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와 난고손여행1 - 미야자키에서 휴가시를 거쳐 백제 마을 난고손(남향촌) 에 가다!
11월 4일 아침에 규슈 동남부 미야자키 역에서 로컬 기차를 타고 한정거장인
미야자키 진구 역에 내려서는 미야자키 신궁 을 본다.
그러고는 다시 미야자키역 宮崎駅 으로 돌아와 동구로 나가 분수 가 있는 광장을
둘러보고는 역전에 있는 호텔에 체크아웃을 한다.
배낭을 메고는 1분 거리에 있는 미야자키 에키 宮崎駅(궁기역) 로 들어가서는
휴가시 日向市(일향시) 로 가는 9시 37분 특급 니찌렌 10호 에 오른다.
기차는 미야자키 시내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리는 데.....
오른쪽으로는 태평양 바다 가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까마귀 한 마리가 우리 기차를 지켜보는 모습을 본다.
기차는 미야자키를 출발한지 불과 50분만인 오전 10시 27분에
휴가시 日向市(일향시) 역에 도착하는지라 내려서는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온다.
여기 휴가 日向(일향) 는 글자 그대로 “태양을 향하는 곳” 인 데.....
시베리아 바이칼호 를 떠난 태양을 숭배 하는 기마 민족 이 만주와 한반도를 거쳐 규슈에 상륙하였다.
규슈에서도 해뜨는 곳을 향해 동쪽으로 향해 나아가 여기 바닷가에 이르러.....
더 갈수가 없으니 이름하여 해를 바라보는 곳 휴가 日向 요, "해뜨는 곳 일본 日本" 이라!
중국 사서 隋書(수서) 에 보면 왜국 왕이 수 양제 에게 보낸 국서에
“ 해 뜨는 곳의 황제가 해지는 곳의 황제 에게 국서를 보내노니, 그간 무양하신가?”
수 양제 는 왜왕의 국서를 집어던지며 다시는 왜국의 사신을 접견하지 않겠다고 대로했으나...
고구려와 전쟁을 하는 중이라 다음해에는 답서 를 보내지 않을수가 없었다지?
당시 왜국은 쇼토쿠 태자 가 어머니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을 때인데 그 배포 하나만은 알아주어야 하리라!
그건 그렇고 사흘후 벳푸에서 구로카와 온천으로 가야하는데 버스편이 귀하므로...
규슈 횡단버스 를 인터넷에서 예매했는데 버스 티켓 을 구입해야 한다나!
버스 티켓은 콘비니 コンバニ 라고 부르는 편의점에서 구입해야 하는데 보이지를 않네?
콘비니는 패밀리 마트 ファミリマト 나 세븐 일레븐 セブンイレブン, 로손사쿠루 K 등을 말한다.
역 구내에 잡화점으로 들어가 아가씨에게 콘비니(편의점) 가
어디 있는지 물으니 미안스럽게도 밖으로 나와서는 역의 문까지 열고 나가 손으로 가르켜 준다.
아가씨가 말한대로 역을 나가 5~ 6분을 걸어 주유소를 지나 편의점 으로 들어가서는
부탁을 하니 할머니 직원이 기계에서 여러차례 시도를 해보건만 역시나 실패!
이번 여행에 일본에 도착하여 나흘동안 버스 티켓 발매를 네 번이나 시도했지만....
그것도 매번 일본 직원이 직접 애를 썼건만 안되네?
나중에 보니 비수기 라 버스 자리가 많아 티켓예매는 물론이고 예약도 필요없더라만????
다시 휴가시 역으로 돌아와서는 역안에 인포메이션에서 시내 지도를 받아 들고는...
구다라노사토 백제 마을 난고손(南向村 남향촌) 가는 버스 정류소를 물어본다.
직원이 버스 시간표가 적힌 종이를 보여주며 버스 정류소는 바로 역 광장에 있다고 말하더니.....
아예 일어서서 밖으로 나와서는 우릴 직접 데려다 주는 친절 을 베푼다.
옛날에 여기 휴가에 왔을 때도 기차역에서 할머니 에게 버스 정류소를 물으니“지깐가 아리마스카라 ....”
시간이 난다고 운운하며 육교를 지나 직접 데려다 주시던 기억이 난다.
시외버스 센터 까지 쫓아온 할머니가 창구에 있는 여직원에게 우리가 난고손 간다고 목적지까지 말해주고는
기차시간이 임박했는지 거의 구르다시피 황급히 달려가던 모습이 새삼 떠오르네?
하지만 MB 가 독도 방문에 이어 천황 사과 운운하면서 요즘은 한일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으니....
끝없이 치솟던 한류 열풍 도 MB 이후 내리막길이고 한국에 대해 호감을 보이던
보통 일본인들도 돌아서니 수출이 줄고 서울 방문 일본인도 급감했다!
아베 신조 내각은 독도에서 정신대까지 강경발언을 쏟아내고 도쿄 신오쿠보에서는 혐한 시위 도 벌어진다.
그래도 혐한시위에 반대하는 “한국과 잘 지내자”는 맞불 시위도 일어나는데다가....
와세다대학 한국학 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에서는 1,993년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담화의 고노 요헤이 씨도 가까운 나라와의 유대를 강조했다고 하니 희망을 본다!!!
예전에는 벳푸에서 출발해 오후 에 여기 휴가시에 도착한지라......
버스를 타고 난고손 까지는 잘 갔는데 그게 마지막 버스라!
난고손(남향촌) 에서 한정거장 神門(신문) 까지 간후 바로 되돌아 나온다고 하네?
그럼 관람시간은 불과 10분 정도라...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급히 본 아쉬움이 남아 있다.
해서 오늘은 여유있게 두어시간 동안 난고손을 보려고 휴가시에 오전에 도착한 것이네?
정류소 간판에도 버스 출발 시간이 적혀있는 데....
미카도 神門(신문) 행은 하루 4차례가 있는데 첫차가 으잉??? 오후 한시 출발 이네!!!
지금 시간이 10시 50분인데 그럼 2시간 10분 을 우두커니 기다려야 하네....
미카도에서 나오는 버스는 오전에 3편이 있고 오후에 1편이 있으니 그럼 어떡하나?
그러니까 이 버스는 관광용이 아니라.... 산골에 사는 사람들이 아침에 여기 대처인
휴가시로 나와 일을 보고는 저녁에 들어가는 식 으로 시간표가 짜여져 있네?
옛날에 가보지 않았으면 오후에 다카치호정 관광을 포기하거나 아님
택시를 대절해서라도 가볼텐데 아쉽지만 옛 추억을 회상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구다라노사토 백제 마을 난고손 ( 南向村 남향촌 ) 을 가자면 여기 휴가 日向 에서
미카도 神門(신문) 행 버스를 타고 깊은 산속으로 한시간을 가야한다.
여기 규슈 동남부 태평양 연안에 미야자키현 은 일본내에서 목재 생산률 2위라고 하는데,
돌아 보는 산마다 노송과 삼나무들이 울창하여 촘촘한게 인상적이다.
난고손(南向村 남향촌) 에 내리면 백제 마을 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반대편에는 백제 정가왕 신사 와 그 뒤에 서정창원 (백제 보물전) 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백제 마을 은 휴가시 (日向市) 역에서 버스로 산골로 100리를 들어가면
미카도 (神門) 면 난고손 (南鄕村) 구다라노 사토 (百濟の里 ) 에 있다.
663년 백제가 망한후 왜국으로 건너와 오미국(교토) 간자키군 등에 자리잡은
2천명의 백제인에게 왜국은 3년동안 관식을 지급하는데 672년에 임신의 난 이 일어난다.
삼촌인 대해인의 반란 으로 천지 천황을 이은 아들 고분왕이 죽고
대해인이 덴무(天武) 천황 으로 친신라계 새 왕조를 세우자 많은 백제인들은 새 왕조에 항복했으나...
백제의 왕자들은 야마토(大和) 지방을 떠나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났으니
백제왕의 후손인 정가(禎嘉)왕 일행은 오미(近江) 를 떠나 아게(安藝 안숙) 에 머물다가....
추적하는 대해인의 군대를 피하여 안주의 땅을 찾아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빈호내해) 를 지나
규슈의 미야자키(宮崎 궁기) 현 휴가(日向) 해변에 표착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아들인 복지왕 은 해변가인 기조초(木城町 목성정) 에 머무르고
아버지인 정가왕 은 더 북쪽으로 내륙 지방인 난고손(남향촌) 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풍랑으로 정가왕만 북쪽 해안인 가네가하마에 상륙하였다가 뒤따라온 추격군에 대항하는 중
소식을 듣고 장남 복지왕자가 구원하러 왔을 때는 이미 아버지는 전사한 뒤였다고 한다.
복지 왕자는 풍랑으로 부왕과 헤어져 좀 더 남쪽인 가쿠치우라 해변에 상륙해서는
내륙으로 들어가 키죠초 木城町(목성정) 히키 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남향촌에 정가왕의 무덤이 있고 미카도 신사에 주신(主神) 으로 모시고 있으며
왕비는 다나카베 신사에, 장남은 히키 신사에 그리고 차남은 이사가 신사에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12월 18일 에는 히키의 복지 왕자 일행이 90km 떨어진 미카도의 아버지 정가왕을 보러 오는
시와쓰 마쓰리 師走 まつり(사주마쓰리) 가 1,300년이나 계속되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9박 10일 이 걸렸으며 정가왕이 상륙한 바다 가네가하마에서 엄동설한에
알몸으로 목욕하고 신악 을 올리는데 부여 은산 별신굿과 유사한 점이 많다.
구다라노사토에는 나라 동대사에 있는 천황의 보물창고인 정창원(正倉院) 을 본떠
니시노쇼소인 (서정창원) 이 지어져서 당화육화경(唐花六花鏡) 을 비롯 여러 보물이 전시되어 있다.
미카도신사에 전해진 瑞花六華鏡(서화육화경) 銅鏡(동경) 은 나라(良)의 도다이(東大)사 경내
쇼소인(正倉院)에 있는 동경과 같은 틀 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난고손은 노베오카 延岡藩(연강번), 기조초는 다카나베(高鍋) 번인 만큼
번주간의 양해 없이는 번과 번을 걸친 시와마쓰리 제례 는 유지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국은 일찍이 4세기 후반부터 백제에서 전해져온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비조 문화(飛鳥文化) 가 꽃피웠으며 7세기 후반에는 백제인들이 대거 망명해 온다.
백제는 일본(왜)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5세기 부터 왕족 진손(辰孫)과
곤지(昆支) 및 태자 아좌 (阿佐) 와 왕자 풍(豊) 등을 왜에 파견하였다.
의자왕의 아들 풍 은 백제 부흥운동 시에 복신의 요청에 의해
5천명의 왜군 을 인솔하고 본국으로 귀국해 백제왕 에 올라 사비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후 663년 왜국으로 부터 전함 1천척에 2만 7천명의 왜군이 도착했으나
하쿠스키노에의 전투 白村江戰鬪 (백촌강 전투) 패배후에 왕자 풍은 고구려로 망명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제인들은 후퇴하는 왜선 600척에 몸을 싣고 왜국으로 도망친다.
풍의 동생 선광(善光) 은 왜에 남아 백제 왕씨(百濟王氏) 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백제 귀족들은 대내씨(大內氏)· 화씨(和氏)· 삼송씨 등 주요 성씨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의자왕의 후손들은 백제가 망한 뒤 3개국으로 흩어져 살았는 데....
통일신라에서는 자신들의 성씨까지 부여 夫余 씨나 서씨 徐氏 등으로 바꾸면서 숨죽여 살았으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신분을 인정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영위한
의자왕의 후손들이 있으니 정가왕 부자 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