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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강 - 行由品- 11
慧能이 後至曺溪하야 又被惡人의 尋逐하고
乃於四會에 避難獵人隊中하야 凡經一十五載라
時與獵人으로 隨宜說法이러니
獵人이 常令守網하라하면 每見生命하면
盡放之하고 每至飯時하야는 以菜로 奇煮肉鍋하니
或이 問則 對曰, 但喫肉邊菜라하니라
一日은 思惟하니 時當弘法이라 不可終遯일새
遂出至廣州法性寺하야 値印宗法師의 講涅槃經이러니
時에 有風吹幡動이라 一僧은 云幡動이라하고
一僧은 曰風動이라하야 論議不己어늘
慧能이 進曰,
不是風動이요
不是幡動인데 仁者心動이라하니
一衆이 駭然이어늘 印宗이 延至上席하야
眞詰奧義할새 見慧能의 言簡理當하되
不由文字하고 宗이 云, 行者는 定非常人이라
久聞黃梅衣法이 南來러니 莫是行者否아
慧能曰, 不敢이로라 宗이 於是에 作禮하고
告請傳來衣鉢을 出示大衆하고 宗이
復問曰, 黃梅付囑을 如何指授니잇고
慧能曰, 指授卽無하니 惟論見性하고
不論禪定解脫이니라
***
육조스님의 행적에 대한 소위
行由品(행유품). 행유품 이야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慧能(혜능)이 後至曺溪(후지조계)하야 했는데
지난 이야기까지는 법을 받아가지고,
야밤중에 도망을 나왔지요?
그런데 道明(도명)이라고 하는 사람이
쫓아와가지고, 옷 과 발우를 빼앗으려고 할 때,
옷 과 발우를 바위위에다 얹어놓고
숨어 있었는데, 그 도명이 옷 과 발우를 들어도
끄떡도 하지 않자 얼른 생각을 바꿔서, ‘
이 행자가 큰도인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내가 법을 구하러 왔노라.”고 말하면서
얼른 나오시라고 그렇게 됐지요.
그래서 육조스님이 나와서는,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하라.
正與麽時(정여마시)에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아니할 때,
그럴 때 어느 것이 그대의 모습이냐?
그대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이냐?
참 모습이냐? 참 생명이냐?
이런 이야기를 해서 역시 도명이라는
사람까지도 거기서 깨닫게 됐고,
또 도명이라는 사람이,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 할까요? 하니까
혜능 스님이 있다가,
逢袁則止(봉원즉지)하고
袁이라는 지명을 만나거든 거기서 그치고,
遇蒙則居(우몽즉거)하라 蒙이라고 하는 지명을
만나거든 거기에서 살아라.
이렇게 끄트머리에 됐어요. 그러니까
도명이 예배하고 서로 헤어졌지요.
헤어지고 얼른 되돌아가서 쫓아오는 사람들에게
“이쪽으로 가보니까 없더라.”
하고 거짓말을 해서 딴 데로 돌려보내서
육조스님을 무사히 도망시킬 수 있었다 하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慧能(혜능)이 後至曺溪(후지조계)하야→
혜능이 그러다가 曺溪山(조계산)이라고 하는데
이르러서, 여기서는 또 조계산에서 피해갔다가
나중에는 또 조계산에서 살게 되고 그렇지요.
한국 불교도 육조스님의 법맥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하는 뜻에서, 전통 종단을 “曹溪宗(조계종)”
그렇게 합니다. 우리나라 송광사 있는 산 이름도 조계산.
그렇게 했는데요. 후에 조계라고 하는 산에 이르러서,
又被惡人(우피악인)의→
또 악인들의 쫓아오는 바를
尋逐(심축).→
찾고. 쫓아오는 것을 입게 됐다.
이 말입니다. 거기까지 찾아 나섰더라
이것이지요. 그래서 또
乃於四會(내어사회)에서→
사회라고 하는 곳에
避難獵人隊中(피난엽인대중)이라→
엽인들. 사냥꾼들 무리 속에서 피난을 하게 됐다.
여기 四會라고 하는데, 저 앞에: (11강) 예언에
오조스님과 헤어질 때, 逢懷則(봉회즉) 하는
그런 말이 있었지요. 懷를 만나거든 거기서 그치라.
고 하는 그런 말이 한번 있었습니다.
그 예언하고 맞아 떨어져요.
祖-云(조-운,) 逢懷則止(봉회즉지)하고
遇會則藏(우회즉장)하라 거기 모일 會자.알 會자가 있지요?
遇會則藏(우회즉장)하라 會라고 하는 지명을 만나거든
거기서 감추라. 자기 몸을 감추라. 이 말입니다.
藏자는 “숨으라” 이 뜻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四會라고 하는 지명을
오조스님이 이렇게 예언을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四會라는 땅에서 사냥꾼들의 무리 속에서
피난을 했는데,
凡經一十五載(범경일십오재)라→
15년 동안 사냥꾼들 무리 속에서 피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참 대단한 일이지요. 어려운 일입니다.
도를 통해 가지고서, 얼른 법을 펴야할 입장인데...
또 섣불리 나갔다가는
그때 신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 분들이 전국에 흩어져서는, 옷과 발우.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람들이 충분히 잊어버릴만한
그런 길고 긴 시간이 경과한 것이지요.
15년쯤 지났으니 사람얼굴도 변했을 것이고,
또 그 사람들이 찾고자하는 마음도 이제는
시들했을 것이고, 각자 자기 돌아 갈 데로 돌아가고,
자기 공부 할 바데로 공부 하게 되었을 테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時與獵人(시여엽인)으로→
그 때에 사냥꾼들하고 어떻게 살았느냐?
엽인으로 더불어 隨宜說法(수의설법)이라→
편의를 따라서, 꼭 법문 한다 하는
그런 모양새를 갖추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생활하는 속에서 설법하게 되면 설법을 했는데...
獵人(엽인)이 常令守網(상령수망)이라→
말하는걸 보니까 사냥꾼들하고는 달라서 늘
그물을 지키도록, 다른 사람들은 몰이를 해오지요.
짐승을 몰이 해오는 것은 전문가들이 하는 것이고,
육조스님은
못 빠져 나가도록그물을 딱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못 빠져 나가도록 지키게 했는데,
每見生命(매견생명)이면→
살아있는 짐승을 만약에 보게 되면,
盡放之(진방지)라→
다 놓아 주었다. 이겁니다. 그냥 두면 그 사람들 손에.
그물에 걸려서 죽게 될 테니까,
육조스님은 살아있는 생명을 보면 몰래.
그 사람들 몰래 전부 다 놓아 주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每至飯時(매지반시)하야는→
매양 밥 먹을 때 이르러서는,
以菜(이채)로서 奇煮肉鍋(기자유과)라→
유과. 고기를 지지는 냄비에다가
채소를 거기에다가 얹어서 먹었다.
그러니까 고기는 안 먹고
고기를 그 사람들에게 삶아주고는,
고기물이라든지 뭐 그 옆에 하며는 맛이 좋겠지요?
그렇게 같이 익혀서 먹으면서...
或(혹)이 問則(문즉)→
“왜 그렇게 고기는 안 먹고 늘 채소만 먹느냐?”
그렇게 하니까,
對曰, 但喫肉邊菜(대왈, 단끽육변채)라→
이 유명한 말이에요. 육변채. 나는 육변채만 먹는다.
육변채. 고기 가에 있는 채소만 먹는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뒤에 편집하는 사람들이,
뭐 그 소상한 그런 내용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관계없이 그렇게 좀 이치에 맞도록
이렇게 꾸미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요.
안 먹을 수는 없고 그 사람들은 늘 사냥을 해서
전부 고기를 주식으로 했을 테니까요.
육변채를 먹을 뿐이다.
一日(일일)은 思惟(사유)하니→
그러다가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러다가 진짜 사냥꾼이 되고 말겠다.’
이런 생각도 들고, 그래서 생각 하니까
時當弘法(시당홍법)이라→
때가 마땅히 법을 펼 때가됐다.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까
‘이제는 내가 나가서 법을 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낌새를 차리게 된 것이지요.
不可終遯(불가종둔)일새→
가히 끝까지 죽을 때까지
이렇게 계속 도망만 다닐 것이 아니라...
遂出至廣州法性寺(수출지광주법성사)하야→
드디어 나가서 광주 법성사 에 이르렀다. 이겁니다.
지금의 광주예요. 홍콩옆에 있는 광주요.
큰 도시지요. 제가 중국 맨 처음에 갔을 때,
그때는 곧 바로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홍콩을 거쳐서 갔는데,
마침 또 비행기가 잘못되어가지고
기차를 타고 광주로 갔어요.
홍콩서 기차를 타고 광주 어느 역까지 갔는데,
거기는 국경이었어요.
국경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갔는데,
첫 도시가 광주였어요.
법성사도 들려보고 그랬는데,
“광주 법성사다.” 그랬어요.
그 때 그 사찰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値印宗法師(치인종법사)의 講涅槃經(강열반경)이러니→
법성사라고 하는 절에 가서,
인종법사의 열반경 강하는 것을 만나게 되었다.
마침 그 절에 들렸는데, 인종법사 라는 이가
열반경을 강의를 하고 있었더라.
時(시)에→ 그때
有風吹幡動(유풍취번동)이라→
經山林(경산림). 예를 들어서 화엄경산림.
무슨 경산림하면 사찰에서 대단한 불사거든요.
佛事(불사) 중엔 제일 큰 불사입니다.
“경산림”그러는데 열반경을 강한다
그러면, 열반경산림! 그래요.
한 달이나 아니면 100일 한 철이나,
일정을 정해가지고 크게 행사를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찰에서도 오고,
신도들도 오고, 성황을 이루지요.
유명한 법사가 경을 강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경산림” 그래요. 그때 마침 바람이...
그런 불사를 할 때는 幡(번)을 많이 걸어 놓습니다.
五方幡(오방번). 十方幡(시방번).
시방번 같은 것은 冥府(명부)에 해당 되는 것이고,
오방번 하면 동서남북에 따라서 부처님을 뜻하는,
東方瑠璃光世界藥師如來(유리광세계약사여래)=
大醫王佛(대의왕불).
西方極樂世界阿彌陀如來佛
(서방극락세계아미타여래불).
이런 것을 크게, 지금 같으면 현수막이지요.
그 현수막. 그런 것이 절에서부터 발달했는지
아무튼 크기도 그만 해요. 요즘 큰 현수막같이,
그것을 밑으로 길게 거는데 요즘에 보니까
현수막을 밑으로 걸더라고요.
밑으로 거는 현수막이 많지요.
데모할 때 보면 밑으로 많이 세우잖아요.
절에서는 본래 그렇게 밑으로 세웠었어요.
옆으로 거는 법이 잘 없고
꼭 밑으로 내려서 걸었는데,
그것을 법당에 걸어놓는 경우도 있고,
행사 때는 도량에, 온 도량에
그런 것을 많이 걸고 천수경에 있는
다라니를 梵唄(범패)로 써서
그것을 걸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신장들께서,
큰 佛事(불사)에 가피를 내리소서 하는 뜻도 되고,
시방번같은 것은, 보호 해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걸기도 하고 그렇지요.
그래서 여기도 그런 것을 많이 걸어놓고
불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던 모양이에요.
재미있는 이야기로
자주 人口(인구)에 회자되는 말인데요.
一僧(일승)은 云幡動(운번동)이라하고→
한 스님은 바람이 펄렁거리니까,
“아 저거는 번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一僧은 曰 風動(왈 풍동)이라→
“아니야, 번이 움직이지만 바람 없이
어찌 번이 움직이나?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야.”
두 스님이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이것이지요.
다 맞는 말이지요.
論議不己(의론불이)라→
논의가 끝나지 않고 계속 옳으니 그르니
일종의 법담 형식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떠꺼머리총각
慧能(혜능)이 進曰(진왈),→
혜능이 떡 나아가가지고 하는 말이,
끼어든 것이지요. 다투는데 끼어들어서 하는 말이,
不是風動(불시풍동)이요
不是幡動(불시번동)인데
仁者心動(인자심동)이라→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번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서 번이 움직였다손 치더라도,
보는 사람의 마음이 함께 움직이지 아니하면,
그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 한다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움직인다고 인식함으로 해서 움직이는 것이
인정이 되니까, 그 움직인다고 인식하는 주체는 뭐냐?
결국 마음이다 이것이지요. 그 말을 듣고
一衆(일중)이 駭然(해연)이라→
놀랐지요. 아! 이거 대단한 소리를 한다.
이겁니다. 듣고 보니 그렇거든요.
지금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는 이거야 뭐
그야말로 너무나도 기초적인 상식에 불과 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 경을 강하는 자리에서,
아마 초심자들이 되었던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印宗(인종)이→
이상한 사람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延至上席(연지상석)하야→
상석에 모셔서 대접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는
眞詰奧義(진힐오의)라→
경에 대한 깊은 뜻. 아니면 불법에 대한 깊은 뜻을
하나하나 묻게 되었습니다.
※
眞詰(진힐)
이라고 하는 것은
따져 묻는다 이겁니다.
비판적으로 꼬치꼬치 묻는 것을
진힐이라고 그래요.
이 眞자를 불교에서는 아주 잘...
경을 주워내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 써요.
경을 해석 하는 이들에게는...
詰.
묻다라고 하는 뜻인데,
그냥 순리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으로 묻는 것.
그런 입장을 眞詰이라고 합니다.
見慧能(견혜능)의 言簡理當(언간이당)이라→
혜능의 언간리당함을 보았다.
말은 간단한데,
이치에는 딱딱 맞더라 이것이지요.
말은 간단하면서도 뭐 긴 설명 없이
딱 딱 조리에 맞게 하더라 이것이지요.
不立文字(불입문자)가고요.
또 문자를 말미암지 아니 해요.
말 했다 하면 언필칭 경전의 구절을 인용 하든지,
옛날에 누가 한 이야기를 이끌어 오든지
뭐 그렇게 하는데, 이분은 전혀
그런 것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모르니까 인용도 못하고
전혀 문자하고는 관계없이
그렇게 이치에 맞는 말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宗(종)이 云(운),→
인종법사가 말하기를,
行者(행자)는 定非常人(정비상인)이라→
행자께서는 결정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데 내가
久聞黃梅衣法(구문황매의법)이 南來(남래)러니→
옛날에 듣기를 황매산 에서
옷과 법이 남쪽으로 내려갔다. 라고 하는 말을
일찍이 들었는데,
15년 전 일이니까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지요.
“법의가 남쪽으로 내려갔다.” 라고 하는
그런 말을 들었는데,
莫是行者否(막시행자부)아→
혹시 행자가 아니오?
“행자가 그때 그 오조스님의 법을 이어받고.
옷과 발우를 가지고 종적 없이 사라져버렸던
그 사람이 아니오?” 이렇게 물었어요.
그러니까 인종법사도 뭔가 느낌이 달랐겠지요?
慧能曰, 不敢(혜능왈, 불감)이로다→
혜능이 말하기를, “아이고 감히 내가 어떻게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이런 뜻으로, 말뜻은 그렇지요.
불감. 하는 말은... “아이 나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지만, “사실입니다.” 하는 그런 뜻이지요.
내용은 “사실이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사실이다.” 라고 인정하는 말이 不敢 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내가 감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천만에요. 뭐 이런 뜻이지요.
宗(종) 於是(어시)에 作禮(작례)하고→
인종법사가 그냥 퍽 엎어져서 예배를 올리고,
告請傳來衣鉢(고청전래의발)을
出示大衆(출시대중)하고→
전래해온 의발을, 뒤에 짊어지고 있던
것을 끌르는데 그 때 전해 받은 옷과 발우지요.
그것을 대중 앞에 내보이게 되었지요.
宗(종)이 復問曰(부문왈),→
인종이 다시 묻기를,
黃梅付囑(황매부촉)을
如何指授(여하지수)니잇고→
황매스님께서, 황매산의 오조스님께서
부촉. 불교에서는 분부. 부탁. 또는 가르침.
특히 뒷일에 대해서 遺囑(유촉)을 한다 그럴까?
遺言(유언)이라고 할까?
이런 의미를 부촉이라고 하는 말을 합니다.
불교에서는 소임을 줄 때,
“咐囑章(부촉장).” 그런 말도 써요.
임명장 이라는 말보다는 부촉장이라는 말을 잘 써요.
황매산의 오조스님께서 어떻게 가르쳐주었습니까?
慧能曰(혜능왈),→ 혜능이 말하기를,
指授卽無(지수즉무)하니→
가르쳐 준 것은 없어요.
나한테 가르쳐준 것은 없는데,
惟論見性(유론견성)하고→
오직 우리 오조스님께서는 견성만 이야기 했다.
各自(각자) 자기의 성품을 보는데 주안점을 두고
가르쳤더라 이것이지요. 그리고
不論禪定解脫(부론선정해탈)이니이다→
선정. 해탈은 크게 말하지 않았다 이거예요.
오직 견성하라. 뭐니 뭐니 해도 자기 자성을 깨닫는 것이
불교의 근본 목적이고...
불교의 시발이 神의 계시가 있어서
어떤 가르침이 나왔다더라.
또는 어떤 학문이 축적하고, 축적하고
발달해가지고 유교처럼...
옛날에, 예를 들어서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을,
문왕이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을 뒷사람이
거기에 설명을 붙이고, 그 설명에서
다시 공자가 繫辭(계사)를 쓴다든지,
註譯(주역)을 본다는, 그런 식으로 해서
발전해가지고 비로소 유교 같은
그런 체계적인 학문이 생겼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불교는...
그것이 다른 종교와 아주 크게 다른 점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꼭 인식 하고 있어야 돼요.
神의 계시가 절대 아니고요.
그러면 학문의 어떤 발전 과정을 통해서
오늘 날 까지 이런 가르침이 있게 된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저 마음 하나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자성하나 보는 것.
그것 가지고 그냥 불교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저렇게 이야기 하고, 이야기가 길어졌지요.
많아졌지요. 사실 見性(견성)! 이거 하나가지고
그렇게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 많은 가르침이 여기에서 견성이라는
데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 性品(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一切萬法(일체만법)의 自性(자성)! 그러지요.
일체만법의 자성이라...
일체만법의 자성을 보았다가 견성이지요.
불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내용인데, 불교는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육조단경에서 더욱 이것을 빼버리면
눈이 빠진 결과가 되지요.
일체만법의 자성이라.
일체만법이란 사람을 위시한
모든 존재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전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뭐라고 했지요?
法性(법성)이라 그랬지요.
일체만법이라고 했으니까...
일체만법을
하나하나 개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자성이라고 그래요.
전체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법성그러고,
이것을 어떤 깨달은 입장에서 말할 때는,
깨달음의 본바탕.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불성이라고 그러지요.
“부처의 성품이다.”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이다.”
이렇게 자성. 법성. 불성. 이런 말을 씁니다.
법성이라고 하는 것도
일체만법의 자성.
만법이라는 법과
성품이라는 성.
그러니 법성이 되고,
그 일체만법들의 하나하나의
개체적인 본질에서 볼 때는
자성이 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래 같은 거예요 사실은...
자성이나
법성이나
불성이나
진여나,
또 더 발전하면
반야나
지혜나
공이나
결국은 같은 이야기인데,
뭐 禪定(선정)을 닦는다.
生死(생사)를 解脫(해탈)한다.
물론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것이긴 하지만,
궁극적인 최종 목표는
견성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惟論見性(유론견성)입니다.
오조스님이 그랬지만,
역시 이건 육조스님도
특별히 주창하는 가르침이거든요.
※
그래서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견성을 해서,
일체만법의 자성을 깨달아가지고,
거기서 가르침을 펴기 시작 했고,
육조스님 역시 마찬가지로
일체만법의 자성을 깨달아서
그것 으로서 법을 이어 받게 되었지요.
불교의 출발은 순전히 인간에서부터 출발했고,
인간 중심으로 이야기가 되고,
결국 인간에서부터 출발해서
인간에 귀결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이고 인간이 뭐 별 수 있겠나?”
이렇게 이해하기로 시작한다면,
그 사람들은 그리되면
불교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있지도 아니한 그 神을 우리가 막연하게라도
이야기 한다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선한 것 같고
높은 것 같으면서도
그것은 사실은 공허한 얘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그런 대목 이지요.
인간이상 뭐가 있겠습니까?
神. 神하지만
사실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지요.
인간이 신을 만들었지요.
신학자들도 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분명히 인간이 신을 만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