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출장길에 '동학농민혁명 봉기현장'을 찾았다. 이미 오래 전 아이들과 함께 동학혁명의 발자취를 찾아 곳곳을 다녔지만, 삼례는 처음이다. 당시 이곳에 운집했던 농민군들은 1894년 11월 9일 우금티의 피비린내나는 처참한 살육을 예상치 못했을텐데,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그들은 살아서 패배했지만 죽어서는 역사에서 승리했다.
삼례벌은 일제의 조선 침략에 맞서 투쟁한 역사의 고장이다.
1894년 왜군이 경복군을 점령하고선 고종을 연금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학농민군은 이곳 삼례에서 구국항일의병을 일으켰다.
10만 여 농민군은 북상하면서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과 연합부대를 이뤘다. 이에 맞추어 경상, 강원,경기,황해도 등지에서 농민들이 붕기함으로써 조선 전역에 항일의 기차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나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석패하여 서울 입성은 끝내 끝내 좌절되었다.
그후 치욕적인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였으나 동학농민혁명의 기운은 멈추지 않고 3‧1독립운동 등 근대 민족‧민중운동의 큰 산맥이 이어졌다.
조형물 / 대동의 장
동학농민봉기 삼례집회 당시의 농민군중 운집의 터를 재현하였다.
삼례에서 제2차 거병한 1만의 전봉준(全琫準)의 남접과 보은에 집결한 손병희(孫秉熙) 등의 1만의 북접 등 도합 2만의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목표로 진격하였다. 그에 비해 조선중앙군 3.200명과 왜군 200명을 포함하여 총 3,400명 수준에 못 미쳤지만, 조선중앙군 본대는 크루프제 야포, 개틀링 기관총과 개인화기 스나이더 소총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반면, 농민군은 조총과 소수가 관군의 노획 화기로 무장했을 뿐, 그것조차 없는 사람은 대부분이 대나무를 깍아 만든 죽창으로 무장한 탓에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이 조형물은 쇠스랑이 아닌, 죽창이었다면 좋았겠다 싶어 아쉬웠다.
조형물 / 추념의 장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 많은 농민군들의 넋을 위로하고 추념하며 자아존재의 역사와 우주, 즉 나(동학군)와 하늘이 하나되는 체험을 통해 농학농민혁명 정신의 핵심인 인내천 사상을 인과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사유의 장으로서, 경건의 돔으로 조형물을 조성하였다.
탐방후기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뒷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다. 삼례봉기의 역사의 현장에는 기념관은 물론, 주차장마저 없다. 게다가 잡풀이 가득하고 죽순밭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