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도 신양교회 초기개척 약사(1928-1935)
-梁泰橋:“新陽禮拜堂建築報告"를 중심으로-
노종해(CM리서치)
*제주시 추자도 전경
1. 들어가는 말: 추자도와 교회시작
추자도는 전라도와 제주도 중간지점의 섬으로 찬란하도록 아름다우며 수산자원이 넉넉한 섬이다. 추자도는 제주도 주변 섬 즉, 우도, 가파도, 비양도, 마라도 중 가장 큰 섬으로, 38개의 무인도와 4개의 섬, 상추자(대서리, 영흥리)와 하추자(묵리, 예초리, 신양1리,신양2리)의 6개 법정리가 있다.
추자도는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 왜구의 침입에 시달려 무인도가 되었다가 조선중기 이후 다시 농어업으로 주민이 정착 되었다. 일제강점기 1894년부터 일본인들이 상추자의 대서리로 이주하여, 일본어민들이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활발한 어로 활동 및 해상유통으로 활기찬 섬으로 유통 수산업의 섬이 되었다. 1920년 이후 참치·참돔·연어·갈치 등 멸치어업 등 활기찬 섬이지만 어업수탈과 일제의 군사요충지로 항만이 건설 되었다.
*전도자 양태교 선생의 "강도연습 1호"(1931.6-1932,6,) 표지와 목차
*전도자 양태교 선생의 첫 설교문:"끝까지 참자"(1931년6월7일 주일)
복음전도와 교회설립은 1928년 하추자도의 신양리에서 복음 전도와 신양교회 개척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는 양태교 선생의 유고 설교집의 "신양교회건축보고"를 중심으로 초기개척을 밝히려 한다. 서홍 양태교의 설교집은 "강도연습"(講道練習)이란 제목로 1-12호로 묶어져 있으며, 1931년부터 1943년1월10일까지 수록 되었다. "신양교회건축보고"(新陽禮拜堂建築報告)는 1호 97-98쪽에 수록 되어 있다. 설교문 첫번째는 "끝까지 참자"(1931년6월7일.주일)이며 한자와 한글 친필(親筆)로 작성하였다.
2. 양태교 선생과 신양교회 개척
서홍 양태교(1907-1943) 선생은 1907년 제주도 서귀포 대정읍 상모리에서 출생하신 분으로, 1925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사범(광주사범 전신) 강습과1년 과정을 마치고 교사로 봉직하신 분이다. 1927년 추자공립보통학교(개교1925.9.1.)로 발령 되어 하추자(下楸子)인 신양분교로 부임하여 1927-1935년까지 8년 간 근무하시며 교회개척과 운영에 실제적으로 헌신하신 분이다.
추자도는 상추자(上楸子) 하추자(下楸子)로 구분 되며, 상추자(上楸子)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하추자에는 한국인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교회도 하추자 신영리의 신영분교와 뒷편에 신양교회가 개척(1928년) 되었다.
양태교 선생은 제주도 서귀포 출신으로 교사로 봉직하며, 모슬포교회와 연계하여 교회개척에 앞장섰고, 1932년 초부터 성경통신과정에 등록하고 이수한 분으로 예배인도를 통해 설교 복음전도를 병행하였다.
양태교 선생은 1932년12월22일, 방필수(方必守) 선생(목포 貞明女學校)과 결혼하였고, 기독교의 박애정신과 봉사활동을 펼치며, 일제의 황민화 내선일체 교육에 저항하는 교사로 각인되어, 일제의 강압으로 1935년 추자도 신양학교를 떠나기까지 헌신하신 분이다.
양태교 선생은 추자도 신양교회 첫 건축 준공식(1932년12월7일)에서, “신양교회 건축보고”하였다. 건축보고 문서는 방필수 선생이 보관하고 있는 남편 양태교 선생의 유고집인 설교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건축보고서를 근거로 신양교회 초기 약사(1928-1935)를 작성하였다.
3. 방계성 전도사와 신양교회 개척 및 건축
*추자도 신양교회(1928년. 현재 교육관)-추자도는 목포와 제주도 중간 지점의 섬(사진출처:국민일보.2018.6.15.)
1928년 제주도 모슬포교회의 전도인 채대일(蔡大一), 조영국(趙永國), 김명숙(金明淑, 女) 3인이 원상권(元常權) 씨 집에서 추자도 신영교회 개척하였고, 곧 20여명 성도의 집회로 성장하였다.
전남노회(全南老會)에 담임 목회자를 청원하여 初代擔任으로 박남규(朴南圭) 전도사 부임하였다. 이어 조영국(趙永國), 김용병(金龍炳), 감재진(金在眞) 등이 전도사로 활동하며 담임하였으나, 빈번한 전도사의 교체로 교회는 성장치 못하고 정체 되어 있었다. 이에 전남노회에 교역자 파송을 청원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부산의 방계성 장로가 추자도로 자원하여 헌신하였다.
1930년9월1일 부산 초량교회 장로인 방계성(方啓聖. 1988-1949) 장로님이 추자도 신양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3년 동안 목회하시었다. 1930년 9월 20일자 초량교회 당회록에 의하면 “방계성 가족을 전남노회 소속 신양교회로 이명한다”는 기록이 있다.
방계성 장로님은 평북 철산 출생(1888년)으로 신천예수학원(1903년)에서 수학하였고, 19세부렴 철산군청 토지산림 측량기사이셨다. 1913년 부산으로 이주하여, 건착망 회사 서기로 근무하셨고, 평양신학교에서 수학(1920-1922년)하셨다. 방계성 장로님은 주기철 목사님이 1926년 초량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시자 동역하셨고, 1926년 초량교회 장로 장립으로 시무하시는 중에 주기철 목사의 권고로 사역자로 헌신하시며 추자도 신양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시었다. 방계성 장로님은 1931년 경남노회에서 전도사로 시취 받으셔서 목회자로 헌신하신 분이시다.
방계성 장로님은 신양교회 전도사로 야학을 열고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어린이 주일학교를 개교하여 교육목회로 교회도 활기를 찾아 부흥 성장하였다. 결국 예배당이 협소하여 건축계획을 수립하였다.
*신사참배 반대 출옥 후 방계성 목사외 주기철 목사-추자도 신양리 출신 사위 오재길(중앙-오재식 목사의 형)
1931년10월11일 신양교회는 재정도 없고 건축할 능력도 없으나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건축 기성회(期成會)를 조직하였다.
방계성 장로님은 건축 기금모금을 위해 기도하며 힘쓰던 중 호남선교의 중심인 전남 광주 양림교회 부인조력회(여전도회)에서 건축기금 청원이 회장 김필례 총무 서서평 선교사의 주선으로 가납되어 교회건축의 기초를 놓았고 전남각지와 경남지방, 제주도 교회들의 참여로 교회 신축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1931년11월 초순 방계성 장로님은 목재(木材)를 풍선(風船)으로 운반해 오시는 풍랑의 위험을 격으시며 건축자재를 확보하고, 11월14일부터 착공하여, 12월7일 준공하였다.
4. 나가는 말: 신양교회 건축 보고서
1932년12월7일 추자도 신양교회 건축 준공식에서 양태교(梁泰橋) 선생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감격의 답사를 하였다. 양태교 선생님은 실제적인 전도인으로 교회 앞 “신양공립보통학교”(개교1925년9월1일) 교사로 근무하며(1927-1935년), 신양교회개척 초창기부터 강단을 맞아 설교하고 실제로 목회도 담당한 분이시다.
다음은 서호 양태교(1907-1943) 선생님의 친필 설교집에 수록 되어 있는, “추자도 신양교회 건축보고(1932.12월7일)”를 원문에 충실하여 필자가 정리한 문서로써, 사료(史料)로 제공한다. 서홍 양태교 선생은 한자 한글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rch-20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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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料) 曙紅 梁泰橋 先生 肉筆 講道集(1932-1937)
新陽禮拜堂建築報告
하나님의 사랑은 크시고 差別이 없으시어 어떤 나라 어떤民族 어떤個人에게나 恩惠베풀기를 좋아합니다.
지금으로 부터 二千億年 前 옛날 猶大廣野에서 洗禮요한이 出現하야 “悔改하라 天國이 가까왔다”고 왜치든 때부터 天國福音을 宣傳傳播되야 今日에는 땅 끝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 우리 楸子島에도 一九二八年(五年前) 부터 濟州道 摹瑟浦敎會를 通하야 主의 使者 蔡大一氏 趙永國氏 金明淑女史 三人이 와서 元常權氏宅에서 天國福音의 씨를 뿌리게 되여 처음으로 二十여名의 信徒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全南老會에 哀願書를 提出한 結果 朴南圭氏가 初代 傳道師로 赴任되었으며 그後 趙永國氏 金龍炳氏 金在眞氏等이왔는데 傳道師의 交替가 빈번 하고 重任期間이 오래임으로 牧者잃은 羊과 같아 信者들이 갈 바를 모르고 헤매어 傳道의 成績 좋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一九三十年九月一日에 方啓聖長老님이 赴任하시면서 불어, 幼年主日學校를 始作하게되여 敎會의 싹이 자라나 점점 長成하여가고 活氣를 띄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禮拜堂이 狹窄하고 不適當하므로 如干不便을 느끼었든 것입니다.
그래서 一九三一年(昨年)十一月에는 힘과 能力이 없고, 금전에 自由가 없음으로 不拘하고 다만 하나님만 依支하고 期成會를 組織하였습니다. 果然 하나님께서는 弱子를 도와 强하게하시고, 貧者을 豊盛하게 하시며 뜻이면 이루어주십니다.
方長老님께서 全南光州에 가셔서 婦人助力會長 金弼禮氏와 同 總務 徐舒平孃과 方啓聖氏 名義로 同 淸金을 請하게되엿는데 全南各地와 濟州道와 慶南地方에서 意外의 恩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建築에 着手할 計劃을 세우고 十一月初旬에 方長老님께서 親히 材木을 사기 爲하여 木浦나가서 風船으로 運搬同來하여 오시다가 中路에서 風波를 맞나 많은 苦生은 하였으나 神護之德으로 無事到着하고, 十一月十四日 부터 工事하여, 十二月七日인 今日에 埈功되였습니다.
世上일은 흔히 龍頭蛇尾가 되기 쉬운데 우리 敎會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비록 猶大小邑에 出生하셨으나 그 聖号가 全世界를 울이는 것과 같이 敎會의 建築도 또한 그리하여서 처음에는 계자씨와 같으나 從來에는 廣大한 結果를 맺게 됩니다.
特히 이 建築을 完成하기까지에는 方長老님이 말할 수없는 努力이든 것을 感謝하는 바입니다. 金誠募築 思考 設計 材木 監督等 木手되신이와 土工되신이의 手故로 더욱 感謝하는 바입니다.
우리 敎會兄弟姉妹님들은 내일과 같이 全然이 일만 爲하야 努力하신것은 오직 基督의 奉仕의 精神의 發現임인줄 알고 기뻐하는 바이며 여러 主日學生父兄들까지 直接間接으로 援助하여 주시니 다만 感謝할 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恩惠임을 깨닷고 主께 感謝와 讚頌을 돌이옵니다.
一九三二年十二月七日 梁泰橋
<梁泰橋:"新陽禮拜堂建築報告"(1932년12월7일)>
*현, 추주도 신양초교와 신양교회 전경
*추자도 신양리교회에서 바라 본 신양항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