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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고승전(高僧傳) 제7권-석혜교
승전의 성은 장(張)씨며 요서(遼西) 해양(海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연(燕)ㆍ제(齊) 지방에 떠돌면서 두루 불전 이외의 경전을 배웠다. 스무 살 때 비로소 출가하였다. 다시 삼장을 정밀하게 닦아, 북쪽 땅 학자들의 종사가 되었다. 그 후 양자강을 넘어 서울에 머물렀다. 자리를 깔고 크게 강론을 펴니 교화가 강남 땅을 적셨다.
오군(吳郡)의 장공(張恭)이 오군으로 돌아와 강설하기를 청하였다. 고소(姑蘇) 일대의 선비들은 모두 그의 덕을 사모하여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처음 한거사(閑居寺)에 머물다가 만년에는 호구산(虎丘山)에서 쉬었다. 이에 앞서 승전은 황룡국(黃龍國)에서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였다. 오군으로 들어가자 다시 금불상을 조성하여, 호구산의 동사(東寺)에 안치하였다.
승전은 성품이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두루 도왔다. 맑고 확고하게 자신을 지켜서, 거처하는 곳에 비단이나 돈이 없었다.
그 후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여항(餘杭)에 방현사(方顯寺)를 세웠다. 승전을 초청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대중을 거두는 데 부지런하고, 좌선과 예불을 쉬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보살피느라 지나치게 애쓰다 보니, 급기야는 앞을 못 보았다. 그러나 더욱 정성을 다해 책려하고, 강의도 그만두지 않았다.
오국(吳國)의 장창(張暢)ㆍ장부(張敷)와 초국(譙國)의 대옹(戴顒)ㆍ대발(戴勃)도 모두 덕을 사모하였다. 사귐을 맺고 숭배하여 스승으로 예우하였다.
그 후 승전은 잠시 임안현(臨安縣)으로 떠돌다가 동공조(董功曺)의 집에 투숙하였다. 그는 청신한 불제자였다. 승전이 그곳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병에 걸려 몹시 위독하였다. 항상 그가 조성한 불상이 와서 서쪽 벽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또한 여러 하늘의 동자(童子)들이 모두 와서 간병하는 것을 보았다.
제자 법랑(法朗)은 꿈에 몇 사람이 받드는 어떤 높은 대(臺)를 보고 물었다.
“어디로 떠나십니까?”
그들이 답하였다.
“승전 법사를 영접하러 가는 길이오.”
이튿날 아침 과연 승전이 세상을 떠났다. 현령(縣令) 완상지(阮尙之)가 백토산(白土山)에 있는 곽문거(郭文擧) 묘지의 바른 편에 장사지냈다. 예전에 양홍(梁鴻)을 요리(要離)의 묘 옆에 부장(附葬)한 고사를 본받은 것이다.
특진관(特進官) 왕유(王裕)와 덕이 높은 선비 대옹이 승전의 묘소에 이르렀다. 돌을 깎아 비를 세웠다. 당사현(唐思賢)이 비문을 지었으며, 장부가 조문을 지었다.
11) 석담감(釋曇鑒)
담감의 성은 조(趙)씨며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축도조(竺道祖)를 스승으로 섬겼다.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으며, 율행에 간절한 정성을 기울였다. 많은 경전을 배워 연구하였다.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데도 빼어났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지팡이를 짚고 찾아가 그를 따라 배웠다. 구마라집은 항상 말하였다.
“담감은 한 번 들으면, 들은 것을 잘 간직하는 사람이다.”
그 후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두루 교화를 베풀었다. 형주(荊州)에서 강릉에 도달하여 신사(辛寺)에 머물렀다. 나이가 60에 들어서자, 힘껏 수행하기를 더욱 맑게 하였다. 항상 안양(安養)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여 아미타불을 우러러보았다.
그 후 제자인 승제(僧濟)가 그의 곁을 떠나 상명사(上明寺)로 가자, 담감이 말하였다.
“네가 떠나는 일이야 아름답기는 하다만, 아마도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야.”
그러고는 간곡하게 조목조목 들어 법을 부촉하였다. 밤이 되자 모든 연로한 승려들과 함께 무상(無常)을 서술하였다.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각각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담감은 홀로 낭하(廊下)를 서성거렸다. 삼경(三更)에 이르러 사미인 승원(僧願)이 방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담감이 말하였다.
“너는 돌아가 자거라. 다시 오지 말아라.”
이튿날 새벽에 이르러 제자인 혜엄(慧嚴)이 평상시처럼 문안을 드렸다. 그러나 담감이 합장하고 편안하게 앉아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피니, 사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의 신체는 부드럽고, 깨끗한 향기는 평상시보다 두 배나 더하였다. 이를 알리고 시신을 염하였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이 전기(傳記)와 찬을 지었다. 그는 찬한다.
여지(荔枝) 풀 향기 뿜듯
근옥(瑾玉) 구슬 맑게 드러나듯
심오하신 님이여,
물들지도 물들이지도 않네.
어려선 찬란한 빛이
늙어선 가지마다 울창함이
신의 세계 노닌다고
어찌 참된 헤어짐일까.
도해(道海)ㆍ혜감(慧龕)ㆍ혜공(慧恭)ㆍ담홍(曇泓)ㆍ도광(道廣)ㆍ도광(道光)
당시 강릉의 도해ㆍ북주(北州)의 혜감ㆍ동주(東州)의 혜공ㆍ회남(淮南)의 담홍ㆍ동원산(東轅山)의 도광ㆍ홍농(弘農)의 도광 등이 있었다. 모두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임종 때 상서로운 감응이 있었다.
12) 석혜안(釋慧安)
혜안은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간절한 정성을 기울여 배움이 경전의 논리에 통달하였다. 아울러 설법을 잘하였다. 또한 오로지 계율을 지켜 칭송을 받았다. 40여 만 글자의 경전을 암송하였다. 여산(廬山)의 능운사(陵雲寺)에 머물렀다.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 리 밖에서도 바람처럼 따랐다.
항상 지팡이 하나를 손에 쥐고 말하였다.
“이것은 서역의 승려가 보시한 지팡이다.”
지팡이의 빛과 색깔은 현란하였다. 또한 자못 향기도 감돌았다. 지팡이 위쪽에 범어로 된 글[梵書]이 새겨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글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 후 관중에 들어가 구마라집을 찾아뵈었다. 쥐던 지팡이도 스스로 그를 따라왔다. 구마라집이 그 지팡이를 보고 놀랐다.
“이 지팡이가 여기에 있었나?”
이어 그 범어 글자를 번역하였다.
“본래 천축국의 사라림(娑羅林)에서 태어났다. 남방이 어지러워지면 초야에 의지하여 일어나리라. 후에 구마라집을 만나면 도의 가르침이 융성해질 것이다.”
혜안은 그 후 지팡이를 외국 승려 바사나(波沙那)에게 선물하였다. 바사나는 이것을 가지고 서역으로 돌아갔다. 혜안은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산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13) 석담무성(釋曇無成)
담무성의 성은 마(馬)씨며 부풍(扶風) 사람이다. 집안 어느 대[家世]인가에 피난하여 황룡(黃龍)으로 옮겨 살았다. 열세 살에 출가하였다. 실천하는 업이 맑고 바르며, 빼어난 영특함에 짝이 없었다. 아직 구족계를 받기도 전에 곧 문답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지고 그를 찾아갔다. 그곳에 이르러 구마라집을 만나니, 구마라집이 물었다.
“사미가 어떻게 먼 곳에서 올 수 있었는가?”
그가 대답하였다.
“도를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구마라집이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이에 길 떠나길 멈추고 배움에 힘쓰니, 지혜와 학업이 더욱 깊어졌다. 요흥(姚興)이 담무성에게 말하였다.
“마계장(馬季長)은 고명한 석학이었으나, 당시 세상에서 교만하였네. 법사는 아마도 그렇지는 않겠지?”
그가 대답하였다.
“도로써 마음을 굴복시키는 것은 그러한 허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흥은 그를 매우 남다르게 생각하여 공급하는 것이 크게 두터웠다. 요흥의 운수가 장차 기울려 하자, 관중은 위태하고 어지러워졌다. 담무성은 곧 회남(淮南)의 중사(中寺)에서 휴식하면서, 『열반경』과 『대품경』을 항상 바꾸어가며 강설하였다. 그러자 수업하는 사람이 2백여 명이었다.
안연지(顔延之)ㆍ하상지(何尙之)와 함께 실상을 논하면서 새벽까지 토론을 계속하였다. 담무성은 『실상론(實相論)』과 『명점론(明漸論)』을 지었다.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4세이다.
ㆍ담경(曇冏)
당시 중사에는 또한 담경이 있었다. 담무성과 동학(同學)으로 이름을 나란히 하여, 전송의 임천강왕(臨川康王) 의경(義慶)의 존중하는 인물이 되었다.
14) 석승함(釋僧含)
승함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와 천문과 산수에 뜻을 두텁게 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불교 논리에 뛰어났으며,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데도 밝았다. 더욱이 『대열반경』에 빼어나 항상 강설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원가(元嘉) 7년(430) 신흥태수(新興太守) 도중조(陶仲祖)가 영미사(靈味寺)를 세웠다. 승함의 도풍과 규범을 흠모하였다. 그를 초청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승함은 대중을 도우며 맑고 삼가하여, 3업(業)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 후 서쪽 역양(歷陽)에 떠돌며 불법을 널리 알렸다. 그러자 강남의 도인과 속인들이 소문을 듣고는, 따르는 사람들이 숲을 이루었다.
당시 임성(任城)의 팽승(彭承)이 『무삼세론(無三世論)』을 지었다. 이에 승함은 곧 『신불멸론(神不滅論)』을 지어 대항했다. 무릇 보고 들은 사람들치고, 곧 땅에 떨어지려 하는 불법을 다시 일으켰노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또 『성지원감론(聖智圓鑑論)』과 『무생론(無生論)』ㆍ『법신론(法身論)』ㆍ『업보론(業報論)』 및 『법화종론(法花宗論)』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얼마 후 남쪽 구강(九江)에 노닐면서 크게 경법을 떨쳤다.
낭야의 안준(顔峻)이 당시 남중랑(南中郞)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따라서 심양(潯陽)에 주둔하였다. 승함과 서로의 그릇됨을 존중하여, 만나면 반드시 종일토록 지냈다.
어느 날 승함은 가만히 안준에게 말하였다.
“만약 예언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면, 서울에 곧 재앙과 난리가 있을 것이오. 진인(眞人)의 부신[符]은 응당히 전하에게 속해 있으니, 시주께서는 이 일에 입을 다물어야 하오.”
그런데 갑자기 원흉이 역모를 일으켰다가 세조(世祖)가 황제가 되었으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그 후 평안하고 건강하여 병이 없었다. 문득 대중들에게 고별의 인사를 알렸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천명(天命)을 아는 이라 하였다.
ㆍ석도함(釋道含)
당시 석도함도 학문과 깨우침에 공부가 있어 『석이십론(釋異十論)』을 지었다.
15) 석승철(釋僧徹)
승철의 성은 왕(王)씨며, 본래 태원(太原) 진양(晋陽)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형제 두 사람이 양양에서 임시로 살았다. 승철은 열여섯 살에 여산으로 혜원을 찾아갔다. 혜원은 그를 보고 남다르게 생각하여 물었다.
“차라리 출가할 생각은 없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번뇌를 멀리하고 속세를 떠나는 일은 원래 저의 본심입니다. 먹줄을 놓는다거나 쇠를 달구는 일에서는 종장의 뜻대로 하소서.”
혜원이 말하였다.
“그대가 도에 입문한다면, 곧 더 이상의 두려움이 없는 법문을 얻을 것이다.”
이에 관에 꽂는 비녀를 벗어버렸다.
몸을 맡겨 혜원을 따라 수업하여, 두루 수많은 경전을 배웠다. 더욱이 『반야경』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또한 그는 도를 묻는 가운데 여가가 있으면, 마음을 문장과 시를 짓는 일에 두었다. 한 편의 문장이나 한 수의 시를 짓는데, 바로 붓을 대자마자 문장을 완성하였다[落筆成章].
어느 날 여산의 남쪽에 있는 소나무에 올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맑은 바람이 먼 곳에서 모여들고, 뭇 새들이 이에 화답하며 울었다. 이처럼 그에게는 세속을 벗어난 빼어난 기운이 있었다. 물러나 절에 돌아와서 혜원에게 물었다.
“율법에는 음악을 규제하고, 계율에는 노래와 춤을 끊으라 하였습니다. 노래를 한 번 부르고 휘파람을 한 번 부는 것은 해도 괜찮습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산란해지는 점으로 말한다면 모두가 위법이다.”
이로 말미암아 곧 중지하였다.
스물네 살이 되자 혜원은 그에게 『소품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당시 같은 동년배들에게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던 일이다. 자리에 오르자 글 뜻을 분명하게 분석하여, 듣는 사람이 그의 칼날 같은 기세를 꺾을 길이 없었다. 이에 혜원이 그에게 말하였다.
“전에 너와 겨루며 대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남은 힘이 없어졌다. 너의 방어벽은 엄중하고 견고하여, 공격하던 사람들이 군병을 잃고 수레바퀴를 돌리게 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자못 쉬운 일은 아니다.”
이로써 문인들이 그를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혜원이 죽은 뒤에는 남쪽 형주로 떠돌다, 강릉성 안의 오층사(五層寺)에 머물렀다. 만년에는 비파사(琵琶寺)로 자리를 옮겼다.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의동(儀同) 소사화(蕭思話) 등도 모두 그에게서 계법을 받기 위해, 그를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고, 몸소 음식을 상에 내려놓았다.
전송의 원가 29년(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자사(刺史) 남초왕(南譙王) 유의선(劉義宣)이 그를 위하여 분묘를 조성하였다.
ㆍ승장(僧莊)
당시 형주의 상명사에 있는 승장도 『열반경』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전송의 효무황제 초기에 칙명으로 서울에 내려오라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16) 석담제(釋曇諦)
담제의 성은 강(康)씨이다. 선조들은 강거(康居) 사람이다. 한(漢)의 영제(靈帝) 때 자리를 옮겨 중국에 가까이하였다. 헌제(獻帝) 말기의 난리로 인해 오흥(吳興)에 머물렀다. 담제의 아버지 강융(康肜)은 일찍이 기주(冀州)의 별가(別駕: 벼슬이름)가 되었다.
담제의 어머니 황(黃)씨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황씨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하나의 털이개와 철루(鐵鏤: 무쇠에 조각한 것)로 된 서진(書鎭:文鎭) 두 개를 주었다. 잠을 깨서 보니 두 가지 물건이 모두 있었다. 이어 잉태하여 담제를 낳았다.
담제의 나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털이개 등을 그에게 보여주니, 담제가 말하였다.
“진왕(秦王)이 선물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어디에 두었었느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열 살이 되자 출가하였다.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았으나, 깨달음이 천연적으로 일어났다.
그 후 그는 부친을 따라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갔다. 가는 길에 우연히 관중의 승략(僧䂮) 도인을 만났다. 문득 승략의 이름을 부르니, 승략 도인이 말하였다.
“동자가 어떻게 이 늙은이의 이름을 부르시나?”
담제가 말하였다.
“조금 전에 불쑥 부른 것은, 그대가 전에 이 담제의 사미였기 때문입니다. 대중 승려를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잘못 소리친 것입니다.”
승략은 전에 홍각(弘覺) 법사의 제자로서, 승려들을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었다. 승략은 처음에는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여, 곧 담제의 부친을 찾아갔다. 부친이 담제가 태어날 때의 시말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아울러 털이개와 서진 등을 보여주니, 승략이 이에 깨닫고 울면서 말하였다.
“이 분은 돌아가신 저의 스승, 곧 홍각 법사이십니다. 선사께서는 전에 요장(姚萇)을 위하여 『법화경』을 강의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도강직(都講職)을 맡아 보았습니다. 요장이 이 두 가지 물건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홍각 법사께서 돌아가신 날을 계산해보니, 바로 이 물건을 맡기신 날이었습니다. 다시 나물 캐던 일까지 기억이 나니, 더욱 슬픔이 북받칩니다.”
그 후 담제는 경전을 두루 편람하면서, 눈에 지나가는 것은 곧 기억하였다.
만년에는 오군(吳郡)의 호구사(虎丘寺)로 들어갔다. 『예기(禮記)』와 『주역(周易)』ㆍ『춘추(春秋)』를 각기 일곱 번씩 강의하였다. 『법화경』ㆍ『대품경』ㆍ『유마경』을 각기 열다섯 번씩 강의하였다. 또한 글을 잘 지어, 여섯 권의 문집이 있다. 역시 세상에 전한다.
성품이 숲과 개울을 사랑하여, 후에 오흥(吳興)으로 돌아갔다. 고장(故章) 곤륜산(崑崙山)에 들어가서, 20여 년간 개울물을 마시며 한가롭게 살았다.
전송 원가 연간(424~452)의 말기에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17) 석승도(釋僧導)
승도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열 살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수업하였다. 스승이 『관세음경』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을 다 읽고는, 그가 스승에게 물었다.
“이 경은 모두 몇 권이 있습니까?”
스승은 그를 시험해보고자 말하였다.
“오직 이 한 권뿐이다.”
승도가 말하였다.
“처음에 ‘그때 다 하지 못한 뜻’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상응하는 어떤 일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크게 기뻐하여 『법화경』 한 부를 주었다. 이에 밤낮으로 그것을 보고, 뜻을 찾아 거칠게나마 의미를 해득하였다. 가난하여 기름과 촛불이 없었으므로, 항상 땔감을 주워서 책을 비춰보곤 하였다[採薪自照].
열여덟 살이 되자 다방면에 읽은 것이 더욱 많아졌다. 원기의 바탕이 씩씩하고 용감하며, 영묘한 작용이 빼어나게 드러났다. 행동거지가 올바르고 고상하며, 거동이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 없었다. 승예가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물었다.
“그대는 불법에서 무엇이 되고자 원하는가?”
승도가 대답하였다.
“법사가 되어 도강(都講)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에 승예가 말하였다.
“그대는 바야흐로 곧 만인의 불법의 우두머리가 될 사람이다. 어찌 자잘한 승려들을 상대로 하여 부양시키는 정도에서 그치겠는가?”
구족계를 받음에 이르러 식견이 더욱 깊어져서, 선(禪)ㆍ율ㆍ경론이 저절로 마음속에 들어앉을 만큼 통달하였다.
요흥(姚興)이 그의 덕업을 흠모하여 벗으로서 사랑하였다. 절에 들어오면 찾아가서, 가마를 타고 함께 궁전으로 돌아갔다. 구마라집이 경론을 번역해 내려 하였다. 그러자 그도 함께 하여, 참조하고 의논하며 자세하게 내용을 바로잡았다.
승도는 이미 본래부터 풍채가 좋은데다 관중(關中)의 성대한 모임을 만났다. 이에 많은 경전을 계획하고, 널리 진제와 속제의 이치를 캐내었다. 곧 『성실(成實)』과 삼론(三論)의 의소(義疏)와 『공유이제론(空有二諦論)』 등을 지었다.
그 후 전송의 고조(高祖) 황제가 서쪽 장안을 토벌하였다. 군주 노릇하던 자[僞主]를 사로잡아 관내(關內)를 쓸어버리고 깨끗이 하였다. 그는 이미 평소 자자하게 승도의 명성을 들었다. 그러므로 곧 요청하여 상견하더니, 승도에게 말하였다.
“서로 멀리서 바라본 지 오래인데, 어쩌면 그리도 풍속이 다른 곳에서 지체하였는가?”
승도가 대답하였다.
“명공께서 천하를 소탕하여 말발굽소리가 황하와 낙수에 울렸습니다. 이때에 서로 만나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조황제가 깃발을 돌려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아들인 계양공(桂陽公) 의진(義眞)을 그곳에 남겨두어, 관중 지방에 주둔하게 하였다.
헤어질 때 고조가 승도에게 부탁하였다.
“나이 어린 것을 이곳에 남겨 주둔하게 하였다. 원컨대 법사가 때때로 돌아보고 마음에 품어주기를 바란다.”
그 후 의진은 서쪽 오랑캐 발발혁련(勃勃赫連)에게 핍박당하였다. 관남(關南)을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어지럽게 패배하였다. 그러자 추한 오랑캐들이 흉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였다. 기병이 곧 그의 몸 가까이 당도하였다. 승도는 제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중간에서 오랑캐들을 가로막았다. 의진을 추격하는 기병들에게 말하였다.
“유공(劉公)이 아들을 부탁한 일이 있소. 빈도는 지금 곧 죽음으로써 그를 전송하려 하오. 반드시 잡지도 못할 것이니, 번거롭게 추격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뭇 오랑캐들은 그의 신비한 기운에 놀라, 마침내 칼날을 되돌려 돌아갔다.
의진은 달아나 풀밭에 숨어 있었다. 때마침 그의 중병(中兵) 단굉(段宏)을 만나 끝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는 무릇 승도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조황제는 이 일에 감격하여, 아들과 조카 내외로 하여금 그를 스승으로 섬기게 하였다.
그 후 수춘(壽春)에 절을 세웠다. 곧 동산사(東山寺)가 그곳이다. 항상 경론을 강설할 때마다 수업하는 문도들이 천여 명이었다. 그 당시 오랑캐들이 갑자기 불법을 멸하였다. 그러니 사문들이 난을 피해 이곳에 투신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들 모두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하였다. 오랑캐에게 죽음을 당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향을 나누어 주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사신을 파견하여 불러들였다. 생각을 돌이키어 조서에 응하여 서울의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황제의 가마가 이곳을 찾아오자, 몸소 나가서 영접하고 안부를 물었다.
승도는 효건(孝建) 연간(454~456) 초기에 3강(綱)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여, 이 일에 감격하고 가슴에 품어,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황제도 역시 목이 메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곧 와관사에 칙명을 내려 『유마경』의 강론을 열도록 명령하였다. 황제가 친히 그곳으로 거동하니, 공경대부들도 모두 다 모여들었다.
승도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 말하였다.
“예전에 부처님께서 왕궁에 탄생하시고 쌍수(雙樹)에서 입멸을 보이신 이래로, 천 년의 세월이 넘었습니다. 그때의 순후한 근원은 영원히 떠나갔어도, 경박한 풍속은 뒤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급고독원은 폐허가 되고, 녹야원은 허물어진 풀밭이 되었습니다.
아흔 다섯 종류의 삿된 견해를 지닌 자들은 아래로 나아가는 길을 높은 곳으로 오르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삼계의 중생들은 불이 난 집을 청정한 불국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주상전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보살들이 서성거리며 방황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이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사부대중들이 이 일 때문에 얼굴빛을 바꾸었다. 다시 황제에게 말하였다.
“법을 보호하는 일과 도를 널리 펴는 일을 제왕보다 더 앞서 할 사람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네 가지 평등심(平等心)을 움직이시어, 위태로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시고 착한 일을 권유하실 수 있다면, 모래밭과 기왓장이 흩어져 있는 이 세계가 곧 자재천궁(自在天宮)이 될 것입니다.”
황제는 오래도록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앉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그 후 하직하여 수춘으로 돌아와 석간사(石澗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96세이다.
ㆍ승인(僧因)
당시 승인도 당시 세상에 이름난 이로 승도와 버금갔다. 어떤 사람이 승인에게 물었다.
“법사와 승도 가운데서 누가 더 훌륭한가?”
그는 대답하였다.
“나와 승도는 같이 구마라집에게 사사받았습니다. 공자의 문인에 기준해서 말한다면, 승도는 입실(入室) 제자에 해당하고 나는 승당(升堂) 제자라 할 만합니다.”
ㆍ승위(僧威)ㆍ승음(僧音)
승도의 제자에 승위와 승음 등이 있었다. 모두 『성실론(成實論)』에 빼어났다.
18) 석도왕(釋道汪)
도왕의 성은 반(潘)씨며 장락(長樂) 사람이다. 어릴 때 숙부를 따라 서울에 있었다. 열세 살에 여산의 혜원(慧遠)에게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경전과 계율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였다. 특히 『열반경』에 빼어났다. 수십 년 동안 거친 음식으로 일관하였다.
한번은 양주(梁州)로 갔다. 길에서 강(羌)족 오랑캐 도적들에게 포위되어, 의복과 발우를 빼앗겼다. 도왕(道汪)과 제자 몇 사람이 마음으로 서원하며, 함께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였다. 잠시 후 구름과 안개 같은 것이 도왕 등의 몸을 덮는 것을 느꼈다. 이에 도적 무리들이 쫓아오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재난을 면하였다.
그 후 하간(河間)의 현고(玄高) 법사가 선(禪)과 지혜가 깊고 넓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곳에 가서 이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토곡혼(吐谷渾)의 난을 만나, 그곳에 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성도(成都)로 돌아왔다.
조정에서 부른 적이 있는 학덕이 높은 선비[徵士] 비문연(費文淵)이 처음으로 그를 따라 수업하였다. 곧 고을 성의 서북쪽에 절을 세워 기원사(祇洹寺)라 이름 지었다. 그곳에서 파촉(巴蜀) 지방에 교화를 행하여 명성이 조정과 재야를 적셨다.
양주(梁州)자사 신탄(申坦)은 도왕과 구면이었다. 그 후 신탄이 사고를 당하자, 도왕은 그곳에 가서 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신탄이 그곳에 도왕을 머물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비문연이 자사(刺史) 장열(張悅)에게 글을 올렸다.
“도왕 법사는 학식과 수행이 청백하고, 뜻과 기개[風霜]가 매우 준엄합니다. 탁연히 무리 짓지 않고 확고하여 뽑아내기 어려운 지조가 있습니다. 근간에 들으니 양주에서 그를 맞아들이려고 교지를 보내자, 그가 떠나가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온 경내의 여론이 모두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 고을은 변방의 황량한 고을로서 비구와 비구니의 수효가 만 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선(禪)과 계율에 힘입는 바는 그 한 사람에게 의지합니다. 어찌 강물이 갖은 진주를 잃게 하고, 산이 갖은 옥을 잃게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원컨대 도인과 속인들의 정성을 비추어 보시고, 사부대중의 무리들로 하여금 기댈 곳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에 장열이 곧 정중하게 만류하였다. 마침내 양주로 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열이 서울로 돌아가, 전송의 효무황제에게 자세히 도왕의 덕행을 진술하였다. 황제는 곧 칙명을 내려, 그를 영접하여 중흥사(中興寺)의 사주(寺主)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도왕은 장열에게 병을 이유로 굳게 사양하니, 그곳으로 가는 일을 면하였다. 이로써 병을 사칭하여 휘장을 내리고, 인간세계를 엿보는 일을 끊었다.
그 후 유사고(劉思考)가 고을에 다다라 크게 불법의 제사를 마련하였다. 도왕에게 강설을 청하니, 곧 그의 청에 응낙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는 항상 고요함을 지키기로 맹서하였소. 무엇 때문에 절개를 훼손시키는가?”
그가 대답하였다.
“유공은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바야흐로 불법이 이에 기대려고 합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작은 노고를 마다하겠습니까?”
이에 앞서 3협(峽) 안의 사람들이 매일 밤마다 바위 언덕 옆에서 신비한 광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유사고는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도왕에게 청해서 광명이 일어나는 곳에 절을 세우게 하였다. 즉각 절벽에 불상을 새기고, 험한 지점에 방[室]을 세웠다. 길을 가다가 우러러 바라보면, 모두가 청정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 후 왕경무(王景茂)가 초청하여, 무담사(武擔寺)에 머물러 승주(僧主)가 되었다. 대중을 도와 맑고도 삼가하니, 도인과 속인이 귀의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원년(465)에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명에 따라 화장하였다. 유사고는 그를 위하여, 무담사의 절 문 오른쪽에 탑을 세웠다.
경화(景和) 원년(465)에 소혜개(蕭慧開)가 서쪽으로 나아가 성도에 주둔하였다. 도왕의 높은 명성을 듣고 함께 도를 강론할 생각으로 찾아가다가, 중도에서 도왕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탄식하였다.
“애석하구나.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그러니 곽문거(郭文擧)가 강성(康成)을 뒤쫓아 간 일 따위야, 어찌 말할 만한 꺼리나 되겠는가?”
당시 현인들이 애석하게 여겼음이 이와 같았다.
ㆍ보명(普明)ㆍ도은(道誾)
당시 촉(蜀)의 강양사(江陽寺)의 보명과 장락사(長樂寺)의 도은도 모두 계율과 덕망이 높고 밝았다. 거친 음식을 먹으며 경전을 읽고,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감통(感通)을 얻었다. 도은은 배움이 내외의 경전을 겸하고, 더욱 담론과 토론에 빼어났다. 오(吳)나라의 장유가 초청하여 계를 내리는 스승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