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시>
환상박피 외 2편
임희선
식순(式順) :
-나는 기념식수였다
국민의례
아버지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고
어머니는 애국가를 불렀다
동맥을 타고 애국심이 온몸에 뿌리 내려
나는 부모에게도 기꺼이 총을 겨눴다
나라를 명분으로 덩굴손 키우고 가시 키우고
당당한 거목으로 자랐다
경과보고
맞은 편 언덕에서 가끔 소문이 날아들었다
해처리에서 부화한 애벌레가 변태를 시작해
아버지를 타고 넘어 어머니를 밟고 넘어
매일 죽음으로의 환원을 꿈꾼다는 소식
밥알을 물고 있는 실패한 숟가락과
흰 곰팡이가 올라앉은 비틀어진 老松과
썩기 시작한 다리를 질끈 잘라내 버린 의자이야기
기념공연
의자가 의자면 시가 될 수 없어
강한 긍정을 반복하는 짧은 네 다리
식탁 밑을 들락거리며 술래가 돼보면
딱딱한 다리도 아플 때가 있지
엉덩이 밀어 올리지 않아도
내면에 굴종의 냄새가 배지
침묵을 건져 두르고 한 뼘씩 푸른 꽃 키우며
詩가 되고픈 꿈
축사
“달려라!”
바퀴를 단건 투쟁의 시작
어설픈 자기위안과 노련한 자기기만 사이
비굴해지지 않게
진공상태에서 자연 발생해 아무런 징후 없이
병이 들었다
기념촬영
나는 활착력이 약한 모찌꼬미나무
아버지가 삽을 들었다
* 환상박피 : 둥근 모양으로 껍질을 벗겨 제거한다는 의미. 나무줄기 둘레 전체에 걸쳐 껍질을 벗겨냄.
* 모찌꼬미나무 : 활착력을 높이기 위해 전지 등 조형잡업을 통해 수형을 잡고 잔뿌리와 모근을 생성시킨 나무. 소나무 같이 이식력 약한 나무는 옮기기 전에 나무뿌리에 환상박피를 해서 잔뿌리가 나오 게 하는데 이런 나무를 모찌꼬미나무라 한다.
外食
-얼굴을 벗어라, 얘들아
-아직 노래를 부르지 않은 걸요?
-울고 넘을 박달재는 없어, 달리지 않아도 된다 아가야
12살인데 이제 아가가 된 막내가
쨍그랑 울음을 터뜨렸다
불편한 표정의 꽃들은 발끝 세워 허공을 딛고
가장행렬을 막 마친 우리는 기름때처럼
테이블에 둘러앉아 목 짧은 선풍기를 더듬거렸다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조물조물 주문을 외었다
희망의 노래를 부르자
아버지가 가셨구나
감사기도를 드리자
하늘이 갖추지 못한 심상에 골똘해질 때
관대해진 저녁의 음정으로 시작하는
외식은 한 편의 연극
구름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은
입 안에 넣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어린 신발들은 식탁 아래서 지쳐가고
뾰족한 의자에 앉아 각자의 배역에 충실했다
아버지의 세계는 작은 움직임에도 불쾌해졌고
모든 욕구가 숨죽여 붉어져도
관객이 감동할 때까지 외식은 끝나지 않았다
룸룸룸루움~ 룸룸룸루움~
출렁거리는 여름 길 끝에서 실타래를 감는 매미소리
기억은 촛농처럼 하얗게 굳어가도
우리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배역도 망칠 수 있었다
외식(外飾)하는 자가 받을 판결을 기다리며
내려앉는 침묵을 담기에는 가벼운 그릇들
빈 그림자에도 발목이 잠길까 두려워
우리는 죽음을 서정적으로 노래하지 못했다
막내야, 공을 가져오렴, 공터가 생겼구나
막내가 그릇에 남은 짜장을 줍는다
달려 올라간 아버지 눈썹이 바닥에 허리를 굽힌다
신경 쓰지 않았다
외식을 마치고 일어서는
엉덩이와 등에 간결한 우기의 징후가 남았다
우리의 무한한 능력은
마음만 먹으면 정말 큰 꿈도 이룰 수 있었다
어휘의 어떤 진화
그의 말엔 떼어내고 싶은 점성이 있어요
뭣 모르고 발현하는 말의 풍미에
이물감을 느껴본 사람들은 알죠
준비하세요
잠재력을 발휘할 시간입니다
화르르 비둘기 떼가 타오르면
천사처럼, 악마같이,
아장아장 불편을 잉태할 독설이 쏟아질 거예요
섣불리 묻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듣고 따라 해 보세요
자, 날아옵니다
탄산을 쏘는 그의 화법에
모서리 맞댄 귀에 물이 고이죠?
장롱에 물린 이불자락처럼
감정 한 끝이 밀려들어가나요?
말하는 방식은 취향의 문제예요
적의를 드러내지 마세요
소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는
윗몸이 길어지고 있다는 반증이죠
찰칵,
한 채씩 집을 진 사람들 내력이
욕조에 새알심처럼 떠다녀요
독설의 효용성에 대한 논란은
뱉어낸 수박씨처럼 쌓이죠
착각,
문장을 칸칸이 유리로 끼워둔 길을 걷다
다리가 굵어지는 걸 발견했나요?
소음을 발라냈다면 됐어요
아!
하필, 그때 의자가 넘어진 것 뿐이죠
그 말에 목을 매려고 줄을 챙겨둔 건 아니예요
탈출처럼, 떠나는 건 늘 두렵죠
<신작시>
닭들아, 너희는 좋겠다 외 2편
임희선
이제 누구의 이름으로 얘기하지?
신은 죽었고
전문가는 경계를 넘지 못하는데
몇 개의 기호와 상징,
어떤 것의 대상,
무언가의 가능성인 나,
어떤 권위에 기대야 하지?
잘 나가는 시인들이 얘기를 시작해
사람들 불러 모아 팔을 내저으며
꼭, 꼭, 꼭,
적은 울음 찍어, 띄워놓은 별에 좌표를 찍어
닭털이 날리고
마른 씨처럼 하얗게 날리고
약속한대로, 순번대로, 저희들끼리 위대해져.
위대한 시인이 되려 요절을 꿈꾸는 이들
진정성을 증명하려 놋쇠 황소 속에 들어가
눈 시고, 광휘에 현혹되고,
경박하게 몸 불리다 모가지 빠지며
시답잖은 시를 찍어내
시닭들아,
무력함을 장악해, 양육은 필요 없어
밝은 이 방에서 생산에 힘쓰면 돼
날려는 망상 버리고 얌전히 모욕을 견디면
올려다보지 않아도 돼
냄새나는 발, 흉측한 껍질과 똥집까지
열렬히 핥아줄 거야
잊은 거야?
허니멜로, 써프라이드, 자메이카, 갈비천왕
죽음 후, 곧장 이름을 얻을 거야
닭들아,
너희는 좋겠다
어린 공화국
새의 눈엔 유리창이 보이지 않아
시야가 넓은 아버지는 늘 멀리 날아다니고
가까이 선 우리는 보지 못했다
캐비닛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비밀과 거짓말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그럴듯한 음모가 탄생하는 방은 그 여자 차지
우리는 밥 먹다가도 후후~
어린 입김 불어 유리창을 닦았다
소매로 닦고 신문지로 닦고 걸레로 훔쳤다
언젠가 먼 비행 끝에
아버지가 유리창에 부딪쳐 죽도록
닦고 또 닦았다
동생이 유리창에 지문을 새겼다
희망을 남기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나이
어린 권리는 불편한 체험
바람이 가리키는 방향 따라 고개 돌리면
‘아빠를 죽이자’
엄마가 집요하게 나를 꾀고
넘어진 것은 일으켜 세워
똑바로 밟고 지나가는 여자 앞에서
우린 과자 하나 과감히 줍지 못했다
‘엄마를 버릴 거야.’
밥상보 아래 뜨끈한 것을 동경한 나
스커트 아래 뜨뜻한 것을 경멸한 나
일렁이는 거짓말, 범람하는 거짓 웃음으로
광활한 기억은 얌전히 굴 것
어린 권한은 비의지적
구경꾼이 되어 죽은 자의 귀환을 보는 일
냄새가 나
일그러지고 텁텁한 두부처럼
늙은이에게서 냄새가 나
냄새와 효용은 반비례
어리다는 건 층위가 다르다는 말
늙은이는 가라, 이곳은 어린 공화국
“잡내 없는 어린 양갈비에게 찬사를!”
그런 관습적 사용에 대해
짜장면 단무지,
라면 김치,
버스앞문 승차,
뒷문 하차,
삼겹살·갈비 2인 이상 주문,
꼬박꼬박 하루에 두 번씩 목욕하며 한 번도 씻지 않은 침대에서 자기, 같은 접시에 수없이 음식을 담았다 비우며 아침, 점심, 저녁, 시간 낭비하기, 늘 불안한 남자 대신 도망칠 수 없는 장롱과 책꽂이를 벽에 붙인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 이유 없이 이어폰에 귀를 이식하고 휴대폰에 손을 장착하고 TV에 눈을 꽂는 것에 대해 의문 갖지 않기, 희박함과 희소함의 차이, 상실과 상식의 공통점, 통상적으로 거론 않는 논란에 무심하기, 유형을 고를 수 없는 하루에 만족하기, 웅크릴 줄 모르는 바닥과 교양 있는 척 도도해지는 계절, 나날이 해체되는 인격과 감빛 손가락 주무르는 나무들에 대해, 원칙적으로 은폐된 오류와 의도적으로 교란한 의혹, 관성적인 불문율에 대해 이의 없기, 검은 뼈들이 지붕 오르는 소리에 꽃들이 일제히 팔을 뻗는 편, 들끓는 바람에 나무들 목이 단일하게 돌아가는 쪽, 물구나무 서 허공을 맴도는 구름들 위치, 미학적 전복에 동요하는 것들의 방향, 그런 관습적 사용에 대해 고심하지 않기,
그저 관습적이므로 개의치 말 것.
<시인의 에스프리>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 - T. S. 엘리엇>
정빌라, 행복빌라, 명품빌라, 금빌라!
이곳은 골목마다 비어버리면 안 될 것들의 목록이 즐비하다.
이곳 사람들은 노심초사가 생활화되었다.
얼마 안 되는 행복이, 정이, 금전이,
비어버릴까 늘 전전긍긍한다.
이곳은 아파트나 단독주택과 다른 정서를 내포한다. 한 세대가 방 한 칸인 집.
이곳 사람들의 가지런한 삶은 같은 위치에서 일을 보고, 같은 면적에서 잠을 자고, 같은 방향에서 밥을 먹으며 실현된다.
이곳의 가치는 높낮이의 차이가 존재할 뿐, 공동체의 계통 없는 바람은 한결같다.
금기처럼, 빌라 이름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말 것!
그리하여 이곳 사람들은 골목을 오가며 틈틈이 자신을 추궁한다.
감춰둔 동경의 주문을 왼다.
빌라! 어서 빌라! 꿈을 빌라! 소원 빌라!
언젠가 위대한 시인이 나타나 주술적 힘을 모아 모든 이름을 “들라”로 바꿀 때까지
그들의 염원은 이어진다.
<인간은 이 지구에서 시적으로 존재한다. - 프리드리히 휠덜린 >
믿지 못하겠지만, 이 빌라에는 코끼리가 산다.
식물성기름 마가린에 진간장 넣은 비빔밥을 좋아하고, 손끝이 여물어 손뜨개가 취미인 섬세한 코끼리가 산다. 매일 편의점에서 볶음양념맛 고래 밥을 사다 먹이며 한 마리 고래를 키우는 그녀, 음식물 통 들고 계단을 내려올 때는 항상 뒤꿈치 반짝 들고 사뿐사뿐 우아한 걸음을 구사한다. 그때마다 방바닥이 옴푹옴푹 패는 것 같지만, 욕조에서 고래고래 노래하는 아들 때문에 언제나 이웃에게 미안해하는 사려 깊은 동물이다.
비웃어도 할 수 없지만 이 빌라에는 하마도 산다.
아침마다 신선한 샐러리를 들들들 갈아 녹즙을 내려 마시고 주말에는 뽀얗게 빤 양말들을 뒤꿈치 쑥- 잡아 당겨 빨랫줄에 가지런히 너는 싹싹한 동물이다.
눈치 못 챘겠지만, 이 빌라에는 끼니때마다 왕만두를 스무 개씩 국 끓여 먹는 대식가 콩새도 산다. 별다른 인기척은 없지만 직설적인 말투로 매번 심사를 거스르는 동물이다.
어처구니없지만 이 빌라에는 듀공, 아르마딜로, 레오파드게코, 피그미늘보모리스, 빈투롱, 파타고니아 마라, 펠리컨 거미가 산다. 어중이떠중이 온갖 동물들이 다 모여 산다.
게다가 쉬쉬-하지만 집집마다 한, 두 마리씩 공룡을 낳아 기른다.
어쩌다 마주쳐도 서로 인사를 건네지 않는 건 암묵적 규칙이다.
이 세계의 오랜 약속인양, 실례될 만한 질문은 용케 하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모든 인위적인 인과관계를 거부한다.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 맥뤼시>
짧고 긴 침묵이 비밀을 지키는 겨울 저녁
섬광처럼 계시가 일어나, 빌라를 구원해줄 귀인,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시인이 나타나
골목 떠들썩하게 주문을 왼다.
“정들라, 행복들라, 명품들라, 금들라!”
그 순간, 추측형 술어보다 명령형 담론이 훨씬 든든해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저절로 배운다.
그리고 무너지는 삶의 복원을 빌라에서 시작하기로 단단히 다짐한다.
풍자의 빌라촌! 이곳은 에어캡 같은 무덤에 둘러싸여 있다.
일부러 눌러 터트리지 않는 한 어느 곳보다 안전한 지대라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들은 쓸데없이 아파트단지를 기웃거리지 않는다.
<어디에서나 시는 부정(不正)의 부정(否定)이 된다. - C.P.보들레르>
이곳에 둥근 것만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둥근 것은 모두 주물러 모서리를 만든다.
제 머리통을 네모나게 주무르고 과일들은 모서리지게 잘랐다.
공은 납작하게 눌러버리고 동그란 눈동자를 대면하면 당장에 찌그러뜨리고 싶어 했다.
그는 공같이 구르는 세상이 싫다.
달콤한 게 죄다 동그란 모양인 게 싫다.
뾰족뾰족 싹이 뚫고 올라와도
빗방울에 둥글둥글 젖어버리는 세상이 싫다.
구슬과 동전과 도넛과 호강한 뒤꿈치가 싫다.
모난 것만 찾는 그를 사람들은 빌라의 詩人이라 불렀다.
반바지에 롱패딩 입고 삼선 슬리퍼 차림으로
시인은 매일 이렇게 중얼거리며 골목을 돌아다닌다.
“이야기가 소진되고 있어. 또 다시 불을 찾아야 해.”
임희선
1974년 대전 출생.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 석사과정.
2014년 애지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