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손에 들고
-김병기
1. 혁명의 냄새
2016년은 발음도 기분 나쁜 병신(丙申)년인데 올 겨울은 우리에게 비통한 계절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친구 최순실이라는 여자가 대한민국을 개판으로 만들어버려 온 국민이 경악하고 좌절하고 분노해서 거리로 뛰쳐나와 촛불을 들었다.
10월말부터 광화문 광장에 모이기 시작한 시민들이 11월이 되어서는 주말마다 수십만이 모였다. 11월 12일에는 흐린 날씨에도 100만 인파가 모였고 11월 19일의 토요일에는 빗방울이 내리는 날씨에도 광화문에만 60만의 시민이 운집했다.
나는 늙어서 시간이 남아돌기도 하지만,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방관만 할 수 없어서 11월 12일, 11월 19일, 11월 26일, 12월 3일까지 네 번의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처음 참석했을 때부터 약간 특이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데모군중이 아니었다. 억울함을 소리치면서도 즐겁게 노래를 불렀고 통분함을 외치면서도 기쁜 모습으로 웃었다. 21세기형 창조적 집단 군중이었다. 참여자의 다양함은 말할 필요도 없고 각양각색의 분장행태와 구호들은 서로서로 관객이 되면서 공동 출연자로서의 사명감을 공유하게 만들었다. “거문도 초등학교 자퇴자 동창회”, “갈현동 고양이밥 훔쳐먹는 여자들” 들의 재치있는 플랭카드는 “박근혜 즉시 퇴진”, “박근혜 구속” 등의 묵직한 구호를 용해시키고도 남았다. 청와대를 향해서 행진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한가지 공통된 점은 혁명의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이다.
1905년 겨울,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손에 성상을 들고 성가를 부르면서 차르가 있는 겨울궁전으로 향했던 수십만 군중들이 러시아혁명의 방아쇠를 당겼던 것과 같이
촛불군중도 혁명을 손에 들고 민심이 천심(天心)임을 절규하고 있었다.
2. 땅에서 타오르는 별
11월 26일의 토요일은 일기예보부터 수상했다. 많은 비가 오고 눈이 내리며 바람이 불 것이라고 예보했다. 불순한 일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은 기우였다. 사상 최대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서울에서만 150만 군중이 모였고 전국 여러 도시에 모인 사람을 합치면 200만이 훨씬 넘었다.
세종대왕 동상이 내려다보는 광화문 광장에서는 가수 안치환이 백만 군중을 이끌었다.
어둠이 깔리고 빗방울이 내려치는데도 시민들은 안치환의 노래 ‘꽃보다 사람이 좋아’를 열창하며 촛불을 흔들었다. 거센 바람과 함께 음습한 추위가 몰려오면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구호가 적힌 큰 플랭카드도 울고 있는 민심처럼 빗물에 젖었다가 흰 눈으로 덮혀갔다. 7시 넘어 연단위로 중진 여가수 양희은이 올라왔다. 체격이 크고 입이 비트룸한 양희은은 똑바른 발성으로 ‘아침 이슬’을 부르기 시작했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150만 군중이 한 목소리가 되어 어둠속에서 목 놓아 불렀다.
옆에 있는 50대의 아주머니는 흐느끼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손에든 촛불도 흐느끼는지 가볍게 흔들렸다.
비가 눈이 되고 눈이 비가 되는 매서운 11월의 밤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그러나 땅에서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백만개의 촛불이 빛나는 별이 되었다.
추위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붉은 목도리를 두른 양희은은 계속해서 ‘상록수’라는 노래를 우렁차게 불렀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우리 나갈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촛불을 들고 150만명의 시민이 부르는 합창소리에 이순신 동상이 깜짝 놀라 잠을 깨어서 청와대를 노려보며 칼을 뽑을 것 같았다.
2016년의 노벨 문학상은 미국의 참여가수 밥 딜런이 받았다. 그렇다면 2017년의 노벨 평화상은 한국의 가수 양희은이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눈보라치는 겨울밤, 150만 시민과 함께 썩어 문드러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노래로 아우성쳤기 때문이다.
3. 이것이 나라냐
우리가 박근혜씨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정치적 역량만을 평가해서 대통령으로 투표한 것이 아니었다. 박근혜 얼굴 뒤에 어른거리는 박정희 대통령을 기억하며, 그의 딸이니 어느 정도의 자질과 품성을 갖추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면, 부모에 대한 추억을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승화시킬 것을 기대 했었다.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미스코리아처럼 예쁜 여성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외국 정상들이 뚱순이라고 비웃는 메르켈 독일 총리처럼,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을 넉넉하게 안아주고 경제를 살려내는 자랑스러운 여자 대통령이 되기를 열망했었다.
그런데 시간에 쫒기면서 밤낮으로 고뇌해야 할 대통령이 밤낮으로 해괴한 ‘야매’주사를 맞으면서 성형수술만 해제끼니 이런 사람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고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선 것이다.
권위 있는 어느 심리학자(황상민 연세대 교수)는 박근혜씨의 정신연령이 17살 밖에 안된 발달 장애인이라고 판정했다. 이런 사람이 국민을 향해 큰소리 치고 장관과 국회의원들을 훈계하는 것은 블랙 코미디였다. 교수 출신의 수석 비서관들이 이런 대통령의 말씀을 한자도 빼놓지 않고 받아 적으려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은 3류 비극이었다.
대통령을 손안의 구슬처럼 가지고 노는 최순실의 빽으로 이화여대에 부정 입학한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야. 능력 없으면 부모를 원망해라’하고 국민을 조롱했는데, 이런 말이 21살의 여자 입에서 술술 나오는 나라가,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이란 사람이 불법, 특혜의 기관차가 되어있는 재벌 총수들과 은밀히 독대하면서 조폭 수준의 공갈을 치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는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린 학생 수백명이 바다에서 죽어가고 있는데도 대통령이란 여자가 미용사를 불러 올림머리를 쓰다듬느라 2시간씩이나 소비하고, 국가안보실장이란 사람이 대통령의 현재 소재지를 파악할 수도 없는 나라가, 현대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사아줌마, 기치료아줌마, 봉침아줌마, 독일의 말 거간꾼까지 청와대를 고자 처갓집 드나들 듯 했지만, 영장을 가진 검찰관은 범죄 수사를 위해 청와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런 나라를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4. 광장에서 솟아오른 장엄한 대한민국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잘못을 저지르고 과오가 있었을 때는 깊이 반성하고 교정하는 것이 보통 인간의 행동양식이다.
헌데 박대통령과 최순실은 그렇지 않았다. 국가를 통째로 마비시키고 국민들을 패닉상태로 몰아넣고서도 잡범처럼 생떼를 썼다. 참 뻔뻔하고 치사하다. 그리고 교활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해가 서산으로 지는 것을 모르며 운명의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있는 것도 모른다. 인간은 퇴장하는 자태가 아름다워야 뒷그림자에 여운이 서린다.
부정선거 원흉으로 청와대에 은신해 있다가 자기의 시대가 끝난 것을 알고 온 가족이 자살해버린 이기붕, 박마리아의 최후는 얼마나 드라마틱했던가.
조국 이집트를 지켜내기 위해 아름다운 몸으로 역사를 휘어 감았던 클레오파트라는 남편이 악티움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젖가슴을 독사가 물게 해 로맨틱하고 장엄하게 생애를 마감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21세기 초 광화문 광장에서 쓴 대한민국의 현대사도 장엄하게 응답될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기다리면서
2017년 1월 1일
송춘강:
병기씨!
올린글 잘 읽었어요.
이렇게 재미있게 잘 쓰시는데 종종 써 올리세요.
카페가 생기 있어 보입니다. 100명이상이 다녀 가셨네요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공유난에는 정치.종교.가족.이야기는 쓰는게 아니라는
말을 들은적 있습니다. 누구나 부담없는 글을 올렸으면 더 좋갰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까요. 제 생각입니다.
김선태:
역시 명문이시고, 역사를 바로보시는 눈을 그리고 세계사의 해박하심을 다시 읽게 만듭니다.
저도 광화문에 나가서 함께 했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도 나가봅니다.
나라꼴이 하두 수상해서 길거리에 나서 봅니다. 저 멍청한 태극기 부대 같은 짓을 하지말자고
맹세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