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백의종군길 이음 도보 대행군 참가기(8)
15. 골안개 감도는 운봉 떠나 지리산 길 살피다(운봉초등학교 – 지리산 유스캠프 17km)
8월 28일(월), 맑고 선선한 날씨다. 민박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게 되어 한결 느긋하다. 오전 7시, 골안개(고원의 산자락을 감도는 안개) 바라보며 운봉초등학교를 출발하여 전날 지나왔던 이백면으로 향한다. 충무공은 운봉에서 권율 도원수가 순천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함양 지나 합천 가려던 행로를 바꿔 구례 거쳐 순천으로 가게 된다. 우리 일행도 그 노선 따라 어제 왔던 길 중 이백면 소재지까지 되돌아가는 것이다. 갈 길 바쁜 충무공도 아침 일찍 떠났으리라.
이른 아침, 운봉초등학교 출발에 앞서
운봉초등학교에서 서림공원 쪽으로 들어서니 큰 내가 읍내를 가로지른다. 동쪽으로 남강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백두대간 지리산 자락의 여원재를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섬진강, 동쪽으로는 낙동강으로 갈라진다는 조용섭 씨의 설명이다. 농로길 따라 준향마을 앞 큰길에 들어서니 전날 지나온 한국경마축산고등학교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촌에 특수학교가 들어선 모습이 인상적, 넓은 목초지에는 여러 마리의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운봉에서 여원재 거쳐 이백면 사무소까지 10km는 어제 걸었던 길을 그대로 되짚는 코스다. 여원재부터 새로 개발한 산길 따라 이백면 소재지에 이르는 길은 내리막길이라 전날보다 걷기가 수월한 편, 10시 경에 이백면사무소에 이른다. 친절한 직원들이 시원한 매실차를 대접하고 이강조 면장이 먼 길 걸어 찾아온 것을 반긴다. 면장의 설명, 이백면은 벼농사가 주업인 농촌지역으로 24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남원의 1읍(운봉읍) 15면 가운데 7개면이 2,000명 이하의 적은 인구로 벼농사 외에 시설원예가 지역특화사업이란다.
이백면사무소에서 차 한잔 마시며 담소하다
면사무소에서 10여 분 휴식 후 효기마을 거쳐 장백로(도로 주변의 산이름이 장백산)를 따라 주천면 쪽으로 들어선다. 아침에 맑더니 10시 경부터 구름이 끼어 걷기 좋은 날씨, 멀리 지리산 능선이 선명하게 시야에 잡힌다. 산정상이 뾰족한 만복대(1,433km)로부터 숙성재(별이 잠드는 고개의 뜻), 밤재로 이어지는 산자락이 대자연을 품는 너그러움으로 다가선다. 길 안내를 맡은 조용섭 씨는 지리산이 좋아 남원에 둥지를 튼 귀농인사, 수십 개의 산봉우리를 여러 차례 답파한 경력으로 지리산 둘레의 지세를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11시에 이백면계를 벗어나 주천면에 들어선다. 고개 아래 아늑하게 펼쳐지는 시골풍경이 아름답고 주천면소재지의 원터마을(외평)이 시야에 들어온다. 원터마을은 1390년 경 채(蔡)씨와 정(丁)씨가 터를 잡은 이래 수백 년 이어온 전통마을로 교통의 요충지며 경관이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설명이 마을 앞의 큰 비석에 새겨져 있다. 지리산 둘레길 1호(주천 - 운봉)가 이곳에서 시작한다.
원터마을에 설치된 지리산 둘레권역 안내도
12시 경 외평마을의 식당(지리산 칡냉면)에서 점심을 들고 사흘간 일행을 안내한 조용섭씨와 작별하였다. 선상규 회장은 남원지역 이순신 백의종군길을 개척하고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지역의 길 안내를 성심으로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박수로 표하였다.
주천에서 지리산 유스캠프까지는 약 4km, 지리산 자락의 능선을 넘어야 구례로 갈 수 있는 오르막길이다. 12시 반에 주천면소재지를 출발하여 캠프에 도착하니 오후 1시 반, 17km를 걸어 지금까지 걸은 중 가장 짧은 거리다. 여장을 풀 새 없이 집행부는 이전에 답사했던 코스의 재점검, 잘못 붙인 코스안내 표지교체 등으로 분주하다.
저녁 6시에 캠프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 음식이 깔끔하고 직원들이 친절하다. 관리자들에게 치하하니 이용자들로부터 시설 전반에 걸쳐 호평을 듣는다며 자부심을 나타낸다. 식당입구에는 정부로부터 전국최우수청소년수련기관으로 지정받았다는 홍보 판이 크게 붙어 있다. 모든 접객업소가 이런 자부심을 가지면 좋으리라.
오늘로 14일째,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힘이 부친다. 저녁 식단의 포도 두 송이 들며 기운을 보충하였다. 밤하늘의 초승달이 밝고 별이 빛난다. 솔바람 쾌적한 숲속에서 자연의 정기 받아 활력을 되찾자.
* 걷는 중 살핀 운봉읍 서림공원의 ‘남원 서천리 당산’과 주천면소재지 ‘원터마을(외평)의 유래를 소개한다.
1 ) 남원 서천리 당산, 중요민속문화재 제 20호
당산은 마을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곳 서현리 당산에는 한 쌍의 돌장승(박수)이 있는데 외형상 구분은 불분명하지만 북쪽의 것은 남자, 남쪽의 것은 여자라고 한다. 악한 기운을 막는다는 뜻으로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과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라 새겼다. 두 장승 모두 벙거지를 쓰고 수염이 달렸으나 남자 장승에는 귀가 없다. 수수한 노인모습을 한 여장승은 키가 작지만, 실제 인간 모습에 가까우며 얼굴표정이 사실적이다. 이 여장승은 마을을 수호한다는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서민의 소박한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민속예술의 연구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갖는다.
2) 원터마을(외평)의 유래
1390년 경 채(蔡)씨와 정(丁)씨가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조 이래 조선 말기까지 응양(현재 이백면 효기리)에서 원님이 말을 갈아타고 이곳 현 파출소 앞에서 일단 쉬어가는 곳이어서 원터거리라 하였는데, 경치가 수려하여 감탄을 자아낸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 때부터 교통의 중심지로써 국가에 납품하는 물자를 생산해낸 지역(원부곡)이었으며 조선조 말까지 원천원(元川院, 국가에서 운영하는 숙박업소)이 있었다. 1885년(고종 22년)에 면 중앙지로서 위치를 정하고 하원천방(下元川坊)의 소재지로 원터라는 마을명칭으로 불리운다.
마을이 내방(內坊)과 외방(外坊)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내방은 물이 많아 근심이 없다하여 무수(無愁)라 불리고, 외방은 땅이 건조하여 들의 대부분이 밭으로 구성되어 밭들이라고 부르다 외방 외(外)자와 밭들의 전평(田坪) 평자를 따서 외평이라 하였다.
16. 산수유 시목지 거쳐 섬진강 유역으로(지리산 유스캠프 – 구례구역 37km)
8월 29일(화), 맑고 더운 날씨다. 아침에 일어나니 밤에 비가 많이 온 듯, 캠프 주변에 물기가 흥건하다. 6시 20분에 아침식사, 적은 수의 일행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조리 팀이 감사하다. 다양한 영양식에 무화과, 바나나, 요구르트 등 과일류도 푸짐하다.
오전 7시, 캠프를 출발하여 약 3km 오르막길의 밤재로 향하였다. 안개가 자욱한 산길이 운치 있어 중턱에서 포즈를 취한 후 40여분 걸으니 급경사, 숨이 가빠진다. 정상에 오르니 7시 50분, 490m로 운봉 갈 때 높은 고개 여원재의 480m와 엇비슷하다. 고개를 경계로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에 들어선다. 잠시 휴식하며 ‘지리산 둘레길을 열며’라 쓴 표지판을 살폈다.
‘지리산 둘레길의 대정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순례길로 제안되었고 지리산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도시와 농촌을 이어주는 끈으로,,, 그리고 산림을 통한 치유 숲길로 화해와 상생, 뭇 생명의 안위와 평화를 위한 길이 되고 있습니다’
같이 새긴 박남준 시인의 ‘지리산 둘레길’ 시의 앞, 뒤 구절은 이렇다.
‘그대 몸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은 무엇에 두었는가---
그대와 나 지리산이 되었네 그대와 나 지리산 둘레길이네‘
안개 자욱한 밤재를 오르며
구례군의 이순신 백의종군길은 상당부분 지리산 둘레길과 겹친다. 밤재 정상에서 20여분 내려와 지리산 둘레길에서 벗어나 남원 – 구례 간 산업도로 옆의 소로를 따라 40여분 걸으니 ‘산수유시목지’로 알려진 계척마을 입구에 이른다. 소로에서 450m 들어간 산수유시목지(산수유를 처음 심은 장소로 지금도 오래된 산수유나무가 서 있다.) 앞에 광장을 조성하여 ‘백의종군로에서 배우는 이순신 장군의 삶’을 다양하게 조명한 대리석 벽화가 크게 만들어졌다.
전라남도가 심혈을 기울여 ‘남도이순신 백의종군로’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을 남도 이순신 백의종군로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관광과 연계한 이순신 마케팅의 아이디어로 여겨진다. 이순신 연보, 이순신 백의종군로의 발자취, 백의종군 구례행로, 백의종군 순천행로 등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한 백의종군의 행적과 동선이 잘 정리되어 있어 이 지역의 백의종군길 행군에 큰 도움이 된다.
산수유시목지에서부터 전라남도가 제작한 백의종군로 표지판이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 표지판 표시대로 산동면 소재지를 거쳐 한천마을에 이르니 10시 반, 한천마을 유래비를 살피니 이순신 장군이 이곳을 지나며 사시사철 수온이 일정한 물을 마셨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이곳을 흘러 구례에서 섬진강과 합류하는 물길은 서시천, 한천 지나 운흥정 작은 다리 옆 정자에서 휴식한 후 호수처럼 큰 구만저수지를 자나니 광의면에 들어선다. 호수 건너 지리산 풍경이 웅혼하고 구례에 이르기까지 노고단을 비롯한 웅봉들을 동쪽에 끼고 서시천 제방 따라 걷는 길이 아름답다. 500년 전통의 구만마을 지나 광의면소재지에 이르니 오후 1시, 파출소 앞에 있는 광성식당에서 소머리국밥으로 점심을 들고 2시에 오후 걷기에 나섰다.
서시천 따라 구례읍에 이르니 오후 4시, 먼저 찾은 곳은 충무공이 구례에서 머물 때 유숙한 군관 손인필의 비각이다. 구례읍 봉북리에 있는 손인필 비각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역사의 현장, 입구에 적힌 손인필 비각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손인필 비각(북문 밖 손인필 집)
1597년 8월 3일,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구례로 들어와 조선수군 재건을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이때 이순신 휘하에는 손인필, 황대중을 비롯한 군관 9명과 병사 6명이 전부였다. 특히 군관 손인필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병참물자 조달과 군인을 모집하는 일을 수행했다. 구례읍성의 북문 밖에 위치한 손인필 집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설치한 통제영 주둔지로 조선수군재건을 위한 출정지가 되었다.’
비각 앞에 있는 묘비(당시의 것과 1964년에 후손이 세운 것 등 2개가 있다) 설명문에는 1597년 4월 이순신이 백의종군하여 구례의 손인필 집에 있을 때 극진히 대접한 일, 노량해전에서 아들과 함께 순절하여 초혼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정3품의 통훈대부 행 군자감정에 제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들른 곳은 구례현청 터(지금은 읍사무소),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후 1박2일 체류하며 체찰사 이원익을 만나 전황을 살피고 전략을 논의한 곳인데 500년 된 소나무 세 그루가 남아 있어 그때의 상황을 확인(?)해 주고 있다.
구례 읍내를 빠져나와 다시 서시천 제방으로 향하였다. 잠시 후 섬진강과 합수하는 지점에 이른다. 이곳에서 섬진강 제방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문척교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니 죽연마을, 아름다운 섬진강 100리 벚꽃길의 일부구간인 동해마을까지 한 시간여 걸으니 남도 이순신 백의종군로 제3로가 끝난다. 제1로는 산수유시목지에서 광의면소재지, 재2로는 광의면소재지에서 구례읍내 지리산둘레센터까지, 제3로가 둘레센터에서 동해마을까지다. 동해마을에서 오늘 도착지인 구례구역은 제4로의 일부다. 구례구역에 도착하니 오후 6시 반, 37km를 걸었다. 지금까지 걷는 중 가장 긴 시간과 거리다. 곧장 식당(숙소인 섬진강 모텔 옆의 강변맛집)으로 가서 일부는 냉면, 일부는 코다리찜으로 저녁을 들고 7시 반에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오늘(8월 29일)은 국치일(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부끄러움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는 국민 모두의 자각과 자강의식을 일깨며 15일째 걷기의 의미를 새긴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지리산자락
* 몇 년 전 조선통신사 걷기를 함께 한 신향순 여사가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왔다. 일행들에게도 소개한 내용을 덧붙인다.
‘교수님,
보내주시는 '충무공 백의종군길 도보 대행군' 메일 매일 잘 읽고 있습니다.
겁도 없으시지, 그 뜨거운 한 여름 날씨에 10분만 걸어도 에어컨이 있는 室內가 그리운데 연세 드신 분들이 감히 그 머나먼 길을 향해 떠나시다니!
시작이 반이라는 傳言대로라면 이제는 거의 完步하셨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날씨까지 가을로 접어들어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해지고.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님.
저는 찾아뵙기에 비교적 수월한 편인 다산 선생님 주변을 몇 십년동안 혼자서 맴돌며 살고 있습니다.
남한강 철로길이 다산길로 수리되면서부터는 덕소역 또는 팔당역에서 내려 다산길 따라 가다가 生家 뒤 언덕에 계신 산소에 들러 茶한 잔 올리고 兩水里를 향해 걷다가 양수리역에서 대개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우리 중시조 할머니가 다산 선생님 어머니에게는 고모가 되는 인연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다산 선생님은 난세를 만날 때마다 제가 살아가는데 선생님으로 계셔주셨습니다.
걷고 싶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저는 늘 하고 있습니다.
힘드신 게 당연한 대행군 길에 늘 神의 가호가 함께 하시어 별 탈 없이 모든 대원들이 完步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신 향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