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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1969년 3학년생도의 하훈(7.19~9.1)은 참 다채롭고 험난했다 (3)-유격정찰훈련
-유격훈련 동복체력단련과 지리산 정찰훈련-
♣ 양해당부: 훈련 중 젊고 어린 마음이었음에. 순전히 자기 기준으로 다른 동기생들을 비방하는 생각의 글들도 있다. 참 민망하지만, 지금 읽는 동기생들이 먼 옛날의 일을 실감나게 함께 회상하는 기회가 되겠기에 ,철판 깔고 그대로 옮김을 백번 혜량해 주시기 바란다. ♣
8월18일 월요일 / 8월19일 화요일 [무등산 넘어 화순동복으로 행군]
새벽부터 화순동복 유격훈련장으로 지루하고 긴 행군. 새삼 약한 체력 실감, 무등산 갈대밭을 낮은 포복으로 뒹굴게 만드는 조교들의 기압 횡포. 반팔 차림의 팔꿈치가 갈대에 베어 피가 흘러도 감내해야 했던 고통. 피곤에 지쳐 잠든 행군 길 야영장. 적(조교들)의 기습으로 혼비백산 도주. “구보는 내 세상이었지만 물속, 모래와 자갈길 뒤져서 뛰고 해도 피로는 모른다. 맹호군장으로 단독군장 조교를 추월하여 들이받고 앞질러도..” (일지 표현) 화순 적벽강에 병기 채 잠기었다 올라선 유격대 입구 언덕에 포인터를 대동하고 마중 나온 텁석부리 수염의 유격대장. “유격대의 분위기는 그 본거지가 마치 골짜기에 쳐박힌 도둑의 산채와 같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동복유격대의 첫 인상이었다.” (일지)
8월20일 수요일 [8km 비무장구보]
콘세트 내무반. “눈을 뜨자말자 진로를 가리지 않고 야지 구보가 시작되었다. ①대오를 맞추라 ②선두조교와 3보 간격을 항상 유지하라 ③.어떠한 장애물도 피하지 말라. 이것이 야지구보를 대표하는 3.4~4km를 주파하는 아침구보였다. 구보 후에 간단히 뜀틀, 줄타기, 철봉, 경사판 오르기 등의 기초체력단련 코스를 지나는 것이다.” “무척이나 못 믿어운 것이 동기생들의 지능지수라고 생각까지 했던 것이 바로 지금 이야기 하는 화랑체조에서의 반복구호! 어쩌면 그렇게 멍청한 녀석들이 많을까? ”(복창하지 말라는 마지막구호 튀어나와 실시회수가 늘어나 고통스러웠으니까^^) 물속 오리걸음 물속구보가 야지구보의 멋? 지겨운 화랑체조와 화랑고지 선착순. 대오 짓는 구보에선 몇 백리도 갈텐데 그놈의 선착순 구보에선 늘 낙오해 흙탕물 생쥐신세. 아이구! 그래서 선착순 구보하면 종마처럼 선두를 뛰는 남재철이가 부러웠지.
동복유격대 밧줄오르기
올빼미 복장 백마중대
8월21일 목요일/8월22일 금요일 [8km단독군장구보 연속]
동기생과 함께 뛰는 데는 용감하지만. 마지막 선착순은 정말 싫어. 어린 시절 만화 주인공 타잔 흉내 내 외줄 타고 바위타고 나무타기로 놀던 경력?이 유격대 줄타기가 식은 죽 먹기 솜씨를 발휘하게 하다니.
8월23일 토요일 [12km단독군장구보]
암벽 하강에서 조교보다 멋진 점프를 보여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조교 놈들이 보기 싫다. 유격대장이 데리고 다니는 눈곱 낀 붉은 눈의 늙은 포인터나 내가 포복한 웅덩이를 더럽히는 목을 길게 늘이고 꿱꿱 시끄러운 거위와 오리 떼처럼.
8월24일.일요일 [12km 구보를 8km로]
참호격투 묘사 “아~! 아!~나는 패자입니다. 지금 패자의 고통을 당하여 그대 이름만을 눈물 흘리며 부르는 나를 그대의 가슴으로 묻어다오,” 조교들이 시키는 대로 울부짖어야 했지. “일요일? 유격대에선 일요일이란 개념이 없다. 존재할 이유가 한 가지도 없는 것이다. 도수공방, 담력코스를 마치고 참호격투. 동기생의 얼굴에 수없는 배반의 상처를 남겨가면서 나는 이겨야 한다, 이마가 터지고, 팔뼈가 빠지고, 면상이 붉게 물들어 나가고, 패자기 되지 않기 위하여 뒹굴었다....”
동복유격대 참호격투
8월25일 월요일 [생존학, 16km 야지구보. 가장 잘 뛰었던 구보. 빗속에 “왕”(교관 왕대위)의 귀여운 자기 자랑.]
생존학에서 날 뱀 고기 먹는 법의 묘사 “ 꿈틀거리는 녀석을 내 약한 두 손가락으로 떨리는 채 꼬나쥐었고 날름거리는 혀와 차디찬 시선을 추움 속에 느끼면서 나는 녀석의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 나갔다. 목 줄기의 연한 껍질부터. 살과 껍질의 응집력은 대단하였다. 허연 고기가 피에 배어서 드러났다. 순간 녀석은 강한 반응을 보이며 내 손목을 감아오며 압박해 왔다.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나는 알 수 없는 압박감으로 순간 공포에 질렸다. 이윽고 동기생의 허연 얼굴들에서 인간을 보았다. 잔인한 놈들! 드디어 껍질은 녀석의 사타구니와 같이 벗겨지고 녀석은 불 위에 던져지고 이윽고 고기는 익고 있었다. 시간 재촉에 설익은 고기를 동강 내어 앉은 꼴사나운 얼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녁 식사 때까지 지겨운 비린 내와 역겨운 맛을 주었지만 「뱀」 고기는 힘의 원천이라 했다.”
8월26일 화요일 [수중 수직낙하와 하향횡단 훈련]
“만경대의 푸른 물. 길어야 3초인 것을 그 3초의 시각을 세면서 나는 내 몸이 허공에 떠 있던 순간을 음미하였다. 무척 기분이 나쁜 코스였다.” “활차가 cable에 걸린 채 도중에 움직이지 않을까? cable에서 벗겨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는 없었다. 얼마나 멋있게 보여질까 이다. 그러나 활차를 놓칠 것만 같았다. 그저 신이 났었고, 나는 내 몸뚱이를 허공에 날려 보았었다. 그리고 교관의 기가 올라갔다 하는 그 이후 나는 물 속에 있었다. 쩡~!하게 귀를 울리는 충격음!,,,”
동복유격대 하향횡단
8월27일 수요일 [백중. 독도법]
목표 너무 잘 찾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노래 부르며 오다 교관에게 찍혀 동기생 전체를 불편하게 만들어. 정찰예비지식 강의. 마을 사람들 백중놀이 농악잔치와 담 넘어 처녀들 훔쳐보다.
8월28일 목요일 [정찰훈련 준비]
오늘까지는 기초과정인 체력단련. 내일부터는 본격과정인 정찰훈련. 그 개념을 잡는다. 갖가지 전술상황에서 적의 배후 유격대로서 실제 활동요령을 배운다. 이제까지 알던 단위부대 척후와 같은 역할만이 아니다. 적 진지로의 침투와 전투기지편성에서부터 적진 목표에 대한 수색과 습격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리산을 무대로 날뛰던 공비처럼 물품노획 인원살상을 위한 매복, 도피 및 기지편성, 발악적인 교란작전, 아군진지로의 철수 하는 도피 및 탈출이 따를 것이다.
8월29일 금요일 동복 유격훈련장 떠나 정찰 제1일. [침투 및 전투기지]>
“잘 있거라 옹성산아 다시 보자 만경대여! 오리들이 줄지어 개천에 뛰어들고 있었다. 이따금씩 꾸억꾸억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거위와 항상 씨근덕거리려 꿀꿀거리는 돼지들. 이들만이 말없이 평화로웠던 유격대! 짧은 2주였지만 괴로움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장황한 자기도취에 문약하였던고? ” “드디어 시작되는가 보다. 노란 발바닥의 역사가...”
♣ 이후의 유격 정찰훈련을 실감나게 회상하기 위해 당시 일지 내용 거의 그대로를 옮긴다.
8월30일 토요일 [수색]
一步, 二步! 앗! 적이다! 이 정도로? 실감을? 천만의 말씀! 적진을 향해 스며드는 우리의 침투 및 기지편성은 한낱 훈련에 불과했다! 2시간여의 오전 행군을 끝으로 아군 전초에 도착. 밥을 해먹고 다시 적진에 대한 지형연구를 끝내고 밤이 이슥하도록 어둠을 기다렸다. 우리의 목표는 우선 계곡의 건너편 산 정상의 독립수 목표의 방위각과도 일치하는 点이다. 80도 경사의 벼랑을 꼬꾸라질 듯이 내려 질러 개활지(도로 마을)에 도착한 후 즉시 척후를 세워 도로와 부락을 살폈으나 간간히 들리는 징후를 알리는 소리 이외엔 척후로 나섰던 나에겐 이상이 없었다. 정찰의 초두 장식 2시간여를 벼랑을 내려오는데 허비. 이때 많은 화랑들이 시계 병기부속품, 후랫쉬 등을 잃고 말았다. 개활지를 통과 적의 추격에 몸을 은신하며 독립수가 있는 고지를 오르기 시작하자 드디어 비가 오기 시작했다. 가장 귀찮은 비가 때를 맞추어 오고 있었다. 정찰은 비로부터. 산을 오를 땐 선두에 하산할 땐 후미에서..., 5m 낭떠러지에서 회전 낙법으로 추락! 지금 나는 그 때 일을 지금 쓰고 있는 거이다. 목적지인 신풍리는 오후가 가까워 도착했을 것이다. 지겨운 몸부림이었다, 어둠 속에서
★ 5m 낭떠러지 추락은 한밤중 졸며 이동하다 벌어진 상황인데 생도무도시간을 통해 몸에 밴 자동적인 유도낙법과 떨어진 등허리를 배낭이 받쳐줘 아무런 탈도 없게 했던 것임,
♣ 한편. 이 정찰 때의 일지는, 당시 빗속에 공비처럼 정신없이 산을 헤매던 정황상 매일매일 쓸 수 없었고, 생도대에 돌아와 메모와 기억을 통해 재생한 후기였음을 밝힘.
8월31일 월요일 [습격]
비속에 온몸이 떨리고 오한을 느끼면서 계속 다그쳐 통명산을 넘어 왔더니 다시 식사 후 텐트를 치자마자 넘어왔던 통명산을 다시 넘어 적 사단CP에 대한 수색에 나섰다. 가공할 만한 놈의 일이다. 산길은 그저 빗물의 통로였다 빗물에 침식당한 산길은 그대로 진창과 바위 자갈과 모래로 미끄럽기 한량없었고 유격대에서의 만월은 이제 드롭프스 형태로 찌그러들고 있었다. 잠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 피로를 잊기 위하여 다른 생각을 하면 세 걸음에 그 생각의 내용은 바로 꿈의 내용이 되어 버렸다. 나중엔 꿈속에서 정신 차리자 라고 뇌이고 있으며 나는 아차! 하고 걸음을 헛디뎠을 때 앞 전우로부터 5걸음은 쳐져 있는 것이다. 자면서도 걸을 수 있다니,.... 다시 밤을 도와 돌아와야 한다. 산길 60리. 비에 젖어 작업복과 속옷이 쓸려 아랫도리는 상처투성이다. 모다 게 걸음을 걷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인상들로.... 갈아입지도 못할 형편! 바로 그 복장으로 바위 틈에 들어찬 텐트 속으로 들어가면 그런데 잠이 아쉽다. 이끼 낀 바위 돌들이 등이 배겨도 망개와 다래 덩굴이 빗속에 차게 푸르러도 텐트 속의 나는 움직이기가 싫었다. 발바닥은 불어 터져서 구멍투성이의 곰보였다.
★ 일지에 없는 관련한 당시의 회상: 판쵸우의도 소용없이 몸과 군장을 적시는 비가 세차게 내려도 행군 중 10분간 휴식을 주면 하늘을 보고 얼굴에 비를 맞으면서도 코를 골고 잘도 잤지. 빗물에 거시기가 쓸려 아프니 모양말과 비닐로 감싸도 심한 걸음에 곧 벗겨지고 말았지^^ 모두가 포경수술 고래잡은 놈들처럼 어기적어기적. 같은 남자라 이해할 만한 조교 놈들 모른채 뒤짐지더니 저들끼리는 눈짓 주고받으면 킥킥 거리더라★
9월1일 월요일 [매복 1일 :대 차량화 매복]
LMG는 내가 보기엔 ‘Long Man’s Gun’일 텐데(?^^) 나에겐, 이 shot man에겐 S.M.G가 되어 통명산의 수색 습격 이래 뛰어 오르내리게 하였다. 작은 체구에서 오는 자학감의 발로라고 본다면 곤란하다. 또한 자신의 약점을 cover하기 위한 무리한 시도라고 보아도 좋다! 단 나는 너희 얄팍한 녀석들 물개 똥같은 녀석들 보단 어딘가 달라야 한다. 너희들보다는 더한 악조건 하에서도 너희를 누를 수 있다는 네들이 이해 못하는 쾌감을 느끼는 세계에서 나는 살고 있는 거다. 좀 더 초인 아니다. 맞다. 초인을 의미하자면 가장 철저한 인간이겠지. 인간은 항상 초월 속에서 발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겠지. 물론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만화 속의 주인공처럼 멋있고 질긴 녀석이 되고 싶은 거다. 이렇게 험한 상황일수록... 내 군화는 드디어 쩍 벌어지고 말았다. 바닥이 입을 벌리고 걸음의 한 cycle마다 경쾌한 마찰음을 내었다. 그러나 통명산과 신풍리를 떠나는 마음을 한결 가벼운 것이어다. 밤...
★ 일지에 없는 관련한 당시의 회상: 군화가 벌어진 것과 함께 밑바닥의 못이 뚫고 올라와 휴식 때마다 대검자루로 내려박곤 했지만 소용없어 처음엔 발바닥에 상처를 내 피가 나게 하더니, 나중엔 곰발바닥처럼 노랗게 굳은 발바닥에 못이 고정되는 굳은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 솟아오른 못을 맞춰끼워야 오히려 편한 행군이 됐었지! 인간의 인내와 능력의 무서운 한계에 스스로 놀랐었지! 한편 위에 불평한 LMG덕분에 구사일생했던 적이 있다. 졸며 산허리 다락밭길을 야간행군 하다가. 발밑 허당으로 푹 떨어졌는데 어깨에 가로맨 기관총이 다래 덩굴에 걸려 더 이상 낙하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9월2일 화요일 [매복2일: 대도보부대 매복]
상상하던 것과는 역시 실망할 것이었고 기대에 어긋나고 있었다. 허점투성이 기대에 어긋나 있었다. 위험한 부분은 견학으로 때우는 그러한 훈련이었다. 숙영지를 정했고 작전명령 하달과 예행연습을 마치고 드디어 정찰 기지를 떠나 도로 일방의 언덕으로 기어 올라가 적의 차량화 부대를 기다리며 졸고 있었다. 나는 지원조로 LMG옆에서 솔방울 수류탄을 앞에 놓고 차거운 땅에 궁둥이가 시려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따금 돌격조의 예행연습 함성이 일고 있었다. 500m 전방 적 차량 출현 휘파람 신호! 우리 지원조 앞을 통과 우리 매복지역 내에 적의 차량이 몽땅 들어왔다. 이때 밤공기를 째며 터지는 폭음이, 번쩍 번쩍하는 두 번의 섬광보다 훨씬 뒤에 적 차량의 앞뒤에서 터졌다. LMG는 열심히 볶아댄다. 조금 후 공포탄 탄피를 줍고 있는 우리 지원조 대신 돌격조의 돌격과 노획조의 오늘 3끼 분 식량 탈취, 폭파조의 차량폭파, 경계조를 후미로 한 줄행랑이 남았다. 다시 정찰 기지를 떠나기 전에 적의 도보부대를 같은 방법으로 섬멸해 버렸다.
9월3일 수요일 [도피 및 기지편성]
아군의 유격대! 우리의 수선스러움으로 적군은 혼비백산 일제히 주위의 초점을 우리에게 돌리자 우린 어서 이곳을 떠야만 했다. 벌써 한 달이 가까운 듯 치고 뜯는 Tent 생활에서 다시 보따리를 짊어지고서 뛰어야 한다. 700고지를 넘어서 다시 제2의 전투기지인 현저동에 도달하기까지. 물론 밤이었던 탓도 있겠지만 잡목이 숲을 이루어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길이라곤 가파른 역시 물의 통로로 다져진 험한 밤길이었다. 이 길에서 수m만 옆으로 몸을 숨긴다 해도 웬만한 병력과 방법에 의한 수색으로서는 도저히 공비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으리라! 때때로 갈잎 사이로 뵈는 하늘에 검은 먹장구름이 떼를 지어 휘몰아치고 있었다. 오르는 길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부합되는 바 있어 쉬웠다치고 내리막길은 적어도 마음의 부담을 여러모로 가져다주는 길이다. 목표지가 최종적으로 확정되기 전까지는 새벽 3시30분! 다시 Tent를 쳐야 한다. 준배와 나는 항상 장소의 선택에 골머리를 앓는다. 이번에도 공구에 의한 정지작업이...
9월4일 목요일 [교란작전]
어제 하룬 그런대로 따분한 몸을 쉬었다. 그래서인지 온몸이 이를 데 없이 피곤하다. 사람에겐 계속적인 고통의 훈련이 가해질 수 없는 법. 반드시 일정한 휴식을 취해야만 한다지만 훈련 도중에 긴장감을 풀어주는 처사는 매우 위험스럽기도 한 것이다. 다시 이곳 현저동으로 집결해야 함에도 또 근거리(2~4km)의 목표에 대한 교란작전(이를테면 최후발악)을 시도해야 한다. 벌써 별로 달갑지 않은 마음 속에서 반발의 기운이 감돌고 LMG를 짊어지고 오르는 산길이 그다지도 힘드는 것인지... 정말 마음이 안 맞고 안 통하는 것처럼 세상이 답답해 본 적은 없었다. 교관의 언사와 행동이 무척 쌍스러운 까닭에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도 행군을 계속 중 수색 중에 산에 야생으로 자란 개복숭아 맛에 홀리기도 하면서... 적의 보급소를 폭파하고자 한단다. 달이 떴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차이는 벌써부터 애매했지만 이날처럼 밤길에 자신을 잃었던 적이 없었고 이날처럼 밥하는 데 자신을 가진 적은 없었다.. 비오는 날에 마른 노가지 나무는 불씨에 좋다.
9월5일 금요일 [교란작전 2호]
구질구질한 날이었다. 간밤엔 보급소를 폭파하면서 카스테라 빵을 노획해서 우물거리며 잠자리로 기어 올랐지만. 밤길을 걷는 신경의 소모! 가득 찬 울분을 욕설에 실어 공중에 흩날려 버리며 참아가는 녀석들에겐 건방진 조교의 언사에 어린애같이 순진해져 불같은 분노를 터뜨린다. 가엾은 자들이여! 서로가 같은 구속을 받는 겸제의 생활 속에서 조금의 다툼이 있었다 한들 모다 모자람의 소치이거나 자신을 조금 연장시켜 보장해서 편해보겠다는 한심한 행동들이 아닌가? 밤길은 두고두고 좋았겠지만 생명이 위태로운 산책의 길이었다. 다른 정찰조가 우리 진지로 벌써 도착 후 Tent 속에 몸을 뉘인 후에야 우린 다시 2km여의 새 정찰 기지를 찾아야 했다, 보성강이 붉게 밤에도 흐르고 있었다. 피를 노래하는 여울 소리가 계곡을 울리지만 하천과 도로는 생명의 원천이 동맥으로 표시되었고 인간의 의도 하에 건축된 교량은 싸움으로 파괴되어야 한다! 어리석은 교관을 뒤로 하고 철로를 걷는다.
9월6일 토요일 [도피 및 탈출]
다시 되돌아온 현저동은 우리의 Tent 자리는 비에 젖어 삭막하였다. 겨우 하루 밤의 인연이 먼저 있었던 곳이었다는 사실에서 마치 고향을 찾은 듯 반가웠다. 요즘의 하루는 왠지 한 달에 해당하는 시간의 가치를 지닌 듯했다. 마지막 잠자리를 털고 드디어 마지막[Climax] 절정이라 불리는 도피 및 탈출이 시도된다. 염라대왕이 부를 거라고? 五人의 한 조는 겁이 없었다. 모다 똑똑하였다. 그리고 강했다. 그러나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오랜만에 가벼운 차림으로 군장을 실리운 채 적진을 빠져 아군진지로 향해야 했다. 오랜만의 차량 행군으로 늑골운동을 해가며 구레구역에서부터 1km 남짓 다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서 요란한 총성과 함께 뛰기 시작하는 거다. 우리 똑똑하다는 五人조는 미리 옆으로 새어 버렸다. 이것이 많은 시간을 초래하게 하였다. 독도법을 너무 믿은 탓으로 하천을 잘못 보았다. 때는 장마철이었다.
9월7일 일요일 [교란작전]
아군 전초를 만나는 지점까지 우리 조는 시간에 늦어가며 애초 원칙을 찾으려 험난한 길 400고지를 오르내리는데 3시간여를 잡아먹어가며 다시 고생을 한 뒤 포기상태 하에서 대로를 졸음 속에 활보해서 북괴 군관동무와 전사동무 한 마리도 보지 못한 채 오고 말았다. 너무 주의심이 많은 탓으로 30분을 지난 뒤에... 피로와 허탈 속에 뱃속은 생고구마와 시골집 빵이 뒤섞여 설사를 생성하고 있었다. xxxx
팔뼈가 부러진 녀석, 얼굴이 까진 녀석, 포복으로 양 무릎과 팔굽(꿈치)이 벗겨진 녀석, 농작물을 몇 십 평을 망쳐놓은 뻔뻔한 녀석, 민가에서 외박을 하고 오는 녀석, 맞아서 울었던 녀석, (괴뢰군 역 조교에게) 빌었던 녀석, 이를테면 비겁한 녀석의 총 집산이 새벽이 지나자 우르르 천은사로 몰려들었다. 조교의 애꿎은 팔목시계와 손목과 눈탱이를 으스러뜨려 놓고서.. 정말 꼴불견이었다. 개울 물 속의 포복, 차 밑, 자갈길의 포복, 고지 선착순, 모다 헛거다. 「알겠나 도피 및 탈출을 알겠지?」
★ 일지에 없는 관련한 당시의 회상: 누군가는 적(조교)에 발각되어 논 속으로 도망가니 농작물이 상할까 쫓아오지 못하는 조교가 나와달라고 사정사정하더라 했고, 누군가는 정말로 잡혀서 거꾸로 매달려, 코에 쏟아붓는 고춧가루 물에 지옥구경을 했다고도 했지!★
★ 일지에 없는 관련한 당시의 회상: 천은사 집결시간에 늦어 낙오자로 처리돼 받은 물속 포복 기압을 받는데 장마로 시뻘개진 격류에 떠내려가면서 함께 구르는 돌과 바위에 부딪칠 때, 어느 기수인가 이 격류 속 포복으로 죽은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나도 그리 될 것 같아 공포를 실감했었다★
9월8일 월요일 [대 유격작전: 행군]
모든 유격대 편성이 끝났다. 공비들의 발자욱을 따라 벌써 8백여리! 다시 차량행군으로 화엄사까지.. 지지난밤의 악몽 같았던 사고현장을 눈여겨 보아가며 서시천을 돌아 구례읍으로 돌아서 다시 화엄사로 향했다. 나는 그날 밤에 과자를 사먹었던 가게 아가씨들을 찾아보았으나 가게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화엄사! 단지 좋은 절이라는 것. 역시 부처님의 작은 눈은 사람을 엄숙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절 내의 종과 불상이 마음에 들었다만 절 밖의 물에 대해서는 더 이상 표현을 않으려는 바이다. 손이 시리다기에 입에 물어 보았더니 이가 마주쳤다. 과연 명산에 명절(명찰)에 명수였다. 참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계곡의 물이란 대개는 이렇게 골짜기조차 웅장하면서부터 좋은 명 약수의 품위를 지닌 모양이다. 이제 반합 속의 밥이란 계곡의 물속에 뜸을 들여야 제격인 모양! 문수리를 향해 다시 발길을 돌렸다, 여기는 어딘가 산이다! 아니다. 어디건 내 잠자리요 나의 산소자리다!
화엄사에서
9월9일 화요일 [노고단 숙영]
드디어 참나무 숲이 우거진 노고단 산록을 끼고 돈 후에 약 70도 경사의 산허리를 수직으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중간에서 참나무 숲이 우거지고 바짝 죽어서 말라 빠진 원목과 관목이 쓰러진 가운데 드문 드문 1,000 고지가 넘는 고산 식물이 눈에 띄는 행로의 도중에서 우리는 수색 대신에 저녁거리 산나물을 찾아보았다, 기껏해야 더덕 뿐인 것 같았으나 나는 야생 대나무와 싸리나무가 드문 드문 진을 치고 있는 산비탈 급한 곳에서 싸리버섯을 올빼미(모자)에 가득 따담았다. 노랗게 익은 것이 어떻게 보ᅟᅧᆫ 독이라도 들었을 법 한데 연한 버섯줄기는 감촉이 싸늘하였다. 드디어 1,507고지! 노고단 정상이 보였고 정상을 앞두고 300여m엔 키 작은 참나무가 아름다운 정원수를 닮아 growtask(^^→grotesque)하게 줄지어 있고, 바우 틈에 깔려 피어있는 패랭이꽃 들국화는 돌이끼 검푸른 바탕에 돋보였다. 아! 벌써 고산엔 늦가을이 찾아왔다. 아름다운 핀란드의 어느 고산 목장의 정원을 연상하듯.. 고산지대에서 힘들다는 밥도 훌륭히 해 먹은 뒤 하룻밤을 다사롭게 지냈다.
★ 이 때를 회상해, 1990년 6월(40대일 때) 혼자 지리산종주를 하면서 화엄사에서 노고단에 오른 적이 있다. 연하천과 치밭목 산장에서 막영하고 취사하느라 텐트 야전삽 석유버너 침낭 도끼 반찬유리병 간식 등 온갖 장비를 다 챙겨 짊어지니 배낭무게가 30kg이 넘었다. 그 무게로 오르니 힘들었다. 5분 가고 5분 쉬면서. 그때 유격훈련 당시의 고된 경사를 회상했는데, 1990년 당시의 민간 등산가들 중에서도 회자되던 눈썹바위(힘들어 눈썹도 떼어버리고 싶다에서 유래) 코재(코가 땅에 달 정도로 경사졌다는 데에서 유래)를 지나면서 실감했고, 대유격작전 모루조로 숙영하던 노고단에 이색적인 붉은 벽돌집이 있고 선교사들이 거주했었다고 했는데 1990년에는 발견하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을 가진다. ★
9월10일 수요일 [망치와 모루 작전]
새벽 5시에 기상! 그야말로 입김이 새하얀 추운 아침이었지만 모다 용케도 잘도 나와 주었다. 망치조에 의하여 쫓기는 적 게릴라가 우리가 지키는 길목으로 올 것임에 틀림없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나무(주목?) 사이에 아침 찬 샛바람을 막기 위해 하나 둘 총을 쥔 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어 멀리서 간간이 총성이 들리더니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우리 위치에서 약 400m 우측으로 적의 도주로가 바뀌었다는 상황이 주어졌다. 한번 산토끼처럼 뛰어보기로 했다. 다시 잠복해 있기를 몇 분, 발사신호탄이 쏴 올려지고 우리는 열심히 남은 마지막 공포탄을 쏴버렸다. 조금 있더니 좌편 방어진에서 “잡았다!”는 소리와 “살려둬!”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상황이 끝난 뒤 우리가 얻은 수확은 적 게릴라가 아니었다. 세 마리의 작고 큰 정말 산토끼였다. 아침잠에서 총성에 놀라 우왕좌왕하다 개머리판에 맞거나 코를 정통으로 총에 맞은 것이다. 추격전을 반야봉으로 실시하려다 그냥 두고 해질 무렵에 우린 정말 장한 모슴으로 천은사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지리산 건설단은 “주먹의 힘”(깡패)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9월11일 목요일 [천은사에서 정비]
아침부터 개운한 기분이었고 정비를 하기 시작했다. 참 지루했던 날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처럼 신나는 일도 없었을 거다. 이제 천은사 뒷 골짜기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넓은 바위에 몸을 누인 채 도벌로 이상한 형태로 듬성듬성 능선을 타고 오르는 소나무들을 바라보았고 그 나무 새로 파란 늦가을(?) 하늘이 푸르게 푸르게 아프게 눈을 육박해 왔다. 잘도 참아왔다. 힘들었던 한 달을... 그러나 이제 병기에 애착을 갖고 손질하기 전에 이 고통을, 보다 더한 고된 훈련을, 남이 받는 이러한 것이 아닌 남들이 모르는 고통을 말없이 받을 수 있어야 했을 터인데. 나는 이 훈련기간 너무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제 힘들었던 나날이 열매로 맺어 내입에 들어올 때 그 맛은 그리 달콤하거나 입맛에 그렇게 꼭 맞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할 때 내가 뜻하는 바대로 나를 지키지 못했고 그런 노력마저 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천막 주위의 청순한 코스모스 향기여.
9월12일 금요일 [유격훈련 수료식]
생긴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양철조각이었다. 파란 바탕에 하얀 칼과 밧줄! 수료식은 천은사에서 문중섭 보병학교 교장에게서부터 있었고. 예의 털보 유격대장은 우리가 선물한 지휘봉을 받고 기꺼워하던 모습으로 서있었다. 언젠가 또 한 번 이 과정을 밟을 런지는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이 순간은 가슴 벅차오르는 동시에 다시 과연 이 휘장의 가치는 어느 정도가 되는 것일까 하고 생각되었다. 모두 어떤 기분으로 들 이 휘장을 받는 걸까? 나같이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도 있겠고 의지와 몸이 약했던 어떤 동기생은 께름직한 기분으로 받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면 부족과 철저한 발바닥의 안마라고 비유된 이번 훈련을 통해 걸은 걸음은 거의 1,000 리를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다 헤어져가는 유격대의 올빼미의 복장에 어울리지 않게 생철 조각의 휘장이 빛나고 있다. 이어 구례에서 광주까지 거의 여섯 시간을 먼지 속에 트럭으로 달려왔다. 5번의 자동차 고장으로 차량행군은 중단되었다. 전시에도 다를 바는 없으리.
유격훈련 당시 올빼미 모자와 유격훈련수료 휘장, 올빼미 모자에 낙서된 유격훈련의 애환
9월13일 토요일 [에필로그-귀경]
우리가 다니던 옛 빨치산의 통로에는 민가가 있었고 사람들이 살았었다. 사람은 많이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軍人은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산골 촌막의 늙은이네와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람 구실을 정말로 하고 있는 지도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별로 반가운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제 훈련이 끝나면서 구례읍을 거쳐 광주로 오는 어제의 행로에서 간간이 보이는 젊은 여성에 대하여지는 우리의 태도는 모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릴 때 왜 군인 녀석들이 누나 또래의 여자와 같이 길을 가노라면 휘파람을 불고 야성을 지르는지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분개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제야 겨우 이해가 갈 듯한 경지에 들어선 모양이다. 사람에 대한, 문명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도 어지간한 모양이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무리들의 어리석음에서는... 광주가 그렇게 사람 사는 맛이 보였고 서울 보다 원색을 즐기는 아가씨들의 옷차림이 오랜만의 눈요기가 되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지긋지긋한 광주를 털어버리고 차창 밖에 풍년의 향취가 드높은 호남, 김제 평야를 가르며 귀경에의 열차에 오른 것이다. 서울! 역시 서울이다.
9월14일 일요일 [에필로그-학교]
4박5일, 5막6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2박3일로 준다 해도 그게 문제가 정말 아니었다. Rapel코스에서 암석면에 얼굴을 뭉개버리고 참호격투에서 이마와 턱에 영광의 승리의 패배의 상처를 지니고 긴 행군에서 얻은 발바닥의 노란 굳은 살을 몸에 지닌 우리들은 이것저것보다 학교가 좋았다. 높은 산을 오르내리던 눈에 92고지가 깎여 없어진 줄로 착각한 정도이었어도 돌밭에 Tent를 치던 기분에서 호실의 철침대의 spring 맛은 기가 막힌 고급의 멋이었다. 하루를 정비의 시간으로 가지면서 무한히 지난 이야기에 들떠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얀 생도대가 초록으로 바뀌면서 우리의 눈에 거슬리는 건 많았지만 위치가 어느 자리를 돌아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새로운 결심들을 한 가지씩 할 수 있었고 어설퍼진 신경이 둔해지는 날까지 잠시 휴양을 가든지 해야 했다. 작은 산골 어느 구석이 아니어도 마음 속으로 내 고향은 깊이 들어 앉아 있었다. 모두 웃음으로 받아 주리라, 그리고 또 무척 시무룩하게도 앉아 있을 수 있으리라. ♣♣
2021.4.29. 김명수
첫댓글 그 힘든 훈련속에서도 역사를 기록했구나 !
대단한 자랑스러운 동기
김명수 수고 많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