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를 읽고
초판본 <백범일지>
올 2월에 출판사 지식인하우스에서 <백범일지> 초판본을 재인쇄해서 출판하였다. 초판본은 1947년에 도서출판 국사원에서 발행하였다. 당시의 구어체 문장,세로 읽기, 지금과 다른 글자체와 맞춤표등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안다. 김구의 나의 소원을. 김구가 원하는 나라는 정치,군사,경제적으로 강한 나라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힘을 갖춘 나라 임을. 그러나 그의 육필로 쓴 자서전을 읽지 않고서는 그 주장의 참 됨을 이해할 수 없다. 초판본 <백범일지>를 통해 우리는 그의 소원이 왜 그러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백범일지> 상편
1919년 기미독립운동의 힘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0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분열과 반목, 운동가들의 생활난, 일본의 탄압과 변절로 지리멸렬해졌다. 백범은 이때 경무국장에서 주석이 되면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다. 우선, 해외 동포에게 편지를 써 돈을 구호하고 이봉창과 윤봉길등의 테러를 배후 조종한다. 이런 포석을 깔던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다. 고국에 두고 온 어린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삶을 알리기 위해 일지를 쓴다. 당시 그의 나이 53세.1929년의 일이다.
김구의 전반부 삶
김구는 어릴 적 상놈과 양반의 차별에 분노했다. 과거를 보았으나 그 부패함에 뜻을 접고 관상을 배웠다. 그러나 본인의 관상이 좋지 않음에 좌절하고 있던 터에 얼굴보다는 몸이, 몸 보다는 마음이 좋은 것이 낫다는 경구를 맘에 품고 동학에 들어간다. 19세에 접주가 되어 동학난에 뛰어들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 태훈과 유림 고 산림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청에 의지하여 반왜를 기도한다. 그러던 차 삼남지방의 의병의 불길을 보고 한성으로 내려가던 차, 치하포에서 일본 밀정을 살해하게 된다. 명분은 조선의 황후를 죽인 일본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는 구속이 되고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고종에 의해 사면된다. 인천 감옥에서 신학문을 접한다. 탈옥한 그는 교육운동에 종사하다가 안명근조직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3년여 형기를 마치고 농촌부흥운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에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백범일지> 하편
1943년. 그의 나이 67세에 작성된다. 김구는 이때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후배 운동가들에게 반면교사로 삼고자 글을 쓴다. 테러 투쟁으로 임시정부는 독립 운동의 존재성은 인정받았지만, 분열과 대립은 여전했다.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피난처를 옮겨 가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장준하를 비롯한 50여명의 학병들이 충칭에 들어서고 이들을 모태로 광복군 활동이 활성화 된다. 그들이 미국 OSS 부대에 참여하는 것이 사실상 30년대 말 40년대 초 임시정부 활동의 전부였다.
사실 임시정부라는 간판을 단 단체는 여러 곳이 있었다. 실질적 힘으로 따지자면 김구의 임시정부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해방 후 임정내에서도 자진해체설이 나올 정도 였다. 김구는 이에 반대했다. 어떻거나 독립운동의 상징과 정통성은 임시정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구의 후반부 삶
대한민국의 법통은 기미독립운동에서 시작해 임시정부에 있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왜 그럴까? 간판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끝까지 내리지 않았는가? 김구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고자 했으나 경무국장이 되었고, 나중에 국무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그는 편지 투쟁으로 해외 동포들을 결집시켰고 테러를 통해 반일 투쟁을 이어갔다. 이후 광복군을 조직하고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성취하고자 했다. 비록 그 여정이 실효적이지 않았다 비판하더라도 그 정신과 명분은 옳은 것이었다. 그 누가 김구만큼 꾸준했으며 목숨을 내 놓았는가? 나라의 법통과 명분이 이렇듯 한 사람의 인생 역정으로 뒷받침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책 익는 마을 원 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