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밤
이혜민
찬바람을 헤집고 얼어터진 몸으로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여린 꽃잎을 틔우는 산수유를 시작으로 초등하고 입학하는 햇병아리 같았다. 옹기종기 알록달록 이 동네 저 동네서 엄마 손을 잡고 산길을 걸어 학교 운동장을 찾던 아이들 같았다. 산속에 수줍게 숨어 진달래가 피고 유치원 소풍가듯이 개나리도 피고 동네 아낙들 수다 떨 듯 벚꽃도 피기 시작했다. 먼 산골 아이 학교 가려고 일찍 집을 나서듯 꽃들도 시간차를 두고 피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꽃들이 아파트촌 학교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처럼 우르르 앞 다퉈 뛰어 나왔다. 한꺼번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땐 홀로 먼 길 걸어 학교 오던 친구가 외로워 보였다. 나뭇가지 밑에 숨어 피던 진달래 같았다. 한 마을에 모여 북적북적 살면 될 텐데. 왜 이렇게 흩어져서 살아야만 할까. 산수유가 저 혼자 몰래 피었다 지고 진달래가 피었다 지는 게 싫었다. 친구와 떨어져 혼자 사는 것이 싫어서 철없이 고민한 적이 있다.
야탑에 이사 온지 20년이 넘었다. 그땐 두부 자르듯 반듯하게 자른 땅위에 박은 듯 늘어서 있는 게 신기하고 깔끔해 보였다. 구시가지 들쭉날쭉 허름하며 작은 성냥갑 같은 집에서 살다가 이사를 왔다. 늘 살아오면서 꿈꿔왔던 집 구조는 일층에 가게를 하고 이층에 어르신 모시고 3층에서 살림하는 거였다. 그럼 행복이 집안 가득해 계단을 미끄러져 넘쳐흐를 줄 알았다. 발걸음 멈추고 그런 집들을 꿈꾸듯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 기간 만료가 끝나기 무섭게 벌어 논 돈 두 배로 올려 달라는 가게 세와 집세를 감당하느라 허리 한번 펴보지 못했다. 내 집 꿈은 물 건너 가버리고 말았다. 꿈꾸던 환상과 행복도 찰나에 날아가 버렸다. 헛바람만 부풀대로 부풀었다. 그럴수록 문 밖의 소음이 더 크고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밤중까지 아니 새벽까지 소음을 이불처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다. 눈뜨기도 전에 싱싱한 야채가 왔다고 확성기가 창문 틈새를 한바탕 비집었다. 뒤따라 거친 소리로 산지에서 직접 따온 과일이 왔다고 돌던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행상들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그 뿐인가 밤늦도록 이 가게 저가에서 새어 나오는 웅성거림과 쨍쨍대는 음악소리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조명 빛에 귀와 눈도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중 삼중으로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대도 그 놈의 깔깔거리는 혀 꼬부라진 취객들의 고성은 불면처럼 잘도 파고들었다. 골목골목 가로등 불빛보다 더 강한 네온사인과 간판들이 제멋대로 깜빡거려 눈 감아도 눈을 뜨고 있는 듯했다. 밤이어도 낮인 듯한 삶이 이어졌다. 쓰레기차가 찍찍 소음을 밟고 부스럭대며 하루의 삽작문을 열어놓고 갈 때까지 뒤치락거려야 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내려다 본 밤을 건너 온 아침 거리는 또 어떤가. 8m 도로 아스팔트가 보이지 않을 만큼 전단지로 덮여 있다. 안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니까 모두 밖으로 나와 피우고 휙휙 던져 버렸다. 여기저기 꽁초가 홍보지 위에 마침표처럼 찍혀 있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밟고 지나가는 골목 끝까지 펼쳐져 있다. 드러낸 젖가슴을 움켜쥐고 허연 넓적다리를 배배 꼬고 누워 있는 전단지 속 여자들. 그 사진 위에 나이트클럽 전단지가 부둥켜안고 있다. 지나가면서 꽃가루 뿌리듯 뿌려대도 뭐라고 나무라는 이도 흘깃 쳐다보는 이도 없다. 밤이슬에 촉촉 젖은 전단지 속 벌거벗은 여자들을 밟으며 학교 가는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추억이 만들어질까. 그나마 아이들 뒤를 따라 노인 일자리가 따라갔다.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게 얻은 영세민 어르신들이다. 굽은 허리로 휴지를 줍는다. 절름거리는 관절염 부은 다리로 동네를 이 잡 듯 뒤진다. 전단지와 꽁초와 숨바꼭질 한다. 밥 먹고 살게 해줘서 고맙다는 듯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이다.
천정부지 치솟는 전세 값 때문에 물가 때문에 청년 실업률 증가 때문에 조기 퇴직 때문에 우왕좌왕. 때문에 때문에 탓만 하다가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이젠 물불 가릴 여력이 없다. 돈 액수가 맞으면 아무데라도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실정이다. 알바시대다. 언감생심 어디 정규직을 바라볼까 뻥쳐서 대통령 국회의원 시의원 공무원을 제외한 모두가 다 비 정규직인 시대다. 흑수저인 우리네 서민들은 이런 불합리한 환경도 감지덕지다. 하지만 참고 살아가려니 울화통에 기름 붓고 싶어진다. 안식처가 아니고 좌불안석 가시방석이 되었다. 잘 만들어진 천당 밑에 분당이라고 집값이 날뛰자 철딱서니 없는 봄꽃들도 한꺼번에 피어나 난리법석이다.
이혜민
경기도 여주 출생, 2003년도 문학과 비평 등단.
2006년 경기문화재단과 2018년 성남문화발전기금 수혜로
토마토가 치마끈을 풀었다 나를 깁다 출간.
2018년 작은 시집 봄봄 클럽 전자책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