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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 4월28일 한성 건천동에서 태어났어요
1564년(명종22년) 방씨와 결혼하여 아들(회)가 태어납니다
1572년(선조5년)28세때 무과시험에 떨어집니다
1576년(선조9년)32세때 무과시험에 합격해서 함경도동구비보의 군사 책임자가됩니다
1579년(선조12년)에 훈련원 봉사가됩니다
1580년(선조13년)발포 수군만호가됩니다
1583년(선조16년)건원보 권관과 훈련원 참군이 됩니다
1583년(선조19년)사복시 주부를거쳐 함경도 조산보의 군사 책임자가됩니다
1587년(선조20년)녹둔도 둔전관직을 겸하던중 파면됩니다
1589년(선조22년)에 정읍 현감이 됩니다
1591년(선조24년)전라좌도 수군 절도사가 됩니다
1592년(선조25년3월에 거북선을 완성하고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그해 한산도 대첩에서 승리합니다 (첫 전투는 옥포해전)
1593년(선조26년) 삼도 수군통제사가됩니다
1597년(선조30년) 원균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가 백의종군의벌을 받지만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됩니다 그해 명량해전에서 12척의배로 왜군
133척의 배중에 36척을 격파시키고 적장을(마다시) 전사시킵니다
1598년(선조31년)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총탄을 맞아 장렬히 전사합니다
1643년(인조21년)충무라는 시호를 얻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은 최초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하여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꼽히는 한산대첩을 비롯하여 장군이 최후에 전사한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한 때 원균의 모함으로 세 번의 파직과 옥중 생활을 겪고 두 번의 백의종군이란 시련도 있었지만 정유년 일본이 재침략하자 복위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이 탁월하였으며 특히 해전에서의 전략이 뛰어나 학익진법을 비롯, 많은 전투진법을 개발하여, 실전에 적용하여 패전없이 승전을 거듭했습니다. 또 기존 전함 판옥선을 변형하여 거북선을 개발 제조하여 실전에 투입시킴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장군이 한산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전술 그리고 거북선과 화포 등의 뛰어난 무기를 잘사용했기 때문으로서, 장군은 임진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나라와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격퇴함으로서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겨졌습니다.
주요 해전목록 총 26전 25승1패입니다 1패는 이순신 장군이 없을때 원균이 지휘한 칠전량 해전입니다
옥포 해전 1592년(선조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이순신이 이룬 23전 23승 신화의 첫 승전이다. 선박대수 조선:91척 (판옥선 29척, 협선 17척, 포작선 46척) 왜군:44척 (옥포 26척, 합포 5척, 적진포 13척 )
합포 해전(合浦海戰) 오후에 있었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아직 옥포 해전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왜군의 소함대(5척)를 전멸시켰다. 조선:전선91척 왜군:전선5척
적진포 해전(赤珍浦海戰) 전날의 여세를 몰아 조선 수군은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중이던 왜군 함대를 공격하여 모두 11척을 격침시켰다. 이순신의 1차 출정은 적진포 해전으로 마감하고 다시 본영으로 복귀한다. 이때에는 아직 거북선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91척 왜군:13척
사천 해전 사천에서 왜수군 12척을 전멸시킨 해전으로, 이순신은 여기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 투입했다. 조선:26척 왜군:13척
당포 해전(唐浦海戰) 1592년(선조25년) 음력 6월 2일(양력 7월 13일) 전라좌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가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이다. 조선:90척 왜군:21척
당항포 해전(唐項浦海戰) 이순신이 지휘하는 삼도수군 연합함대가 당항포에서 왜군을 격파한 해전. 유인작전으로 먼 바다로 끌어내어 싸웠다. 26척 격침 병력2720명전사시킴 조선;56척 왜군:26척
율포해전 1592년 음력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가 거제도 율포만에서 부산으로 향하려던 왜군 함대 (대선 5척, 소선 2척)를 발견하여,대선 2척과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은 해전이다. 조선:2척 왜군:7척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왜군을 격멸한 해전이다. 조선:56척 왜군:42척
부산포 해전(釜山浦 海戰) 왜군 함대를 기습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왜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이 전투 후 왜군은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 조선:170척 왜군:470척(병력 7만명) 조선:6명전사 25명부상 왜군:128척격침 3800명 전사
제2차 당항포 해전 인근의 왜군들을 몰아내기 위해 부하 어영담을 경상우수영이 연합하여 출전한 6차 연합함대 출전이자 이순신의 12번째 해전이다. 조선:124척 왜군:31척(31척전멸)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조선:169척(조선군 157척격파 (이순신 장군 감옥 원균지휘)조선군 대패 왜군:850척
어란포 해전 복귀한 이후 치른 첫번째 전투였다. 칠천량 해전패전 후 남은 13척의 판옥선을 수습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던 중, 8월에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였다. 이 전투는 자신을 노출시켜 왜군을 유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어란포 해전 후 본진을 진도의 벽파진으로 옮겼다. 조선:13척 왜군:8척
벽파진 해전 어란포 해전에 뒤이어 벽파진에서 왜군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한 해전이다. 복귀한 후 2번째 해전이다. .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왜군은 조선 수군이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순신의 복귀도 확인한다. 이순신의 존재를 확인하나 첩보는 이미 보고받은 상태였다. 이 전투 역시 이순신이 왜군을 명량해협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조선:13척 왜군:13척
명량 해전(鳴梁海戰) 일본수군 133척을 쳐부순 해전이다. 조선:13척 왜군:333척 (병력22,000명) 전과 아군 피해:전선 피해없음 전사 2명 부상3명 왜군피해:31척격침 91척대파 병력 12,000명 전사
노량해전(露梁海戰)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이며,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조선:전선 170척, 병력 1700명 총병력 전선 298척, 병력 4300명 왜군:512척 병력 55,000명 피해: 조선:이순신 외 장수 4명 전사, 10명 전사, 300명 부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