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피워 올리는 저녁이 있는 삶
어느 때부터인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회자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저녁 시간마저도 여유를 누리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각박한 삶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제기된 화두다. 그런데 나는 이에 착안하여 좀 더 다른 저녁 시간을 누리는 삶을 준비하기로 했다. 시골에 터를 잡고 아담한 집을 짓기로 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세상 한 모퉁이 액자처럼 걸려 있는 오두막에서 풍경 위에 평화를 덧칠하며 첫 연기를 피우다.” 우리집 거실 대들보의 상량문이다. 글귀는 내 시의 한 구절을 다듬은 것이고, 투박한 글씨는 가족들이 부분 할당을 하여 번갈아 가며 붓으로 쓴 것이다.
사람이 어느 곳에 처음 터를 잡고 삶을 이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일러 연기를 피워 올리는 일에 비유하곤 한다. 연기는 그만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존재다. 좀 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본다면, 연기를 피운다는 것은 밥을 짓고 구들장을 데우는 일로써 일상의 가장 기본적인 생계유지 행위였다. 사실은 지금도 취사와 난방이라는 삶의 핵심 원리는 별반 다르지 않은데, 그 구체적인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즉, 현대 과학 기술이 선물처럼 만들어 준 전기밥솥과 보일러 같은 문명의 이기들로 도구가 대체된 것뿐이다. 아궁이가 헐려 나간 부엌은 싱크대가 있는 주방으로, 장작은 석유와 천연가스 등의 화석 연료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이처럼 첨단 디지털 문명의 혜택으로 인해 편리하고도 편리한 삶을 구가하고 있는 시대에, 더군다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가 바야흐로 목전이라고 들떠있는 차에 새삼스럽게 시대 역행적인 아날로그식 삶을 동경하다니, 이런 복고풍의 취향이 은근히 남루하고 구차해 보일 법도 한가 보다. 겨울나기 준비를 하느라고 화목을 사다가 잘라 토막을 내고 도끼질을 하여 장작을 패고 있노라면, 건강을 위한 고품위 황토방 따위의 호사를 떠올리며 부러움을 표하는 이도 더러 있지만, 난방비를 아끼면 얼마나 아낀다고 뭐 하러 사서 이 고생을 하느냐고 대다수의 이웃 사람들은 핀잔을 놓고 가기 일쑤이다.
그러나 내가 굳이 시골에 집을 짓고 아궁이를 만들고 구들을 놓고 굴뚝을 세운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건강을 위해서도 난방비 절약을 위해서도 아니고, 굳이 대답한다면 그냥 좋아서일 뿐이다. 시골살이를 계획하면서 여러 즐거움을 꿈꿨는데, 그중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일이 바로 연기 피워 올리는 저녁이 있는 삶이었던 것이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고향을 떠나버린 뒤 단절되어 버린 유년기 삶의 서정을 복원하고자 하는 뜻이기도 했다.
어느 산비탈에서 생을 지탱하고 서 있던 존재들인지는 몰라도, 트럭에 실려 온 화목을 자르다가 촉촉한 피부의 나이테를 어루만져보는 순간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잘린 나무 도막을 들고 맡아보는 나이테의 은은한 향은 세속의 탁하고 자극적인 냄새들을 한순간에 지워버릴 듯이 정갈하면서도 감미롭기 그지없다. 속세의 가파른 자락에서 온몸 구석구석 두르고 섰는, 아직도 단단하게 결구 되지 못한 내 나이테의 무게와 향기를 가늠해보는 것도 이 순간이다. 더불어 복원된 삶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는 아궁이 앞의 장작더미를 바라보는 흐뭇함은 그 어떤 부귀에 견줘도 부족함이 없을 것만 같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나절,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있노라면 타닥타닥 불똥을 튀기며 맑게 타오르는 장작의 불빛이 손바닥 가득 유년의 노을처럼 물든다. 또한 그 아스라한 향수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를 바라보노라면 모든 상념이 소멸해버리고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든다.
순간, 깊이도 모를 고즈넉함 속으로 침잠하듯 밀려오는 그 안온함이라니. 그리고 먼 바다와 들판을 건너 꿈결처럼 살그머니 밀려온 어둠이 불꽃을 더욱 선명하게 채색하며 따스함 곁으로 나를 바싹 끌어당겨 줄 때, 아 소소한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며 절로 마음이 꾸벅거린다. 앞으로도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그곳에 아주 오래도록 생을 주저앉히고 싶을 따름이다.