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시 공성면 큰재에서 화동면 신의터재까지 걸었다
제13차 백두대간
(1) 언제 : 2016년 4월 24일(일)
(2) 어디를: 큰재-회룡재-개터재-윗왕실-백학산-개머리재-지기재-신의터재
.....23.3km...(247.09km)
(3) 누구와 : 나와 강쌤
(4) 산행 이야기 : 어제에 이어 다시 산에 들어 간다. 상주시 모텔에서 일찌감치 일어나 큰재에 도착하고 들머리인 생태교육장을 가로 질러 뒷산으로 접어들면 된다.오늘은 23.3km로 장거리 코스이다.그러나 300~500m의 표고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코스여서 쉽게 완주 할 수 있었다. 다행이 이틀간 걷는데 별 지장없이 버텨 준 두다리가 고맙고 다음달에는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랙킹을 가는데 무리없이 다녀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 오전 5시30분 생태교육장에서 신의터재까지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의 산행기을 쓴다.
어제밤 경북 상주시에서 자고 이른 아침 큰재로 나왔다.
큰재는 과거에 초등학교 분교가 있었던곳인데 상주시에서 생태교육장으로 만들었다.
오늘은 생태교육장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날은 밝았으나 하늘에는 아직 달이 떠 있었다.
간단한 체조를 하며 몸을 푼후 큰재 들머리로 들어간다.
오늘 걸어야 하는 큰재에서 신의터재까지는 23.3km로 짧은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백두대간 구간중 가장 쉽고 편한 길이기도 하다.
고도가 낮은 산이 연이어진 코스이며 시골마을 뒷산 같은 아담한 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해발 300~800 넘나드는 코스이다.
어느새 선선한 기운이 감도는 아침공기를 마시며 숲의 안개길을 30여분 걸었다
첫번째 이정목을 만나는데 회령목장 정문 앞이다.
아마도 착유를 하는 젖소목장인듯 하다.
(회령목장 정문)
나는 젊은 시절 푸른초원을 가진 젖소 목장을 동경한적이 있다.
그래서 농업고등학교을 진학했고 대학에서 축산학을 전공하였으며 졸업후에는 사료회사에
취업을 해서 7년을 다녔다.그러나 결혼후에 사업을 하겠다고 회사생활을 접고
하우스용 파이프 사업을 하였으나 별 재미을 못봤다.
3년을 헤메이다가 내가 잘 아는 사료대리점을 하면서 한우농장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그러다가 2005년 돼지농장을 매입하는 기회가 생겼다.
그때 농장을 매입할 당시 양돈업은 불황으로 양돈농장을 하는 모든분들이 고생을 하고 있었다.
특히 소모성 질병을 극복하지 못하여 농장마다 높은 폐사율로 고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0년 이후 써코바이러스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백신을 수입하여
그 백신을 공급 받아 사용하고 나서부터 소모성질병들이 컨트롤 되었고 폐사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2010년 구제역 바이러스가 대한민국 중부지방을 휩쓸었는데 그때 무려 약300만두의
돼지를 매몰하여 국가는 국가의 재난을 선포를 하기도 했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발굽을 가진 동물의 발굽이나 구강에 수포성 물집을 이르키는 질병이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국제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전염성 질병이라서 어느 국가든 구제역이
발생하면 국제사회에 보고를 하고 감염된 동물들은 모두 매몰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구제역 바이러스는 경기도와 충청권과 경남지역까지 넓은 지역을 감염시켰으나
호남지역은 감염되지 않았다. 호남지역에 사는 나로선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였고 그렇게
살아 남은 돼지는 높은 가격으로 판매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였던가?
나의 농장은 2014년 12월 4일 밤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농장에 불이 났다.
(2014년 12월 화재가 난 돈사를 정리하는 모습)
그래서 돈사 건물 4동과 2,200여두의 돼지가 불에 탔었다.
불타버린 양돈장은 전쟁터나 다름없는 처참한 모습이였다. 불에 검게 타서 내려 앉은 건물 잔해
속에 더 검게 숯댕이처럼 타 버린 돼지는 소화수와 돼지의 배설물 속에 둥둥 떠 있거나 가라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해 12월은 야속하게도 참 많은 눈이 내리기도 했었다.
그래도 거래하는 사료회사와 지역 사회의 수 많은 지인들과 여러친구들의 도움으로 춥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불에 탄 농장의 잔해와 폐사체을 처리하였고 마침내 다시 건물을 재건축하였다.
농장 화재 후 2년만에 농장은 돼지 개체수도 늘어 나고 외형적인 복구가 되었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두번의 위기를 격게 되는데 나는 그때의 사건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였던것 같다.
당시 나에게 도움을 준 (주)우성사료 임직원과 박성정사장,
그리고 신승완부장의 고마움을 잊을수 없다.
또한 (주)이지바이오 회사의 임직원과 하태영부장의 수고도 감사하다.
신광산악회와 신광번영회등 지역사회 지인분들과 그리고 해당 공무원분들이 너무도 고맙다.
특히 함평군청 백승배과장님의 배려도 잊을수 없다.
또한 나의 고향친구들도 한달음에 달려와 냄새나는 오물덩어리 잔해들을 마다 않고
치워 준 친구들이 너무나 고맙다.
그리고 고향친구들은 반드시 제기하라며 십시일반 성금까지 모와 가지고 와서
나를 감동시켰으며 복구하는데 큰 힘이 됐다.
초등동창회 이진근회장과 김회동친구에게도 큰 고마움을 갖고 있다.
그리고 초우회,약우회,43동창회원들의 수고를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이제 나에게 도움을 준 단체나 지인들에서 평생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뭔가 보답을 할 수 있다면 평생 보답하고 살아야겠다.
나는 살면서 나에게 이런 사고가 있을 줄은 단 한번도 상상 해 본적이 없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 날 수 있다.그래서 살면서 늘 위험을 생각하고
행동을 겸손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또한 복구하고 재기하라고 큰돈을 선뜻 빌려 준 정찬훈친구도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며
특히 매주 농장에 찾아와 쓰레기를 치워 준 농촌진흥청 문윤호 박사의 안타까워 하는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매일 수십명의 사람들이 먹을 밥을 하는데 도움을 준 아내의
친구들도 고맙다. 그들은 김치를 가져 왔으며 반찬을 만들어 오기도 하고 설겆이를 도와
주기도 하였다. 이런 모든분들이 나에게는 삶의 은인이다.
회령목장 정문을 지나며 나의 지난 시간들과 기억들이 슬라이드 비추듯 생각이 났다.
회령목장 옆 숲길을 따라 회룡재을 향해 걷는데 아침 안개가 걷히며
늦은 아침 햇살이 나온다.큰재에서 4km를 1시간 30분 정도 걸은것 같다.
(회룡재 이정표)
오늘 구간은 비교적 낮은산으로 이어진 마루길이며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작은재를 여러개 지나고 작은 산을 넘는다. 작은재들을 나열해 보면
큰재-회령재-개터재-윗왕실재-개머리재-지기재-신의터재이다.
회령재 다음으로 개터재을 넘으니 윗왕실재에 도착한다.
뭔가 왕가와 관련한 이야기와 역사가 있을 듯한데 안내 설명이 없어 궁금했다.
이제 오늘 산행구간중 가장 높은 백학산(618m)을 향하는데 3km쯤 가야 백학산 정상이다.
(백학산 정상 표시석)
백학산 설명을 월간<산> 94년 11월호에서 백학산을 소게한 글을 옮겨 적는다.
봉황산 동남쪽 화령재(320m)에서 숨을 죽인 백두대간은 그 피곤함을 늘어지게 풀어 보려는 듯 더욱 더 고도를 낮추면서 어산재(280m)~지기재(250m)에 이르고 나서야 다시 기지개를 펴고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기 시작한다. 즉, 낮아질 대로 낮아졌던 백두대간은 지기재에서부터 남동쪽 약 6km 거리에 이르러 화령재와 어산재의 높이를 합친 것보다 15m나 더 높은 백학산이 숫구쳐 오른다.백학산에 이른 백두대간은 여기에서부터 남쪽으로 마치 백학 한 마리가 날아가듯 고만고만한 산릉을 빚어 놓으면서 약 10km 거리에 이르러 백학이 물을 만난 듯 국수봉(790m)을 솟구쳐 놓는다. 국수봉에서부터 백두대간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며 추풍령~황악산~삼도봉~덕유산 방향으로 다시
힘차게 내달리고 있다.
월간 "산" 기자님이 말하는 폼새는 다르다.그래서 글 전문가 인가 보다.
지역의 의미와 설명이 자세하고 문장이 부드럽고 멋지다.
백학산(618m) 정상의 나무 의자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오늘 코스중 가장 높은 산이니 쉬어 갈 이유가 나름 있는 것이다.
백학산 정상에서 강쌤은 제자들과 전화를 여러번 그리고 오랬동안 통화를 한다.
고등학교 교사인 그는 학생들 모의고사 성적과 관련해서 학부모님들을 안심시켜 드리는것
같았고 기숙사에서 기숙하는 제자들이 휴일이라 잠시 잠깐의 외출 허락을 구하는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평범하게 쉬고 있었다. 오늘 구간은 전망이 없는 편인데 백학산은
높이가 있어서 나름 전망을 보여주었다.
(무슨일인지 모르나 허벌나게 웃는 모습이 정겨운 모습이다)
친구의 전화통화가 끝나고 백학산을 내려 가는데 앞서가는 단체 산행팀을 만난다.
우리보다 1시간 먼저 산행을 시작한 산행팀이다.
그 산악회 후미에서 따라 가는 여성을 만나 사진을 부탁했다.
철쭉이 만연한곳에서 사진한방 남기는데 화사한 웃음이 절묘하게 찍혔다.
백학산 휴식후에 선행하는 산악회팀 일부을 추월하며 한시간여 하산 했을까?
낮은 고갯길에 도착하는데 개머리를 닮은 개머리재이다.
얼마전에 우두령이란곳을 지났었고 이번에는 개머리란다.지명이 재미있다.
4월의 야산은 진달래와 철쭉이 경쟁하며 활엽수 이파리가 아우성인데
오늘 산행은 저 낮은 마을 뒷산을 걷는듯 하고 그 길은 포근하기 그지없다.
개머리재를 지나 야트막산 산을 하나 더 넘으니 이번에는 지기재 마을이 나온다.
지기재는 몇가구의 농촌마을이 있는재이며 포도 과수원이 군데군데 있었다.
지기재 포도밭은 비닐멀칭으로 풀이 나지 못하게 해서 잘 관리하고 있었고 포도나무 위로
비닐 하우스를 설치하여 빗물로 부터 질병을 예방하고 나무를 일부 보온하여
수학시기를 앞당기는 친환경 포도밭이다.
나도 편백나무 묘목밭이 있어 조금은 짐작 할 수 있는데 농부는 잡초와의 전쟁이다.
과수원은 1년에도 여러번 제초작업을 해 주어야 하는데 제초제를 쓰다 보면 과일에서
잔류 농약성분이 나올 수 있어 판매하는데 치명적일 수 있다.
친환경 농법은 제초제를 쓸 수 없어 비닐 멀칭을 한것이다.
지기재 농민의 노고가 느껴지는 포도밭을 지난다.
(지기재의 현황판을 보고 있는 강쌤)
친환경 포도원과 마을이 있는 지기재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12시 정오 무렵 지기재에 도착하지만 쉬지 않고 그대로 다시 출발했다.
이제 정오를 지나니 제법 햇살이 뜨겁다.
과수원 옆길에서 휴식중인 서울의 어느 산악회팀을 추월하여 진행한다.
오늘 산행을 일찍 시작한것이 다행이다.
점심은 지기재 마을 뒷산에서 쉬면서 해결했다.
오늘 점심은 사과 반개와 김밥 한줄로 해결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인 신의터재에 도착했다.
오후 2시30분 신의터재에 도착하고 돌탑앞에서
두손 들어 환호하며 오늘의 산행을 마감한다.
신의터재는 임진왜란때 김준신이라는 의병장이 이곳 신의터재에서 깃발을 올리고
상주성에서 수 많은 왜적을 물리치자 왜병들이 이를 보복하기 위해 마을에 침입하여 닥치는대로
사람을 학살하였다.당시 부녀자들이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낙화담 너른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래서 "낙화담"이라는 이름 얻었고 이 고개를 "신의터재"라 부르게 됐다고 설명하는
현판 글이 있었다.신의터재(280m)는 해발이 낮은 재이다.
표시석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한시간전에 연락했던 추풍령 택시기사님이 사 오신
캔맥주를 신의터재 팔각정에 앉아 마시는데 시원하고 달다.
그후 서울산악회팀도 신의터재에 속속 도착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아침 5시 30분에 시작하여 9시간만에 23.3km을 걸었다.
나는 다음달에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랙킹을 떠난다.
오늘 산행이 마지막 히말라야 연습산행이기도 하다.
히말라야 설산은 내 생애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히말라야 산행도 오늘처럼 잘 걷고 건강하게 돌아 올 것이다.
이로서 이틀간 산행을 마감하고 광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2016년 4월 24일 걷고 4월 30일 산행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