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랑길 58코스(여수구간)-1
한적한 해변에서 삶의 속도를 늦추다
5월 하순에 갓 접어들었는데 초여름 날씨다. 갈수록 봄가을이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는 추세다.
봄 가뭄도 심각하다. 비가 내리지 않으니 밭작물이 타들어간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가 이상기온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세계가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날씨가 무덥다. 남파랑길 58코스가 시작되는 여수시 화양면 서촌마을에 도착하니 햇볕이 따갑게 내리쬔다.
서이산을 등지고 있는 서촌마을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남파랑길은 서촌마을 앞 들판 가운데로 난 농로를 따라서간다. 모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들이 파릇파릇하다.
들길을 지나 석교마을 방향으로 가는 도로를 만난다. 걷고 있는 도로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좁고 길게 들어와 있다.
썰물 때가 아닌데도 갯벌이 드러나 있다. 물이 완전히 빠지면 이곳은 갯벌 일색이 된다.
갯벌에서는 바지락과 고막이 양식된다. 잠시 863번 지방도로를 따라 걷다가 제방을 거쳐 해변 산자락 임도로 접어든다.
바다를 막은 조그마한 석교제방 안쪽으로 넓지 않은 논과 석교마을이 바라보인다.
임도를 걷고 있는데 바로 아래에서 바닷물이 출렁인다. 길가에서 하얗게 핀 찔레꽃이 진한 향기를 전해준다.
해변 산자락을 돌아가자 또 하나의 작은 제방이 나온다. 옥적제방 안쪽으로 네모반듯한 논들이 펼쳐지고
농경지 뒤로 옥적리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제방을 막기 전에는 이곳 농경지는 바다였을 것이다.
모내기하기 전 물을 가두어놓은 무논에는 주변의 낮은 산봉우리들이 그림자를 내려놓았다.
농경지 안쪽으로 보이는 옥적리 마을에는 폐교를 활용한 여수시 예술인촌이 자리하고 있다.
예술인촌은 2009년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의욕을 높이고 시민들의 문화예술체험과 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예술인촌에는 작은미술관 옥적갤러리가 있는데, 여기에서 입주 작가를 비롯한 지역 작가들이
지역민들을 위한 다양한 미술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갤러리에서는 지역작가 전시회도 열린다.
논길을 지나 임도를 따라 언덕하나를 넘자 마상마을이다. 마상마을에서는 낮은 산봉우리들 사이로 여자만이 바라보인다.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아래쪽에 조그마한 마상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남파랑길은 마상저수지 제방 아래 농로를 따라 이어진다. 농로에서 바라보니 남쪽으로 고흥 팔영산이 고개를 내민다.
주변 밭에서는 옥수수가 자라고 있다. 이미 열매를 맺은 옥수수도 있다.
여수에서 생산되는 옥수수는 일찍 심어 강원도 등 다른 지역보다 한 달 이상 빠르게 수확한다.
여수시 화양면에서 주로 재배하는 옥수수는 6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수확한다.
옥수수는 여수시의 지원으로 돌산갓, 거문도해풍쑥과 함께 여수지역 대표 농특산물로 집중 육성중이다.
재배된 옥수수는 생 옥수수로 팔기도 하지만 지역 업체가 사들여 조청과 분말 등으로 가공하여 판매한다.
863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감도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감도해변은 높지 않은 불암산(178m)이 감싸고 있다.
불암산에서 북서쪽으로 낮은 언덕을 이루며 뻗어나간 산줄기는 900m 정도 여자만으로 돌출하여 곶을 이뤘다.
바다로 가늘게 뻗어나간 감도곶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여자만에 떠 있는 섬 여자도를 바라보고 있다.
용의 목에 해당하는 언덕 양쪽 해변에 감도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해변에 길쭉하게 자리한 감도마을은 앞쪽으로 여자만이 넓게 펼쳐진다.
여자만 뒤로는 고흥반도를 이룬 산봉우리들이 하늘과 경계를 이룬다. 여자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자도가 손짓한다.
감도해변은 부드러운 타원형인데 갯벌을 이룬 주변과는 달리 몽돌해변이다.
감도마을 끝에서 ‘ㄱ’자로 꺾어진 해변에 형성된 감도포구에는 여러 척의 배들이 정박되어 있다.
마을 뒤 언덕은 밭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 밭 역시 대부분 옥수수가 재배되고 있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본 감도해변이 예쁘고 정겹다. 고갯마루를 지나는 도로 위쪽에 있는 사각정자에서도
감도마을과 감도해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감도마을은 조용한 해변을 따라 길게 자리하고 있다.
감도해변으로 내려선다. 민가에서 약간 떨어진 감도해변 남쪽 끝에는 펜션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펜션단지를 지나 감도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서대회무침과 해물칼국수도 있지만 우리는 아구찜을 시켰다.
감도식당은 감도해변에 있는 조그마한 식당인데, 음식이 담백하고 정갈하다. 음식솜씨 좋은 시골밥상 그대로의 맛이다.
밑반찬은 대부분 밭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와 바다에서 잡은 해물이어서 신선하다.
식당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풍경은 음식 맛에 운치를 더해준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 잔디밭에 놓인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멍을 때린다.
가슴에 안겨오는 넓고 잔잔한 바다가 내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파도소리마저 멎어버린 해변은 고요하고 한적하다.
삶의 속도가 저절로 늦춰지고 가슴 속에 여백이 생긴다.
삶의 여백이야말로 평온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인데, 우리는 여유를 갖지 못하고 늘 바쁘고 조급하다.
감도해변을 따라 걷다가 마을 뒤 옥수수밭을 지나 낮은 언덕을 넘으니 북쪽에도 감도마을 가옥들이 해변을 끼고 있다.
해변길을 걷고 있는데 잠시 후 만나게 될 이천마을이 북쪽에서 손짓한다.
감도곶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소운두도는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소운두도 뒤로 자래섬과 운두도가 나란히 서 있다.
감도마을 북쪽해변에서 863번 지방도로로 올라와 200m 정도 걷다가 도로 위쪽 중촌마을로 올라선다.
중촌마을길을 지나 임도를 걷는다. 무더운 오후 날씨 속에서도 임도 숲길이 시원하다.
길은 고개를 넘어 소옥저수지로 이어진다. 소옥저수지 아래는 여수시 예술인촌이 있는 옥적리 마을이고, 저수지 위쪽은 소옥마을이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소옥저수지와 소옥마을을 지날 때는 지척에 해변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마을 근처 밭에는 고추를 비롯한 여러 가지 밭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소옥마을 위쪽 좁은 골짜기에는 모내기를 마쳤거나 모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논들이 층을 이루고 있다.
마을을 막 지나자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정자가 기다리고 있다. 5월인데도 초여름 못지않게 더워 정자에 앉아 땀을 식힌다.
정자 아래로 농경지와 소옥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우리나라 어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정자는 주민들의 쉼터이자 소통공간이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에는 중요한 피서공간이 된다. 길은 논과 산을 경계 지으며 이어진다.
임도를 따라 낮은 고개를 넘어서자 다시 여자만이 펼쳐진다. 임도 숲길을 빠져나오자 발 아래에 이천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완만하게 타원을 그린 이천해변 앞바다에는 운두도와 자래섬, 소운두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소운두도와 가깝게 다가와 있는 감도곶도 이들 섬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감도곶과 세 섬으로 감싸인 이천마을 앞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포근하다.
운두도‧자래섬‧소운두도 뒤로는 고흥반도와 벌교 인근 산들이 하늘과 경계를 이룬다.
세 개의 작은 섬 중에서 가장 큰 운두도에만 사람이 산다. 운두도에서는 11가구가 거주한다.
섬 주민들은 계절에 따라 전어잡이와 장어‧새우잡이를 한다. 그리고 섬 근처 갯벌에서 바지락을 채취한다.
세 섬의 행정구역은 여수시 화양면 감도마을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