태로워진다.(정조생각,198쪽)
10. 이분법의 함정
적을 향해 날린 무기가 고스란히 되돌아 온다. 이런한 논지의 결론은 하나다. 가차없이 차단하고 금지시키는 것.패관잡서를 비판하는데 인재라 하며니 책은 불태워지고 사람은 중벌로 다스려야 한다. 서교를 반대하는 이들의 결론과 비슷하게 된다.(199쪽)
11. 다산의 내용적 혁신과 형식적 보수의 모순
다산은 소품체에 대하여 극력 반대했다. 그러나 유학의 태도로 선진고경을 주자학 도그마를 벗어나는 탈출구로 삼았다. 일면 안 맞는 것 같지만 다산 사상 자체는 이러한 형식적 전형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여 내용적 진보를 이룬다 해도 그 사상 체계는 결국 왕조체제에 맞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근대 이후,민주주의의 적 가치,나아가 민중적 가치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후대의 시선에 의해 굴절된 다산의 사상일 뿐인 것이다.(201쪽 내용 변주)
12. 연암의 문체 반정론.
고문이냐 금문이냐는 문젯거리가 아니다. 스타일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현장의 생동감을 어떻게 하면 잘 표현할 수 있느냐이다. 왜 사람들이 고문을 보고 졸까? 옳고 엄숙하고 훌륭하면 뭐하는가? 반복과 권태의 회로에 빠져 있는 걸.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권태다. 문체건 삶이건 정치건 그래서 권태만큼 막중한 정치적 이슈는 없다. 왜 정치인들은 이 문제 만큼 무심할까? 왠 줄 아는가? 권력투쟁에는 권태가 없기 때문이다. 늘 쫓고 쫓기고,죽고 죽이는 권력게임의 장에 권태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니 대중들이 자신들처럼 그렇게 사는 줄 안다. 그래서 늘 도그마에 빠지는 것이다. 고로 도그마는 거대한 반복이자 끔찍한 권태다. 중요한 건 그 회로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다. 생성을 향한 실험은 그때 비로소 가능하다. 중요한 건 배후가 아니다. 원굉도,김성탄이 아니다. 명청소품이 아니다. 공안파가 아니다. 활발발한 생동감 그 자체다. 그것을 국가와 제도가 어떻게 길들이겠는가. 국가와 제도는 일방향적인 균질화를 강제한다. 그 배치에선 생성과 창조가 불가능하다. 생성과 창조에는 방향이 없다. 사방으로 열려 있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그것이 생성이고 창조다
정조와 다산은 반박한다. 그래서 위험한 거라고.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것들이 대체 세상을 위해 뭘 하겠느냐고,풍속만 어지럽힐 뿐 대책도 없을 거라고 그러고도 아무런 책임도 지려 하지 않을 거라고
연암은 이렇게 반박할 거다. 법고창신. 아! 옛 것을 배우는 사람은 형식에 빠지는 병이고,새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법도가없는 것이 탈이다. 만약에 옛 것을 배우더라도 변통성이 있고,새것을 만들어 내더라도 근거가 있으면 지금의 글이 옛날의 글과 마찬가지일 것이다라고.그러나 연암은 더 나간다.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빛은 날마다 새롭다' 이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사이의 변주를 말한다. 정조와 다산은 고문과 소품간의 이분법적 장벽을 강조했다면 연암은 사이의 변주가 가능하다면 어떤 문장이든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정조가 문체반정을 일으키면서 그 주범인 연암을 직접 공격하지 못 한 것은 소품체라는 형식에 연암이 구애받지 않았다는 것. 정체는 분명 아닌데 그렇다고 소품이 갖는 협소한 틀을 벗어난 전혀 다른 사유와 글쓰기 실험이 들어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결국 핵심은 자연스러움,자기 자신의 언어,입체적 구성등이다. 그 반대편에 표절,주어진 틀,고정성,과문이 존재한다. 연암은 진부함을 참지 못 했다. 인순고식-낡은 관습에 사로 잡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 구차미봉-구차하게 임시변통을 일삼는 것이 진부함의 극치다.
다산은 파란과 생색이 묘한 문장을 짓고자 했다. 파란은 물결의 파장이 일으키는 무늬고, 생색은 만물의 생동하는 빛깔이다. (206쪽)
13.천주교가 조선사회에 급속하게 접속한 이유
성리학적 질서 외부에 있는 마이너들의 정서와 접속했기 때문이다. 남인 사대부들과 중인 이하의 평민,그리고 여성들. 이들이 보기에 성리학적 세계 안에서는 출구가 없다. 태평성세에 대한 기다림도 이젠 지쳤다. 헌데 아주 멀리서 어떤 빛이 보인 것이다.(224쪽)
14.다산은 소품체에 연암은 천주학에 강경한 반대입장을 견지했다.
그렇다면 다산은 소품체에 무심했고, 연암은 천주교에 무지했다? 당쟁과 파벌등의 사안에 그토록 냉철한 그들이 이 두 사안에 있어 과격한 언사를 쏟아냈을까? 아마 그 것은 두 문제가 폭발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문체가 세도를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 천주교가 얼마나 조선인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알아서 그랬던 것은 아닌가?
문체를 비판한 근거는 실용과 이념이다. 후자는 국가장치.유형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게이고 무체와 지성은 정신,곧 ㅜㅁ형의 원리가 주도하는 세계다. 층위가 다르다. 교정은 불가능하다.
천주교는 노론벽파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남인 공서파들이 주도했다. 정조는 남인 신서파들을 지켜 주지 못 했다. 또한 종교는 영혼의 영역이다. 권력과 국가장치는 이들을 결코 포획하지 못 한다. 검열과 박해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원초적으로 반동적이다.
문체와 서학은 세계사와 맞물려 있었다. 소품체는 명말청초 곧 양명학의 조선적 변주이고 천주교는 서양과 동양의 마주침이라는 문명사적 사건의 일환이다. 전자는 결국 성리학적 기반을 흔들어 놓았고 후자는 동양 전체를 침몰시킬 쓰나미의 예고편이었다.연암과 다산,정조는 그 세계사적 거대한 흐름을 읽어 내지는 못했다. 다만! 이 징후가 불러일으킨 시대적 균열위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최선을 다해 갔다는 사실에 있다.(231쪽)
15.열하일기와 목민심서의 차이
전자는 공간을 가로지르고 후자는 시간의 추이를 따라간다. 토대는 그러하지만 상부구조는 전자는 시간적 변화가 핵심이고 서사와 사건을 구성하는데 주력한다. 후자는 공간적 배열이 더 우선이다. 항목별 질서와 배치에 더 중점을 둔다. 소리는 시간적 리듬을 타면서 움직이고 빛은 공간의 점유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전자는 청각이 후자는 시각이 더 주도적이다. 청각은 다중적이지만 시각은 일의적이다. 청각은 귀,신장으로 이어진다. 시각은 눈빛 심장으로 이어진다. 유머와 패러독스를 통해 의미를 다양하게 분사하는 것이 연암의 전략이라면 다산은 주석과 인용을 통해 백과전서식 종합에 주력한다. 연암이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면 다산은 시각적 도표-프리젠테이션의 명수다. 전자는 물의 속성이고 후자는 부르이 속성이다.(261쪽)
열하일기를 통해 글쓰기에 필요한 상상력과 저력을 배울 수 있다면, 목민심서에선 책읽기에 필요한 근기와 집중력을 익힐 수 있다.(268쪽)
두 작품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건강함이다. 그것도 위대한! 위대한 건강이란 병없이 체력이 완성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황을 주시할 수 있고, 어떤 악조건에서도 생의의지를 끌어 올려 무언가를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뜻한다. 연암은 질적 도약,다산은 양적 확산의 종결자다. 그 원천은 체력이다.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포기하고 또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시 획득하고 획득해야 하는 위대한 건강의 화신들이다.(270쪽)
연암에게 낱낱의 사항들보다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 혹은 서사가 더 중요하다. 다산에게는 그 내용들을 채우는 개별 항복들이 더 중요하다. 한치라도 흔들리면 전체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283쪽)
연암은 당시 지배적 이념인 성리학과 북벌론에 맞서 새로운 이상과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내부적 균열을 통해 거대담론의 지반 자체를 와해시키는 대 주력했다. 천주교에 인연이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천주교와 접속을 하려면 원대한 비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281쪽)
목민심서는 봉건체제의 모순-삼정문란,아전과 토호들의 수탈,민의 수난과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읽는다. 이렇게 읽으면 재미없다. 이것을 베이스로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과 풍속을 음미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제도에 대해 연암과 다산은 부정적이었다. 연암은 엉망진창인 과거장에서 살아 남은 것 만도 다행이라고 긍긍 앓으면서 결국 포기하는 길로 갔다. 다산은 그럼에도 과거는 봐야겠다고 했고. 이러한 난장판을 바로 잡기 위해 수령이 제대로 해야 한다고 혁파를 한 거고.(285쪽)
16. 명랑과 숭고
명랑이란 사건 혹은 사물에 물결과 빛깔을 부여하는 경쾌한 기운이다. 어떤 상황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해 주는 그리하여 경쾌한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연암의 명랑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열하일기에 들어 있다.(293쪽)
유머와 해학,역설과 기지등은 단지 우스개가 아니라 삶과 세상을 보는 연암의 시선, 곧 '명랑함'의 수사적 전략이기 때문이다.(296쪽) 연암은 성리학적 엄숙주의에 유머와 역설의 명랑함으로 맞섰던 것이다.(297쪽)
다산은 이기같은 개념보다 효제나 풍간같은 실천적 윤리를 중시 했다.(297쪽) 환곡은 사창이 변한건데,백성의 뼈를 깍는 병폐가 되었다. 하여 수령이 잘해야 한다. 수령은 엄숙만 해서는 안 된다. 모순과 비리로 얼룩진 유학자들의 교설을 제압하려면 거룩해야 한다. 이 때의 미학적 기제가 숭고다(300쪽)
목민심서는 분명 감동적이다.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감동의 파고가 늘 비슷하게 변주된다는 것. 그래 세상은 다 썩었어,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어,이걸 바로 잡아야 해,거룩한 위엄을 갖추어야 해,수령이 잘 해야 해! 카타르시스는 한 번으로 족하다. 이 것이 두번 세번 반복되면 정서적 울림이 약해진다. 그러다 문득 피로감이 밀려온다. 모든 비극적인 가치드릐 비극이다. 숭고 역시 그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연암의 명랑성은 자주 비방을 불러왔다. 상상 그 이상의 감흥을 유발하지만 종종 경박함으로 오인했다. 경쾌함에도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가 드물었다. 다산은 고독했다. 높고 웅장하지만 쉽게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이것을 얻으면 저것을 잃고 저것을 얻으면 이것을 잃는 것. 이것이 문장이다. 이것이 인생이다.(303쪽)
17. 머묾과 떠남의 동시성: 연암의 유목민적 태도
고을 원으로 있는 사람은 비록 내일 당장 그만두고 떠날지라도 늘 백 년 동안 있으면서 그 고을을 다스린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기술지건 어원이건 늘 거기에 리듬과 서사를 부여했다. 바로 융합과 소통의 글쓰기다.(307쪽)
18. 목자의 윤리학 계몽주의,그 한계
사목의 원 뜻이 목부,곧 가축을 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목자와 양떼, 이 관계를 잘 지키는 성인이 도다.(309쪽)
모든 항목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지킨다고 해서 좋은 수령이 될지는 또 의문이다. 그걸 지키다 보면 스스로의 잠재력과 자발성은 현저히 떨어질테니 말이다. 이게 사목권력,계몽주의의 한계다. 계몽정신은 균질화를 지향한다. 불규칙하고 예측불가능한 것들을 혐오한다. 거기에서 모순과 비리가 싹튼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불규칙 바운딩을 가능한 한 제거하는 것을 정치와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311쪽)
아들-제자의 실력이 엄청 늘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스승에 대한 의존성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배움의 자발성을 위축시키는 것.이게 계몽의 한계다.(380쪽)
그러니 다산은 그런 계몽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왜냐? 스스로 배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계몽의 욕망을 압도했던 것이다.(382쪽)
계몽은 제자들을 스승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촉발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건 방향과 목표가 아니라 리듬과 박자다. 각자 자신의 길을 가되 서로 교감하고 감응할 수 있으면 된다.(387쪽)
19. 양반전과 애절양
프레임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진다. 마이너의 시선으로 보자 양반의 허위와 위선,기득권과 폭력만 난무하는 진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판도 논평도 필요없다.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폭소와 반감을 야기할 수 있다. 시선의 전복과 진상의 폭로,이것이 연암식 풍자의 핵심이다.(321쪽)
연암의 작품에 등장하는 하층민은 민과 백이라기보다는 마이너에 가깝다. 이들은 억압받긴 하지만 소외된 인간들은 아니다. 억압과 소외는 다르다. 전자는 외적 구조와 관련된 것이라면 후자는 내적 심리와 관련되어 있다.(324쪽)
연암이 겨냥한 건 관계의 윤리학이다. 연암은 윤리적 해방의 차원에서 사회적 모순에 접근했고, 다산은 통치의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수탈의 현장을 고발했다.(325쪽)
20; 카오스와 코스모스
우리가 푹 젖어 있는 논리적 회로가 이거다. 뭐든 원인과 목적을 설정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습속. 이렇게 인관론을 거치다 보면 제일의적이고 가장 일차적인 의도를 설정하게 된다. 그럴 때 하늘이 호명된다. 그때 호명된 하늘은 카오스에서 분리되어 초월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모든 것은 하늘이 창조한 것이다라고..(339쪽) 다산의 상제나 효제나 다 코스모스다. 효제란 인이다. 인이란 총괄해서 하는 말이고 효제란 분할해서 하는 말이다(342쪽) 계몽주의와 리얼리즘의 원조로서 다산! 그 인식론적 원천에는 이처럼 상제의 화려한 부활과 인간중심주의,그리고 유토피아적 열망이 부글거리고 있다.(347쪽)
21. 책읽기의 두가지 방법(350쪽)
다산의 저술은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된다. 연암은 하나하나가 전체다. 전자는 박람강기로 갈 수 있으나 후자는 어렵다. 다산은 사기를 분석하여 지식을 제대로 얻는 데 촛점을 맞추었지만 연암은 사마천의 심정을 읽으려 했다. (350쪽)
22. 도그마를 무너뜨리는 방법
언어와 세계,말과 사물은 늘 일치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마로가 사물이 심각한 간극(소외)을 연출할 때, 그것을 일러 도그마라 한다. 따라서 변환기에는 이 간극을 둘러싸고 각종 이슈들이 제기된다. 하지만 국가장치는 모든 권력과 시스템을 동원하여 그것들을 일방적으로 침묵,봉쇄시켜 버린다. 18세기 성리학이 그렇고 북벌론이 그렇다. 이 독단적 배치와 맞서기 위해선 언어의 탈영토화가 관건이다. 거기에는 두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낡은 상투성의 체계로부터 탈주하여 예측불가능한 표상들을 증식해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통사법을 뒤덮고 있는 먼지를 털어 내고 최대한 투명하게 만드는 것. 연암과 다산은 두 방향의 대표주자다.(353쪽)
23. 기질과 지성,운명의 삼위일체
다산은 성리학적 도그마와 소품문의 번쇄함을 동시에 밀어냈다. 선진고경의 이상을 체득한 다음 그것을 경세치용의 문장으로 토해 내는 방식을 통해 양수겸장. 연암은 선진고경이나 경세치용이라는 이상을 설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는 순간 말과 사물의 관계는 재영토화될 것이다. 그 포획장치로 달아나려면 사이의 스릴과 서스펜스를 계속 즐기는 수 밖에 없다. 매순간 새로운 길을 여는 탈영토화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연암은 사이비를 못 참고, 다산은 뒤죽박죽 섞이는 것을 못 참는다. 그런 기질이 그들의 문체를 만들고 그 문체가 곧 그들의 인생을 결정했다.(361쪽)
24.다산과 연암의 상징
우도와 강학-연암의 친구들과 다산의 형제들
북학과 서학
생계형 관직과 왕의 남자
열하일기(74쪽)와 목민심서
명랑과 숭고
빛의 파동과 입자.
유목 과 목자
20세기와 21세기
주변과 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