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누리길 열다섯 번째 길
철원 세 번째 : 화강길
2023년 01월 29일 일요일 맑음
글쓴이와 아내
죽어도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 군대 생활을 한 곳을 향해 용변도 안 본다.
군 생활의 외상(外傷:트라우마)으로 통하는 심리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글쓴이는 40여 년 전에 백골 사단에 속하는 신수리에 근무했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던 그곳이 슬슬 어느샌가 그리워지더니 드디어 걷기를 통해 사단의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 꼬꼬지 추억이 떠오르며 발길 닿는 곳곳마다, 이등병의 정기와 병장의 느긋함을 다 느낄 수 있는 모처럼의 한가로움을 만끽한다.
도창 군 검문소에 다시 왔다.
보안상 검문소는 찍지 못하고 출발지점의 안내판에서 시작한다.
도창검문소에서 큰길을 따라간다. 3,5Km 정도다
40분 정도가면 곧바로 화강 둑길로 연결된다. 다리는 남대천교라 부른다 여기서 왼쪽이다.
강 물길을 잡는 역할을 하는 한국농어촌공사건물이 있고 화강이라는 안내판과 평화누리길 안내 그림이 있다.
이길은 화강 느티나무 30리길이라 따로 이름했고, 화강길 중 쉬리 공원까지 11.2Km를 걷는 방향 오른쪽으로 느티나무를 촘촘하게 심어놨다. 여름에는 아름다움이 훨씬 더할 것 같다.
전쟁으로 허리가 댕강 잘린 김화(金化)읍을 지나는 이곳은, 원래 1937년도만 해도 9만7,000여 명의 인구를 먹여 살린 강원도에서 두 번째 큰, 1개 읍 11개 면을 거느린 커다란 군(郡)이었다. 인근 철원과 화천은 말할 것도 없고 춘천보다 인구가 많았다. 그러나 화려했던 김화의 모습은 자료로만 남아 있다. 현 김화읍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5km를 더 들어간 생창리에 “사라진 마을 김화 이야기” 전시관이 있다.
금강산철도가 지나는 김화 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읍내의 모습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았다. 동일은행 김화지점을 비롯해 식량 소매조합, 상공회, 목재조합, 제탄조합, 체육협회, 주조조합 등 전시장에 열거한 여러 직능단체의 면면만 봐도 김화의 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된다. 왼쪽으로 가면 쉬리공원이 시작된다.
도창 검문소를 출발하여 화강을 따라 난 둑길을 거쳐 쉬리공원을 지나 와수천을 따라 사단 신병훈련소, 18연대 본부를 찍고 자등 119지역대까지의 여정이다. 20.6km 거리를 딛고 걸어야 한다. 위아래 심한 굴곡이 없고 푹신한 눈밭 위를 걸어서 비교적 발의 충격이 없다.
생창리와 읍내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김화읍은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흔적도 없이 파괴되고, 분단 이후에는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지역으로 묶였다. 그래서 이곳의 작은 김화읍이 재건되어 인구 2,000여 명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된 채 외로운 길만 덩그러니 남았다. 자등119 지역대까지는 12.2km 남았다..
지역주민의 쉼터 화강의 쉬리공원을 지난다.
화강(花江)은 북한 쪽 김화군 수리봉에서 발원해 DMZ를 거쳐 한탄강에 합류하는 강이다. 총 43.6km 중 23.5km가 남측 구간이다. “화강 쉬리공원”에는 야영장이 조성돼 있다. 놀이터와 수영장, 강변 산책로와 징검다리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1급수에 서식하는 쉬리를 공원 이름으로 했지만, 이곳의 주요 즐길 거리는 주로 다슬기 잡기다. 매년 8월 화강 일대에서 다슬기 축제가 열린다.
남대천교에서 여기까지 한시간 반이 걸렸다.
쉬리공원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맞은편부터 서면 와수리 지역이다. 여기부터는 장수길이다.
철원군 갈말읍에서 동쪽으로 약 20km를 달리면 서면 와수리다. 분명 철원의 동쪽이면 동면(東面)이어야 할 텐데 서면(西面)이다. 왜냐하면, 기준이 철원이 아니라 김화이기 때문이다. 이웃의 근동면과 근북면도 김화읍을 중심에 놓은 지명이다.
“와수(瓦水)”라는 지명도, 북쪽 김화 오성산에서 바라보면 기와(瓦)지붕이 물결(水)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유래했다. 또 고려 시대에 이곳 김화 고을에서는 청기와 공장(工場)과 고려자기를 제조하는 기와공장이 있어 기와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와수리 일대의 민가는 거의 와가일색(瓦家一色)이었다 한다.
여기부터는 와수리를 남쪽으로 돌아 와수천을 따라간다. 데크로 꾸민 길이 아름답다.
청둥오리가 한가롭게 뛰노는 와수천
서면 시민 운동장을 알리는 탑에서 에서 왼쪽으로
임시로 만든 얕은다리를 건너자 마자 직진하지 말고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나란히 한 길을 따라가다 와수천교에서 왼쪽으로 꺾어 큰길을 건너간다.
와수천교길에서 둑길로.
여기서 조용하고 지루한 길을 오랫동안 따라간다. 외길이라 알바는 염려가 없다.
드디어 맞은 편에 3사단 신병교육대가 보인다.
신병교육대 앞 산을 빙돌아간다. 작은 동산옆구리를 두른 데크길을 따라간다.
쉬리공원에서 여기까지 한시간 반이 걸렸다.
하송동교를 지나 송동1교 앞이다.
3사단 18연대 본부대가 보인다. 여기부터는 신수리라 부르는 자등리(自等里) 일대다
조선 숙종 2년(1676년) 2월 김화(金化) 고을에 부임(赴任)한 황후영(黃候永)이라는 현감이 현 자등 2리에 있는 상해암(上海巖)의 마루 터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볼 때마다 남녘 하늘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같이 있던 아전에게 사유를 물은즉 “남쪽 하늘은 원래부터 그렇게 빨갛게 물들어 있습니다” “아마 무슨 곡절이 생길 전조가 아닐는지요”라고 말하자 현감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러면 이제부터 이곳 마을을 자등(紫等) 마을이라고 부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여기를 지나면 석현마을이다
그로부터 이곳 마을을 자등(紫等)이라 부르다가 해방(解放) 후부터는 현 법정지명과 같이 자등리(自等理)로 부르게 되었다.
석현교를 지나 석현마을을 지나니 남근을 새긴 돌이 길 옆에 있다 무슨 연유인가?
요즘 보기드믄 징검다리를 건넌다. 건너서 오른쪽으로 가면 신수리 마을이다.
자등리에 다왔다.
신수리 119지역대 앞. 이 코스의 종점이다.
신병교육대에서 여기까지 1시간 반이 걸린다.
20.6Km
5시간 08분 56초
39,245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