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로추사조선역사
菊露秋寫朝鮮歷史
국로추사
시대 근대
저작자 강린(姜璘)
창작/발표시기 1928년
성격 역사서
유형 문헌
권수/책수 2권 2책
분야 역사/근대사
소장/전승 규장각 도서, 장서각 도서,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도서관
요약: 강린(姜璘)이 단군조선에서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여러 사서에서 발췌하여 엮은 역사서.
서지적 사항
2권 2책. 목활자본. 1928년에 저자가 쓴 서문이 있다.
표지명은 『국로추사(菊露秋寫)』, 내제명은 『국로추사조선역사』이다.
체재는 단군조선·백제조선·신라조선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상권은 단군에서부터 백제 법왕까지, 하권은 백제 무왕에서 신라 경순왕까지를 표제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정통을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한 것이다.
내용
서술은 단군조선에서 신라 말까지의 역사를 시간 순에 따라 여러 사서에서 뽑아서 편집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기사의 말미에는 인용서를 주기했으며, 서문에서는 모두 32종의 인용서명을 밝히고 있다.
인용서로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정사 자료 외에도 『고조선기』, 『조선실기』, 『천통사』, 『평양사』, 『마한사』, 『발해사』, 『고구려유기』, 『백제사』, 『신라고지』 등 고기류 자료와 『동사연표』, 『대동사』, 『동사집략』 등 개화기에 나온 사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인용되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은 ‘우안(愚按)’과 ‘국사왈(菊史曰)’을 통해 개진하였다.
내용을 보면 단군조선조에서는 단군에서부터 기자를 거쳐 삼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
진한과 변한은 별도로 ‘기(紀)’를 두었다.
백제조선에서는 마한이 백제에 항복한 때를 원년으로, 이후 백제 멸망까지를 다루었다.
신라조선조에서는 백제가 신라에 항복한 때를 원년으로, 이후 고려에 항복한 때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하였다.
서술은 먼저 각 왕조의 역대 왕의 왕호 아래 왕의 이름과 출자, 재위 연수 등을 부기하고, 이어 각 왕의 재위년에 일어난 각 국의 역사적 사실들을 적고 있다.
자서에 따르면 사물의 원리뿐만 아니라 역대의 연기(年紀)·치란의 명암(明暗)·귀천의 분별이 많은 책에 실려 있으나 정신과 세월을 다해도 모두 다 찾아보기 어렵다고 적었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는 모르면서도 다른 나라의 역사를 익히려고만 하기때문에 개탄스럽다고 하면서, 이에 여러 책을 널리 구해 두루 참고해 쉽게 알 수 있도록 정리했다고 적고 있다.
규장각·장서각·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에서는 국가적 정통의 계승을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백제-신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던 점, 백제조선이라는 표제를 붙여 삼국 가운데 백제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각시킨 점, 각 시대별로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조선의 정통성이 연면히 이어졌음을 보이려고 했던 점 등이 특징적이다.
참고문헌・ 『국사집(菊史集)』
이하 姜明求(통계공-청풍공-忠烈公종회)의 자료를 옮깁니다.
국로추사에 참조 인용한 서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서도 많습니다.
古朝鮮記, 朝鮮實記, 天統史, 平壤史, 馬韓史, 渤海史, 遼東史, 遼史, 東史, 朝鮮列傳,
漢書, 魏志, 晉書, 隋紀, 唐志, 唐東征紀, 高句麗留記, 百濟史, 新羅古志, 三國遺事,
東史略, 東國通鑑, 歷代總目, 彝尊錄, 東史年表, 星湖僿說, 歷代一覽表, 朝野輯要,
大東史, 輿地勝覽, 東史輯略, 朝鮮史略 (이상 32가지)
[서지 사항]
백여년 전 1928년에 강린(姜璘, 호號 국사(菊史), 은열공파)이라는 문인이
<국로추사 (2권2책-목활자본)>라는 역사책을 썼는데
표지명은 <국로추사>,내제명은<국로추사조선역사>이다
체재는 단군조선,백제조선,신라조선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상권은 단군에서부터 백제 법왕까지, 하권은 백제 무왕에서 신라 경순왕까지를 표제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정통을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국로추사조선역사>를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터넷에서 <국로추사>라 검색해 보시면 본 유투브와 함께 <원문 국로추사 PDF 2.83MB 총80P>자료를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단군(檀君)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까지의 역사를 여러 사서에서 발췌하여 엮은 역사서인데
강이식(姜以式) 장군 이야기를 자세하게 썼습니다.
☞ 612년 1월, 수의 양제는 姜以式 병마도원수를 책임자로 하여
113만 3800명의 군사등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는 을지문덕을 표기장군으로 삼아 이에 대적했다.
을지문덕이 신책구천문云云의 시를 보낸 상대는 수나라의 강이식장군이다.
대승 후 을지문덕은 대공충무장군이 되고 興京을 식읍으로 받았다. ☜ <원전 : 見 遼東史 >
신채호 선생께서 대동운해와 서곽잡록에서 인용하여 조선상고사를 쓰셨는데
대동운해의 살수대첩 병마도원수와 서곽잡록의 임유관전투 병마원수중에서
대동운해는 잘못되었고 서곽잡록을 따른다고 하였는데...
위와 같은 강린의 <국로추사>는
대동운해(612년 살수대첩)를 따르고 있슴이
즉 시조님이 패전장수(병마도원수)라는
[그래서 그 후(615 618년 9월)에
잉유불반(仍留不返) 또는 인유불반(因留不返)<진주강씨 족보기록과 같음>
즉 수(隋)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동국(東國)에 머물러 (귀화했)다는...]
제가 여지껏 알고 있던
임유관전투의 승전장수!! 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국로추사> 서적정보를 알려주신
허경진 교수(연세대학교 열상고전연구회 회장)님의 견해입니다
수나라가 곧바로 망한 뒤에 강이식 장군이
<당나라 신하가 되기보다는 고구려 귀신이 되겠다>는 것을 보면
중국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린이라는 분이 수많은 역사기록을 인용하며 국로추사를 편찬했는데.
인재공이 기록한 연원보 서문에도
강이식장군 손자 강행본이 당나라 장수들과 함께 고구려를 정복하고
자손대대로 안동도호부 총병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중국인이었다는 뜻인데.
당나라 사신으로 한국에 왔다가 귀화했다는 기록은 여러 문중 족보에 있습니다.
임진왜란에 도와주러 왔던 명나라 장수들 가운데 명나라가 망하자 돌아가지 않고
귀화한 문중이 16성씨입니다.
수나라 장수가 귀화했다는 사실이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조선건국에 참여한 퉁두란은 여진족인데 청해이씨의 시조가 되고.
설장수는 위구르인인데 경주설씨의 시조가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을지문덕 만큼의 공을 세운 강이식장군의 이름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한번도 보이지 않는 게
그때까지는 외국인이었으니까 쓰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다음은 국로추사의 강린의 서문 <자서>와 <見 遼東史>라 인용처를 밝힌 원문중
612년조, 613년조, 614년조, 618년조의 PDF 내용을 사진으로 보여 드립니다
첫댓글 참 대단한 자료입니다. 여지껏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 자료 감사히 보겠습니다. 이와같이 좀더 많은 사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하루빨리 세상에 밝혀지기를 원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본댓글 속에도 또 오타가
615의 오타를 645로 ㅎㅎㅎ
저도 원자료 부기내용을 615에서 618로 고쳤습니다
위 첨부된 자료는
사진속이라 못고치는데
제가 다시보낼테니
수정본으로 갈아주세요
그리고 하나 추가사항은
국로추사 598년조 [견 (고구려) 유기]에는
강이식 시조님의 휘가 보이지 않아
[서곽잡록]의 내용과 비교하실 수 있습니다
615 ->618년으로 수정합니다. 당나라가 들어서면서 수나라 장수였던 강이식 장군이 돌아가지 않고 망명한 것 같습니다.
연원보 서문에는
손자 행본이 이적,설인귀와 함께 당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를 평정하였다고 하였으니
이식 할아버지의 고구려 귀화는 또 의문부호가 붙네요 허허참
戊午四十四年[羅十九年麗八年]...서기 598년 봄
春麗王帥靺鞨之衆數萬伐遼營州總管韋沖出兵拒戰麗軍不利見敗引還矣隋帝聞之大怒以王諒王世績爲都元帥將水陸軍三十萬出屯於臨渝關會天連日大雨潦水漲溢糧道不繼軍皆飢乏又逢疫疾而進退兩難不知所爲矣是時周羅㬋周羅喉自東萊航海赴平壤城遇大風波多爲沈沒於是隋將不爲一戰而返師兩軍皆自死生還者不過數千矣麗王聞之遣使慰勞隋煬帝大悅厚禮稱謝請和親[見留記]
국로추사 39 - 40쪽 기사로
서기 598년 봄 고구려 왕이 말갈족 수만을 데리고 요동을 쳤는데...임유관에서 장마, 기아 등으로 물러갔다. 대부분 죽고 겨우 살아난 자는 수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