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윤공(漢城府尹公) 묘지명(墓誌銘)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우리나라 씨족 중의 하나이다.
고려 초에 휘 은열(殷悅)은 태조(太祖)를 도와 큰 공을 세웠으며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바로 잡으니 그 공덕이 후세자손들에게 대대로 유전해 갔다.
이어서 벼슬이 좌복야(左僕射) 충평공(忠平公)휘 관(灌)과 상서(尙書) 휘 사윤(斯胤)과 한림학사(翰林學士)휘 예(裔)등은 당대의 혁혁한 명성이 울렸고 그 후 벼슬이 첨의중찬(僉議中贊) 충정공(忠正公) 휘 자번(子藩)은 또한 고려 충렬왕(忠烈王)을 도와 큰 공을 세우니 나라에서 경흥군(慶興君)을 봉(封)하였다.
이 후에도 큰 벼슬이 많았다. 특히 증직(贈職-사후에 주는 벼슬)인 호조참판(戶曹參判) 휘 덕보(德輔)는 한성부윤공(漢城府尹公)의 아버지요. 어머니는 영천(永川) 이씨(李氏)니 벼슬이 판전시사(判典寺事),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인 휘 석지(釋之)의 따님이시다.
홍무(洪武)무인(태조7년 1398년)에 공(公)을 낳으시니 휘는 심(深)이요 자는 백청(伯淸)이라.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 하였으며 또 포부와 뜻이 크고 깊어서 구구하게 벼슬길에 뜻이 없어 과거(科擧)를 보지 않았다.
영낙(永樂)계묘(세종5년 1423년)에 음보(蔭補)로 계성전직(啟聖殿直) 에 처음으로 임명되니 공의 나이 25세의 젊은 시절이었다.
비록 소관이긴 하지만 지극히 겸손하고 또 성경(誠敬)을 다하여 소임을 완수(完遂)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장차 국가에 큰 그릇이 될 재목이라고 칭찬하였다.
신혜(세종13년 1431년)에 남부령(南部令)으로 영전했으니 공의 나이 33세였다.
이어서 벼슬이 주부로 옮겼다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 정6품)로 천거 되었고 또 일약 전첨(典籤 : 정4품)에 올랐으며 돈녕판관(敦寧判官)을 거쳐 중추원도사(中樞院都事)에 상서(尙書)를 겸하니 모두 요직을 두루 거친 영전이었다.
정통(正統)원년(세종18년 1436년)에 사헌부(司憲府)지평(정5품)에 발탁 되었고 이해 겨울에 호조정랑(戶曹正郎)을 거쳐 통덕랑(通德郞)에 옮겼고 4년 후 여름에 조봉(종4품)에 올라 예빈소윤(禮賓小尹)으로 있다가 사헌부장령(정4품)에 임명하니 기간 6년6개월 동안 사헌부(司憲府)에서만 3차례나 있었던 것은 공의 성품이 곧아서 불의와 비위를 참고 보지 못하던 옛날 간관(諫官 : 임금의 잘못을 말하는 신하)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정치가들이 부정을 일삼는 경우가 많아 공께서 해박하게 정의로서 시비를 가리어 말 하다가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었다.
9년 만에 다시 전농관(典農官)으로 올라 선공감(繕工監)에 있다가 이해 가을에 모친상을 당하여 퇴직하고 3년 상을 마쳤다.
병인(세종28년 1446년) 군기선공감(軍器繕工監)예빈시(禮賓寺)에 옮겼으나 신병으로 사직했다가 이듬해 복직하여 중훈(中訓)에 오르니 이제까지 지내온 벼슬이 모두 화려하고 또 명성이 높았다.
기사(세종31년 1944)에 예빈(禮賓)으로서 임기가 만료되니 이때에 문종이 동궁(세자 칭호)에 있었다. 사복시윤(司僕寺尹)으로 천거코자 하니 세종께서 말씀 하시기를 “시윤(侍尹)으로서 시윤에 다시 옮기는 것은 부당하다. 어찌 이와 같은 직에 오래두는가? 이 사람은 간관의 기질이 있으니 특별히 사간원사(司諫院事)에 임명토록 하라” 하시었다.
공이 또한 바른 말과 오른 변론으로 알고 말 않는 법이 없으며 또한 세종 문종 두 임금의 두터운 은총(恩寵)도 잊을 리 없다. 그러니 자연 뭇사람의 여론이 적지 않았다.
이해 겨울에 통훈전농사(通訓典農事)에 올랐으며 경태(景泰) 경오(세종32년 1450)과의지병조사(果毅知兵曹事)가 되었다가 곧 병조참의(兵曹參議 :정3품)에 올랐다.
2년 후에 돈영(敦寧)부사로 있다가 가선(嘉善 : 정2품)에 올랐다.
공이 통훈(通訓)으로 부터 2년 안에 추밀(樞密)에 발탁되니 당시 조정에서 이런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 나라의 총애도 더욱 두터웠으며 이어서 당시 정치문화의 극치지인 한성부윤(漢城府尹 : 현 서울특별시장) 정2품에 임명되었다.
한성은 옛날 서울이라 법과 기강(紀綱)을 잡아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정치를 해야 하는데 근래 관리들이 국가의 기강을 따르지 않고 다만 사소한 업무에 만 급급할 뿐더러 귀족들의 청탁(請託)이나 우선권으로 보아 주는가하면 세도(勢道)집의 문서 따위나 보아주는데 젖어 있어 그 병폐(病弊)가 고질이 되어 있으니 당시 뭇 선비들이 말하기를 모든 부정부패(不正腐敗)는 서울의 관리들로 부터 시작 된다고 했다.
임금은 항상 착하고 명철(明哲)한 인제를 구하여 한성부윤(漢城府尹)을 명하고자 하나 그런 인물을 얻기 어렵드니 이제 조정(朝廷)이 다 공(公)을 추천하여 한성부윤(漢城府尹) 자리에 앉히니 부중이 다 공의 공명정대한 정치에 굴복(屈服) 않는 사람이 없었다.
3년 후에 경기도를 다스릴 때 도내 관리들을 공명(公明)하게 임명하고 해임하니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모두 자취를 감춰 버렸다.
5년 후에 다시 소환 되어 인순부윤(仁順府尹)을 삼었고 이듬해 또다시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되었다. 이때 임금이 위에 오르셔서 원종공신(原從功臣)을 삼았으며7년 후 여름에 윤봉(尹鳳) 등이 고명(誥命)을 받아 오는데 그를 맞아 드리기 위하여 관반(館伴 : 사신을 접대하는 직책)이 되었더니 윤봉(尹鳳)등이 환국하자 평양에서 선위(宣慰 : 임금의 명으로 위로)하다가 9월에 불행히 중화군(中和郡 : 평안도 소재)에서 돌아가시니 공의 나이가 59세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심히 슬퍼하시며 또 많은 부의와 큰 증직(贈職)을 내리셨다.
공의 천성이 너그럽고 풍채(風采)가 범인에 뛰어났으며 평생의 지조(志操)는 그저 바르고 옳은 것뿐이요, 아첨이란 전혀 없으며 특히 공사에 임하면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며 밤잠을 안자가며 염려하는가 하면 친척과 친구를 대하여 서민적(庶民的)으로 둥글둥글 원만히 사시다가도 일을 당하여 처리 할 때는 그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공명(公明)하고 해박(該博)하게 처리하였다.
집에 계실 적에는 이해와 생명에 급급한 작업 같은 것은 하지 않고 항시 태평하였다. 장차 경륜(經綸)의 큰 포부를 펼 것인데 문득 돌아가시니 슬프고 아깝도다.
공의 배(配)는 파평윤씨(坡平尹氏)니 증직(贈職)이 영의정 부사 규(珪)의 따님이시다.
5남 4녀를 두었으니 맏에 긍(矜)은 사헌감찰(司憲監察)이요, 둘째 응(應)은 세자좌문학(世子左文學 :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신미년에 장원 급제 했고(후일 성종 때 정승), 셋째 칭(偁)은 통예문(通禮門)이요, 넷째 항(恒)은 생원(生員)이니 이미 돌아갔고, 다섯째 흥(興)은 성균생원(成均生員)이다.(후일 성종 때 대사헌)
딸은 제용직장(濟用直長) 임한(任漢)에게 출가하고 둘째는 숙빈(淑嬪 : 문종의 후궁)이니 문종 동저(東邸 : 세자궁)에 뽑혀 들어가 부덕이 여러 후궁들 중에서 제일 높음으로서 내정(內廷)에 선입(選入)됐다.
그래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昭憲王后) 부부의 총애가 깊었고 현덕왕후(顯德王后 : 문종의 본궁)가 돌아가신 후로 숙빈(淑嬪)께서 본궁으로 들어가 내조를 하시니 그 인자(仁慈)한 마음씨와 유순한 덕은 온 나라에 소문이 퍼졌으니 참으로 장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는 중군사직(中軍司直)노윤필(盧允弼)에 출가하고 넷째는 시옹별좌(司饔別坐) 기윤철(奇允哲)에게 출가하고 맏아들 감찰(監察)은 광주 노처중(盧處中)의 딸에 취처했다.
이해 9월에 (1456)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석실 사곡 임좌(壬坐)선영하에 안장했다. 장차 양례(襄禮)를 모실 적에 둘쩨 아들 문학 응(應)이 나를 찾아와 묘지명(墓誌銘)을 청하니 이는 친구라 나도 항상 아버지 같이 공(公)을 모셨고 공도 또한 문학으로 하여금 나를 특별히 아껴 주셨으니 차마 그 슬픈 심정(心情)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삼가 눈물 흘려 곡(哭)하고 엎드려 명(銘)을 짓노라.
뿌리가 깊고 근원(根源)이 먼 것은 오직 남양(南陽)의 홍(洪)씨요, 대대로 인물이 배출(輩出)했으니 공도 또한 큰 인물이라.
공은 일찍이 경윤의 포부(抱負)를 가졌고 마침내 뜻을 이뤄 출세했도다. 나라를 도와 백성을 다스렸으니 입신양명 (立身揚名)제일 높다.
경사를 심어 조상의 음덕(蔭德)을 받았고 덕을 쌓아 신의 가호(加護)를 받았도다. 심은 경사는 후손(後孫)들이 높은 벼슬에 올랐고 쌓은 덕(德)에 자손들이 현달(顯達)하였도다.
이렇게 복록(福祿)이 무궁한데 어찌 총총(悤悤)이 가시나이까?
음덕(蔭德)을 후세에 끼쳤으니 오직 자손들이 창성(昌盛)하리라. 내가 사실대로 기록(記錄)하니 이 글은 오래오래 가리라.
대제학(大提學) 서거정(徐居正) 찬(撰)
<1980년 8월 16세손 영길(永吉) 삼가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