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2장 9~18절
세상과 기독교의 겸손
겸손은 능력입니다. 그리고 지혜이고 통찰력입니다. 겸손은 절제의 의가 아닙니다. 교육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겸손이라고 기독교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겸손은 충분히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낮춤으로 모든 사람에게 덕을 나타내는 것을 겸손이라 말합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충분히 존귀히 여김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서로 높아지고 남을 밟고 일어서려고 하는 이 세상에서는 그나마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란 쉽게 찾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지요.
하지만 기독교의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이유가 내 안에 있는 가치관이나 선한 의지, 또는 의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겸양이 아닙니다. 세상의 겸손은 자기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기독교의 겸손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철저히 전능하신 하나님 아래에 있는 자신을 바라봄으로 깨어지는 작업인 것이지요.
성경이 말하는 겸손의 간단하고도 명확한 명제는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익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도 받은 사랑 그대로 대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기독교의 겸손은 찌꺼기나 불순물을 남기지 않습니다. 뒤 탈이 없고 뒤 말이 없습니다. 무익한 종으로 사랑을 받아 은혜로 섬기고 나누는 것이기에 그 가운데 무슨 섭섭함이 있고, 무슨 답답함이 있겠습니까?
그 겸손은 행위로는 섬기지만, 은혜를 베푸는 행위입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 나라에 상급을 쌓은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케 하는 기쁨의 제사입니다. 반면 아직 덜 성숙한 사람들은 자기 의를 주장하고 겸양을 노력하다 결국 실패하는 것입니다.
건방진 사람들
세상에는 무례하고 건방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겸손의 축복을 알지 못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겸손 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열등감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못된 자아 존중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온갖 교만과 방자함이 넘칩니다. 그 교만과 방자함은 서로에 대한 헛된 경쟁과 긴장을 불러 일으켜 서로를 진실되이 사랑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런 헛된 긴장은 교회와 성도 안의 사랑을 누수케 만들고 의미 없는 관계로 만들고 맙니다.
하나님을 알면 남의 약점을 섬기게 되지만, 하나님을 모르면 약점을 공격하게 됩니다. 성도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지 무례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눈치, 섬김의 눈치를 소유하시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열등감입니다. 내 속에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채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그리고 다른 이가 내면을 보지 못하게 자꾸 벽을 쌓게 됩니다.
진실한 선생은 자신이 모르는 문제를 솔직히 고백하지만 거짓 선생은 모르는 문제일 수록 더욱 더 학생들을 공격하여 괴롭게 만듭니다. 마치 돌팔이 의사가 자기도 모르는 병에 대해 환자에게 겁을 주고 더 이상 묻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속이 공허하면 공허할수록 말이 많고, 주장이 강하고, 억지가 생기고, 남을 먼저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 자들은 겸손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겸손은 공허함, 열등감의 산물이 아니라 풍성함, 자존감의 산물이기 때문이지요.
세 번째, 잘못된 자아 존중 때문이지요. 세상에는 나면서부터 많은 재능을 타고 난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은 천재라고 부릅니다. 똑 같은 아이라도 뛰어난 아이가 있고, 멍청한 아이가 있고 장애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능력은 죽는 순간까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좋은 조건을 타고 난 사람들이 그 은혜의 근원을 알지 못하면, 건방지고 무례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자기가 잘 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요. 세상은 그런 천재들의 무례함과 괴팍함, 그리고 교만과 자기 주장을 너그러이 보아줍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그래도 된다는 식의 이상한 무력함이 존재하지요. 하지만 그 능력을 주신 하나님은 너그러운 용서가 아니라 무서운 심판을 칼을 듭니다.
천재에게 열광하는 사회
‘이쁘면 다 용서 받는다’는 명제가 이젠 먹혀 들어갑니다. 이쁜 여자가 실수하면 웃으며 넘어갈 수 있지만, 못 생긴 여자는 당장에 처벌 받는다는 것이 이제 인류가 가진 공공연한 진리가 되었습니다. 또 ‘돈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라는 명제도 먹혀 들어갑니다. 사회나 개인에게 공헌을 한 천재나 유명 인물은 그를 추종하는 무리나 군중들에게 실수도 범죄도 용서받습니다. 이건희, 김대중, 박정희, 서태지, MC 몽, 등의 인물에게 열광한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적인 요소에 관심이 있지 그들의 실수나 약점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아 합니다. 그런 것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군중은 그런 자들의 겸손을 원치 않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최고로 남아 주길 원하지, 낮아지고 겸손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군중의 과욕은 그들에게 더 많은 교만을 요구하고, 그로 인해 자신들도 고통에 빠지게 만들지요. 어떻게 보면 자학이지요.
예수님께 열광하는 군중
나사로가 죽음에서 산 사건은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님도 슈퍼 스타였지만, 나사로도 그에 버금가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습니다. 대제사장의 무리는 나사로까지 죽여야 할 정도로 급박하게 전세가 예수님께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소식이 들려졌을 때 그 환호와 기대는 하늘 끝을 찔렀습니다. 사람들이 나와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땅에 펼쳐두고, 오는 길목 길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사람들은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
그토록 그들이 열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가 이젠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다윗 시대에 누렸던 영화를 다시금 보게 할 인물로 기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찬양하고 노래 불렀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윗의 왕권을 회복할 예수 장군”이었습니다. 그들은 백마를 타고 오실 왕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예수 장군에게는 겸손은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오신 겸손의 왕
그들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을 때, 목격한 장면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흰 백마나 호위병을 두르고 거만으로 무장한 모습으로 온 것이 아니라 나귀 세끼를 탄 겸손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상징적인 모습은 주님이 군중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던 진실한 주님의 메시지였고 우리가 따라야 할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기대와 욕심은 너무 강하여 나귀 타고 오신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해서..
그것은 군중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동일했습니다. 제자들도 주님이 나귀를 타고 오신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 모두 예수님이 왕이 될 것이고 자신들도 왕좌에서 한 자리를 얻는 그런 꿈들만 있었지, 우리를 겸손히 섬기시고 죽음으로 구원하실 주님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후에 그들이 나귀 타신 주님의 이유를 알게 된 것이지요.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했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
교만이 아닌 겸손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능과 비전과 꿈을 주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재능과 비전과 꿈을 가지고 교만을 창출해 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꿈은 겸손을 이룩하는 것이지만 세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꿈을 가지고 교만으로 똘똘 뭉쳐 서로를 해하고 죽이며 파괴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좋은 것을 품어도 그 속에는 서로간 상처로 인해 죽은 시체만이 난무합니다.
몇 만 명을 모이는 교회를 세우면 뭐합니까? 그 속에 상처와 영적 시체만이 난무한데…
그 중에 있는 자들만이 여전히 악을 품고 교만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데…
우리는 겸손합니까?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2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마음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가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라”(빌2:1-4)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